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25화 (25/42)

힐러-track 23

[……다른 사람에 비해 부상이 심하진 않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거처에 모셔다 드리려 했는데 반항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무님이 보냈다고 해도 믿지 않고, 아니, 오히려 더 경계하더군요. 아무튼 일행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고양이 감시자는 지친 음성이었다. 이석은 눈썹을 좁혔다.

“피신한 곳은 어딥니까?”

[숙소 근처 단독 주택입니다. 젊은 남자 혼자 사는 것 같던데 그 남자가 숙소에서 불이 나자 달려들어 가더군요. 일단 가수들과 부상당한 깡패들 모두 그 집으로 갔습니다.]

“누구인지 알아보고 계속 지켜봐요.”

[안 그래도 그 말씀 드리려던 참입니다. 아깐 급한 마음에 신분을 밝혔고 얼굴까지 노출돼서 당분간 미행은 어렵겠습니다. 아예 다른 사람을 붙이시던가, 얼마간 미행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생각해 보죠.”

고양이 감시자는 보고를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감시자에게 수상한 기운이 돈다는 보고를 들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어깨들을 지원사격 보내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됐다. 급하게나마 감시자가 녀석을 건져낸 것이다. 이번 일은 더 볼 것 없이 차 회장의 깜짝 이벤트다.

“달려갈 줄 알았는데 의외다.”

껄렁한 목소리에 이석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커다란 창문 안으로 성재가 비쳐들었다. 그는 홈바에 놓인 머그잔에 커피를 따르는 중이다. 새로운 숙소는 이석의 아파트 위층이다. 브레인들은 이삿짐 풀기가 무섭게 방안에서 회의 중이다. 이석은 한쪽 입술에 미소를 걸었다.

“이번 일은 차 회장이 파라디소에 대한 징벌이지만 내게 간을 보는 것도 있을 거야. 순순히 넘어갈 순 없지.”

“너한테?”

“내가 기자회견장에서 빠져나왔던 날, 야바는 내 아파트로 달려왔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있다 갔어. 그전부터 내게 미행자가 붙었으니 그것 말고 더 많은 걸 봤겠지. 모두 차 회장 귀에 들어갔을 거고.”

성재가 마지막 잔에 커피를 따르며 말했다.

“하긴, 너는 밖에서 온갖 난잡한 짓을 해도 집안에는 안 들이니까.”

야바를 단순한 사기꾼으로 생각하기엔 그간 자신의 행동이 미심쩍었을 것이다. 늙은이는 아직도 차명환 일에 대해 자신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이번 사태는 파라디소에 대한 보복이며 늙은이가 그어놓은 마지노선에서 자신이 넘어서는지 넘어서지 않는지를 시험한 것과 다름없다.

“애들 기다리니까 적당히 하고 와라. 참, 세간살이가 영 부실하다. 호텔에서야 다 갖춰져서 편했는데, 그릇부터 이불, 냄비까지 살 게 한둘 아니야.”

성재는 머그잔 6개를 양손에 나눠 쥐고 회의 방으로 걸어갔다.

“너한테 전부 걸었다는 거 잊지 마라.”

느닷없는 말에 성재에게 시선을 향했다. 성재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너 요즘 위태위태해서 말야.”

“원한다면 언제든지 배를 갈아타. 손수건 정도는 흔들어 줄 테니.”

“반대 손에는 내가 탄 배를 난파시킬 폭탄을 들고 있겠지?”

이석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성재는 웃지 않았다.

“이번 일 틀어지면 우리 아버지, 나, 전부 골로 가는 거다. 브레인들도 이번 일에 인생을 걸었어. 그 바닥에서 잘 나가는 애들 꼬드겨 중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만든 건 너란 거 잊지 마라. 내가 왜 너한테 올인했는 줄 아냐?”

성재는 덧붙였다.

“넌 한번 스타트 끊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완주하고 가장 먼저 피니쉬라인을 밟으니까. 앞길에 방해되면 가족이고 친구고 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인정사정 안 봐주지. 마치 명예 회장님처럼. 처음엔 뭐 이런 자식이 다 있나 했는데 말야. 생각해 보니까 나 역시 너를 버려야 할 때가 오면 미안할 필요 없겠다 싶어서 오히려 고맙더라고.”

이석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담배를 물었다.

“우리 사이에 고맙기는.”

시뻘건 담뱃불이 성재 눈알을 겨냥했다. 성재는 묵직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회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석은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애간장이 탄 애송이 같다. 고양이에게 달려가고 싶어 환장할 것 같은……. 차 회장이 이 얼굴을 본다면 승자의 여유를 누리며 자신을 마음껏 휘두르겠지. 자신은 뻔히 알면서도 휘둘리겠지. 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도시야경 위로 울음소리 같은 담배 연기가 흔들렸다.

“크윽…! 빠, 빨리…! 내 차롄 언제야?! 빨리해 줘!”

부상자들이 머문 곳은 숙소에서 가까운 단독 주택이었다. 허름한 주택엔 작은 마당이 딸렸고, 방 두 개, 마루도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풀지 않은 이삿짐이 쌓였다.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신음이 집을 가득 채웠다. 모두 중상이지만 기적의 노래가 있기에 구급차를 극구 거부했고, 기하의 똘마니들은 심각한 사람만 남기고 모두 구급차에 올라탔다. 기하는 조사 나온 형사에게 가수 중 하나가 실수로 화재사고를 냈다고 둘러댔다. 기하 역시 거동이 힘들 만큼 중상이었는데 코카인의 힐링을 받고 곧장 가게로 달려갔다. 온몸에 그을음 묻은 고자들은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잃어 넋을 뺐다. 코뼈와 이마가 망가진 헤쉬쉬, 눈 아래가 찢어져 피범벅인 모르핀, 팔다리가 골절된 헤로인, 화상 입고 울부짖는 똘마니들…. 코카인은 고통에 버무려진 중생을 구원하려고 쉴 틈 없이 노래 불렀다. 힐링 받은 깡패들은 마당에 모여앉아 울분을 터트렸다.

“연합파 새끼들! 왜 갑자기 우릴 치느냐고?! 도끼, 너 자세히 아는 거 없냐?”

“나도 몰라. 그동안 사장님이 주의하라고만 하셨지 자세한 내막은 말씀 안 하셨으니까.”

야바는 마루 한켠에 앉아 있었다. 이빨이 약간 흔들렸고 무릎과 어깻죽지가 욱씬거리는 것 외에 어디가 부러지진 않은 듯했다. 깡패들에게 붙들려가 병원에서 치료받고 왔다. 병원은 질색이다. 이 늦은 시간에 응급실에 가봐야 의사는 졸며 수술하다가 메스를 넣고 봉합해 버릴 거다. 숙소 불이 진화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똥색 점퍼들은 사라졌다. 그들은 차이석이 보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이 따라가선 안 된다. 똥색 점퍼들은 자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야산에 파묻었을 것이다. 잠시나마 꼬임에 넘어갈 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하는 숙소 습격 사건을 차 회장 짓이라 했지만 야바는 진범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차이석이다. 자신의 가족까지 들먹이며 회유와 협박을 해도 먹히지 않으니 이 방법을 선택한 거다. 차이석은 사람들이 이번 사건의 주범이 차 회장이라 단정하는 것까지도 계산했을 터였다. 차명환에게 노래 불러주는 일만 방해하지 않으면 봐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진짜 가만있지 않을 거다. 차이석에게 당장 전화해서 따져 묻고 싶은데 휴대폰은 불타버렸다. 책도, 독극물도, 항우울제도 모두 재가 되었다. 야바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마룻바닥을 노려보았다.

무릎에 감긴 붕대 위에 벌레들이 돌아다녔다. 손톱으로 벌레를 똑똑 터트리자 내장을 드러냈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내려와 자신의 손을 무릎에서 떼어냈다. 동시에 커다란 남자가 다리를 굽히며 내려앉았다. 시선이 이마를 짓눌렀다. 사고도 몸도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야바 무릎의 흐트러진 붕대를 정리했다. 아이처럼 어설픈 손놀림은 숨길 수 없을 만치 떨고 있었다. 야바는 간신히 주박을 풀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그가 다시 자신을 주저앉히자 의도치 않게 보고 말았다. 엄마와 아빠의 장점만 섞어 놓은 이목구비를…….

“다쳤잖아요…….”

어떤 결점도 없는 눈망울에 야바가 비쳤다. 굴절된 제 모습은 유리구슬에 난 균열 같다.

“다리… 다쳤잖아요.”

그는 더 많은 말을 쏟아낼 듯이 입술을 떨었다. 그를 향한 자신의 시선엔 온기 하나 없이 차가웠다. 모르는 척하려 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건 중학생 때였다. 그간 자신은 살도 쪘고 얼굴은 벌레에게 뜯어 먹혀 예전 모습은 찾기 어려울 거다. 그런데 그는 똑똑히 기억하는 눈이었다. 세준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상상 안 했지만 반푼이와 고자가 만나 감격 따윈 없단 건 분명했다. 그때 작은 방에서 고음역의 아리아가 퍼져 나왔다. 야바에게 박혔던 눈길은 망설임 없이 방으로 향했다. 그는 순식간에 코카인의 세계로 빠져들어 입술이 벌어지고 눈이 풀렸다. 코카인의 비명에 머리가 터져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죽었어야 했다.

“가서 노래나 실컷 들어. 병신아.”

10년 만에 재회하고 처음으로 하는 말이다. 야바는 절뚝거리며 마루에서 내려갔다.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대문 밖으로 나가려는데 깡패가 눈알을 부라리며 막아섰다. 답답했다. 저 반푼이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깡패들은 끝내 길을 내주지 않았다. 야바는 하는 수없이 대문가 찬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일쯤 차명환이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노래연습이라도 하고 싶었다. 한때 노래에서 도망치려 했던 자신이 이젠 노래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게 낯설었다. 코카인 노래가 잠시 그치자 세준은 마루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는 마당에 쌓인 이삿짐에서 상자를 꺼내 바닥에 깔더니 그 위에 야바를 앉혔다. 그리고 조용히 대문 밖으로 나갔다. 겨울 막바지에서 바람이 불어와 체온을 휩쓸어갔다. 열린 문으로 땀을 닦는 코카인이 보였다. 광대뼈가 함몰되고, 온몸에 화상을 입어 혼수상태였던 깡패는 아름다운 아리아로 서서히 새살을 얻었다. 코카인은 부상자들에게 잡혀 몇 시간째 노래만 불러제꼈다. 미리 힐링 받은 헤쉬쉬는 코카인을 일으켰다.

“안 되겠다. 너부터 치료해야겠어. 일어나.”

“좆 같은 새끼가! 가긴 어딜 가? 애들 고쳐주기 전에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깡패들은 벌떡 일어나 가로막았다. 헤쉬쉬가 말했다.

“애 힘들어하는 거 안 보입니까?! 밤새 한숨 못 자고 꼬박 노래만 불렀습니다. 우선 코카인부터 치료받고 올 테니 조금만 참으란 말입니다.”

“코카인 저 새끼, 다친 거라고 해봐야 사장님한테 몇 대 맞은 게 전부 아냐? 저 새끼가 비명만 질렀어도 우리가 이 지경까진 안 됐어!”

코카인 입술이 굳었다. 헤쉬쉬는 싸늘하게 웃었다.

“코카인이 비명을 질렀다면 다들 무사할 것 같습니까? 그럼 단순한 방화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을 텐데요.”

“그래서 귀 막고 있었잖아! 용역 새끼들은 그걸 모르니까 한방에 처리할 수 있었어!”

“애가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으면 목소리도 못 냈겠습니까. 비키시죠.”

헤쉬쉬는 아랑곳없이 코카인을 방에서 끌고 나왔다. 헤로인과 모르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모르핀은 피로 범벅된 낯을 감싼 채 끙끙거렸다.

“어, 어디가? 우리는 고쳐주고 가야지!”

“비켜! 이런 상황에도 니들은 자기 생각뿐이냐?”

“너 같으면 이 마당에 남 생각 하겠냐? 저 형님 말씀 틀린 거 하나 없어! 까놓고 말해서 우리 머리에 칩 박힌 것도 다 누구 때문인데……. 그, 그렇지?”

모르핀은 헤로인에게 동의를 구했다. 헤로인은 난감한 기색이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다리가 부러진 상태라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헤쉬쉬는 헛웃음 쳤다.

“그게 니들 본심이었냐? 칩은 사장이 코카인을 제어하려는 것도 있지만 애들 탈출 막으려는 것도 있었어. 니들 아쉬울 땐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고작 이런 일로 안면 몰수해?”

“고작 이런 일? 우리 전부 죽을 뻔했어! 어쨌거나 코카인이 나섰으면 이 지경까지 안 됐을 거잖아!”

“너 이 새끼들……!”

헤쉬쉬가 목에 핏대 세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좆 같은 고자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깡패 하나가 헤쉬쉬를 마당에 내던졌다.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 깡패들은 모조리 덤벼들어 헤쉬쉬 머리통을 짓밟고, 배를 걷어찼다. 헤쉬쉬도 눈이 뒤집혀 발악했으나 싸움판에서 다져진 깡패에겐 상대가 안 됐다. 무차별적인 발길질에 헤쉬쉬는 몸을 말았다.

“그만해───! 모두 그만 좀 해────!”

코카인의 비명에 방문과 창유리가 요동쳤다. 발광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부동자세가 됐다. 고요해진 내부에 잔동이 울렸다. 코카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나를 그렇게들 생각하는 줄 몰랐어……. 이제 알았어.”

깡패들과 고자 가수들은 떨떠름한 안색이다. 코카인의 시선이 야바에게 종착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나보다 야바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너 때문에 이 꼴을 당했는데 내가 왜 모든 원망을 들어야 하지?

그 눈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도 이번 일을 차 회장 소행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야바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웃음을 머금었다.

“왜냐하면, 너는 신이니까. 아둔한 인간들이 부당한 비난의 화살을 돌려도 모든 걸 감내해야 하는 고결한 존재니까.”

코카인은 일방적으로 추앙받는 걸 당연하게만 여겼지만, 그 대가도 치러야 한다는 걸 몰랐던 거다. 치유와 살상이란 두 얼굴의 목소리가 성역의 존재가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맹목적으로 떠받들던 신에게 보호받지 못 했으니 나약한 인간들이 동요하는 건 당연했다. 모르핀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거기서 똘아이가 왜 나오냐? 아무리 너한테 몹쓸 짓을 많이 했다지만 이런 것까지 뒤집어씌우는 건 진짜 아니지 않냐?!”

코카인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는 대꾸없이 마당에 구겨진 헤쉬쉬를 부축했다.

“그 새끼 고쳐주면 너부터 죽을 줄 알아!”

“그럼 누구한테도 노래해 주지 않을 겁니다.”

“이 새끼가!”

깡패가 코카인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다른 똘마니가 만류했다.

“형님! 진정하십시오. 그러다 진짜 저 새끼 눈 뒤집혀서 비명이라도 지르면…….”

“씨발……!”

깡패는 이를 벅벅 갈며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코카인은 헤쉬쉬를 방에 들여 힐링을 시작했다.

“아까 진작에 저렇게 비명 지를 것이지.”

모르핀은 중얼거리며 피가 흐르는 눈가에 휴지를 눌렀다. 깡패들에게 힐링을 마치고 모르핀과 헤로인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얼마 후 세준이 가쁜 숨을 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양손에는 봉투가 한가득이었다. 그는 한눈 팔지 않고 코카인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코카인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문앞에 멈춘 채 아름다운 음색을 경청했다. 노래가 끝나자 세준은 방에 들어가 코카인에게 빵과 우유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코카인은 지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준은 코카인 안색을 살피다가 그 곁에 히터를 놓았고, 웃풍이 들지 않게 아귀 안 맞는 문을 몇 번이나 닫아 맸다. 그런데 이상했다. 저렇게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도 헤쉬쉬처럼 코카인을 적극적으로 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헤쉬쉬는 세준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았다. 그를 제치고 세준이 제일 먼저 힐링 받았기 때문이다. 세준은 헤쉬쉬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고 방에서 나왔다. 길쭉한 다리는 딴 데로 새지 않고 마당에 쭈그려 앉은 야바에게 다가왔다. 야바 코앞에 빵과 우유를 내밀었다. 눈길도 주지 않자 세준은 빵 비닐을 절반쯤 뜯고, 우유 주둥이를 벌려 야바가 앉은 상자 옆에 올렸다. 그는 다시금 발길을 돌려 남은 가수들과 깡패들에게 무작위로 빵을 주는 기이한 행동을 했다. 헤쉬쉬는 세준이 내민 빵을 받지도 않고 살벌한 눈빛을 고수했다.

“여긴 언제 이사 왔습니까?”

세준은 책을 읽듯 이상한 억양으로 대답했다.

“…어제, 오후 1시 45분에요. 1시 30분 안에 오려고 했는데 길이 막혀…….”

“숙소엔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자려고 누웠는데 연기가 났어요. 그래서…….”

“왜 이 동네로 왔죠?”

“……여기가 좋아서요…….”

“왜 갑자기 이 동네가 좋아졌느냔 말입니다.”

“…그냥… 좋아서요.” 세준은 쏟아지는 질문이 벅찬 듯 우물거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르핀이 야바에게 다가왔다.

“헤쉬쉬 저거 완전 개 싸가지잖아. 집 내주고 빵까지 사다 주는데 고마워는 못 할망정, 하여간 이럴 때 인간성 나온다니까?”

“…….”

“여기 집주인 말야. 내가 잘생긴 남자가 이사 왔다고 했지? 바로 저 사람이야! 가까이서 보니까 어지간한 탤런트 뺨치네. 그 깡패들이 판치는 전쟁터에도 들어오고 잠자리에 먹을 것까지…요즘 보기 드물게 정의감 넘치는 청년이란 말야. 코카인하고 아는 사이 같던데 똘아이 혹시 아는 거 있냐?”

“없어.”

흔쾌히 집을 내주고, 빵과 우유를 사다 바치는 이유가 코카인 때문이라는 걸 알 턱 없는 그들은 반푼이를 마냥 속 좋은 이웃이라고만 생각했다. 야바는 엉덩이께 놓인 빵과 우유를 내던져버렸다. 무릎을 끌어안고 퀭한 눈으로 시멘트 바닥만 보았다. “성질머리하곤.” 모르핀은 혀를 찼다. 그는 명품 사려고 모아놓은 돈을 하루아침에 날려 절망에 빠졌지만 코카인의 노래로 어느 정도 위안을 얻은 듯했다. 모르핀은 야바의 무릎과 까진 팔뚝을 보았다.

“이 정도면 코카인 노래로 금세 나을 텐데……. 아니, 왜 너한텐 안 먹히는 거지?”

어릴 적 코카인에게 무릎을 치료받은 적이 있었다. 그땐 분명 힐링이 효과가 있었는데 왜 지금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을까? 신체 손상은 힐링 받는 사람의 의지와 크게 관계없다고 들었다. 만약 단 1%도 치유되길 원하지 않거나, 힐링을 극도로 거부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건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며, 밑바닥에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깔렸다고 했다. 결국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힐링은 만인에게 통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정말로 코카인의 힐링을 완전무결하게 거부하는 것일까.

“아씨…. 우리 이제 어디서 사냐? 사장은 가게 때문에 여기 신경 쓸 여유도 없을 거고, 아까 얘기 들어보니까 가게도 개판이라던데! 우리 이제 어떡하냐!”

모르핀이 땅을 치며 하소연할 때였다.

“여기서…살아요…….”

목소리 주인에게 시선이 몰렸다. 너무나 고요한 눈이어서 그가 말한 장본인인지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시 알려주듯 세준이 말했다.

“집 구할 때까지 여기에서 살아도 돼요…….”

야바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헤쉬쉬는 미간을 잔뜩 구겼고, 코카인 또한 놀란 눈치였다. 모르핀은 등잔만 해진 눈으로 물었다.

“지, 진짜요? 그럼, 여기서 신세 좀 져도 될까요? 방 두 개니까 하나는 형이 쓰고 나머진 우리가 쓰면 되잖아요.”

“난 아무 데나 자도 괜찮아요. 여기 오기 전에도 하늘 보면서, 별 보면서 잔 적 많았어요.”

세준이 대답했다. “야.” 헤로인이 눈알에 힘 주자 모르핀은 되레 큰소리였다.

“거참! 사람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헤로인은 모르핀을 노려보다가 세준에게 말했다.

“오늘도 이렇게 신세 졌는데 과분합니다. 새로운 숙소를 언제 구할지도 모르고, 저희 책임자도 허락 안 할 겁니다.”

세준은 마당과 방을 차지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눌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전부 채우 노래 들었잖아요. 그럼 모두 하나잖아요…….”

“……하, 하나요?”

풋. 모르핀은 입을 가리며 터지는 웃음을 참았다. 헤로인도 말려 올라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준은 고집스럽게 진지했다.

“그리고 세진이 친구잖아요…….”

모르핀은 어리둥절한 낯빛이다.

“채우는 코카인인 거 아는데, 세진이? 그게 누군데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세준의 눈길이 야바에게 당도했다. 그가 닫아 맨 입술을 벌렸다.

“세진이는 내 동ㅅ…….”

“입 다물어.”

누가 네 동생이야? 누가?!

야바는 가시 세운 눈초리로 세준을 노려보았다.

“입 다물어. 아무 소리도 하지 마.”

절절 끓는 분노로 눈앞이 흐릿했다. 바둑알처럼 까만 세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처입은 눈빛이 구역질 났다. 먼발치에서 복잡한 얼굴의 코카인이 보였다. 야바는 고개 돌리며 그 모든 걸 단절했다. 똥오줌도 못 가려 기저귀에 의지했던 그가 저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변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는 밀폐됐던 세계를 깨고 나왔지만 야바는 그날에 갇혀버렸다. 이름을 잃었고, 남성을 잃었고, 노래를 잃었고, 형을 잃었다. 그건 야바의 모든 것이었다. 방 한 칸과 빵 쪼가리로 엄청난 상실을 메울 수 없다. 그럼 비참했던 과거가 너무 억울하다. 세준은 묵묵하게 야바를 응시했다. 그러나 새까만 눈동자는 단호했다.

이석은 차 회장 호출을 받고 사무실을 나섰다. 회장실로 들어가 한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미리 도착한 이사진이 둥그런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차 회장은 종종 이사진을 호출해 함께 식사한다. 오늘은 우성랜드 임 회장도 보였다. 이석은 차 회장 옆에 앉았다.

“늦었습니다.”

차 회장이 말했다.

“요즘 홍콩계 펀드가 태령 주식을 모은다는 소문은 너도 들었겠지.”

“그런가요? 저야 그쪽으론 아는 게 없어서요.”

“외국인 투자가 중 국적은 외국계지만 그걸 운용하는 사람은 국내 사정에 밝은 한국인일 거다. 놈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올지 다방면으로 예상 중이다만, 홍콩계 펀드의 정체가 뚜렷하지 않아 정확한 정보는 얻기 힘들다. 그런데 홍콩 펀드가 사들인 태령 지분이 벌써 4%를 넘어섰다더군.”

“오, 그렇게 많이요? 돈깨나 갖다 부었겠군요.”

이석은 짐짓 놀라운 목소리로 물었다. 차 회장은 주름진 눈가를 떨었다.

“그게 무슨 뜻인 줄 알긴 아느냐? 5%를 채우면 홍콩계 펀드가 주총을 소집할 수 있는 건 물론 경영진까지 갈아치울 권한을 쥔다는 의미다. 첫 번째 타깃은 명환이가 될지 모른다. 아무리 너라도 그다음 일은 어떻게 될지 짐작하겠지.”

“그쪽에서 세게 나온다 해도 한 이사님과 임 회장님이 계시는데 순순히 당하겠습니까?”

한 이사와 임 회장의 안면이 굳었다가 이내 풀어졌다.

“허허…! 차 전무 말이 맞습니다. 저희는 물론 이사진 모두 일심단결해서 태령을 지킬 겁니다. 그런 근본 모를 놈들에게 쉽게 당할 태령이 아니지요. 그러니 회장님, 오랜만에 함께 한 자리인데 골치 아픈 일 얘기는 잠시만 접어두시고…….”

임 회장은 불과 얼마 전까지 강간 플레이에 흠뻑 빠진 사람답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남자 비서들이 들어와 샐러드와 스프를 놓았다. 차 회장은 붉은 냅킨을 무릎에 얹었다. 간결하고 정확한 동작에 비해 저 머릿속은 온갖 생각이 뒤섞였을 것이다. 늙은이가 생각하는 차기 총수 자리에 자신은 없다. 차명환이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면 친족 중 하나를 그 자리에 앉힐 거다. 그가 그린 태령의 미래도에서 한치도 어긋남 없이 고분고분 따라줄 충견으로 말이다.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전문 CEO를 물색할 것이다. 차 회장은 크리스털 잔을 들며 지나가듯 물었다.

“어젯밤엔 어디에 있었지? 저녁에 명환이한테 찾아갔다던데 함께 있으면서 말동무나 해주지 않고. 정밀 검사 나오기 전까지는 예민한 거 알잖느냐.”

파라디소 습격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신을 떠보는 관찰자의 시선이다. 이 정도 미끼는 물어줄 의향이 있다. 이석은 물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집에 있었다는 거 아시면서 뭘 물으십니까. 그나저나 형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겠던데요?”

차 회장의 눈길이 향하자 이석은 말을 이었다.

“형님은 순진하게도 회장님이 파라디소 건을 그냥 넘어갔다고 믿던데 말이죠.”

차 회장은 몸을 곧게 펴며 깍지를 꼈다.

“개한테 사람의 말로 대화를 시도하면 안 되지. 놈들 수준에 걸맞는 대화였다.”

한순간 차 회장의 눈이 안광을 내뿜었다.

“그런데 그 소식은 어떻게 알았느냐?”

“그런 대형사고를 뉴스에서 놓칠 리 없잖습니까.”

“경찰과 언론 쪽은 미리 막아뒀다.”

“어디선가 샜겠죠.”

차 회장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주시했다. 이석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걱정마세요. 형님께는 안 일러바칠 테니까요.”

이석은 차 회장과 점심을 마치고 차를 몰았다. 정체된 도로는 진행이 더뎠다. 이석은 귀에 갖다 댄 폰을 내리며 침음을 냈다. 아까부터 야바에게 통화를 시도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담배를 집어물고 불을 붙였다.

노래하고 싶어. 노래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던 젖은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녀석이 있는 곳으로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뒤에서 느리게 따라오는 차들이 백미러 안에 비쳤다. 그는 담배 필터를 질겅거리며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여기저기서 경적소리가 울렸으나 무시하고 뒤쪽에 줄 서 있는 검정색 소나타로 걸어갔다. 소나타 차 문을 열어 사내를 끌어내자 딸려나온 사내는 당혹스러운 낯빛이다. 이석은 남자 팔을 뒤로 비틀고 본네트 위에 머리통을 짓이겼다. 남자의 손가락 관절을 꺾자 뼈 부러지는 울림이 손끝에 전해졌다. 남자는 몸부림쳤다.

“크윽…! 아악…! 큭, 뭐, 뭡니까? 다, 당신……!”

“우리 사이에 따로 소개가 필요하나?”

이석은 남자의 바지를 뒤져 폰을 꺼냈다. 첫 번째 목록에는 차 회장 번호가 있었다. 직통 번호까지 알려주다니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다. 통화를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얼마 후 늙은이 목소리가 들렸다.

[낮엔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나.]

“이렇게 제 일거수일투족에 관심 가질 만큼 부정 넘치는 분인 줄 몰랐군요.”

[…….]

늙은이는 당황했는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석은 입술을 끄집어 당겼다. 바르작 대는 팔을 포악하게 꺾자 남자는 목을 젖히며 절규했다.

“이 남자 토막 나서 회장실로 배달되는 꼴 보기 싫으면 치워요. 아, 개는 개의 언어로 대화해야 되는 걸 깜빡했군요. 뭐라고 짖어야 알아들으실까…….”

이석은 이를 드러내며 낮게 뇌까렸다.

“으르릉.”

“거기에 있던 손님과 종업원 모두 합쳐서 40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습니다. 보수 공사 완료까지 시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서류와 귀중한 자료들은 모두 옮겨놨습니다.”

“엘리베이터만이라도 빨리 고치라고 해. 가수들은 당분간 출장 돌리면 되고.”

기하는 폐허가 된 자신의 왕국을 보며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1층은 불도저로 밀고와 완전히 파손됐고 3층까지 불이 번져 잿더미가 됐다. 연합파는 거대한 규모라 자신의 부하들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보복을 가한다면 더 큰 보복이 있을 것이다. 형사들은 대충의 정황만 조사하고 돌아갔다. 신문사나 방송국에서도 조용하다. 아마 차 회장이 미리 손 썼을 것이다. 언젠가 밀고 올 거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크게 칠 줄 몰랐다. 배를 따서 내장을 자근자근 씹어먹고 말 것이다. 기하는 불에 탄 소파를 들어 내던졌다.

“씨발. 개 같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퍼붓듯 손에 잡히는 대로 부수었다. 코카인에게 급한 힐링만 받고 뛰쳐나와 전신이 뻐근했다. 그 고통마저 점멸시킬 만큼 이성이 날아갔다. 부하들은 기하의 발광에 쥐 죽은 듯 얼어 있었다. 기하는 모조리 깨부수고 난 뒤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소유주한테 사고 얘기했나?”

“예. 대리인에게 연락했으니 오늘내일 중에 전할 겁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가게 넘기라고 하면 되겠군. 피해액까지 내가 떠안고 가면 되니까.”

“보수 공사비용까지 엄청날 텐데요.”

“괜찮아. 차 전무가 약속한 지분만 넘기면 이런 가게 몇 개는 살 수 있지.”

파라디소는 위치부터 금싸라기 땅이며 VVIP들만 드나드는 초호화 궁궐이다. 무엇보다 오픈에서부터 직원, 인테리어,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차 전무에게 지분을 증여받고, 대충 일이 정리되면 소유주와 만나 담판 지을 것이다. 만약 가게를 넘기지 않으면 자신도 애들을 모조리 빼서 여길 뜰 계획이다. 자신이 손수 데려온 녀석들이니 가게와는 전혀 별개니까.

“야바는 어때?”

“크게 다치진 않았고, 병원에 다녀와서 지금 이웃집에서 피신 중입니다.”

기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는 놈이지?”

“도끼 말로는 얼마 전에 이사 온 사람인데, 새로운 숙소를 구할 때까지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했답니다.”

“누군 줄 알고? 애들 빼서 여관으로 데려가.”

“다들 쇼크 받아서 움직일 여력도 없다고 합니다. 코카인한테 남은 치료 받을 녀석도 줄을 섰고요. 게다가 이번일 소문 나서 근방 여관에서는 선뜻 받아주는 곳이 없습니다. 숙소 바로 아래층에 집이 하나 비긴 하는데 그게 삼사일은 걸린다더군요. 아파트가 빌 때까지 거기에 머무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혹시 집주인한테 이런 데서 일하는 애들이란 게 알려지는 것이 걸리신다면…….”

“이런 데?”

기하가 심기 불편한 눈초리를 하자 임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테라피’에서 일한다는 게 알려져도 별일은 없을 겁니다. 집주인이 워낙 있는 듯 없는 듯 굴어서 애들도 편안해한다더군요.”

기하는 면도조차 못한 턱을 쓸었다. 당분간 자신도 눈코 뜰새 없이 바쁠 것이다. 탐탁지 않지만 부하들도 있으니 하루 이틀쯤 맡겨도 되겠지. “씨발.” 기하는 아수라장이 된 가게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때 부하들 손에 끌려온 코카인이 로비에 들어왔다. 기하는 손목시계를 풀었다. 그대로 걸어가 코카인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기하는 쓰러진 코카인을 끌어 올려 벽에 처박았다.

“그런 식으로 반항할 줄 몰랐군. 덕분에 숙소며 가게까지 개판이 됐어.”

코카인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뇌수가 짓뭉개질 만큼 고통스러웠다. 동료가 당하는 건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자신이 폭행당한 건 처음이다. 신체에 쏟아지는 고통보다 자존심이 헤집어져 더 치가 떨렸다. 독기로 곤두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지금 누구한테 손찌검입니까? 저를 그 애들과 똑같은 취급하지 말아요.”

“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놀랐는데? 계속 나불거려 봐. 지금 나도 퓨즈 나가기 직전이니까.”

기하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코카인의 피부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푸른빛이 감도는 큐빅이 경고처럼 눈을 번뜩거렸다. 큐빅 아래는 코카인만을 위한 리모컨이 숨겨졌다. 기하는 얌전해진 코카인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니가 비명을 지르지 않은 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야. 하지만 내게 반항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겁에 질려서 아무 생각도 안 났다는 변명은 하지 마. 니가 그 정도에 정신 놓을 만큼 나약한 놈이 아닌 걸 아니까.”

코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이번 일은 차 회장의 소행일 거다. 사기극에 대한 앙갚음이며, 자신은 아무 관계 없다. 그러나 사장이란 작자에게 그 잘잘못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밤새 한숨 못 자고 힐링만 했다. 사람들의 신음소리, 이기심, 모두 지긋지긋해졌다.

“숙소나 빨리 마련해 주세요. 지금 그 집 불편해요.”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살아서 모르나 본데, 누구나 그 정도 불편은 참고 산다구. 어서 가 봐. 네 노래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제해 주러 가야지.”

기하는 반대편 손등으로 코카인 볼을 툭툭 쳤다. 그것마저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모멸감이다. 코카인은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등에 달라붙는 수군거림, 사장에게 받았던 모욕감으로 머리는 뒤범벅이었다. 오늘 새벽부터 자신을 보는 사람들 눈빛부터 달라졌다. 이런 것이다. 환호가 야유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며 사람이란 이렇게 얕고 경박한 것이다. 그들에게 자신은 신도 아니었으며 동료도 아니었다.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숙주였다. 기생충은 숙주의 양분을 모조리 빨아들이면 망설임 없이 떠난다. 그래, 변함없이 자신을 증오하는 야바의 감정이 차라리 낫다. 이런 곳은, 이런 지옥은 더 이상 있을 곳이 못 된다. 코카인은 바닥을 물끄러미 보다 입술을 열었다.

“처음에 가수들 데려오면서 힐러인지 아닌지 테스트했다고 하셨죠?”

짜증 섞인 기하의 눈길이 당도했다.

“그때…하나도 빠트리지 않으셨겠죠.”

“그렇다면?”

“정말 빠짐없이 한 거 맞아요?! 정말로?!” 코카인은 절규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기하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건 새삼스럽게 왜 묻지?”

코카인은 눈을 내리깔며 평정을 찾으려 발악했다.

“전에 부친께서 밝히지 않은 데이터가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죠? 한번 알아보실 수 있습니까?”

“지금 가게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니 너까지 보태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코카인은 하얗게 떨리는 입술을 끄집어 올렸다.

“요즘 제 몸 상태가 이상해서 그래요. 가게도 엉망인데 저까지 쓰러지면 출장도 못 받잖아요. 혹시 알아보실 수 있다면 부탁합니다.”

기하는 생각에 잠겼다가 입꼬리를 당겼다.

“그래. 맞아. 파라디소의 보물이 아프면 안 되지. 나도 궁금한 게 많았는데 어디 한번 알아 보자구. 우리가 모르는 게 있는지 말야.”

“네. 아무쪼록 뒤통수를 후려칠 만한 정보였으면 좋겠어요.”

코카인은 싱긋 웃으며 1층 로비를 나섰다. 기하는 저만치에서 걸어가는 코카인을 보며 말했다.

“코카인 벌점이 얼마지?”

“50점입니다. 수년 전, 코카인이 성악 훈련에 적응 못 해서 비명을 질렀던 적이 있었죠.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거실 유리가 모두 박살 나서 경고 조로 벌점을 주셨습니다. 이후로는 특별히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작 50점이라니 지독하군. 벌점 500점 얹어 줘.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선 안 되니까.”

코카인, 그동안 너무 컸다. 항상 차분하고 주변을 포용해서 원래 그런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아까의 눈빛은……. 언젠가 놈을 제어 못 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하는 코카인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했다. 그때 부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사장님. 사다리차 도착했답니다!”

기하는 사다리가 스카이라운지 발코니에 닿기도 전에 건물 안으로 뛰어내렸다. 사장실로 들어가 벽에 있는 책장을 옆으로 젖혔다. 컴퓨터 모니터만한 추적장치 단말기가 보였다. 전원을 켜자 도시 지도가 나타났고 다섯 개의 불빛이 한데 모여 있다. 가수들 머리에 박은 칩은 위성과 연결돼 세부적인 위치까지 파악한다. 기하는 단말기를 꺼내 들고 책장을 닫았다. 뒤따라온 임수가 말했다.

“가게가 엉망이 됐지만 애들도 탈출할 생각은 안 할 겁니다.”

“돌대가리가 아닌 이상 당연하지. 고가의 이식 비용부터 매년 유지비만 해도 두당 수백이 깨지는데 괜히 그 돈을 들이는 게 아니니까.”

“사실 사장님께서 진짜 실행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임수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애초에 가수들한테 칩을 박자고 한 건 사장님 아이디어가 아니잖습니까.”

“지금껏 그 말을 따라서 후회한 적은 없지. 처음엔 미친놈이 술주정하나 싶었는데 기막힌 아이디어긴 했으니까. 너는 나머지 서류 챙겨 와.”

“예.”

기하는 단말기를 들고 사다리차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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