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27
여명에 물든 골목으로 은빛 폰티악이 정차했다. 파란 대문 앞에서 깡패 두 명이 졸고 있다. 이석은 핸들에 양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새벽 5시 45분이다. 고양이 전화에 무작정 달려나왔다. 녀석의 젖은 목소리는 노래만큼이나 혼을 빼앗았고 최대한 밟아 도착하기까지 정확히 15분이 걸렸다. 녀석을 대할 때면 가끔 감정과 행동이 제어할 수 없을 만치 폭발한다. 그런 자신이 이해 안 되면서도 외줄 타는 아찔한 유희처럼 즐겁기도 하다. 차에서 내려 깡패들에게 다가갔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아 새벽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야바 있습니까?”
문지기들은 졸음이 달아난 눈으로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사장님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셨습니다. 특히 차 전무님은요.”
“지금 안 보면 돌 지경인데 얼굴만 확인하고 가죠.”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들은 물러날 기색이 아니다. 흠…이석은 지갑에서 천만 원짜리 수표 넉 장을 꺼내 내밀었다.
“5분만 어때요? 나를 봤던 기억을 지워주면 당신들 겁니다.”
수표 색깔을 확인한 깡패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침을 삼키고 눈짓으로 부산한 실랑이를 벌였다. 긴 시간에 걸쳐 협의 점을 찾은 사내들은 이석의 손가락에 걸린 수표를 슬쩍 뺐다.
“그, 그럼 딱 5분입니다. 우리도 목숨 걸고 들여보내는 거니까 약속 어기면 모두 죽는 겁니다. 오른쪽…방입니다.”
이석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눈에 띈 건 이런 주택에 어울리지 않는 마당 풍경이다. 분재 종류와 다듬은 모양, 텃밭을 둘러싼 벽돌의 정렬은 본가와 익숙한 느낌이다. 마루에 올라 오른쪽 문을 열었다. 좁고 어두운 방 곳곳에는 짐가방과 옷더미가 쌓였고, 사내 세 명이 각자 개성 있는 모습으로 잠들었다. 어두워서 누가 누군지 식별이 어려웠다. 차례로 얼굴을 확인하다가 벽에 붙어 잠든 인영을 발견했다. 고양이처럼 웅크린 등과 이 어둠에서도 감춰지지 않는 야한 목덜미. 그는 얽기 설기 꼬인 다리를 피해 안쪽으로 걸어갔다. 야바 허리에 다리 얹은 남자를 밀치고 공간을 확보했다. 동그랗게 생긴 남자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었다. 이석은 팔 한쪽을 바닥에 짚고 잠든 야묘를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과 이마에서 콧잔등까지 떨어지는 곡선은 정신을 나른하게 했다. 녀석의 숨소리는 지친 듯이 야트막했다.
“남은 못 자게 해놓고 잘도 자는군.”
단단히 말아쥔 고양이 앞발이 보였다. 앞발 틈새로 내비친 건 자신이 줬던 사탕 케이스다. 첫 숨을 터트린 아이의 손처럼 야바는 손등이 도드라지도록 케이스를 쥐고 있었다. 이석은 녀석의 손목에 감긴 칼자국을 쓰다듬었다. 목덜미의 실루엣을 망치는 화상 자국도. 으……녀석은 몸을 뒤척일 뿐 깨어나진 않는다. 눈을 떴으면 했지만 이렇게 발톱을 감추고 잠든 모습도 나쁘지 않다. 새벽에 달려올 가치는 충분하다. 그는 고개를 떨어트려 심장을 조이는 흔적에 입술을 묻으려 했다. 그 순간 목줄기에 차고 날카로운 금속이 닿았다. 이석은 시선만 움직여 정체불명의 물건을 거슬러 올라갔다. 창문으로 드는 푸른 빛에 그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야바 머리맡에 있는 건 옷더미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어둠 속에서 흰자위가 번뜩거렸다.
“조금 전에 잠들었습니다. 오늘 많이 울었습니다…….”
신경이 예민한 편이다. 이렇게 근접한 곳인데도 전혀 감지 못했다.
“알아요.”
이석은 상체를 들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자신의 목에 닿은 것이 가지치기용 가위라는 걸 알았다. 가위는 성인 남자 목을 너끈히 썰 만큼 커다랬고 날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이석은 가늘게 눈을 떴다. 남자는 본가 정원사였다.
“여기서 볼 줄 몰랐군요.”
“제 집입니다.”
임시 거처가 정원사 집이었다니. 임시 거처를 제공한 사람치고 야바를 잘 아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 시간에 자지 않고, 야바 머리맡에서 뭘 했는지 신경이 곤두섰다. 남자는 가위를 자신의 목에 겨누면서도 야바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저 눈빛이나 구부려 앉은 꼴은 주인을 지키는 개 같다.
“그날 당신을 봤습니다……. 당신은 집 앞에서 세진이를 들춰 안고 차에 넣었습니다. 저는 동생이 붙잡혀 갔는데도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저는 쫓아갔지만 차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저는 차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니까요.”
남자는 침울한 어투로 우물댔다. 이석은 한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실망할 거 없어요. 어지간해서 차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대부분 잘 알아듣지 못할 소리였다. 그 가운데 한 단어가 신경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야바를 동생이라고 했습니까?”
“야바가 아닙니다. 세진입니다. 세진이는 제 동생입니다.”
이석은 입술에 묻은 웃음기를 지웠다.
“별로 믿기지 않는군요.”
“서울시 난곡동 41번지 14통 1반. 세진이는 제가 길을 잃으면 경찰서에서 이 주소를 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외우지 못하면 제 손바닥을 때렸습니다.”
남자가 읊은 건 야바의 어릴 적 집 주소다. 자폐증에 걸린 형이 있으며 행방불명이라고 들었다. 그 형제가 본가 정원사였단 말인가. 처음 정원사를 봤을 때 누군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 듯했다. 이쪽이 더 골격이 크고, 순한 인상이지만 분명 야바의 이목구비가 묻어 있다. 야바의 형이라 주장하는 남자는 상대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든 말든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정원사는 주인 잃은 동물처럼 입술을 파들거렸다.
“당신은…키도 크고, 미남입니다. 제가 본 남자 중에 제일 멋집니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남자는 벌레처럼 등을 굽혔다.
“당신은 저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멋집니다. 당신은 웃을 때도 멋집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합니다. 전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갈 때 들어주는 걸 봤습니다. 정아 씨도 당신이 웃으면 얼굴이 빨갛게 됩니다. 그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일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멋있고 친절합니다. 그래서 세진이 옆에 있는 게 불안합니다. 당신이 세진이를 차에 밀어 넣었을 때 세진이는 무서워했지만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곧 울음을 쏟아낼 듯한 정원사는 불안하고 절박해 보였다. 그러나 가위는 거두지 않았다. 이석도 목을 짓누르는 흉기를 피하지 않았다.
“그쪽도 꽤 멋있군요.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 훨씬 커 보일 겁니다.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재벌가 안주인 표적으로 그만인 타입이죠. 정원 가꾸는 솜씨도 훌륭하더군요. 나는 거기처럼 멋지게 벽돌 쌓지도, 가지치기도 못하죠. 고양이도 형을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고양이가 아닙니다. 세진입니다. 그리고 저는…….”
슬슬 이 대화가 지루해졌다.
“그렇다 치고, 가위나 치우겠습니까? 지금 나비 목덜미 좀 빨고 싶은데 녀석 얼굴에 피를 뿌리면 깰지 모르니까요.”
남자는 처음으로 시선을 맞췄다. 까만 눈망울에 득실거리는 건 살기였다. 시퍼렇게 갈린 가윗날이 서걱거리며 이석의 목 가죽을 위협했다. 가위는 주인을 지키는 개의 이빨이었다.
“세진이를 멋대로 만지면 안 됩니다……. 세진이는 제 것입니다. 저도 만지고 싶지만 세진이가 용서해 줄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이제 정원사와의 대화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이석은 야바의 입술선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참을 여유가 없군요.”
“그럼 당신을… 죽여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꼬마가 어른 흉내 내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아이의 감정처럼 가식 없는 살기였다. 친동생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정원사가 놀랍지 않다. 야바라면, 이 싸구려 마약이라면 친형제마저 잡아먹고도 남을 것이므로. 자, 그렇다면 그럴만한 사연이 둘 사이에 있었다는 건데. 적나라한 장면이 머리를 긁고 갔다. 독뱀 같은 감정이 득실거렸다. 이석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열렬한 고백 뒤에 경고라니, 실망이군요.”
이석은 세상 모르고 잠든 야바를 내려다보았다. 이 얼굴에 정액을 뿌리면 그만이겠지만 피를 뿌려도 꽤 어울릴 것이다. 상체를 숙여 고양이 목덜미를 머금었다. 보드라운 살갗이 혀에 감기자 포악한 정욕이 중심을 후려쳤다. 자신의 목줄기에 닿은 가윗날은 살가죽 아래 맥동하는 정맥을 끊을 듯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이석은 번들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야바, 야바, 싸구려 마약. 따닥, 따닥, 어금니를 부딪치며 그 이름을 토막 쳤다. 다리를 분지르고 혓바닥을 잘라 어딘가에 감춘다 해도 또다시 제 발로 기어나가겠지. 대체 이 머리통에 뭐가 들었는지 갈라보고 싶을 지경이다. 다시 상체를 들었을 때 정원사는 당혹감과 살기, 살기. 온통 티끌 없는 살기에 뒤엉킨 눈이다. 이석은 그 눈알을 잇새로 씹어 발기듯 말했다.
“형이든, 전 애인이든 소속을 정확히 해요. 그럼 나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할 거니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위가 살갗을 할퀴고 떨어져 나갔다. 선혈이 목덜미를 타고 내렸다. 언젠가 놈을 다시 만나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땐 좀 더 명확한 이름으로 말이다.
아침부터 반푼이 집은 술렁거렸다. 새로운 숙소로 이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야바는 방에서 짐을 꾸렸다. 눈뜨자마자 항우울제를 먹고, 부유 감에 정신을 내맡기고, 헤집어진 머리가 멍한 것 말고 별다를 것 없는 아침이다. 밤새 실컷 울어서인지 안에 썩었던 찌꺼기가 빠져나간 기분이다. 탈진한 몸은 뼈 마디마디가 녹아내린 것 같다. 칼자국과 화상 자국은 그대로였다. 그 흔적에 얽힌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몸에 상주하는 벌레를 태워죽이려 했다거나, 피를 통해 뽑아내려 했다거나, 아사시키려 했던 행위들. 다른 진실이 보일까 봐 두려웠지만 이미 차이석의 항우울제에 길들어 약을 참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신 거울을 안 보기로 했다. 언젠가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마주할 날이 올까? 이 고난을 인내하고 나면 그는 어떤 상을 줄까? 어젯밤 그와의 통화는 진짜였을까……?
고자 가수들은 단출한 짐을 꾸리고 방을 나섰다. 다른 방에서 지냈던 코카인이 들어왔다. 그들과 코카인은 여전히 냉랭한 분위기다. 그는 모르핀에게 다가가 상자를 건넸다. 모르핀은 떨떠름한 낯으로 물었다.
“뭐, 뭐? 지금 손님한테 받았다고 자랑하는 거야?”
“어제 출장 갔을 때 손님이 주셨어.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
상자 안을 본 모르핀이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건 까르띠에 목걸이잖아?! 이걸 진짜 나 준다고? 까르띠에를?!”
코카인은 화사하게 웃었다.
“너는 피부가 하얗고 목이 길어서 어떤 디자인이든 잘 받잖아. 어서 해봐. 잘 어울리는지 보고 싶다.”
“네, 네가 웬일이냐? 손님한테 받은 걸 다 주고…?”
“전엔 미안했다. 그땐 너무 두려워서 너희를 지켜주지 못했어.”
“아니 뭐…….”
모르핀은 저 자세로 나오는 코카인을 어색해하면서도 목걸이를 껴보았다. 코카인은 헤로인과 필로폰에게 시계와 지갑을 주었다. 모두 상표도 떼지 않았으며 명품이었다. 그는 헤쉬쉬도 빠트리지 않았다. 헤쉬쉬 팔짱에 착 감겼다.
“너는 다음에 줘도 되지?”
“꼭 기억해 둘 거야.”
헤쉬쉬는 볼을 붉혔다. 코카인의 맨살이 감긴 팔뚝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명품 못지않은 선물이었다. 코카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에게 잡티 하나 없는 미소를 건넸다. 면도칼로 입술을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말이다.
“야바 너한테는 따로 준비한 게 있어. 이따 새로운 숙소에서 보여줄게.”
야바는 입술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기대할게.”
코카인은 그간 비실댄 게 맞나 싶을 만큼 생기 넘쳤으며 어젯밤 일을 내색하지도 않았다. 야바는 코웃음 쳤다. 그게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인 건 자신만 아는 사실이다. 고자들은 짐을 꾸려 임시 거처와 안녕을 고했다. 이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코카인을 힐난했던 고자들은 이 집에서 나갈 때 다시 신봉자가 되었다. 그러나 모두 눈치 못 챈 사실이 있다. 코카인은 다시 신이 된 게 아니라, 비로소 인간으로 사는 법을 깨우친 것임을.
새로운 숙소는 같은 구조, 같은 인물들이라 달라진 건 아래층으로 옮겼다는 것뿐이다. 고자 가수들과 깡패들은 짐을 나르고 가구를 배치했다. 반푼이는 괴기스런 분재를 이사 선물이랍시고 가져왔다. 반푼이는 간혹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 외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워낙 짐이 없어서 오전 중에 이사는 대충 마무리했다.
야바의 방은 욕실 딸린 큰방이었다. 자신과 모르핀, 필로폰이 같은 방에, 헤쉬쉬와 헤로인이 한방을 쓰기로 했다. 모르핀이 시끄럽긴 하지만 숫기없는 필로폰 때문에 그냥저냥 괜찮은 구성이다. 코카인은 컨디션이 나쁘다는 이유로 제일 작은 방을 혼자 쓰겠다고 했다. 헤쉬쉬 외엔 다들 불만은 없었다. 야바는 침대 비닐을 뜯고 그 위에 누웠다. 깡패들이 오전에 대포폰을 나눠줬다. 차이석 번호를 제일 첫 번째 목록에 저장했다. 문득 방 한켠에 있는 정수기가 시야를 긁었다. 전에 썼던 것과 같은 모양이며 이것이 코카인의 특별한 선물임을 직감했다. 정수리에 열이 끓었다. 거실에서 걸레질하던 코카인은 손을 멈추었다. 눈을 살짝 접으며 묻는 듯했다.
전에 쓰던 거와 같은 걸로 골랐는데 마음에 들어?
야바는 침대에서 일어나 정수기를 걷어찼다. 정수기 뚜껑이 떨어져 나가며 물이 쏟아졌다. 코카인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 정수기 물 안 마시는 거 몰라? 상대방 취향 무시한 선물은 민폐라는 거나 알아 둬.”
“…….”
“치우지 않고 뭘 멍청하게 보고 있어?”
구겨진 그의 얼굴에 마음이 조금 풀렸다.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어 던졌다. 물소리와 함께 발성연습을 했다. 욕실에 울리는 목소리는 환청 같다. 이상했다. 독극물이 망상일지도 모르며 보이지 않던 진실이 보이는데도 생각만큼 두렵지 않았다. 어쩌면 차이석이 준 항우울제는 진실과 정면으로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묘약일지 모른다. 문득 몸뚱이를 씻는 손길이 느려졌다. 그런데 조금 전 일은 진짜일까?
샤워하고 나오니 모르핀과 필로폰이 어딘가로 가는 중이었다.
“우씨! 이사하는 날 부려 먹고 지랄이야. 녹취록 백업하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어느 세월에 다 구분해서 옮기냐고?”
귀가 번쩍 뜨였다. 야바는 모르핀의 뒷덜미를 잡았다.
“무슨 소리야?”
“형님이 파라디소에 있는 녹화분 옮기라고 해서. 그 왜 있잖아. 변태새끼들 룸에서 지랄하는 거. 어찌나 변태새끼들이 많은지 지금 일손 딸리니까 와서 도우란다.”
심장이 술렁거렸다. 녹화 장면이라면 차이석 것도 있을 거다. 기하는 그걸 종신 보험이라고 했다. 세상에 공개하면 차이석 하나쯤 외국으로 날릴 만한 무기. 그렇지 않아도 차명환이 건강해져서 불리할 텐데 행여 기하가 눈 돌아서 그걸 까발린다면…….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나도 갈게.”
“똘아이 네가 웬일이냐? 전 재산 날리더니 딴 사람 됐어~~~? 근데 너 아까 발성 연습 한 거냐? 발성 그따위로 하면 목소리 다 망가져 이 똘아이야! 근데 톤이 약간 달라졌더라?”
모르핀은 두 번 묻지도 않고 찰싹 엉겨붙었다. 성가신 것을 떼어냈다. 머리카락도 말리지 않고 앞장섰다. 습격당하고 파라디소는 처음이다. 보수 공사에 박차를 가한 건물은 예전 모습을 찾는 중이었다. 대기실 옆 밀실로 가니 벽에 CCTV 모니터가 다닥다닥 박혀 있다. 깡패가 말했다.
“그동안 녹화한 건 모두 포맷하고 DVD로 옮길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예에~~”
모르핀은 건성으로 답하고 손을 놀렸다. 파라디소 CCTV는 사람 움직임이 있을 때만 감지하는 센서가 있어서 경제적으로 녹화된다. 테마룸 별로 복사하고 나누니 한나절이 지났다. 작업을 마쳤을 때 DVD는 수백 개에 달했다. 깡패는 몇 번을 확인하고 원본을 지웠다. 숙소 근처에 있는 체벌 창고에 상자를 모두 옮기고 자물쇠로 걸어 잠갔다. 야바는 초조한 눈으로 창고문을 힐끔대며 숙소로 돌아갔다. 차명환 자택에 가 노래하면서도 DVD 생각에 집중할 수 없었다. 차명환의 핀잔도 대꾸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기하는 인부들에게 지시 내리며 보수 공사 현장을 순회했다. 엘리베이터 수리공이 작동 여부를 테스트했다. 기둥 뼈대가 세워지고 붕괴했던 벽면이 예전 모양을 갖춰갔다. 부하가 달려와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리고는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조금 전에 차 전무 비서라는 사람이 주고 갔습니다.”
기하는 담배를 비벼껐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벼락 맞은 양 굳었다. 믿기지 않는 눈으로 몇 번을 훑어보았다. 임수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렇게 빨리, 이런 식으로 줄 거라곤 예상 못 했다.
“태령그룹 지분이야.”
임수는 놀란 눈으로 서류를 보았다. 기하는 서류에서 눈 떼지 못한 채 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가고 얼마후 차 전무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에 듭니까?]
마약에 쩔었는지 술에 취했는지 발음은 꼬여 있었다. 폰 너머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교성이 넘어왔다. 이 시간에 들을 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기하는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넘기실 줄 몰랐습니다.”
[그동안 내 발바닥 핥느라 수고 많았는데 이 정도 선물이야…….]
“코카인 때문에 차명환 씨 병세가 호전됐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코카인과 나와의 일이니 걱정 말아요. 이제 남은 동안은 감상용으로 하겠다고 서로 합의했고.]
“금시초문이군요.”
힐링용과 감상용은 그 효과부터 확연히 다르다. 다시 차명환을 속이는 거나 다름없으며 형태만 달라졌을 뿐 다시 차 전무에게 발목 붙들리는 건…….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군요. 이 지분으로 혹시 다른 거래를 하시려는 거라면…….”
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던져 주는 거 잘 받아먹으면 그만이지 또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습니까? 증여계약서, 명의개서 신청서, 내 쪽은 모든 절차를 마쳤고…….]
[뭐 하는 거야? 이렇게 달아올랐으면서, 빨리 와~~]
[잠깐, 잠깐, 손 좀 빼 봐.]
차 전무는 끼어든 여자를 달래는 듯했다. 한심한 새끼. 기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까지 했죠? 아, 인감. 인감이 중요하지. 주주 명부에 강기하란 이름도 올렸으니 내 지분의 일부는 당신 것이고 서류는 거짓말 안 하죠.]
이미 차 전무 인감까지 찍힌 상태였고, 서류는 깔끔했다. 허탈할 만큼 난데없어서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그간 야바에게 보였던 관심은 흥밋거리에 불과했을 것이며 생각보다 꽤 오래간 편이다. 이 시점에 지분을 넘겼다는 건 입막음과 동시에 모든 걸 정리하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계속 버티면 녹취록을 내밀어 그 오만방자한 면상이나 뭉개줄까 했는데 이렇게 순순히 지분을 토하다니. 삼대는 놀고먹어도 될법한 금액이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이다. 벅차오르는 심경을 목구멍에 삭였다. 이제 유령 같은 소유주를 만나 가게 넘겨받는 일만 남았다. 그토록 바라던 꿈이 목전에 다가왔건만 어째서 놈이 지분을 넘긴 게 반갑지만은 않은지 알 도리가 없다. 차 전무 옆에 있는 여자가 뭔가를 채근하자 놈은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 오늘 밤 친구들과 저녁 만찬이 있는데 분위기를 달궈줄 양념이 필요합니다. 코카인과 가수들이나 보내줘요.]
“죄송합니다만 오늘 애들이 이사해서 곤란…….”
[안 된다고 하지 말아요. 그럼 진짜 실망할 겁니다.]
차 전무는 한숨 쉬며 칭얼거렸다.
저녁이 되었다. 야바는 라면을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나왔다. 슈퍼에서 라면을 사고 일부러 검정색 봉투를 얻었다. 숙소에서 도보로 10분쯤 걸리는 체벌 창고는 폐공장 근처라 인적이 드물었다. 자신과 코카인이 거세당한 곳이라 꿈에서도 몸서리치는 장소였다. 주변을 살피며 체벌 창고로 접근했다. 깡패들은 일손이 모자랐는지 중요한 자료가 있음에도 따로 감시자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부터 보초를 붙일 것이고 그럼 기회도 영원히 날아간다. 창고 문은 쇠줄로 둘둘 감아 자물쇠까지 걸어놓았다. 고자들이 고문당할 때 소리가 새지 않도록 창문은 모두 쇠 판으로 땜질했다. 그러나 한때 고자 가수 하나가 비밀 탈출구를 파놓았다는 걸 깡패들은 꿈에도 모른다. 그 고자 가수는 위대한 업적만 남기고 시체가 되어 나갔다.
건물 뒤쪽으로 갔다. 벽면을 아래를 두드리자 어떤 지점에서 다른 소리가 났다. 아래쪽 땅을 열심히 파니 조그만 개구멍이 보였다. 산만한 덩치가 들어가기엔 턱없이 모자란 공간이나 사람은 위급할 때 초능력을 발휘하기 나름이다. 야바는 숨을 들이마시며 최대한 몸집을 적게 만들었다. 구멍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거미줄 덮인 창고 한쪽에 상자가 있었다. 상자를 뒤지자 ‘N’ 라벨이 붙은 DVD가 보였다. 차이석이 스카이라운지 단골이 된 건 두 달 전이지만 그전부터 지하층 단골이라고 했다. 원본은 삭제했으니 이제 복사본만 없애면 그 안에 든 차이석 영상은 누구도 볼 수 없다. 일단 N 라벨이 붙은 건 싸그리 꺼내 DVD 알맹이만 끄집어냈다. 손을 움직이면서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나 귀를 곤두세웠다. 만약 기하가 이 사실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거다. 행여 리모컨을 누르기라도 하면…….
“아…….”
야바는 탄성을 질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독극물이 없다면, 칩도 없을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위치 추적에 폭탄까지 되는 칩이 있을 리가 없다. 위치 추적이야 폰으로도 하려면 할 수 있다. 고자 가수들도 기하에게 세뇌당해 철석같이 믿는지 모른다. 메사돈 머리가 날아간 건 환상이었을지 모르고 지금 어디선가 멀쩡히 돌아다닐 수도 있다. 그때 벌레가 피부를 뚫고 기어나와 동그란 몸뚱이를 떨며 비웃었다.
네 머리 믿을 만한 거 맞아? 칩은 있을까? 없을까? 있을까? 없을까? 칩칩칩칩칩칩칩칩칩……….
닥쳐! 조용히 해! 야바는 시끄러운 것들을 손바닥으로 으깨었다. 요즘 벌레 출몰 횟수와 양이 줄었다 싶었는데 다시 활개를 쳐댔다.
하지만 만약 칩이 진짜라면…. DVD를 담는 손길이 느려졌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손목의 자해 자국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창고에서 하는 이 행위도, 지금 느끼는 두려움도 환상은 아닐까? 코카인 말대로 자신은 독극물이 없다는 충격에서 헤어나려고 또 다른 망상을 지어낸 건 아닐까? 모르겠다. 이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어디인지 혼란스러웠다. 무릎에 코를 묻고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문득 어둠이 스민 창고에서 아이들의 비명이 아련하게 울렸다. 현기증이 일었다. 야바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분명한 건 차이석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만 진짜라면, 그만 환상이 아니라면…….
손을 다시 놀렸다. 그렇게 골라낸 DVD만 해도 꽤 많았다. 양쪽을 잡아 부수려는 손이 멈칫했다. 이 안에서 그가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기도 했고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제일 바라는 건 그가 이 안에 없는 것이다. 그만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빈 케이스는 제자리에 두고, DVD는 라면이 든 봉투 제일 아래 집어넣었다. 창고에서 빠져나와 개구멍을 다시 메웠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이걸 차이석에게 전해주느냐였다. 전화해서 나오라고 할지, 차명환 집에서 우연히 만나면 건네야 할지 고민이다. 만약 칩이 없다면 그를 아무 때나 만나러 갈 수 있다. 벌점은 아직 넉넉하다. 어쩌면 벌점도 생각보다 적을지 모른다. 이걸 전해주면 그는 어떤 표정을 할까? 아마 이런 게 녹화됐다는 건 꿈에도 몰랐을 거다. 안도의 숨을 터트리며 고맙다고 하면 어떤 얼굴로 마주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다 폰을 꺼내 그의 번호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 현관에 접어들 때였다. 모르핀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 진짜 똘아이! 라면 공장 갔다 왔냐? 물 다 쫄았잖아! 빨리 줘!”
모르핀은 야바가 든 봉투를 무작정 빼앗아 갔다. 너무 놀라 심장을 게워낼 뻔했다.
“내놔!”
야바는 본능적으로 모르핀을 떠밀었다. 나자빠진 모르핀이 고함을 질렀다.
“뭐 샀는지 보자는데 왜 또 지랄이야?!”
“라면이 라면이지 별거 있어?”
야바는 라면을 봉투를 꽉 쥐었다. 등줄기엔 땀이 내렸다. “왜 그래?” 시끄러운 소리에 고자 가수들이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코카인도 함께 있었다.
“거기서 뭣들 하는 거냐?”
굵직한 음성에 이어 계단으로 그림자가 올라왔다. 잠시 후 기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맥박이 빠르게 치솟았다. 야바는 봉투를 뒤로 감췄다.
“뭐 하는 거냐니까?”
“아니, 글쎄 라면 뭐 샀는지나 보려는데 똘아이가 저를 다짜고짜 밀지 뭐겠어요…….”
모르핀은 앞잡이답게 넙죽 고해바쳤다. 기하의 눈길이 봉투에 날아들자 척추가 뻐근해졌다. 칩은 없다. 아마 없을 거다. 그러니까 기하도 종이호랑이다. 야바는 고개를 꾸역꾸역 들었다.
“니들은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할 일 없어?”
야바는 라면 하나를 꺼내 모르핀 명치에 내던졌다. 싸한 눈빛만 남기고 숙소에 들어갔다. 계단 아래서 기하가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 올렸다. 바닥을 밟는 발끝이 떨렸다. 방으로 와 필로폰을 끌어내고 문을 잠갔다. 항우울제를 입에 털었다. 조금 진정되었지만 식은땀이 등에 흥건했다. 밖에서 모르핀이 문을 두드렸다.
“똘아이. 모두 출장이래!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문 열어!”
봉투에서 DVD를 꺼냈다. 침대 매트리스를 들었다가 놓고, 옷장을 열었다가 닫으며 목 잘린 닭 마냥 방을 돌아다녔다. 행여 자리를 비운 사이 깡패들이 불시검문하면 큰일이다. DVD를 손수건에 말아 팬티에 넣었다. 무대 의상을 입으니 앞섶이 불룩했다. 짐가방으로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문고리가 물크덩한 덩어리 같다.
기하도 출장길에 동행하리라곤 예상 못 했다. 게다가 자신만 놈의 차에 타리란 것도 말이다. 고자 가수들을 태운 밴은 뒤를 따랐다. 도시에서 빠져나왔을 즈음 기하는 항우울제를 건넸다. 기하는 바쁜 와중에도 똘마니를 통해 약을 조달했고, 자신은 받는 족족 내다 버렸다. 팬티에 든 DVD를 들킬까 봐 가방을 꽉 껴안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기하는 낡은 노트를 보는 중이다. 자신의 시선을 느낀 그가 말했다.
“힐러에 관한 데이터야. 부친이 숨겨둔 게 더 있나 보는 거지.”
누군가 머릿가죽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그 부친이란 작자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다.
“너희 아빠 실험하다가 힐러의 비명 때문에 머리 터져 죽었다면서?”
그건 스스로 자처한 죽음이며 노망난 영감에겐 호사로운 종말이다. 기하는 말 없이 노트를 읽었다. 야바는 물었다.
“그런데 데이터는 갑자기 왜?”
“요즘 코카인 몸이 이상하다더군. 만약 힐러의 힘이 소진된다면 매상에 타격이 가니까.”
“몸이 이상하긴 무슨… 속지 마. 걔 쇼한 거야.”
“쇼라니?”
“니들은 걔가 말 잘 듣는 인형 같지? 그러다 된통 당하는 날이 올 테니 조심해.”
야바는 전방을 노려보며 입술을 자근거렸다. 기하는 눈썹을 구기며 의아한 표정이다. 앞에서 운전 중인 임수가 말했다.
“거기 작은 수첩 보셨습니까? 전화번호가 꽤 많던데 혹시 부친의 연구를 잘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기하는 낡은 수첩을 꺼내 건성으로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임진희?”
“누구입니까?”
임수가 물었다.
“부친의 조수. 이 이름을 잊을 리 없지. 이 여자와 바람나 부인도 자식도 나 몰라라 했으니까. 원래 조수가 몇 명 있었지만 부친의 광기에 질려서 모두 떠났지. 그녀만은 임종 직전까지 곁을 지켰다더군.”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연구를 지켜봤으니 가장 정확한 정보를 알겠군요.”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여자야. 10년이 지난 번호를 아직 쓸 리도 없고.”
기하는 수첩을 아무 데나 내팽개쳤다. 임수는 한 손으로 낡은 노트 몇 권을 뒤로 넘겨주었다.
“데이터를 틈틈이 보다가 재밌는 걸 발견했습니다. 전문용어가 많아서 제가 확실히 이해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임수는 말을 이었다.
“치유와 살상을 할 수 있는 힐러, 여기까지는 모두 아는 사실인데…. 그 밖에 치유만 가능한 힐러, 살상만 가능한 힐러가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다른 타입의 힐러가?”
“그런 것 같습니다.”
“부친이 접했던 샘플이 몇 명 있었다는 건 알지만 유형이 다른 힐러라니, 금시초문이군.”
그들의 대화에 관심이 몰렸다. 야바는 물었다.
“그럼 살상만 하는 힐러는 비명으로만 힘을 발현한다는 거야?”
기하는 대답했다.
“글쎄. 이런 타입은 처음이라 정확히 몰라. 코카인은 치유와 살상의 힘을 모두 가졌지만 무작정 비명을 지른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정한 절망과 공포에 싸였을 때만 살상이 가능하지.”
“그럼 살상만 하는 애 잡아다가 청부살인에 이용하면 되겠다. 경찰한테 꼬리 밟힐 위험도 없고, 돈 되겠네. 걔 잠깐 빌려 써도 돼?”
기하는 피식 웃으며 노트를 넘겼다. 임수는 말했다.
“그런데 사장님. 아까 코카인이 데이터에 대해 물어서 그 얘길 했더니 이미 아는 눈치였습니다. 다른 걸 알려달라던데요.”
“코카인이 알아? 힐러의 유형이 더 있다는 걸?”
“예.”
기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나조차 몰랐던 걸 어떻게 알았지?”
“나중에 따로 물어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물어보지.”
“알겠습니다. 거기 노란 용지 끼워놓은 곳을 봐주십시오.”
기하는 표시한 부분을 펼쳤다. 그 페이지엔 사람 이름과 간략한 정보가 쓰였는데 묘한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실험 객체 다섯 구? 부친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꼬드겨 실험에 이용했지. 그런데 왜 다섯 명이 아니라 다섯 구라고 썼지?”
기하와 임수는 백미러를 통해 시선을 주고받았다. 임수는 무뚝뚝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시체 셀 때나 쓰는 단어죠. 거기 붉은색 용지로 표시한 곳을 보시면…….”
기하는 붉은색 종이로 표시된 곳을 보며 볼을 꿈틀거렸다.
“지옥문을 넘어간 영혼까지 부르는 목소리?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힐러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양반이군. 설마 환자도 모자라 시체까지 실험에 이용한 건 아니겠지?”
기하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야바는 노트를 훔쳐보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 한켠에 휘갈긴 문구가 눈을 사로잡았다.
-지옥문을 넘어간 영혼까지 불러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야말로 완벽한 힐러다-
야바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노망난 영감이 그걸 실험하려고 시체를 이용했다는 걸까? 미치광이 박사에게 들볶이며 시체 앞에서 노래했을 힐러가 절로 상상이 갔다.
“완벽한 힐러라…….”
기하는 그 문구를 입속에 굴렸다. 그는 모르고 있다. 힐러에 인생을 바친 부친을 경멸하면서도 그 역시 부친을 닮아간다는 걸. 하루빨리 저 부자가 지옥에서 재회할 날이나 왔으면 좋겠다. 그때 그 완벽한 힐러에게 다시 불러들이면 될 테니까. 야바의 입술에 싸늘한 곡선이 그려졌다. 문구에서 시선을 거뒀을 때 언제부턴가 기하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 가깝다는 걸 알고 놈에게 붙은 어깨를 떼었다. 야바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너 개 키운 적 없어? 셰퍼드나 도베르만 같이 커다란 개.”
“뭐든 돌보는 거 질색이야. 개는 키우는 게 아니라 후려 차주는 거지.”
“…….”
야바는 가방을 끌어안고 밖을 내다보았다. 수평선에 비친 불빛들이 울음소리처럼 흔들렸다. 두어 시간을 달려와 도착한 곳은 바닷가였다. 해 떨어진 바닷가에 눈에 익은 요트가 보였다. 그건 차이석의 요트였다. 기하는 차 밖으로 발을 뻗으며 말했다.
“혼신을 다해 노래하고 와. 마지막 파티가 될 거니까.”
선실에 들어가자마자 술 냄새와 마리화나 냄새가 훅 끼쳤다. 역한 정액냄새도 뒤따랐다. 교성이 난무하는 선실은 나체들의 혼음 파티가 한참이었다. 차이석은 선실 입구에 기댄 채 가면 쓴 고자 가수들을 빙 훑었다. 마약 한 사람 마냥 질 나쁜 눈빛이었고 발음도 뭉개졌다.
“들어 와. 어서.”
차이석의 꼴은 엉망이었다. 머리카락과 걸음걸이도 흐트러졌다. 스트라이프 셔츠 단추는 모두 풀렸고, 바지 지퍼도 열려 있었다. 그는 약에 취해 누가 누군지 분간도 못 하는 듯했다. 가장 거슬리는 건 그의 허리에 매달린 여자였다. 여자는 산발인 머리카락에 립스틱도 번졌고, 브래지어 한쪽으로 젖가슴이 삐져나왔다. 차이석도 여자도 구역질 나도록 선정적인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성재가 얼큰한 걸음으로 다가와 눈알에 힘을 주었다. 가장 화려한 가면의 주인공을 잡고는 안으로 이끌었다.
“오우! 코카인! 네 노랫소리 그리웠어. 어서 들어와.”
헤쉬쉬는 살벌한 눈으로 코카인을 따라갔다. 그 광경이 처음 파라디소에서 헤롱거리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여자는 차이석을 교태롭게 바라보며 제 음부를 더듬었다.
“빨리 들어 와. 너 때문에 음모도 밀었어. 거기 네 이름 이니셜도 새겼단 말야.”
“잠깐만 기다려. 문신이 지워질 만큼 실컷 비벼줄 테니까.”
차이석은 혼곤한 눈으로 여자의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만졌다. 여자는 고자 가수들에게 느물거리는 미소를 보냈다.
“너희 목소리가 그렇게 끝내준다고? 얼마나 화끈한가 기대해도 되겠지?”
“가수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세우다가 시간 다 보내네!”
그때 낯선 남자가 끼어들었다. 남자는 곱상한 외모에 나긋한 체형을 지녔고, 상의를 드러낸 채 차이석 허리에 팔을 감았다. 세 명은 당장 침실로 기어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얼굴이었다. 야바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불에 달군 송곳으로 눈알을 후벼 파이는 듯했다. 차이석이 가수들을 불러놓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조금 전까지 어디서 뒹굴다 나왔는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팬티에 있는 DVD를 박살 내 저들의 목을 찌르고픈 살의뿐이었다. 나가고 싶다. 나가는 게 맞다. 그대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자, 하나는 따라와.”
차이석은 가수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어딘가로 끌고 갔다. 우연인지 뭔지 간택된 건 야바였다. 기하가 반대쪽에서 야바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노래는 밖에서만 들어주시죠.”
차이석이 상체를 휘청이며 대답했다.
“대충 넘어가요. 안에서 다들 기다리는 중이니까.”
“죄송하지만…….”
여자가 기하를 흘겨보았다.
“고작 노래 몇 곡 부를 거면서 뭐 대단한 가수라고 비싸게 굴어?”
“천국을 보여주는 황홀한 목소린데 비싸게 굴만하지. 내가 보여주는 천국과 가수들이 보여주는 천국 중에 뭐가 나은지 비교해 봐.”
차이석은 혀 꼬인 소리로 여자를 달랬다. 기하는 한심하다는 듯 차이석을 힐끔거렸고 야바의 손을 더 움켜쥐었다. 차이석은 기하까지 안으로 끌어당겼다.
“거기도 들어와서 쌓인 거나 풀고 가요. 나야 많을수록 좋으니까.”
주변에서 파트너를 찾던 여자들이 승냥이 마냥 기하 주변에 몰렸다.
“흐음~마침 잘 됐네. 하나 모자랐는데, 당신 벗으면 멋질 거 같아.”
상의만 입은 여자는 기하의 허벅지를 지분거렸고 다른 여자는 젖가슴을 문질렀다. 알몸인 남자는 성기를 세운 채 기하의 벨트를 풀었다. 기하는 역겨운 낯빛을 가까스로 숨기며 그들을 떼어냈다. 코끝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그럼 30분 뒤에 애들 데리러 오겠습니다.”
기하는 야바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건네고 사라졌다. 차이석은 야바 손을 낚아챘다. 건너편에서 그의 허리에 매달린 골빈 여자가 베실거렸다. 야바는 그의 손을 떼어내고 매섭게 쳐다보았다. 온몸이 용광로에 삼켜지는 듯했다.
“더러운 손 치워. 다른 애나 데려가서 놀아.”
“벌써부터 흥분하면 곤란해. 파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차이석은 자신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놔! 이거 놔!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제정신 아닌 인간은 괴력도 엄청났다. 속절없이 끌려가 작은 선실에 처박혔다. 여자와 남자도 따라와 문을 잠갔다. 곧 차이석과 저들이 난잡하게 엉켜 섹스 파티를 벌일 거다. 그 꼴을 보며 노래하라니, 구더기보다 구역질 났다. 창고에서 고문당하는 것보다 끔찍했다. 차이석을 밀어내고 탈출하려 했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 순간 몸부림을 멈추고 말았다. 침대와 술병이 뒹굴어야 할 방에는 이상한 기계가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기계는 사람 키보다 훨씬 높았고 평평한 침대가 달렸다. 한쪽엔 작은 모니터 몇 개와 납색 판이 세워졌다. 여자는 삐져나온 젖가슴을 추스르더니 기계 쪽으로 걸어갔다.
“차이석! 대체 너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밤에 갑자기 X선 촬영기를 가져오라니. 옮기느라 우리가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아? 이건 내 전공이 아니니까 민우가 맡을 거야.”
여자는 곱상한 남자에게 턱짓했다. 민우라는 남자도 셔츠를 껴입으며 선실 불을 껐다. 창문 블라인드를 쳐 빛을 차단하고는 야바에게 말했다.
“쇠붙이 달린 옷하고 가면 좀 벗어볼래? 목걸이나 귀걸이 했으면 빼고, 기계 앞에 서 봐.”
차이석이 물었다.
“얼마나 걸리지?”
“촬영하고 결과 나올 때까지 30분이면 넘치고도 남아.”
뒤돌아 보았을 때 야바는 할 말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한껏 풀렸던 차이석의 눈도, 비틀거리던 걸음도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머리가 멍해졌다. 차이석은 기계 앞에 야바를 세운 다음, 뒤에서 가면 리본을 풀었다. 얼굴이 드러나자 여자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눈 돌려. 성해민.”
낮게 깔린 그의 음성에 피부가 움츠러들었다. 성해민이라 불린 여자는 모니터 앞에 앉아 마우스로 뭔가를 조작했다. 차이석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너 때문에 우리까지 10년 치 방사선 한방에 피폭되는 거야. 생명보험 제일 비싼 걸로 들어줘!”
그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만 했다.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했다. 야바는 넋 나간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차이석의 옆 얼굴이 어깨에 내렸다. 뒤에서 뻗은 손이 물처럼 떨어져 야바의 의상 지퍼를 내렸다. 귓전에 나직한 음성이 흘러내렸다.
“겁먹지 마. 네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만 확인하는 거야.”
삐빅- 기계가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