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20
[똑똑하고 담 센 홍콩인으로 다섯 명 물색했다. 이력서 메일로 보낼 테니 살펴봐라.]
전화기 너머에서 성재가 말했다. 태령 주식을 차근차근 사들이는 브레인들은 홍콩 펀드로 둔갑한 상태다. 주총이나 공석에서 브레인을 내세우면 꼬리 밟힐 위험이 있으니 진짜 홍콩 사람을 물색 중이다. 그마저 마땅치 않으면 다른 방법을 동원하면 된다. 이석은 살점이 벌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응급처치는 했으나 출혈이 멈추지 않아 회사에서 가까운 성해민 병원으로 왔다.
“걔들 연기는 좀 되나?”
[연기뿐이겠냐? 카메라 테스트까지 하마. 아, 내일 숙소 옮긴다.]
“먼저 숙소도 노출됐다면 이번에도 위험하니까 한 명씩 움직여. 남자끼리 모여 섹스 파티하는 장소처럼 꾸며놨어. 당분간 여자도 불러서 마음껏 즐기라 하고.”
[브레인들 환호성이 벌써부터 들리는군. 걔들 멀쩡한 물건 두고도 너한테 시달리느라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잖냐. 이따 기자회견자리에 올 거냐?]
“쇼 좋아하는 양반인데 당분간 장단 맞춰줘야지.”
성재는 혀를 끌끌 차다가 불쑥 말했다.
[니가 두 발 달린 짐승은 모두 깔고 박는 대상으로 본다지만 뭐가 모자라 수컷한테까지 손을 뻗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무슨 소리야?”
[요트에서 너하고 같이 있었던 애 누구냐고 물었잖냐. 은주 알지? 그날 걔가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목격했다더라고.]
“…….”
[파라디소 가수란다.]
이석은 검지로 눈썹 결을 따라 쓸었다. 별생각 없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가수 누구지?”
[몰라. 전부 같은 옷에, 같은 가면을 써서 분간 못 하겠다더군. 은주 말엔, 그날 너 약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데 파라디소 가수가 알짱거리더란다. 그러다 네 위에 성해민이 올라타니까 해민이를 뜯어내고 네 지퍼까지 채워줬다는데. 왜 그랬는지는 묻지 마라. 내 알 바 아니니까. 아무튼 니가 그 가수하고 눈싸움 한판을 벌이더니 걔를 잡아당겨서 키스를 퍼붓더란 말이지. 니가 워낙 눈 뒤집혀 덤비니까 걔도 겁먹었는지 그대로 내빼더란다.]
성재는 말을 이어갔다.
[그게 다가 아니야. 니가 도망치는 걔를 따라가 들춰 안더니 선실로 들어갔단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안 나와서 뒷일은 모르고.]
이석은 미간 근육을 좁혔다. 당연히 여자라 단정했는데 파라디소 가수였다니 의외다. 그날 자신이 누구와 있었는지, 끝까지 갔는지 어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뚜렷한 건 그날의 손길과 입술 감촉뿐이다. 그 순간 뜬금없게도 한 사람이 뇌리를 지나갔다.
“혹시 그때 내 주변에 그 녀석이 있었나?”
[누구?]
그러나 같은 가면에 같은 의상인데 녀석인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그때 성해민이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독약 냄새에 달큰한 향수가 섞였다. 의사 가운을 두른 그녀는 이지적인 분위기다. 수술대를 사이에 두고 성해민은 이석의 손 곳곳에 벌어진 살점을 살폈다. 이석은 일단 통화를 끝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타의 눈초리를 보냈다.
“미쳤어! 손이 이 지경이면 바로바로 왔어야지. 여긴 뼈도 보이잖아. 하마터면 신경과 인대까지 손상될 뻔했다구.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당분간 여자 몸 더듬는 것도 끝이란 말이야. 대체 어쩌다가 이랬어? ”
그녀는 미리 준비한 주사기를 들었다. 이석은 말했다.
“마취하지 마.”
“미쳤어? 못 해도 20바늘은 넘을 건데 그걸 어떻게 참으려고?!”
“차라리 이걸 참는 게 나아. 아니면 미칠 것 같으니까.”
“…….”
성해민은 입을 딱 벌린 채 눈을 끔뻑거렸다. 이석은 미끈한 미소를 머금은 채 관자놀이에 손을 괴었다. 며칠간 식욕이 떨어졌고, 불면증도 거세졌다. 마약을 멀리해서 오는 금단증상이려니 했다. 애초에 끊을 생각은 없었기에 다시 손댔다. 그러나 귀울음은 갈수록 날카롭고 집요해졌다. 수천 키로 심해저 아래로 빨려가는 듯한 압력이다. 아무리 약을 흡입하고 술을 퍼부어도, 잠을 자도, 깨어 있어도 녀석의 얼굴과 음성이 신경을 잠식시킨다. 궁여지책이라도 이 그악한 갈증을 잊기엔 그만일 거다.
“진짜야? 진짜 마취 없이 그냥 해?”
“시작해.”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성해민은 아연실색하며 마취주사를 내렸다. 봉합바늘이 벌어진 살갗을 신중하게 파고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대신해 고통스러운 낯빛이다. 이석은 상체를 뒤로 젖혀 벽에 기댔다. 바늘이 생살을 떠올리고 꿰뚫는 그 나른한 고통을 음미했다. 뜨거운 통각이 손으로 몰려 귀를 점령한 이명을 몰아냈다. 극성스러운 목마름도 사그라졌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봉합수술이 진행됐다. 마지막 실을 자르는 성해민은 부쩍 창백했다.
“3,4일 정도는 통증이 굉장할 거야. 너 약 하니까 따로 진통제 필요 없지? 내일 와서 치료받고 가.”
진짜 미쳤어…. 그녀는 진저리쳤다.
야바는 대기실 초연한 의자에 앉아 보습크림을 발랐다. 눈뜨자마자 씻고, 아침 먹기 전에 또 씻고, 끼니마다 두 번씩 샤워하며 시간의 중압을 씻겨냈다. 그러니 진짜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 자세가 진짜 가능하긴 한 거냐? 합성 아냐?”
고자 가수들은 해괴한 자세로 점철된 성인잡지를 보며 침을 삼켰다. 그래 봐야 그림의 떡이지만 말이다. 따뜻한 계절은 제일 싫었다. 날이 더워지면 벌레들은 짝짓기에 더 열 올린다. 야바의 귓구멍이고 사타구니고, 아무 때나 교성을 뿌려가며 그 짓거리를 해서 잠 못 들곤 했다. 지금껏 몽정은 두 번이 전부다. 거세 전에 한번, 거세 후에 한 번. 거세 후엔 미칠듯한 감각에 비해 마른 팬티로 깨어났다. 자위도 몇 번 해봤는데 절정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차이석이 뇌수 녹는 애무를 퍼부었을 때도 성기는 넋 놓고만 있었다.
코카인이 들어와 n자로 놓인 소파 끝에 앉았다. 세수했는지 얼굴에 물기가 그대로였다. 젖은 머리카락과 입술은 지쳐 보였고 그만큼 청초했다. 헤쉬쉬는 그 모습을 멍하게 보다 헛기침 뒤에 물었다.
“지금 들어갔다 온 사람 야구 선수 아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더니 언제 왔었지?”
“작년에 인대가 늘어나서 치료받으러 온 적 있어. 다음 달에 출국하는데 그전에 한 번 더 받고 싶다고 해서.”
가수들을 단체로 부르는 것보다 코카인을 단독으로 부르는 게 훨씬 비싸다. 그러나 코카인을 독차지한다는 이유로 손님 대부분은 그 이상한 계산법을 흔쾌히 따랐으며, 코카인이 예약을 미루지 않은 것만으로도 황송해한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그러다 너부터 쓰러지겠다. 차라리 별장 가는 거 그만둬.”
코카인은 말없이 웃었다. 헤쉬쉬는 불만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참, 아까 차 전무 본가에서 그 새끼 안 보이더라. 거기 집사 말엔 오늘 어디로 이사 간다고 했다던데, 또 너한테 추근대면 반 죽여버릴 거니까 그땐 말리지 마. 그 새끼 진짜 동네 형 맞긴 맞아?”
그 순간 코카인의 시선이 야바에게 잠깐 옮겨와 떨어졌다.
“그렇다고 했잖아.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그런데 왜 너한테 존댓말이야? 그거 좀 모자란 놈 같던데, 혹시 이거 아냐?”
헤쉬쉬는 손가락을 제 귀에 대고 휙 돌렸다. 뭔가 심기를 건드린 건지 코카인은 수건을 테이블에 세게 내렸다. “체, 알았어.” 헤쉬쉬는 볼멘 얼굴로 물러났다. 오늘도 코카인은 차명환 별장에 갔다. 차이석 본가에도 들렸다고 했다. 다녀올 때마다 안색은 어두워졌다. 코카인과 눈이 마주쳤다. 세상만사 달관한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난히 복잡해 보였다.
“야바 너 어디 아파? 안색이 별로다.”
정작 쓰러질 것 같은 게 누군데 웃기는 소리였다. 야바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너야말로 당장 쓰러질 것 같은데?”
몇 마디 안 했는데도 숨이 찼다. 으슬으슬 한기도 났다. 코카인의 미간은 굳어갔다.
“너… 진짜 괜찮아?”
“오지랖은 너 자신한테나 발휘하고 신경 꺼.”
야바는 시선을 거두고 늘어진 팔뚝에 크림을 문질렀다.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이쯤 하면 모르핀이 따박거릴 타이밍인데 입도 뻥끗 안 했다. 오늘따라 고자 가수 누구도 자신에게 시비 걸지 않았다. 살다 보니 참 별일이었다. 코카인은 테이블에 놓인 예약 명단을 살폈다. 야바는 크림을 바르는 척하며 코카인이 쥔 명단종이를 노려보았다. 혹시 저 안에 차이석도 있을까? 눈알을 잠깐 뺐다가 끼우면 얼마나 좋을까? CC 카메라같이 코카인 뒤의 옷걸이에 올려뒀다가 훔쳐보면 좋을 텐데 말이다. 헤쉬쉬도 머리를 맞대고 명단을 보았다. 아무 소리 없는 걸 보니 오늘 차이석은 없는 거다. 반면에 코카인 낯빛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어쩌면 이 시간, 차이석은 지하층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백합과 향수로 치장한 죽은 육신에 몸을 비비적거리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지하층에 내려가 보고 싶다.
코카인은 피부톤을 돋보이게 하는 하늘색 벨벳 의상과 미색 가면을 착용했다. 헤쉬쉬가 맨 가슴을 힐끔거리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싸구려 디자이너의 싸구려 옷은 코카인의 몸을 빌어 값비싼 명품으로 탈바꿈했다. 코카인은 의상을 갖춰 입고, 신봉자들에게 은총을 내리러 향했다. 찌끄러기들도 뒤따랐고 야바도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다. 눈앞이 희뿌옜다. 평소보다 감각이 무뎌지고 몸이 둔중한 하루였다. 오늘 아침 욕실에서 창백한 남자를 두 번이나 봤다. 남자는 유독 초조하고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이제 곧 봄이 온다. 동사자의 하수인인 그도 바빠진 거다. 따뜻한 계절이 오기 전에 희생양을 데려갈 작정인 거다. 그러니 자신도 미완성된 작품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날 결국 화공약품 점엔 들리지 못했다. 머리카락은 자꾸 눈을 찔렀다.
“똘아이! 어디 가?”
모르핀의 부름에도 야바는 가면을 벗고 무리에서 이탈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주머니에서 폰이 울렸다. 체념하는 심경과 혹시나 하는 심경으로 액정을 확인했다. 차명환이었다. 놈은 그날 이후 시도때도없이 전화했다. 전원을 죽이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전화기 쳐다보는 건 관두기로 했다. 현기증이 돌아 복도 벽에 기대자 허벅지 살이 경련했다. 살갗이 벗겨지는 통증도 뒤따랐다. 윽…. 허벅지를 주무르고 두드려도 떨림은 없어지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이 통증도 사라질 거다.
지금 남은 건 유통기한 지난 기억과 수표, 그리고 항우울제. 항우울제는 오늘 아침을 마지막으로 모두 뱃속에 털어 넣었다. 항우울제는 아무나 구할 수 없다. 더욱이 주민등록증도 없는 사람에겐 내줄리 없다. 차이석에게 그 약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물어둘 걸 그랬다. 혹시 몰라 기하가 준 약도 챙겨왔는데 아직 손대진 않았다. 일부러 안 먹는 건 아니었다. 몸은 벌써 새로운 약에 적응했는지 새로운 약만 원했다. 어디선가 벌레 한 마리가 꾸물꾸물 기어와 야바 앞에 섰다.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다른 벌레 하나가 따라나와 화음을 넣었다. 생전 처음 듣는 노래였다. 노래는 구슬펐다. 놈들을 터트리려고 발끝에 힘을 실을 때였다. 한발 앞서 까만색 구두가 벌레를 짓이겼다. 커다란 손이 야바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흐리멍덩한 시야로 누군가 들어왔다.
“예약 있지 않나? 룸에 안 들어가고 어디 가?”
“머리 자르러 가려고.”
당당히 말하고 걸음을 뗐다. 기하는 팔을 붙잡았다.
“누구 마음대로 조퇴야? 멀쩡한 머리카락은 또 왜?”
“빨리 갔다 올게.”
“차 회장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니까 당분간 혼자 다니지 마.”
“싫어. 깡패들 달고 가면 미용실에서 쫓겨나.”
“같이 가.”
“싫어.”
기하 손을 털어내려 해도 거머리 같이 달라붙어 생각대로 안 됐다. 기하는 로비 끄트머리에 있는 베란다로 걸어갔다. 의지와는 달리 딸려갔다. 베란다에 오자 거머리가 떨어져 나갔고, 그 부위가 피 빨린 양 벌겠다. 그가 물었다.
“얼굴 왜 그래?”
대체 자신이 어떻길래 그럴까. 궁금했지만 거울은 싫었다. 요즘 들어 창백한 남자가 무작위로 출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묻는 기하는 밤새 잠을 설쳤는지 까슬했다.
“어제 또 주방에서 칼 훔치다 들켰다면서. 한 번만 더 걸리면 진짜 가만 안 둬.”
기하는 슈트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손을 내밀었다. 자잘한 상처가 있는 손에는 연두색 각이 들렸다. 항우울제였다. 야바는 군말 없이 받아 뒷주머니에 꽂았다. 먼저 자리 잡은 빈 케이스가 몸을 뒤척였다.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헤쉬쉬한테 목 찔린 놈 오늘 오후에 죽었어.”
“이제서야?”
무감각한 말투에 기하는 눈을 좁혔다. 코카인이었다면 살려냈겠지만 그는 메사돈의 죽음에 충격받아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거부했다. 기하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만약 코카인이 제 머리에 든 칩의 존재도 잊을 만큼 눈이 돌아 비명을 지른다면 기하 역시 황천길 행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코카인만은 극한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일심단결한 고자들의 장대한 위업이었으며 이 이야기는 전설로 길이 남아 고자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기하는 어지간해서 코카인 노래에 의존하지 않는다. 한때 마약 밀매업까지 했던 그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들었다. 옛날 코카인의 기적을 경험한 깡패들은 천상의 음색에 홀려 생활이 힘들 지경이었다. 그때부터 기하는 부하들에게 코카인 노래 금지령을 내렸고, 똘마니들은 긴 시간에 걸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후, 기하 자신은 물론, 똘마니들에게도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듣지 못하게 했다. 코카인에게 미쳐 가산 다 털어먹은 사람을 비웃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한참 조용하던 기하가 불쑥 말했다.
“차 전무 연락은 있나?”
야바는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맞보았다.
“내가 경고했잖아. 걔들은 그런 족속이라고.”
자신을 관찰하던 그가 단언했다. 일이 터진 뒤 차이석은 기하에게도 연락을 차단한 모양이다. 쓰다가 필요 없으면 버리는 도구. 차이석에게 있어 자신은 기하와 똑같은 선상에 놓였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놈과 이런 동질감으로 묶이는 건 구역질 났다. 기하는 온통 날을 세우고 있으면서도 까닭 모를 여유도 비췄다.
“걱정 마. 나도 앉아서 당하진 않을 거니까.”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했다.
“니가 무슨 수로 걔를 감당할 건데?”
“종신보험이 있거든. 차 회장한테 보여주면 못해도 차 전무 하나쯤 한국 뜨게 할 수 있어.”
체온이 가파르게 떨어졌다. 차이석이 이 땅을 뜨게 할 만한 위력적인 종신보험, 어쩌면 몰락시킬지도 모를……. 야바는 성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 종신보험이……뭔데?”
“자세한 건 알 거 없어. 그렇다고만 알아둬.”
혹시 전에 말했던 녹화분일까? 그의 성벽이 고스란히 담긴. 그 모습을 차 회장에게 보여준다면, 혹은 언론에 유포라도 한다면……. 정신이 흐릿해졌다. 야바는 난간에서 떨어져 둔중한 다리를 움직였다.
“그럼 조퇴한다.”
“자르지 마.”
돌아봤을 때 기하는 난간에 기대앉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넌 지금처럼 머리카락이 눈가에 흘러내리는 게 더 좋아.”
야경을 등진 그가 말했다. 이대로 놈을 밀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놈이 혼자 갈 리 없으니 자신을 물고 늘어져 저 아래로 떨어질 거다. 아니면 재빨리 리모컨을 누를지도 모르겠다. 놈을 없앤다고 해도, 종신보험은 놈의 개가 잘 물어다 숨겨 놓을 테니 서로 개죽음만 당하는 거다. 야바는 눈길을 거두고 바닥을 밟아갔다. 무릎이 떨렸다.
코카인을 선두로 청년들이 빚은 아름다운 화음이 흩어졌다. 노래가 끝나자 김 회장은 어김없이 과장된 손뼉을 쳤다. 코카인은 홀로 앉은 노인 곁으로 걸어갔다. 으레 가수들을 물리고 코카인과 독대를 청하던 김 회장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코냑을 홀짝이며 가면 쓴 청년들을 두루두루 살폈다. 뭔가 할 말이 따로 있는데 괜한 코냑만 들이키는 사람 같았다. 김 회장은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이윽고 운을 뗐다.
“그런데 저 애들 중 누구냐?”
“누구를…….”
“전에 차 사장 별장에서 봤던 아이 말이다.”
자신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이 적나라케 느껴졌다. 룸에 들어오고 김 회장이 껄끄러운 분위기를 풍겼던 건 별장에서의 일을 아직 미안해 해서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말투가 차가워진 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조퇴했어요. 그런데 왜…….”
김 회장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다가 실없이 웃었다.
“별건 아니고, 그때는 상황이 그래서인가 별생각 없었는데, 희한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 목소리가 귀에 맴돌더란 말이지. 허허…….”
눈앞에 핑 돌았다. 인공 숲이 우거져 푸른 조명을 받은 벽면은 몽환적이었다. 변색 된 풍경이 다른 세상 같다. 김 회장은 가수들을 모두 내보내고 황급히 말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거라. 그냥 할애비가 노망나 해본 소리려니 흘려 듣고…….”
자신의 표정이 뭐 어떻길래 저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제가 왜 기분 나쁘겠어요? 아마 그 애도 들으면 좋아할 겁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아니, 잘못되지 않았다. 야바에게도 가끔 이런 날이 있어야 한다. 이곳에 끌려와 억지로 거세당하고 뒷방에 내몰려서 괴로운 시간만 보냈으니까. 그늘진 곳에 서식하는 식물도 가끔 볕은 필요하다. 코카인은 주문처럼, 저주처럼 되뇌었다. 불현듯 궁금증이 생겼다. 코카인은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차 회장님은…별말씀 없으시던가요? 회장님처럼 당신도 모르게 야바 노래가 생각나신다거나…….”
“글쎄. 그런 말은 못 들었단다. 차 회장이야 워낙 음악에 관심도 없고, 이런 말 하긴 그렇다만 성격이 대쪽 같아서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릴 종종 듣지. 아무튼 지금 회사며 차 사장이며, 거기 매달리느라 여유도 없을 게다. 허허…참. 안 들은 것으로 하래도!”
노인은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진땀뺐다. 코카인은 노인이 바라는 웃음을 던져주었다. 웃는 것이 이렇게 에너지가 필요한 운동일 줄 몰랐다. 노래 몇 곡을 더 불러주고 테라피 실을 나왔다. T자로 꺾인 복도를 걸어가니 대기실 초입에서 헤쉬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눈이 더 무거워졌다.
“왜 그래? 계속 몸이 안 좋아?”
“그냥, 여러 가지 일로 신경 썼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봐.”
“지금뿐만 아니라 너 그전부터 계속 힘들어했잖아. 안 되겠다. 오늘 예약 모두 취소해. 손님들도 너 아프다고 하면 아무 말 못 하니까.”
“그래도 기다리는데 취소할 수 없지. 이러다 괜찮아질 거야.”
헤쉬쉬를 뒤로한 채 복도를 걸어갔다. 카펫에 흡수된 걸음 소리가 적막했다.
야바는 불 꺼진 거실을 가로질러 방에 들어갔다.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신성한 의식을 하기에 앞서 몸부터 청결히 했다. 미용실에서 깡패들에게 향한 눈총은 대단했다. 코 찔찔이 아이가 울어대도 놈들을 쫓아낼 담력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전담하는 미용사가 볼륨펌을 권유했다. 여자의 잔망스런 웃음이 꺼림칙했지만 깡패들 따돌리기엔 좋은 미끼 같았다.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샴푸 하는 도중에 몰래 빠져나왔다. 화공약품 점은 무사히 다녀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약간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어색했다. 약을 제조하기 전에 먼젓번 사용하던 봉투를 찾았다. 행여 힘 조절에 실패할 걸 대비해 개량 스푼도 준비했다. 서랍을 빼내자 검은 틈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 속에 사는 자들은 잊고 만다. 빛이 닿은 그 뒤편에도 반드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여유 부리다 뒤통수를 맞고 만다. 웃음 한 모금을 입에 물었다. 검은 공간으로 손을 뻗어 더듬었다. 봉투가 걸리지 않았다.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텅 빈 공간만큼 머리도 비워졌다. 없다. 독극물 봉투가 사라졌다. 눈을 비비고 다시 찾아도 없었다. 책상 아래쪽과 침대, 옷장을 뒤져도 마찬가지였다. 방을 빙빙 돌다 욕실로 달려갔다. 개인 수납장을 열어 목욕 용품을 뒤집어엎고 칸마다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숨이 차올랐다. 설마, 설마…. 야바는 코카인의 수납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럴 리 없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코카인의 수납장을 열고 샴푸가 진열된 곳을 들췄다. 그 아래 칸으로 손을 내려 잘 개어 둔 수건을 들어보았다. 그 순간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수건 사이에 독극물 봉투가 있는 것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다. 몽유병이 아닌 이상,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 이상 코카인 수납장에 넣어둘 이유가 없다. 등줄기에 땀이 났다. 설마……코카인이 옮겨다 놓은 거라면…. 아니다. 그는 절대 남의 책상을 뒤지는 짓은 하지 않는다. 설령 그랬다 해도 이 봉투의 정체는 짐작 못 할 거다. 아! 야바는 탄성을 질렀다. 그렇다! 자신이 잠결에 옮겨놓고 깜빡했던 거다. 전에 깡패들이 난동 부렸을 때 들킬 뻔했고, 코카인이 서랍을 뒤질 위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 모든 걸 예상하고 자신이 옮겨 놓은 게 틀림없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선조의 지혜를 잘 이용한 자신이 뿌듯했다. 그제야 머리가 맑아졌다. 심장은 정상 속도를 유지했다. 욕실에서 나와 정수기 앞에 앉았다. 봉투 입을 벌리고 오늘 사온 약품을 잘 배합했다. 정수기 뚜껑을 들어 독극물을 뿌렸다. 청산가리 0.01g, 아세틸콜린 0.6g, 레세르핀 0.3g. 15L짜리 물에 딱 알맞은 양이다. 자신은 프로다. 순간의 실수로 장시간 공들인 작품을 망쳐선 안 된다. 손에 묻은 건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 행여 독극물 묻은 손으로 입술을 만지거나 눈을 비볐다간 큰일 나고 만다. 정수기 몸체를 흔들어 잘 섞이도록 했다. 코카인을 파멸시키는 성스러운 계획도 이제 슬슬 끝낼 생각이다. 그때 외롭지 않도록 함께 손잡고 벼랑으로 뛰어 내려줄 수도 있다. 그땐 이 모든 원죄를 사하는 거다. 머리는 환희로 달아올라 차이석에 대한 생각을 묽게 만들었다. 그렇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벼락 맞은 사람 마냥 몸서리쳤다. 들고 있던 봉투와 개량 스푼이 요란한 소릴 내며 나동굴었다. 어두운 거실을 등지고, 열린 문 너머에 누군가 서 있었다. 코카인이었다.
진심으로 까무러칠 뻔했다. 봤을까? 언제부터?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대체 언제, 언제부터……. 바닥에 떨어진 봉투에선 가루가 조금 새어나왔다. 벌레들은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숨죽였다. 불 때문에 자신의 표정을 숨길 어둠도 없었다. 상황이 불리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한동안 응시하던 그가 입술을 열었다.
“거기서 뭐 해?”
야바는 떨림을 감추려고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왔으면 기척이라도 하지 쥐새끼처럼 뭐하는 거야?”
히스테릭한 목소리는 제 것이 아닌 것 같다. 떨어진 체온은 올라오지 않았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서툰 질문이다. 목소리도 한심할 만큼 떨렸다. 코카인의 입술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열렸다.
“너 정수기 뚜껑 열 때부터.”
“……!!”
벌레들이 눈알과 숨구멍으로 튀어나와 모든 광경을 뒤덮었다. 숨을 토하는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당황하면 안 된다. 자신은 프로다. 야바는 목소리를 밀어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가게 일은?”
“몸이 안 좋아서 예약 취소했어. 다른 애들이 오늘 나 대신 뛰어주기로 했고. 그런데 사람이 와도 까맣게 모를 만큼 뭘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어?”
눈앞이 흐려 코카인 얼굴이 뭉개졌다.
“정수기 앞에서 뭘 하겠어? 물 마시려는 중인 거 보면 몰라?”
“너 이 방 정수기 물은 입에도 안 대잖아.”
눈치챈 거다. 눈치챈 거다.
“냉장고까지 가기 귀찮아서. 왜? 난 이 방 물 좀 마시면 안 돼?”
“안된다는 게 아니라… 정수기에 뭐 넣는 거 같길래.”
심장이 쏟아낼 것같이 날뛰었다. 무심결에 야바는 발치에 떨어진 봉투를 쳐다보았다. 봉투는 몇만 키로 떨어진 양 아득해졌다. 그의 시선도 따라왔다. 그곳에 향했던 코카인 눈길이 다시 올라와 야바 눈에 얽혔다. 알 수 없는 저 표정이, 끔찍한 침묵이 숨통을 졸라맸다.
“거실 불도 안 켜고 뭐 해?”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헤쉬쉬였다. 코카인 신경이 현관 쪽으로 돌아가는 찰나, 야바는 민첩하게 허릴 굽혀 약 봉투와 개량 스푼을 집었다. 방바닥에 떨어진 가루를 발로 문질러 흔적을 없앴다.
“나 먼저 씻는다.”
최대한 여유로운 걸음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기를 제일 세게 틀고, 변기 물탱크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봉투를 숨겼다. 진정이 안 됐다. 문에다 귀를 바짝 대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렴풋이 둘의 말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들켰을까? 들켰겠지? 들킨 거다. 알아챈 거다. 순진한 눈으로 모르는 척 가증 떨고 있는 거다. 지금 헤쉬쉬와 모략을 꾸미는 중일 거다. 자신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목을 매달지도 모른다. 코카인이 비명을 질러 머리를 터트릴지도 모른다. 등줄기에 맺힌 땀방울이 지방을 긁으며 추락했다. 약이 필요했다. 약을 먹으면 대범해지고, 사고도 낙관적으로 변한다. 이석이 준 약은 모조리 먹어버렸다. 기하가 준 약은 밖에 있다. 욕실에 딸린 창문으로 눈길이 간 건 본능이었다. 야바는 변기 위에 올라섰다. 창문 밖으로 고개 내밀자 동사자의 휘파람이 뺨을 할퀴었다. 창문 위에 힘껏 올라탔다. 문득 벌점이 얼마인지 궁금했다.
“거기 서서 뭐 하냐니까?”
코카인이 그 자리에 꿈쩍하지 않자 헤쉬쉬가 다가와 어깨를 쳤다.
“야바가 먼저 와 있길래.”
“어디로 튀었나 했더니……. 오랜만에 너하고 단둘이 있나 싶었는데 김샜군.”
헤쉬쉬는 인상을 구기며 입맛을 다셨다. 코카인은 덮개가 덜 닫힌 정수기를 바라보았다. 아까 자신이 도착하고 방에 들어섰을 때, 야바는 분명히 정수기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야바는 항상 정수기 주변을 배회했다. 저는 물 한 방울 안 마시면서 자신의 물은 꼬박꼬박 챙겼다. 이상할 만큼 말이다.
‘그런데 너 왜 이 방에 있는 물은 한 번도 안 마셔? 바로 옆에 정수기가 있는데도 꼭 냉장고에 있는 것만 마시고, 혹시 정수기에 독약이라도 들었어?’
‘누가 독약 타게 할 짓이라도 했나 보지?’
코카인은 방 한켠에 있는 정수기로 걸어갔다. 조금 전 야바가 밟았던 자리에 내려앉았다. 한 곳을 물끄러미 보다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주욱 훑었다. 그대로 손가락을 가져와 한참 들여다보았다.
“만약에 말이야. 니가 야바라면 이 정수기에 뭘 넣겠어?”
뭐? 헤쉬쉬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새어나왔다. 코카인은 문 안을 투시하듯 쳐다보았다. 야바가 자신의 물을 챙겼던 게 아마 두어 달 전쯤부터였다. 그 무렵 탈출한 파라디소 가수들이 공황에서 잡혔다. 탑 배우가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발표했고, 유명 성악가가 내한 공연했던 시기이다. 그리고 차이석이 단골이 됐을 무렵이다. 코카인은 욕실 문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가루를 털듯 손을 타악, 타악, 털었다.
“만약 내가 야바라면…….”
그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차 회장은 검정색 양복에 짙푸른 넥타이를 매고 단상에 섰다. 여자 도우미는 마이크가 그의 입가에 일 직선상에 놓이도록 정돈했다. 차 회장 뒤엔 태령그룹 이사단이 의자에 앉아 포진했다. 이석과 성재는 간부 중 가장 연배가 적어 끝자리에 앉았다. 그들 앞에 있는 기자단과 대치한 포지션이다. 그간 공식 기자회견에서 대변인을 세웠던 태령에겐 그룹 총수가 직접 나서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차 회장은 입을 다문 채 빗발치는 플래시와 카메라 공세를 받아냈다. 현 CEO의 건강 상태에 관한 루머와 태령의 미래에 대한 PT 후, 질답시간이 시작됐다. 뿔테 안경에 뚱뚱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현재 차 대표가 항암치료를 중단한 상태라고 들었는데요. 이젠 항암치료도 소용없을 만큼 악화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돌고 있습니다.”
차 회장은 마이크에 다가가 말했다.
“항암치료가 필요 없을 만큼 병세가 호전됐기 때문입니다. 주치의 의견이니 오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파파라치 통신에 따르면 별장에서 요양 중인 차 대표 체중이 눈에 띄게 빠졌다고 하던데요.”
“차 대표가 요즘 식단 조절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거, 몸짱 열풍이 대단하니 근육이라도 만들라고 해야겠군요.”
차 회장의 농담에 기자단은 예의상 웃음을 보였다. 여기자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차 회장님을 대신해 태령그룹을 이어갈 차기 총수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회장님이 은퇴를 고려 중이고, 차 대표가 병석에 누웠다면 전문 CEO를 앉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한테 못 맡기는 혈족의식이라고 비난 여론이 들끓습니다. 현재 차 전무가 유력하다고 조심스럽게 관망하는 중인데요.”
차 회장의 어깨가 뭉치는 게 여기서 느껴질 정도였다. 표정은 어떠할지 가히 짐작 가고도 남았다. 이석은 비틀린 웃음을 머금은 채 늙은이 뒤통수를 주시했다. 차 회장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나왔다.
“물론 차 전무는 발전 가능성이 큽니다만, 아직 총수에 앉기엔 적은 나이고, 경험도 부족합니다. 차 대표가 최악의 상황이라면 모를까…. 물론, 차 대표는 여러분이 우려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기자 회견을 자청한 건 차 대표의 건강이 호전됐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차 대표가 직접 공식석상에서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완쾌되는 과정이라 좀 더 안정해야 한다더군요. 조만간 공석에 참여할 겁니다.”
“파파라치 통신에 따르면…….”
다시 쏟아지는 질문에 차 회장은 진중함으로 일관했다. 누가 CEO가 되느냐는 시장의 주요관심사항이다. 당연히 주가도 즉각 반응한다. 실력 있는 인물이 CEO로 영입되면 주가가 뛰기 시작하는 반면, 실망스러운 인물이 앉으면 주저앉는다. 차명환이 대표 이사에 발탁되자 창사 이래 가장 큰 수치로 주가가 하락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 악화설까지 돌아 투자계획을 철회한 업체까지 생겼다. 모든 문제를 종식 시킬 방법은 차명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거나, 유능한 CEO를 앉히는 것이다. 그러나 차 회장은 기필코 차명환에게 보호막을 쳤다. 이 기자회견 이후, 태령 주가는 소폭이나마 상승할 것이다. 발버둥치는 차 회장은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이석은 지루함이 가득한 기색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재킷에서 갈색 케이스를 꺼내고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봉합한 손의 상처가 욱씬댔지만 진통제는 먹지 않았다. 케이스를 주머니에 넣는데 폰이 진동했다. 야바에게 붙인 남자였다. 앞다툰 기자들의 목청과 플래시 잡음에 말소리가 불분명하다.
[…금…있습니다. 어…쩔까요……?]
“다시 말해요.”
이석은 한쪽 귀를 막고 몸을 약간 틀었다.
[갑자기 창문으로 탈출하더니 숙소를 뛰쳐나갔습니다. 맨발에 셔츠 바람으로 택시를 타고는 강남 펜트하우스로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석의 입매가 경직했다. 그곳은 자신의 아파트였다.
“계속 지켜봐요.”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으스러트릴 듯이 움켜쥐었다. 직각으로 세운 다리에 나머지 다리를 얹어 짓눌렀다.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머리는 이미 아파트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최대한 밟으면 20분 안에 도착한다. 차 회장이 붙인 사람이 따라붙을 것이다. 오늘 기온은 최대치로 떨어졌다. 대체 왜 갑자기…. 머리에 난입한 녀석 때문에 회견 내용은 들리지도 않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 성재가 눈을 부라렸다. 이석은 성큼성큼 단상을 내려가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이사단과 기자단의 술렁거림이 따라붙었다. 늙은이의 시선도 느껴졌다.
밤이 되자 도시에서 배설된 사람들이 흘러나왔다. 야바는 지나가는 여자에게 택시비를 요구했다. 여자는 버스비만 줬다. 버스로는 그의 집을 찾아갈 수 없고, 한시 빨리 약을 손에 넣고 싶었다. 구걸하는 맹인의 바구니에서 모자란 돈을 꺼냈다. 야산에서 토막 시체로 발견될 위험을 감수하고 택시를 탔다. 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 근방에 도착했을 때 낯익은 건물이 보였다. 높이 솟은 구조물은 멀리서도 압도적인 위압감으로 침범을 허락지 않았다. 네온사인은 만화경에 비친 형형색색의 유리조각 같다. 무작정 달려갔다. 신발도 못 신고 나왔다. 발바닥이 까져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코카인에게 들켰다. 들키고 말았다. 괜찮다. 이제 알았다고 해도 이미 몸은 독극물이 점령했을 거다. 성대도 망가졌다는 걸 차명환의 반응이 증명해 줬다. 유통기한 지난 기억과 수표, 그리고 항우울제. 항우울제를 먹으면 대범해진다. 이 추위와 삭막한 밤을 평온하게 날 수 있다. 그러니 약을 공급해 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야바는 홀린 듯이 뛰었다. 허파가 타들어 가는 고통에 잠시 쉬었다가 또 뛰었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장애물이 생겼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비와 실랑이 끝에 쫓겨났다. 건물 입구를 서성이며 오가는 차들을 멍한 눈으로 좇았다. 차 한 대가 정문을 통과하자 경비는 거수경례했고, 경계가 느슨한 사이 몸을 낮춰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연결된 터널에서 불이 번쩍이며 경고음을 알렸다. 주차된 차를 살펴도 차이석 것은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 공중전화도 없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문이 보였다. 문 옆에는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흰색 자가용이 들어와 정차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문에 카드를 댔다. 남자가 들어가고 남은 문틈으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남자는 어리둥절한 눈을 하다가 왼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고, 야바는 남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미리 훔쳐다 보관해 놓은 그의 호수를 떠올려 버튼을 눌렀다.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맥박이 빨라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다 비상구 계단으로 몸을 숨겼다. 복도 끝자락, 그의 집 앞에서 여자가 서성이는 것이었다. 차명환 부인이자 차이석의 형수였다. 누가 봐도 공들여 손질한 머리와 화장, 자주색 원피스에 하얀 털이 박힌 코트는 기혼녀로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찬합을 든 채 벨을 누르다가 폰을 꺼내 들었다.
“도련님. 전화 안 받으시길래 음성 남겨요. 저 지금 도련님댁 앞인데, 미세스 문이 더덕 무침을 너무 많이 해서 한번 드셔 보시라구요. 마침 오늘 서울에 모임이 있어서 들렸어요. 도우미가 있어도 남자 혼자 살면 먹는 게 부실하잖아요. 경비실에 놓고 가려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아, 그리고 오늘 코카인 씨 다녀갔는데 그이도 많이 좋아졌어요. 역시 진짜는 달라도 뭐가 다른가 봐요. 그럼 경비실에 맡기고 갈 테니 꼭 찾아가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잘 자요. 도련님…….”
명랑한 음성에 비해 여자는 울적해 보였다. 저 여자를 볼 때마다 계단에서 밀어버리고 싶은 건 청초한 이목구비와 유한 분위기가 코카인을 꼭 빼닮은 탓이다. 야바는 입술을 깨물며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갔다. 창문 속에는 꽁꽁 언 냉동돼지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조금도 가련하지 않은 몸뚱이였다. 머리는 깨지도록 아팠다. 감각이 떨어져 나간 다리가 멋대로 휘청거렸다. 계단이 꿈틀거리고, 붙잡은 난간이 흘러내렸다. 계단 아래,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닥은 유혹적이다. 자신의 품에 안기라고, 소녀를 유혹하던 죽음의 목소리 같다. 저 아래는 창백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야바는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갔다.
끼이이이……. 비상문 열리는 소리가 여자의 울음소리 같다. 마지막 계단에 내려설 때까지 창백한 남자는 만나지 않았다.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나와 벽에 기댔다. 곳곳에 설치된 CC 카메라는 사각지대 없이 감시 중이었다. 곧 경비가 달려와 자신을 무단 침입죄로 경찰서에 넘길 거다. 셔츠 바람에 바로 나왔더니 피부가 얼얼했다. 어깨에 덧댄 손은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흙 묻은 발등에 씨앗 같은 피가 돋아났다. 한 계절이 죽고 나야 싹이 튼다. 싹을 틔우려면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 근원지 모를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휩쓸었다. 지금도 동사자의 하수인은 자신이 잠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눈을 감고서 겨울 막바지에서 불러오는 바람을 들이마셨다. 문득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눈동자에다 있는 힘껏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꽉 닫아 맨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새된 입김이 흐드러졌다. 굽이치던 바람이 방향을 틀 때였다.
끼이익――――――!
타이어 긁는 소리는 급하고 사나웠다. 차 문이 열렸다가 부술 듯이 닫는 소리가 났다. 성급하게 뛰어든 발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빠른 걸음 소리가 속도를 줄이더니 차츰 가까워졌다.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현실로 이끌었다. 야바는 눈꺼풀을 들었다. 한파에 혹사당한 눈이 제 기능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앞 코가 잘빠진 구두였다. 붕대 감긴 손과 길쭉한 다리를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자 뿌연 윤곽이 선명해지고, 시체에 발정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호흡을 고르며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넘겼다. 어두운 베이지색 블레이저를 풀어헤쳤고, 넥타이 없는 셔츠 단추는 두어 개가 풀려, 이제 마악 술독에 진탕 빠졌다가 나온 매무새였다. 광막한 우주를 횡단한 눈동자는 발화점에 도달할 듯 말 듯했다. 다물린 입술은 웃을지 말지 기로에 선 것 같다. 그 모든 게 신기루 같다.
그의 시선이 흙 묻은 야바의 발에 당도했다가 다시금 수직으로 올라왔다. 그의 이마에 내린 음영이 깊어졌다. 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야바 어깨와 귓불까지 감쌌다. 구두를 벗고 유유히 내려앉더니 야바 발에 하나씩 신겨주었다. 공간은 한참이나 남았고 따뜻했다. 옷에 묻은 체온은 얼어버린 어깨를 녹였다. 용오름처럼 일어선 그가 손을 들었다. 약간 구불거리는 야바의 머리카락 끝을 건드렸다가 손가락에 감았다. 유연하게 내려온 손가락은 속눈썹을 스치고, 입술 위를 부드럽게 유영하다가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그러면 또 야바는 저절로 눈꺼풀이 나른해졌다.
“정신 차렸을 때 벌써 시동을 걸고 있었어. 대체 뭐하는 건지 대답을 얻기도 전에 여기에 도착했더군.”
낮은 음성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뇌까렸다. 며칠 만에 보는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건강하던 피부도 퍼석했고, 턱선과 콧대는 더 날카로이 다듬어졌다. 메마른 눈빛은 사막이었다. 야바는 그 사막 한가운데를 걸어갔다. 백 년을 참다 터진 말을 뱉어냈다.
“약 줘. 다 떨어졌어…….”
갈라진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차이석은 표정없이 자신을 응시하다 턱 아래에 닿은 손을 거두었다. 바지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손엔 약 케이스가 들렸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초조했다. 어서 약을 먹고 싶었다. 야바는 약 케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손을 위로 들어 느긋하게 피했다.
“공짜는 두 번째까지만이야.”
“웃기지…….”
“그 웃기지도 않는 게 이 바닥 룰이야.”
저렇게 나오는 그가 놀랍지 않았다. 야바는 꽁꽁 언 입술 끝을 깨물었다.
“지금 네 처지를 잘 모르나 본데, 나 갖고 놀지 말랬잖아. 그동안 니가 차명환한테 무슨 짓 하려고 했는지 나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차명환과 코카인은 어떻게 주물렀는지 몰라도 나는 쉽지 않을 거야.”
그의 입술에서 바람 소리가 새었다.
“그렇게 바들바들 떨면서 누굴 협박한다는 거야?”
“말했잖아. 너는 보기 좋게 면피했고, 기하는 손해 볼 거 없어. 코카인은 차명환을 고쳐서 명예를 쥘 거야. 나는 사기꾼이란 말 밖에 얻은 게 없어.”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차명환이 그걸 믿을지는 어떻게 장담하지? 넌 이미 사기꾼으로 찍혔는데 말이야.”
“그래도 니가…….”
“나는 얼마든지 진실을 포장해서 완벽한 각본까지 쓸 수 있어.”
여기까지도 다 계획했던 바였다. 명치뼈가 부서지고, 목구멍이 녹아내리고, 이날을 위해 그 얼마나 인고했던 시간이었나……. 야바는 아껴놓았던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시체한테 발정하는 건 포장 못 하겠지.”
태연자약한 저 얼굴이 일그러질 걸 기대하며 흐린 눈을 치켜떴다. 차이석의 눈매가 찌푸려졌다가 어느 순간 시원한 능선을 그리며 휘었다.
“협박할 땐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되지. 그게 예의야. 네 명분은 뭐지? 이렇게 젖은 모습으로 찾아와 대체 원하는 게 뭐야?”
그는 몸서리쳐지도록 오만불손했다. 관통해오는 검은 눈이 성난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순순히 약을 내줄 의향이 없나 보다. 비장의 카드마저 묵살당하자 사고가 증발했다. 저 손에 들린 약 케이스만이 신경을 사로잡았다. 고집스럽게 내주지 않는 손이 초조했다. 당장 약을 먹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이 우울에서 건져내 줄 신비의 묘약, 와인 빛깔을 닮은 환락.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인데 까마득해 보였다. 바짝 약오른 입술 거스러미를 물어뜯었다. 어김없이 피가 나왔다. 야바는 느슨하게 풀린 그의 셔츠와 단단한 목덜미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한풀 꺾인 음성은 하얗게 떨렸다.
“약값… 얼만데?”
검은 동공이 진한 와인처럼 일렁거렸다.
“비싸.”
“얼마나 비싼데?”
“무척.”
짤막한 음성은 잔뜩 쉬어 있었다. 수표는 지금 없다. 샤워하느라 잠깐 빼놓은 그대로 두고 왔다.
“돈은 이따가 꼭 줄게. 빨리 약부터 줘.”
차이석은 팔을 뻗어 야바 뒤에 있는 벽을 짚었다. 긴 다리가 치골을 짓눌렀다. 질식시키는 이 거리에 야바는 숨결을 움켜쥐었다.
“돈은 원하는 대로 줄게. 빨리 하나만…….”
차이석의 입술이 비릿한 곡선을 그렸다.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자 매끈한 턱선과 콧대에 불빛이 내려앉았다.
“흥정할 땐 상대가 갖고 싶어 환장할 만한 걸 던져야지. 그렇게 어설픈 미끼로는 한 알도 못 내줘.”
그는 야바의 턱을 손으로 감싼 채 입술을 만졌다. 입술선을 그리던 손가락은 그 틈으로 들어와 혀를 유린했다. 눈꼬리에 신열이 몰려 숨이 차올랐다. 맞댄 그의 중심은 언제부턴가 단단해져 더운 열을 뱉었다. 그는 할딱이는 야바의 입술과 목덜미, 턱선을 눈으로 더듬었다. 맞물린 하체는 얇은 바지를 꿰뚫듯 사나워졌다. 그는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올렸다. 검은 결정체가 상스러운 빛을 발산했다.
“먹어달라고 해봐. 구멍이 너덜거릴 만큼 휘젓고, 흘러넘칠 때까지 싸달라고. 숫말 발정제처럼.”
그렇지 않으면 약은 없어. 저속한 언어가 폭언처럼 쏟아졌다. 그의 목소리 성분은 물의 입자로 되었을 거다. 탁한 눈동자는 야바의 의식을 꾸역꾸역 삼켰다. 야바는 눈을 감고 어지러움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때도 그랬었다. 그때도 이름을 물었고, 의미를 알려 주었고, 혀가 녹을 만큼 키스했고, 안아 올려 어딘가로 데려갔고, 의식이 짓뭉개질 만큼 음란한 말을 강요했고, 머리가 눅눅해질 만큼 속살에 쏟아부었다.
두려웠다. 다신 볼 수 없는 것도, 다시 보는 것도. 그를 갈망하는 일분일초가 두려움이었다. 혀끝에 뭉친 말을 삼켰다. 거짓은 추앙받고 진실은 조롱당하므로……. 야바는 얕은 숨을 게워냈다. 젖은 심장 소리가 입술을 조종했다.
그가 읊조린 밀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