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19
아아아~~~~~~~
목소리가 공간의 틈을 가득히 채웠다. 코카인은 그치지 않고 다음 곡을 향해 목소리에 박차를 가했다. 땀방울이 머리카락에서 떨어져 뺨으로 흘러내렸다. 고음 역대로 된 보칼리제와 아리아를 연달아 불렀다. 곁에서 화음 넣어주는 헤쉬쉬도 쳐지지 않고 따라왔다. 그날은 야바와의 차이점을 보여주고자 불순한 감정에 휩싸여 기교에만 신경 쓴 건 인정한다. 환자의 마음도 그러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힐러의 마음가짐이다. 그 마음을 사람의 귀는 귀신같이 알아채므로, 진심을 다한다면 청중이 제일 먼저 교감해주며, 효과는 몇 배가 되므로. 그날의 모욕을 만회하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온전히 노래에만 빠져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필사적이었다. 노랫소리가 사라지고 내부에 퍼진 파동이 흩어졌다. 차명환은 침대에 기대앉은 채 코카인을 주시했다. 앙상한 손가락으로 뼈가 도드라진 손등의 주삿바늘을 피해 벅벅 긁었다.
“꼭 이렇게 가까이서 불러야 되나?”
코카인은 손등으로 뺨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소리 증폭에 따라 효과가 달라져서 장애물 없이 가까운 거리가 좋습니다.”
“그럼 제발 그 꼴같잖은 가면이나 벗어. 가까이서 보니 더 구역질 나니까.”
“죄송합니다. 가면을 벗는 건 규칙 위반…….”
“아, 됐어. 얼굴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4곡씩이나 불러야 되나? 앞으로 두 곡만 해. 노래도 좀 색다른 거 없어?”
코카인은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차 사장님은 지금 기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처음부터 너무 강렬한 곡만 하면 무리가 옵니다. 노래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도 기력이 소진됩니다. 어느 정도 심신이 안정되면 본격적인 치료에…….”
“말만 뻔지르르하게 하지 말고 실력으로 보여 봐. 뭐, 사실 선곡은 나쁘지 않아. 후추 빠진 카레 같은 네 목소리가 문제지.”
“…….”
헤쉬쉬는 경악에 가까운 눈으로 코카인 안색을 살폈다. 코카인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명환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너 진짜 힐러 맞나?”
“무슨…….”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건 과장된 소문이라 치고, 김 회장님뿐만 아니라 네 노래를 들은 사람은 사이비 종교신자같이 굴던데 대체 어딜 보고 그렇다는 거지?”
“……그것도 과장된 소문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 같군. 어찌 된 게 사기꾼보다 못해. 걘 완벽하게 제멋대로 불러댔지만 한눈팔지 못할 만큼 몰입시키는 힘이 있는데 말야.”
거침없는 말은 차라리 욕설에 가까웠다. 진심으로 칼을 갈게 하는 남자다. 차이석과 차명환, 다른 뉘앙스지만 속을 긁어 오기를 부추기는 형제들임은 틀림없다. 코카인은 바닥에 주저앉는 자존심을 잡아 일으키듯 고개를 올곧이 들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간신히 끌어올린 입꼬리가 떨렸다. 부디 그것이 미소로 보이길 바라며. 문득 침대 가에 산소 호흡기가 보였다. 폐에도 암세포가 퍼졌다고 들었는데 차명환이 호흡기에 의지한 건 한 번도 본 적 없다.
“산소 호흡기는 안 하십니까?”
“얼마 전부터 뗐어. 뭐, 산 좋고 물 좋은 데라 그런지 이제 도움 없이도 숨쉬기 편해졌으니까. 진통제 맞는 횟수도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진통제 없이는 잠을 못 자는 건 매한가지지.”
차명환은 갑자기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귀가 아파.”
“어떻게 말인지…….”
“뭐라고 하나…쇠 긁는 이명 같은 게 들릴 때마다 귀와 머리가 찌르듯이 아프지. 그때마다 입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설명하기 어렵군.”
뻑뻑한 그의 눈동자는 초조하고 갈증 나 보였다. 함께 얘기하는 내내 정신은 딴 데 가 있는 양 시선에 초점이 없었다. 마치 억지로 약을 끊은 중독자처럼 말이다. 저 강박적인 행동이 적어도 자신 때문은 아닌 거다. 차명환은 거뭇한 피부를 긁다가 불쑥 물었다.
“걔 몇 살이야?”
“예? 누가…….”
“야바인지 뭔지 하는 사기꾼.”
“……23살입니다.”
차명환은 움푹 들어간 눈동자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나이가 있네. 생긴 거나 목소리도 그렇고, 십 대인 줄 알았는데.”
그는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침대 끄트머리에 휙 던졌다.
“걔 번호 찍어.”
“죄송합니다. 직원들 번호는 함부로…….”
“잔소리 말고 찍으라면 찍어.”
차명환의 안광은 투지로 불타올랐다. 코카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폰을 집어들어 야바의 번호를 찍어주었다. 폰을 낚아채간 차명환은 번호를 확인하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번호도 꼭 저 같은 걸 했군.”
그리고 차명환은 한참 동안 번호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이 방에 도착했을 때도 차명환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했다. 숙소에서 나서고, 별장에 도착해 이 방문을 열 때까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이 일을 거절하는 게 가장 현명하지만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건 진심이다. 하지만 끝내 망설이는 건 혹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차이석 때문이었다. 이 사기극을 시작한 것부터 그가 형제의 죽음을 바란다는 의미다. 관두든 도전하든 차이석이라도 결정해준다면 한결 편할 텐데 그는 철저하게 방관자 입장만 고수했다. 과한 생각이든 아니든, 시험당하는 기분을 떨칠 수 없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상념을 부쉈다.
“뭘 하고 있어? 나가.”
차명환은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하아…….”
방을 나섰을 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노래에 힘을 쏟아부어서인지, 차명환이 안겨준 모멸감 때문인지 현기증이 났다. 노래하는 내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정말로 환자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마음이었냐고. 그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힐러로서의 마음가짐이 진짜였냐고. 물론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어느덧 오기 부리며 노래하는 자신이 있었다.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중요하다면서?”
별장에서 나와 차고에 걸어갈 때 헤쉬쉬가 말했다. 사려 깊은 목소리에 비해 눈길을 엉뚱한 데 가 있다.
“그래도 힐링 효과가 없는 건 아니야. 처음에 사람들은 나를 의심하고 거부하지만 일단 힐링을 시작하면 눈에 띄게 효과가 나타났고…….”
“중독 증상을 일으키니까?”
헤쉬쉬가 말을 가로챘다. 그는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차명환 아마 속으로는 감탄했을 거야. 똘아이한테 사기당한 게 괘씸해서 덩달아 너까지 곱지 않게 보는 거겠지. 예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네 노래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어.”
“…….”
차명환은 내내 모욕적인 눈초리와 언사를 퍼부었다. 힐러를 믿지 않아 경계하는 사람은 많이 봐 왔지만 경계의 밑면에는 호기심도 깔렸다. 그런데 차명환은 일말의 호기심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혼신을 다해 노래한 뒤 남은 감정은 오물 같은 모멸감뿐이었다. 굳은살 없는 유연한 감정에 언제부턴가 불온한 감정이 곪아 갔다. 야바는 매일 이렇게 살았을까.
“야바는 어떻게 버텼을까?”
“똘아이잖아.”
그가 딱딱한 농담을 던졌다. 그런 대접을 받아서 정신이 망가진 걸까, 정신이 망가져서 그런 대접을 받은 걸까? 코카인은 헤쉬쉬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정에서의 일도 그렇고, 헤쉬쉬는 내내 찬바람만 풍겼다. 그럼에도 제 감정을 죽이고 이렇게 위로하고 있다. 가수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지만 가장 마음 터놓는 사람은 헤쉬쉬뿐이다. 물론 헤쉬쉬는 그것도 모자라 더 캐내려고 하지만 말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영원히 친구로 두고 싶다. 헤쉬쉬 팔을 팔꿈치로 쳤다. 그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툭, 툭, 몇 번 건드리자 그는 피식 웃고 만다. 그러다 팔로 코카인 목을 감더니 질질 끌고 갔다.
“진짜 얄미워 죽겠다니까.”
“아, 아파!”
코카인은 헤쉬쉬에게 끌려가며 웃음을 거뒀다. 예전에 차명환과 비슷한 케이스를 본 적 있다. 그 환자 역시 온몸에 암세포가 퍼졌는데 겨우 눈만 뜨고 있었다. 더 볼 것 없이 가망 없는 사람이라 포기 의사를 밝혔지만, 가족들이 간곡하게 원해서 하는 수없이 치료에 들어갔다. 힐러의 노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에너지가 있다. 그 힘의 폭발력을 조절하지 않으면 듣는 환자가 몇 날 며칠 기절하는 때도 더러 있다. 그래서 같은 곡목이라고 해도 발성법과 힐러가 싣는 감정에 따라 감상용과 치료용으로 구분하는 거다. 더군다나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사람은 제대로 앉아 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결국 자신의 노래는 암세포의 번식력을 따라잡지 못했고, 그 사람은 며칠 뒤 죽고 말았다. 코카인은 차명환이 있는 별장 3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차명환은 어째서 저렇게 몸을 가눌 수 있는 거지? 내리 4곡을 부르는 동안 멀쩡하게 앉아 있었고,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기엔 믿기 어려울 만큼 눈빛은 왕성하게 살아 있었다. 그리고 차명환이 말했던 호조 된 증세들. 정말 그 말마따나 이런 곳에서 요양했기 때문일까?
차명환은 둘째치고서라도 차이석은 예전 자신의 노래에 눈에 보일만큼 반응했다. 노래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다. 피부로, 눈으로, 혀로도 듣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자극도 느끼지 못한 눈이었다. 마치 그들 주변에 강력한 막이 에워싸 무의식으로의 통로를 가로막은 것처럼…….
야바는 침대에 널브러져 느리게 눈을 끔뻑거렸다. 햇볕이 쏟아져 책상과 방바닥에 반사됐다. 지긋지긋한 햇살을 블라인드로 가리고 싶지만 침대에 눌어붙은 몸뚱이는 꿈틀거림마저 거부했다. 코카인은 일찍부터 별장에 출장 갔다. 지금쯤 차명환은 속았다는 배신감을 잊고 코카인의 아름다운 음색에 함락됐을 거다. 헬렐레 거릴 모습이 눈에 훤했다. 코카인 노래를 안 들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듣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그 방에 차이석도 함께 있을지 모르겠다. 업무를 미루고 그 먼 곳까지 달려가 그 의자에 앉아, 차명환과 똑같은 눈으로……. 그날 그들이 시큰둥했던 건 독극물이 일으킨 일시적인 기적일 터였다. 모로 돌아누워 갈색 케이스를 열었다가 닫았다가 반복했다. 썰렁하게 남은 알약 두 개가 좁은 공간에서 뒹굴었다. 부드러운 달칵거림이 시계 초침 소리 같다.
진실은 누구 입장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요정에서 내내 신경 써주고, 차이석 스스로 낸 상처로 구급상자를 부끄럽지 않게 만들었다. 푸석한 성탄절에 생각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 당시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것이 왜 시간이 지났을 때야 제대로 보일까. 코카인을 의식한 질투 유발 작전이건 뭐건, 그 순간만은 코카인이 고통받았다는 게 중요했다. 제 혀를 씹은 듯한 코카인 낯빛이 떠올랐다. 베개에 코를 묻으며 비죽비죽 웃었다. 자신의 행복보다 코카인의 불행에 더 몰두하는 스스로가 가끔은 가여웠다.
“밥 왔어. 나와.”
문틈으로 모르핀이 동그란 낯을 내밀었다. 거실에 나가니 고자 가수들은 상에 둘러앉아 점심 먹는 중이었다. 모르핀이 자리에 앉으며 툴툴거렸다.
“시켜먹는 것도 지겹구만. 뭐니뭐니해도 집 밥이 최곤데, 누구 때문에 인스턴트 아니면 꼬박 시켜먹어야 하는 신세라니…….”
야바는 시선을 들어 모르핀을 쳐다보았다. 모르핀은 큼지막한 눈을 굴리며 밥그릇에 코를 박았다.
“그, 그러니까 앞으로 칼 같은 거 훔치지 말라고, 걱정돼서 그러잖냐…….”
모르핀은 입을 한 대 빨 내밀다가 표정을 바꾸었다.
“그런데 똘아이. 너 차 전무랑 무슨 사인지 말해. 전에 왜 차 전무가 여기 와서 너를 들춰 업고 갔냐고? 어? 애들뿐만 아니라 나도 궁금해 죽을 뻔했다.”
“채무관계가 있는 사이야.”
“무슨? 자세히 좀 말 해봐!”
모르핀은 열을 올렸다. 더 상대해 주기도 성가셨다. 야바는 수저를 들고 오늘 메뉴를 확인했다. 1인분 뚝배기에 담긴 북엇국이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처럼 속이 보이지 않는 음식은 질색이다. 거기에다 침을 뱉었을 수도 있고 머리카락이나 손톱, 토막 난 바퀴벌레가 있을지도 모른다. 북엇국을 뒤적거리고 안전한 걸 확인한 뒤 밥을 쏟아붓고 퍼먹었다. 헤로인이 숟가락을 상에 올리며 말했다.
“요즘 사장 말야. 완전 인상을 팍 구기고 다니던데 왜 그런 줄 알아? 말 시켜도 듣는 둥 마는 둥이고…….”
차이석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애간장 탔을 거다. 뭔지 몰라도 이 일에 대해 대가도 받기로 했을 텐데 눈앞에서 날아갈 위험에 처했고, 차이석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니 열심히 머리 굴리는 중일 거다.
“생리하나 보지. 아주 그냥, 그 새끼 똥줄 타는 표정 보니 없던 입맛까지 돈다니까?”
모르핀 말에 고자들은 큭큭거렸다. 헤로인은 혼자 심각했다.
“웃어넘길 게 아니라 얼마 전부터 가게 얼쩡거리는 깡패들 머릿수가 늘어난 거 같더라. 무슨 전쟁 직전에 보초 서는 마냥 말야. 찜찜해 죽겠단 말이지.”
차 회장이 언제 공격할지 몰라 경계를 강화한 거다. 이것이야말로 고자들이 알 리 없는 진정한 남자들의 세계였다.
“그나저나 사장이 요새 또 애들을 물색 중이라던데?”
“뭘?”
“가수 말야. 원래 9명이었잖아. 2명은 도망치려다가 공항에서 그렇게 됐고, 얼마 전에 마리화나 도망쳐, 메사돈… 벌써 4명이나 비었잖냐. 그런데 마리화나는 어떻게 됐을까?”
필로폰은 입맛을 쩝쩝대며 말했다. 모르핀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야바는 북엇국에 든 감자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걔 안 와. 지금 파라디소 지하층에 있어.”
고자들 눈이 튀어나올 듯했고, 모르핀은 숟가락을 든 채 굳어 버렸다. 헤로인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지하층이라니…무, 무슨 소리야? 마리화나가……그럼 네크로필리아들이 득실거리는 데 있단 말야? 너 또 약 처먹고 헛소리하는 거지?”
“아니.”
“너 이 새끼.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똑바로 말해……!”
고자들은 험악한 얼굴로 진실을 부정했다.
“아 씨발! 밥맛 떨어지게 왜 그 얘길 하고 지랄이야!”
모르핀은 숟가락을 내던지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룸메이트를 밀고한 죄책감을 떨치려 몸부림칠 거다. 고자 가수들은 누구도 밥을 먹지 못했다. 야바는 밥알 한 톨도 남김없이 긁어먹었다. 노란색 바구니에 빈 그릇을 차곡차곡 올리고, 물 한잔 마시고, 방으로 들어와 죄다 토해 버렸다.
내장까지 게워낸 양 몸이 늘어졌다. 다시 침대에 늘어져 눈만 끔뻑이는 반복이었다. 야바는 손을 팬티 속에 넣고 음낭을 만지작거렸다. 노래를 넣지 않은 음낭은 바람 빠진 풍선 같다. 베개 위에서 기절한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시커먼 액정은 오늘 한 번도 불을 밝히지 않았다. 차이석은 그날 밤 친절을 마지막으로 모든 걸 단절했다. 크게 충격받은 건 아니다.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고 지금 예상대로 가는 중이니까. 오히려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시간이 더 불편했고, 무기력한 이 시간이 편안했다. 코카인 흉내 내는 것도 짜증 났는데 차라리 잘 됐다. 가벼워진 머리에 비해 몸은 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차이석과 함께하는 동안 규칙적인 생활이 죄다 흐트러졌다. 바야흐로 잃었던 규칙을 재정비해야 할 때가 왔다. 그동안 못 갔던 미용실에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어느덧 머리카락이 눈썹 아래로 내려와 눈두덩까지 덮었다. 모르핀이 따라붙으려는 걸 간신히 떼놓았다. 모르핀은 앞잡이 스타일이다. 그는 고자들이 무슨 얘길 하는지 기억했다가 기하에게 고해바쳐서 모두 멀리하는 편이다. 밀고자와 앞잡이. 환상적인 조합이지만 언제든 버려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친구는 만들지 말자는 주의다. 간신히 모르핀을 떼어 놨더니 이번엔 깡패 두 마리가 달라붙었다. 놈들은 기하의 명령이라며 물러나지 않았다. 야바는 구불거리는 골목을 걸어가다 그들을 절묘하게 따돌렸다. 미용실에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화공약품 점에도 들려야 했다. 아까 힘 조절이 안 돼 코카인을 위한 독극물을 정수기에 모조리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행여 깡패들이 따라붙을까 봐 외진 골목으로만 다녔다. 그때 바지에서 기절해 있던 휴대폰이 웅웅거렸다. 심장 박동이 급격하게 부풀었다. 폰을 들어 번호부터 확인했다. 그러나 생전 처음 보는 번호에 어깨가 늘어졌다. 바지에 집어넣다 말고 끈덕지게 진동하는 폰을 주시했다. 이 끈질김이 차이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접을 수 없었다. 혹시 다른 번호로 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야바는 조심스럽게 폰을 받아들었다.
“……왜?”
상대는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역시 아닌가. 그냥 끊으려는데 대뜸 머리도 꼬리도 없는 말이 들렸다.
[누가 근본 없는 것 아니랄까 봐 전화받는 꼬락서니 하곤…….]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건 분명 차명환 목소리였다.
[잘못했다고 빌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들어? 아버지가 니들 가만 안 두시겠다는 걸 내가 간신히 말린 줄 알아.]
“그 얘긴 서로 끝났으니까 나머진 이석이한테 따져.”
[끝까지 잘못했단 소리 안 하지.]
궁금했다. 왜 이 시간에 전화했는지보다,
“그런데 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 너 스토커야?”
[아직도 천지 분간 못 하나 본데, 네까짓 거 정보 하나 못 알아낼 것 같아? 사는 곳, 가족사항, 모조리 캐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저세상 보낼 수 있어.]
“제발 좀 알아내 봐. 나도 잃어버린 나를 좀 찾게. 그래서, 왜 전화했는데?”
[당연히 사과받으려고 했지. 이제 두 번 말 안 해. 지금 당장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빌어.]
코카인에게도 사과 한마디 안 했던 자신이다. 그건 괜한 아집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철칙이었다.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이상 그때부터 진짜 죄인이 된다고.
“싫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싫어. 용건 끝났지? 끊는다.”
[끊기만 해! 진짜 가만 안 둬.]
“코카인 노래 듣고 얼른 쾌차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야. 그럼 끊어.”
[좋아.]
차명환이 황급하게 말을 꺼냈다. 바싹 약오른 얼굴이 절로 상상 됐다. 긴 한숨이 들리고 한층 낮은 음성이 들렸다.
[차라리 안 받고 말지. 너 같은 거한테 반성을 바란 자체가 어불성설이니까.]
야바는 눈썹을 구겼다. 차명환이 말했다.
[말귀를 잘 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내가 용서해 준다고 말하는 거야.]
“말귀 못 알아듣는 건 너야. 난 용서 필요 없다고 말했어.”
[아, 다 됐고, 일단 노래나 좀 불러 봐.]
낮게 깔린 목소리에 털이 오소소 기립했다. 독극물의 기적은 아직 지속 되는 모양이다. 아니면 갈 때가 다돼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내가 왜 너한테 노래해 줘야 되는데? 이제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정신 고문이나 하자 이거야?”
[잔말 말고 일단 노래부터 불러 봐. 아, 이럴 게 아니라 지금 차 보낼 테니 별장에 와. 아니, 그전에 일단 노래부터 불러 봐.]
“너 진짜 암세포가 뇌까지 퍼졌어? 정신 차려. 나 코카인 아니야.”
[그걸 누가 몰라? 서로 돌려 말할 것도 없겠군. 좋아. 얼마면 되지? 한 곡당 천만 원이면 되나?]
“그 돈 내가 줄 테니까 좀 먹고 떨어져.”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거지?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일일이 열거해야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다는 걸 알아먹을 거냔 말이다.]
“너 한참 잘못 짚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만은 그런 협박 안 통해.”
[꼭 죽는 게 안 무섭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런 것들이 막상 눈앞에 닥치면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다시 죽을 수 없어.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신음처럼 말했다.
[그래. 다 좋아. 이런 말 하는 내가 한심하고 짜증 나 죽겠지만, 지금 네 노래 안 들으면 미치겠으니까 그래.]
이번에 침묵한 건 야바였다. 모든 게 드러났는데도 지금 차명환은 사기꾼에게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자신의 노래를, 코카인 노래가 아니라……. 그건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입술 거스러미를 뜯자 금세 피가 나왔다. 벌어진 살에 맺힌 피를 쪽쪽 빨다가 정신을 번뜩 차렸다. 이렇게 살살 꼬드겨서 쥐도 새도 모르게 생매장하려는 거다.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 야바는 표정을 단단히 고치며 말했다.
“지금 누굴 반푼이로 알아? 또 전화하면 경찰에 신고할 줄 알아.”
가차없이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악다구니하는 휴대폰을 바지에 쑤셔 넣었다. 외출했던 목적을 실행하려고 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찬바람이 할퀸 양 뒷목이 오싹했다. 또 다. 오늘 내내 이런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지켜보는 선뜩함 말이다. 머리는 정면에 둔 채 눈동자만 굴렸다. 골목 모퉁이, 주택 옥상, 물탱크……. 시선이 닿는 반경 안을 빠르게 훑어도 인기척은 없었다. 줄기차게 우는 폰을 무시한 채 천천히 걸어갔다. 골목 귀퉁이를 돌자마자 바람 소리가 날만큼 달렸다. 아무 집에 들어가 대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하아…하아……숨을 할딱이며 머리를 굴렸다. 벌써 차명환이 살인청부업자를 보낸 걸까? 아니면 역시 차이석 쪽일까? 굼뜬 차명환이 벌써 움직일 리 없으니 우선 후자 쪽에 마음이 기울었다. 어쩌면 이 시간, 코카인과 헤쉬쉬도 양평 호숫가에 발에 돌을 매달고 사투 중일지도 모르겠다.
날뛰던 심장이 진정됐을 무렵 대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좁은 골목엔 쓰레기조각과 돌멩이가 전부였다.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들어 이마에 박힐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행인이 배에다 칼을 꽂고 유유히 사라질 수도 있다. 아무래도 외출은 그만둬야겠다. 야바는 시멘트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타구니에 끼인 수표가 존재를 알렸다. 뒷주머니에서 약 케이스를 꺼내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수돗가가 앞에 있지만 그 안엔 몸에 해로운 온갖 약품과 세균이 득실댈 거다. 수도꼭지에 닿은 손을 거두고 약은 그냥 삼켜버렸다. 약기운이 돌면 조금 더 대범해진다. 그때 숙소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무릎을 세워 그 위에다 턱을 얹었다. 휴대폰을 꺼내 번호 저장 목록에 들어갔다. 제일 첫 번째에 있는 차이석 번호에서 멈췄다. 훔친 번호 위를 벌레가 기어 다녔다. 잠깐 비었던 음낭은 ‘네크로필리아와 이 사기극의 내막’으로 채워져 금세 든든해졌다. 차이석은 능수능란하므로 어설픈 협박 정도는 가볍게 비웃을 거다. 시간을 들여 치밀하게 구상하고 실행에 옮겨야만 이 인고의 시간도 보답 받는 거다. 어느새 늘어난 벌레들이 까맣게 액정을 덮었다. 벌레를 털어내고 서늘한 번호를 만지작거리자 지문이 꼬리를 늘어트렸다. 갈라진 시멘트 바닥과 허름한 마당 풍경을 멍하게 보았다. 해질녘 마지막 빛이 물거울에 반사돼 눈을 시리게 했다. 문득 목구멍이 조여왔다.
[20분째 그냥 앉아만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뒤지던 이석의 손이 속도를 떨어트렸다.
“왜요?”
[갑자기 어떤 집에 달려 들어가더군요. 아무래도 낌새를 눈치챈 것 같은데……. 하지만 보통 이 거리에서 지켜봐도 알아채는 사람은 지극히 드뭅니다. 과대망상증 환자나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만 아니라면 말이죠.]
남자는 덧붙였다.
[그리고 조금 전 누군가와 통화하던데요. 내용은 거리 때문에 듣지 못했습니다. 도청도 가능하니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이석은 어정쩡하게 걸린 손을 움직여 담배를 꺼내물었다.
“근방을 어슬렁거리는 사람이나, 따로 접촉하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지금 잠깐 외출하는 것 외엔 계속 숙소에서만 있었습니다. 누구와 얘기도 안 하고 종일 멍하게만 있더군요.]
“아직도 그대로 있습니까? 어떤 표정입니까?”
[거리가 있어서 자세한 표정까진…….]
어떠한 감정이 심장을 묵직하게 비틀었다. 이석은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라이터를 쥐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여 폐 속 깊숙이 빨아들였다. 강렬하진 않지만 당분간 이 대마초 향으로 아득한 갈증을 버틸 생각이다. 내장을 훑고 나온 연기가 공기에 퍼졌다.
“잘 지켜봐요.”
통화를 마치고 책상에 기대앉았다. 차 회장이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 차명환은 곧이곧대로 믿지만 이번 일을 그냥 넘길 리 없는 늙은이다. 몇 걸음 떨어진 테이블에서 성재는 소파 팔걸이에 팔을 걸었다.
“야바위한테 붙인 사람? 아까도 전화 왔었지 않나?”
“수시로 보고하라고 했거든.”
성재는 한쪽 눈썹을 질끈 올렸다.
“그건 감시냐? 보호냐?”
“둘 다.”
이석은 고개 돌려 창문에 담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도시는 포화 된 욕망 덩어리를 감당치 못해 허덕거렸다.
“태령이 이 손에 떨어질 때까지 변수는 얼마든지 있어. 내가 테러당하고, 너와 브레인들이 배신하고, 강기하가 병신 같은 짓으로 배에 구멍 내고, 차명환이 살아나는 최악의 최악까지 말이야. 이제 코카인과 야바도 포함이야. 코카인은 이성적인 녀석이지만 단언 못할 게 사람이란 족속이지.”
성재는 혀를 내두르며 양팔을 벌렸다.
“나의 배신까지 네 계획에 포함됐다는 사실이 서운해야 되는데 딱히 그렇지 않다는 게 슬프군.”
성재는 묘한 눈길로 물었다.
“그런데 왜 야바위만 사람을 붙였지? 코카인도 사실을 알고 있는데 말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니 좀 더 주의하는 게 좋으니까.”
“귀찮게 그러지 말고 돈이나 두둑하게 찔러 줘. 인종과 시대마저 초월하는 게 바로 돈이며, 그런 애들한텐 특효약이잖아?”
“그런 타입은 물욕이 없어. 오히려 자극 시킬 수 있지.”
패를 숨기고 계산하는 기교는 없지만, 그때그때 감정으로 부딪혀온다. 그만큼 상대방도 휩쓸리게 하는 파괴력이 있다.
“코카인이 왜 마음에 드는 줄 아나?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은 상대방에게 선을 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게 만들지. 그런데 야바는 전혀 달라. 그런 타입은 상대를 미치게 해. 같이 있기만 해도 판단력을 떨어트리거든.”
속물처럼 굴다가도 순진한 처녀처럼 군다. 눈을 즐겁게 하지만 머리는 어지럽히는 녀석이다. 차 회장이 신나게 가짜 코카인을 밝히고 다닐 때 자신은 파라디소 사장과 야바를 두고 흥정하고 있었다.
‘나한테는 내키는 대로 하지 마. 전에 말했잖아. 나 누구한테든 말 안 가린다고. 기분 틀리면 차명환한테 무슨 소리를 할지는 나도 몰라. 나는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어. 나는…….’
그 협박이 귀엽게 봐줄 수준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차 회장 표적에 들어갔고, 그쪽에서 야바에게 따로 접촉할 수도 있다. 입단속 차원에서도 감시는 필요하다. 이석은 왁스 한 머리를 뒤로 넘겼다. 흐트러졌던 머릿결은 금세 제 모양을 되찾았다.
“아마 당분간 얌전할 거야. 상심한 고양이를 좀 쓰다듬어 줬으니까.”
이석은 손에 감긴 붕대를 가볍게 펴보였다. 딱히 계산한 행동은 아니었다. 구급상자를 들고 있던 야바 표정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지금껏 누구도 여기까지 오게 한 사람은 없었다. 잠깐 이성을 잃은 건 여기까지다. 태령이 이 손에 완벽하게 떨어질 때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어디선가 어두운 심해 같은 울림이 귓가에 스몄다. 그리고 어김없이 고막을 찢는 이명이 왔다. 습관적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담배 연기에 감긴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차이석 모친은 잠옷차림으로 침대에 늘어져 노래를 감상했다. 음률에 완벽히 빠져든 눈은 지난번보다 평온해 보였다. 확실히 그녀는 차이석, 차명환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예전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이렇게 감격스러울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조용한 아리아가 물러났다. 그녀는 낮잠에서 깬 듯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 켰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둘둘 말았다.
“너 처음 왔던 날부터 계속 푹 잤어. 그렇게 숙면한 건 오랜만이야. 덕분에 술도 절반밖에 안 마셨지. 그게 네 노래 때문인지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이고.”
“네.”
“말할 때 목소리가 노래할 때와는 다르네. 차분하고 깨끗하게 생겼을 것 같아. 네 목소리가 어떤 악기를 닮은 것 같아 생각했는데, 플롯 같아. 난 음악은 질색이지만 악기 소리는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거든.”
“감사합니다.”
코카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말투며 생각하는 거며, 역시 모자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헤쉬쉬는 차에 있으라고 했다. 이 집에 오는 것조차 못마땅해하는 그가 차이석 모친 앞에선 오죽할까 싶었다. 어쨌거나 그의 모친을 만나는 시간은 색다른 기분이었다.
“간혹 제 노래와 상성이 안 맞아 처음에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약물이 몸에 안 맞는 것과 비슷한 건데, 그 단계만 지나면 효과를 보실 겁니다. 혹시 그날 이후에 특별한 이상증세는 없으신가요? 두통이나, 속이 메스꺼우시다거나…….”
“두통은 이석이가 있고. 그 자식 불면증도 심해. 허구한 날 밤에 나돌아다니는 것도 그 때문일 거야. 도대체 그 방랑벽은 누굴 닮았는지 몰라.”
코카인은 쓰게 웃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을까? 본가에 오면서 내심 차이석이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는 기대를 말끔하게 날려버렸다. 그간 수도 없이 노래를 들려줬으나 그의 두통은 잡지 못했다. 아마 뇌 질환이라기보다 심리적 원인이라 짐작한다. 심리적인 질병은 노래를 듣는 순간만 고통에서 해방 시킬 뿐 환경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완벽한 치유는 어렵다. 더욱이 차이석같이 강인한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뿌리까지 피폐한 사람은 내면 아래까지 범접하기 어렵다. 천장을 향해 누웠던 그녀가 몸을 뒤집으며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내일은 계열사 안주인들과 모임이 있으니까 안 되고, 모레 또 와.”
“네.”
“한 곡 더 하고 가.”
“그럼, 이번엔 가볍게 들으실 수 있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코카인은 노래를 시작했다.
Once upon a dream…….
꿈에서 한번은…….
We was lost in love's embrace, There we found a perfect place ,
우리가 사랑의 포옹에 침잠했어요. 거기서 우리는 완벽한 장소를 발견했지요.
Once upon a dream…….
꿈에서 한번은 말이에요…….
그녀는 눈을 감고서 멜로디를 음미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지고 있었다. 출근 전에 잃어버린 폰을 사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헤쉬쉬는 야바가 제 입으로 변기에 버렸다고 전했다. 헤쉬쉬는 그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자신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애라면 그러고도 남았으니까. 그 일에 관해 더는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코카인은 가면을 벗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몰아닥쳐 땀을 얼렸다. 그때 정원 자연석에 앉아 있던 인영이 길쭉한 선을 그리며 일어났다. 세준이었다. 그는 분홍빛 조명을 받은 채 다가오지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형제이기 때문일까. 그들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졌다. 야바가 형의 생존 사실을 부정한다고 하면 뭐라 할까? 야바와 한방을 쓰고 있다면 뭐라고 할까? 적어도 야바 허락을 받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차씨 형제들 때문에 기분이 엉망인데 저 형제들까지 머리 아팠다. 코카인은 자신이 다가가기로 했다.
“아까 안 보이던데 계속 있었어요?”
거리를 좁히자 세준은 흠칫했다.
“여기에서 채우 노래 듣고 있었어요. 숨도 못 쉴 만큼 아름다워서…….”
말을 흐린 그는 무언가 경이로운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눈이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거기… 아파요?”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자신의 가슴 언저리였다. 다시 시선을 들었을 때 고요하게 응시해오는 눈동자가 있었다.
“채우는 나를 안 봤지만 나는 계속 보고 있었어요……. 거기가 아파 보였어요.”
“…….”
확실히 아이 같은 면이 있다. 다 큰 어른이 가진 눈이라기엔 지나치게 깨끗해서 경계하면서도 방심하고 만다. 코카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형, 예전보다 많이 좋아진 거 같아요. 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예전엔 몇 문장밖에 구사 못 했잖아요.”
“채우 노래 때문이에요.”
“아…….”
그가 자신의 노래를 들은 건 고작 두 번 정도다. 아무리 세월이 지났다고 해도 저렇게 눈에 띄게 나아졌다니…. 자폐증은 못해도 몇 달 이상은 잡아야 완쾌한다. 간혹 같은 질병에도 몇 번의 힐링으로도 놀라울 만큼 효과를 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자신과 파장이 잘 맞는 경우다. 세준은 목장갑을 벗고는 바지에 앞뒤로 닦아냈다. 코카인 손목을 감싸더니 다짜고짜 잡아끌었다.
“보여줄 게 있어요.”
“무슨…….”
“따라와요.”
“어디로…자, 잠깐만……!”
당황스러웠다. 신장에서부터 차이 났지만 손목을 감은 손아귀 힘이 엄청났다. 그대로 대문 앞까지 끌려갈 때였다. 헤쉬쉬가 험악한 얼굴로 달려와 세준을 뜯어냈다.
“뭐야? 이 새끼.”
헤쉬쉬는 세준의 멱살을 잡아채더니 대문에 몰아세웠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세준은 금세 돌변했다. 순한 눈이 한순간 살기를 띄웠다. 경보음이 머리를 울렸다. 코카인은 헤쉬쉬 손을 잡아 풀었다.
“어서 손 치워! 아는 형이야.”
헤쉬쉬 눈이 일그러졌다. 코카인은 세준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말했다.
“어릴 때 한 동네 살았던 형이야. 어서 사과해.”
헤쉬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아마 세준의 외모가 그를 더 경계하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세준의 정체를 알고 나면 뜯어먹으려 덤빌 거다. 헤쉬쉬는 가까스로 표정을 고쳤지만 입은 꽉 다물었다. 하는 수 없이 코카인이 나섰다.
“형, 미안해요. 제 친구가 뭘 오해했나 봐요. 성격이 불같아서 그러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세준은 그 어떤 감정 없는 눈으로 헤쉬쉬를 목도 했다. 조금 전 살기는 환영인 듯이 불순물 없는 눈망울이다. 코카인은 세준에게 눈인사만 남기고 헤쉬쉬를 밴으로 끌고 갔다. 자리 잡자마자 헤쉬쉬가 물었다.
“혹시 저 새끼 때문에 늦었어?”
“사모님이 노래를 계속 청하셨어. 제발 그 성질 좀 죽일 수 없어?”
차가 출발했다. 코카인은 안전벨트를 매며 헤쉬쉬를 노려보았다.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딴전을 부렸다.
“거봐. 차명환이 비정상이라니까. 분명 죽을 때가 다 돼서 그런 걸 거야. 저 여자도 가산 다 들어먹는 건 아닌지 몰라.”
헤쉬쉬는 차이석 본가 저택에 조소를 뿌렸다. 코카인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말했다.
“사장님 말야. 아직도 다른 힐러를 찾느라 전국에 수배해 놨다고 했지?”
“그렇다고는 하더군. 미친 새끼. 그 새낀 언젠가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거세하면 힘이 유지된다. 이 힘이 영원불멸할지, 언젠가 밑을 드러낼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알 문제이다. 사장은 아마 그날을 대비하고 있을 거다. 그런 날이 온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코카인은 헤쉬쉬에게 시선을 틀었다.
“만약에 사장이 다른 힐러를 찾아낸다면……나와는 조금 다른 타입일까?”
“다른 타입이라니? 어떻게?”
“글쎄. 듣는 사람의 의식까지 점령하고 중독을 일으킬 만큼 강한 힐러 말야. 부친의 연구 외에 아직 감춰진 사실이 훨씬 많을지도 모르잖아.”
“너만큼 중독성 있는 음색이 또 어딨겠어? 네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열렬한 신봉자가 되지. 얼마 전에 힐링 받은 바이올리니스트와 배 뚫린 장 의원도 너한테 선물까지 보냈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의 정신을 망가트릴 만큼 파괴력을 지닌 목소리 말야…….”
자신에게 힐링 받은 사람들은 모두 건강해졌다. 그 중 정신적으로 불완전한 사람들이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스스로 망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걸 훨씬 뛰어넘는, 누구를 막론하고 듣기만 해도 미치게 만드는 그런 목소리.
헤쉬쉬는 피식 웃었다.
“불안해?”
뜻밖의 질문이었다. 코카인은 질문을 되돌렸다.
“뭐가?”
“혹시 너를 뛰어넘는 힐러가 나타날까 봐 불안한 것 같아서. 걱정 마. 설령 다른 힐러가 나타나도 넌 최고니까.”
헤쉬쉬는 코카인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웃을 수 없었다. 그런 걸까?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이 자리에서까지 내려오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처음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고 회의를 느꼈지만 죽어가는 사람이 되살아났을 때의 희열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헤쉬쉬는 코카인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설령 무슨 일이 생겨도 사장은 너한테 함부로 못해. 그 새끼 너를 은근히 두려워하잖아. 정확히는 네 비명소리. 그래서 칩 박은 거고. 옛날에 너 사장한테 덤비다가 숙소 거실 창문 박살 냈을 때 그 새끼 표정 볼만했지.”
헤쉬쉬는 코카인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칩, 내가 꼭 빼줄게.” 앞에 탄 깡패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그 맹목적인 믿음이 눈을 가린다. 그게 족쇄가 되기도 하지만 가끔은 편리하기도 하다. 헤쉬쉬는 상체를 구부리며 시선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힐러들은 아마도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겠지. 아름다운 목소리로 신과 소통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메신저. 노랫소리로 병을 고치지만 비명에 담긴 가공할 힘은 상상을 초월해.”
코카인은 퍼석한 미소를 집어문 채 말했다.
“풍부한 성량으로 훈련받은 사람이면 창문 박살 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너나 다른 가수들도.”
“하지만 사람 두개골을 박살 내는 위력은 아무나 못 가졌지.”
헤쉬쉬는 그 끔찍한 힘이 경이로운 듯 눈을 빛냈다. 코카인은 숨 막힐 것 같은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유리에 투영된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래. 맞아. 아무나 가질 수 없지…….”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 천사와 악마의 언어를 모두 가진…….
사이드미러, 그 좁디좁은 공간에 갇힌 세준이 점점 작아졌다. 강아지 같은 까만 눈동자가 주인 잃은 강아지같이 하염없이 서 있었다. 눈을 깜빡거린 찰나의 사이, 그는 환영처럼 사라졌다. 속도를 올린 차가 퍼석한 과거 위를 내달렸다. 눈을 감자 환청 같은 목소리가 아련했다.
내, 내가…… 지켜줄게요…. 채우… 괴롭히는 사람들은…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