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30화 (30/42)

힐러-track 28

바깥은 소리만으로도 상상 갈 만큼 교성이 난무했다. 어렴풋이 코카인의 아리아가 들리자 난잡한 신음은 잦아들었다. 천상의 노래가 짐승들의 혼음마저 정화했을 터다. 안팎은 고요해졌다. 야바는 머리카락에 엉긴 젤을 매만졌다. 씻고 싶은데 장소가 마땅찮았다. 갑자기 끌려와 이상한 기계 앞에 섰고, 작은 전극을 머리에 단 채 뇌 구석구석을 들쑤셔진 기분이었다. 차이석은 검사가 끝나자마자 야바에게 하늘빛 벨벳 의상을 손수 입혀 주었다. 항상 칩의 존재를 웃어넘겼던 그가 이렇게 나오리라곤 상상 못 했다. 거기다 요트에 투시 기계까지……. 정작 머릿속을 보고 싶은 건 그였다. 민우와 해민이란 사람들은 모니터 앞에서 출력 과정을 지켜보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몇억 광년에서 다가오는 우주의 시간처럼 냉랭하고 고요했다.

“약 먹어도 돼?”

고양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이석은 야바의 의상 지퍼를 목덜미까지 올리며 물었다.

“언제 먹었지?”

“아까 출발하면서.”

“대신 두 알 만이야.”

이석이 물을 가져다주자 고양이는 의상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 먹었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씹어 괴롭혔다. 녀석이 긴장할 때면 나오는 습관이다. 무의식적인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이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야바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틈으로 만졌다. 보드라운 털의 감촉에 진정되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나왔어.”

날아든 목소리에 야바는 경련처럼 어깨를 떨었다. 함께 모니터 앞에 섰다. 모니터에는 다각도에서 머리를 찍은 X선 사진들이 떴다. 형광 빛 이미지는 뭐가 뭔지 분간키 어려웠다. 민우는 사진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기 보여?”

야바는 모든 신경을 남자의 손가락에만 집중했다. 칩은 없다. 환상이다. 기하의 세뇌이다. 주문처럼 되뇌었다. 폭주하는 심장 소리가 귀청을 두드렸다. 제발, 제발, 제발……!

슬로우모션처럼 남자의 음성이 늘어졌다. 그리고…….

“여기, 분명히 금속물질이 있어.”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야바의 어깨를 쥔 차이석 손에 엄청난 힘이 들어갔다. 이 현기증을 단단히 받쳐주는 것과 달리, 그의 눈동자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야바는 자신이 숨 쉬고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참았던 숨을 터트리자 차츰 눈앞이 선명해졌다. 그제야 사진이 보였다. 두개골과 척추가 이어지는 부분 즈음, 손가락 반 마디만한 길이에 쌀알 모양의 조각이 박혀 있었다.

“……금속물질이라면…다른 파편일 지도 모르잖아.”

남자는 코끝에 걸린 안경을 올리며 답했다.

“파편이라기엔 모양이 너무 깨끗해.”

야바는 바싹 마른 입술을 떼었다.

“그럼… 칩이야?”

“X-ray 촬영에선 형태만 파악하는 게 다야. 이게 뭔지는 속단할 수 없어.”

“그래서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제 음성은 날카로웠다. 남자는 갸름한 눈으로 차이석을 곁눈질했다.

“의사가 정확한 검사 없이 소견을 내는 건 금물이야. 금속 물질이라는 것만 확실해.”

이래서 의사는 질색이다. 뭉뚱그린 대답으로 빠져나갈 구멍부터 만드는 게 사이비 점쟁이하고 다를 바 없다. 지금 매달릴 건 남자가 돌팔이길 바라는 것뿐이다.

“제거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마른 음성이 머리에 흩어졌다. 차이석의 가슴이 등에 닿은 건 그다음이었다. 그의 옆모습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남자는 X-ray 사진 어딘가를 가리켰다.

“금속 박힌 데가 연수 근처야. 숨골이라고 뇌의 최하부 지점인데. 사람은 대뇌나 소뇌를 다쳐도 안 죽지만, 연수는 생명과 직결돼서 함부로 건드리면 수술 안 하니만 못해. 일단 자세한 건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아.”

“그러니까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 시도하면 얼마나 걸리냐고.”

차이석은 한자 한자 짓씹었다. 남자는 매끄러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정밀 검사만 해도 한나절이 걸려. 수술 시간만 쳐도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거야. 그 이하일 수도, 그 이상일 수도 있고.”

“더 줄일 수 없어?”

“전자렌지에 음식 돌리는 일이 아니야.”

연수? 숨골? 그건 또 뭐지? 왜 민우란 사람은 저런 표정이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차이석이 말했다.

“칩만 최대한 확대해 줘.”

“알았어.”

차이석은 의사가 확대한 사진을 메일로 보내고 어딘가 전화했다.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간 그들을 의식이 따라잡지 못했다. 야바는 차이석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뭐야? 왜 너희끼리만 말해? 그게 뭔데?”

그는 야바의 뒷머리를 자늑하게 어루만졌다.

“정확히 어떤 녀석인지 알아보는 거야. 상대를 알아야 해결법도 나오니까.”

달래는 손길에도 안심할 수 없는 건, 그가 전에 없이 흔들리는 눈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애써 감추려는 게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야바는 생존본능처럼 생각하는 걸 관두기로 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넘어오자 차이석은 폰에 대고 말했다.

“사진 하나 메일로 보냈습니다. 뭔지 좀 알아봐요. 아니, 이대로 기다리죠.”

그는 폰을 귀에 댄 채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때 민우란 남자가 그에게 묘한 신호를 보냈다. 차이석은 기계와 조금 떨어진 침대에 야바를 데려가 앉혔다. 그는 가면에서 깃털 하나를 뽑더니 테이블에 뒹구는 빨대로 뚝딱 깃털 막대를 만들었다. 깃털로 야바 코끝을 건드렸다. 입천장까지 간지럽히는 감촉이었다.

“연락 올 때까지만 이거 가지고 놀면서 기다려.”

“싫어. 나도 들을 거야.”

“얌전히 있으면 나중에 실컷 그루밍해 줄게.”

“…….”

차이석은 오디오를 틀어 볼륨을 높이고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서 대화를 나누었다. 음악에 묻혀 소리는 또렷하지 않았다. 야바는 깃털 막대를 빙빙 돌렸다.

“쟤 좀 이상해서.”

이석이 다가갔을 때 민우는 다짜고짜 말했다.

“목소리 죽여.”

이석은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중얼거렸다. 민우는 야바를 힐끔거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쟤 말야. 간단한 뇌파 검사도 했는데 10분 넘게 뇌파가 정지했어. 뇌파가 정지하면 뇌사 판정을 하거든?”

뜻밖의 말이었다. 이석은 야바에게 들리지 않도록 말했다.

“GHB를 장기간 먹다가 얼마 전에 끊었어. 정신도 불안정하고 지금 많이 긴장해서일 거야.”

“그럼 이상 뇌파라도 잡혀야지. 기계 고장도 아니고.”

“머릿속에 있는 금속 물질 때문일 수도 있잖아.”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석연치 않아. 그냥 죽은 사람처럼 뇌파가 정지했어. 완전하게. 그런데 진짜는 지금부터야. 10분이 지나고 뇌파가 반응했는데, 이건 뭐라 말을 못 하겠다.”

민우가 가리킨 곳은 곡선 그래프로 채워진 종이와 붉고 푸른 색깔의 뇌파 이미지가 뜬 모니터였다.

“이것 봐. 색깔 분포도가 완전히 비대칭이고, 그래프 파형이나 속도가 아주 극에서 극을 달려. 공간이 더 있다면 그래프가 위아래로 뚫고 갔을 정도로. 100명을 엽기적으로 살인한 연쇄살인자, 뇌질환 환자, 약물 중독자…. 그 사람들의 이상 뇌파와는 패턴이 전혀 달라. 그렇다고 얘가 정상 뇌파도 아니고. 정상 뇌파든, 이상 뇌파든 제각각 파형과 색이 다양하고 지문처럼 다른 사람과 구분되지. 그래도 결국 어느 범위에 한정돼서 몇 개의 패턴으로 나타나거든? 그런데 쟤는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아.”

“저 녀석은 멀쩡하게 살아 있어. 여긴 배 위고, 다른 잡음이 섞였을 수도 있어.”

“그래, 병원에서 제대로 검사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

민우는 화면을 보며 경이로운 듯 눈을 빛냈다.

“그래도 이런 패턴은 처음 봤다. 뇌파는 뇌의 목소리라고 하거든? 그런데 쟤의 뇌가 자꾸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단 말이지.”

어떤 패턴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 뇌파, 약을 해서도 칩 때문도 아니다. 모든 의문을 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그때 폰에서 사내의 부름이 들렸다. 폰을 귀에 대자 야바는 자리를 박차고 다가오려 했다. 안돼. 거기 있어. 이석은 눈빛으로 야바를 주저앉히고 통화를 시작했다.

“말해요.”

부탁한 상대는 바이오 기계 공학 전공자이며, 자신의 페이퍼 컴퍼니에서 재직 중이다.

[대충 모양을 보니 오래된 모델로 보이는데……아마 칩일 겁니다.]

이석은 그대로 굳었다.

“혹시 베리칩입니까?”

[비슷하긴 한데, 좀 더 원시적입니다. 아무래도 이거 시험제품 칩을 개조 한 것 같습니다. 아시죠? 이식된 사람의 위치도 파악하고 정보도 빼내는 거 말입니다.]

개조…. 피가 모조리 휩쓸려나간 듯 체온이 떨어졌다. 작은 목소리가 고막을 가로질렀다.

‘사실은 내 머리에 알람시계가 설치돼 있어. 위치 파악도 다 되는 건데 만약에 늦게 오거나 말을 안 들으면 머리가 터져.’

‘같이 사는 애가 죽었어. 깡패가 리모컨을 눌러서 머리를 터트려버렸어.’

“혹시 말이죠.”

성마른 음성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

“폭탄과 연동하도록 개조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까?”

[정확히는 직접 봐야 아는데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크기가 적어서 폭발력은 적을 겁니다. 칩이 이식된 곳이 어딥니까? 손목이나 종아리면 국소적으로만 훼손되지 목숨엔 지장 없거든요.]

눈알이 뒤틀려 모든 사물이 잿빛으로 변했다. 이석은 어금니를 깨물고 눈을 감았다.

“칩 박힌 곳이 머리입니다.”

[이런.]

상대는 빠르게 말했다.

[아! 혹시 검사한다고 MRI 기계에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MRI 전류 하고 칩 내부 금속 간의 감전이 일어나면 터지거든요. MRI뿐만 아니라 길거리 지나가다 전기라도 통하면 폭발할 수 있고, 칩에서 나오는 물질 때문에 종양이 생길 위험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그 사람 걸어 다니는 시한 폭탄입니다.]

짐승의 이빨에 산채로 심장을 물어뜯기는 듯했다. 풍경이 제 색깔로 돌아왔을 때 본능적으로 야바를 눈으로 찾았다. 자신의 표정을 확인한 야바는 손이 부서지도록 침대 커버를 쥐었다. 공포와 절망으로 뒤범벅된 눈이 흔들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이길래…….

“알았어요.”

이석은 폰을 끊었다. 모든 사고는 짓뭉개졌고 오직 한가지 생각만이 소용돌이쳤다.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 다치지 않게 쥐도 새도 모르게. 수술 시간은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필요하다. 그러나 리모컨 누르는 시간은 0.1초면 충분하다. 어디를 보아도 절벽이다. 아니, 분명 탈출구는 있다. 생각해야 한다. 제대로 된 생각. 야바는 부서질 것처럼 앉아 있었다. 불안한 녀석의 눈빛은 수면을 적신 석양처럼 처연했다. 어떠한 감정이 심장을 쥐어 비틀었다.

차이석은 폰을 끊고 걸어왔다. 그는 정물화처럼 차갑고 메마른 표정이다. 오랜 침묵이 고통스러웠다. 야바는 이 불길한 적막을 깨부수고 싶었다.

“뭐래?”

차이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뭐래?”

다시 물어도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야바의 뒷머리를 만졌다. 힘줘 감싸지도, 거두지도 않는 손길은 신중하고 신중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열었다.

“네 머리에 칩이 있어. 의사들도 꺼릴 만큼 치명적인 곳에.”

심장이 곤두박질했다. 발아래가 무너져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득함이었다. 칩이 망상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걸었지만 그게 아니란 게 판명됐다. 애초부터 없앨 시도조차 안 했으니 달라질 건 없다. 한 꺼풀씩 드러날 진실이 벅차도 항우울제가 있으니 괜찮다. 아마 그럴 거다.

“수술 할래?”

그가 물었다.

“……할래?”

바닥을 보던 야바는 고개 들어 그와 시선을 겹쳤다. 그 단순한 행동마저 지금은 힘겨웠다.

“만약에 의사가 수술하다가 실수하면 어떡해? 그러다 영원히 못 일어나면?”

“최고 의료진으로 붙일게.”

“수술대에 눕기도 전에 기하가 먼저 알아챌 거야. 그럼 리모컨을 누를 거야.”

“칩 때문에 혈종이나 종양이 생길지도 몰라. 길을 가다가, 네 머리맡에 있는 전자 제품으로도 폭발할 위험이 있어.”

걸러짐 없는 말은 낱낱이 상상하게 만들었다. 제어 못 할 만큼 전신이 떨렸다.

“조심하면 되잖아…….”

차이석은 야바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시선을 포갰다. 그 눈동자가 의식 속으로 침잠했다.

“평생 그 새끼 노예로 살아야 돼.”

적나라한 말에 두려움의 파편이 살가죽에 박혔다. 야바는 눈을 부산하게 감았다 떴다. 수술하는 게 좋을까? 그의 말대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가 온 걸까? 그럼 자유를 찾을까? 만에 하나 수술하다 잘못되면? 도둑맞은 불알을 영원히 찾지 못하면? 그를 보지 못하면? 이 감촉도, 눈빛도 다신 느낄 수 없으면? 자유의 대가치고 너무나 무모한 모험이다.

“그냥… 있을래. 아직 벌점도 여유 있으니까 앞으로 규칙만 잘 지키면 돼. 방에 있는 것도 다 치우고, 밖에도 안 나가면 돼……!”

차이석은 야바의 어깨를 고쳐잡으며 뭔가 말하려 했다. 그도 확신이 선 표정이 아니면서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적나라한 공포가 등줄기를 휘갈겼다. 야바는 정신없이 도리깨질했다.

“싫어! 이대로 살 거야! 나는 계속 말했어. 계속, 계속……! 그런데 너는 안 믿었잖아! 왜 이제 와서 그러는 거야?! 지금까지 괜찮았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안 해! 수술 안 할 거야!”

차이석은 목 졸린 사람처럼 눈을 일그러트렸다. 기하가 앞으로 그를 만나지 못하게 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차명환 집에는 보낼 테니 그때나마 만나면 된다. 자신은 또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는 걸까? 아니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한 거다. 눈두덩이를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뜨끔했다. 입술을 악물고 차오르는 것을 견뎌냈다. 뿌연 시야로 차이석이 보였다. 어떤 상황에도 태연자약했던 그가 적군에게 넋 놓고 당한 패잔병 같았다. 저런 얼굴을 하지 말았으면 했다. 모든 걸 거머쥐고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해서 가난한 왕의 눈빛을 지웠으면 했다. 야바는 그제야 사타구니에 있는 물건을 인지했다. 팬티에 손을 넣고 DVD를 꺼냈다. 손수건에 감싼 것을 그의 코앞에다 내밀었다.

“받아. 원본은 지웠으니까 이것만 갖고 있으면 돼. 너무 많아서 되는대로 가져왔어. 혹시 없으면 말해. 또 찾아볼게.”

차이석의 눈길이 DVD를 훑었다가 다시 야바에게 되돌아왔다. 야바는 말했다.

“너 지하층에서 찍힌 영상이야. 기하가 이걸로 협박할 거라고 했어. 너 지금 외국으로 쫓겨나면 안 되잖아.”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이 야바를 목도 했다.

“왜.”

그가 탁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당연한 걸 묻는지 모르겠다.

“이거 차 회장한테 넘어가거나 언론에 공개되면 너 불리해지잖아.”

“내가 불리해지든 말든 너와 무슨 상관있길래.”

“상관없지만…그래도 너 회사 가져야 되잖아.”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관통했다.

“그래서 머리통이 날아갈 위험까지 무릅쓰고 빼돌렸다는 거군. 단지 내가 불리해질까 봐?”

야바는 입술을 자근거리다가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태령그룹 후계자가 되든 통째로 빼앗든,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장애물 없었으면 했다. 두통을 거둬주지 못한다면 이거라고 하고 싶었다. 자신은 절망해도 그는 절망해선 안 된다. 그는 현실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이므로, 그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이렇게 됐지만, 너는……. 너라도…이제 약점 같은 거 잡히지 마.”

야바는 그의 손에 DVD를 쥐여 주었다. 물에 물감 번지듯 서서히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파장이 해일처럼 모조리 휩쓸었다. 차이석은 야바의 턱을 옥죄며 벽에 밀어붙였다. 통제되지 않는 시선이 파편처럼 박혔다.

“너 병신이야? 강기하가 리모컨이라도 누르면 어쩔 뻔했어!”

목소리는 날고기를 씹어 발긴 들짐승이었다. 너무나 놀라 눈앞이 핑핑 돌았다.

“걔 아직 몰라…. 당분간 눈치 못 챌 거야.”

“당분간?”

핏대 선 그의 눈동자가 경련했다.

“그 새끼가 복사본을 안 남겼을 거라고 생각해? 가게 공격당하고 제일 먼저 녹화분부터 빼돌렸을 거야!”

“아니야. 걔 공사에 매달리느라 그럴 정신도 없었을 거야.”

“이렇게 중요한 미끼를 남의 손에 넘어가게 할 만큼 강기하가 허술할 것 같아? 그 새끼가 빈손으로 그 자리를 꿰찬 게 뭣 때문이라고 생각해?”

“…….”

진짜일까? 기하가 벌써 복사본을……?

“그럼 차 회장이 너 외국으로…….”

“내가 안 가면 그만이야! 차 회장은 내가 더한 짓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해. 알아듣겠어? 이 바닥 것들은 주머니만 채워주면 어떤 인간이든 상관 안 해!”

고막이 욱씬거릴 만큼 차이석은 소리쳤다. 그는 오늘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적군이 쥔 약점을 다시 빼앗았는데도 기뻐하지 않았다. 가벼운 설탕물 같은 친절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가장 비참한 건 자신이 목숨 걸고 가져온 게 그만큼의 가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걸 몰랐던 멍청함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래! 나 병신이야! 필요 없으면 버리든 부수든 알아서 해! 알아서 해!”

야바는 그를 뿌리치고 문고리를 잡았다. 포악한 손아귀에 다시 벽에 처박혔다.

“너 뭐야. 너는 왜 그런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왜 그렇게…….”

“미치겠다.” 그는 잇새로 읊조리며 이마를 벽에 짓찧었다. 그의 눈동자와 손아귀는 온통 불구덩이였다. 짓눌린 음성이 어깨에 부서졌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했어. 주주들이 돌아서고, 차 회장이 강수를 던지고, 성재가 배신하고, 차명환이 무덤에서 튀어나오는 것까지. 너는 내 계획에 없었어.”

야바의 뒷머리를 감싼 손은 흉폭한 언어와는 달리 보드라웠다. 뒤통수에 박힌 금속 물질이 오늘따라 또렷하게 느껴졌다. 맞댄 그의 팔과 가슴에서 내뿜는 열기에 녹을 것만 같았다. 야바는 몸을 움츠리며 조여든 목구멍으로 호흡했다. 누군가를 저주하는 건 능숙해도 다독이는 방법은 모르겠다. 야바의 손은 그의 등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선실문을 두드렸다.

“아직이냐? 사장이 그 애 찾아.”

야바는 파드드 손을 거뒀다. 차이석은 야바에게 가면을 씌워주고 방에 뒹구는 DVD를 주워 건넸다.

“다시 제자리에 놔둬. 아니 두고가.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마.”

차이석은 침착함을 잃고 중구난방으로 말했다. 야바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 했다. 한발 앞서 그가 손을 뜯어내고 허겁지겁 야바의 입술을 찾았다. 혀를 넣고 따뜻한 점막을 휘젓다가 숨을 짓누르며 이를 세워 턱과 목덜미를 깨물었다. 야바는 어깨를 움츠렸다. 한쪽에서 숨죽이던 의사 친구들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차이석은 야바를 거칠게 떼어냈다. 불덩이에 휩싸인 눈동자가 망막을 꿰뚫었다.

“이 방에서 일어났던 일 전부 잊어. 가서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자고 쉬어.”

쉰 목소리는 환청 같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기하는 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트 입구에서 모인 고자 가수들 틈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가면이 자신을 응시했다. 차갑게 언 코카인의 눈망울엔 온갖 지저분한 상념이 담겨 있다. 이 시간만은 모든 게 무미건조했다. 기하는 자신을 위아래로 훑으며 별다른 이상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뭔가를 더 읽으려 했다.

“마지막인데 성심을 다해 불러줬나?”

육신에서 이탈한 영혼이 이 모든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 같다. 적막했고 덤덤했다.

“역겹게들 뒹구느라 내 노래는 듣지도 않던데?”

기하는 경멸 섞인 눈을 선실문 너머의 고객에게 날리고는 손을 들어 야바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야바는 진저리치며 그 손을 내쳤다.

“만지지 마. 앞으로 네 손이 닿는 곳은 칼로 도려낼 거야.”

“또 무슨 헛소리…….”

“헛소린지 아닌지 궁금하면 시험해 봐.”

기하는 제 살이 잘린 듯 볼을 일그러트렸다. 공중에 들린 손은 내려갔다. 어쩌면 놈의 아킬레스건은 생각보다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야바는 그를 지나쳐 고자 가수들과 합류했다. 잠시나마 꾸었던 백일몽에서 깨고 나니 잔혹한 현실이 온 힘을 다해 달려왔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을 거다. 한 꺼풀씩 벗겨지는 이 세계를 똑바로 직시할 거다. 저 뒤에서 그가 지켜보고 있다. 주머니엔 항우울제도 두둑하다. 차가운 바닷물에 알몸으로 뛰어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밤이다.

이석은 움직임 없이 모니터에 비친 사진을 주시했다. 민우와 성해민이 뭐라 말을 걸었다. 고양이가 가져온 DVD, 모니터 안에서 균열 난 형광 빛 사진, 그 안에 박힌 칩. X선 사진은 녀석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를 헤집은 것 같았다. 녀석의 말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생각해봐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좀 더 빨리 수를 썼어야 했다.

“큭…….”

그 순간 눈알이 뽑힐 듯한 귀울음이 고막을 헤집었다. 그는 상체를 굽히며 창문에 몸을 지탱했다. 근육이 급격하게 경련하고, 관자놀이에 심줄이 불거졌다. 발작처럼 촬영 기계를 넘어트렸다. 모니터를 뜯어내 선실문에 내던졌다. 박살 난 문 너머로 유희를 즐기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소파를 뒤집어엎고, 선반의 장식품을 팔로 휩쓸었다. 물건이 바닥에 깨지고 튀었다. 그악한 감정이 둔중해질 때까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라니까?! 정신 차려!!”

누군가 허리에 매달려 벽으로 밀어붙였다. 성재는 자신의 멱살을 쥔 채 창백하게 얼었다. 그 너머로 사색이 된 얼굴들이 낱낱이 박혔다. 어째서 난장판이 됐는지, 저들이 왜 저런 표정인지 중간의 기억이 끊어졌다. 아수라장 속에서 여전히 약에 절어 섹스에 열 올리는 누군가 있다. 정액이 흘러넘치는 구멍, 지독한 타락의 냄새, 그토록 심취했던 유희들이 구역질 났다. 이석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파티는 끝났어. 다들 꺼져.”

탕…

탕……

타앙……

지포 라이터 튕기는 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모두 사라진 요트 선실은 박살 난 술병과 마리화나 냄새, 정액이 눌어붙은 콘돔뿐이다. 이석은 난장판이 된 선실 소파에 늘어져 술을 퍼부었다. 육신에서 빠져나간 영혼이 이 꼴을 내려다보듯 무미건조했다. 피묻은 손에는 DVD를 감쌌던 손수건이 들려 있다. 그는 느적 느적 손수건을 코에 대고 녀석의 냄새를 뒷골까지 빨아들였다. 한순간 무의식으로 빨려가며 시야가 뒤틀렸다.

자장… 자장… 노래를 들으며 옥같이 어여쁜 우리 아가야…….

하느작… 하느작… 나비 춤춘다…….

우울한 멜로디가 신경을 따라 세포와 혈관에 엉겨붙었다. 밑바닥까지 나른해지는 음색, 이성을 모조리 긁어 없애고 파괴욕만 남게 하는, 들어도 들어도 목마른 음성……. 독한 마약을 치사량까지 복용한 듯 머리가 없어졌다. 소리의 잔향에서 빠져나왔을 무렵 자신의 성기는 선명하게 발기했다. 라이터 튕기는 손길이 우뚝 멈췄다. 마지막 술 방울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술병을 내던졌다.

쨍그랑──!

흩어진 파편에 반사된 햇볕이 망막을 난도질했다. 이석은 유리조각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피가 쏟아지자 해체되었던 사고가 조각을 맞춰갔다. 폰을 집었다. 액정에서 움직이는 손가락 놀림에 피비린내가 퍼졌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상대가 폰을 받았다.

“구할 게 있습니다. 20대 초반 남자, 키는 177쯤, 마른 체형…. 빠를수록 좋아요. 지금 해결 못 하면 돌 것 같거든요.”

갈라진 목소리가 바닥에 흘러내렸다.

“구해봐요. 보기만 해도 설만큼 싱싱한 시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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