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22
모르핀은 눈뜨자마자 야바의 방으로 달려왔다. 새벽에 마리화나를 봤다며 수선떨더니 그때부터 나갈 생각을 안 했다. 열린 문 너머로 거실을 서성이는 헤쉬쉬가 보였다. 그 모습에 모르핀이 말했다.
“아주 똥줄이 타겠구만. 똥줄 타겠어. 헤쉬쉬는 아까 코카인 혼자 간다고 하니까 아주 잡아먹을 기세더만. 코카인은 차 전무 본가에 출장 간 지가 언젠데 전화도 안 받고 감감무소식이야? 오늘은 별장에도 안 간다던데…….”
“…….”
“참, 들었지? 얼마 전에 코카인이 출장 갔다 오는데 웬 오토바이가 쫓아왔다잖아. 깡패들이 내려서 잡으려고 하니까 잽싸게 도망쳤는데, 헬멧 쓰고 번호판까지 가려서 누군지도 모른대. 근데 진짜 섬뜩한 게 뭔 줄 알아? 다음날 놓쳤던 지점에서 그 오토바이가 귀신같이 출몰해선 동네 근처까지 따라붙었다지 뭐야? 진짜 소름 끼치지?”
“…….”
“예전에 코카인이 스토킹 당한 적이 있었잖냐. 이번엔 아주 제대로 사이코지 싶어. 그래서 사장도 깡패들 더 붙여줬잖아. 근데 헤쉬쉬는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대? 의심 가는 새끼가 있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아무튼 헤쉬쉬 저 새끼도 은근히 스토커 기질이 있단 말이지. 코카인이 불편해하면 적당히 거리 두면 될 거 가지고, 사람 질리게 말야.”
야바는 책장을 넘기며 모르핀을 발로 밀쳤다.
“꺼져. 니 방으로 가.”
“거참! 내가 자리 차지해봐야 얼마나 차지한다고 그래? 제일 넓은 방 쓰면서 속은 어째 한 평짜리 골방보다 좁아터졌냐? 나를 그냥 베개라고 생각하든가! 그놈의 망상은 이럴 때나 발휘하지 않고 뭐하냐?”
“안 그래도 베개 빨 때가 됐는데, 네 껍데기 좀 벗겨 세탁기에 돌려줄까?”
“에이~ 무섭게 왜 그래?”
모르핀은 잔망스럽게 웃어젖혔다. 어젯밤 차이석에게 약값을 주느라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온종일 그 장면만 맴돌아서 머리가 쉴 틈이 없는데 모르핀까지 신경을 긁었다.
“그런데 그 옷 좀 어떻게 할 수 없냐?! 대체 집에서 무슨 옷을 그렇게 껴입고 난리야? 보는 사람 갑갑하게……!”
자신이 입은 옷은 입술 아래까지 덮은 니트였다. 목덜미에 잔뜩 남은 울혈을 가리려면 깔깔함과 답답함을 견뎌야 했다. 그 안에는 차이석에게 훔쳐온 셔츠를 입었다. 셔츠는 잠잘 때도 외출할 때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그의 향기가 묻은 물빛 셔츠는 이제 자신의 냄새로 뒤덮였다. 코카인은 정말로 밀고하지 않았는지 기하에게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빚이다.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자신도 눈감아 줘야 하는 귀찮은 빚. 그러나 그 빚을 갚아줄 생각은 없다. 자신은 분명 밀고할 상황이 생기면 그러라 했으며 그러지 않은 건 코카인의 선택이다. 나중에 기하에게 자신의 벌점이 얼마인지 물어봐야겠다. 모르핀은 코카인 침대로 가서 작은 서랍장을 들추더니 눈을 빛냈다.
“허억! 파텍필립 시계잖아? 이거 못 해도 수천은 할 텐데! 가방에, 목걸이에…! 집 한 채는 사겠다. 이건 못 보던 건데 또 손님한테 받은 모양이네. 하긴, 나라도 돈 남아돌면 해주고 싶긴 하겠다. 코카인 노래 들으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피부도 좋아지고, 병원 가서 돈 처바를 필요가 없잖냐. 혹시 코카인은 마약이 아니라 건강식 같은 게 아닐까? 왜 가끔 보양식에 환장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런데 이상한 게 손님 중에 가산 다 털어먹고 폐인 되는 사람까지 속출하면서 왜 우린 괜찮은 걸까?”
“니들은 정상이야. 걔들이 미친 거지.”
야바는 차가운 목소리를 내팽개쳤다. 모르핀은 큭큭거렸다. 다시 서랍장에서 이것저것 다 꺼내며 어디 상품인지부터 가격까지 떠들어댔다. 모르핀은 고가의 명품에 입맛 다시며 서랍을 닫았다. 일어서서 창밖을 보더니 요란을 떨었다.
“어? 누가 이사 오나 보다. 바로 옆에 옆의 집인데? 이삿짐이 왜 저렇게 비루해? 저 사람이 이사 온 사람인가? 키도 크고, 얼굴도 꽤 생겼네? 오우! 근육 죽인다! 똘아이. 너도 와서 봐봐! 얼른!”
야바는 억지로 일으키려는 모르핀의 손을 뿌리치고 포우 단편집을 쳐다보았다.
“너는 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 쇼핑을 하나,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길 하나…….”
“꼭 재밌어야 사는 건 아니야. 그냥 사는 사람이 훨씬 많아.”
“개똥철학은.”
모르핀은 입술을 내밀며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출장 다녀온 코카인이 숙소에 들어섰다.
“코카인! 왜 이제야 왔어~~~! 나 무릎에 멍들었어!”
모르핀은 쪼르르 달려갔다. 여기저기 찔러봐야 받아주지 않으니 결국 만인을 아우르는 코카인 품으로 안겼다. 코카인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는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하면 금방 나아.”
“꼭 아파서 그러냐? 네 노래도 들을 겸, 얘기도 나눌 겸, 겸사겸사 하는 거지!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냐?”
“차 좀 마시고 오느라.”
“차 전무 하고? 뭐 마셨는데?”
“그런 게 왜 알고 싶은데? 별거 없어. 난 생강차 마시고 차 전무님은 커피 마시고.”
“사장이 알면 한소리 하겠네. 하긴, 너한테는 뭐든 오케이지만…. 차 마시면서 무슨 얘기 했는데?”
“그냥 이런저런…….”
코카인은 시선을 내린 채 웃음으로 대답했다. 야바는 책이 찢어지도록 움켜쥐었다. 제일 좋아하는 책인데도 활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코카인은 모르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곧장 정수기로 걸어가 머그잔에 물을 받아 들이켰다. 야바는 그를 곁눈질했다. 오늘 아침에도 독극물을 넣었다. 독극물 봉투는 변기 물탱크 안에 얌전히 있다.
코카인은 그날 이후 정수기 물을 아무렇지 않게 마셨다. 둘 중 하나이다. 자신이 그 안에 뭘 넣었는지 꿈에도 상상 못 하거나, 알고도 모르는 척하거나. 만약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안다면 저렇게 마셔댈 수 없을 거다. 똑똑한 척해도 예상외로 둔해 빠졌을지 모른다. 아니, 아니다. 코카인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저렇게 보란 듯이 물을 마신 뒤 화장실에서 게워내거나, 자신이 잠든 사이 새 물로 갈아치웠을지 모른다. 말간 얼굴로 딱 잡아떼지만 언제 등에다 칼을 꽂을지 안심할 수 없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으로 먹여야겠다. 독극물을 그의 가면이나 칫솔에 조금씩 묻히거나…. 그간 정수기를 고집했던 건 그가 조금씩 죽어가길 원했기 때문이다. 방법을 바꾼다면 다시 적정량을 연구해야 한다. 물에 희석된 걸 마시는 것과 직접 입술에 닿는 건 치사량부터 차이 나니까. 갑자기 할 일이 생기자 초조해졌다.
“나는 포우 단편 중에 리지아가 제일 좋아.”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야바는 눈초리를 곤두세웠다.
“내 책에 손댔어?”
코카인은 큰 눈을 휘며 대답했다.
“내가 언제 네 물건에 손대는 거 봤어? 리지아는 내가 중학교 때 읽은 거고 그 책에는 없어. 반년 동안 마르고 닳도록 읽은 책이면서 그것도 몰라?”
귓불이 붉어지는 걸 야바 스스로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을 사고 단 하루도 단 한 페이지도 빼지 않고 읽었다. 어떤 페이지에 어떤 장면이 있는지도 욀 정도다. 그런데 리지아가 무슨 내용인지조차 가물거렸다. 모든 기억이 뒤엉켰다. 당황한 걸 감추려고 야바는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없는 거 나도 알아. 포우 단편이 워낙 많아서 헷갈렸어.”
“그런 것 같네. 너를 너무 믿지 마.”
코카인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외투를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왜 오자마자 샤워부터 하는 거지? 아까 들어올 때 걸음걸이도 불안정해 보였다. 차이석과 차를 마시고 왔다. 그와 마주 앉아 시선을 맞추고, 예쁜 입술에 찻잔을 대며 웃음을 교환하면서…. 정말로 차만 마셨을까? 가슴에 불이 지글거렸다. 야바는 입술을 물어뜯다가 책을 펼쳤다. 제일 앞 페이지로 빠르게 넘겼다.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목차에 리지아가 선명히 박힌 것이었다. 야바는 가팔라진 호흡을 고르며 샤워실 문을 쏘아보았다. 욕실에서 물소리에 섞여 노랫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비웃음 같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붕대를 풀어내고 마지막 실밥을 뽑아낸 성해민은 경악했다.
“어떻게…그 많던 상처가 이틀 만에…! 이것 봐. 실밥만 빼면 감쪽같잖아! 이렇게 깨끗하게 나은 것도 몰랐어?”
“붕대를 푼 건 처음이니까.”
성해민은 손톱으로 상처가 있던 자리를 눌렀다. 실밥이 뚫고 간 흔적 외에 통증도, 생채기도 완벽하게 사라졌다. 봉합수술한 손의 통증은 어젯밤부터 느껴지지 않았다. 밤새 야바의 몸과 자장가에 심취해 통증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순이에게 물린 건 야바가 잠든 직후다. 오전까지 있던 뱀 이빨 자국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어째서.
“어떻게 이틀 사이에 그 많은 상처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는 이석의 손을 뒤집으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무슨 짓이라…. 그러다 조금 전 본가에서 코카인 노래를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모친은 아침부터 전화해 히스테리를 부렸다. 본가에 들려 모친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 그녀는 생각보다 맑은 눈으로 기다렸다. 주량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힐러를 불신하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포상 겸 코카인과 차를 마시고 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본가에 들렸을 때 코카인 노래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 정도만 들어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치유된다는 건가? 그는 실눈을 뜬 채 유리에 찢겼던 손과 순이에게 물렸던 손을 번갈아 관찰했다. 뭔가 잡힐 듯 말 듯하지만 뚜렷하게 성립되는 게 없다. 만약 코카인의 힘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면 차명환도 안심할 일은 아니다. 차명환이 코카인을 자를지 말지는 정밀 검사 결과로 판가름할 것이다. 성해민은 이 불가사의한 일에 대해 캐물을 준비태세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잘라내는 게 낫다.
“이렇게 만들 솜씨는 너밖에 없지 않나?”
“무슨 소리야? 이건 제아무리 명의라고 해도 불가능해! 너 그때 진짜 다친 거 맞아? 아니지. 내가 분명히 봉합했으니까……. 정말 말도 안 돼.”
성해민은 펄쩍 뛰며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이석은 함께 저녁 식사하자는 성해민의 제의를 거절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고자 가수들은 짐을 챙겨 들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야바 뒤를 따라오는 깡패 두 명이 절뚝거리며 육두문자를 퍼부었다. 놈들은 두 번이나 자신을 놓쳐 기하에게 걸레가 되도록 두드려맞았다. 그들이 멍청해서 놓친 게 아니라 자신이 뛰어난 탈출범이기 때문이란 걸 기하는 모르고 있다. 기하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는 차이석에게 연락받은 이후로 걸음걸이부터 경쾌해졌다. 임수 말에 따르면 차이석은 기하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건 일에 대한 수당을 챙길 수 있다는 의미며, 당분간 종신보험 타 먹는 걸 연기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기하는 예약자 명단을 코카인에게 건네고 야바 앞으로 걸어왔다. 팔짱을 낀 채 묘한 눈길로 내려보았다. 야바는 시선을 올려붙였다.
“뭘 봐?”
“출장이야. 지명 출장.”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기하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자신을 향했다.
“너 말야. 너. 지명 들어 왔다고.”
“저녁 잘못 먹었어?”
“아니. 비프스테이크 한 접시 깨끗하게 소화시켰어. 뭘 잘못 먹은 건 널 지명한 사람이지.”
고자 가수들은 의아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고, 코카인도 제 예약명단을 보다가 관심을 보였다. 그 시선을 받는 자신조차 미심쩍었다. 기하는 농담할 주변머리도 아니니 헛소리는 아닌 듯했다. 그 순간 왜 차이석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차이석은 코카인만 찾았고 어젯밤 그와 했던 행위는 약값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달래지만 심장이 울렁거리는 건 마음대로 안 됐다.
“……누군데?”
“일단 준비해. 임 실장하고 애들 두 명 붙여줄 테니 같이 가고.”
찜찜해하는 그의 표정에 더 찜찜해졌다. 기하는 끝내 누구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예전 코카인이 납치당할 뻔한 다음부터 출장은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면 보내지 않는 편이다. 이렇게 선뜻 출장 보내는 건 자신이 코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바는 가방에 짐을 쑤셔 넣고 대기실을 나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음낭에 노래를 넣어야 하는데 이미 차이석의 숨결과 음란한 소리로 가득 차서 노래가 끼어들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고민 끝에 짧고 부담 없는 곡으로 하나만 넣었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의 대저택이었다. 지명한 게 차이석이 아니란 말이기도 했다.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졌다. 한편으론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도 귀찮은 게 더 컸다. 그렇게 양쪽을 오가다 보니 성문 같은 문 앞에 도착했다. 양복 입은 경호원이 깡패들 신분증 검사부터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낯선 차를 향해 셰퍼드 세 마리가 맹렬히 짖었다. 예전에 기하가 키웠던 개와 같은 종이었다. 처음 자신에게 벌레를 옮긴 중간 숙주가 바로 기하가 키우던 개였다. 기하는 한때 개가 가출해서 심란해했던 적이 있었다. 기하는 자신의 개를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똘마니를 개 잡듯 잡았지만, 사실 똘마니들이 한눈파는 사이 자신이 몰래 끌고 가 보신탕집에 가져다준 것이다. 개 판 돈은 독극물 사는데 보탰다. 거실에 들어섰을 때 임수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거실에 있을 테니 혹시 수상하면 소리 질러.”
“여기서 니들이 제일 수상해.”
야바는 깡패들을 뒤로하고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며 입술만 드러낸 와인색 가면을 정리했다. 긴 장갑에다 팔뚝 살을 잘 담아 넣었다. 오늘 의상은 위아래 모두 크림색 벨벳의 민소매였다. 이렇게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의상은 질색이다. 싸구려 디자이너는 야바가 주문한 치수를 무시하고 항상 M 사이즈로 만들어 왔는데 신축성이 탁월한 옷감인지 여태껏 찢어지지 않고 잘 버텼다. 문앞에 다다르자 뒷목이 뻣뻣해졌다. 경호원은 노크해 주고 뒤로 비켜섰다. 야바는 마른 침을 삼키고 문을 열었다.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절로 눈살이 구겨졌다. 침대에 앉아 있는 건 차명환이었다. 환자복을 벗어 던진 그는 하늘색 셔츠에 캐시미어 스웨터를 덧입고 있었다. 그는 황달 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숨소리는 힘겹게 들렸다. 그가 가면을 뒤집어쓴 자신을 뜯어보다 게슴츠레 눈을 떴다.
“너 사기꾼 맞나?”
“니가 왜 여기에 있어?”
야바는 되물었다. 목소리를 확인한 그 눈가에 기이한 색이 떠올랐다.
“정밀 검사받으러 왔으니까.”
“검사받았으면 별장으로 갈 것이지 왜 여기로 샜어? 객사하고 싶어?”
“여기가 원래 내 집이야. 주치의와 내 수행 비서 모두 대기하고 있으니 큰 탈은 없을 거야. 따지지 말고 들어 와. 바람 들어오잖아.”
“…….”
정말로 사과를 받으려고 작심한 모양이다. 놈이 다리를 분질러도 무릎은 꿇지 않을 거다. 야바는 각오를 씹으며 안으로 걸어갔다. 행여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문은 열어두었다. 방은 숙소가 들어갈 법한 크기에 벽 한 면엔 클래식 레코드판이 유독 많았다. 호사스러운 미술품과 공예품 등 상류층의 전유물로 점철되었다. 이런 걸 남겨두고 죽으려니 억울할 만도 하겠다 싶었다. 그는 산소호흡기를 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삿바늘이 매달린 팔로 링거액 걸이 대를 끌며 소파에 앉았다. 걸을 때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든 기색이다. 전에는 안색이 송장 같아도 기운은 쌩쌩했는데 지금은 금세 쓰러질 만큼 비실거렸다. 차명환 부인이 이석에게 전화했던 내용에선 코카인 때문에 호전됐다고 들었는데 의외였다. 차명환은 마른기침을 쏟아내다가 이내 투덜거렸다.
“사장이 얼마나 의심 많던지 설득하느라 애먹었어. 내가 아버지께 니들 가만두라고 했다는데 왜 믿지를 않는지. 하긴, 아버지가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실 분인 걸 네깟 것들이 알 리가 없지. 다시 찾아준 걸 감지덕지는 못할망정 내가 왜 설득해야 되지? 사기꾼들한테 백배 사죄받아도 모자랄 판에 정말 짜증 나는군! 콜록…! 콜록……!”
“사기당한 게 자랑이냐? 니가 별장에만 박혀 있어서 세상 물정을 모르나 본데, 지금은 당한 사람이 멍청하단 소리 듣는 세상이야.”
“됐어. 이걸로 모든 실랑이는 그만하지. 우선 노래부터 불러 봐.”
놈은 작은 테이블에서 잔을 들어 물만 들이켰다. 초조하게 굴리는 눈알은 이구아나처럼 오싹했다. 별로 내키진 않지만 벌점도 위험했고 그도 엄연히 손님이다. 모든 걸 떠나 저토록 자신의 노래에 목매는 사람은 처음이다. 지명한 사람도 처음이다. 야바는 입술을 자근거리다가 노래를 불렀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였다. 차명환은 빠르게 시선을 맞춰왔다. 일렁이는 눈동자는 사막에서 물을 만난 감격이 담겼다. 그건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Leise flehen meine Lieder Durch die Nacht zu dir
부드럽게 간청하라 나의 노래야 밤을 가로질러 당신에게…….
In den stillen Hain hernieder, Liebchen, komm’zu mir
고요한 아래쪽 작은 숲으로, 귀여운 사람아, 오라 나에게.
Fuerchte, Holde, nichtrack.
두려워 말아요. 사랑스러운 사람아…….
아름다운 운율과 가사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백조의 울음소리처럼 축축하고 처절한 멜로디다. 차명환은 눈을 닫고서 가슴이 불룩해지도록 산소를 마셨다. 야바는 목 늘어트린 백조같이 어깨에 힘을 풀고, 음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점액질 같은 노랫말은 바닥에도, 공기에도 흘러내렸다. 질퍽한 소리를 끌어모아 최고 음까지 도달했다. 그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렸다가 눈길을 피하기도 했다. 바이올린이 들어가는 간주에선 허밍으로 채웠다. 물 위에서 홀로 표류하는 백조의 시체처럼, 그 황홀한 율동처럼…….
아…아…….
Bebend harr’ich Dir entgegen Komm, begluecke mich
나는 몹시 떨면서 당신을 기다린다. 오라, 행복하게 해다오. 나를…….
노래가 끝나자 그의 거뭇한 피부는 붉어졌다.
“제멋대로 해석해서 불러대는 건 여전하군. 그나저나 무슨 바람이야? 니가 이런 노래를 다 하고.”
“넌 줄 알았으면 이거 안 골랐지.”
차명환은 눈알에 잔뜩 힘을 줬다. 그 모습이 뭍으로 끌려나온 갈치 같았다. 그러다 야바의 머리카락을 힐끔거리더니 거무튀튀한 피부가 요상한 색깔로 바뀌었다.
“그럼 간다.”
야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나왔다. 문고리에 손 닿기 무섭게 놈이 달려와 손목을 붙잡았다. 다 죽어가는 암환자치고 완력도 강했다.
“왜 한 곡이야?”
“한 곡밖에 안 담아왔으니까.”
그는 문을 세게 닫았다. 처음 봤을 땐 거동도 못 했는데 이렇게 걸어 다니는 걸 보니 또 코카인 노래 덕분인가 싶었다. 야바는 그 손을 털어냈다.
“그렇게 소신 있게 싸가지 없기도 어려운데, 이제 너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해.”
그는 약오른 얼굴로 말했다.
“내일부터 다시 와.”
“그럼 코카인은?”
“걔는 걔고.”
“계속 힐링 받을 생각인가 보지?”
“이번 주에 검사 결과 나오는 거 봐서. 하지만 힐러는 안 믿어. 그러니 내가 원하는 노래나 실컷 들을 생각이야.”
차명환은 오늘 여러모로 자신을 놀라게 했다. 놈과 단둘이 있는 건 무릎 꿇는 것만큼이나 질색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볼이 간지러웠다. 그것은 거머리가 기어 다니는 것과는 다른 간지러움이었다.
“그렇게 내 노래 듣고 싶냐?”
“인내심 테스트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말하기 싫으면 말고.”
야바는 팔뚝을 긁으며 딴청부렸다. 차명환은 입술을 꽉 깨물다가 고개를 픽 돌렸다.
“그래. 듣고 싶어. 하루 종일 귀에 맴돌아서 미치겠어. 됐나?”
차명환 귓가에 홍조가 생긴 건 헛것을 본 거라 생각했다. 야바는 거죽만 남은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출장 얘긴 사장하고 말해.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
돌아서는데 차명환이 다시 팔을 붙들었다. 깡마른 손아귀는 나뭇가지가 긁어대는 기분이다. 차명환 얼굴은 터지기 직전의 화산 같았다. 난데없이 그가 손을 뻗어 리본을 잡아당겼다.
“무……!”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야바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차명환이 더 빨랐다. 서로의 다리가 감겨 바닥에 쓰러졌다. 링거액 걸이 대도 넘어갔다. 차명환은 야바 팔을 확 잡아당겨 드러난 얼굴을 주시했다. 마치 바위에 몸을 깔린 낯바닥이었다.
“하아…젠장. 그때 헛것을 본 게 아니었어.”
“놔! 이거 놔……!”
차명환에게 깔린 채 발버둥쳤다. 차명환 두 배나 되는 몸집인데도 어처구니없도록 힘에서 밀렸다. 손을 휘적거려 내려칠 것을 찾았지만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깡패들이 딴전만 부리지 않는다면 자신의 고함을 듣고 달려올 거다. 아직까지 무소식인 건 한가지 이유밖에 없다. 자신이 코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똘마니들, 밥만 축내는 것들. 모두 찔러 죽여버릴 거다.
“가만히 좀 있어 봐!”
“놔! 놔! 미친놈아!”
그는 오늘내일 하는 반 송장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셌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얼굴을 더듬다가 몇 년을 굶은 사람 마냥 침을 삼켰다. 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때였다. 차명환 머리통을 누군가의 손이 포악하게 뜯어냈다. 차명환은 누군가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힌 채 박제장식같이 벽에 매달린 꼴이었다.
“아! 뭐…야! 콜록! 콜록!”
차명환이 버둥거리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움찔했다. 차명환 머리카락을 움켜쥔 건 깡패들이 아니었다. 차이석이었다. 바닥까지 깔린 음성이 들렸다.
“뭐 하는 겁니까? 형님.”
그건 질문이 아니라 경고음이었다. 차이석은 차명환의 머리 가죽을 벗겨 낼 듯 눈을 시퍼렇게 갈았다. 차명환은 눈을 찌푸렸다. 이런 장면을 들켰다는 무안함과 살갑던 동생의 변화에 당황스러움이 뒤섞였다. 차이석은 싸늘한 눈을 거두어 야바에게 내던졌다.
“가면 써.”
핀에 찔린 곤충이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가 이 시간에 칼같이 여기에 왔는지 불가사의했다. 그리고 그날 주차장에 있던 자신을 찾은 것도. 야바는 몸을 일으켜 가면을 썼다. 문득 붕대를 풀어낸 그의 손이 시야를 찔렀다. 손에는 상처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까 코카인과 차를 마셨다고 들었다. 저렇게 기적적으로 손을 치료해 준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임수와 깡패들은 막아서는 경호원을 제치고 뒤늦게 달려왔다. 안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 눈이 등잔만 해졌다. 차명환은 자신의 옷을 틀어쥔 차이석을 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손 놔. 형님한테 무슨 짓이냐?”
야바가 가면을 추스르고 일어서자 차이석은 그제야 차명환을 쳐다보았다. 차명환을 옭아맨 손을 푼 건 그 다음이었다.
“이렇게 날뛰는 걸 보니 상태가 많이 좋아졌나 보군요. 정밀 검사하는 날인 걸로 아는데 끝났으면 별장으로 가셔야죠.”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고민이야. 별장에 있어봐야 별다른 차이도 없고. 아예 서울에서 통원치료 받을까 생각 중이다.”
차이석의 눈매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곤두세운 눈빛과는 달리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안 그래도 언론에서 압박을 가하는데 파파라치에게 일부러 먹잇감이 돼줄 필요는 없잖습니까.”
“내 마음이 편한 곳에 있어야 요양이라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 사람도 그렇고 너도, 왜 그렇게 날 못 보내서 안달이지?”
“형님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길 원하니까요. 몰라서 묻습니까?”
차이석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차명환은 그런 동생을 주시했다. 그는 항상 동생 앞에 서면 아나콘다 앞에 선 개구리 같았는데 오늘만은 황소개구리 같았다.
“아니. 내일 곧바로 짐 옮기고 여기서 치료받을 생각이야.”
그들은 날 세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차이석의 눈은 파충류의 이빨 같았다. 사자처럼 급소를 물어뜯어 단박에 죽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죽어가는 순간을 느끼도록 서서 숨통을 옥죄었다. 황소개구리여도 개구리는 개구리였다. 차명환은 위축된 시선을 거두었다. 차명환은 곁에 차 회장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눈빛부터가 달랐다. 직위도 연배도 차이석보다 높지만 어떤 본능적인 것이 차명환을 먹이사슬 아래로 끄집어내리는 듯했다. 임수가 신호를 보내자 야바는 방을 나섰다.
“내게 했던 약속 지켜.”
차명환이 빠르게 말했다. 차이석의 눈은 흉기로 돌변했다.
밴을 타고 저택을 나왔다. 해가 져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가는데 뒤에서 경적소리가 들렸다. 곁에 앉은 임수가 뒤돌아보며 미간을 구겼다. 그 순간 잘빠진 은색 차가 빠르게 지나가더니 아슬아슬하게 밴을 막아섰다. 깡패는 육두문자를 뱉으며 급정차했다. 내장이 쏟아질 만큼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이석은 차에서 내려 밴 뒷문을 열어젖혔다. 그의 손아귀가 달려들어 야바 손을 낚아챘다. 임수는 차이석의 손을 붙들어 제지했다.
“놓으시죠. 지금 가게로 가야 됩니다.”
“내가 데려다 주죠.”
“안 됩…….”
“안 될 거 없습니다. 지금 내 기분이 아주 더러우니 참고해요.”
“자꾸 가게 규칙을 어기시면 곤란합니다. 그건 야바도 마찬가집니다.”
“자꾸 이 녀석이 나한테 규칙을 어기도록 만드는군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차이석은 야바를 밴에서 끌어내렸다. 쥐어 비트는 손아귀 힘은 포악했다. 앞만 보며 내뻗는 걸음은 배려 없었다. 코카인에게 치료받은 손이 눈을 할퀴었다. 야바는 그 손을 뿌리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다시 팔을 낚아챈 그가 자신을 조수석에 내던지듯 쑤셔 넣었다.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그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는 거친 소음을 내며 출발했다. 이석은 악셀을 밟다가 외진 골목으로 커브 틀어 밴을 따돌렸다. 차는 복잡한 골목을 달려 막다른 건물 앞에 섰다. 그는 두통이 도졌는지 관자놀이를 눌렀다. 앞만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긴 왜 왔지?”
“불렀으니까 왔지.”
“부르면 아무한테나 가는 녀석인 줄 몰랐는데.”
“부르면 가는 게 내 직업인 거 몰랐어?”
“다신 오지 마.”
“싫어.”
“오지 말라고 했어.”
“싫어.”
날카로운 시선이 각을 좁혀왔다.
“다음엔 차명환이 가면만 벗기는 걸로 안 끝날지 몰라.”
“나는 가면 벗으면 안 돼? 가면 아래 얼굴 궁금해하는 사람들 많아. 아무리 밥맛 떨어지는 얼굴이라도 보여줄 수 있어. 손님은 왕이니까.”
날아드는 시선에 진공상태 같은 갑갑함이 밀려왔다. 차이석이 어떻게 알고 여기에 왔는지 모르지만, 왜 한달음에 달려왔는지 똑똑히 알고 있다.
“왜? 내가 차명환한테 다 말해버릴까 봐 겁나?”
“장 세진. 23살. 난곡동 41번지. 14살에 실종 신고돼서 사망 처리. 모친은 10여 년 전에 길거리에서 동사, 친형은 행방불명, 부친은 뇌사로 2년간 투병생활하다가 장기기증으로 생을 마감했지. 틀린 게 있으면 말해.”
기습적인 말에 목구멍이 막혔다. 너무나 빨리, 한꺼번에 쏟아져서 그게 자신의 이야기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는 시선을 비스듬히 틀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 자꾸 이죽거려 봐.”
야바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코카인에게 힐링 받은 그 손이 시야를 찔렀다. 입술 끝이 떨렸다. 뒷구멍이 짓무르도록 절정에 도달하게 한 건 비밀 누설을 예방하려는 입막음이었다. 감정과 몸의 균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 손을 코카인에게 내줬겠지. 코카인은 그 손을 잡고 노래했겠지. 코카인에게! 코카인에게!
“그런 걸로 나를 협박하면 내가 납작 엎드릴 줄 알았어? 안 됐지만 넌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나는 너 같은 거 하나도 안 무서워.”
저 혓바닥으로 차명환을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조종할 거다. 노래를 부르려면 발성연습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가사를 터득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를 설득시켜야 하는 거였다. 불러주고 싶다.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어 안달 난 차명환이 싫지 않았다.
“너는 차명환보다 겁쟁이야. 차명환은 멍청할 만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서 나를 편하게 해 줘. 그래서 좋아해. 걔 앞에서 노래하는 거 좋아해. 내일도 모레도 차명환이 부르면 올 거야. 걔한테 노래 불러 줄 거야! 걔 앞에서 노래하는 거 좋아해! 좋아해……!”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는 야바 뒷머리를 당겨갔다. 입술을 밀어붙이고 혀를 빨아가 씹어댔다. 아릿한 고통에 신음을 새어나왔다. 그는 야바의 가면을 거칠게 벗겨 냈다. 붉은색 가면이 바닥에 뒹굴었다. 입속에 침범한 혓바닥이 교접행위처럼 목구멍 깊숙이 찔렀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그의 어깨를 후려쳤다. 혀의 움직임이 짙어졌다. 차이석은 야바를 끄집어당겨 허벅지에 올렸다. 상의를 올려 젖꼭지를 물었다. 훑는 곳마다 살가죽이 떨렸다. 벌려진 야바의 가랑이 안쪽으로 손을 가져가 바지를 잡아 뜯었다. 그 틈으로 드러난 팬티를 거칠게 밀치자 입구가 드러났다. 그는 물렁거리는 야바의 성기를 잡아빼며, 다른 손으로 그의 벨트를 풀어헤치고 지퍼를 내렸다. 위압적으로 발기한 성기가 튕겨 나왔다. 그것은 당연한 듯 구멍을 꿰뚫었다. 야바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삼켰다. 압박감에 입구가 몸을 떨었다. 그는 허리를 몇 번 들었다가 내리더니 곧장 쳐올리기 시작했다. 느긋함도 배려도 없었다. 무자비했고 외설적이었다. 도리질치며 미칠듯한 감각에서 달아나려 했다. 그는 야바 허리를 움켜잡아 돌리며 탄력적으로 찍어 올렸다. 예민한 신경이 몰린 살덩이의 교접이 그날 밤의 열락을 되새겨 주었다.
“하윽…! 으응……!”
그는 야바의 입술에 귀를 갖다 붙이며 교성을 짓뭉갰다. 거친 반동에 몸이 뒤로 튕기려 하자 그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크림색 장갑에 감싼 손은 핏기없는 시체 같다. 어디선가 사람들 발소리가 들렸다. 야바는 신음을 삼켰다. 선팅된 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차의 흔들림으로 알지도 모르겠다. 창 너머로 오색 찬연한 야경이 잿빛으로 변색했다. 말초적인 자극만이 난무하는 차 안은 밀폐된 향락가 같다. 그는 야바의 무릎 뒤쪽에 팔을 밀어 넣고 높이 들어 올렸다. 다리는 잔뜩 벌어졌고, 결합은 깊어졌다.
“하앗… 아윽…으응……!”
“흣, 하아…….”
그의 검은 동공에는 초조함과 뜨거움이 산란했다. 피스톤 질이 예고 없이 방향을 우회했다. 그를 담은 속살이 함께 쓸려가 엉겨붙는 듯했다. 그는 야바의 목덜미를 씹으며 짙은 신음을 토했다. 규칙적인 피스톤 질은 무절제하게 방향을 잃어갔다. 바지 틈으로 나온 자신의 성기는 차이석의 옷에 쓸려 열기를 띠었다. 차체도 뒤흔들렸다. 엉덩이를 튕기는 그의 아랫배가 딱딱해지고 내벽으로 뜨거운 것이 역류했다. 내부에 달라붙은 정액이 왔던 길로 다시 흘러나갔다. 그는 쏟아내면서도 쾌락이 응집된 내부를 집요하게 후벼 팠다. 미적지근하게 발기된 야바의 성기가 정액을 조금 게워내고, 그의 셔츠를 더럽혔다. 그는 성기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야바의 턱을 빨았다. 어두운 차 안에서 선명한 시선이 감겨왔다. 야바는 얕게 헐떡였다. 온몸이 기진맥진해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소리 공백을 채우고 얼마 후였다.
“너 상대하다 보면 제어가 안 돼.”
목소리는 누그러졌지만 사나움이 잔재한 눈동자는 망막을 태울 것 같았다. 야바는 그 잠열을 흐린 눈으로 보며 말했다.
“노래 부르고 싶어…….”
그의 눈동자가 중간지대에서 일렁거렸다. 그 흔들림을 붙잡고 싶었다.
“노래하고 싶어. 노래하고 싶어…….”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종족 번식을 할 수 없는 고자들은 노래를 포자처럼 뿌린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는 음침하고 독기 가득한 것이다. 야바는 아무것도 반사되지 않는 눈을 보며 속살거렸다.
“걱정마. 차명환이든 누구든 네 비밀 말 안 할게.”
아마 그럴 것이다. 어차피 그가 알아낸 정보는 무용지물이다. 유리한 패가 자신에게 돌아온 거다. 그러니 잠깐만 내버려둔다면 비밀을 함묵할 수도 있다. 그가 눈을 내리깔며 검은 눈동자를 가렸다. 금욕적으로 보이는 손가락이 야바의 입속으로 미끄러져 혀를 만졌다. 밤의 장막에 젖어든 그의 이목구비는 한층 퇴폐적이었다. 다시 들어 올린 눈동자는 갈라진 뱀 혓바닥처럼 섬뜩했다.
“차명환이든 누구든 마찬가지야. 노래하지 말라면 하지 마. 혓바닥 잘리기 싫으면.”
절망적일 만큼 그는 단호했다. 야바는 그의 목에 두른 제 손을 매만지다 눈을 치켜떴다.
“싫어.”
그가 미간을 구겼다. 야바 입술을 삼키고 혀를 빨아당겨 절단할 기세로 깨물었다.
가게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곧장 숙소로 왔다. 야바는 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아래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 가랑이 안쪽 제단이 찢어졌고, 팬티 아래쪽도 있는 대로 늘어나 갈아입어야 했다. 그래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그는 오늘 약도 주지 않고 약값을 받아갔다. 파라디소를 통해 선이자 떼는 계산법은 익숙했으니 괜찮았다. 차이석은 숙소에 데려다 주는 내내 인상을 썼다. 두통이 아직도 심한 모양이다. 힐러의 노래가 아니어도 노래 자체만으로 어느 정도 치유 효과가 있다고 들었다. 그는 자신이 불러주는 자장가에는 금세 잠들곤 했다. 만약 노래 듣는 순간이나마 두통을 잊을 수 있다면……. 뜨거운 것에 떠밀린 양 야바는 벌떡 일어났다. 목을 가다듬고 발성연습을 했다.
아아~~~~~아~~~~~~~~~~
아까 신음을 질러 목소리가 갈라졌다. 보는 사람도 없고, 안 되면 수천 번이라도 담금질하는 거다. 30분에 걸쳐 발성연습을 하고 나니 등에 땀이 찼다. 곧장 욕실로 달려가 몸을 씻어내렸다. 몸에 거품질 하면서도 발성연습을 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외눈으로 보았다. 이상했다. 하룻밤 사이 그럴 리 없지만, 어제보다 살이 조금 빠진 듯하고, 눈도 커 보였다. 밖으로 나와 항우울제를 꺼내 먹었다.
“똘아이 언제 왔냐?”
고자 가수들이 숙소에 몰려왔다. 누군가는 욕실로 달려갔고, 누군가는 야식을 시켰다. 헤쉬쉬는 아직도 코카인이 차이석 본가에 혼자 갔던 일로 싸한 공기를 풍겼다. 코카인은 달래는 걸 포기했는지 방에 딸린 욕실로 직행했다. 야바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책을 펼치는데 기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니트를 목덜미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밤낮 안 가리고 불시에 방문할 때가 있었다. 숙소 근처에 깡패들을 세웠지만 차 회장 쪽이 계속 잠잠하자 예전보다 경계가 느슨해졌다. 기하는 침대로 걸어와 야바 곁에 섰다. 단단하게 버틴 다리가 아래로 내린 시야에 들어찼다.
“차 전무가 그 시간에 왜 거기에 있지? 만나서 뭐 했어?”
임수가 보고한 모양인지 놈의 눈빛은 엄청났다. 야바는 책을 들여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글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얘기했어. 차명환한테 간 것 때문에 열 받아서.”
“왜?”
“몰라서 물어? 내가 모든 걸 불어버릴까 봐서겠지.”
“다른 말은?”
기하는 취조하듯 자신을 주시했다. 요즘 들어 놈은 자꾸 낯선 감정을 드러냈다. 변명하는 것 같아 창자가 뒤틀리지만 주의를 돌려야 했다.
“차명환이 내일부터 계속 오래.”
“너를? 오늘 한 번만 부르는 게 아니라? 왜?”
“내가 알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막 살려나 보지.”
기하의 관심을 흐트러트리는 덴 성공한 모양이다.
“그래서 차명환한테 갈 건가?”
“그런 건 언제부터 가수들이 결정했어? 내가 가기 싫다고 하면 안 보낼 거야?”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야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머리를 짓눌러 뒷목이 뻣뻣했다. 야바는 책에 고정했던 눈을 치켜떴다.
“나가. 책 읽는데 거슬리잖아.”
기하는 기습적으로 손을 뻗었다. 야바가 입은 목폴라를 내렸다.
“뭐……!”
야바는 놈의 손을 뿌리치고 졸라매듯 옷을 움켜쥐었다. 기하의 얼굴이 점차 험악해졌다. 놈은 야바의 손목을 비틀어 떼어냈다. 옷을 아래로 잡아 내리고 목덜미가 드러나려는 순간이었다.
“뒈지기 싫으면 빨리 기어나와!”
“으아악……!!”
밖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골목을 울리는 발소리가 창문으로 넘어왔다. 눈앞이 뿌예지면서 탄 냄새가 났다. 동시에 기하의 폰이 울렸다. 폰을 받아든 기하는 표정을 얼렸다.
“무슨 소리야?”
[지금 연합파가 불도저까지 끌고 와 가게를 갈아엎고 불을 질렀습니다! 거긴 아무 이상 없습니까?!]
“금고는?”
“사장님……!”
그 순간 기하의 똘마니가 이마에 피를 흘리며 거실로 달려왔다. 그 뒤에는 건장한 남자가 쇠파이프로 똘마니를 공격했다. 낯선 남자는 방독 마스크를 썼고 팔에 녹색 완장을 했다. 용역 깡패였다. 그를 기점으로 셀 수도 없는 중무장한 사내들이 쏟아져 왔다. 용역 깡패들은 휘발유를 거실에 뿌리며 불을 붙이고 집기를 때려 부쉈다. 고자 가수며 기하의 똘마니며 가리지 않고 머리채를 휘어잡아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그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씨발. 차 회장인가…….”
기하는 욕을 짓씹었다. 문을 잠그고 야바를 일으켰다. 연기는 문틈으로 들어와 방을 뒤덮었다. 밖에서 문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용역 깡패의 발길질 몇 번에 문짝은 날아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코카인은 사색이 되었다. 기하는 침입자에게 주먹을 퍼붓고 쇠파이프를 빼앗았다. 안으로 들어오는 놈의 머리통이며 어깨를 내려쳐 하나씩 쓰러트렸다. 용역들은 눈 깜짝할 사이 밀고 들어왔다. 살기등등한 눈으로 기하를 에워쌌다. 기하는 야바를 뒤로 물리며 쇠파이프를 놈들에게 겨누었다.
“화장실 문으로 빠져나가!”
곧바로 흉기를 휘두르며 적에게 돌진했다. 기하의 손놀림에 놈들의 광대뼈가 주저앉고 이빨이 사방에 튀었다. 누군가의 절규소리, 파열음이 들렸다. 기하는 엄청난 숫자의 깡패들에게 둘러싸였다. 내부는 연기에 휩싸여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독한 연기에 숨이 막혔다. 나머지 깡패들은 야바와 코카인에게 쇠몽둥이를 내려쳤다. 거실에 포진한 용역들은 똘마니들 배를 구타하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불길에 휩싸인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질주하다가 거실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코카인!”
헤쉬쉬가 얼굴에 피를 흘리며 달려왔다. 코카인을 뒤로 물리며 용역 깡패에게 소화기를 난사했다. 위층을 장악한 용역 깡패들은 기하를 포위해 어깨와 다리를 마구잡이로 내려쳤다. 기하는 벽을 등진 채 피로 얼룩진 낯을 닦아내고 쇠파이프를 움켜잡아 닥치는 대로 적을 후려쳤다. 화마는 더욱 사납게 날뛰며 침대며 옷장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야바는 죽기 살기로 출구로 향해 갔다. 뜨끈한 통증이 등을 강타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깡패의 발길질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었다. 내장으로 파고드는 유독가스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 낯선 남자 두 명이 달려와 용역 깡패에게 테이저 건을 발포했다. 높은 전압에 깡패는 몸을 경련하며 쓰러졌다. 나머지 한 명은 야바 옷 덜미를 잡아끌고 갔다. 흐린 시야로 보이는 남자들은 똥색 점퍼와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덩치는 왜소해도 이런 일은 익숙한 듯이 테이저 건을 난사하며 아수라장을 돌파했다. 야바는 그를 밀치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꺼져! 깡패 새꺄!”
“아니! 우리는 깡패가 아니라 당신을 도와주러 온……! 자세한 얘긴 나중에 하고 일단 나갑시다!”
“이거 놔! 이거 놔아―――――!”
예리한 비명에 남자들은 귀를 틀어막고 신음했다. 야바는 그 틈을 타 남자들을 팽개치고 출구로 달려갔다. 테이저 건을 든 남자들은 연기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용역 깡패와 유독가스에 건물은 완벽하게 고립됐다. 방독마스크를 쓴 용역들은 끝없이 쏟아졌다. 기하는 전장을 헤치고 코카인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았다.
“어서 비명 질러! 내가 책임질 테니 저 새끼들 다 죽여버려!”
코카인이 비명만 지르면 수십 명의 용역 깡패들은 한번에 초토화된다. 물론 고자들과 똘마니들도 위험하지만 그걸 불사하고서라도 해볼 법한 모험이었다. 코카인이 피묻은 입술을 벌렸다. 야바는 소리 낱알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귀를 틀어막았다. 헤쉬쉬도 흠칫하며 귓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
그러나 코카인은 입술만 떨 뿐,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기하는 코카인 뺨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멍청히 있지 말고 어서 비명 질러!! 어서!”
“그만해요! 놀라서 아무 생각도 못하잖습니까?!”
헤쉬쉬가 덤벼들자 기하는 그에게 주먹을 퍼부었다. 기하는 바닥에 널브러진 코카인을 끌어 올리고 피로 범벅된 이를 드러냈다.
“비명 질러! 어서……!!”
“…….”
코카인은 하얗게 질려 기이한 신음만 흘렸다. 폭력에 면역이 없는 그에겐 이 활극이 감당키 어려웠던 거다. 피를 뒤집어쓴 채 넋 나간 모습은 10년 전 그날 같았다. 그렇지만 코카인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핏물뿐이었다.
“씨발……!”
기하는 눈에 핏대를 세운 채 헤쉬쉬며 용역 깡패, 가리지 않고 머리통과 어깻죽지를 내려찍었다. 쇠파이프는 다시 코카인에게 타깃을 바꾸었다. 기하는 코카인에게서 비명 소리를 끌어내려고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그 순간이었다. 연기를 전신에 묻힌 누군가 기하를 향해 달려갔다. 남자는 쓰러진 깡패만큼이나 피로 범벅됐지만 녹색 완장을 차지 않았다. 방독 마스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선이 간 건지 모르겠다. 야바는 하염없이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아수라장을 질주한 남자는 야구방망이로 기하를 내려쳤다. 몇 번이나 공격하며 기하가 쓰러진 걸 확인하더니 코카인을 감싸 안고 달려갔다. 코카인은 몸서리치다가 남자를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자는 누군가 휘두르는 칼끝에 팔에서 피를 뿌렸다. 쇠몽둥이로 어깨와 허벅지를 맞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남자는 용역 깡패며 기하의 똘마니며 닥치는 대로 머리통을 가격 했다. 두개골을 깨부수는 흉기는 거침없고 잔혹했다. 코카인은 그때마다 몸을 떨었다. 이윽고 폐허 속을 돌파한 남자는 야바 앞에 당도했다. 가속 붙은 흉기가 야바를 향해 추락했다. 피하지 않았다. 몸이 굳어 피할 수 없었다. 무시무시하게 돌진하던 흉기가 야바의 정수리에서 우뚝 멈췄다. 질주에 제동 걸린 남자는 굳어 있었다. 갈라진 연기 사이로 남자의 이목구비가 선명해졌다. 절규가 난무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그와 자신을 둘러싼 이 공간만은 고요했다. 서로 엇돌던 시선이 접점을 찾아갔다. 완고하게 닫힌 남자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 눈동자에 투영된 자신은 무표정했다. 매끄러운 질감의 새까만 눈동자, 강아지 같은, 마냥 퍼주고 싶었던……. 그렇게 시간은 윤회하며 과거를 잊고자 발악하는 자를 조롱했다.
형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세진이요. 동생이 제일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