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19화 (19/42)

힐러-track17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함정임을 깨닫고 발버둥쳐도 이미 발목은 덫에 물려 옴짝달싹 못 했다. 코카인은 혼란과 당황이 범벅돼 차이석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짓을 건넸다. 자신의 뒤에 있는 차이석이 어떤 표정인지 궁금했다. 등을 감싼 그의 손은 미동하지 않았다. 아마 그 머릿속도 비슷한 상황일 거다. 붉은색 히터가 더운 공기를 게워내도 오한이 일었다.

차 회장은 야바와 코카인을 눈여겨 관찰했다. 진품과 모조품을 가려내는 맹금류의 눈이었다. 차이석과 외모는 안 닮았지만 탐색하는 눈빛만은 부자지간임을 입증했다. 일자로 다문 입술이 열렸다.

“그래, 누가 진짜 코카인이지?”

감정 없는 음성이 현실로 잡아당겼다. 차 회장은 재차 물었다.

“대답하거라. 누가 진짜 코카인이냐.”

야바는 바닥만 흘겨보았다. 참담하게 엉킨 머리에 비해 마음은 차분했다. 코카인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망울을 떨구었다. 차 회장은 곁에선 김 회장에게 물었다.

“김 회장님. 다시 여쭙겠습니다. 노래를 들어보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김 회장은 야바와 코카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방안에서 들어 소리가 작았지만 저 아이 실력도 놀랄 만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코카인 목소리가 아닙니다. 코카인 얼굴을 본적 없어도 목소리만은 똑똑히 기억하죠. 코카인은 청아하고 맑은데 비해 저 아이는 어둡고 음습하군요.”

야바는 미간을 구겼다. 둘 다 가면을 썼어도 자신은 100kg에 육박하는 비계덩이고, 코카인은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코흘리개 애도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김 회장은 우습게도 목소리 가지고 열변했다.

“더 확인할 필요 없겠군.”

진품 감정을 마친 차 회장은 곧게 세운 허리에 뒷짐을 졌다. 나이에 비해 뼈대가 굵고 균형 잡힌 체형이었다.

“처음부터 힐러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오른 건 나 자신만 믿었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명환이가 원했고 지푸라기 잡는 심경으로 시도했지. 그런데 이상하더군. 김 회장님을 비롯해 수많은 환자를 고쳤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명환이는 더 악화 되는지 말이다. 백번 양보해서 힐러의 힘이 실존한다면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애초부터 힐러를 믿지 않았으니 명환이 상태를 가지고 문책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나를 감쪽같이 속였다는 거다.”

차 회장 눈길이 야바를 지나쳐 뒤에선 이석에게 도착했다.

“차 전무가 보낸 신상정보는 모두 위조됐더군. 가게도 강기하란 사장이 실소유주가 아니란 얘기가 있던데.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은 안 통한다. 니가 답 없는 놈이지만 멍청한 놈은 아니란 걸 아니까.”

“어서 대답해! 설마 모두 니가 꾸민 거냐?”

차명환이 참았던 분노를 내뿜었다. 자신이 매달린 게 썩은 줄임을 깨닫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차이석에게 시선이 빗발쳤다. 야바 등을 감싼 이석의 손가락이 툭툭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는 리듬처럼, 그 리듬에 등줄기가 떨렸다. 그는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아마 망설임 없이 발뺌할 거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기꾼 집단에 뒤통수 맞은 것뿐이라고, 혈육의 동정을 얻은 그는 이 불구덩이 속에 자신을 내던지고 여유롭게 탈출할 거다. 그것이 가장 편리했고, 그들의 이치에 걸맞은 해결법이니까. 결국 진짜 이방인은 자신뿐이니까. 등을 감싼 손은 의지할 버팀목이 아니라 단두대로 떠미는 집행관의 손일 터였다. 그가 안면 몰수하면 어떻게 할지 뇌가 뻐근하도록 생각할 때였다. 이석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야바의 심장도 맥동을 그쳤다. 차이석은 픽 웃더니 내려뜬 눈을 들었다. 조금씩 열리는 입술은 거대한 성문같이 느리고 육중했다.

“이런 날을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군요. 누구보다 형님만은 끝까지 모르길 바랬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차명환은 칼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석은 야바의 양어깨를 감싼 채 차명환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녀석이 코카인이 아닌 건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 제가 계획한 일이니까요.”

이석을 제외한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예상 밖의 대답에 야바는 움츠린 숨을 터트렸다. 그제야 몸을 틀어 훌쩍 큰 그를 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치고 올랐다. 그는 눈꼬리를 미세하게 접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 이 일을 의뢰했을 때 코카인은 바로 거절했습니다. 형님 상태를 말했더니 자신의 힘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더군요. 최고의 힐러조차 손대지 못할 만큼 형님은 악화된 상태인 거죠.”

가면 아래 코카인의 눈이 일그러졌다. 이석은 안색 한 번 안 바뀌고 뻔뻔했다.

“저 역시 힐러를 믿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매달릴 건 그뿐인 걸 형님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굳이 이런 짓을 해서 형님을 속인 건 플라세보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형님 마음만 편해진다면 가짜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상체를 구부려 야바의 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코롱향을 닮은 목소리가 야바 목덜미에 스몄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물론 힐러는 아니지만 이 녀석이 노래하는 순간만은 완벽하게 몰입하게 해서 잠깐이라도 고통을 잊게 하죠. 음색, 실력 모두 다른 가수와 비교해도 코카인과 견줄 만큼 매혹적이니까요. 말기 암까지 불가능할지라도 사람 목소리엔 어느 정도 치유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요즘 형님도 변화를 느꼈을 겁니다. 잠이 잘 온다거나, 사용하는 진통제 양이 미약하게나마 줄었다거나…….”

“그건…….”

차명환은 눈을 좌우로 굴릴 뿐 반박하지 않았다. 이석은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야바는 멀거니 눈만 감았다가 떴다. 아까 숙소에서 그에게 코카인도 차명환을 치유 못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했던 말을 집어문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살을 덧대고 시나리오를 만들어 정면돌파 하려는 거다. 당연히 잡아뗄 거로 생각했다. 그에겐 그게 가장 편리한 이치니까. 다시 이석의 시선이 명환에게 돌아갔다.

“그럼 이번엔 제가 묻죠. 만약 형님이 제 입장이었다면요? 암에 점령돼 매일 지옥을 사는 동생이 드디어 구세주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구세주가 미리 손을 털었습니다. 형님은 제게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란 말을 했겠습니까?”

“그야…….”

차명환은 입술을 꽉 여민 채 퀭한 눈동자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이석의 표적이 차 회장으로 옮겨갔다.

“코카인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주민번호 말소자입니다. 이 녀석도 마찬가지고, 그건 이미 조사하셨을 테니 아시겠군요. 불분명한 정보로 의심 사서 형님의 위안을 뺏을 바엔 위조라도 해서 안심시킬 생각이었습니다.”

차 회장은 한층 엄격해졌다.

“너는 단순히 의뢰만 맡은 것치고 지나치게 사정을 꿰고 있구나.”

“형님 일을 맡기는데 그 정도 조사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명환은 혼란스러운 시선을 떨어트렸다.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갔다. 차 회장은 코카인을 보았다.

“차 전무 말이 사실이냐?”

관심이 주목된 가운데 시선의 주인공은 입술을 달싹였다. 코카인은 차이석과 시선을 겹쳤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안아주고 싶을 만큼 처연했다. 저렇게 맑은 눈이 이 안에 감춰진 모사를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물 맑은 곳만 헤엄치던 고기가 진흙탕 세상도 있다는 걸 알 리가 없다. 야바는 냉소를 삼켰다. 뒤에서 규칙적인 그의 숨결이 야바 옷에 스며 늘어진 지방 사이에 배어들었다. 땀내가 날까 봐 온몸에 힘을 주었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가늠 못 할 시간이 지났다. 이윽고 코카인의 분홍색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차 전무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태연함을 고수하지만 차이석도 그러했을 것이다. 코카인은 회장을 직시했다.

“처음 차 전무님께 이 얘기를 듣고 거절했습니다. 지금껏 암 환자와 희귀병에 걸린 사람을 많이 접했지만 저조차 어찌할 수 없는 분은 돌려보냅니다.”

“어째서? 너는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재주를 가졌다고 들었는데 소문과는 다르군.”

“힐러는 신도 아니고 만병통치약도 아닙니다. 분명 한계가 있고 손댈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드님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아직 제가 부족한 게 많아서겠죠. 처음부터 직접 거절했어야 하는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코카인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가면에 매달린 크리스털 방울이 잔동하며 떨림을 전했다. 허리를 편 코카인과 시선이 맞부딪혔다. 야바는 차게 웃었다. 기품있는 매무새와 차분한 말투는 역시 진품다웠다. 어떻게 이토록 다른 것일까? 유전인자가 다른 걸까?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와 그 짧은 시간에 상황 판단을 마치고, 거짓말까지 곁들여 차이석을 보호했다. 누구라도 믿게 하는 목소리야말로 불알을 대가로 얻은 성역의 힘이었다. 그러나 차 회장은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다시 그는 차이석을 주시했다.

“모두 사실이라면 왜 나와 형수한테라도 언질 하지 않았느냐? 지금껏 우릴 속였는데 이제 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차이석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비밀을 담고 있기엔 사람 입은 너무 가볍고 천박하죠. 차라리 혼자 아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누님들이었어도 저는 똑같은 방법을 취했을 텐데, 회장님도 이렇게 나왔을지 궁금해지는군요.”

차 회장은 폐부를 찔린 양 어두워졌다. 차이석은 느긋한 관찰자로 변했다.

“언제 시간 나면 생각해 보시죠. 대답을 꼭 듣고 싶군요.”

한눈팔 틈 없이 당겨진 시선이 오갔다. 서로 가진 패를 탐색하고 교묘히 감춘 눈이다. 그들은 부자지간이라기보다 각자 다른 종족을 지배하는 포식자 같았다. 차명환은 둘의 눈치만 살폈고, 김 회장은 헛기침만 연발했다. 차 회장은 아들을 완고한 눈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이유 불문하고 너는 모두를 속였다. 아마 이런 날이 오지 않았다면 끝까지 모르는 척했겠지.”

“물론입니다. 형님이 이 녀석을 진짜 코카인이라고 믿으며 영원히 속아주길 원했습니다.”

“네 얘기는 한치도 어긋남 없이 아귀가 잘 맞는구나. 그런데도 믿어지지 않는 건 왜일까?”

흠, 이석은 엄지손톱으로 눈썹을 쓰다듬었다.

“거기까진 저도 어쩔 도리가 없군요. 마음 가는 대로 판단하십시오.”

그때까지 생각에 빠졌던 차명환이 끼어들었다.

“니가 한 말……전부 사실이냐?”

이석은 말없이 형제를 목도 했다. 차명환 표정이 차츰 흔들렸다. 다른 건 몰라도 차이석은 저 두 사람만큼은 완벽하게 파악한 모양이다. 차명환에게는 감정적인 면을 공략했고, 부친에겐 객관적인 대답으로 그들의 모서리 진 질문을 소화하고 마름질했다. 차명환은 한숨을 내리 토했다. 형제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은 혼란스러움으로 바뀌고, 가죽만 남은 안면을 신경질적으로 쓸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말했어야지! 어제 아버지께 처음 이 사실을 들었을 때 병신 된 기분이었어. 밤새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고. 왜 이런 사실을 숨겨서 널 오해하게 만드는 거냐. 이게 뭐야. 대체…….”

이석은 검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중얼거렸다.

“저도 이런 날이 영원히 오지 않길 원했습니다.”

차명환은 괴로운 신음을 내며 머리카락을 쥐었다. 복잡한 감정이 잔재한 눈이 일그러졌다.

“아버지도 이제 그만 하세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쁜 시간 쪼개서 별장에 들리고, 매달 산삼이다 뭐다, 저 챙긴 건 이석이 뿐입니다. 더는 오해하기 싫습니다.”

차명환에게서 격앙된 감정이 점차 물러가고 또 다른 절망이 그를 휩쓸었다.

“그래. 가망 없단 말이지……. 힐러라는 걸 믿은 내가 병신이었어. 세상에 그런 기적은 없어…….”

명환이 뼈만 남은 어깨를 부둥켜안고 중얼거렸다. 차 회장 이마에 짙은 비탄이 드리웠다. 희망을 잃은 남자의 절망 앞에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았다. 차이석은 고개를 내저으며 차 회장을 응시했다. 이걸 원했느냐는 듯이, 눈동자에 반사된 빛이 은밀한 조소를 감췄다. 김 회장은 헛기침하며 운을 뗐다.

“차 회장님. 차 전무 말도 일리 있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희망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차 전무의 배려심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코카인까지 저렇게 말하니…….”

노인은 코카인도 빠트리지 않았다.

“너도 놀랐겠구나. 할애비가 많이 원망스러워도 이해하려무나. 네게 미리 얘기할까 말까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단다.”

“아닙니다. 제가 김 회장님이었어도 그랬을 거에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김 회장은 고가의 도자기 보듯 눈을 빛냈다.

“보셨습니까? 이 아이가 이렇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아이를 어떻게 저런 병풍과 비교하겠습니까?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차 사장을 코카인에게 맡겨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

야바는 고개를 추켜올렸다. 추락하는 바위에 압사당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차명환 일을 짐짝으로 여겼던 자신이 충격받은 사실에 또 놀라고 말았다. 불현듯 이석의 손이 야바 어깨를 꽉 물었다. 그가 놀라서라기보다 안심시키는 손짓 같았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어깨를 감싼 체온으로도 진정이 안 됐다. 모두의 관심이 코카인 대답에 집중됐다.

“저는…….”

차 회장이 코카인의 말을 잘랐다.

“생각해 주시는 건 알지만, 더는 저들을 여기에 들이고 싶지 않군요.”

“물론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진짜 코카인이 더 빨리 왔었더라면 반드시 차 사장을 완쾌시켰을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믿으셔도 됩니다!”

김 회장은 ‘진짜 코카인.’이라는 단어에 힘을 실었다. 차 회장은 침묵했고, 차명환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김 회장이 말했다.

“아! 말로만 이러실 게 아니라 진짜 코카인 노래를 직접 들어보시면 어떨는지요? 분명 듣고 나면 마음이 바뀌실 겁니다! 천상의 목소리가 어떤 건지 아시게 될 겁니다!”

코카인은 난감한 안색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지런한 치아에 붙들렸다 나온 입술에 윤기가 감돌았다. 무심코 하는 행동마저 넋을 빼앗았다. 야바는 온 신경을 차이석에게 곤두세웠다. 애처로운 저 입술을 그도 바라보고 있을 거다. 이대로 몸이 타버릴 만큼 가슴에서 불구덩이가 끓어 올랐다.

“자! 어려워 말고 해 보거라. 그냥 너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단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모두 네 노래가 듣고 싶을 거다. 괜찮으니 어서 해 보거라! 어서!”

김 회장의 부추김에 코카인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차이석을 응시했다. 야바는 경련하는 입술을 씹으며 코카인을 노려보았다. 현기증이 날만큼 피가 솟구쳤다. 차 회장과 차명환은 여전히 곱지 않은 눈초리다. 그러나 코카인 노래가 끝나면 저 표정도 완벽하게 뒤바뀔 것이다. 천상을 보여주는 목소리니까, 기적을 노래하는 코카인이니까. 매번 심판대에 올랐던 코카인이기에 익숙하게 몸가짐을 정돈했다. 입술을 벌려 숨을 마시자 숨결 끝자락을 따라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천상에서 내린 미성이 빛의 파동처럼 퍼져 나갔다. 순도 높은 태양만큼 압도적이었다.

Ebben…… Ne andrò lontana…….

그럼……멀리 떠나갑니다…….

come va l'eco della pia campana. là, fra la neve bianca…….

경건한 종소리가 저 흰 눈 사이로 흘러가듯이…….

‘나 멀리 떠나가네.’라 왈리에 나오는 아리아였다. 고운 선으로 움직이는 입술에서 플롯의 청아함이 울려 퍼졌다. 조금 전까지 혼란에 범벅됐던 눈망울은 거짓말같이 우수에 젖었다. 커다래진 차 명환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김 회장은 들이켠 호흡만큼 탄성을 터트렸다. 공기를 부유하는 선율이 청중을 휘감았다. 긴장감 흐르는 공기를 허물어트리고 또 다른 긴장감이 넘쳐나게 했다. 비범한 힘과 달콤한 음색으로 세포를 자극하고 저들의 의심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파라디소 조명과 무대 없이도 충분히 신비로웠다.

Ne andrò sola e lontana…….

여기서 홀로 멀리 떠나갑니다.

come l'eco della pia campana, là, fra la neve bianca,

경건한 종소리가 저 흰 눈 사이로 흘러가듯이.

ne andrò ne andrò sola e lontana e fra le nubi d'or…….

여기서 홀로 멀리 떠나갑니다. 저 금빛 구름 사이로 흘러가듯이…….

풍부한 성량과 흠결없는 고음이 뻗어 나갔다. 김 회장은 감각의 만찬에 격동했다. 고음역에 올라서도 코카인은 농익은 감성으로 기교를 발산했다. 기교를 뛰어넘은 음색으로 신의 숨결처럼, 설원 창공에 흐드러진 오로라처럼 무아지경으로 이끌었다. 코카인은 완벽한 왈리였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원치 않는 사람과의 결혼을 강요당해 결국 고향을 떠나기로 한 왈리는 처연할 만큼 비장했다. 하지만 코카인은 왈리 같이 질투에 눈멀 일은 없을 거다. 어리석은 애증으로 연인을 눈사태에 휩쓸려가게 하지도 않을 거다. 연인의 죽음으로 도탄에 빠져 절벽에 몸을 던지지도 않을 거다.

상념을 배제한 깨끗한 목소리를 따라 코카인의 몸짓도 리듬을 탔다. 맑고 투명 소리가 야바를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음성이 탄력받을수록 신경 줄이 끊어졌다. 그의 혓바닥을 뽑아서 노래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문득 이석의 숨소리가 야바 목덜미에 흩어졌다. 더 짙어진 코롱향이 자신의 역한 땀내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코카인 노래에 얼마나 젖어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가면에 붙은 살갗에서 땀이 채였다. 벌레들이 우글우글 기어나와 혈관을 돌아다녔다. 야바는 살갗이 뜨끔하도록 뺨을 긁었다. 그때 뒤에서 뻗은 손이 야바 손목에 감겨 아래로 잡아 내렸다. “긁지 마.” 이석의 목소리가 귓불의 솜털을 간질였다. 잡아 내린 손이 야바 손가락에 얽히고, 그가 하체를 펑퍼진 엉덩이에 밀착했다. 목덜미에 내리는 숨결은 한층 짙어졌다. 야바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Ma fermo è il pie'! Ne andiam. che lunga è la vie! Ne andiam…….

발이 움직이지 않아도 가겠습니다. 길이 멀어도 가겠습니다…….

환상의 보이소프라노가 자아낸 운율 끝자락이 깊은 잔향을 남기고 흩어졌다. 코카인이 마지막 호흡을 내뱉을 때까지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긴 적막이 실내를 눌렀다. 잠시 후 김 회장은 고조된 목소리로 찬사를 보냈다.

“어떤가?! 정말 훌륭하지 않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러의 목소리라네!”

박수소리가 고막을 쩡쩡 울렸다. 차명환은 병색이 완연한 볼을 긁었다. 그 모습이 히스테릭해 보였다. 차 회장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코카인이 노래하기 전과는 분명 다른 눈빛이었다. 처음 조소하던 사람들도 노래가 끝나면 열렬한 광신자가 되니 결과는 뻔했다. 딛고 있는 바닥이 야바의 무릎까지 꾸역꾸역 삼켜갔다. 김 회장은 흥분 어린 빛으로 차명환의 대답을 기다렸고, 코카인도 새로운 청중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차명환은 침대에 기댄 채 코카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툭 던졌다.

“뭐, 좀 밋밋하지만 괜찮군요.”

말투만큼이나 시큰둥한 낯빛이었다. 코카인 입술이 하얗게 경직했다. 야바는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죽을 때가 다 돼서 귓구멍이 맛 갔나 싶었다. 그것도 아니면 괜한 아집이 분명했다. 그때 차이석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힐끗 보았다. 고개 들어 표정을 확인하는 순간 다른 의미로 멍해졌다. 코카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어김없이 몽롱함에 빠졌던 그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공연을 본 눈이었다. “왜?” 시선을 느낀 그가 낮게 물었다. 김 회장은 코카인 손을 주물락거리며 너털거렸다.

“허허…. 차 사장 지금 기분이 저조해서 그렇지 다시 들으면 아마 깜짝 놀랄 게야! 한 곡 더 부를 테니 집중해서 잘 들어보게!”

차명환은 코웃음 쳤다.

“제가 왜 일부러 집중해야 됩니까? 저를 집중하게 할 노래를 불러야죠.”

전례 없던 분위기에 코카인 얼굴빛에 핏기가 빠졌다.

“……죄송합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고개는 꼿꼿이 세웠다. 김 회장은 자신이 모욕당한 마냥 낯을 붉히며 코카인 눈치를 살폈다. 야바는 그제야 이 반응의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의 독극물이 코카인 성대를 망가트린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반응이 가능할 리 없다. 얼떨떨하면서도 오금이 저릴 만큼 희열을 느꼈다. 돌연 차명환은 악에 받친 얼굴로 주삿바늘을 뽑았다. 서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다리로 야바에게 걸어왔다. 차이석은 눈을 날카롭게 세웠다. 차명환은 험악한 숨을 뿜었다.

“다 필요 없고, 그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 전부 사실이냐? 너 그동안 나를 속인 거였어?”

야바는 턱을 치켜올렸다.

“남들 실컷 얘기할 때 달나라 갔다 왔냐? 애초에 나를 코카인이라고 생각한 건 니들이잖아. 그래서 그렇게 착각하라고 내버려 둔 거야.”

차명환은 콧잔등을 부들부들 떨었다.

“싸구려 따위가 감히 나를 기만해?”

“싸구려한테 살려달라고 구걸한 건 너야.”

“내가 언제 구걸했어?!”

“했어. 살려 달라고 질질 짜고, 훌쩍거리면서 애원했어.”

“헛소리 말고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해. 내 앞에서 빌어!”

“쥐약 먹었어?”

야바는 미간을 힘껏 찡그렸다. 차명환은 이를 드러냈다.

“죽여버릴 거야.”

“네 몸무게 두 배나 되는 사람을 무슨 재주로…….”

그때 야바 머리에 그림자가 졌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차 회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짜악――――――――!!

그 순간 야바 턱을 뻐갤 만큼 후려쳤다. 혼이 빠져나갔다 들어온 마냥 눈앞이 하얬다. 코카인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너무나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 쓸 틈도 없었다. 야바 얼굴에서 벗어난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탁탁…침대 아래로 굴러가 널브러졌다. 차 회장은 손을 내리며 말했다.

“더이상 되바라진 너를 받아줄 생각 없다. 나와 내 아들을 기만한 죄는 어떻게 갚을 테냐.”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야바는 독오른 눈을 치켜떴다. 늙은이 손목을 부러트리고 싶었다. 부러진 손을 저 입에 쑤셔 넣고 싶었다. 그러나 차 회장이 내뿜는 살기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

누군가 괴이한 신음을 터트렸다. 고개 돌렸을 때 차명환은 뭔가에 충격받은 눈으로 야바를 보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은 소 혓바닥으로 얼굴 전체를 핥은 마냥 역겨웠다. 그 순간 차이석이 야바 머리를 움켜잡았다. 휘익―――! 바람 소리가 날만큼 빠르게 잡아당겨 가슴에 파묻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균형을 잃었다. 입술과 코가 그의 가슴에 파묻혀 숨 막혔다. 뱃살에 두른 그의 팔도 맞댄 하체도 견디기 힘들었다. 몸을 뒤틀자 그는 머리통을 더 강하게 짓누르고, 허리를 부러트릴 듯이 옥죄었다. 이빨로 날고기 씹어 발기는 음성이 정수리를 관통했다.

“뭐하는 겁니까.”

“그 물건 내놓거라.”

“이 녀석은 시키는 대로 한 거란 말 못 들었습니까.”

차 회장은 눈썹 까딱 않고 야바 옷을 잡아당겼다. 나이답지 않은 완력에 옷이 뜯길 지경이었다. 야바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선뜩한 땀이 등골을 긁었다. 하지만 쏟아져야 할 폭력 대신 낯익은 숨결이 이마에 쏟아졌다. 눈 떴을 때 두 개의 손이 시야를 압도했다. 야바 옷을 움켜쥔 주름진 손, 그 손을 쥐어 비튼 젊은 손아귀. 불거진 심줄과 푸른 정맥은 사자 몸을 휘감아 내장과 눈알을 터트리는 거대한 뱀과 그 뱀을 물어뜯는 사자의 싸움 같았다. 차이석 눈이 번뜩였다. 그를 기점으로 석고처럼 하얘진 차 회장 손이 옷에서 떨어져 나가고, 부들부들 경련하며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내렸다기보다 강제로 끄집어 내려진 듯했다. 똬리 튼 손이 풀려나가자 차 회장 손목에 시뻘건 이빨 자국이 선연했다. 명환은 목젖을 울리며 침을 삼켰다. 부릅뜬 차 회장 흰자에 핏발이 섰다.

“너는 요즘 들어 그 얼굴을 자주 보여주는구나.”

이석의 눈동자에 독사 혓바닥 같은 빛이 할퀴고 갔다.

“흥분하지 말고 심호흡 좀 해 봐요. 훨씬 달라 보일 겁니다.”

“나를 기만한 죄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그 가게와 책임자, 이 일에 연루된 사람들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 너도 마찬가지다.”

“무서워서 지리겠는데요.”

차이석은 치아를 드러내며 비린 웃음을 걸었다. 차 회장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석은 야바 얼굴을 가슴에 숨긴 채 다른 손을 뻗었다. 민첩하고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으로 소파에 걸친 코트를 들었다.

“이 녀석 저녁 좀 먹이고 오겠습니다. 나머진 다녀와서 하죠.”

곧바로 문으로 걸어갔다. 방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 코카인의 굳은 얼굴이 어룽거렸다. 방을 나갈 때까지 기묘한 공기가 달라붙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형수란 여자와 마주쳤다. 여자는 차가웠다. 야바는 코웃음을 남겨주고 나왔다. 별장 밖으로 나왔을 때 다리에 힘이 빠졌다. 차고에 오는 내내 차이석도 자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코카인이었다. 어느덧 가면을 벗어낸 코카인은 전쟁터에서 빠져나온 양 핼쑥했다. 코카인은 야바를 보다가 이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얘기 좀 해요.”

차이석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야바에게 건넸다.

“먼저 가 있어.”

“어? 뭐야? 똘아이 아냐?”

차고에 들어서자 깡패들이 어리둥절해했다. 헤쉬쉬도 함께였다. 코카인 혼자 온 줄 알았는데 역시 껌 딱지다웠다. 헤쉬쉬는 껄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코카인은?”

아마 이 일에서 미련없이 손 털었을 거다. 코카인만 아니었다면, 하다 못 해 헤쉬쉬였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진 않았을 거다. 그건 마치 몇 년간 부은 적금을 품에 안고 가다 퍽치기당한 기분이었다. 야바는 헤쉬쉬의 질문을 묵살하고 차에 올라탔다. 정원 조명 옆에서 마주한 코카인과 이석을 주시했다. 헤쉬쉬의 눈길도 따라갔고, 뒤통수는 싸늘하게 굳었다. 멀어서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채색 풍경 속에서도 선명한 실루엣, 적당한 키 차이의 두 사람은 흑백 엽서의 한 장면 같다. 번갈아 토하는 입김은 서로에게 퍼붓는 키스 같았다. 코카인은 등 돌려 어딘가로 걸어갔고, 두 사람은 암전 속으로 사라졌다. 야바는 차 시트 홈을 손톱으로 쥐어뜯으며 사라진 그들의 종적을 좇았다. 차 회장에게 맞은 뺨이 이제야 뻐근했다. 개들이 유난히 짖어댔다. 경호원들은 미쳐 날뛰는 개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도베르만이 쇠줄을 끊고 달려가 코카인 목덜미를 물어뜯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코카인은 본 건물 뒤뜰로 가 제일 외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코트를 잡고 더 어두운 데로 끌어당기며 북받친 목소리를 눌러 쏟아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세요. 대체 어떻게……!”

차이석이 허리를 세우자 손에 물린 코트가 빠져나갔다.

“들은 대로야. 너 대신 야바가 힐러 노릇을 잠깐 했지.”

“아까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제가 아무것도 몰랐다고 했으면 어쩔뻔했어요?”

“나도 놀랄 만큼 능숙했어. 역시 넌 똑똑한 녀석이야.”

그 뻔뻔함이 기막혔다. 조금 전 일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납치당한 것보다 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야바의 행동반경은 모조리 꿰고 있는 편이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런 일을 벌였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그간 차이석과 붙어 다닌 이유를 알았으니 다리가 풀릴 만큼 안도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라 야바도 괜한 오기를 부리는 거라고. 예전부터 야바는 자신의 물건을 탐냈고, 실제로 훔쳐가거나 망가트린 적이 많았다. 김 회장이 노래하라고 부추겼을 때 당황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내심 기다렸다. 야바와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코카인은 긴 한숨을 퍼트렸다.

“형님 상태가 어떻죠? 아까 꼬치꼬치 여쭈실까 봐 얼마나 긴장했다구요.”

“담낭암이야. 폐와 간은 물론 주변 장기까지 암세포가 퍼졌고, 길어봐야 두 달이라더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경일 테니 조만간 차명환이 연락할 거야.”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그는 입술 끝을 살짝 올릴 뿐이었다. 자신이 이 일을 맡는다면 그에게 불리할 거다. 아니, 그런 걸 떠나 지금 형님 상태로는 가망 없다. 자신이 꼬박 매달려도 그 짧은 기간 안에 엄청난 암 덩어리를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힐러라는 초자연적 힘을 찾는 사람은 내몰릴 때까지 내몰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마지막 돌파구마저 좌절되면 그간 모든 원망과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것으로 순탄했던 이 생활에 흠집 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아까 자신이 노래했을 때 형님 반응은 뭐였을까? 차이석은? 조금 전 대질하는 내내 차이석도, 그의 형도 야바에게만 신경을 쏟았다. 살면서 한 번도 시선에서 소외된 적 없었다. 코카인은 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야바가 형님 앞에서 노래…했나요? 언제부터…….”

“이 주쯤.”

“야바 노래를 들은 사람은 전무님과 형님뿐인가요?”

“형수도 한두 번쯤 들었지만 이후론 차명환이 얼씬도 못 하게 했지. 그것 때문에 둘이 꽤 실랑이를 벌였다더군.”

한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그들이 야바의 노래를, 야바의 노래에……. 차이석을 따갑게 노려보았다.

“야바가 이 주씩이나 제 흉내를 내고 다녔다는 거군요. 누가 저를 사칭하는 거 불쾌해요. 그 애 성격에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죠? 이건 제 명예가 걸린 문제고, 이렇게 되면 전무님 모친 일도 껄끄러워서 못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거예요?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격렬한 입김이 공기에 부서졌다. 이석은 팔짱을 낀 채 벽에 왼쪽 어깨를 기댔다. 천천히 시선을 비틀어 코카인에게 향했다.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걸 말해야 되지?”

코카인 입매가 굳어갔다. 그는 나른하게 눈을 내리뜨며 코카인을 깔아뭉갰다.

“말해 봐. 너한테 명예라는 게 있는 줄은 몰랐는데? 설령 있다 해도 내가 왜 그따위 걸 신경 써줘야 되지?”

차가운 음성이 등줄기를 긁어 몸이 떨렸다. 목구멍이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예전처럼 짓궂은 농담도 질척한 눈빛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낯선 모습이었다. 코카인은 가면을 움켜쥐었다. 휘청이는 몸을 추스르며 촉촉이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제게 먼저 알려줬어야 했어요. 제가 전무님께는 그런 것도 이해 못 할 사람이었어요?”

차이석은 읽지 못할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했다. 코카인은 바람에 일렁이는 머리카락을 넘겼다.

“데려다 주세요. 가면서 제가 들어야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요. 야바는 제가 타고 온 차에 보내면 돼요. 또 이따 숙소에서 얘기하면 되니까…….”

그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니, 아니. 오늘은 하늘이 두 쪽 나도 고양이와 저녁 먹을 거야. 경치 좋은 레스토랑에서 칼질하건, 편의점에서 라면을 빨건. 아니면 내 기분이 진짜 더러워질지 몰라.”

“저녁을 사줘야 하는 건 오히려 저 아닌가요?”

코카인은 단단한 목소리를 뱉었다. 차이석의 시선이 이마를 관통했다. 지금 이대로 돌아가면 자신은 잠도 못 잘 거다. 숙소에서 야바의 조소를 마주할 용기도 없다. 아니, 그런 비웃음에 흔들릴 만큼 자신은 나약하지 않다. 야바도 한 번쯤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간 너무 비참했고 외로웠을 테니 자신을 흉내 낸 건 눈감아 줄 수 있다. 바닥에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바람에 비틀거렸다.

“저 아까 충분히 비참했어요. 이대로 사기꾼 취급당하고 돌아가면 아무것도 못 해요. 레스토랑에서 칼질하든,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든 상관없으니까 기분 풀고 들어가고 싶어요. 이대로 들어가면 야바와도 껄끄러울 거예요.”

차이석은 흥미로운 눈을 번뜩였다.

“내 대답에 따라 차명환에게 불려 갔을 때 네 태도도 달라지겠군.”

코카인은 고요하게 그를 마주했다. 쌍꺼풀 없이 찢어진 눈은 느른하게 취한 약물 중독자의 것이었다가, 사냥 직전의 파충류 같다가 수시로 변모했다. 바람에 날리는 코트 깃이 차이석의 턱을 두드렸다. 코트 깃 끝자락에 닿은 입술이 미끈하게 휘어졌다.

“너는 눈치가 빨라. 조금 전 내가 화나기 직전에 기막힌 타이밍으로 멈췄어. 지금도 네 자존심을 챙기는 선에서 내가 거절 못 할 미끼를 던졌지.”

“삶의 방식은 다들 제각각이죠. 그걸 탓할 순 없는 거예요.”

코카인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석은 눈을 번들거리며 중얼거렸다.

“탓할 생각은 없어. 오히려 마음에 드는 방식이니까.”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뽑아 코카인 볼을 툭툭 쳤다. 손가락은 밤 공기보다 더 서늘했다.

“너는 가면 쓰는 게 훨씬 매력적이야.”

손을 거둔 차이석은 어둠으로 걸어갔다. 무릎까지 떨어지는 진회색 코트가 이석의 긴 다리에 감겼다가 펄럭거렸다. 코카인은 벽에 기댄 채 사라지는 그를 응시했다. 자꾸 습한 본성을 부추기는 남자다. 한때나마 즐기는 자극제든 뭐든 상관없다. 실컷 놀다가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그때 뼛속부터 차근차근 개조시킬 생각이다. 화려한 외모나 배경보다 그냥 저 남자를 갖고 싶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저 오만방자한 남자를.

건물 코너를 돌자마자 이석은 벽을 후려쳤다. 손등이 까지도록 사납게 두드렸다. 둔탁한 소음 위에 그의 숨결이 흩어졌다. 그는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늙은이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덫을 놓을 줄 예상 못 했다. 한발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다. 얼굴을 모르는 상태라 방심했다. 김 회장에게 줄을 댈 가능성도 염두에 뒀어야 했다. 변명할 여지 없이 자신의 실수다. 늙은이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이제 그대로 되돌려줄 일만 남았다. 담배를 꺼내물며 달아오른 피를 진정시켰다. 요즘 들어 감정 절제가 힘들다. 약에 절어 살던 예전보다 멀리하는 지금이 오히려 뇌가 무뎌졌다.

산그늘로 뒤덮인 별장은 을씨년스러웠다. 기다리는 시간은 지리멸렬했다. 약기운이 달아나려 하자 야바는 뒷주머니에서 케이스를 꺼냈다. 별장에 들어가기 전 이석이 준 것이다. 검붉은 알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한알, 두알, 세알… 그가 말했던 적정량을 훌쩍 초과했다. 오도독 오도독 씹으며 약기운에 몸을 내맡겼다. 가죽 시트가 입을 벌려 야바를 꾸역꾸역 삼키기 시작했다. 끌려가지 않으려면 뭐든 붙들어야 했다.

멀리 어둠을 헤집고 길쭉한 인영이 나타났다. 낮에는 어느 재벌가 누구이자, 밤엔 네크로필리아로 둔갑하는 남자였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물결 치고 코트 깃이 다리를 휘감았다. 그는 담배를 문 채 느리지만 확실한 보폭으로 걸어왔다. 그와 눈길이 잇닿았다. 폭발 직전의 화산을 억지로 눌러 놓은 눈빛이었다. 문득 유통기한 만료가 이 차에 탔을 때인지, 이 차에서 내렸을 때인지 궁금했다. 그 생각이 알을 까고, 성체가 되어 다시 알을 낳고 기하급수로 번식했다. 그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야바에게 시선을 던졌다. 차가운 색채의 파편이 목구멍을 찢었다. 야바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찬 손가락이 차 회장에게 얻어맞은 볼 언저리를 스쳤다.

“됐어. 아직 최악의 상황은 아니니까.”

야바는 푸석한 입술을 열었다. 약기운이 핑 돌아 혀가 밀렸다.

“……최악은 뭔데?”

“물론 차명환이 살아나는 거지.”

“앞으로 차명환은 코카인이 맡는 거야?”

“아마도. 지금은 속았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혔지만 김 회장 때문에라도 흔들릴 거야.”

야바는 물었다.

“만약에 코카인이 차명환을 살려내면, 너는 어떻게 돼?”

“글쎄. 변수는 어디든 존재하지만 큰 타격은 없을 거야. 다만 차 회장이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감상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 길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야.”

그는 롱코트를 벗었다. 담배 향 섞인 코트가 야바 무릎을 덮었다.

“일단 다 집어치우고 저녁이나 먹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아, 야바는 가느다랗게 탄식했다. 일이 틀어졌는데도 그는 추궁이 아니라 밥을 먹자고 하고 있다. 이용가치가 있을 때 그들은 웃는다. 이용가치가 없어도 웃는다. 악수를 청하면 뒤도 보지 말고 도망쳐야 한다. 기하는 비열하지만, 그 비열함은 세상의 잔인한 진실과 싸워 얻은 훈장이었다. 흐트러진 이석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다. 미끈하게 뻗은 콧날에서 입술까지 떨어지는 라인을 눈에 담았다. 서러운 감정이 목구멍을 헤집었다.

“아무거나 다 좋아해…….”

그때 코카인이 차고에 걸어와 헤쉬쉬와 얘기를 나누었다. 헤쉬쉬는 인상을 구기며 이쪽을 힐끗거렸다. 이석이 온기 없는 음성으로 뭐라 덧붙였다. 이어 코카인이 뒷좌석에 올랐고, 헤쉬쉬도 곁에 앉았다. 백미러에 들어온 코카인은 시선을 부딪쳐왔다. 차이석이 산 사람에게 별 감흥 없다는 걸 코카인은 알까? 싸늘하게 식어 썩은내 풍기는 육체에 더욱 발정한다는 걸 알까? 바로 자신처럼 말이다.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약기운에 감각이 마모됐는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야바는 이석의 코트를 그러쥐고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엔진음을 품은 차가 출발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꼬이고 비틀린 길 위에서 기를 쓰고 해답을 얻으려 하지만 결국 아무 해답을 내주지 않는 무한의 띠처럼…….

이로써 위기에 빠진 왕자를 구해낸 오늘의 히로인은 저녁 만찬으로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 만찬이 끝나면 그의 친절도 유통기한이 끝날 터였다. 이제 차명환 방에는 코카인의 노래로 채워질 거다. 지금 자신이 앉은 조수석도 코카인이 차지할 거다. 별로 새삼스러울 것 없는 뻔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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