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26
창백한 밤을 지나온 바람이 볼을 할퀴었다. 건넛집에서 흐르는 빛의 분말이 마당에 부유했다. 조금 전까지 죽었던 코카인이 부활해 갈라진 땅 위에 서 있다. 그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네가 정수기 앞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애들한테 물었어. 하나같이 못 봤다고 하더군. 숙소엔 칼도 가위도 못 들이게 하는데 그렇게 위험한 독약을 모으는 걸 왜 누구 하나 경계하지 않았을까? 네가 철저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눈뜬 장님이어서?”
코카인은 자신을 직시했다.
“왜냐면 넌 아무것도 넣지 않았으니까. 내게 들켰던 날도 넌 빈손이었어. 하지만 네가 정수기에 뭔가 넣는 행위를 했다는 건 확신했지. 너는 그 안에 뭘 넣고 싶었을까? 내가 너라면 뭘 넣었을까?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어.”
불빛을 등진 그의 눈이 번뜩거렸다.
“바로 독약이라고. 나만이 볼 수 있는 독약.”
회색빛 사물들이 비틀거렸다. 야바는 어지럼증을 견디려 사투를 벌였다. 코카인은 자신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코카인이 죽어갈 때 자신이 그러했듯이. 그가 말했다.
“여기까지가 내 생각이야. 이번엔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정수기에 넣은 건 뭐였어?”
독약이 없어? 애초부터? 독극물이 있든 없든 어느 쪽을 선택해도 절망 위에 서 있었다. 선택? 아니, 그건 선택이 아니라 진실이다. 독극물은 존재한다. 몇 달간 철저하게 정보를 모으고 발품 팔아 독극물을 샀다. 정성을 다해 제조하고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정수기에 넣었다. 오전에도 변기 물탱크를 열고 독극물 봉투가 있는 걸 확인했다. 신에게 맹세할 수 있다. 그런데 없어? 개소리, 헛소리다. 코카인은 함정을 파놓고 유도심문 하는 거다. 넘어가면 안 된다. 절대. 절대. 야바는 침착하려 발악했다. 시선을 똑바로 쳐올렸다.
“무슨 헛소리야? 방금 네 입으로 내가 빈손이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뭘 넣었냐니? 너 지금 제정신이야?”
성마른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코카인은 싸늘하게 물었다.
“그럼 조금 전에 내가 쓰러졌을 때 왜 아무한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지?”
야바는 박장대소할 뻔했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건 피가 아니었고 넌 진짜 쓰러진 것도 아니잖아.”
잘하고 있다. 잘하는 거다. 의연하게 중심을 잡으면 넘길 수 있다. 이건 신이 내린 마지막 관문이다. 신이 물었다.
“그럼 그동안 정수기 물에 손도 안 댄 이유가 뭐지? 어설픈 변명은 집어치워. 네가 바로 옆에 있는 정수기를 두고 기어이 냉장고까지 가는 수고를 했을 때부터 이상했어.”
그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었다.
“너는 정수기에 독약을 탔어. 정확히 말하면 두 달 전부터. 더 정확히는 차이석 씨가 스카이라운지 단골이 됐을 때부터. 이 사실을 차이석 씨한테 말하면 어떨까? 그 사람은 낭만을 좋아하니 무척 흥미로워할 거야. 지금 당장 불러서 말해 볼까?”
야바의 입술 끝이 얼어붙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머리가 빈사에 빠졌다. 코카인은 뙤약볕에 말라 죽어가는 지렁이를 기어이 짓이겼다.
“너는 내 자리, 내 사람들, 내가 쌓은 명예 모든 걸 야금야금 빼앗아 갔어. 고작 뒤에서 코러스나 넣던 네가! 내가 죽으면 내 것을 모두 가질 거로 생각했어? 그 사람이 너한테 관심 보인다고 해서 착각하지 마. 애당초 네게 내 흉내 내게 했던 건 나를 보호하려는 게 목적이었어. 차이석 씨는 너란 인간한테 끌려서가 아니라 그 알량한 목소리에 홀려서…….”
코카인은 쏟아내던 말을 자르고 눈썹을 좁혔다. 이내 차가운 미소를 걸었다.
“안 됐지만 차이석 씨는 내 몫이야.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절대 안 빼앗겨.”
저 자신만만함을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 야바는 손마디가 부서지도록 움켜쥐고 시선을 올렸다. 입술 끝을 꾸역꾸역 끄집어 당기며 말했다.
“자꾸 독약이라고 우기는데 말야. 증거 있어? 그 헛소리를 누가 믿을 것 같냐고.”
“그게 진짜든 망상이든 중요건 그게 아니야. 그 마음만은 진짜라는 게 중요한 거야. 나를 밀고했던 것도, 나를 죽이려 했던 것도, 먼저 시작한 건 너야. 너 같은 걸 한때나마 친구로 생각했던 내가 한심해서 눈물 날 지경이야.”
코카인은 치를 떨었다. 더는 한계다. 야바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처럼 실컷 웃어본 건 처음이야. 친구? 지금 친구라고 했어? 너는 친구 같은 건 안 만드는 인간이야. 너는 나와 가수들을 친구로 생각한 게 아니라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잖아. 너는 가증스럽고 역겨운 이중인격자야.”
둘은 밖을 의식하며 형태 없는 칼을 서로에게 휘둘렀다. 코카인은 증오 어린 음성을 잇새로 뱉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네 덕이 커. 배신이란 게 뭔지, 친구가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한 장본인이니까. 너는 어렸으니까 겁에 질렸을 거야. 충분히 이해했어. 그런데 정말로 그게 다였어? 오직 그들의 협박이 무서워서 나를 밀고한 거였어?”
코카인은 손가락으로 야바의 심장에 겨누었다. 서릿발 같은 음성을 뿌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너를 죽여버릴지도 몰라.”
이 거리라면 코카인의 비명 한 번이면 자신의 머리가 산산조각 날 거다. 어리다는 사실은 진실을 가리기에 무척 편리한 면죄부이다. 그러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니, 이렇게 유혹적일 수가….
“사실은 말야…….”
야바는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흔들림 없이 그를 보았다. 입술은 악랄한 선을 그렸다.
“별로 안 무서웠어. 니가 눈앞에서 꺼져주길 바라는 마음이었거든.”
코카인의 입술 끝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그날 거세당할 때의 공포보다 그에 대한 증오가 더 선명하게 남은 걸 보면 답은 이미 나왔다. 야바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기하와 너희 엄마가 다른 게 뭐야? 어차피 네 능력을 이용해 주머니 채우려는 포주나 다름없잖아? 여기에 왔으니 신 대접이라도 받은 거야. 너도 그걸 즐겼잖아. 지금 그 자리를 빼앗길까 봐 벌벌 떠는 거잖아.”
“너는 난지도보다 지저분하고 구역질 나는 인간이야. 그 혓바닥을 놀려 내 모든 걸 망쳤으면서도 뉘우치기는커녕 나를 죽이려고 했어! 너는 독약을 넣기 전에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했어! 네가 인간이라면, 적어도 양심이란 게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미안하다고 해야 했어!”
코카인의 외침이 마른 공기를 갈랐다. 전신으로 퍼지는 독기에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야바는 독으로 범벅된 혀를 움직였다.
“마찬가지야. 너와 엮이지 않았다면 나도 이 지옥에 끌려오지 않았어. 내 미래는 모두 망가졌고 나는 남자로 태어났어도 남자가 아니야. 너야말로 발성연습을 하기 전에, 인간들을 구제하기 전에, 내게 미안하다고 해야 했어!”
코카인은 입술을 비틀었다.
“다른 남자와 바람나 얼어 죽은 엄마에, 반병신 형에, 너나 나나 시궁창에 살았던 건 매한가지 아냐? 그런 너를 내가 구해줬다고 생각해.”
“그래. 우린 서로 비긴 거지?”
자신의 목소리는 히스테릭했다. 만약 하늘이 다시 기회를 줘 10년 전 그 시간으로 되돌려준다면 코카인에게 결코 말 걸지 않았을 거다. 그랬다면 채우란 인간도, 그 비밀도 몰랐을 거다. 뇌수가 짓무를 만큼 질투심도 없었을 거다. 어쩌면 자신과 코카인의 증오대상은 어긋난 건지도 모른다. 그도 자신도 기하 때문에 남성을 잃었다. 기하는 쓰레기다. 쓰레기는 소각장에 넣는 것 외에 뭘 더 고심해야 할 가치가 없다. 기하에게 대적할 힘도 없다. 그러니 만만한 대상이나 물어뜯는 수밖에. 이 증오는 녹슬지도 않고 마침표도 없으므로.
“내가 빼앗아 간 게 아니라 원래 네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래, 뒤에서 코러스나 넣는 병풍한테 위기감을 느꼈어? 이렇게 유치한 쇼나 할 만큼 오금이 저렸어?”
코카인은 악문 입술로 말했다.
“그 썩어 문드러진 머리통에서는 독약이었다는 거 알잖아. 정수기에 넣은 건 독약이었어. 너는 나를 죽이고 싶어 했어. 그래서 독약을 넣은 거야! 어차피 너란 인간은 망상이 무너지면 현실을 직시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망상을 만들어 도피하겠지. 평생 그렇게 시궁창 같은 망상 속에 살다 죽어버려.”
그는 눈빛만큼이나 적나라한 저주를 퍼부었다. 부활한 신의 저주는 그 어떤 주문의 말보다 강력할 터였다. 목덜미에 한기가 긁고 지나갔다. 야바는 한 걸음 다가가 코카인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독오른 그의 눈동자는 잔혹한 칼날이었다. 붉은 색소로 물든 치아는 기괴했다. 가면을 풀어헤친 코카인은 몹시 매력적이었다.
“얼굴 한번 굉장하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야. 그동안 감추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에 숨겨둔 발톱이 제 살을 뚫고, 피를 흘려도 꾸역꾸역 참았겠지?”
코카인은 입술을 떨었다. 멀리서 변성기 이전의 가수들 목소리가 들렸다. 대문으로 그들이 들어서기 전에 코카인의 진짜 얼굴을 실컷 봐둬야 했다. 광채를 뿜는 두 개의 시선이 어둠에서 맞부딪혔다. 잠시 후 고자 가수들과 반푼이가 들어왔다. 야바는 코카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뭐해? 표정관리 하지 않고.”
새벽녘 야바는 고자 가수들이 잠들고 임시거처를 빠져나왔다. 깡패에겐 숙소에 잊은 물건이 있다고 하니 보내줬다. 할딱이는 숨소리, 뜀박질 소리가 골목에 퍼졌다. 아파트 계단을 밟아가며 부디 코카인 말이 거짓이길 빌었다. 부디! 부디! 시커멓게 타버린 숙소 내부는 영혼의 쉼터 같았다. 신발도 벗지 않고 욕실로 달려가 불을 켰다.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변기 물탱크 뚜껑을 열었다. 야바는 입을 가리며 터지는 비명을 뭉갰다. 뚜껑이 바닥에 나뒹굴어 조각나고 잔음만이 공간을 채웠다.
“……!!”
오전까지 변기에 있던 독극물 봉투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아, 그래! 아마 코카인이 확인할 거라 예상하고 자신이 미리 다른 데 숨겨둔 거다. 욕실과 숙소 안을 뒤졌다. 계단과 옥상까지 가 보았다. 등골에 내리는 식은땀과 헐떡이는 호흡소리는 다른 세계의 감각 같다. 타들어가는 입속을 혀로 축이고 다시 욕실을 뒤졌다. 없다. 몇 달간 모아둔 독극물이 몽땅 사라졌다.
‘어차피 너란 인간은 망상이 무너지면 현실을 직시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망상을 만들어 도피하겠지. 평생 그렇게 시궁창 같은 망상 속에 살다 죽어버려.’
코카인이 조소를 뿌렸다. 확 뒤를 돌아보았다. 숙소에는 스산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감당치 못할 현실에 떠밀려 무릎이 무너졌다. 독극물은 정말로 없었던 걸까? 정말로 자신은 정수기 앞에서 헛짓거릴 했던 걸까? 아니다. 그랬다면 자신이 빈손이란 코카인의 말이 맞다는 거다. 그 정도로 자신은 망가지지 않았다. 코카인이 자신을 물 먹이려고 음모를 꾸민 거다. 당장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어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추리하기 불가능했다. 욕실 문밖에서 창백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둠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낚아채 데려갈 거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어깨를 감싸 안고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 순간 몸을 떨었다. 흉측한 자국이 자신의 양 손목에 낭자한 것이다. 손목 절반을 차지한 상처는 팔찌처럼 감겨 있었다. 연신 눈을 감았다가 뜨며 확인했다.
“아, 뭐…지……?”
언제… 언제 이런 게…….
오랜 시간이 지나 아문 상처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고, 누가 봐도 목숨을 끊으려 시도한 흔적이었다. 뒷걸음질치다 맞은편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소스라쳤다. 얼룩처럼 생긴 화상 자국이 목덜미 한쪽을 감싸고 있는 것이었다. 눈을 비비다가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은 선명했다. 셔츠를 들었다. 허리께에도 손바닥만한 화상 자국이 있었다. 자국은 고목처럼 오래돼 보였고, 징그러웠다.
“으…….”
가느다란 신음이 흘렀다. 뼈가 부서지도록 경련했다.
‘앞으로 뭘 봐도 놀랄 필요 없어. 새로운 걸 받아들일 땐 그만한 고통도 따르기 나름이니까.’
‘뭐든. 아프지 않던 곳이 아프거나, 보이지 않던 게 보이거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부에서 갈라지는 균열 음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이 아파트에 창백한 남자의 망령이 떠돌기 때문이다. 그 남자가 눈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파트에서 뛰쳐나왔다. 어두운 골목과 깜빡거리는 가로등은 피안길로 인도하는 영혼의 불빛 같았다. 불빛을 이정표 삼아 달려갔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사고가 뒤엉켰다. 이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분간 가지 않았다. 이 상처는 뭐지? 그럼 독극물은? 그럼 차이석은……?
그와의 시간은? 함께 채웠던 공간은? 별장에 가 노래했던 건? 그럼 자신은? 자신도 존재하긴 하는 걸까? 두려움이 어깨를 짓눌렀다. 어딜 봐도 암흑이었다. 달려오는 내내 자신을 다잡아주는 주문처럼 그의 이름을 입속에 곱씹었다. 그의 이름이 환청처럼 바닥에 나동글었다. 동네 슈퍼에 구식 공중전화기가 보였다. 바지를 뒤적여 동전을 꺼냈다. 꾸역꾸역 차오른 숨을 삼키고 전화기를 집어 그의 번호를 눌렀다. 눈앞이 핑핑 돌아 몇 번이나 손이 어긋났다. 상대방은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끊고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은 길고 지루했다. 이 번호는 존재하는 것인지 불안함으로 심장이 박살 날 듯이 요동쳤다. 조금 뒤 목소리가 넘어왔다. 자다 깬 건지 술에 취한 건지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예.]
그다. 그의 목소리다. 그렇게 강렬한 순간이 환상일 리가 없다. 정신 나갈 만큼 안겨주었던 쾌감이 망상일 리가 없다. 서러움이 눈가에 몰렸다.
“이석아. 니가 주는 약 이상해.”
그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들렸다.
[어디야.]
“……그 약 이상해.”
침묵이 느린 걸음처럼 지나갔다.
[그 새끼가 길들인 약물이 빠지고, 내 것으로 적응하는 과정이어서 그래. 조금만 더 참아.]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제 금방이니까 피하지 마. 절대 눈 감지 말고 너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똑똑히 쳐다봐. 잘 버티면 상 줄게.]
하아…너 어디야? 단단했던 그의 음성이 초조하게 들렸다. 세상에 의지할 건 그의 목소리뿐인 듯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목구멍이 저렸다.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전화기를 붙든 손목에 칼자국은 여전히 있었다. 목덜미에 감긴 화상 자국도 손끝에 느껴졌다. 그는 이 흉측한 상처들을 봤으면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이런 걸 핥고 빨아대며 구역질 나지 않았을까? 기하는 자신을 살리려고 항우울제를 먹였다고 했다. 그럼 차이석은 자신에게 진실을 보여주려고 항우울제를 먹인 걸까? 그는 얼마나 더 많은 진실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지금 내 아파트로 와. 아니,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어디야? 그의 목소리는 먼 과거처럼 넘어왔다. 가만히 전화기를 끊었다. 지금은 이것으로 되었다. 그만 진짜라면 이 밤을 견딜 것 같다. 넝마 된 몸을 벽에 기댔다. 다리 감각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얼마 후에 전화벨이 울렸다. 소리는 끈질겼다. 검은 하늘은 은폐된 심해 같이 거대한 압력으로 내리눌렀다. 불빛은 바닷속 발광생물처럼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