힐러-track 29
“전자파 차단하는 기계는 어때? 선인장도 차단된대! 숯! 숯도 사자!”
모르핀은 골목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야바는 대답했다.
“상술에 놀아나지 마. 워낙 인기 없는 품목이라 팔아치우려고 사기 친 거야.”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 말리다가 세상 하직하긴 싫다구! 사장 새끼! 언젠가 내 손으로 죽이고 말거야!”
“걘 내 거야. 건드리지 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모르핀은 입을 삐죽거렸다. 필로폰은 두 사람 등쌀에 못 이겨 동참한 터라 겁에 질려 있었다.
“얘들아 흥분하지 말고 다시 생각해 보자. 새살림 내다 버린 거 알면 애들 눈 뒤집어질 거야.”
숙소 습격 사건과 이사에 정신이 팔려 칩의 위험을 잠시 망각했던 그들은 새삼 동요했다. X-ray 사진을 찍고 난 뒤 전자제품 근처엔 얼씬도 안 했고, 차명환에게 가는 것 외엔 외출도 끊었다. 욕실에선 형광등도 안 켰으며, 밤엔 촛불에 의지해 샤워했다. 물에도 전기가 흐른다고 들었다. 샤워기는 전기가 통할까? 승용차는? 위험 분자 목록을 작성하고 행동반경을 최대한 좁게 잡았다. 그래도 안심이 안 돼 오디오며 스탠드, 가습기…. 싹 내다 버렸더니 모르핀이 게거품을 물고 발광했다. 야바는 하는 수없이 말하기로 했다. 칩 때문에 종양이 생길지 모르며, 일상에서도 폭발 위험이 있고, 숨골이라 수술도 힘들다는 등등…. 물론 X-ray를 찍었던 사실은 뺐다. 십여 분간의 연설이 끝났을 때 모르핀 낯은 흑색으로 변했다. 그는 앞잡이답게 귀도 얇아서 야바의 숙원사업에 선뜻 동참했다.
방에 있는 건 처리했고, 거실의 공용 물건을 버리려고 아파트 후문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머지 고자들이 출장 간 지금이 적시였다. 야바는 컴퓨터 본체를 맡았고, 모르핀과 필로폰은 TV를 양쪽에서 들며 낑낑거렸다. 길바닥도 안심할 수 없어 흰색 수건으로 단체 양 머리를 했다.
“똘아이.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자. 우린 네가 시킨 대로 한 죄밖에 없는 거다?”
저 살 구멍부터 파놓는 모르핀이 딱히 얄밉지 않았다. 모르핀 나름의 생존 방식이고 그 방식은 꽤 마음에 드니까. 야바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저리 가. 니들도 1M 안으로 접근하지 마.”
사람 몸에도 미세한 전기가 흐른다는데 목록에 추가해야겠다. X-ray 사진을 찍고 난 이후 차이석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차명환 집에도 안 왔다. 전자파 덩어리 휴대폰을 버릴 수 없는 이유였다. 기껏 요트에다 기계와 약쟁이 친구들까지 동원했는데 수술을 거부해서 화난 걸까? 혹시 DVD를 확인하고 충격받아 잠수 탄 걸까? 그 영상은 곧바로 파기했을까? 아니면 코카인이 독극물에 관해 일러바친 걸까? 그렇다 해도 자신은 할 말이 있으니 거리낄 것 없다. 그것도 아니면……어디가 아픈 걸까? 온갖 상념이 줄기를 뻗어 나가 방향을 잃고 헤매었다. 결국 종착점에 다다른 건 기하의 얘기였다.
‘차이석이 지분을 모두 넘겼어. 그건 파라디소에서의 모든 걸 정리한다는 뜻이지. 그 새끼가 정리 안 하면 나라도 할 참이었는데 잘됐어.’
‘아니야. 걔 나한테 그런 말 안 했어.’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그 새끼가 친절하게 작별인사까지 할 것 같나? 지금쯤 새로운 놀이에 빠져서 정신 못 차릴 거야. 지분은 그런 의미야.’
믿지 않을 거다. 기하의 언어는 이성을 빨아먹는 거머리니까. 그러나 수시로 가슴 언저리가 조여왔고, 자다가 깨어 불안정한 심장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항우울제도 이제 다 떨어져 가는데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물어둘 걸 그랬다. 야바는 불쑥 말했다.
“그루밍이 뭐야?”
모르핀은 대답했다.
“고양이 세수. 고양이가 제 혀로 얼굴이나 발바닥 핥고 똥구녕도 핥잖냐. 근데 갑자기 왜? 너 설마! 길 고양이 잡아다 죽이려는 건 아니지?!”
“…….”
야바는 고개를 수그리고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모르핀은 뜬금없이 소리를 꽥 질렀다.
“맞다! 이거 세준 형네 갖다 주자! 그 형 살림도 시원찮잖아.”
“차라리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지.”
“독한 똘아이 같으니라고. 그 형이 코카인한테 잘하긴 하지만 너한테도 얼마나 잘해주냐? 그런데 가까이도 못 오게 하고 말이야. 그런 사람한테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니다. 잔말 말고 따라와!”
모르핀은 반푼이 집의 낮은 담벼락을 넘어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조용한 걸 보니 집주인은 일하러 간 모양이다. 전에 차이석이 때려 부순 문은 노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었다. 반푼이는 이틀에 한 번꼴로 빵과 우유를 들고 와서 숙소 청소를 하거나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고자 가수들이 마다할 리 없었고, 깡패들도 반푼이가 워낙 반푼이라 그냥 동네 바보쯤으로 여겼다. 가끔 반푼이는 울기 직전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 발길질 당해도 주인의 손길만 기다리는 강아지 마냥 처량 맞고 끈질겼다. 만약 크리스마스날 반푼이가 자신의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면, 엄마의 명복을 빌며 그 적막한 밤을 함께 보냈더라면. 어느덧 틈을 내주려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모르핀과 필로폰은 TV를 마루에 놓았다.
“세준 형 이따 와서 보면 놀라겠다. 근데 부잣집 정원사라더니 마당 분위기가 좀 으스스하다.”
마당엔 괴기스럽게 뻗은 분재가 즐비했다. 붉은 벽돌로 에워싼 밭에는 반푼이가 뿌린 씨앗이 음습한 흙에 짓눌려 몸을 떨고 있을 터였다. 모르핀은 안에서 대문을 잠그고 담벼락을 넘어갔다. 필로폰도 담을 타다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왜 그렇게 운동신경이 꽝이냐? 어? 어? 너 코피! 똘아이! 필로폰 코피 나서 먼저 간다!”
그들의 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자신은 저들같이 담 넘을만한 신체조건이 아니므로 잠긴 대문을 열려했다. 그때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머리에 두른 수건을 낚아채 갔다. 야바는 혀를 찼다. 집 뒤쪽으로 날아간 수건을 주우려고 걸어갔을 때였다. 뒷마루 아래에 신문으로 싼 뭔가 대가리를 내밀었다. 야구방망이였다. 수년이 흘렀는지 나무는 삭았고, 몸통에는 피와 머리카락이 묻었다. 숙소가 습격당했던 날 코카인을 구할 때 휘둘렀던 것 같다. 방망이 무늬가 특이했고 그날의 장면이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잊을래야 잊지 못할 물건이다. 이런 걸 보관하다니 딱 반푼이다웠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특이한 무늬라 여겼던 건 말라빠진 검은 얼룩이었다. 무언가 튀어 무척 오래된 듯한 얼룩……. 왠지 모를 토기가 목구멍을 괴롭혔다. 그만 가려다가 마루 귀퉁이에서 보자기에 싸인 뭔가를 발견했다. 반푼이가 애지중지했던 물건이었다. 심장 소리가 요란해졌다.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니지만 대체 뭐길래 반푼이 눈빛마저 돌변하게 했는지 궁금했다. 사방을 살피고 매듭을 풀었다. 봉인했던 천이 미끄러지자 야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사람 모습의 흉상이었다. 약간 말캉하고 투명한 살색인 걸 보아 특수한 점토인 듯했다. 머리카락에서 목덜미 핏줄, 쇄골까지 정교하게 조각된 데 비해 얼굴은 완성해가는 중인 모양이다. 조각상을 살피다 소스라치며 나앉았다. 허공에 향한 흐린 색채의 눈알, 날카롭게 빠진 콧날과 턱, 미완성이라도 몰라볼 리 없다. 그건 분명히 창백한 남자였다. 반푼이가 어떻게 창백한 남자를 알고 있지? 왜 이런 걸 조각한 거지? 왜?! 어쩌면 자신은 금기를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흉상을 깨부수고 싶지만 숨만 할딱이며 굳어 있었다.
그때였다. 먼발치에서 녹슨 대문 소리가 들렸다. 방향을 가늠 못할 발소리가 마당을 배회했다. 야바는 보자기로 끔찍한 것을 감싸고 건물 뒤쪽으로 숨었다. 맞은편 담벼락에서 그림자가 주욱 기어 올라왔다. 벽 모서리 너머로 해를 등진 반푼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가지치기용 가위와 장비를 벽에 세웠다. 그리고 보자기에 싸인 조각상 앞에 앉았다. 꽤 오랫동안 그것을 매만지던 손이 파들 경련했다. 반푼이가 응시하는 건 보자기 매듭이었다. 그는 울먹거렸다.
“이렇게 안 묶었는데…….”
그 순간 까만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스쳤다. 반푼이는 가지치기용 가위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야바는 입을 틀어막고 더 깊이 몸을 숨겼다. 등가죽에 식은땀이 척척했다. 시커먼 그림자, 묵직한 발소리가 거리를 좁혀왔다. 야바는 발뒤꿈치에 온 신경을 모아 뒷걸음질쳤다. 신경이 마비돼서 들켰는지 안 들켰는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거기서 본 것들은 모두 지워야 한다는 외침뿐이었다.
기하는 컨테이너 사무실 소파에서 서류를 들추었다. 임수가 들어와 소파에 앉으려다 말고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를 보았다.
“저건 뭡니까?”
① 야바 ② 젊은 의사? ③ 노 의사? ④ 코카인
입구
⑤ 나 ⑥ 임 실장
10년 전 크리스마스 날 녀석들을 거세할 때 있었던 사람들을 끄적였고, 주변엔 맥락 없는 낙서가 빼곡했다.
“그냥 머릿속을 정리할 겸해서 낙서한 거야. 창고에서 애들 거세했던 날, 야바는 코카인의 비명에도 보호장치 없이 멀쩡했지. 그 후로 힐링조차 듣지 않았고.”
임수는 보드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저도 생각해 봤는데, 혹시 마취 때문이 아닐까요? 마취하면 아무래도 감각이 무뎌지잖습니까.”
“마취한 상처에도 힐링은 들어. 시체가 아닌 이상 힐러의 힘을 피할 수 없지. 야바가 자신은 그날 이미 죽었다고 했다더군. 살려는 의지를 버렸다는 의미겠지만, 아무리 삶의 욕구가 없고, 힐러를 불신한다 해도 힐링이 듣지 않는 건 납득이 안 돼.”
기하는 소파에 기대고 말을 이었다.
“예전에 부친이 재밌는 실험 하나를 했지. 힐러 두 명의 손바닥을 칼로 찢고, 서로 마주 보게 세운 다음 노래를 시켰어. 노래가 끝나자 둘의 상처는 깨끗이 아물었고. 힐러끼리도 힘이 통하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이 힐러의 힘을 완전무결하게 거부하는 게 가능할까?”
“아니면 야바의 독기가 코카인의 힘까지 튕겨낸 건 아닐까요? 야바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임수는 실없는 농담을 할 때마저 진지했다. 기하는 픽 웃었다. 이번에 가져온 데이터는 기본적인 것 외에 건질만한 게 없다. 대부분 전문용어로 점철돼 자신과 임수에게 상형문자나 진배없었다. 임수가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아, 말씀하신 서류를 금고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늘 증여세 신고를 할까 해서.”
“오늘…말씀이십니까? 지분 증여 신고는 3개월 안에만 하면 되는데 더 기다려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차명환이 호전됐다는 소문이 돌아 태령 주식이 상승세고 그럼 세금도 뛸 겁니다. 일각에선 한시적인 현상으로 보고 하루빨리 새 대표 이사를 물색하는 게 낫다고 전망 중입니다. 저도 차명환이 3개월을 버티지 못 할거로 생각합니다. 차명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신고하셔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서류가 흠결 없이 완벽함에도 이 불안감은 뭔지.
“아니. 세금은 둘째치고 일단 내 명의로 돌려놔야 발 뻗고 자겠어.”
“알겠습니다.”
임수는 산도둑 같은 외모에도 두뇌 회전이 빨라 자신의 의중을 파악할 것이다. 기하는 푸른빛 반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만약 코카인이 완벽한 힐러라면……. 아니, 우선 완벽한 힐러라는 게 부친의 환상인지, 실존하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다. 만에 하나, 코카인이 차명환을 살린다면 차 전무와는 척을 지는 반면, 차 회장은 아들을 살린 은인에 대해 생각을 달리할 거다. 어쩌면 차 전무보다 차 회장이 더 안전한 배인지 모른다. 문제는 차명환이 코카인의 힐링을 받아도 살아날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때 코카인이 들어와 앞에 섰다. 옅은 톤의 스웨터를 입은 녀석 때문에 컨테이너 안은 정갈한 분위기다. 완벽한 힐러에 관해선 코카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기하는 다리를 꼬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그래. 내가 보내준 데이터는 잘 봤나?”
“건질만한 건 별로 없었습니다. 사장님도 일부러 그것만 주신 거 아닌가요?”
기하는 빙긋 웃었다.
“힐러의 유형이 더 있다는 걸 넌 이미 알았다던데 어떻게 된 거지?”
“우연히요. 혹시 다른 종류의 힐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게 맞아떨어진 것뿐입니다.”
“나조차 몰랐던 걸 우연히 라고? 내 본가에서 데이터라도 훔쳐봤나? 아니면 지옥까지 찾아가 죽은 양반과 대화라도 나눴나?”
“어쩌면 누구보다 제가 힐러에 관해 잘 알지도 모르죠. 직접 몸으로 부딪혔으니 의식에 내재한 정보가 많을지도요. 그것 말고 다른 건 없습니까? 사장님도 궁금하시잖아요. 제 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게 영원불멸할지 말예요.”
예전엔 적정 수위를 넘지 않는 코카인의 영민함이 흡족했지만, 지금은 유독 거슬린다. 기하는 코카인 멱살을 틀어잡아 벽에 처박았다. 과격한 충돌에 벽체가 진동했다.
“대답해. 왜 갑자기 힐러의 데이터에 관심을 보이지? 네 몸이 나빠졌다는 이유는 집어치워.”
“사장님이 지금 숨기시는 걸 말씀 안 하시면 저도 대답할 생각이 없습니다.”
기하는 코카인 얼굴을 후려칠 기세로 손을 치켜들었다. 녀석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숨통을 졸리면서도 눈에 가시를 세웠다. 기하는 들었던 손으로 코카인의 얼굴을 두드렸다.
“지금 나 갖고 거래를 하자 이건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그래? 아니면 머리통을 박살 내서라도 직접 볼 생각이니까.”
“그럼 제 머릿속에 든 것도 공중분해 되겠군요. 그게 싫으시면 사장님부터 내놓으세요. 조수를 물색하든 데이터를 뒤지든 그게 먼저예요───!”
코카인의 절규가 고막을 후벼 팠다. 흡음 장치 없는 사무실이 뒤흔들리자 임수는 어깨를 긴장시켰다. 코카인의 흰자위에 독기가 득실거렸다. 반지 리모컨을 낀 손이 제 목을 조른다는 사실도 잊고 말이다. 내부의 진동이 사라질 무렵 코카인은 격앙된 숨을 가다듬었다.
“얼마 전에 차이석 씨가 차명환에게 감상용으로 노래하라고 부탁했죠. 아니, 명령했죠. 힐링용과 감상용은 효과부터 차이가 현격해서 그 둘을 구분해 놓습니다. 제가 차명환을 정식으로 맡은 지 2주가 지났습니다. 2주 동안 매일 가서 노래하고 모욕당했죠.”
기하를 직시하는 눈동자가 고약한 빛을 뿜었다.
“자, 여기서부터 수수께끼에요. 차명환은 항암치료도 못 견딜 만큼 쇠약했고 최고 의료진마저 포기해서 죽을 날만 기다렸죠. 그런데 그 짧은 기간, 온몸에 퍼졌던 암세포가 급속도로 소멸 중이고 지금은 멀쩡히 걸어 다닙니다. 어째서일까요?”
“그야 네 위대한 노래 덕분이겠지.”
기하는 비아냥거렸다.
“사장님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가끔은 쉬운 답도 복잡하게 돌아가죠. 답은 생각보다 단순한지도 몰라요.”
코카인은 눈앞에서 미끼를 흔들듯 요사하게 웃었다. 그러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악에 받쳐 있었다. 저렇게 웃는 녀석이 아니었다. 녀석은 개화한 독화였다. 코카인은 눈을 내리깐 채 멱살을 틀어쥔 손을 보았다.
“좀 놔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세게 누르시면 성대가 다칠 수도 있거든요.”
기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도 앞으로도, 어쩌면 칩으로도 코카인을 통제하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여기서 더 몰아붙이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작전상 후퇴도 좋겠지. 기하는 목 조른 손을 풀었다. 코카인은 손자국이 난 목을 잡고 잔기침을 했다. 그러다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를 응시했다. 조금 전 기하가 10년 전 거세 당시 상황을 그린 낙서였다. 오랫동안 낙서를 보던 코카인은 입꼬리를 당겼다.
“인간의 기억력은 별로 믿을 게 못 되죠.”
코카인은 정중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기하는 코카인이 나간 문을 응시했다. 그때 사무실 안으로 부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부하는 사색이 돼 더듬거렸다.
“사장님…저…오늘 DVD를 정리하느라 다시 살폈는데 몇 개가 빈 케이스만 있다고 합니다.”
기하의 살벌한 눈초리에 부하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옮긴 날부터 계속 감시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다, 다행히 모두 없어지진 않았고 네크로필리아 녹화분만 없어졌습니다.”
백업 본을 따로 챙겨뒀지만 중요한 녹화분을 분실한 건 그냥 넘어가선 안 될 사안이다. 더욱이 차 전무 영상은. 그러나 며칠 동안 가게 일에 시달려 부하는 눈 아래가 푹 꺼졌다. 기하는 주먹세례 대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씹어 물었다.
“함께 옮겼던 놈 누구누구야?”
“저, 저하고 도끼, 불곰입니다. 손이 모자라서 모르핀과 필로폰도 도왔습니다. 아, 똘아이도 함께 있었습니다.”
“방금 네크로만 사라졌다고 했나?”
“예.”
설마……. 기하는 눈가를 떨었다.
“야바 지금 어딨어?”
임수는 어딘가로 전화한 뒤 통화를 마치고 말했다.
“방금 차명환 집에 도착했답니다. 벌써 들어갔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씨발. 기하는 담배를 질겅질겅 씹어 발겼다.
“마치면 곧바로 나한테 데려와. 예민한 놈이니 이상한 낌새 풍기지 말고.”
야바는 문턱에서 방안부터 확인했다. 미리 차명환한테 전화해 방에 있는 의료기계와 가전제품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하니 말끔히 치워 놓았다. 야바는 한결 휑해진 방으로 들어다가 흠칫했다. 차명환이 낀 산소 호흡기 때문이었다.
“그거 치워.”
“아직 호흡기 없이는 숨쉬기 힘들어.”
“잠깐 떼도 안 죽어. 침대 전자동 아냐? 주삿바늘에는 전기 안 통해?”
“가지가지 한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알면 다쳐.”
차명환은 온갖 인상을 쓰면서도 산소호흡기를 뗐다. 방에 들어가서 그와 멀찌감치 떨어졌다. 차명환이 불쑥 물었다.
“나 좀 달라지지 않았냐? 살이 붙었다거나, 혈색이 좋아졌다거나…….”
“송장 혈색이 좋아봤자지. 라면 먹고 잤냐?”
“살 붙기 시작한 지가 언젠데 눈썰미하고는.”
“내가 왜 너 살찌는 걸 알아봐야 되는데? 내 살 관리도 안 돼서 머리 아픈데.”
“하여간.” 차명환은 투덜거릴 뿐 별다른 응수는 하지 않았다. 그는 꽤 단련돼서 어지간한 독설은 이빨도 안 들어간다. 정신력도 강해졌고 살도 붙었는데 차명환은 날이 갈수록 생기 빨린 사람 같았다. 야바는 무심결에 방안을 살폈다. 차이석은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어딘가 아픈 걸까?
“기다릴 필요 없어. 차 전무 며칠째 여긴 발길도 안 하니까.”
차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차명환은 목소리만큼 싸늘한 얼굴이다.
“왜?”
“왜는 무슨 왜야? 증발했어. 큰어머니고 친구고 주변 사람 모두 연락두절이고, 회사도 며칠째 결근이야. 나 이렇게 되고 간신히 여론이 좋아지려는데, 발바닥에 굳은살 박이도록 뛰어다녀도 모자랄 판에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뭐, 물론 어디 틀어박혀 즐기는 중이겠지만. 누가 먹다 뱉은 지도 모르는 여자와 놀아나고 싶을까. 불결하게 말야.”
손톱과 살점 사이를 바늘로 후벼 파는 듯했다. 차라리 어딘가에서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면…….
“차 전무 그동안 아무리 방탕하게 살았어도 회사에 얼굴도장은 찍었는데 아버지도 심기가 불편하셔. 해민이와 날을 잡아야 정신 차리려나 몰라.”
익숙한 이름에 시선을 들었다. 차명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아, 해민이라고, 아버지가 점찍은 며느릿감이지. 유학 생활 때 만났다나 어쨌다나. 차 전무도 슬슬 가정 꾸리고 안정을 찾아야지 않겠어?”
머리가 차가워졌다. 차명환은 야바의 표정을 살피다가 침대에 기댔다. 머리가 멍해서 음낭에 무슨 노래를 담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음낭엔 차이석의 숨결과 음란한 마찰음으로 꽉 차서 이제 한 곡만 간신히 담긴다. 어렵사리 끄집어내 노래했다. 바닥에 뒹구는 노랫말은 씹다 뱉은 음식물 같다. 지금이라도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아 자신의 노래를 감상할 것만 같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그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뇌 속을 점령했고, 자신을 조종했다. 폭탄 칩은 정작 그 일지도 모르겠다. 우중충한 켈트 민요 한 곡을 완창하고 방을 나섰다. 뒤에서 링거액 걸이대 끌리는 소리가 났다. 팔에 감긴 그의 손에선 제법 묵직한 살집이 느껴졌다. 차명환이 말했다.
“더 있다 가.”
“싫어.”
차명환 미간이 움푹 패었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래도 요새 너 한 곡으로 줄여서 죽겠는데, 대체 왜 줄인 거야? 아무튼, 두통 때문에 그래. 잠이 안 올 정도로 심하고 아무리 약을 써도 소용없어. 그나마 네 노래 들을 땐 괜찮아져. 물론 그것도 들을 때뿐이지만. 아무거나 좋으니까 몇 곡 더 부르고 가.”
“너 인간 되면 다 낫는 병이야. 괜한 기력낭비 말고 가서 명상이나 해.”
“손님이 하라면 하는 게 니들 임무 아니야? 아무리 배운 게 없다지만 프로의식이 없어.”
밑바닥에서 끝간데 없는 열 덩어리가 솟구쳤다. 야바는 놈의 손을 후려쳤다.
“그럼 프로의식 충만한 코카인 부르면 되잖아!”
차명환은 갑자기 머리를 쥐었다. 고통스러운 듯 한쪽 눈을 일그러트렸다.
“왜 소리 지르고 난리야? 얘가 사람 잡네. 내가 언제 코카인 얘기 했어? 지레 먼저 꺼낸 건 너잖아.”
“니가 생각나게 했으니까 그게 그거야.”
“억지도 정도껏 부려. 머리 아파서 몇 곡 더 부르고 가라는데 뭐가 그렇게 비싸?”
자신은 누구처럼 기적의 목소리도, 거창한 책임감도 없다. 그냥 운 좋게 이 목소리를 마음에 들어 하는 말기 암 환자를 만났고, 그걸 내심 즐겼던 것뿐이다. 차라리 저 병석에 누운 사람이 차이석이었으면 좋겠다. 잔인한 생각이 머리를 마모시켰다. 죽음을 목전에 둔 반송장과 매 순간 죽음에 잇닿은 인간이 마주한 이 시간이 신물 났다.
“귀찮아. 다 귀찮아.”
“왜? 차 전무가 안 보이니까 노래할 맛도 떨어지나?”
생각도 못한 공격에 빈사에 빠졌다. 야바는 눈꼬리가 빨개지도록 놈을 노려보았다. 차명환은 실핏줄이 불거진 눈을 부릅뜬 채 입술을 떨었다. 그 표정은 코카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과 닮아 있었다. 차명환은 쓸개즙을 쥐어짜듯 한자 한자 뱉었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왜 따박따박 말대답해 보시지?”
짜악───! 야바는 말대답 대신 놈의 뺨을 올려붙였다. 놈은 이를 갈더니 실성한 양 덤벼들었다.
“저리 가! 미친놈아!”
“젠장! 너 가면 쓰고 성질 부리면 얼마나 섹시한 줄 아나? 왜 자꾸 이런 기분 들게 하는 거냐.”
차명환은 발버둥치는 야바 허벅지를 무릎으로 짓눌렀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냄새를 힘껏 빨아들였다. 홍조로 번진 면상과 번들거리는 눈알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놈의 입술이 목적지를 향해 돌진했다. 야바 입술이 뒤덮였다. 약 맛이 맴도는 혓바닥은 점막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개구리를 산 채로 입에 쑤셔 넣은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혀를 물어뜯어도 놈의 신음은 높아졌다. 차명환 손등에 박힌 주삿바늘을 뽑아 목과 눈알을 찔러 버리고 싶다. 하지만 놈이 죽으면 자신의 노래를 원하는 유일한 존재가 사라진다. 야바는 눈을 질끈 감고 놈의 면상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으윽.” 놈이 떨어져 나갔다. 야바는 놈에게 발길질을 퍼붓고 입술을 박박 닦았다. 차명환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코를 싸쥐었다.
“야. 나 환자야.”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면 내 손으로 묫자리에 파묻을 줄 알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링거병 걸이대로 봐주지 않고 놈을 두드려팼다. 매질 당하던 놈은 걸이대를 붙잡고 나불거렸다.
“닳고 닳은 얼굴로 사사건건 비싸게 굴긴. 너는 다 괜찮은데 그놈의 까탈이 다 까먹는다구. 노래도 잘하고, 요새 애들 같지 않게 가치관도 뚜렷하고.”
차명환은 가면이 벗겨진 야바를 힐끔 보았다.
“뭐, 얼굴도 그만하면…훌…으윽……! 야! 진정해!”
야바는 바닥에 쓰러진 개구리 뒷다리를 짓밟았다. 창자를 터트릴 기세로 배를 걷어찬 뒤 방문을 열어젖힐 때였다.
“야. 사기꾼.”
차명환은 끙끙거리며 허벅지를 문질렀다.
“나 내일 공식 석상에 참석한다. 6개월 만에 처음이야. 너도 그동안 수고했으니 무사히 다녀오면 보너스 줄게.”
그렇게 말하는 차명환은 사뭇 들떠 보였다.
씩씩거리며 정원을 걸어갔다. 한 손엔 끈 떨어진 가면이 뒤흔들렸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도 메스꺼움이 가지 않았다. 혀도 입술도 통째로 잘라내고플 지경이었다. 현관에 당도했을 때 문이 열리고 짙은 색 슈트 바짓단과 구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장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온 건 차 회장이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또 이렇게 기대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 차이석은 뇌 주름에 자리 잡은 정보 중 하나가 아니라 뇌 자체가 되었다. 뇌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 전신에 맥이 빠졌다. 야바는 억지로 다리를 움직여 늙은이를 지나쳐갔다.
“너를 이 집에 걸음 하도록 놔두는 건 명환이 때문이다.”
뒤돌아봤을 때 차 회장은 자신에게서 등지고 있었다.
“명환이가 호전됐다고 해도 언제 악화 될지 모른다. 지금껏 이런 식으로 매번 그 녀석 희망이 짓밟혔지. 그러니 마지막 가는 날까지 성심성의를 다 하거라. 이건 명령이다.”
“내가 왜?”
차 회장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저 이목구비는 차명환과 판박이지만 냉혈 동물 같은 눈빛만은 차이석과 빼다 박았다. 가슴 언저리가 조여왔다.
“아저씨하고 차명환이 불러서 오는 거 아니야. 내가 오고 싶어서 오는 거야. 다 귀찮고 싫어지는 때가 오면 내가 이 일을 그만두는 날이야. 그리고 걔 아직 살아 있어. 자꾸 죽은 사람 취급하지 마.”
“아직 겁 없이 날뛰는 건 여전하군. 천박한 태생들은 평생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아서 눈치가 빠른 편인데, 너를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구나.”
“맞아. 싸구려 태생이라고 다 눈치 빠른 거 아니야. 차명환을 보면 알잖아?”
차 회장은 활화산의 요동처럼 눈가를 떨었다. 그는 차명환에게만은 평범한 아버지였다. 만일 차이석한테도 저랬다면 그는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겠지? 시체에 발정하지도, 죽음의 냄새에 매료되지도 않았겠지? 파라디소에도 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를 만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자신은 세상에 이런 고통이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아저씨 아들들이 그 모양이 된 건 전부 아저씨 때문이야. 그 잘난 피가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 하등 인간과 괴물을 만들었어. 죽을 때까지 모를까 봐 내가 가르쳐 주는 거야.”
야바는 늙은이에게서 등 돌려 정원에서 빠져나갔다.
차명환 자택에서 나왔을 때 해가 어스름해 질 무렵이었다. 차 뒷자리에 올라탔다. 앞에 앉은 깡패 두 명이 눈길을 던졌다. 묘하게 위압적인 시선에 신경 줄이 당겼다. 차는 출발해 인적 드문 도로에 접어들었다. 가게로 가는 지름길은 어젯밤 내린 폭우에 물웅덩이 천지였다. 산등성에서 굽이치는 안개가 도로를 뒤덮었다. 먹구름과 석양이 뒤섞인 이상한 하늘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조용한 깡패들이 불안했다. 안개와 습기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자 조수석에 앉은 깡패는 걸레로 유리를 닦고 창문을 내렸다. 좌로 굽은 경사를 올라갈 때였다. 운전하던 깡패가 백미러를 힐끔거렸다.
“뭐야, 저 새끼 술 처먹었나…….”
야바는 뒤를 돌아보았다. 덤프트럭이 뒤따라왔고 차선에서 벗어났다가 제자리에 왔다가를 반복했다. 흙을 실었는지 자갈이 떨어졌다. 추월하려는 분위기 같은데 1차선 도로여서 비키기도 마땅찮았다. 조수석에 앉은 깡패는 말했다.
“더 밟아.”
“예.”
승용차가 속도를 올리자 트럭도 번호판이 보일 정도로 바짝 따라붙었다. “씨발놈이.” 깡패는 경적을 울리다가 우측 갓길로 차를 붙여 공간을 내주었다. 덤프트럭이 승용차 옆구리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섰다. 완전히 선팅된 유리 너머로 사람 윤곽이 어른거렸다. 덩치 큰 차들이 나란히 달리기엔 좁은 도로였다. 트럭은 중앙 분리대가 박살 나도 비켜나지 않았다. 깡패는 급하게 핸들을 틀어 피했다. 등줄기에 한기가 들었다. 뒷자리엔 에어백이 없다. 야바는 안전벨트가 잘 물렸는지부터 확인하고 조수석을 꽉 붙잡았다. 입술을 깨물며 불안함을 달랬다. 이 커브길만 벗어나면 차가 많이 오가는 도로였다.
콰앙─────!
그 순간 덤프트럭이 엎쳐들 듯 승용차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뼈가 부서질 만큼의 충격이 쏟아졌다. 깡패는 욕을 씹으며 급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조작했다.
“저 새끼 뭐야?! 크윽……!”
콰앙─────!
트럭은 그치지 않고 반대편 언덕으로 내몰았다. 음주 운전이든, 장난삼아 위협하든 제정신이 아닌 것 틀림없다. 힘에 밀린 승용차는 오른쪽 가드레일을 긁었다.
끼끼기──────!
급브레이크의 마찰음과 고무 탄 내가 귀와 코를 찔렀다. 승용차는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거인의 힘을 감당치 못해 가드레일에서 탈선했다. 경사 낮은 언덕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야바는 무릎에 머리를 박고 전신에 힘을 잔뜩 줬다. 차에서 떨어진 부품들이 날아다니고, 박살 난 유리로 나뭇가지와 돌멩이가 튕겨 들었다. 으윽…! 야바는 벨트에 매달려 뒤흔들렸다. 뼈마디가 제각각 어긋났다. 내장이 뭉개지는 듯했다. 육신의 고통보다 훨씬 큰 공포였다. 어느 순간 차체가 뒤집힌 채 멈춰 섰다. 엄청난 충격으로 잠깐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앓는 소리가 메아리 같다. 뒤집힌 차에 몸이 구겨져서 호흡이 힘들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뿐이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우그러진 범퍼와 사라진 앞유리였다. 조수석 깡패는 옆 유리에 머리를 박힌 채 꺽꺽거렸다. 운전석 깡패는 좌석과 에어백 틈에 끼어 신음했다. 놈은 범퍼에서 연기가 나자 빠져나오려고 발악했다. 검은 연기와 불꽃, 매캐한 냄새, 모두 죽음의 징후였다. 벗어나야 하는데 움직여지지 않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점점 머리로 피가 쏠려 시야가 흐려졌다. 가위에 눌린 듯 혼자만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수술이나 받아볼 걸 그랬다. 기하의 전갈 꼬리도 잘라볼 걸 그랬다. 범퍼가 내뿜는 불기둥에서 대가리와 지느러미가 돋아났다. 화마가 탐욕스런 혀를 날름거렸다. 그 순간 혼이 날아갈 만큼 엄청난 폭발음이 터졌다. 의식이 점멸했다. 마지막에 차이석이 떠오른 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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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
갑작스러운 폭우가 진탕 같은 세계를 씻어내렸다. 진한 비 내음이 몸 언저리에 덕지덕지 붙었다. 빗줄기는 하얀 결을 만들며 일렁거렸다. 유리창에 갇힌 아파트 내부도 아무 표정없는 얼굴도 빗물에 정화됐다. 막 샤워를 마친 이석은 욕의 차림이다. 입술엔 담배가 물렸지만 오래도록 불을 붙이지 않아 필터는 눅눅했다. 벽시계를 주시했다. 초침의 율동은 얄밉도록 태연자약하다. 약속시간이 다가온다. 아랫도리에 팽팽한 열기가 몰렸다. 그는 병적으로 입술을 훔쳤다.
누군가 벨을 눌렀다. 이석은 곧장 현관으로 갔다. 그 시간마저 단축하길 원한다. 큼지막한 보폭으로 내뻗었다. 현관문을 열었다. 검정색 점퍼와 야구 모자를 쓴 사내 두 명이 서 있다. 그들은 마스크를 낀 채 모자챙 아래로 눈만 내비쳤다. 그리고 커다란 포대 자루를 함께 들고 있었다.
“주문하신 겁니다. 말씀하신 조건에 맞추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이석은 포대 자루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양팔로 안았다. 안에 든 육신은 찹찹했고 가벼웠다. 그 무게감에 위아래에서 열기가 충돌했다. 이석은 느릿느릿 물었다.
“레시피 대로입니까?”
“예. 주문하신 사이즈에 양쪽 고환 적출, 손목에 칼자국, 알맞게 잘 익혔습니다. 아, 그런데 똑같은 칩이 없어서 제일 비슷한 모델로 넣었습니다.”
깔끔한 일 처리가 흡족했다. 이석은 그들에게 형식적인 미소를 던졌다. 포대 자루 매듭을 풀었다. 그 안에서 자그마한 머리가 이석의 가슴에 힘없이 늘어졌다. 볼과 이마에 그을음을 묻힌 고양이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작게 벌어진 입술은 얕은 숨을 뱉었다. 그의 눈동자에 뱀 비늘 같은 빛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