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15
해 저문 골목에 고즈넉한 조명이 비추었다. 코카인은 높은 담벼락에 기댄 채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가면에 달린 흰색 깃털이 꽃샘바람에 나부꼈다. 그 위에서 입김이 바스러졌다. 세준은 약간 넋 나간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조용한 시선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코카인은 견디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또 금세 떨어져 나가는 시선이다. 정적을 깬 건 코카인이었다.
“10년 만이네요…….”
그 목소리가 머나먼 세월을 휘돌아오는 듯했다. 세준이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는지, 또 자신은 어떻게 그러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건 과거를 공유한 자들만의 교감이었다. 야바 말대로 죽었거나 운 좋으면 시설에 들어갔으리라 짐작했다. 아까 낯선 남자가 껴안았을 때, 그가 세준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동안 어디서 지냈어요?”
“많이 돌아다녔어요. 전국을 떠돌면서 여러 가지 나무를 만났어요. 그리고 계속 채우를 찾아다녔어요….”
“형이…조경사가 됐으리라곤 생각 못했어요. 더군다나 여기에서 일할 줄은…….”
그는 책을 낭독하듯 부자연스럽게 말했다.
“우연히 만난 조경사 밑에서 일하다가 독립했어요. 여기에 온 지는 두 달 정도밖에 안 됐어요.”
“집은 어디에요? 여기서 상주하면서 정원을 돌보는 건가요?”
“하늘과 제일 가까운 곳에서 살아요.”
세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저멀리 허름한 집이 즐비한 언덕이었다. 그가 손을 내리며 무구한 세월이 담긴 시선을 중첩해 왔다. 그는 여전히 벅차오른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당장 벼락같이 껴안을 듯한 눈이지만 한발 정도 물러난 거리를 유지했다. 마치 경외하는 성직자 앞에 선 신자처럼 말이다.
10년 전, 노래해 달라고 쫓아다녔을 때도 저런 눈이었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꼬박꼬박 존댓말 하는 것도 여전했다. 어눌한 말투지만 예전처럼 의사소통에 어렵진 않았다. 세준과는 이웃에 살았어도 얼굴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공짜로 노래해 주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세준이 집 주변을 배회하면 야바가…세진이가 어김없이 뒷덜미를 잡아 끌어가곤 했다. 자폐증은 오히려 암보다 섬세한 기술과 시간을 요해서 몇 번 들은 것으로 눈에 띄는 효과는 어렵다. 실제로 세준이 자신의 노래를 들었던 건 고작 두어 번이 전부였을 거다. 한번은 세진이 집에서, 한번은 쫓아다니지 않는 조건으로 어머니 몰래,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이 마지막이다. 아니, 그날 그가 노래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선명하게 각인된 건 도륙의 냄새와 절규뿐이다. 깊숙이 눌러놓았던 장면이 비어져 나오려 했다. 정신이 날을 세웠다. 숨이 막혔다.
“동생은…형 동생도 있었잖아요. 잘…지내요?”
“사라졌어요.”
시종일관 감격에 벅차했던 세준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까만 눈동자가 먼 곳을 배회하고 돌아왔다.
“그날 다녀오니까 채우가 없어져서 놀랐어요. 동생도 사라졌어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없어졌어요. 크리스마스는 온 세상 사람들이 선물을 받는 날이죠. 하지만 나만 예외였어요.”
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야바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세준에게 먼저 야바 얘길 해야 할까? 아니면 야바에게 먼저 얘기해야 할까? 그 자존심에 지금 자신의 처지를 형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거다. 그래. 역시 야바에게 먼저 알리는 게 낫다. 코카인은 눈을 닫았다. 골목 저편에서 밴에 올라탄 깡패가 경적을 짧게 울렸다. 가면을 꽉 쥔 채 걸음을 돌렸다.
“이제 가 봐야 해요.”
세준이 황급히 붙잡았다.
“어디에 살아요? 또 언제 와요?”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언제 와요? 그가 재차 물었다.
“모르겠어요. 사모님이 또 찾으신다면 오겠지만…….”
“또 부를 거예요. 채우 노래는 한 번만 들으면 다시 듣지 않고는 못 견딜 거니까. 다음에 만나면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
야바의 얼굴이 묻어난 이목구비, 하지만 훨씬 순하고 맑은 눈이다. 그와 자신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눠선 안 된다. 그는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의 조각이다. 피하고 싶었던 과거와의 조우, 악몽의 되새김질, 10년 전 그날의 목격자와 가해자이기에…….
“이 사람아. 사모님 방에 그렇게 뛰쳐들어가면 어쩌나? 사모님 많이 놀라셨어.”
“죄송합니다.”
세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원에 들어섰다. 집사는 기계적으로 들리는 사과에 찜찜한 표정이다.
“아까 그 청년 아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고향 친구인가?”
“친구가 아닙니다. 그런 게 될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저를 구원해준 사람입니다.”
“하여튼 가끔 희한한 소릴 한단 말야.”
집사 얼굴이 묘하게 구겨졌다. 세준은 목장갑을 끼고 멈췄던 작업을 시작했다. 정원수를 짚으로 감싸고 작은 화단 주변을 벽돌로 둘렀다. 집사는 정원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이 정도 솜씨면 찾는 곳도 많을 텐데 자네도 한 곳에 정착하는 게 좋지 않나? 좋은 여자 만나 아이도 낳으면서 말야. 아, 전에 두 사람을 찾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거라고. 누구지? 형제나 가족인가? 아니면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인가?”
세준은 벽돌 모서리를 칼같이 정렬하며 말했다.
“한 사람은 저의 신입니다.”
감히 손댈 수 없는 성역이며, 신성한 존재…….
“남은 한 사람은 제 애인입니다.”
다시 그 옆에 벽돌을 얹으며 고요히 읊조렸다.
“둘 중 하나라도 빼앗아 가면 죽여버릴 겁니다.”
어둑한 골목에 검정색 밴이 빠르게 달려갔다. 코카인은 임 실장에게 전화해 예약을 모두 취소했다. 모든 수입원을 자신에게 의지하는 동료에겐 미안했지만 오늘은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기력을 모두 소진했다. 묵직한 머리를 차창에 기댔다. 충동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건너편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이석이었다.
[어땠어?]
“어땠을 거 같아요?”
코카인은 말을 이어갔다.
“첫 번째는, 다 큰 남자를 모친에게 보내놓고 찾아오지도 않다니 의뢰인이 고약하다고 생각했어요. 두 번째는, 사모님 아드님이 참 무심하다고 생각했어요. 조금만 관심 보여도 그렇게 악화되진 않았을 텐데…….”
[고칠 수 있나?]
“육체보다 마음의 병이 더 치유가 힘들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한 번 해볼게요.”
[그 양반한테 질려서 손 뗀 의사가 한둘 아니니 각오해야 될 거야.]
“제대로 하기도 전에 겁주시는 거예요?”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신뢰 담은 목소리에 무거운 머리가 맑아졌다. 코카인은 웃음을 잘근 물었다.
“대신 밥 사주세요.”
[지금 누굴 만나는 중이라 곤란한데. 언제 시간 내지.]
코카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쩐지 오늘은 필요 이상의 떼를 쓰고 싶었다. 그러면 그는 피식 웃으면서 달려올 것만 같다. 변하고 있는 건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대신 비싼 거 사주셔야 해요.”
매달리는 대신, 깔끔하게 맺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도시야경이 내다보이는 와인 바에 재즈 선율이 번졌다. 한쪽 벽면에는 와인병과 스크린이 있고 재즈공연을 기다리는 악기들이 질서와 자유분방함 사이에 정렬했다. 바에 나란히 앉은 두 남자 너머로 흑백영화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짙은 음각을 가진 남자들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이질감이 없었다. 이석은 폰을 끊고 테이블에 올렸다. 기하는 잔을 들며 물었다.
“코카인입니까?”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길이라더군요.”
“아마 그 녀석이라면 전무님 모친을 치유할 겁니다. 힐러로서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사람 마음을 다독거리는 것도 곧잘 하니까요. 코카인은 타고난 힐러입니다.”
기하는 덧붙였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코카인이 본가에 드나들다가 차 회장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집안 행사 외엔 본가에 얼씬도 안 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운 나쁘게 마주친다고 해도 가면을 써서 알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이석은 잠시 끊겼던 대화를 이어갔다.
“가게는 언제부터 했습니까?”
“10년 전쯤입니다. 부친이 음성학 연구를 하셨죠. 우연히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기적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걸 발견하고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부친은 연구 도중에 사망했고, 샘플도 자살했습니다.”
“당신이 대업을 이어받았군요.”
기하가 눈썹을 들며 대답했다.
“그 양반은 연구만 할 줄 알았지 그걸 돈으로 만드는 방법을 몰랐던 거죠. 코카인의 소문을 처음 들은 건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입니다. 어디엔가 노래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더군요. 때마침 투자자가 나타나 공중분해 될 뻔한 기회를 잡았습니다.”
“거기가 가게 소유주 아니었습니까?”
“곧 제 것이 될 겁니다.”
기하는 자신만만하게 잔을 들었다. 이석은 그런 기하를 응시하다 담배를 물며 말했다.
“그 사람도 어지간히 판타지를 좋아했나 보군요. 힐러를 철석같이 믿고 투자까지 하다니.”
“그쪽 대리인을 통해 들으니 투자자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었다더군요. 궁지에 몰리면 무당 치맛자락이라도 붙들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허무맹랑한 일이 아니란 걸 코카인이 증명했죠.”
이석은 무채색 미소를 머금은 채 잔을 가볍게 돌렸다. “그런데 너무 늦었죠.” 크리스털 잔에 감기는 액체를 보며 읊조렸다.
“…예?”
기하는 되물었다. 이석은 대답없이 레드 와인을 입천장 뒷부분에 머금었다. 혀에 감기는 두터운 바디감이 야바의 혓바닥처럼 자극적이고 찰졌다. 그는 치즈를 둘둘 말며 말했다. 우유빛깔의 보드라운 치즈는 음모 없는 사타구니 같다.
“그런데 거세는 왜 했습니까?”
기하는 와인잔을 빙빙 돌리며 답했다.
“중세 유럽의 성당에서는 여자에게 노래하는 걸 금지했다더군요. 카스트라토는 여성 파트를 대신하도록 사내아이를 거세해서 미성을 유지하도록 했죠. 제 부친은 남성의 깨끗한 목소리가 육신과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특히 2차 성징이 일어나지 않은 순수하고 성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더러운 것을 씻을 수 있다는 신념에서요.”
달그락, 달그락, 잘 깎인 얼음 조각이 물소리를 쪼갰다.
“수년 동안 전국을 뒤지던 끝에, 어렵게 코카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일이 꼬이고 말았죠. 그날 코카인 집에 놀러 왔던 꼬마를 코카인으로 착각하고 잡아온 겁니다. 녀석은 코카인을 밀고했고 지금의 코카인이 있게 된 거죠. 물론 제게 절반의 책임이 있는 건 인정합니다. 전에 나머지 절반은 누구 책임이냐고 물으셨나요?”
기하의 눈길이 흑백영화가 움직이는 스크린에서 이석에게 당도했다.
“코카인을 밀고한 건 야바입니다. 차 전무님이 총애하셨던 코카인을 말이죠.”
이석은 읽지 못할 눈으로 기하를 마주했다. “저런.” 이윽고 그의 입술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친구 잘못 사귀어서 인생 꼬였군요.”
“뭐, 코카인이 느낀 배신감이야…….”
“야바 말입니다.”
툭 던지는 말에 기하는 입을 다물었다. 이석의 입술에서 지워졌던 웃음기가 되살아났다.
“절반의 책임이라…. 어린애한테 던져주는 지분치곤 너무 많군요. 두려움에 좀 먹힌 애한테 의리까지 바라는 건 무리 아닙니까.”
“그 당시 눈빛은 이미 아이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겁에 질려서라기보다 악의로 가득 찬 눈이었죠.”
“꽤 오래된 일인데도 세세하게 기억하는군요.”
“인상적이었으니까요.”
기하는 회상에 젖은 눈으로 말했다. 이석은 눈을 휘며 서늘하게 웃었다.
“좋게 생각해요. 당신도 야바 덕분에 코카인을 손쉽게 찾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계속 생각 중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야바를 자꾸 내 눈밖에 나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뭘까를.”
오만함이 덧씌워진 이석의 이목구비는 은은한 조명과 강한 대비를 이루었다. 기하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목소리는 차분했다.
“있는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같은 배를 탄 동반자로서.”
이석은 조명이 녹아든 술잔을 흔들며 입가에 댔다.
“그렇다 치고. 통금 시간이나 늘여봐요. 나야 상관없지만 그 녀석이 통 말을 안 듣는군요. 혹시 진짜 야바 머리에다 장난쳤습니까? 폭탄이나 위치 추적 칩 같은…….”
기하는 실눈을 뜨며 고약하게 웃었다.
“설마 그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죠. 물론 그 녀석 말을 듣다 보면 혼란스러울 때가 있으니 이해합니다만, 정신도 똑바르지 않은 녀석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한 분일 줄 몰랐군요. 미리 경고하지만, 그 녀석 말을 다 믿다간 분명 뒤통수 맞는 날이 올 겁니다.”
“그야 당신이 먹이는 약의 활약이 컸겠죠. 멀쩡한 사람도 폐인 만드는 그 약 말입니다.”
“녀석을 살리려고 먹인 겁니다.”
무슨 개소리죠? 이석이 눈썹을 미끈하게 들며 물었다.
“아무래도 생활이 그렇다 보니 언제부턴가 자해하더군요. 숙소에 몇 번이나 불을 질러서 위험한 고비까지 넘어갔죠. 동료를 흉기로 위협하기도 했고, 그걸 막으려면 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꽤 골치 아픈 녀석이군요.”
이석이 눈썹을 들며 말하자 기하도 입술 끝을 올리며 답했다.
“답이 안 나오죠. 그 녀석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은 게 한두 번 아니니까요.”
“그럼 나한테 주던가.”
기하의 눈동자에 불이 튀었다가 금세 사라졌다. 이석은 그 미세한 동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기하는 여유로움을 가장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위층 아이들이 파는 건 목소리뿐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립니까. 잠깐 데리고 놀 애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해 드리죠.”
“긴말 필요 없고, 가격이나 제시해봐요.”
날 비린내 나는 눈동자가 기하를 거침없이 응시했다.
오전에 무대 의상 디자이너 두 명이 방문했다. 기하가 소개한 디자이너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녀에게 수제 의상을 맞춰야 하는 게 의무였는데, 여자는 옷감이 어디 출신이며, 장신구가 어떻게 가공됐는지 침 튀기게 설명하고 눈 튀어나오는 가격을 불렀다. 거창한 설명과는 달리 원단과 디자인은 밤무대 출신 같았다. 고자 가수들은 불평을 터트렸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의상을 구입해야 했다. 물론 의상 선택은 코카인의 체격과 피부톤, 그의 취향이 기준이었다. 코카인은 청년들과 머리를 맞대고 카탈로그를 살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야바는 처음부터 보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달라붙던 눈길이 사라졌다. 거실 한쪽에선 청년들이 치수를 재려고 줄을 섰다. 아직도 메사돈의 핏자국이 벽에 남았지만 그들은 늘 그랬듯이 절망 속에서도 코카인 노래로 구원을 얻었다. 모르핀은 디자이너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이모. 이거 얼마 주고 샀어요? 아씨~ 우린 언제까지 대포폰이나 써야 되는데? 요새 누가 이런 폴더를 쓰냐고? 인터넷도 안 되고……!”
“내 말이. 밖에서 내놓기 쪽 팔려서 진짜.”
고자 가수들이 입을 모아 불만을 터트렸다. 불알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명품으로 중무장한 그들에게 구식폰은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깡패가 버럭 소리쳤다.
“왜? 최신 폰으로다 빛의 속도로 짭새한테 접촉하려고? 삐삐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 고자 새끼들아! 주둥이 닥치고 똑바로 줄 안 서?!”
깡패는 담배를 뻑뻑 피우며 거실 바닥에 침을 뱉었다.
“꼭 방바닥에 뱉고 지랄이야. 저 새끼 평생 뱉은 침 가래, 나중에 뒤졌을 때 다 처먹었으면 좋겠다니까? 왜, 죽으면 생전에 자기가 버렸던 밥 전부 먹어치워야 한다잖아.”
모르핀은 퉁퉁 부은 얼굴로 궁시렁거리다 화제를 바꿨다.
“얘기 들었냐? 나도 깡패들이 수군대는 거 들었는데, 얼마 전에 사장님 귓구멍 뚫은 사람이 차 전무래. 그 사람이 사장 귀에다 만년필을 쑤셔 넣었다더라고.”
“진짜? 왜?” 주변에 있던 고자들이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나야 모르지. 내 언젠가 사장이 그렇게 당할 줄 알았다니까? 물론 코카인이 금세 고쳐줬다지만 어찌나 쌤통이던지.”
청년들은 십 년 묵은 체증을 털어낸 양 함박웃음을 지었다. 모르핀이 말했다.
“참! 차 전무도 아래층 이용했다가 위로 올라왔지? 워낙 매너가 좋아서 어딜 사용했는지 짐작을 못 하겠네. 혹시 미소녀 쪽일까?”
“의외로 그런 사람이 SM쪽 취향이 있던데. 코카인 너 아는 거 있어?”
“몰라.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헤로인의 의뭉스런 물음에 코카인은 실소를 터트렸다. 어느덧 늘어선 줄이 짧아지고 야바 차례가 되었다. 뿔테 안경을 쓴 디자이너가 야바 허리에 줄자를 둘렀다. 그녀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너한텐 붉은색이 어울리는데 코카인이 워낙 강한 색이 안 받아서 아까워. 에그, 또 살 빠졌잖아? 팍팍 좀 먹으라니까…….”
“차라리 고추장에 묻힌 돼지두루치기 구경하고 싶다고 하지그래?”
“뭐?”
여자 목을 줄자로 졸라버리고 싶었다. 대신 여자의 뿔테 안경을 벗겨내 발로 짓뭉갰다. 그녀가 가져온 옷감과 카탈로그도 찢어발겨 사색이 된 여자 면상 앞에다 내던졌다. 코카인 눈알을 터트리고 살갗을 찢어발긴 것 같아 머리가 개운했다.
“니가 가져온 원단도, 니가 만든 의상도 전부 싸구려야. 그중에 니가 제일 싸구려야.”
야바는 쌀쌀맞게 방으로 걸어갔다. 낙엽 같은 시선이 쏟아졌다.
“저 똘아이…….”
핀잔주는 고자들의 입가엔 웃음기가 꿈질거렸다. 야바는 곧장 욕실로 달려갔다. 샤워를 마치고 보습크림을 펴 발랐다. 쌓아놓은 옷을 들춰 랩으로 만 종이 뭉치를 찾았다. 얼마 전 별장에 다녀오고 나서 이석은 수고비로 수표를 주었다. 전에 주었던 건 모조리 찢어졌다는 말을 했다. 그는 찢어진 금액까지 얹어주었다. 겹쳐 있는 허벅지 살을 헤치고 그 틈에다 종이 뭉치를 끼웠다. 깡패들에게서 보호하려면 여기가 제일 안전했다. 팬티를 끌어 올려 그의 키스를 감쪽같이 숨겼다. 걸을 때마다 수표 뭉치가 사타구니에 쓸렸다. 그의 입술이 닿은 것 같아서 열기가 몰렸다.
욕실 거울에 서린 김을 손으로 닦아내자 보기 싫은 얼굴이 비쳤다. 희미하게 남은 멍 자국이 곰팡이 얼룩 같다. 손끝을 가져가 괴상하게 찢어진 눈가도 만져보고, 납작한 콧등도 더듬어보고, 볼에서 붙은 탄력 없는 살덩이를 꾹꾹 눌러도 보았다. 조금만 눈이 컸으면, 조금만 코가 오똑했으면, 얼굴도 갸름했으면. 그러다 거울에 담긴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샤워하고 나오니 오전 약 먹을 시간이었다. 서랍장에 있는 알약을 꺼냈다.
‘아침에 한 알, 저녁에 두 알. 약효가 강해서 과다복용은 금물이야.’
갈색 케이스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검붉은 색 알약 하나를 들어 불빛에 비췄다. 어두운 적색은 퍼석한 그의 눈동자를 닮았다. 또는 혓바닥의 짙은 빛깔을 닮았다. 뇌 속이 물컹해졌다. 매번 약을 먹기도 전에 약 먹은 기분이 들다니 신종 약이라 다르긴 확실히 달랐다.
그가 가져다준 약을 먹은 지 삼일째다. 첫째 날은 그냥저냥 괜찮았다. 둘째 날부터가 문제였다. 그제, 어제 창백한 남자가 출몰했다. 이렇게 자주 나타나는 건 처음이었다. 심장도 자주 뛰고, 초조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칼로 저미는 것처럼 살이 아팠다. 속도 매스꺼워 끼니도 챙기는 둥 마는 둥했다. 차이석은 새로운 약에 몸이 적응하는 거라고 했다. 알약 하나를 꺼내 입술로 가볍게 품었다가 떼어냈다. 전에 먹던 약은 약간 짠맛이 났는데 이건 약간 달달한 맛이 났다. 그때 달팽이관에서 잠들었던 벌레가 속삭였다. 신종 약? 그걸 곧이곧대로 믿다니, 한 알로는 치사량에 밑돌 테니 걔도 흔쾌히 먹은 거야. 지금쯤 깜빡 속아 넘어간 널 보며 비웃고 있을걸? 너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어. 이제 차명환도 숨이 끊어질 거고, 더이상 넌 쓸모도 없으니 제거하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한 거지. 그건 니가 더 잘 알잖아? 계속 모르는 척하기야?
돌대가리! 돌대가리! 돌대가리! 돌대가리! 돌돌돌돌돌돌……….
“시끄러워! 시끄러워!”
짝!짝! 야바는 제 귀를 때리고 귓구멍에 손가락을 욱여넣어 벌레들을 끄집어냈다. 손톱에 뭉개진 벌레가 악다구니했다. 야바는 약 케이스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손에 쥔 알약을 으깰 듯이 움켜쥐었다. 당장 전화해서 따져 봐! 어서! 몸통이 반은 날아간 벌레가 다그쳤다. 야바는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방안을 빙빙 돌아다녔다. 코카인 침대 위에 있는 폰이 보였다. 코카인에게 차이석 번호를 물으면 알려주겠지만 그런 것으로 의지할 생각은 없다. 뭐든 스스로 쟁취해야만 진짜 자신의 소유가 되는 거다. 야바는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최근 통화 목록을 들추는 순간 손을 멈춰 섰다. 제일 첫 번째 목록에 있는 이름은 차이석이었다. 번호를 얼른 훔쳤다. 혀끝을 통해 뇌 한쪽에 숨겨두었다. 벌레에게 발각돼 갉아 먹히지 않도록 제일 아래쪽에다 넣었다. 그때 코카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너무 놀라 날아가려는 번호를 꽉 붙들었다. 야바는 코카인 폰을 바지 속에 감추고 제 침대에 드러누웠다. 코카인은 선반과 가방을 뒤지다가 허리를 펴며 물었다.
“혹시 내 폰 못 봤어?”
“못 봤어.”
“어디 갔지…….”
코카인은 한숨 쉬며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기이한 눈을 했다. 어제부터 종종 저런 눈빛으로 야바를 살폈다. 거머리가 얼굴을 기어 다니는 기분이다. 코카인은 불쑥 정수기로 걸어갔다. 컵에 물을 담으며 이쪽으로 걸어와 내밀었다. 오늘 아침 독극물을 부어놨던 물을 말이다. 야바가 미동 없이 앉아 있자 코카인이 말했다.
“약 안 먹을 거야?”
야바는 마른 입술을 뗐다.
“됐어.”
“지금 약 먹으려고 손에 쥐고 있는 거 아냐?”
“됐다잖아.”
코카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너 왜 이 방에 있는 물은 한 번도 안 마셔? 바로 옆에 정수기가 있는데도 꼭 냉장고에 있는 것만 마시고, 혹시 정수기에 독약이라도 들었어?”
심장이 한 줌만 해졌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표정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사고가 허우적거렸다. 야바는 천천히 컵을 건네받았다. 손에 쥔 알약을 입에 넣고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독 섞인 물은 혓바닥과 식도를 녹이며 위장으로 들어갔다. 솟구치는 구역질을 참느라 등줄기에 땀이 고였다. 깨끗하게 비운 컵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누가 독약 타게 할 짓이라도 했나 보지?”
침착하게 대처한 자신이 대견했다. 코카인은 풋, 하며 건너편 제 침대에 앉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있잖아. 계속 말할까 말까 망설였어. 하지만 아무래도 니가 알고 있는 게 맞는 거 같아.”
야바는 숨죽인 채 그의 입술만 뚫어지게 주시했다. 선이 고운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했다. 먼저 도착한 건 코카인의 눈동자였다. 꽉 막힌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세준이 형…… 봤어.”
“그게 누군데?”
야바는 낯선 이름을 되돌려줬다. 코카인은 미간을 접었다.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지.”
“너희 형이잖아.”
테이프 늘어지는 소리처럼 괴이한 단어였다. 야바는 발끝에 걸린 시선을 들어 코카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헛소리야? 그 반푼이는 니가 죽였잖아. 꿈꿨어?”
“나도 처음엔 눈을 의심했어. 그런데 진짜 세준이 형이었어. 지금 조경사가 돼서…….”
“조경사? 그런 반푼이한테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정원을 맡기겠어? 그리고 10년 전에 몇 번밖에 안 본 얼굴을 니가 어떻게 알아봤다는 건데?”
“너하고 닮았으니까.”
“세상에 이런 돼지 상은 널렸어. 헛소리 말고 좀 쉬어. 너 지금 안색이 엉망이야.”
“비꼬지 마. 정말 세준이 형이었어. 차이석 씨 집 정원을 돌보는 사람이었어.”
“…….”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듯했다. 코카인은 항상 저렇게 정중한 얼굴로 깊은 내상을 입혔다. 이러니 그의 몰락을 갈망하는 것이다.
“……걔 집에 갔어? 왜?”
코카인은 한숨을 풀어헤치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희 형은…….”
“걔 집에 왜 갔었냐고 묻잖아!”
조금 전 나눴던 대화는 깨끗하게 날아가고 한가지만이 피를 절절 끓게 했다. 코카인은 차가운 얼굴로 마주했다.
“차이석 씨 어머니가 편찮으셔. 정기적으로 본가에 방문해서 치료하기로 했어.”
“걔가 직접 말했어? 너한테… 자기 본가에 가서 엄마를 힐링 해 달라고?”
“그래.”
코카인이 대답했다. 생살을 쥐어짜듯 손을 움켜쥐었다. 그런 거다. 결국 저 얘길 꺼내려고 반푼이니 뭐니, 헛소리를 지어낸 거였다. 본가와 그의 모친. 별장과 차명환. 진짜는 햇볕 잘 드는 곳에, 가짜는 곰팡내 나는 음지에. 가족을 지켜낸 코카인에겐 칭송이, 연극을 한 광대에겐 입 발린 싸구려 인사치레만이. 지극히 당연한 절차였다. 바닥까지 떨어진 체온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세준이 형은 어떻게 할 거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야바는 싸늘한 시선을 올려붙였다.
“몇 번이나 말해? 걘 죽었어. 니가 죽였어.”
그늘진 코카인 미간이 얼어붙었다.
“나도 왜 하필 나를 먼저 만났는지 원망스러워. 그래 좋아. 난 분명히 말했어. 앞으로 어떻게 돼도 날 탓하지 마.”
코카인은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코카인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하얀 얼굴로 숨을 헐떡거렸다. 격렬하게 날뛰던 야바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반응했다. 야바는 안색 나쁜 코카인을 물끄러미 관찰하며 손톱 끝을 자근자근 물어뜯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공기에 부서지는 음성은 체온 없는 기계음 같았다.
“그냥, 조금 어지러워서…….”
아직 미완성된 작품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이제 바야흐로 자신의 작품이 완성될 시간이 다가오는 거다. 코카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신호였다. 긴 시간 동안 몸을 추스른 코카인은 헤쉬쉬 부름에 밖으로 나갔다. 야바는 곧장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손가락을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조금 전 마셨던 물을 모조리 게워냈다. 피가 머리로 쏠리고 신물이 솟구쳤다. 위장에 든 독극물을 싸그리 토했을 때야 마음이 평안해졌다. 바지에 든 코카인 폰을 변기에다 던지고 물을 내렸다. 새하얀 휴대전화는 절규를 끝으로 물살에 휩쓸려 갔다. 오물 속으로 빨려가는 게 코카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못내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인간은 오물에서 태어났다. 역한 냄새를 맡으며 인분을 자양분 삼아 부단한 고행의 시간 끝에 씨앗 같은 태아로 형성되는 거다. 코카인의 몰락은 진정한 본연으로 돌아가는 거다.
문득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머리도 송곳으로 우겨 파는 것처럼 아팠다. 야바는 아까 쓰레기통에 버렸던 약을 꺼내 먹었다. 새로운 약에 몸이 적응해가는 것이든, 서서히 죽이는 독약이든…. 물도 없이 약을 삼켰다. 머리에 숨겨둔 그의 번호를 끄집어내 폰 버튼을 하나하나 눌렀다. 버튼이 물그덩거리는 눈알 같았다. 액정 안에 완성된 간결하고 차가운 번호를 매만졌다.
“이석아. 이 약 이상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별장에 가지 않는 날은 가게 일을 하기로 했다. 불알 값도 모아야 했고, 오늘 찢은 원단과 여자 안경 값도 배상해줘야 했다. 불알 값에는 차이석이 준 수고비도 보탤 참이다. 물론 이곳에서 벗어났을 때의 일이다. 이제 가게 오픈 시간이라 안팎으로 정신없이 바빴다. 야바는 문가에 바짝 붙어서서 주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10여 명 되는 사람들이 주방 가운을 입고 음식 준비에 여념 없었다. 여드름이 빼곡한 주방보조가 인상을 구겼다.
“왜 또 여기서 어슬렁거려? 나가.”
몇 번 칼과 가위를 훔치다 들켜서 그들은 자신이 주방 근처에만 와도 경계했다. 숙소에는 칼이나 가위를 들이지 못한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조리하는 게 불가능해서 인스턴트 아니면 시켜먹어야 했다. 그 규칙이 생긴 데는 자신이 크게 일조했다. 야바는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기하가 수정과 달래. 한 그릇 퍼와.”
“누가 그 수법에 또 속을 줄 알아? 나가 빨리!”
“의심스러우면 기하한테 물어보던가. 걔 지금 열 받아서 거슬리면 안 좋을걸?”
여드름이 움찔했다. 그러다 체, 하며 야바 얼굴 가까이에 수건을 탁탁 털었다.
“그런데 나이도 한참 어린 새끼가, 사장님이 네 친구야? 어디서 따박따박 이름을 불러?”
야바는 상대도 않고 수정과 통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유리뚜껑을 열고 국자로 퍼담았다. 선반 도마 위에 얄팍게 잘 갈린 칼을 힐끔거렸다. 주방 보조는 야바 곁에 찰싹 붙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때 양파 까던 아줌마가 그를 불렀다. 그의 시선이 한순간 떨어졌다. 야바는 수정과는 내팽개치고 도마에 있던 칼을 들고 빠져나갔다.
“야! 거기 안 서?!”
놈의 부름도 무시하고 주방에서 나와 복도를 꺾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야바의 손을 움켜잡았다.
“놔!”
야바는 본능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기하는 민첩하게 피하면서 야바 손목을 눌러 칼을 떨어트리게 했다. 바닥에 뒹군 칼을 저 멀리 발로 찼다. 그는 요즘 부쩍 가게에 일찍 나와 늦게까지 자릴 지켰다. 마치 각고의 노력 끝에 제집 마련한 사람 마냥 가게 구석구석을 손질하고 돌아봤다. 그가 눈썹을 구기며 엄중하게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게 왜 필요한 거지?”
“몰라서 물어? 살 자르려고 그래.”
기하는 입술을 꿈틀거렸다.
“도대체 잘라낼 살이 어딨다는 건지 말해 봐.”
“증명하면 저 칼 나 줄 거야?”
야바는 구석에 처박힌 칼을 애간장 태우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둑하게 매달린 뱃살을 주물럭거리다가, 가슴을 잡아 살 다발을 쫙 모았다.
“여기도, 여기도, 전부 지방 덩어리잖아. 이것 봐. 여자 거하고 똑같지?”
야바는 기하의 손을 가져와 뱃살을 만지게 하고, 불룩하게 모은 가슴 위에도 얹었다. 단단한 손이 경직하며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의 눈빛이 짙어졌다. 빳빳하게 굳은 엄지가 어느 순간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거진 살덩이를 눌렀다가 젖꼭지를 스쳤다. 속이 메슥거리는 움직임에 그 손을 뿌리쳤다.
“됐지? 저거 내가 가진다.”
칼을 주우러 가는데 놈이 재차 막아섰다. 기하는 야바 얼굴을 훑었다.
“약은 발랐나?”
“발랐어.”
“바른 게 그 모양이야? 따라와.”
그는 야바 팔뚝을 잡아 어딘가로 끌고 갔다. 야바는 진저리치며 손을 잡아뺐다.
“병 주고 약 주는 놈이 제일 구역질 나. 그냥 병 주는 놈 따로, 약 주는 놈 따로인 게 좋아.”
기하는 공중에 뜬 손을 내렸다.
“고자의 장점 생각하고 있어?”
기하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야바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지나쳐갔다.
“도대체 니가 제대로 하는 게 뭔데? 가게 일이나 신경 써. 그나마 바지사장 자리 잘리지나 말고.”
기하는 납처럼 싸늘해졌다. 이 말은 기하의 폐부를 후벼파는 잔혹한 도구였다. 더 잔인해져서, 더 더 혹독하게 자존심을 할퀴고 피고름을 내고 싶다. 더 더 더. 가혹하게 몰아붙여서 빈 음낭의 절규를 잠시나마 잠재우고 싶다. 곧바로 팽팽한 손아귀가 팔을 씹었다. 과격한 힘에 끌려가 불이 튀는 시선과 충돌했다. 기하는 한자 한자 단어를 찍어눌렀다.
“정말 마지막이다. 앞으로 함부로 빠져나가면 가만 안 둬. 차이석 그 새끼가 어떤 놈인지 몰라서 그래? 행여나 여기서 너를 빼줄 거로 생각하면 대단한 오산이야.”
“나는 만나러 가고 싶으면 갈 거야. 걔가 오지 말라고 해도 내가 가고 싶으면 가서 보고 말 거야. 그러니까 리모컨 누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왜 자꾸 안 하던 짓이야? 차이석이 너한테 왜 그러는 줄 아나? 니가 코카인 대용품이니까 그에 충실히 대하는 것뿐이야. 그런 부류들, 친절한 얼굴로 실컷 이용하다가 필요 없으면 잔인하게 버리는 거 몰라서 그래?!”
야바는 생살의 즙을 짜내듯 눈동자를 움직여 그를 보았다. 쇠사슬에 묶인 목소리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알아. 그렇게 일일이 안 가르쳐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네 앞가림이나 똑바로 해.”
다시 자리를 벗어나려는 의지는 기하 손아귀에 좌절됐다. 그는 한층 더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나 말해 줄까? 차 전무가 원래 어떤 방에 드나들었는지.”
야바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알아.”
“알아?”
“걔 목소리 도착증 있어. 폰 섹스 같은 거 했겠지.”
기하의 입가에 뚜렷한 조소가 파였다.
“정신 차려. 차 전무 위층에 오기 전까지 맨 지하층을 애용했어. 거기가 네크로필리아들이 들락거리는 데란 건 잘 알겠지.”
그리고 가차없이 쐐기 박았다.
“알았어? 예전에 치운 마리화나도 차 전무를 손님으로 받았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