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24
모든 게 차이석 때문이다. 반푼이 집은 짜증 그 자체였다. 좁은 방에 다 큰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것도, 욕실이 하나뿐인 것도, 끼니마다 빵 쪼가리로 때우는 것도, 늘 쓰던 샤워 용품 대신 비누로 버텨야 하는 것도 전부 짜증 났다. 그 중 반푼이가 제일 짜증 났다.
반푼이는 틈틈이 마당 텃밭에 벽돌을 두르고 씨앗을 뿌렸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게 사실이니 차이석 본가에서 조경 일을 한다는 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어쨌든 군색한 살림이며 이 동네에 이사 온 것부터가 돈벌이가 시원찮다는 거다. 얼마 안 되는 살림 중 그가 유독 신경 쓰는 게 있었다. 사람 상체만 한 높이에 묵직한 물건은 보자기에 싸였는데, 식객들이 뭘 건드려도 허용하던 반푼이는 누가 그 물건 근처에만 가도 눈초리가 돌변했다. 어느 순간 ‘그 물건’은 사라졌다.
“가게는 대체 언제 보수 공사를 마치는 거야? 빨리 오픈해야 돈을 모으든가 말든가 하지. 이제 곧 봄도 오는데 오면 뭐해? 입을 옷도 없는데! 돌체앤가바나야! 제냐야! 에르메스야! 내 아기들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어?! 아빠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모르핀은 마루에 앉아 목 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헤쉬쉬와 헤로인은 유부녀에게 인기가 많아 지명 출장이 잦은 반면, 이도 저도 아닌 모르핀과 필로폰은 계속 공치는 중이다. 야바는 귀를 틀어막았다. 오전 내내 이런 소음공해를 겪어야 하는 것도 차이석 때문이다. 차이석 때문이다. 그때 지명출장 다녀온 코카인이 마당에 들어왔다. 가게는 잠시 영업을 접었지만 그는 추종자들에게 은총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고자들 눈초리가 고울 리 만무했다. 코카인이 비명을 거부해서 보금자리와 돈을 날렸다는 생각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코카인은 제 몸집보다 큰 가방을 마루에 올렸다. 그는 휘청거리다가 격한 구역질을 했다. 혹시 독극물 효과가 발동하는 건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까 잠깐 숙소에 다녀왔다. 모두 불탄 줄만 알았는데 변기 물탱크에 보관해둔 독극물만은 무사했다. 물론 코카인 칫솔에다 묻혀놓았다. 코카인은 점점 메말라갔고 그만큼 아름다워졌다. 제 능력이 왜 퇴화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죽어갈 거다. 그야말로 멋진 결말이다. 어디선가 반푼이가 달려왔다.
“괜찮아요……?”
“그냥 어지러워서요…….”
반푼이는 코카인을 부축해 방에 눕혔다. 창백한 코카인을 보며 울기 직전의 낯이었다. 이 자리에 헤쉬쉬가 있었다면 볼만한 구경거리가 났을 텐데 심히 안타까웠다. 애가 탔다. 이쯤이면 확실한 증세가 나타날 텐데 고작 구역질이라니…. 양을 더 늘려야 할지 고심 중이다. 모르핀은 야바에게 바짝 다가왔다.
“어휴, 놀래라. 세준 형 저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약간 오싹 하다니까? 헤쉬쉬가 그러던데 저 형 코카인하고 어릴 때 같은 동네 살았다면서? 그냥 동네 형이라기엔 지나치게 챙긴단 말이지.”
“걔 원래 코카인한테 죽고 못 살았어.”
“그래도 좀…. 아, 너도 코카인하고 한동네 살았댔으니까 세준 형하고 알았겠네? 그래서 저 형이 네 본명 아는 거지? 그러고 보니 저 형하고 네 본명 비슷하다. 어쨌든, 참 희한한 게 헤쉬쉬는 세준 형 못 잡아먹어서 지랄인데, 저 형은 꿈쩍도 안 한다? 보통 노골적으로 싫은 티 내면 같이 들이받기 나름이잖아?”
“모두 하나라잖아.”
야바의 대꾸에 모르핀은 키득거렸다. 아무리 반푼이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헤쉬쉬라 해도 코카인 노래를 맹신한다면 동지라는 범주에 넣는 듯했다. 그건 깡패들한테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만큼 반푼이에게 코카인 노래는 절대적이었다. 바보 병신에서 벗어났나 했더니 미친 광신도가 되었다.
광신도고 뭐고 이젠 작은 돌멩이만 봐도 항우울제가 생각났다. 야바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마당에 뒹구는 돌멩이를 노려보았다. 지금 누군가 항우울제를 준다면 발가벗고 춤출 만큼 약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손이 떨리고 머리카락을 한가닥 한가닥 뽑아내는 듯했다. 계속, 계속, 계속, 계속……. 야바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모르핀은 한숨 쉬며 수첩을 들었다.
“내일 새 숙소로 이사하면 살 게 많은데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이 없다. 기하한테 땡겨 달랠까봐. 나중에 마트 갈 거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똘아이 넌 목욕 용품, 책상, 싱글침대, 개인 옷장, 아, 정수기도 사야지? 너 정수기 없으면 못 살잖아.”
마지막 말이 왠지 거슬렸다. 야바는 흔드는 걸 멈추고 미간을 구겼다.
“정수기 없으면 못 살다니…무슨 말이야?”
“무슨 소리긴? 너 허구한 날 정수기 옆에서 기웃거리고 정수기만 오매불망 쳐다봤잖냐.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코카인도 묻던데?”
“…….”
머리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했다. 야바는 무릎을 꽉 끌어안고 코카인이 들어간 방을 곁눈질했다.
“……코카인이? 걔가 뭐라고 물었는데?”
“그냥 너 정수기 옆에서 뭘 했는지 본 사람 있냐고. 하여간 코카인 쟤도 별걸 다 궁금해한다니까?”
“그래서? 코카인이 또 뭘 물어봤어? 뭐라고 캐물었냐고?!”
야바는 모르핀 멱살을 쥐고 다그쳤다. 모르핀은 흠칫 놀라며 더듬거렸다.
“그, 그것 말곤 별거 안 물었어. 아, 진짜! 똘아이 왜 또 지랄이야?!”
그럼 넌? 넌…뭘 봤는데? 야바는 입술만 파들파들 떨었다.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코카인이 무슨 속내인지, 고자 가수들이 뭔가 목격했는지 알아내는 것보다 당장 냉정해지는 게 우선이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멱살이 풀리자 모르핀은 온갖 욕을 하며 기침했다. 그때 방에서 반푼이가 나왔다. 자신이 코카인에게 독극물을 먹인단 사실을 반푼이가 알면 자신의 머리통을 아작내겠지. 우물거리며 주변을 맴도는 반푼이가 참기 어려웠다. 야바는 눈에 모서리를 세웠다.
“뭐?”
“배… 안 고파요?”
“고프면?”
“빵 사러 갈 건데…같이 갈래요?”
그는 아는 음식이 빵과 우유뿐인 사람 같았다. 나눠주는 순서는 매번 똑같았다. 반푼이의 보호자를 자처했을 때 종종 슈퍼에 손잡고 가기도 했다. 어딜 가나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손을 붙들었다. 그래, 그런 날도 있었다. 야바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내가 왜?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코카인하고나 가.”
세준은 맑은 눈망울을 제 발끝에 떨어트렸다.
“세진이랑 가고 싶어요…….”
그렇게 빈약한 이유라니, 어림없다. 그는 유물 같은 기억을 끄집어내고 정성을 다해 복원하려 했지만 야바는 짓밟고 싶었다.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속삭였다.
“전에 길 가다가 어떤 여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어. 곧바로 여자를 따라가서 육교계단에서 밀어버렸어. 그 여자는 치마를 까고 목이 부러졌어. 알았어? 난 밑도 끝도 없어. 그러니까 항상 조심해.”
세준의 까만 동공이 흔들렸다. 넌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그는 비었던 시간의 공백을 읽으려 했고, 범람하는 생각을 차마 말로 표현 못 하는 듯했다. 만약 물었다면 자신은 그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을 거다. 모르핀은 안절부절못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형! 똘아이 말하는 거 그냥 흘려들으세요. 얘 별명이 똘아인데, 그전에는 개 싸가지였다는 거 참고하시구요. 혼자 가기 심심하면 제가 같이 가 드리죠. 뭐!”
“세진이하고 가고 싶어요.”
반푼이는 고집스러웠다. 머리에 열이 치밀었다. 벌레들이 기어나와 살을 파먹었다. 야바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욕실 문을 세게 닫으며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반푼이를 차단했다. 모르핀이 밖에서 목청을 높였다.
“형! 그러지 마시고 저랑……어? 형! 어디 가요? 같이 가자니까요?”
그때 깡패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대충 씻고 나와. 차명환한테서 지명 출장 들어왔어.”
야바는 샤워를 마치고 짐을 챙겼다. 아까 디자이너가 급하게 조달한 가면과 의상을 짐가방에 챙겼다. 아리아 한 곡도 음낭에 담았다. 골목에 있는 밴에 올라서는 순간 야바는 눈살을 구겼다. 밴 안에 코카인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도 함께 오라고 했으니까.”
“세준이 형…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 안 할 거야?”
밴이 정체된 도로에 들어섰을 때 코카인이 말했다. 아직 고자들과 깡패들은 반푼이 정체를 모른다. 반푼이도 더는 떠벌리지 않았다. 야바는 되물었다.
“뭘 말하라는 건데? 반푼이한테 제발 내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해줘. 네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하잖아?”
코카인은 차 유리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을 뿌리치며 눈을 감았다. 얼마 뒤 차명환 자택에 도착했다. 가면을 쓰고 밴에서 내렸다. 2층 계단으로 올라가 차명환 방에 들어서는 찰나였다. 야바는 숨구멍이 오그라들었다. 널찍한 방에서 차이석이 벽에 진열된 LP판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숙소와 가게를 초토화시킨 주범 말이다. 평일에, 더군다나 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다. 얼마 전 차명환과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그 사이에 화해한 모양이다. 아마 저 세 치 혓바닥으로 멍청한 차명환을 조종했을 거다. 배다른 동생이 어떤 인간인지 짐작 못 하는 차명환이 이젠 처량하기까지 했다. 코카인도 예상 밖의 만남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차이석은 LP판을 들여다보았고 차명환 부인은 그런 시동생을 홀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이석 아파트에서 알짱거리는 걸 목격한 뒤 처음이었다. 차이석은 LP판을 꽂으며 창가에 있는 소파에 느릿느릿 앉았다.
“오랜만인데.”
그는 그제야 방문객에게 매끄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전혀 웃지 않는 눈이 목구멍을 짓눌렀다. 야바는 옭아매는 시선에서 벗어나 바닥을 노려보았다. 오늘에야말로 차명환에게 차이석의 본성을 까발리려 했는데 계획이 엇나가고 말았다. 차명환한테 올 걸 알고 선수 친 거다. 그 야비함과 용의주도함에 치가 떨렸다. 형수란 여자는 코카인 손을 붙들었다.
“기다렸어요. 코카인 씨. 저이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담낭은 물론 주변 장기에 암 수치가 많이 줄었대요! 전엔 체력이 안 돼서 불가능했는데 이대로만 간다면 항암치료도 가능할 거래요! 모두 코카인 씨 덕분이에요. 그렇죠? 도련님?”
차이석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명환이 말했다.
“수선 떨지 마. 호전은 일시적일 수도 있고 이런 적 한두 번도 아니니까.”
“하지만 암 수치가 이렇게 많이 떨어진 건 처음이잖아요.”
여자는 남편이 원망스러운 기색이다. 차명환은 코카인을 보았다.
“앞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와. 물론 너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야.”
코카인은 차이석을 바라보았다. 차이석은 다리를 꼰 채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느슨하게 풀린 눈은 잠깐 반짝거렸다가 금세 속내를 감췄다. 여자는 코카인에게 큰절이라도 올릴 기세였다.
“모두 코카인 씨가 오신 이후로 좋아진 거에요. 그동안 당신이 예민하게 굴고 안색도 나빠서 걱정했는데…황달도 예전보다 옅어졌고, 복수도 많이 빠졌잖아요. 코카인 씨,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사장님과 사모님이 저를 믿어주신 덕분이에요.”
코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명환은 힐러를 믿지 않아도 내심 희망을 거는 눈치다. 어차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코카인이었으니 상관없다. 여자는 간혹 야바를 힐끔거려도 경멸이 섞여 있었다. 야바는 코끝으로 웃었다. 이제야 둘을 불러들인 이유를 알았다. 코카인을 옆에 세워두고 자신을 깔아뭉개려는 수작이다. 이 모든 게 차이석 때문이다. 전부다! 전부다! 야바는 눈길을 돌리다가 흠칫했다. 언제부터인가 차이석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늘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자신의 목을 부러트리고 싶어 안달 난 듯했다. 모두의 신경이 코카인에게 몰린 사이 그는 속내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이렇게 목격자가 많은데 무슨 짓은 못하겠지 싶었다. 아니, 어쩌면 독심술로 이런 생각마저 꿰뚫고 있는지 모른다. 절대 당하지 않을 거다. 절대. 야바는 입술을 단단히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차명환은 부인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찬양은 나중에 하고 너는 나가 있어.”
“저도 오늘은 코카인 씨 노래 듣고 싶은데 안 될까요? 항상 밖에서만 어렴풋이 들어서 아쉬웠어요.”
“너 있으면 정신 사나워서 안 돼. 그리고 코카인 노래에 중독되면 폐인 꼴 된다는 소문도 못 들었어?”
여자는 풀죽은 걸음으로 나갔다. 차명환은 차이석을 곁눈질했다. 딴엔 너도 나가라는 눈치였지만 차이석은 이미 소파에 몸을 묻고 노래 들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차명환은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퀭한 눈을 야바에게 돌렸다.
“어제 왜 전화 안 받았어?”
“없었으니까 안 받았지.”
“폰은 어떻게 하고?”
“몰라. 어떻게 됐겠지.”
“하여간….” 차명환은 투덜대며 산소호흡기를 뗐다. 링거액 걸이 대를 질질 끌고 창가 소파로 걸어갔다. 차이석은 일어나 차명환이 앉을 소파를 창문 안쪽으로 당겨주었다. 끼끼긱─── 의자 끌리는 소리에 피부가 움츠러들었다.
“여기 앉으시죠. 햇볕이 잘 드는 자리니까요.”
차이석이 소파를 옮긴 자리는 지금 야바와 코카인이 노래한다면 소리의 중심축에서 벗어나는 위치였다.
“됐어. 그냥 여기가 편하다.”
차명환은 소파를 원래 자리로 끌어 왔다. 차이석은 순순히 물러나 소파에 앉았다. 가수들을 보며 턱 끝을 움직였다.
“너희들 왼쪽으로 좀 더 가지.”
“아, 네.”
코카인은 고분고분 옆으로 옮겼다. 야바가 꼼짝 않으니 옷을 잡아당겨 곁에 서게 했다. 차명환은 가자미 눈을 뜨고 차이석을 보았다. 차이석은 그려넣은 것 같은 미소를 보냈다. 차명환은 이내 포기하고 이쪽으로 고개 돌렸다.
“좋아. 일단 노래부터 해.”
차명환 눈에 황달 끼는 옅었지만 낯빛은 기괴할 만큼 조급해 보였다. 코카인 노래에 치유와 중독이 함께 오는 것이겠거니 싶었다. 코카인은 주먹을 입가에 대고 목을 풀었다. 야바는 불알 주머니에 담아 온 노래를 도로 집어넣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지만 불알 값을 모으려면 배알이 뒤집혀도 참아야 했다.
“화음 좀 넣어줄래?”
고개 돌려 코카인을 바라보았다. 그건 묻는 게 아니라 명령이었다. 야바는 입술을 끄집어 당겼다.
“왜? 화음 안 깔아주면 자신 없나 보지?”
코카인 볼은 쓰고 있는 가면보다 차가워졌다.
“지금 내가 할 노래는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편지의 이중창이야. 혼자 할 수 없는 노래인 거 알잖아.”
“아, 백작이 하녀 따먹으려고 흉계를 꾸미고, 백작 부인이 하녀와 합심해 남편 물 먹이는 이야기?”
야바는 어깨에 흘러내린 가면 리본을 손가락에 빙빙 감았다.
“당연히 하녀 수잔나는 나겠지. 백작 부인은 너고. 아니면 남편한테 버림받아 악만 남은 백작 부인이 나야? 너는 싱싱한 외모로 늙은 백작 부인을 비웃는 수잔나? 어느 쪽이야?”
“그렇게 해석하다니 재밌네. 이 아리아는 백작부인과 하녀라는 신분을 넘어 여자라는 공동 운명체를 묘사한 곡이야. 사람들 앞에서 백작의 음흉한 계략을 폭로하고 참회…….”
“그건 네 생각이고. 둘이 머리 맞댄다는 자체가 웃겨. 서로 머리채 쥐어뜯는 게 정상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여자로서…….”
“수잔나는 궁상맞은 피가로와 결혼하기보다 백작 부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을걸?”
“…….”
코카인은 말문을 닫고 말았다. 차이석은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관찰했다. 코카인은 입술을 깨물며 화를 눌렀다. 수잔나와 피가로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백작은 수잔나가 피가로와 결혼하기 전에 처녀를 빼앗으려 혈안 돼 있다. 그 사실을 안 백작 부인과 수잔나가 합심해서 백작을 유인해낼 편지를 쓴다. 그런데 서로 물고 뜯는 두 여자라니. 피가로와의 진정한 사랑보다 부와 권력에 군침 흘리는 수잔나라니. 야바의 머릿속을 해부하고플 만큼 황당무계한 해석이다. 그러나 손님이 보는 앞에서, 더욱이 차이석이 보는 앞에서 괜한 공박은 하기 싫었다.
“알았어. 그렇다 치자. 그럼 네가 백작 부인을 맡아. 내가 하녀 할게.”
비록 신분이 낮다지만 극 주인공은 수잔나다. 순애보 적이며 지혜로운 여자의 표본.
코카인은 심호흡하며 가슴을 펴고 곧게 섰다. 편지의 이중창은 백작부인이 불러주는 문구를 수잔나가 편지에 받아쓰며 한 구절씩 주고받는 돌림노래다. 쉬운 선율에 단순한 가사라도 한번 들으면 반하고 마는 명곡이다. 차이석의 존재도 야바의 해석도 의식하지 않으려 노랫말에 집중했다.
Sull'aria…….
산들바람에 노래를 실어…….
곧바로 따라와야 할 목소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곁눈질하니 야바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코카인은 다시 수잔나의 소절을 불렀다.
Sull'aria…….
산들바람에 노래를 실어…….
그러나 야바는 끈덕지게 앞만 보았다. 청중의 시선이 술렁거렸다. 진땀이 났다. 코카인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정확히 하고 싶은 게 뭔지 말해봐.”
“수잔나. 걔가 마음에 들어.”
가면 틈으로 야바의 눈동자에 독기가 예열을 시작했다. 멋대로 해석하고 완벽하게 몰입하는 야바가 섬뜩했다. 코카인은 이 노래가 단순한 이중창으로만 끝나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야바의 입술이 벌어졌다. 나른하게 혀를 튕겼다.
Sull'aria.
산들바람에 노래를 실어.
마치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음색이었다. 어디에도 융화되지 않는 목소리 빛깔은 코카인의 영역을 침범했다. 코카인은 시선을 벗겨 내고 음을 단단하게 모았다. 전장에 나가기 직전의 비장함이 차올랐다.
Che soave zeffiretto…….
포근한 산들바람이…….
zeffiretto.
아, 산들바람이.
그 뒤로 비스듬히 뉘어 낚아채는 수잔나의 소프라노가 뻗어 나왔다.
Questa sera spirera…….
오늘 저녁 부는구나…….
Questa sera spirera.
오늘 저녁 부는구나.
튕겨 오른 혓바닥이 바늘 같은 노랫말을 뱉어냈다. 발음도 엉망이고, 저렇게 목과 허리를 당기면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기 어렵다. 정석적인 호흡이나 발성법도 아니다. 그러나 고음과 저음의 이행이 매끄럽고 바이브레이션이 독특했다. 야바는 자신과 눈을 맞췄다. 조롱하는 눈빛이 신경줄을 당겼다. 코카인은 유연하게 그의 목소리를 따라잡았다.
Sotto i pini del boschetto…….
멋진 소나무 아래…….
Sotto i pini.
소나무 아래?
야바는 도톰한 입술을 휘며 노랫말을 되받아쳤다. 이런 걸로 네 남편을 유인할 수 있겠어? 좀 더 색다른 문구 없어? 남편이 달려오지 못할 만큼 자극적인 언어 말야.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야바의 곡 해석은 충격적이고 기괴했다. 하지만 그만큼 눈을 뗄 수 없었다. 야바는 뭇 남성들 한가운데를 거닐며 그들의 시선에 봉사하는 요부 같았다. 붉은 입술과 가면 아래 살짝 치켜뜬 눈동자는 시각까지 풍족하게 했다. 어둡고 공격적인 야바의 음색이 뻗어 나갔다. 실내 벽과 장식품, 그 안에 있는 차씨 형제의 몸을 질퍽하게 감싸고 먼지마저 엉겨붙는 점액이었다. 초조했다. 하마터면 가사를 씹을 뻔했다. 코카인은 야바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렇게 야바와 단둘만 입을 맞춘 건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뭔가 달라졌다. 마치, 방치됐던 악기가 누군가의 손에 좋은 울림을 찾은 것처럼…….
코카인은 저도 모르게 차이석을 바라보았다. 의식은 이미 다른 차원에 빨려간 듯 그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눈동자였다. 차이석은 가슴이 불룩할 만큼 숨을 들이켰다. 공기에 유영하는 목소리를 흡입하듯이, 내내 혀로 입술을 훔쳤다. 그 행동은 병적으로 보였다. 마치 머릿속에 약물로 범벅된 중독자처럼 말이다. 차명환은 입술을 벌린 채 넋 나간 얼굴이다. 언뜻언뜻 볼에 붉은빛이 떠올랐다. 차이석은 그런 차명환을 틈틈이 뱀 혓바닥 같은 눈으로 주시했다. 짐승의 이빨 같은 기운을 느낀 건지 차명환은 이복동생을 힐끔거렸다. 그들 시선의 영역 어디에도 코카인은 없었다. 시선을 되찾고 싶었다. 그는 목소리를 뾰족하게 치켜세우고 야바를 추격했다. 그러나 다시 따라붙은 야바의 음성이 저들의 오감을 감아올렸다. 암초에 부딪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의 에너지로 휩쓸어갔다. 코카인은 어느덧 뒷방에 물러난 백작 부인이 되었다. 남은 건 초라한 세월을 가려줄 보석과 옷뿐이며,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는 귀족 부인, 저 천박한 태생의 하녀를 짓밟고 싶다는 악의가 돋아났다. 함께 부르는 파트에서 두 사람의 화음이 날을 세워 서로를 공격했다.
certo, certo il capira
확실히 그럴 거야.
Canzonetta sull'aria…….
산들바람에 노래를 실어…….
Che soave zeffiretto.
산들바람이.
야바의 고음은 눈부실 정도로 깨끗했다. 노래가 절정을 향할수록 기분은 누더기가 되었다. 선곡한 것도, 도발하려 한 것도 자신이지만 정작 쫓기는 기분이 드는 건 자신이었다. 원래 호흡을 잃고 페이스에 말려버렸다. 더 절망적인 것은, 우정을 다지는 노래가 서로를 공격하는 이중창으로 변질됐지만 충분히 완벽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그 뒤 무슨 곡을 불렀는지 기억이 없다. 그저 자신은 노래를 쏟아부었고 야바는 자신의 소리 영역을 잠식시켰다. 준비한 노래를 모두 마쳤을 무렵 코카인은 온몸이 땀에 젖었다. 차이석은 다른 차원을 부유하고 온 눈동자였다. 차명환은 잔향에서 헤어나지 못해 오랫동안 멍했다. 야바는 뒤도 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차명환은 정신을 차리고 야바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마음대로 해석해서 불러대는 꼬락서니 하고는. 쟤는 대체 얼마짜리한테 레슨받은 거지?”
차명환은 뭐라 궁시렁대면서 야바를 쫓아갔다. 그러다 길목에 선 코카인에게 한마디 던졌다.
“역시 넌 밍숭밍숭해. 힐러라는 것 하나만 믿고 연습부족 아니야?”
계단을 내려오는 야바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차명환이 링거액 걸이 대를 끌며 힘겹게 쫓아왔다.
“왜 벌써 가? 너는 따로 준비한 노래 없어?”
야바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계속 쟤랑 같이 부를 거야?”
“오늘만이야. 같이 다니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그럼 걔만 불러. 난 같이 다니기 싫으니까.”
“왜? 니들 같은 집에서 산다면서? 아까 둘이 가관이더군. 손님 앞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
“같이 살면 사이 좋아야 돼? 그러는 너는 왜 부인하고 그 모양인데?”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사기꾼 상대하느라 시간 낭비 말고 가서 코카인 비위나 맞춰줘. 이제 네 목숨도 걔한테 달렸잖아?”
차명환은 미간을 구겼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좋아. 돌려 말할 필요 없이, 얼마면 되지?”
야바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너는 돈 빼면 시체지? 하긴, 돈 있어도 시체지만.”
“말조심해. 까부는 거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대체 어쩌라는 거야?”
“눈치 없으면 양심이라도 있어야지. 오늘 코카인과 나를 같이 불러다 놓고 물 먹이려는 거 모를 줄 알아?”
“함께 부른 건 와이프 짓이야. 그럼 겨우 그것 때문에 아까부터 표정을 구기고…….”
그는 말을 멈추더니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그리고 개구리 뒷다리 튀겨먹는 소릴 했다.
“너 혹시 질투하냐?”
“…….”
“그러니까 코카인을 부른 게 나라고 생각해서…….”
야바는 그를 멀거니 응시했다.
“너하고 나의 공통점은 답이 안 나온다는 거야. 다른 점은 부모 잘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고.”
“너도 부모 있었나?”
“그럼 나는 배추밭에서 뽑아왔겠냐?”
“하도 근본 없이 굴어서 몰랐다. 아무튼 너 폰은 진짜 어쨌어? 하나 사 줘?”
“필요 없어. 이럴 시간에 마누라 단속이나 잘해.”
더 상대할 기력도 없어 계단을 총총 내려갔다. 그가 자신의 팔을 붙들었다.
“알았어. 따로 부르면 되잖아. 내일 또 와.”
동시에 불러들인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코카인 면전에 대고 타박도 했고, 예쁜 짓 했으니까…….
“응.”
야바는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언제부터였는지 계단 끄트머리에서 차이석이 서 있는 것이다. 그 시선엔 위험한 빛이 꿈틀거렸다. 야바는 차명환 손을 걷어치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걸음이 바빠졌다. 부르는 소리도, 걸음 소리도 없었지만 밀도 높은 공기가 등 뒤를 휘갈기는 듯했다. 야바는 정면에 있는 대문만 보며 걸어갔다. 오늘따라 유독 멀기만 했다. 그때였다. 선덕한 손이 자신의 팔을 감아 돌렸다.
“여기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피부를 찢을 만큼 날을 세운 음성이었다. 야바는 무심결에 뒷걸음질쳤다. 이 손으로 자신의 목을 비틀어 분지를 거다. 야바는 그나마 자유로운 다리로 차이석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는 짧은 신음을 내며 허리를 구부렸다. 짐을 내던지고 대문 밖으로 달려갔다. 한쪽 다리를 다쳐서 속력이 나지 않았다. 안간힘을 다해 밴에 올라타고 문을 걸어 잠갔다.
“빨리! 출발해! 빨리!”
“왜 이래? 코카인은?”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게! 빨리 가! 빨리! 빨리!”
숨넘어가는 소리에 깡패는 어리둥절해했다. 그 순간 차이석이 대문 밖으로 나와 성큼성큼 걸어왔다. 툭툭. 그는 차 유리를 우아하게 두드렸지만 눈빛만은 털이 곤두설 만큼 이글거렸다.
“빨리 출발해! 나를 죽일 거야! 나를 죽이려고 온 거야!”
깡패는 얼결에 시동을 걸었다. 차가 속력을 높이자 차이석은 훌쩍 멀어졌다. 숨을 할딱이며 곁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코너를 돌 무렵 대문에서 나오는 코카인이 보였다. 그는 차이석 곁에 서서 떠나가는 밴을 황망하게 보았다. 돌덩이에 정수리를 찍힌 기분이었다. 차이석을 따돌려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코카인과 단둘만 남는 것까진 생각 못했다. 야바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멀어지는 그들을 보았다. 심장이 뜯기는 것 같았다.
이석은 사라지는 밴을 보며 물었다.
“저 녀석 왜 저러는지 설명 좀 해봐.”
“종잡을 수 없는 애니까요.”
코카인은 가면을 벗으며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리고 차이석을 응시했다.
“타고 갈 차가 없는데 어쩌죠?”
봄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옷차림은 한결 가벼웠다. 코카인은 조수석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시선을 움직였다. 차이석은 운전석에 몸을 늘어트린 채 불편한 침묵을 만들었다. 그는 뭔가에 화난 듯 보였다.
“그 손 어떻게 된 거에요? 전에 심하게 다쳤던 것 같은데.”
차이석은 그제야 시선을 주었다.
“네 솜씨 아닌가?”
차이석은 핸들에 올린 손을 앞뒤로 뒤집었다. 코카인은 깨끗해진 손에 할 말을 잃었다. 차이석이 손을 다치고 나서 자신의 노래를 들은 건 얼마 전 본가에서가 마지막이다. 그것도 노래가 끝날 무렵 잠깐 말이다. 코카인은 물었다.
“두통은 좀 어때요? 다른 증상은 없나요? 그러니까…불면증이 생겼다거나 이명이 들린다거나…….”
“힐러는 독심술도 하나 보군.”
그가 덧붙였다.
“두통이라기보다 귀가 아픈 느낌이야. 거기다 이명까지 가세했고.”
두통을 동반한 이명…. 차명환과 같은 증세다. 코카인은 무릎에 올린 가면을 그러쥐었다. 지금 차이석의 혈색은 전보다 나빠졌다. 초점도 흐리고 불안정해 보인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노래 듣는 걸 멈춰야 한다. 자꾸만 차이석의 손에 눈길이 갔다. 그가 말했다.
“이제 차명환도 너한테 무릎 꿇고 애원할 판이겠군.”
“그럼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군요.”
코카인은 말했다.
“어떻게 노래하느냐에 따라 힐링용과 감상용이 달라요. 힐러의 의도, 성량, 발성법, 음색. 소리의 흐름과 진폭에 따라 효과도 천차만별이죠. 상대방이 힐러의 노래를 철저히 거부하면 효과도 그만큼 현저히 떨어져요. 전무님이 제 노래를 그렇게 많이 들었어도 두통이 안 나으신 건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힐러를 연구하던 학자가 중간에 사망했고 저도 미완성 자료와 경험을 토대로 정리해본 것뿐이니까요.”
“한마디로 네 의지에 따라 힐링용이 감상용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거군.”
“네.”
“그럼 감상용으로 하면 되겠는데.”
“그럼 제게 뭘 해 주실 건데요?”
차이석이 입술을 위로 당겼다.
“뭘 원하지?”
“차명환 씨의 죽음이 전무님께 어떤 가치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이 일이 전무님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만큼만 전무님을 제게 할애하시면 돼요.”
“흠….”차이석은 팔 한쪽을 창틀에 세운 채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손가락 끝에 걸린 입술이 밀고 당기듯 묘한 미소를 그렸다. 평소 누구보다 사람 마음을 꿰고 있다고 자신하는데 저 사람만은 예외였다. 속을 알고 싶고 머릿속을 읽고 싶다. 오만함이 오기를 부추기든 화려한 외모에 홀렸든, 모든 걸 떠나 그는 어두운 감정을 끌어내고 담금질한다. 집요하게 붙는 시선이 피를 달구었다. 얼굴에 열이 몰렸다. 코카인은 손등으로 볼의 열기를 덜어갔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앞으로 제 노래만 들어주세요. 그럼 전무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
신호 받은 은빛 차가 정차했다. 차이석은 두 팔을 핸들에 올리고 체중을 실었다.
“네 목소리는 마음에 들어. 그 이름처럼 기분을 극상으로 이끌면서 뒤끝 없는 고급 마약답지. 그런데 너를 보면 왜 자꾸 차 회장이 생각날까? 수면 위에선 우아하지만, 발아래는 열심히 발길질하는 조류 새끼처럼. 나는 네게 부탁하는 게 아니야. 명령하는 거지.”
그는 눈을 내리며 나직이 말했다.
“차명환은 죽을 운명이야. 그 운명을 바꾸려는 사람은 누구라도 혼나. 너는 똑똑한 녀석이니 상상력도 뛰어나겠지.”
주문 같은 그 말이 온갖 잔혹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코카인은 한기로 뒤덮인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생긋 웃었다.
“그냥 제 노래를 듣기만 하시면 돼요. 그게 전무님을 위해서 좋을 겁니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빛의 방향에 따라 일그러졌다. 동료들 눈빛은 제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헤쉬쉬만이 자리를 지키지만 그가 원하는 걸 자신이 내주지 않으면 언젠가 동료들처럼 돌아서겠지. 그러니 막강한 힘이 필요한 것이다. 어떠한 상황이나 감정에도 지배당하지 않는 절대적인 힘이. 차이석을 가지면 저절로 따라오는 것들이다. 벌어진 상처를 헤집고 그 안에서 숨죽어 있던 씨앗이 뿌리를 뻗어 갔다. 그것이 향기로운 꽃일지 독초일지는 다 자라봐야 알 일이다.
“똘아이! 왜 이제야 왔냐?!”
야바가 맥없이 마당에 들어서자 모르핀이 쪼르르 달려왔다. 평소 차명환한테 불러주는 건 두 곡이 최대치였다. 코카인은 오늘 다섯 곡을 흐트러짐 없이 내리 불렀다. 그걸 따라가려니 목도 피로했고, 근육도 당겼다. 자신의 발성법이나 자세에 문제가 있는 걸까? 그러나 코카인과 노래를 불러댔던 것보다 차이석과 마주친 잠깐의 시간이 더 기를 빨아갔다. 모르핀은 팔에 달라붙어 징징거렸다.
“헤쉬쉬하고 헤로인은 아직 안 왔고, 집주인 형은 일하러 갔어. 필로폰은 종일 잠만 자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
야바는 성가신 것을 털어내고 마루에 가면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차명환 집에 가방을 두고 왔다. 외상으로 산 의상인데 몇 번 입지도 못하고 잃어버렸다. 물론 차이석 때문이다.
“참. 아까 차 전무 왔었다?”
이제 그 이름만 들어도 흠칫했다. 야바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언제?”
“너희들 출발하고 난 다음에. 너 찾길래 차명환한테 갔다고 알려줬지. 근데 차 전무가 어떻게 여기를 알아낸 거지?”
차이석은 오늘 아예 작심한 모양이다. 여기서 허탕치고 지름길로 가 차명환 집에 먼저 도착한 거겠지. 점점 발 디딜 곳이 없어졌다. 기하한테 따로 은신처를 마련해 달라고 해야겠다. 그럼 항불안제는 어쩌지? 야바는 입술을 깨물다가 모르핀 어깨를 잡았다.
“잘 들어. 앞으로 이석이나 수상한 사람이 나 어디있냐고 물으면 절대 말하지 마.”
“왜?”
“이번 숙소 습격 사건, 전부 이석이가 뒤에서 조정한 거야. 어쩌면 지금도 어디선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지 몰라.”
“지, 진짜? 알았어!”
모르핀은 숨을 들이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왜 너 혼자냐? 코카인은?”
지금쯤 차이석과 함께 있을 거다. 둘만 남기는 건 싫지만 차이석한테 목 졸려 세상 하직할 순 없다.
“개한테 목을 물어 뜯겨서 병원에 실려갔어. 알지? 기하가 키우던 개랑 같은 종.”
“지, 진짜야?! 코카인 많이 다쳤어?! 목을 얼마나 물어 뜯겼길래 병원엘…! 걘 자기 노래로 치유도 못 하는데 얼마나 아팠을까? 이럴 줄 알았다면 너무 차갑게 굴지 말걸……!”
길길이 날뛰던 모르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잠깐, 사장이 개를 키웠어? 언제? 한 번도 못 봤는데?”
“기하 키우던 개 몰라? 몇 년 전에 도끼가 잃어버려서 기하한테 죽사발 되도록 맞았잖아.”
모르핀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진짜 개소리를 해라. 개소리를 해. 도끼 형님이 사장 밑에 들어온 게 반년도 안 됐어. 너 코카인 얘기도 뻥이지?”
“너야말로 무슨 헛소리야? 기하가 키웠던 개 몰라?”
“귀찮은 거 질색하는 사장이 잘도 개새끼를 돌봤겠다.”
“그래서 도끼한테 맡겼다잖아.”
“도끼 형님 사장 밑에 온 게 반년밖에 안 됐다니까! 아, 됐고! 그럼 개 종이 뭔데? 어떻게 생겼어?”
“…….”
저렇게 물으니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그치니까 기억력이 흐려진 거다. 기하에게 개가 없었다니, 모르핀이야말로 전 재산을 잃어 정신 줄까지 날아간 거다. 야바는 입을 꽉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모르핀은 비웃음을 삼키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아, 알았어. 키웠다고 쳐! 키웠다고 칠 테니까 표정 좀 풀어! 무서워 죽겠잖아!”
어? 어? 모르핀은 어딘가를 보며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데려다 주셨는데 차 한잔 하고 가실래요?”
대문으로 코카인이 들어왔다. 뒤를 이어 좁고 후진 집에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 따라왔다. 차이석이었다. 상상도 못한 기습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차이석은 야바를 발견하고 우뚝 섰다. 느슨하던 눈동자가 사냥 직전의 짐승처럼 번뜩였다. 그가 마당을 저벅저벅 걸어왔다. 야바는 소스라치며 아무 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잠갔다. 방에는 필로폰이 잠자고 있었다. 문이 열리지 않도록 체중을 싣는데 손잡이가 달그락거렸다. 머리털이 쭈뼛했다. 바닥까지 긁는 음성이 문을 관통했다.
“나와.”
“……싫어.”
“나오라고 했어.”
“싫어.”
야바는 손에 쥐나도록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두고도 생생한 살기가 느껴졌다. 간담이 서늘했다. 어느 순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퇴각했다. 갑작스런 고요가 불안했다. 귀를 문에 대고 신경을 곧추세웠을 때였다.
콰앙───! 쾅────!
집 전체가 뒤흔들릴 만큼 무시무시한 굉음이었다.
“으악……! 뭐, 뭐야?!”
필로폰이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몇 번의 거친 공격으로 합판 문이 우지직거리며 균열이 갔다. 방안은 나무 조각과 파열음으로 초토화됐다. 박살 난 문짝이 나가떨어지자 차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내려친 흉기였는지 차이석은 팔꿈치를 쥔 채 접었다 펴고는 무례하게 난입했다. 야바는 방 모서리로 달아나 몸을 움츠렸다. 너무나 놀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마냥 앙칼지게 보는 게 최선의 공격이었다. 코앞에 바짝 다가온 그가 입술을 휘었다.
“무서웠어? 자, 이제 나와야지.”
달콤한 목소리지만, 피가 꼭대기까지 역류한 눈이었다. 야바는 그를 밀치고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뒤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코롱향기가 등을 덮었다. 그는 육중한 자신을 단번에 들춰 매고 마루 아래로 내려섰다. 마당에 서 있던 코카인과 시선이 부대꼈다. 차갑게 독오른 그 눈동자는 낯설었고 또 낯익기도 했다. 증오와 질투로 뒤범벅된 자의 눈, 바닥까지 추락을 맛본 자의 눈……. 아무래도 상관없다. 야바는 차이석의 등을 두드려패고 소리 질렀다.
“놔! 내려놔! 살려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에게 내미는 손길은 없었다. 모두 골칫덩이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린 양 방관했다. 모르핀은 한술 더 떠 대문까지 열어주었다. 만약 하늘이 도와 살아 돌아온다면, 아니 사지만 온전히 붙어 있다면 저들의 배를 칼로 찔러버릴 거다. 차이석은 발버둥치는 자신의 입술을 막고 몸을 옥죄었다. 뒤에서 칼을 꺼내 목 따기 좋은 자세였다. 간담이 싸해져 어깨를 움츠렸다. 그 순간 입속에 차이석의 손가락이 불쑥 들어왔다. 그가 귓가에 젖은 입술을 붙였다.
“얌전히 있으면 하나 더 줄게.”
손가락이 빠져나간 혓바닥에는 작고 동글한 것이 남겨 있었다. 이 맛과 질감은 항우울제였다. 야바는 허겁지겁 알약을 먹었다. 몸부림이 진정되자 차이석은 한결 수월한 걸음으로 자신을 차에 쑤셔 넣었다. 지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항우울제 때문에 천국을 떠다니는 기분이기도 했다. 차이석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유연하게 핸들을 돌렸다. 그때 맞은편 담벼락을 따라 반푼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반푼이는 차 안에서 구겨진 자신을 발견하고 양손에 든 봉투를 내던지더니 차를 쫓았다. 후진한 은빛 차가 빠르게 머리를 틀어 골목을 빠져나갔다. 멀어진 세준이 사이드미러에 침범했다. 강아지처럼 울먹이는 얼굴이 눈 속을 헤집었다. 어느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뭉개진 듯 기이하게 이지러졌다. 어쩐지 한기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