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20화 (20/42)

힐러-track18

양평 별장에서 30여 분을 달려왔다. 차가 멈춘 곳은 수백 평에 육박하는 한옥식 저택 입구였다. 웅장한 건물은 헐벗은 병품림과 안개까지 더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몽환적인 공간이었다.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가 뛰어와 이석에게 90도로 인사하고 차 키를 넘겨받았다. 다른 남자의 안내를 받아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마당 중앙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갔고, 소나무와 자연석이 곳곳에 있었다. 어디선가 가야금 뜯는 소리에 섞여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개량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비녀까지 하고 돌아다니며 그 풍경의 하나로 녹아들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붉은색 한복 치맛자락을 끌며 다가와 허리를 구부렸다.

“그동안 격조하셨습니다. 전무님.”

차이석은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했다. 기생 같은 여자는 이석에게 잔조로운 눈웃음을 뿌리고, 뒤에 있던 일행에게 인사했다. “이쪽으로…….” 여자는 몸을 살짝 틀며 손을 내밀었다. 표정과 손짓까지 세심하게 훈련받은 듯한 몸가짐이다. 외경은 한옥풍이지만 내부는 동서양이 조합된 곳이었다. 여자는 3층 계단으로 올라가 제일 끝방에 멈추고 여닫이문을 열었다. 객실 한쪽에는 커다란 병풍과 벽엔 수묵화가 있고, 가구마다 금박으로 된 전통문양이 박혀 있었다. 방 중간에 길쭉한 테이블을 기준으로 양쪽에 등받이로 된 좌식 의자가 정렬됐다. 벽 한쪽에 난 창문 외엔 철저히 밀폐된 공간이었다. 장소만 다르다 뿐 파라디소나 여기나 오십 보 백 보인데 코카인은 껄끄러운 낯빛이다. 그때 반대쪽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 네 명이 들어왔다. 은은한 사향 냄새도 함께였다. 당장 사극에 출현해도 될 법한 차림인데, 모두 고전적인 미인이지만 도회적인 세련미도 풍겼다. 야바는 저 여자들의 용도가 뭘지 생각하며 이맛살을 구겼다. 차이석은 서열이 제일 높아 보이는 여자에게 눈짓했다.

“오늘은 식사만이야.”

여자들은 일제히 걸음을 물렸다. 코카인은 단정한 미간을 찡그리며 차이석을 보았다.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그랬었지. 먹을거리가 다양하니까.”

차이석은 묘한 말만 남기며 중간쯤에 자리 잡았고, 코카인은 자리에 서서 호화판 내실을 감상했다. 야바는 중간에 빠져나와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은 깨끗했지만 군데군데 갈라진 벽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처녀 귀신이나 검은 고양이 울음 같은……. 벽에 얼룩진 자국은 망령들이 들고난 표식 같다. 이렇게 외진 곳에 요정이 있는 것이며, 이석을 보는 기생의 눈초리며 미심쩍은 게 한둘 아니었다. 야바는 찜찜한 심경으로 균열 난 틈새를 힐끗거렸다. 먼저 온 누군가 변기 하나를 차지하고 오줌 줄기를 뿌렸다. 남는 변기가 있지만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누가 있을 때 소변은 안에서 해결하는 편이다. 자칫 소변기에서 볼일 보다가 쭈그러든 음낭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공중목욕탕엔 얼씬 않는 이유기도 했으며, 고자 가수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좌변기는 겉보기에 깨끗했지만, 세균이 수십만 마리가 득실거릴 거다.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 지퍼를 내렸다. 팬티를 끄집어당기자 랲에 싼 수표가 미끄러져 회음부와 입구를 꽉 눌렀다. 소변을 누고 탄력 없는 살덩이를 옷에 끼워 넣었다. 수표는 사타구니 살에다 잘 쟁여 놓았다. 밖으로 나오니 남자는 없었고, 코카인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야바는 자박자박 걸어가 남은 세면대에 자리 잡았다. 맞은 편 거울이 상반된 두 개의 육신을 여과 없이 비췄다. 야바는 시선을 내리며 액상 비누를 손바닥에 펴 발랐다. 코카인이 손을 털며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한테 할 얘기 있지 않아?”

야바는 질문을 되돌려줬다.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 잘하던데?”

“그럼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했겠어? 얼마나 어이없고 놀랐는지 알아?”

“돌아가지 말고 말해. 내가 네 흉내 내서 기분 나쁘다고.”

“너뿐 아니라 누구라도 나를 사칭하는 거 싫어.”

“내가 실수라도 했을까 봐 겁나?”

“그 걱정도 안 한 건 아니야.”

“그런데 어쩌지?”

야바는 물 묻은 손을 탁탁 털며 그를 직시했다.

“이석이가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길래 진짜 마음껏 해버렸는데.”

코카인의 미간이 싸늘해졌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절제된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 사람…… 이름 불러?”

그는 차이석이란 이름 석 자도 넘겨주기 싫은 모양이다. 답지 않게 핀트가 어긋난 곳에 신경을 세우는 꼴이 재밌지만 짜증스럽기도 했다.

“부르라고 지은 거 아냐?”

“전무님이 아무 말도 안 해?”

“전혀.”

코카인의 안색이 한층 더 얼어붙었다. 지금껏 보았던 어떤 모습보다 눈을 잡아끌었다. 그건 코카인에게서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자신에게선 너무나 익숙한 냄새이기도 했다. 야금야금 빼앗겨 빈손만 거머쥔 패배자의 악취 말이다. 등줄기가 저릿했다. 야바는 입술이 비죽거리는 걸 참으며 그 얼굴을 오래도록 감상했다.

“너는 차명환을 살려내서 명예도 얻고 싶고, 차이석한테도 잘 보이고 싶지? 하지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놔야 해.”

코카인의 입매가 차가운 색채로 물들었다.

“자꾸 자극하지 마. 지금 내 기분 별로니까 너까지 보태지 말란 말야. 진짜 차 전무님 형님 일 받아들이고 싶어지니까.”

“불가능하다고 그 입으로 말했잖아. 온몸에 암이 퍼진 반 송장을 무슨 재주로 살린다는 거야? 모두 너를 신처럼 떠받치니까 진짜 신이라도 된 줄 아나 보지? 전에 꼭 고쳐주고 싶다는 사람은 고쳐줬어?”

기습적인 질문에 코카인은 표정을 고쳤다.

“눈에 드러나는 병이 아니라 한 번 물어봐야겠는데.”

“그 사람, 꽤 오랫동안 힐링 했는데도 낫지 않으면 가망없는 거잖아. 차명환처럼 손 털면 그만 아냐?”

코카인의 이마에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그러기 싫다는 게 문제겠지. 도무지 그럴 마음이 안 들어.”

“고쳐주고 싶은 의지는 너로서야? 힐러로서야?”

야바는 신중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물었다. 코카인의 속눈썹 아래 드리운 그늘이 불빛에 일렁거렸다. 한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나로서야.”

손끝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코카인은 차분하게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차 전무님 형님. 다른 일 재치고 거기만 매달리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 거야. 진짜 한 번쯤 도전하고 싶기도 해.”

야바는 끓어오는 분노를 웃음으로 감췄다. 손목이 떨렸다.

“실패하면 걔들이 너 뜯어먹으려고 할 텐데, 니가 그 비난을 감당할 수 있어? 이석이도 안 반가워할걸?”

“그래, 그게 문제야.”

검은 동공이 흔들렸다. 코카인은 곤두세웠던 시선을 내렸다. 약점 아닌 약점을 쥐었지만, 그것으로 차이석을 이용할 생각은 없다. 그런 저급한 술수로 그를 쥐락펴락할 만큼 자신은 형편없지 않다. 그와 비밀을 공유하게 된 것이 신기했고, 자신이 그를 도왔고, 그래, 묘한 유대감으로 가슴 뛰었다. 그것뿐이다. 코카인은 말했다.

“차 전무님이 무슨 생각으로 너를 거기에 세웠건, 애초에 그 사람들이 원했던 건 나였어.”

“누가 뭐래?”

“그런데 왜 그렇게 빼앗긴 표정이야?”

“…….”

코카인의 말이 목덜미를 베었다. 야바는 머리가 날아간 사람 마냥 몸을 경련했다. 원상복구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야바는 차갑게 올라간 입술로 말했다.

“니가 차명환 일을 맡든 포기하든 상관없어. 걔 좀 찌질하지만 거짓말은 안 하니까 할만 할 거야. 앞으로 잘 달래줘 봐. 밋밋한 노래로.”

일순간 코카인 얼굴이 경직했다. 자존심 다친 그를 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좀 더 밟아주고 싶지만, 갑자기 모든 게 귀찮고 무기력했다. 자신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야바는 돌아서 밖으로 나왔다. 별장에서 출발 전에 털어 넣은 약기운이 핑 돌았다. 눈앞이 흐리멍텅하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복도 제일 안쪽에서 열린 문으로 객실 내부가 보였다. 길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이석과 헤쉬쉬가 마주앉아 있다.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차이석에 비해 헤쉬쉬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둘 다 코카인에게 정신 못 차리는 경쟁구도를 떠나, 먹이사슬 높낮이를 떠나, 그건 불알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헤쉬쉬가 차이석 앞에서 저런 표정인 건 자신이 화장실 칸만 이용하는 이유와 같을 거다. 그렇게 둘의 표정과 고환 유무의 상관관계를 되짚으며 걸어갈 때였다. 코카인이 한발 앞서 지나쳐갔다. 방으로 직행해 차이석 곁에 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자리였다는 듯이 망설임 없었다. 야바와 헤쉬쉬는 동시에 부동자세가 됐다. 딱히 차이석 옆에 앉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헤쉬쉬 옆에 앉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을 뿐이었다. 그건 헤쉬쉬도 동의할 거다. 차이석은 코카인을 힐끗 보더니 별말 없이 픽 웃었다. 진짜를 두고 굳이 가짜에게 옆자리를 내줄 이유는 없으므로.

야바는 다리를 질질 끌고 가 헤쉬쉬와 한 칸 건너뛴 의자에 늘어졌다. 뱃살이 접히든 말든, 퍼진 엉덩이가 좌식 의자로 삐져나오든 말든 마냥 무력했다. 헤쉬쉬는 심지 세운 눈으로 이석을 노려보았다. 차이석은 느슨하게 풀어헤친 눈으로 상대를 주시했다. 그 광경은 마치 한 마리 암뱀에게 똬리 틀어 혈투를 벌이는 숫뱀들의 싸움판 같았다. 물론 한쪽은 되다 만 수컷이지만 말이다. 코카인은 당황스런 낯빛으로 헤쉬쉬를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죠. 여긴 함께 일하는 가수예요. 가면을 써서 못 알아봤겠지만 저와 자주 함께 들어왔어요. 오늘 이상하게 혼자 가기 싫어서 함께 오자고 부탁했는데……. 그렇지?”

헤쉬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카인에 한해서는 한없이 물러터지는 그였다. 코카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 점을 이용하곤 했다. 코카인은 그를 친구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헤쉬쉬는 그런 코카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은 코카인의 도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헤쉬쉬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기색임에도 코카인과 차이석을 남기고 갈 리 없으니 억지로 참는 게 눈에 훤했다. 그건 야바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들러리들의 동질감은 공유하기 싫었다. 헤쉬쉬가 누그러든 얼굴로 메뉴판을 펼치자 코카인은 작게 한숨 쉬었다. 이내 차이석을 바라보며 청초한 입술을 도발하듯 휘었다.

“비싼 거 시켜도 되죠? 오늘 빚 제대로 돌려받을 거에요.”

차이석은 천천히 코카인을 응시하며 입술을 끌어당겼다. 그의 눈에 싸늘한 빛이 긁었다가 금세 사라졌다.

“깜찍하다니까.”

느리게 흘러내리는 음성은 생피부를 녹이는 뱀독 같았다. 코카인은 그 시선을 받아치다가 가만히 눈을 내렸다. 서로에게 겹치는 눈알을 찌르고 싶었다. 가고 싶다. 왜 이 자리에 끼어야 하는 지, 둘만 남겨두기 싫다는 이유로 이 자리를 인내해야 하는지, 다른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는 중이었다. 코카인은 메뉴판을 보다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어머니는 어떠세요?”

“그러지 않아도 내일 한 번 들리라더군.”

“오후 4시쯤 시간 되시나요?”

“아마도. 술병 끼고 침대에 뒹구는 게 일과인 양반이니까.”

코카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메뉴판을 보았다. 헤쉬쉬도 머리를 맞대고 음식을 골랐다. 차이석은 몸을 뒤로 젖히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남은 메뉴판을 야바에게 쭉 밀었다.

“여긴 정식이 제일 깔끔해. 회도 있으니까 참고 하고.”

야바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메뉴판을 보았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고집스런 시선이 콧잔등에 달라붙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야바의 사타구니를 두드렸다. 기하였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안 들렸으니까 안 받지.”

[애들 하는 소리가 대체 뭐야? 왜 코카인이 차명환 별장에 갔어?]

먼저 도착한 깡패들이 보고했는지 적잖이 당황한 목소리다. 야바는 말했다.

“차 회장이 사기당했다는 거 다 알았어. 전부 가만 안 두겠다면서 각오하래.”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아. 끊어.”

야바는 폰 전원을 꺼버리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차이석은 눈썹기슭을 꿈틀거릴 뿐 더는 묻지 않았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지금 팔자 편하게 요정에 있을 게 아니라 책상에 둘러앉아 앞으로의 일을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아니, 아무 생각 없어 보이지만 속으로 칼을 갈고 있을지 모르겠다. 굳이 이런 곳에 목격자들을 끌고 온 것도 꺼림칙했다. 기하는 그가 알아서 해결할 거고, 모르겠다. 이젠 생각하기도 귀찮다. 금박 무늬가 새겨진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방으로 안내했던 여자 뒤로 교자상을 든 나비넥타이 부대가 줄줄이 들어왔다. 테이블은 화려한 음식으로 꽉 찼다.

코카인은 물수건을 차이석에게 건네고 남은 찌끄러기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었다. 헤쉬쉬 안색은 더욱 굳어갔다. 여자는 테이블 중앙 올린 석쇠에다 고기와 버섯을 줄 세웠다. 도톰하게 썬 버섯과 양파를 달군 그릴에 얹고 투명 소스를 펴 발랐다. 마지막으로 파슬리가루와 와인을 살짝 뿌렸다. 불판에서 몸부림치는 버섯과 고기가 죽음의 냄새를 뱉어냈다.

“자연산 송이버섯이에요. 재배한 것과는 향부터가 다르죠. 살치살입니다. 오늘 무척 좋습니다.”

코카인은 익히지 않은 송이버섯을 들어 가볍게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가 입은 분홍색 니트는 남자에게 어울리기 힘든 색깔임에도 그에게는 해당이 없었다. 예쁜 입술에 고인 미소도, 아래로 늘어뜨린 속눈썹도 때 묻지 않은 대학생처럼 싱그러웠다. 저 하얀 얼굴을 불판에 지지고 싶어 창자가 뒤집힐 지경이다. 약기운은 혈관을 빠르게 돌아 육체와 정신을 점령했다. 야바는 눈을 녹일 듯한 불을 보며 무감각하려 애썼다. 탁탁거리며 불꽃을 튀기는 숯은 사람의 뼈 같다. 뼈의 춤사위 위에 유영하는 화염의 질감을 만져보고 싶었다. 문득 속눈썹에 불씨 같은 존재감이 와 닿았다.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힘겨이 들어 올렸다. 언제부터인지 맞은 편에 앉은 이석이 관자놀이에 손을 괸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여자의 손놀림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감겼다. 여자와 나비넥타이가 물러갔다. 차이석은 상체를 뒤로 빼며 의자에 늘어졌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불은 붙이지 않고 물고만 있다.

“그 일은 언제부터 했지?”

특정 대상 없는 물음이었다. 어색한 침묵 뒤에 헤쉬쉬가 대답했다.

“14살쯤 이후부텁니다. 모두 부모 없는 애들이 대부분인데 10년을 함께 지냈죠.”

“이탈리아어, 독일어로 능숙하게 부르던데 따로 교육받았나?”

“모두 중학교도 제대로 못 마쳤습니다. 사장님이 리스트를 뽑아주면 독음을 적어 외우는 게 전부죠. 가방끈이 워낙 짧아서요.”

“하지만 사람들은 너희 노래를 들으려고 오지.”

“정확히는 채우 노래죠. 아, 밖에선 서로 본명을 부릅니다. 마약 이름 불러대기가 그러니까요.”

헤쉬쉬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피력했다.

“이런 질문 받은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군요. 지금껏 가수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 궁금해하는 손님은 없었거든요.”

헤쉬쉬는 손님이란 말에 유독 악센트를 줬다. 하지만 차이석은 예민한 분위기를 간단히 헐겁게 했다.

“고기 익을 때까지 딱히 할 게 없으니까.”

“차 전무님 심심풀이로 때울 만큼 우리 사는 게 재밌지가 않습니다.”

“시궁창에서도 재미는 스스로 찾는 거야.”

헤쉬쉬는 입술을 비틀었다.

“사장한테 끌려와 외출도 거의 차단당하고 사육이나 다름없는 생활에서 무슨 재주로 재미를 찾으라는 거죠? 채우도 여기 안 올 수도 있었지만 누구 때문에 재수 없게 끌려온 거나 다름없지만요.”

“동우야.”

코카인은 다급하게 헤쉬쉬를 제지했다. 딱히 자신을 방어해준다기보다 불편한 과거를 떠올리기 싫을 것이다. 더군다나 차이석 앞이었다. 헤쉬쉬는 일기죽거렸다.

“평소엔 따박따박 쏴붙이더니 웬일로 조용해?”

야바는 테이블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맞은 편에서 차이석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가 캐물어 올까 봐, 헤쉬쉬가 입을 잘못 놀려 모조리 까발릴까 봐 신경이 날을 세웠다. 또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자신은 뭐라고 해야 할지, 온갖 상념이 앞섰다. 이미 기력은 바닥을 치는데 도무지 세상은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무기력한 머리에 비해 심장은 급하게 뛰었다. 야바는 헤쉬쉬를 똑바로 보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건 네 생각이야? 아니면 코카인 생각이야?”

“누구 생각이든 진실은 달라지지 않지.”

“그래서? 이제 와 어쩌란 건데?”

“뻔뻔하긴, 뭐 어차피 너한테 기대한 바 없어.”

헤쉬쉬의 눈에는 선명한 경멸이 박혔다.

“진실은 누구 입장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는 차이석이었다. 차이석은 검지와 중지를 앞뒤로 교차해 자신의 입술을 쓸었다.

“억울해할 필요 없어. 녀석 때문에 코카인은 예수보다 더 추앙받잖아?”

코카인의 눈길이 이석의 옆모습에 닿았다. 의식한 건지 못한 건지 분명 상처받은 눈이었다. “그래요…….” 코카인은 부서질 것같이 투명하게 웃었다. 자신도 저렇게 웃고 싶었다. 야바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헤쉬쉬는 연방 혀 삐뚤어진 소리로 대꾸했다.

“추앙이 아니라 인생 망친 겁니다. 잘 모르시면 상관 마시죠.”

흠, 차이석은 헤쉬쉬를 주시했다.

“다들 귀엽게 구는군. 오늘만 아니었다면 나도 느긋하게 놀아줬을 텐데 말야.”

그 순간 눈동자가 냉혈동물의 막처럼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밥상머리에 같이 앉았다고 해서 밥상머리 위로 기어오르면 못쓰지.”

습지대를 조용히 유영하다 공격적으로 몸을 내뻗으며 이빨을 드러냈다. 형체 없는 공격은 상대방의 골수를 헤집고 밑바닥까지 추락시킬 듯했다. 헤쉬쉬의 입매는 서서히 경직했다. 그는 위축된 눈초리를 거뒀지만 차가운 미소를 입술에 틀어쥔 것으로 오기를 부렸다. 이 중에 고자가 아닌 건 차이석뿐이었다. 그는 욕정을 느끼면 당연한 듯 발기하고 사정할 거다. 헤쉬쉬는 젖내나는 시비로 열등감을 감췄지만 어른에게 깡깡 대는 사춘기 애송이로 보일 뿐이다. 처음부터 승패는 정해진 거다. 딱딱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 분위기의 주범은 이내 시체에게 주의를 돌렸다. 차이석은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받친 채 야바에게 시선을 포개왔다.

“너는?”

야바는 맥빠진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뭐가?”

“진짜 이름 말야.”

“알아서 뭐 하려고?”

그가 입술을 살짝 끌어당겼다.

“부르게.”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약에 취한 듯한 그의 눈동자가 불안했다. 처음 야바라는 이름을 가르쳐줘도 다음날 깨끗하게 잊었듯이,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이번엔 견딜 수 없을 거다. 이 만찬이 끝나고 나면 부를 일도 없을 거다. 장세진은 밀고자. 밀고자 장세진. 차라리 밀고자보다 싸구려 마약, 숫말 발정제가 나았다. 차이석은 의자에 늘어트린 상체를 세웠다. 양쪽 팔꿈치에 체중을 싣고, 아래로 내린 야바의 눈 속으로 깊숙이 침투했다.

“왜 이렇게 힘이 없지? 마치 야채 박스에서 강제 동면한 뱀처럼.”

“…….”

야바는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씹었다.

“다 익었네요. 이제 먹어도 되죠?”

코카인은 능숙하게 차이석의 시선을 빼앗아 갔다. 차이석은 잠깐 그에게 향했던 시선을 회수했다. 다시 상체를 당겨와 집요하게 굴었다.

“자, 원래 이름이 뭐지?”

“말하기 싫어.”

“왜?”

“잊어버렸으니까.”

“믿기지 않는데.”

“그럼 믿지 마.”

그는 입술을 휘었다. 잘 빚어진 이목구비는 얄밉도록 태연자약했다. 그 전쟁통에서 벗어나 멀쩡한 건 차이석뿐이었다. 야바는 쏘아붙였다.

“내 이름보다 네 앞날부터 걱정해야 하는 게 정상 아냐?”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자는 주의거든. 다시 잘 생각해 봐. 그럼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잊어버렸는데 무슨 수로 기억해? 그냥 시시한 이름이었겠지.”

차이석은 한쪽 눈썹을 곤두세웠다.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이 모호한 빛을 띠었다.

“그럼 생각날 때까지 기다리지.”

그는 호기심을 깔끔하게 거둬들였다. 코카인은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작은 접시에 노릇해진 버섯과 고기를 담았다. 폭력과 담쌓은 손이 차이석에게 향했다.

“고마워.”

차이석은 물수건으로 손을 꼼꼼히 닦았다. 밤이면 마약을 털어 넣고 시체를 더듬는 데나 쓰는 손이, 지금은 거짓말같이 정갈하고 금욕적으로 보였다. 코카인은 고기를 담아 헤쉬쉬와 야바에게 내밀었다. 고의든 아니든 얼마나 잔인한 순서인지 알고나 있을까? 그래도 약올라 죽는 헤쉬쉬 얼굴은 지금껏 본 중에 제일 맘에 들었다. 차이석은 한 손에 상추와 깻잎을 겹치고 코카인이 건넨 버섯과 고기를 차례로 포개었다. 마지막으로 밥을 얹고 둘둘 쌌다. 그의 입으로 향할 줄 알았던 손이 앞으로 쭉 뻗어왔다. 종착점은 야바 입술이었다. 코카인은 숟가락질을 멈칫했다. 헤쉬쉬도 굳은 얼굴로 곁눈질했다. 야바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꽉 닫아 맨 입술을 그가 쌈으로 툭툭 두드렸다.

“자, 아 해야지. 나비야.”

야바는 혀를 깨물 뻔했다. 자신을 이용해 질투 유발하는 거다. 헤쉬쉬를 달고 온 코카인이 괘씸해서든 뭐든, 질 낮고 1차원적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코카인 얼굴이 흙 퍼먹은 마냥 어두워졌으니까. 목덜미에 불이 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질했다.

“싫어.”

“너무 큰가? 하긴 너는 입속이 좁으니까.”

차이석은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쌈을 베먹으며 모서리를 다듬었다. 이리저리 크기를 살피더니 재차 쌈을 내밀었다. 그는 입속에 든 걸 우물거리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코카인은 까만 눈망울을 굴렸다가 눈길을 피했다. 야바는 눈을 내리며 말했다. 불판에 지진 양 귀가 뜨거웠다.

“싫어. 침 묻었잖아.”

“자주 먹던 건데 새삼스러울 것 없잖아.”

아무래도 그는 코카인을 절벽까지 내몰 작정인가 보다. 코카인 안색이 하얘졌는데도 그치지 않았다.

“그만 해.”

“음?”

그는 못 알아듣는 척, 눈썹을 가볍게 들썩였다. 진심으로 저 두꺼운 얼굴 가죽을 불판에다 얹어버리고 싶었다. 여기 남아 코카인 속을 뒤집어주고 싶은 마음, 차이석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이 엉망진창 뒤섞였다. 끝내 참아내는 건 그의 친절도 오늘이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눈가가 빨개지도록 그를 노려보았다. 헐겁게 풀린 그의 눈이 짙게 반짝거렸다.

“그만 해. 그만 좀……읏.”

입을 벌리는 찰나 그가 입속에 쌈을 찔러넣었다. 깊이 들어온 손가락이 혀를 스치고 빠져나갔다. 야바는 얼떨떨하게 쌈을 입에 물고만 있었다. 차이석은 넘기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을 기세로 야바 입술을 감시했다. 불판 위를 산란하는 색채가 차이석의 검은 눈동자에 녹아들었다. 날름대는 혀로 그의 얼굴과 양쪽으로 뻗은 어깨를 핥았다. 내일이면 자신의 자리를 모두 빼앗긴다. 차이석이 위기를 모면하는데 코카인 공이 컸다. 하지만 차이석은 간과하고 있다. 이 모든 모략의 전모를 아는 건 코카인뿐만 아니란 걸 말이다. 게다가 자신은 그의 성 취향까지 알고 있으니 큰 약점을 두 개나 거머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란 거다. 그의 속 빈 친절과 이 버섯향을 즐길 여유 정도는 있단 거다. 야바는 꾸역꾸역 입 운동을 시작했다. 쫄깃한 육질과 송이버섯의 어울림은 오물 먹는 자신의 기분을 배반했다. 헤쉬쉬는 경쟁이라도 붙은 양 쌈을 싸더니 코카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코카인이 난감한 기색으로 손을 내밀자 헤쉬쉬는 그 손을 피했다. 그리고 홍조를 띤 채 말 그대로 쌈 싸먹는 소리를 했다.

“아, 해.”

“아니 그냥 먹을게.”

“어서.”

“…….”

한참의 실랑이 끝에 코카인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벌렸다. 예쁜 입술에 꼭 들어가자 헤쉬쉬는 노골적으로 차이석에게 눈초리를 보냈다. 이석은 피식 웃으며 여유로 가장하지만, 헤쉬쉬 손을 부러트리고 싶을 거다. 머리가 끓어올라 현기증까지 났다. 피가 빠르게 돌아 약기운도 솟구쳤다. 우걱우걱 씹어대는데 딱딱한 것이 이빨에 걸렸다. 그것만 솎아내 손바닥에 올렸다. 손가락같이 생긴 덩어리는 부패한 마냥 거무죽죽했다. 손가락같이 생긴 게 아니라 진짜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손톱까지 박힌 진짜 손가락 말이다. 읏, 야바는 소스라치며 손가락을 내던졌다. 비명도 못 지르고 엉덩이로 뒷걸음질치자 깜짝 놀란 벌레들이 피부를 뚫고 우두두 쏟아졌다. 무릎에 테이블이 찍혀 찬그릇이 나뒹굴고 물컵이 뒤집혔다. 세 명의 눈알이 중구난방으로 얽혔다. 패닉에 빠져 입에 든 걸 넘기지도 뱉지도 못할 때였다. 차이석이 벌떡 일어나 야바의 팔뚝을 세게 끌어당겼다. 손을 턱 아래에 내밀며 말했다.

“뱉아.”

야바는 잔기침하며 입에든 걸 그의 손에다 뱉었다. 그는 등을 두드리더니 진정된 걸 확인하고 물잔을 내밀었다. 야바가 뱉은 걸 빈 그릇에 털어내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코카인은 입을 벌린 채 얼었고, 헤쉬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살 안 찌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야바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일갈 했다.

“닥쳐.”

“친구가 없는 이유는 저거죠.”

헤쉬쉬는 아랑곳없었다. 야바는 허리를 숙여 조금 전 보았던 손가락을 찾았다. 바닥이며 테이블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 발길 뜸한 곳에 굳이 데려온 이유도, 차이석이 음식에 손도 안 댄 이유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먹은 건 독버섯이 틀림없다. 귀찮게 꼬인 목격자들이 독버섯을 먹고 정신을 잃은 사이, 잘 갈아 비료로 뿌리려는 거다. 조금 전 손가락은 앞서 당한 사람 것이 분명했다. 코카인과 헤쉬쉬에게 이 사실을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차이석에게 방심했던 그들의 실수니까. 누군가 야바 턱을 잡아올렸다. 차이석은 길쭉한 눈매를 좁힌 채 의식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저녁에 약 얼마나 먹었지?”

물속처럼 귀가 멍멍했다. 할싹 대는 제 숨소리가 이명 같다.

“……다섯 개.”

“과다복용하지 말라는 말 잊었어?”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볼을 툭 쳤다. 손가락이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 감촉이 머리를 더 눅눅하게 했다. 잠시 후 나비넥타이가 달려와 엉망이 된 테이블을 정리했다. 차이석은 송로 죽을 주문했다.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에 대지 않을 거다. 문득 차이석 손등이 시야에 걸렸다. 딱딱한 곳을 두드려 친 것 마냥 손등과 마디에 피딱지가 맺혀 있었다. 전혀 눈치 못 챘다. 별장에 가기 전만 해도 없었는데 언제 생긴 걸까. 야바는 생채기 난 손등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코카인은 젓가락질하다 야바의 눈길을 따라갔고 상처를 발견했다. 코카인 눈이 커다래졌다.

“여기 왜 이렇게 됐어요?”

차이석은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혀를 찼다. 야바는 입술을 잘근거리다 벌떡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비넥타이가 허리를 펴며 일어났다.

“약하고 붕대 줘.”

“누가 다치셨습니까?”

“이석이 다쳤어.”

“차 전무님이요? 어쩌다가요?”

“몰라. 어쩌다가 다쳤겠지. 빨리 약 줘.”

“아, 네. 벨을 누르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요.”

남자는 카운터 안쪽을 뒤적이더니 구급상자를 내밀었다. 그는 저보다 어린 사람의 반말 대거리에도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팁이라도 찔러주고 싶은 순한 눈이다. 그렇지만 팬티에 손을 집어넣고 수표를 꺼낼 순 없다. 백만 원을 주고 거스름돈을 달라는 것도 웃겼다. 야바는 약 상자를 들고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계단을 올라가 복도에 접어들었다. 객실에 가까워졌을 즈음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한복 여자들은 복도 한켠에 모여 노래를 경청했다.

“세상에…누가 부르는 거야?”

“쉿! 조용히 해. 노래 좀 듣게.”

심장 박동은 빨라졌고 걸음걸이는 늦춰졌다. 객실에 좀 더 가까워졌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어딘가를 쏘아보는 헤쉬쉬 뒷모습이 보였다. 그 시선 끝자락엔 차이석 손을 잡고 노래하는 코카인이 있었다. 아름다운 운율에 어느 순간 상처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유리조각처럼 박히는 광경에 균열 난 갈비뼈가 하나둘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진정한 고수는 결정타 한 방으로 승기를 거머쥔다. 노랫소리가 물러나고 코카인이 고개를 돌렸다. 문틈 너머에 서 있는 야바를 발견했다.

“어디 갔다 와?”

“아.” 코카인이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를 기점으로 야바 손에 들린 구급상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차이석은 구급상자를 오래도록 주시했다. 다시 올라온 그의 눈동자가 두텁게 반짝거렸다. 아무리 밋밋한 노래라고 조소해도 기적을 일으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기적의 노래 앞에 구급상자는 초라할 뿐이었다. 야바는 몸서리치며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 순간이었다. 과격한 파열음이 내부를 울렸다. 흠칫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코카인과 헤쉬쉬는 아연실색해서 굳었다. 깨진 창문 아래서, 차이석은 유리 조각이 박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펼치며 천천히 야바에게 시선을 박았다.

“이런, 또 다쳤어.”

그리고 가끔은 예상 못 한 변수가 튀어나와 상황을 뒤엎기도 한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는 진짜 미친 게 틀림없다. 관자놀이로 땀이 흘렀다. 핏빛에 함몰된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상자가 와르르 쏟아지며 내장을 토했다.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환청 같다. 소란한 진동이 바닥에 널브러진 육신을 두드렸다. 몸이 붕 떠올라 어딘가로 옮겨졌다. 따뜻한 공간인 것 같다. 희미한 약 냄새도 났다. 예리한 바늘이 팔뚝으로 파고들었다. 언뜻언뜻 굳은 얼굴의 차이석이 보였다. 그 어깨너머로 훨씬 더 굳은 코카인이 아른거렸다. 그를 노려보는 헤쉬쉬의 눈빛은 차가웠다. 어느 순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차이석이 두 개로 분산했다가 세 개로 갈라졌다. 그 중 하나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어른거리는 그에게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턱에 닿은 손가락에 그들이 일제히 자신을 내려다본다. 부패한 감정이 눈가에 차올랐다. 불빛을 등진 그의 얼굴이 추락했다. 유연한 턱뼈를 벌려 머리부터 삼켜지듯 모든 감각이 점멸했다.

대시보드에 올린 폰이 요란하게 떨렸다. 이석은 폰을 기울여 액정에 뜬 번호를 건조하게 주시했다. 파라디소 사장이다. 아마 지분이 물 건너갈지 모른다는 걱정에 애간장이 녹을 것이다. 약속한 지분은 정확하게 넘길 생각이다. 물론 다시 게워내게 하는 것도. 그전에 충실한 개로 길들이는 게 좋다. 그는 간절한 부름을 묵살하고 핸들을 돌렸다. 코너를 돌아 탁 트인 도로 가에 차를 세웠다. 먼저 정차한 검정색 BMW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성재였다. 창문을 내리자 그는 상체를 숙였다.

“갑자기 숙소를 옮기라고 해서 놀랐어. 우선 중요한 짐만 두고 근방 호텔로 옮겼는데 무슨 일이야?”

“차 회장이 사람을 붙인 것 같아.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거야.”

성재는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이석은 수표를 꺼내 빠르게 글씨를 휘갈겼다.

“빠른 시일 안에 새 숙소로 옮겨.”

성재는 수표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이. 여기 네 아파트 바로 위층이잖아.”

“움직이는 동선을 최소화하는 게 좋아. 홍콩사람 두 명쯤 물색해 봐. 똑똑한 놈으로.”

성재와 헤어지고 대로변을 달리는데 폰이 울렸다. 이번엔 차명환이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조작하며 폰을 귀에 댔다. 인사보다 한숨이 먼저 넘어왔다.

[아버지 조금 전에 가셨다. 가게고 뭐고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시는 걸 말리느라 애먹었어.]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참, 나 다음 달 서울에 정기 검진하러 간다. 며칠 서울에 있으면 너도 들리기 편할 거다. 얼마 전에 양 박사가 내 암수치가 줄었다고 하더라. 정확한 건 정밀 검사해봐야 아는 거고.]

“잘 됐군요.”

[공기 좋은 데서 지냈으니까 일시적인 거겠지. 이러다 만 거, 한두 번도 아니고 기대하기도 지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생각이 건강하면 몸도 건강해질 겁니다.”

[그래. 노력해야지. 코카인인지 뭔지 하는 애 말이다.]

이석은 청각을 곤두세웠다.

[내일 한 번 더 오라고 해라. 뭐,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김 회장님이 하도 성화여서 예의상 부르는 거니까. 이제 힐러란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려.]

코카인의 음색은 한 번만 들어도 쉽게 중독된다. 한때 그 노래를 들으려고 안달했던 자신이니 누구보다 잘 아는 바였다. 그러나 차명환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번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신기에 가까운 음색이 지금은 원액에 물을 탄 것처럼 미적지근했고 신경을 사로잡지 않았다. 어째서…….

코카인은 누구보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다. 유리관에 보관된 도자기 인형 같지만 스스로의 가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리한 구석도 있어 위험한 경계 이상은 넘지 않는다. 요정에서도 자신에게 모욕당한 앙금을 풀었지만 귀엽게 봐 줄만 한 수준이다. 얄팍한 약점 몇 개로 자신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헛꿈은 꾸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녀석이 눈 뒤집히면 더 매운 법이니까.

“내일 보내라고 하죠. 그럼 푹 쉬어요.”

[그 사기꾼 말이다.]

통화를 끝내려는데 차명환 목소리가 급하게 붙들었다.

[걔 진짜 이름이 뭐지?]

“야바라고 하더군요.”

[딱 저 같은 이름이군.]

쇳소리 나는 코웃음이 들리고 얼마후였다.

[혹시……그 사기꾼 연락처 좀 알 수 있나?]

“…….”

꺼림칙하던 예감이 적중했다. 이석은 혀로 입속 점막을 느릿하게 훑었다.

“글쎄요. 직원들 번호는 함부로 누설하지 않는 게 규칙이라더군요.”

[주제에 무슨……. 알았어. 그건 내가 따로 알아보면 되고, 너도 오늘 힘들었을 테니 얼른 쉬어라.]

통화를 끝냈을 무렵 아파트에 다다랐다. 지하에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장 비서에게 전화 걸었다. 10시 넘어선 시간이라 막 잠에서 깬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전무님.]

“메모 준비해.”

폰 너머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 뒤, 좀 더 맑아진 목소리가 들렸다.

[말씀하십시오.]

“사람 하나 붙여봐. 필요 이상 겁 많은 녀석이니까 눈치 못 채게 하고, 주소는…….”

끄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물었다.

[사진은 팩스로 보내실 겁니까?]

“없어.”

[사진이라도 있는 게 좋을 텐데요. 그럼 눈에 띄는 인상착의라도…….]

“20대 초반 남자에, 키는 177쯤, 몸무게는 65kg 정도. 창백한 피부에 눈이 크고 입술이 유독 붉은, 지나치게 야하게 생긴 녀석이지. 한눈에 알아볼 거야.”

[…….]

“자주 보고 해.” 이석은 낮게 덧붙이고 폰을 끊었다. 차 회장 이번엔 제법이었다. 융통성 없고 고지식해 보이지만 속은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다. 차명환을 위협할 조짐이 보이면 싹부터 제거해 보호막을 친다. 한때 자신을 한직으로 내몰았고 지금은 태령의 뒤 닦는 일에만 사용하는 걸 보면 알지 않는가. 다음엔 또 어떤 식으로 뒤통수 칠지 모르니 당분간 조심할 필요는 있다. 야바 또한 이번일로 차 회장 표적 안에 들어갔으니 안전하지 않다. 이석은 붕대 맨 손을 내려다보았다. 코카인이 힐링 한 손은 자신이 만든 상처로 뒤덮였다. 코카인이 다시 노래를 부르려 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는 느닷없이 비릿하게 웃었다. 이로써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고양이 때문에 다른 걸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녀석이 눈앞에 있으면 아무것도 뵈지 않는다. 그 강도와 시간은 점점 늘어난다. 차라리 마약이 안전할 만큼 위험한 녀석이다. 오히려 개운해졌다. 차명환 귓구멍에 더는 야바의 노래를 쏟아내지 않아도 된다. 녹신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머리를 좌우로 젖혔다. 요즘 따라 체중도 줄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두통이 신경을 긁었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쇳소리가 고막을 들쑤시는 극통이다. 엘리베이터가 도착음을 알리며 주둥이를 벌렸다. 이석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 안으로 다리를 뻗었다.

“……!!”

야바는 벌떡 튕겨 일어났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자신의 방이었고, 해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젯밤 차이석이 유리창 깨는 걸 보고 나서 기억이 없다. 바지와 상의에는 어제 그대로였고 피로 얼룩졌다. 전신에 힘이 빠졌다. 비어 있는 코카인 침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돈된 이불, 가방과 외투는 보이지 않았다. 별장에 갔겠지. 차이석 모친에게도 들리겠지.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주인 없는 침대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옷을 벗고 욕실로 갔다. 피 나도록 칫솔질했다. 샤워기가 토하는 찬물이 피부를 때렸다. 샤워를 마치고, 약을 먹고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따닥따닥, 이가 부딪혔다. 어제 하루 동안 누적된 피로가 몰아닥쳤다. 몸이 침대 아래로 빨려 갔다. 야바는 눈 감은 채 공기를 빨아들였다. 절망의 냄새를 맡아본 적 있는가. 그것은 곰팡내처럼 퀴퀴하거나 음식 썩는 악취가 아니다. 이렇게 평범한 곳에서 별거 아닌 모습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밑바닥까지 차근차근 갉아먹고 만다. 유통기한 지난 기억과 차이석의 약점. 그것은 자신이 움켜쥔 마지막 희망이다. 언젠가 다시 한번 비틀린 그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싶은 이 마음은 부스러기 같은 미련함이다. 이불을 둘둘 말아 코까지 덮었다. 그래도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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