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18화 (18/42)

힐러-track16

“정신 차려. 차 전무 위층에 오기 전까지 맨 지하층을 애용했어. 거기가 네크로필리아들이 들락거리는 데란 건 잘 알겠지. 알았어? 예전에 치운 마리화나도 차 전무를 손님으로 받았다구.”

멍하게 걷다가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했다. 간신히 일어나도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뒤통수에 피가 철철 흘러도 고통조차 못 느낄 만큼 빈사에 빠지는 그런…. 야바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밀어냈다.

“아니야. 걔 목소리 패티시 있다고 했어. 여자하고 하려는 것도 봤어.”

“물론 그렇겠지. 가끔 특별식으로 변태 짓을 즐기는 부류가 있으니까. 무엇보다 여기 드나드는 자체가 정상이 아니란 증거 아닌가?”

기하는 벽에 어깨를 기댔다.

“주로 20대 초반 남자를 애용했어. 주변에 백합으로 장식하는 걸 요구했고, 향료도 뿌려주면 좋아해. 어설픈 분장이 아니라 진짜 죽은 육체로. 박았는지 안 박았는지도 궁금하겠지? 안타깝게 거기까진 안 했어. 그랬다면 더 볼만 했을 텐데, 하지만 만지고 비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겹지.”

시야가 이지러져 팔을 감싼 기하의 손길에 몸을 지탱해야 했다. 위장이 입 밖으로 흘러내릴 것 같다. 억눌린 목소리는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헛…소리하지 마.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안을 수 있을 텐데 왜 하필…….”

“너도 알잖아? 차 전무 여기에 발붙이고 살아도 실은 머리 셋 달린 개처럼 문 너머 지옥을 알고 싶어 안달하는걸. 갈가리 찢겨 피 흘리는 세상만 보는 그 눈깔에 넌 없어. 차갑고 늘어진 시체만 있을 뿐이지.”

기하는 야바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며 입술 끝자락을 비틀었다.

“녹화분이라도 보여줘야 되나? 원한다면 보여줄 수도 있어. 말 나온 김에 지금 어때?”

“헛소리하지…….”

현기증이 밀려와 말을 맺을 수 없었다. 저 말에 반박하고 부정할 만큼 자신은 차이석에 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이상했다. 차이석이 네크로필리아라는 게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냥 조금 어지러울 뿐…….

“절대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 니가 감당할 수 있는 새끼가 아니야. 소위 로열패밀리라는 것들은 스스로 왕족이라고 생각하지. 걔들은 물건값이 얼만지 관심 없어. 돈 주고 산다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마음에 들면 그냥 가지는 거지. 걔들이 호의를 베푸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야. 상대가 이용 가치가 있을 때와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 그 어떤 경우에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족속들이라고. 걔들이 악수를 청하면 그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돼.”

기하는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명심해. 차이석이 너에 대한 호의를 베푸는 것도 차명환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야. 그때 유효기간도 끝나는 거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쇳소리를 닮은 귀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알아들었으면 따라와.” 기하가 손을 잡아끌었다. 얼마간 다리 잃은 사람 마냥 끌려가다 손을 내쳤다.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리화나는 역시 죽었구나.”

여태껏 자신만만하던 기하는 입을 다물었다. 야바는 맞부닥친 현실에 등 돌리며 덧붙였다.

“시체한테 발정하는 건 너나 걔나 마찬가지네.”

코너를 돌아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제야 다리가 풀려 간이 의자에 널브러졌다. 벽에 몸을 지탱하고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음낭처럼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그 눈동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쾌락에 신물 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자신의 행복보다 코카인의 몰락에 더 공을 들이듯, 그도 비틀린 것들에서 삶의 활력을 찾았던 거다. 살아 있는 것들은 더 이상 그에게 자극제가 아닌 거다. 영화에서 돼지 같은 시체에 욕정하는 변태를 본 적 있다. 그 남자는 차이석처럼 부가 넘쳐나지도 화려한 외모도 아니었다. 그 남자처럼 깡마르지도 인생 패배자도 아닌 차이석이, 어째서 비계덩이에게 비위좋게 키스해댔는지, 집에까지 끌어들여 발을 닦아주고 성기를 빨아줬는지 늘 궁금했다.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았다. 자신은 10년 전에 이미 죽었으므로, 시체와 다름없으므로.

밤이 되면 파라디소에는 욕망을 충족하려는 사람들의 발길로 달아올랐다. 모두 7층으로 된 건물 외관은 고급 레스토랑 같지만 그 안은 퇴폐적인 진풍경이 펼쳐졌다. 각층엔 테마별로 이상성욕자들을 위한 방이 있고, 한꺼풀 벗어던진 그들은 더는 고상하지 않은 몸짓으로 휘청거렸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스카이 라운지는 코카인을 보려는 사람들이 방문했다. 아까 칼에 찔려서 온 국회의원이 코카인의 힐링으로 멀쩡히 걸어서 나갔다. 손가락이 골절된 바이올리니스트, 심근경색이 있는 부동산 재벌…. 예약은 성대에 무리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받았으며 오늘 마지막으로 간택 받은 사람은 김 회장이었다. 코카인을 중심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야바는 오랜만에 방에 들어갔지만 입을 꽉 다문 채 넋 놓고 서 있었다. 기하가 들려준 이야기가 가사를 밀어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뒤에서 코러스만 넣어주고 그마저도 입만 벙긋거릴 때가 대부분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노랫소리가 물러나자 백발노인이 감격에 젖어 손뼉 쳤다. 청년들을 모두 물리고 코카인에게 곁에 앉으라 손짓했다.

“오랜만에 네 노래 듣고 싶어서 왔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잘 지냈어요. 회장님은 더 좋아지신 것 같아요.”

“그래, 그래, 다 니 덕분이 아니겠느냐. 참, 전에 할애비가 말했던 정 이사 기억하느냐? 마누라가 치매에 걸렸다던…….”

코카인은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니가 한 번 봐줘야겠다. 이젠 아예 벽에다 산수화까지 치고, 며느리며 간병인들 머리채까지 쥐어뜯는다구나. 어젠 정 이사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나 있지 뭐겠어. 보는 사람까지 남사스러워서 참. 허허….”

김 회장은 주름을 접으며 웃어젖혔다. 그간 정 이사의 사정을 외면했던 그가 어쩐 일로 마음을 바꿨는지 의아했다.

“그럼 가게로 한 번…….”

“아니, 정 이사 마누라 상태가 나빠서 직접 오진 못하고, 니가 직접 가봐야겠구나.”

“어디인가요?”

“요양하는 데가 양평 어디라던데. 할애비도 자세한 위치는 모른단다. 내일 사람을 보낼 테니 그리 알거라.”

“위치 알려주시면 제가 갈게요. 데려다 주는 사람이 있어서 함께 가면 됩니다.”

“아니, 주변에 보는 눈도 많고, 시커먼 놈들 왔다갔다하면 장 이사 마누라도 기함할 게다. 할애비가 사람을 보내 마.”

김 회장이 전에 없던 고집을 부리자 난감했다. 예전에 납치당할 뻔한 사건 이후로 출장은 신중히 하는 편이다. 자신을 납치하려던 사람은 어느 재벌가 자제였으며 결혼을 앞둔 사람이었다. 다행히 미수에 그쳤고, 그 후 사장은 믿을만한 단골이 아니면 출장을 허락지 않았다. 김 회장은 무일푼으로 자수성가한 건설 재벌이다. 입이 걸지만 점잖아서 사장이 신뢰하는 단골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출입하는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건 오랜 시간에 걸쳐 터득한 깨달음이다.

“회장님께 폐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위치 알려주시면 제가 갈게요.”

코카인이 단호히 나가자 김 회장도 고집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불쑥 물었다.

“참, 그런데 내일 오면서 가면도 쓰는 게냐?”

“네. 외부에서도 착용하는 게 규칙입니다.”

김 회장은 술잔을 입에 대며 경직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게 하려무나.”

임수는 탁자에 잔을 올렸다. 기하는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응시했다.

“그 녀석 뭐 하고 있어?”

“늘 하던 대로 대기실에서 멍 때리고 있습니다.”

기하는 임수를 힐끗 보았다. 누구라 지칭하지 않았는데도 임수는 당연한 듯 야바의 행방을 보고했다. 산만한 덩치에 비해 눈치 빠르지만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심복이 든든하면서도 못마땅했다.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수가 말했다.

“내일 코카인 출장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어디의 누구?”

“대형 건설 김 회장이 주선한 사람인데 회사 간부이고, 부인이 치매랍니다. 어떻게 할까요?”

“애들 두 명 붙이고 수상하다 싶으면 곧바로 데려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기하는 가죽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사장실을 둘러보았다.

“파라디소 인수에 드는 비용이 얼마라고 했지?”

“겨우 그쪽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떠봤는데 건물 시가만 해도 180억이라더군요. 그밖에 권리금에 세금까지 포함하면 수억은 더 얹어줘야 할 겁니다. 그런데 소유주가 가게를 팔지 안 팔지 의사부터 알아보시는 게…….”

“잘만 구슬리면 넘길 거야. 그동안 코빼기 한 번 안 비췄다는 건 별 관심 없다는 거니까. 문제는 자금이지.”

기하는 어젯밤 차이석의 제안을 떠올렸다.

‘그럼 나한테 주던가.’

‘원래 주기로 한 10%에서 10% 더 어때요?’

원하는 여자와의 하룻밤에 수억을 내놓는 족속들이지만 일회용에게 쓰는 비용치고 지나치게 많다. 물론 구미가 당기고도 남는 금액이다. 태령 자동차 주식은 전망도 탄탄하니 꽂아만 둬도 금싸라기다. 제안을 거절한 스스로가 못마땅하면서도 결코 마음 돌릴 생각은 없다. 어서 차명환 숨통이 끊어져 이 일을 마무리해야 된다. 야바가 차이석과 있는 시간이 늘어나 봐야 득 될 것 하나 없다.

야바를 데려온 지 10여 년이 흘렀다. 처음 이곳에 와서 녀석은 얼마간 노래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쓸모없는 아이를 데리고 있었던 건 친구를 밀고할 때 악의 가득한 눈빛 때문이었다.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후로도 녀석은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진 않았고, 기하의 관심은 오로지 코카인을 이용해 파라디소를 키우려는 일념뿐이었다. 어느새 성인이 된 야바는 눈을 잡아끄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녀석에게 처음 발정했던 게 언제였지. 이 감정의 정체를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 녀석은 이미 거세당했고 칩을 박은 상태였다. 기하는 정돈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 일을 깨끗이 매듭짓고 차이석에게 지분을 증여받는다면 파라디소도 한번에 인수할 수 있다. 그때 야바를 완벽하게 손에 넣을 것이다. 그날까지 칩은 최후의 보루이다.

“후…….”

이석은 콧대를 지압하며 눈에 뭉친 피로를 풀었다. 며칠간 무리한 브레인들은 소파며 침실 곳곳에서 곯아떨어졌다. 테이블에 쌓인 서류 더미를 치우고 담배를 찾았다. 눈으로는 노트북에 가득한 출자구조 그래프를 보며 머리로는 어제 파라디소 사장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사장이 얼마를 불렀다 해도 흔쾌히 내놨을 것이다.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야바는 힐러도 아니며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입맛 당기는 제안을 거절했다. 섣불리 판돈을 올리려는 수작은 아니었다. 놈은 진심으로 야바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이석은 꽉 당기는 뒷목을 주무르며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부재중에 온 전화번호를 건성으로 확인하고 탁자에 던졌다.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조금 전 지나쳤던 번호가 떠올라 다시 폰을 들었다. 액정에 찍힌 번호를 아래로 내리다가 한 곳에서 멈칫했다.

[011-666-4444]

그는 눈을 좁히며 담배 필터를 자근거렸다. 설명할 길은 없다. 왜 이 번호가 묘하게 신경을 잡아 이끄는지 말이다. 엄지로 폰을 두드리다가 통화를 눌렀다. 오랜 시간 신호음이 갔지만 아무 소식이 없다. 재차 통화를 시도할 때였다. 언제부터인지 성재가 주방입구에서 양손에 커피를 든 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다가와 잔을 내밀었다.

“아까부터 왜 그래?”

“뭐?” 이석이 눈으로 묻자 성재는 소파에 벌렁 누우며 대답했다.

“아까부터 회의 내내 집중 안 하고 꼭 딴 데 가 있는 놈처럼 굴잖아. 그러고 보니 너 요즘 약도 안 하고 이상한데? 더 좋은 게 생겼으면 같이 좀 즐기지?”

성재는 자신의 코언저리에 손등을 대고 흡입하는 시늉을 했다. 이석은 눈썹을 구겼다.

“글쎄. 이번엔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서 말야.”

“그래 봐야 금세 질리면 나한테 넘길 거잖냐. 느긋하게 기다리마.”

이석은 날카로워진 눈길로 성재를 응시했다. 성재는 미소를 집어물며 커피를 마셨다.

“형수님이 얼마 전에 전화해서 이상한 소리를 하시던데.”

“무슨?”

“코카인이 오고 나서, 그러니까 야바위가 오고부터 명환 형님 상태가 자꾸 나빠진다고. 너한텐 불쾌해할까 봐 못 물어보시겠단다. 뭐 그리 눈치 볼 일 있는지…. 아무튼 야바위하고 파라디소 사장 단속 잘해라. 이 일의 전모를 아는 사람이니 둘 다 안심할 수는 없잖냐. 그나저나 사장이 맨입으로 가담했을 리는 없고, 얼마 주기로 했냐?”

“내 지분에서 10%.”

“제정신이 아니군. 뭐 대단한 일 한다고 그 큰 금액을 줘?”

성재는 혀를 내둘렀다.

“덕분에 그보다 얻는 게 훨씬 많으니까. 사장이란 사람, 뒷골목에서 굴러먹던 것치곤 머리도 제법 돌아가는 편이고 배짱도 두둑한 편이지. 그런데 10% 더 얹어줄까 생각 중이야.”

“뭐라? 그럼 20%?”

“더 부른다면 원하는 대로 줄 수도 있고.”

“미쳤군. 약 끊더니 딴 데다 욕구 푸는 거냐?”

성재는 기가 찬 듯 헛웃음 쳤다. 담배 물린 이석의 입술이 휘어졌다.

“진짜 꼭지 도는 게 뭔 줄 알아?”

노트북 자판기를 툭툭 두드리며 덧붙였다.

“줬다 뺏는 거지.”

성재는 실눈을 뜨다가 씨익 웃었다.

“어후…그거 확 돌지.”

이석은 소파에 고개를 젖혔다. 처음 사장실에서 차명환 일을 계획할 때 맡았다. 그건 야망을 은닉하고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도약하려는 동류의 냄새였다. 애초 약속했던 10%는 흔쾌히 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잠깐 맛봤던 황홀경을 평생 갈망하며 폐인이 되도록 해 줄 것이다. 놈이 약으로 야바를 그렇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천장을 보며 이를 부딪쳤다. 회의 내내 최음제 같은 목소리와 아치형 목선을 가진 고양이가 머릿속을 점령했다. 밤이 되면 더욱 기승을 부리는 녀석은 밤보다 음탕한 몽마이다. 녀석이 과연 이 시간을 잘 버티고 있을까. 이석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재킷에 팔을 끼웠다. 성재가 몸을 일으켰다.

“가려고? 참, 숙모님은 어때? 그날 코카인 내쫓기진 않았고?”

“무사히 다녀왔다더군. 아마 알아서 할 거야.”

“거 봐. 진작에 데려갔어야지.”

성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니가 코카인을 조금 더 빨리 찾았다면 누님들도 괜찮았겠지? 누님들도 조금만 더 견뎠다면…….”

이석의 입술이 양쪽으로 미끄러졌다.

“기적이 모두에게 통하는 건 아니니까.”

10여 년 전, 부친의 애정을 갈구했던 누이들과 그걸 줄 수 없는 부친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싸웠다. 이석은 그런 누이들을 조소했고, 해결 나지 않는 싸움판을 관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누이들이 죽음의 문턱에 다가가자 생각은 달라졌다. 우연히 그들을 살릴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방법을 찾았을 땐 혈육들 모두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흥미가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호텔에서 나왔을 때 9시 45분이었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파라디소에 가수들이 일 마칠 시간이 다돼 간다. 지금쯤 금단증상이 한참일 시기다. 최대 일주일까지가 끔찍한 지옥이며 심하면 죽는 일도 있다. 정신적인 의존도는 상쇄할지 모르나 육체는 예전에 먹던 약을 원할 것이다. 지금은 사탕으로 플라세보 효과를 노리는 방법밖에 없다. 이석은 폰을 들어 아까 그 기괴한 번호에 연결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받지 않자 대쉬보드에 던졌다. 일단 데리고 나와 늦은 저녁이라도 함께 할 계획이다. 홀로 룸으로 불러내 노래를 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노랫말을 굴리는 입술과 리듬에 맞춘 몸짓이 떠오르자 또다시 입속이 타들어갔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훔쳤다.

불현듯 핸들을 돌리다가 사이드미러에 걸린 검은색 소나타가 보였다. 호텔 주차장에서부터 따라붙은 차였다. 이석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거리 신호가 떨어지자 차 물결을 따라가다가 기습적으로 차 머리를 틀었다. 검은색 소나타는 뒤차에 휩쓸려 시야에서 멀어졌다. 진짜 미행이 따라붙었건, 지나친 기우건 느낌이 별로다. 그는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집으로 차를 돌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만두는 게 좋겠다.

“어디 갔지? 분명히 숙소에 있었는데.”

“차에도 없어?”

“없었어. 방도 샅샅이 찾았는데 없었고…….”

다음날 고자 가수들까지 합류해도 코카인은 폰을 찾지 못했다. 헤쉬쉬는 침울해진 코카인을 다독였다.

“우리가 계속 찾아볼 테니 넌 출장부터 가라. 우선 내 폰 가져가고.”

“응.”

코카인은 초조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그가 왜 저렇게 안달 났는지 야바는 잘 알고 있었다. 차이석의 전화를 받지 못해서이다. 불쌍하게도 헤쉬쉬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땀까지 흘리며 열심이었다. 그는 코카인 침대 아래며 가방을 들추다 바닥에 떨어진 폰을 보며 흠칫했다. 이내 야바 것임을 알아채고 허탈한 숨을 쉬었다. 침대에 늘어진 야바에게 폰을 던지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너 진짜 코카인 폰 못 봤어?”

코카인이 차이석 본가에 다녀온 걸 알면, 차이석과 연락 주고받는 걸 알면 저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까? 야바는 베개에 볼을 묻고 읊조렸다.

“내가 없애버렸는지 묻고 싶지? 맞아. 내가 그랬어. 이제 마음이 편해졌어?”

“똘아이.” 헤쉬쉬는 인상 쓰며 욕실로 들어갔다. 야바는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이렇듯 거짓은 추앙받고, 진실은 외면당한다. 그러니 이토록 진실을 경멸하는 것이다. 야바는 지금 침대에 늘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중이다. 곰팡이 핀 벽을 보며 중얼댔다. 네크로필리아……. 시체에 성욕을 느끼는 성도착증의 한 증상. 시체 애호증, 시간증, 시체애, 사체애, 시체성애증으로 불린다.

머리를 짓무르게 했던 것에 비해 인터넷이 알려준 의미는 차갑고 명료했다. 이 모든 상황도, 자신의 마음도 그렇게 차갑고 명료했으면 좋겠다. 야바는 손을 더듬거려 침대에 뒹구는 휴대폰을 들었다. 액정을 들여다보는 순간 눈이 커다래졌다. 부재중 전화가 10여 통이 넘게 와 있었는데 모두 차이석이었고, 어젯밤 일하던 시간에 온 것이었다. 평소 전화 올 일이 없기에 들여다볼 일은 없었다. 야바는 묵직한 몸을 일으켜 액정을 쳐다봤다. 그는 자신의 번호를 모른다. 자신의 번호는 매력적인 조합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석이 이토록 집요하게 전화한 이유가 궁금했다. 어쩌면 기하에게 물었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차명환이 죽었다는 부고를 알리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름이, 그의 번호가 작은 액정을 온통 채웠다. 책상 서랍에는 그가 준 약 케이스가 놓여 있다. 팬티 속에는 그의 수표가 항상 잠들어 있다. 야바의 공간이 점점 그로 채워졌다.

코카인은 잃어버린 폰을 포기하고 출장에 나섰다. 야바는 현관을 나가는 코카인을 노려보았다. 오늘도 차이석 본가에 가는 걸까? 거기에서 마주치겠지? 마치면 함께 밥을 먹을까? 언젠가 코카인이 죽는다면 그가 노래할 때였으면 좋겠다. 그가 가장 빛나는 순간,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 앞에서 피의 노래를 부르는 거다. 독약으로 성대가 망가져 더는 기적의 노래를 할 수 없게 되면 비로소 자신은 마음의 빗장을 걷고 비참해진 코카인을 돌봐줄 생각이다. 보호자처럼, 친구처럼, 그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말이다. 차이석은 코카인의 장례식에 찾아올까? 시체가 된 코카인에게 발정할까?

남은 찌끄러기들은 일주일치 식량을 사러 외출했고, 나머지는 거실에 둘러앉아 고스톱을 쳤다. 야바는 샤워를 마치고 책상에 앉았다. 서랍을 열자 갈색 케이스가 한켠에 놓여 있다. 어제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결국 다시 주워왔다. 케이스를 열고 알약 두 개를 꺼내 먹었다. 차이석이 준 건 이제 세 개밖에 안 남았다. 벌레들은 약을 더 달라고 아우성 했다. 어제 기하가 줬던 약은 구석에 처박아뒀다. 힐끗거리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누가 쉴새 없이 살점을 쥐어뜯는 것 같았다. 내내 신경이 곤두서서 누가 건드리면 모조리 찔러버리고 싶다. 땀에 젖은 머리를 책상에 떨어트리자 웅웅대는 도시 소음이 전해졌다. 그때 책상에 올려둔 폰이 진동했다.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오래도록 멈췄던 심장에 피가 돌았다. 차이석이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갔다. 오늘은 차명환에게 가는 날이다.

“왜?”

[진짜였군.]

제일 먼저 넘어온 건 바람 빠지는 소리였다. 이내 물속에서의 울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숙소 앞이야. 내려와.]

“……!”

야바는 벌떡 튕겨 일어났다. 침대 머리맡으로 가 창문을 내다보았다. 좁은 골목, 전봇대 아래 은색 차가 보였고 이석은 차에 기댄 채 한 손에 전화를 들고 있었다. 야바는 눈동자를 굴렸다. 다시 시선을 제자리에 돌렸을 때 이미 차이석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도 시야를 압박하는 눈동자였다. 창문 뒤로 몸을 감췄다. 빨라진 심장 박동만큼 입술 쥐어뜯는 손길이 산만해졌다.

“몸이 안 좋아. 잘 거야.”

[왜 그렇게 비실거려? 별장에 가든 안 가든 일단 나와.]

“싫어.”

야바는 폰을 끊어버렸다. 조금 뒤 진동소리가 들렸다. 폰을 베개 밑에 밀어 넣고 질식시키듯 눌러버렸다. 끈질긴 울음이 뚝 그쳤다. 야바는 베개에 몸을 늘어트렸다. 1분, 10분…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베게 끄트머리를 쥐어뜯다가 무릎을 세워 창밖을 내다보았다. 차는 그대로였지만 정작 차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거실이 술렁거렸고, 걸음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방문이 열리고, 차이석이 몰아치는 눈발처럼 걸어왔다. 문이 닫히자 얼빠진 고자들 모습이 차단됐다. 내뻗는 걸음 속도에 맞춰 심장 소리가 치고 올랐다. 너무나 뻔뻔하게 들이닥친 그가 환영 같았다.

“……나가.”

이석은 느긋하게 묵살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거야? 병원부터 가게 일어나.”

“싫어.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은 너잖아.”

야바는 냉랭하게 말하며 침대 머리에 등을 바짝 붙였다. 그는 좁은 방안을 비잉 훑어 보았다. 지긋지긋하도록 익숙했던 공간이 그로 인해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참기 힘든 공기에 떠밀려 일어났다. 그가 팔을 낚아채 도로 앉혔다. “하는 수 없지.” 그는 야바를 이불 통째로 말았다.

“놔! 안 간다고 했잖아!”

구속복 같은 이불에 야바의 팔다리와 목소리는 억류당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몸싸움에 침대가 삐그덕거렸다. 간신히 자유로워진 팔로 그를 힘껏 밀어냈다. 차이석은 침대 머리와 침대 위에 양팔을 뻗어 단단히 지탱한 채 탈출 경로를 봉쇄했다. 널찍한 어깨와 가슴에 야바의 숨이 흩어졌다. 그는 거친 숨결을 야바의 이마에 되돌려주었다. 차이석은 고개를 외로 틀어 무례한 시선을 깊숙이 찔렀다.

“이렇게 반항하는 걸 보면 꾀병 같은데.”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야바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아래로 떨어진 손가락은 입술을 스쳤다. 야바는 고개를 틀며 뜨거운 것을 뿌리쳤다.

“나는 분명히 말했어. 내가 가고 싶으면 갈 거고, 싫으면 안 갈 거라고.”

“마찬가지야. 너에 대한 권리는 나한테 있고 별장에 가고 안 가고는 내 선에서 결정할 일이야. 한동안 고분고분하더니 왜 또 속 썩이지?”

야바는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렇게 불만이면 코카인 데려가면 되잖아. 어차피 차명환은 코카인이 간다고 해도 못 고친다고 했어. 그러니까 고분고분한 코카인 데려가.”

스스로 던진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들었다. 목을 찌르고 살갗을 베었다. 언젠가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고 말 거다.

“지금 와서 바꿔친다고 해도 두 사람 목소리가 완벽히 달라서 빼도 박도 못해. 그러니까 이 일이 끝날 때까지 니가 필요해.”

그래, 그땐 저 웃음에 눈이 멀었었다.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에 귀를 현혹당했다. 그와의 시간에 취해 잊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차이석이 코카인을 보호하려는 데서 비롯된 걸. 차명환을 죽음에서 구원해 줄 끈을 잘라버리기 위함이란 걸. 괜찮았다. 한 달이면 백일몽도 끝날 것이며 한바탕 시끄러운 꿈을 꿨다고 훌훌 털면 될 거다. 야바는 꽉 물려 있는 그의 넥타이를 노려보았다.

“너는 평생 하고 싶은 대로 휘두르고 살았겠지만, 나한테는 내키는 대로 하지 마. 전에 말했잖아. 나 누구한테든 말 안 가린다고. 기분 틀리면 차명환한테 무슨 소리를 할지는 나도 몰라. 나는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어. 나는…….”

매일 지옥 위를 걷고 있어.

차이석의 입술이 스산하게 이지러졌다. 그것은 선명한 조소였다.

“그렇게 서툰 협박으론 어린애 손에서 사탕도 못 뺐겠군. 정확히 말해. 원하는 게 뭐야?”

코카인 네 집에 보내지 마. 코카인 목소리 듣지 마. 쳐다보지 마. 나는 너 편할 때만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야. 밟고 지나가는 다리가 아니야. 나는 너한테 시체야? 그래서 내게 그런 짓을 했던 거야? 비참한 분노, 조악한 질투, 맹목적인 감정이 뒤엉켰다.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 일이 끝나면 너도 기하도 훨씬 더 많은 걸 얻는데 나는 남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니까 돈이라도 챙겨야겠어.”

야바는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숭 안 떨어서 편하군. 좋아. 원하는 금액을 말해.”

싸늘한 눈빛이 야바의 목덜미를 덮었다. 그 오려내고 싶은 장면들, 눈앞이 흐릿해졌다. 눈가에 몰리는 열기를 내몰기 위해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이곳으로 몸의 피가 휩쓸려 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돈 많아? 내가 얼마를 불러도 다 줄 거야?”

“시간 넉넉하게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대신 멋대로 구는 거 봐주는 건 오늘로 끝이야.”

“이제 별장엔 깡패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 거야.”

“안 돼.”

“그럼 차명환한테 데려오라고 해. 너하고 가기 싫어.”

그의 입매가 서서히 굳어갔다. 야바는 독기 서린 눈을 치켜떴다.

“너나 기하나 똑같이 비열한 협잡꾼이야. 차라리 찌질한 차명환이 훨씬 나아. 너희가 삼킨 건 모조리 뱃속에서 썩어날 거야! 시궁창에 있는 건 너희들이야!”

차이석의 눈이 시퍼런 흉기로 돌변했다. 타인의 상처와는 상관없다는 저 눈을 일그러트리게 하고 싶다. 턱까지 차오른 목소리가 뚝뚝 토막 났다.

“차명환한테 데리러 오라고 해. 너하고 가기 싫어! 너하고 가기 싫어……!”

퍼억! 그는 야바가 기댄 침대 머리를 부서트릴 듯 내려쳤다. 둔탁한 파동에 먼지가 산란했다. 꽂혀 드는 시선이 등줄기를 섬뜩하게 긁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밑바닥까지 긁어내리는 경고음이었다. 그에게 압도돼 머리는 이미 비어버렸다.

“너 같은 것보다 차명환이 훨씬…읏……!”

도화선이 당겨진 것처럼 그가 턱을 으스러트릴 듯 눌러 입술을 씹어댔다. 상체로 야바를 짓누르고 입술과 혀를 빨아당겨 한번에 씹어 발겼다. 몸이 파열할 듯이 짓뭉개졌다. 불기에 휘감긴 눈동자가 달려들어 체온을 살라 먹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밀치는 야바의 손가락을 잇자국이 날만큼 깨물었다. 탄탄한 허벅지가 가랑이로 파고들어 치부를 아무렇지 않게 유린했다. 턱에서 미끄러진 입술이 목덜미를 빨아당기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오래된 술처럼 끈적한 호흡이 귓불과 목덜미에 퍼졌다. 그의 손이 공격적으로 바지 안에 침범하고,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더 깊은 틈으로 들어갔다. 기절할 듯한 자극에 목구멍으로 신음이 치달았다. 안 돼! 아…읏……! 절박한 비명은 축축한 공간에서 녹아버렸다. 갑각류처럼 단단한 어깨를 후려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넥타이가 뜯기고, 셔츠가 밀려 올라갔다. 그 아래 드러난 쇄골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혀가 직선으로 뻗어와 야바를 뭉개고 휘저었다. 야바는 입속을 유린하는 혓바닥을 깨물었다. 그의 눈매가 잠시 일그러졌지만 그게 전부였다. 입술과 그 속살까지 파헤쳐 낱낱이 해부하듯 휘저었다.

“흐으……하아…….”

“하아…….”

얕은 교성이 호흡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의 입술에서도 뜨거운 입김이 쏟아졌다. 끈적한 땀내와 코롱향에 현기증이 일었다. 포악한 혀놀림은 점차 수위 높이 감아와 자맥질했다. 엉덩이를 움켜쥐던 손아귀가 조여들어 바짝 당겨갔다. 맞닿은 하체는 급박한 움직임에서 부드러운 운율로 바뀌었다. 척척한 신음성, 짙게 젖은 그의 혓바닥이 맞댄 입술 틈새를 들락거렸다. 한참 동안 집요하게 굴던 입술이 떨어지고, 엉덩이 골에 박힌 손은 뭉근한 움직임으로 변했다. 색색대는 날숨소리가 이 차가운 공간에 흩어졌다. 칼 같은 눈동자가 혓바닥보다 더 깊이 쑤셔 들어왔다. 검은 공간에 불균질한 감정이 들끓었다.

“한 번만 더… 허튼 소리하면 혼나.”

야바는 얕은 숨을 헐떡이며 눈에 가시를 세웠다. 이석은 흐트러진 호흡을 뱉으며 자신의 입가에 범벅된 타액을 혀로 핥았다. 그의 눈길이 야바의 입술로 미끄러졌다가 한꺼풀 누그러졌다. 독사 같은 손가락이 상냥한 독을 품고 입술을 비벼왔다.

“아무래도 약을 바꿔서 예민해진 모양이군. 오늘 별장 가는 건 취소하지.”

“니가 준 약 안 먹었어. 쓰레기통에 다 버렸어.”

독약 같은 시선이 야바의 목을 비틀었다. 차라리 이 조악한 질투가 약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짓눌러오는 그의 가슴에 가루가 될 것 같다. 감정의 파고가 지나간 뒤 체력은 고갈됐다. 심신은 표독해졌다.

‘호의를 베푸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야. 상대가 이용할 가치가 있거나,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 ……걔들이 악수를 청하면 그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돼.’

‘명심해. 차이석이 너에 대한 호의를 베푸는 것도 차명환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야. 그때 유효기간도 끝나는 거라고.’

차명환은 적어도 자신의 노래를 맹목적으로 원했다. 식은땀이 등을 적시고 현기증으로 주저앉을 것 같아도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어서 유효기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야바는 가느다랗게 읊조렸다.

“갈 거야. 차명환한테 데려다 줘…….”

그의 눈동자가 예열 없이 싸늘한 불꽃으로 이글거렸다. 야바는 그에게서 빠져나와 일어났다. 가슴까지 늘어난 셔츠 그대로 검정색 니트를 껴입었다. 엉겨붙는 시선을 무시한 채 가면을 들고 앞장서 나갔다. 다리가 떨렸다. 거실을 빠져나가자 고자들의 넋 나간 눈길이 달려들었다.

차이석은 거칠게 차 문을 닫고 반대쪽으로 건너왔다. 코트에 찬바람을 묻히고 온 그가 운전석에 앉자 차체가 기울었다. 그는 넥타이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느슨하게 만들었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오랜 침묵 뒤에 그가 말했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코카인 폰에서 훔쳤어. 훔치고 나서 코카인 폰은 변기통에 버렸어.”

그는 검은 눈동자만 움직여 읽을 수 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내가 번호 가져서 기분 나빠? 걱정마. 바로 지울 거야.”

“이죽거리지 마. 이번엔 입술 물어뜯는 걸로 안 끝나.”

그의 몸짓은 우아했고 혓바닥은 야만스러웠다. 그는 야바에게 박은 눈동자를 앞으로 향했다. 오만한 음각으로 두드러진 콧날에 불빛이 스몄다. 그가 불빛의 궤적처럼 덧붙였다.

“번호 지우지 마.”

억지로 병원에 끌려가 링거를 맞았다. 이석은 자신을 밖에 내보내고 의사와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무슨 얘길 주고받았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산허리에 남은 노을이 마지막 빛을 뿜고 소멸하자 도시의 호흡이 가빠졌다. 도시림을 빠져나와 외곽에 들어서 또 한참을 달렸다. 검은 강물 위로 헤드라이트의 흐린 잔상이 지나갔다. 문득 저 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세 갈래로 나뉜 길에 접어들자 차이석은 핸들을 꺾어 낯선 길로 들어섰다. 온통 헐벗은 나무뿐인 으슥한 숲길이었다. 야바는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았다. 차갑게 깎인 그의 옆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왜, 왜 이리로 가?”

“지름길이야.”

“지금껏 한 번도 이 길로 안 왔잖아.”

“그래서 오늘 가보는 거야.”

“왜?”

그는 짧게 눈길을 주고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빨리 해치우고 너와 저녁 먹을 거니까.”

피가 모조리 휩쓸려가는 듯했다. 시체애호가는 인육도 먹는 걸까? 숙성시킨 냉동 돼지고기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입술 거스러미를 뜯으며 눈동자를 움직였다. 체온이 떨어진 손끝이 떨렸다. 지금 그를 차 밖으로 밀어버린다 해도 자신은 운전면허가 없다. 우여곡절 끝에 도망쳐도 기하와 한통속이니 머리 칩으로 위치추적 당하는 건 시간문제다. 아까 끌려오는 걸 고자 가수들이 지켜봤으니 모두 목격자가 돼 줄 거고, 이석이 제일 먼저 용의 선상에 오를 거다. 그렇지만 그는 돈과 권력으로 고자들과 경찰을 매수할 게 분명하다. 그 어떤 방법을 생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야바는 등줄기에 힘을 주고 문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잠깐이라도 속력을 줄이면 언제든지 차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구불거리는 숲길을 지나는 동안 한 번도 정차하지 않았고, 정신을 차렸을 무렵 별장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는 가져온 약을 내밀며 먹으라고 명령했다. 끝내 버티는 야바 입을 강제로 벌려 알약을 쑤셔 넣고, 녹게 하고, 삼키게 했다. 그 모든 게 그의 혓바닥이 저지른 만행이었다.

방에 들어서니 부인은 또 쫓겨났는지 차명환은 혼자였다. 이석은 침대 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 차명환이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왔지?”

“코카인 컨디션이 별로여서 일찍 마치고 쉬겠다더군요.”

차명환을 바라보는 이석의 눈에는 온기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는 피마저도 차가울 것이다. 차명환은 언젠가 배다른 형제의 진짜 모습을 알아챌까?

“뭐, 아무래도 좋아.”

차명환의 눈길이 야바에게 당도했다. 그는 점점 말라 갔지만 푹 꺼진 눈은 기괴할 만큼 또렷했다.

“전에 니가 음악 리스트 찢으면서 그랬지. 그런 거 적을 시간에 인생이나 한번쯤 돌아보라고.”

“…….”

“그래서 네 말대로 인생을 돌아봤지. 머리가 터지도록 말야.”

오늘따라 차명환은 이석과는 다른, 묘하게 경직된 분위기를 흘렸다. 그는 대답을 바라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 오늘은 나한테 뭘 불러 거지?”

“알비노비 Adagio, 쟈니 스키키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웬일이야? 그런 곡도 다 부르고.”

“너도 라우레타처럼 결혼시켜 달라고 구질구질하게 아빠한테 협박했을 것 같아서.”

차명환은 가소롭다는 듯이 거멓게 그을린 웃음을 지었다.

“결혼에 목매달 만큼 한가한 청춘을 지내지 않아서 말야. 결혼이라고 별거 있나? 조건 맞으면 대충 하는 거지. 어쨌든, 라우레타가 리누치오와 결혼 안 시켜 주면 강물에 뛰어들겠다느니 죽겠다느니, 쟈니 스키키에게 황당한 소릴 지껄였지만 비장한 마음이 녹아든 아름다운 아리아라는 건 분명하지.”

“그렇게 구걸해서 결혼해 봐야 좋은 시절도 한때야. 처음엔 다들 그렇게 죽고 못 살다가 뱃살 늘어지고 주름살 생기면 바람 필 게 뻔하니까. 라우레타도 리누치오의 외도 사실에 자기 정부와 짜고 리누치오를 독살할 거야. 전 재산을 쥐어봤자 라우레타의 정부도 돈만 먹고 도망칠 거고, 걘 배신감에 치를 떨다가 미쳐서 정신병원에 들어갈 거야. 그럼 자식들은 거리를 전전하다가 감옥이나 들락거리는 신세가 될 거라구. 쓸모없는 범죄자만 양상 할 바엔 결혼 안 하는 게 나아.”

그러니까 네 마누라도 간수 잘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눌러 삼켰다. 지금 차명환은 약간의 충격으로도 부서질 것 같은 낯빛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죽음까지 걸어가고 있어? 문득 묻고 싶었다. 이상했다. 차명환과 얘길 하다 보니 기분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렇게 차명환을 깊이 들여다볼 때였다. 밀도 높은 시선이 관통해왔다. 고개 돌렸을 때 이석의 눈길과 얽혔다. 그의 입술은 잘 치장된 미소를 머금었지만 눈빛은 목구멍 속까지 파고드는 금속 같았다. 야바는 눈을 내리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차명환은 손을 들어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야바는 준비해온 노래를 풀어헤쳤다. 알비노니의 ‘Adagio’였다.

아아아~~~~~~~

원래 연주곡이지만 스캣송으로 만들어 성악가들이 즐겨 부른다고 들었다. 장중하고 음울한 선율이 공간에 녹아들었다. 차명환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Adagio’가 끝나자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불렀다.

O mio babbino caro, mi piace e` bello, bello

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난 그이를 아껴요. 멋진 분이죠.

vo`andare in Porta Rossa a comperar l`anello!

저는 Porta Rossa로 가서 반지를 사려 해요.

Si`, si ci voglio andare! e se l`amassi indarno,

그래요. 그래요. 그럴 생각이에요. 만약 내가 헛되이 사랑한다면

andrei sul Ponte Vecchio, ma per buttarmi in Arno!

베키오 다리로 달려가서 아르노강에 몸을 던지겠어요

Mi struggo e mi tormento! O Dio, vorrei morir!

나는 초조하고 고통스러워요! 신이여!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깊숙한 곳으로부터 목소리를 끌어올려 건조한 공간으로 공명시켰다. 노래하는 내내 차이석은 표정이 없었다. 치밀한 필선 같은 눈동자로 야바를 교묘히 주시했다. 왜 발가벗은 기분이 드는지, 눈으로 겁탈당하는 기분인지 모르겠다. 숨이 막혔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금 왜 이곳에 와서 노래하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지리멸렬한 시간이 지났다. 야바는 두 곡을 부르고 나서 곧장 돌아섰다. 차이석도 말없이 일어났다. 차명환은 징징거리지 않았다. 그는 오늘따라 이상했다.

곧장 출구로 나가려는데 왼쪽에 있는 쪽방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차 회장이 걸어나왔고 한 발 뒤에 누군가 따라나왔다. 김 회장이었다. 야바는 숨을 들이켜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명환은 고개 숙인 채 침묵을 고수했다. 차 회장은 엄중한 눈으로 차이석과 야바를 차례로 응시했다. 주름진 눈두덩 아래에 호기로운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차 회장은 천천히 고개 돌려 김 회장에게 향했다.

“어떻습니까? 김 회장님.”

“제가 그 아이 얼굴 한 번 본적 없지만 목소리는 자다 일어나서 들어도 맞추지요.”

김 회장은 주름진 눈가를 좁히며 머리를 저었다.

“장담하는데 저 목소리는 절대 코카인이 아닙니다.”

차이석의 입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야바의 심장이 박살 날 듯이 요동쳤다. 물컹한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차이석은 큰 보폭으로 걸어와 야바 뒤에 서더니 커다란 손으로 등을 감싸며 몸을 지탱시켰다. 야바는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야바가 쥔 손잡이가 빠져나가고 문이 열렸다. 휘파람 같은 바람이 안으로 들이쳐 야바의 가면 깃털을 뒤흔들었다. 낯선 남자가 안으로 들어와 묵례했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들여보내.”

차 회장이 짧게 명령하자 남자는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남자 뒤쪽에서 누군가 들어왔다. 차랑, 크리스털 방울이 부대끼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이제 막 도착한 듯 옷깃에 찬바람을 묻혀왔다. 그리고 금빛으로 빛나는 가면, 흔들리는 새하얀 깃털……. 안으로 들어온 건 코카인이었다. 그는 정면에 굳어 있는 야바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가면 아래 비친 코카인 눈동자가 당황과 혼란으로 흔들렸다. 이내 야바 너머의 차이석에게 당도했다.

“차 전무님. 어떻게…….”

그가, 차이석이 일이 틀어지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진공상태 같은 이명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야바는 시선을 들어 코카인을 마주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