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14
차 바퀴가 바닥을 긁으며 급정차했다. 도착한 곳은 파라디소 가게 정문이었다.
“꼼짝 말고 기다려.”
“어디 가는데?”
그는 대꾸없이 차에서 내렸다. 야바는 멀어지는 그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이석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어갔다. 전투적으로 달려온 것과는 달리 느긋한 걸음이다. 바지 한쪽에 찔러넣은 손으로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실루엣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혈관 속을 사납게 달리는 피를 달랬다. 사장실 입구가 보였다. 문앞에 있던 사내 두 명이 직각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이석은 문고리를 잡았다. 뺨에 칼자국 난 사내가 문을 지그시 눌렀다.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내가 왔다고 하면 미룰 겁니다. 그래야 되고.”
곧장 사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테이블에 앉은 덩치 다섯의 눈길이 쏟아졌다. 상석에 있던 사장과 시선이 충돌했다. 이석은 천천히 사장에게로 걸어갔다. 카펫에 흡수된 발소리는 정글 짐승의 사냥 직전의 고요함이었다. 기하는 불청객의 난입에 놀라움보다 불쾌감에 가까운 낯빛으로 일어났다.
“이렇게 갑자기 어쩐 일로…….”
이석은 주머니에 꽂힌 손을 잡아빼 앞으로 내밀었다. 기하가 그 손에 악수하려던 찰나였다.
짜악―――――!
이석의 손등이 화살의 궤적처럼 상대 뺨을 후려쳤다. 기하의 몸이 휘청거릴 만큼 고개가 돌아갔다. 깡패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튕겨 일어났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기하가 단호히 명령했다. 임수는 미간을 구기며 뒤로 물러났다. 기하는 고개를 제자리에 돌리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짓입니까?”
“야바 얼굴에 못 보던 그림이 그려졌더군요. 그렇게 병신같은 짓 할 사람은 거기뿐인 것 같은데 잘못 짚었습니까?”
차이석의 말이 기하의 청각을 곤두세웠다.
“얼굴을 보는 건 규칙 위반입니다. 잘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셨습니까.”
“대신 벌금 내죠. 왜 때렸습니까?”
“그럴만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
짜악―――――――!!
다시 기하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이석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짜악――! 짜악――! 채찍 같은 손이 기하의 양쪽 뺨을 연이어 갈겼다. 손자국 난 붉은 피부가 점차 보라색으로 변했다. 기하의 다리가 뒤로 밀려나며 눈빛에 살기가 끓어올랐다. 이석은 도전적인 저 눈을 마모시킬 것처럼, 살가죽이 찢어져 그 아래 붉은 근육을 보고 말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후려쳤다. 부하들은 주먹을 움켜쥔 채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라도 덤벼들 기세다. 어느덧 검붉은 선혈이 기하 입술에서 흘렀다. 채찍질을 멈춘 이석이 한발 늦게 말했다.
“그래도 그러면 못 쓰죠.”
아이 달래는 어투였지만, 눈빛은 발화점 없이 끓는 용암이었다. 기하는 어금니를 짓씹었다.
“제가 관리하는 아이입니다. 제 손으로 교육 시킨 건데 주제넘은 간섭이군요.”
이석은 뒷 머리카락을 쓸었다.
“지분에는 고양이 값도 포함됐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귓구멍을 뚫어줘야 말귀를 알아먹을 겁니까?”
이석은 손으로 기하의 목울대를 움켜잡았다. 중심이 쏠린 기하가 책상에 쓰러지자 팔꿈치로 그 목을 찍어눌렀다. 책상 위에 세워진 만년필을 빼들고, 예리한 펜촉을 사장 고막까지 쑤셔 넣었다.
“달팽이관 뚫리기 싫으면 움직이지 말아요.”
“크윽……!”
끝이 뾰족한 금속 닢이 고막을 들쑤셨다. 기하는 머리칼이 곤두서는 통증으로 이를 갈았다. 부하들이 덤벼들려 하자 이석은 만년필을 더 깊이 찔러넣었다. 부하들은 부동자세로 얼었다. 이석은 허리를 비스듬히 세우고 아래에 깔린 남자와 눈을 맞췄다. 귓구멍에 박힌 만년필을 타고 핏물이 흘러나와 기하의 목덜미에 붙은 전갈 꼬리를 적셨다. 피 냄새, 땀 냄새가 공격적인 본능을 들끓게 했다. 이석은 그 핏길을 몽롱한 눈으로 감상했다.
“한 번만 더 나비한테 손대면, 그땐 진짜 혼나.”
이석의 동공이 파충류 비늘처럼 번들거렸다. 기하는 눈가를 하얗게 경련했다. 서로 핏대를 세운 두 개의 숨소리가 팽팽하게 뒤섞이고 비릿한 광기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석은 만년필을 가차없이 더 쑤셔 넣었다.
“자, 어서 대답해야지.”
크윽! 기하는 코를 일그러트리며 신음을 씹었다. 어차피 필요한 건 코카인 흉내 내는 꼭두각시다. 당장 상처는 가면으로 가리면 된다. 놈은 지금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인다. 야바의 상처 난 얼굴을 봤다. 그 흔적에 눈 뒤집혀 주범을 몰아붙인다. 마치 자신이 야바의 몸에 얼룩진 흔적을 보고 이성이 날아간 것처럼 말이다. 그건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혹시…차 전무님입니까?”
“뭐가요?”
“야바 몸에 남긴 것 말입니다.”
“안 됩니까?”
차 전무는 안색 하나 변함없이 되물었다. 기하는 책장에 있는 권총으로 놈의 대가리를 구멍 내고 싶었다. 흔적의 장본인이 차 전무라니.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외박은 금지라고 미리 말했잖습니까. 잘 아실만한 분이 그런 병신 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군요.”
기하는 주먹을 움켜쥐며 끓어오르는 살기를 다스렸다.
“그래서, 끝까지 갔습니까?”
차이석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억지로라도 먹고 싶었는데 강간은 적성에 안 맞아서요.”
“그새 취향이 바뀌셨는지 몰랐군요. 파라디소 아래층에서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요샌 거기도 별로 안 내키는군요.”
“정신 차리시죠. 야바가 코카인 행세를 한다고 해서 진짜 코카인이 아닙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이석은 비틀린 미소를 베어 물었다. 기하의 반대쪽 뺨을 툭툭 쳤다. 그 반동으로 고개가 틀려 펜촉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모든 통각이 귀에 박힌 팬 끝으로 곤두섰다. 지금 기하의 머리는 살의와 탄탄한 미래, 두 가지 사이에서 갈등했다. 한 번 마음먹으면 존나게 잔인해지는 족속들이다. 한 나라 정제계를 쥐락펴락하며, 걸림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숨통을 끊어놓는다. 놈의 배를 갈라서 파묻어도 모자라지만 훗날 더 큰 것을 얻으려면 지금은 몸을 낮출 때다. 차이석도, 야바도 그 후에 해결하면 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입술 끝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지금 이런 일로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잖습니까. 전무님과 난 더 큰 도약을 해야 되니까요.”
흠, 이석은 만년필을 빙글빙글 돌려 안쪽 연한 살을 헤집었다. 마치 키우는 개가 주인을 공격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듯 악의적인 의도였다. 머릿가죽이 통째로 벗겨지고 손톱 발톱까지 뽑히는 고통이다. 기하는 어금니를 갈며 고통을 참았다. 차갑고도 무표정한 얼굴이 멀어지고 귓구멍에 박힌 만년필이 배려 없이 빠져나갔다. 중앙이 파인 펜촉이 살점과 핏물을 집어물었다. 이석은 소파 테이블에 있는 휴지를 몇 장 뽑아 피묻은 만년필을 닦았다. 만년필을 제자리에 꽂고 문으로 걸어갔다. 부하들은 차이석의 일거수일투족을 씹어먹듯이 노려보았고, 임수는 기하에게 달려가 일으켰다. 기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귀를 손으로 막으며 책상에 기대섰다. 이석은 불쑥 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물었다.
“그런데 야바 거세는 거기가 했습니까?”
기하는 거친 숨소리만 뿜었다. “취미 한번 고약하군.” 이석은 눈썹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기하는 지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혹시 코카인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아십니까? 전무님이 그렇게 총애하셨던 진짜 코카인 말입니다.”
“거기가 잡아왔겠죠. 제 발로 들어왔을 리 없으니.”
“물론 절반의 책임은 제게 있죠.”
이석의 시선이 기하에게 날아들었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누구 책임입니까?”
기하는 싱긋 웃었다.
“다음에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군요. 시간 되시는 날 연락 주시죠.”
그리고 부하에게 말했다.
“뭘 보고 서 있어? 배웅해 드리지 않고.”
부하가 문을 열었다. 이제야 도착한 가수들이 복도 끝에서 걸어가다 이 광경을 발견하고 술렁거렸다. 그 안엔 함께 있던 코카인의 눈이 더없이 커다래졌다. 이석은 피식 웃으며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코카인은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시 눈길을 돌렸을 때 차갑게 굳은 헤쉬쉬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코카인은 눈길을 피하며 문 열린 사장실을 보았다. 헤쉬쉬가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아침엔 허벅지에 저녁엔 고막에, 오늘 수난이군.”
기하는 비틀거리며 귀를 막고 있고,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가 셔츠를 적셨다. 기하와 눈이 마주쳤지만 코카인은 무심하게 걸음을 돌렸다. 헤쉬쉬가 어깨를 붙잡았다.
“어디가? 사장이 너 부르잖아.”
“대기실. 너도 어서 준비해야지.”
“사장 어쩔 거야? 저러다 고막 나가서 실장 꼴 나면 지랄할 텐데.”
“좀 더 놔둬. 그 사람은 그래도 돼.”
그렇게 말하는 코카인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지만, 코카인은 몇 걸음도 못 가 깡패들에게 붙들렸고, 사장 귀를 치료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사장과 코카인, 단둘만 남은 사무실을 나설 때였다.
“그 녀석…상처는 어때?”
코카인은 문 손잡이를 쥔 채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걱정할 거면 왜 때렸어요? 나중에 병원에나 데려가세요.”
사장은 담배를 집어물며 불을 붙였다. 생각에 잠긴 눈가에 연기가 아른댔다. 그는 죄책감에 얼룩진 표정을 집어치우고 몸을 소파에 기댔다.
“그런데 왜 그 녀석은 네 치료가 안 먹히는 거지?”
“아무리 명약이라도 모두에게 효과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요. 사람에 따라 거부반응도 있을 거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겠죠.”
“항상 궁금했는데 말야. 10년 전 창고에서 니가 비명 질렀던 날, 왜 야바는 아무 이상이 없지? 임 실장은 귀 한쪽이 망가졌고 나도 그 의사들 꼴 날 뻔했어. 그 후로도 야바에겐 네 힘이 전혀 안 먹혔고.”
“그 이유를 말해주면 저 좀 풀어줄래요?”
자신이 내던진 말에 기하는 눈에 칼을 세웠다. 불현듯 기하의 반지가 눈에 걸렸다. 별다른 특색 없는 은색 반지에는 푸른 빛깔 큐빅이 박혀 있다. 큐빅을 열면 아주 작은 버튼이 있다. 그것은 코카인 전용 리모컨이다. 비명을 지르거나 도주했을 때 사용하기 위한. 코카인은 피식 웃었다.
“농담이니까 얼굴 푸세요. 음…저도 항상 그게 궁금했는데 야바가 그 이유를 말해주던데요. 그날 자신은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에 힘이 닿지 않은 거라구요. 그 애를 죽인 건 저구요.”
기하는 대꾸할 것도 없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그나저나 그 이유는 저보다 사장님이 더 잘 아실 거 같은데요.”
“내가 아는 건 노친네가 남긴 데이터가 전부야. 그 양반이 주력한 부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심신의 질병을 노래로 고칠 수 있는가, 고치는데 얼마나 걸리는가였어. 그 와중에 거세해야 그 힘을 유지하고, 비명소리로 살인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그건 너도 다 아는 거잖아.”
“정말 그게 전부일까요?”
코카인의 물음에 기하는 얼굴을 굳혔다.
“사장님 부친은 미완성된 연구 자료만 남기고 돌아가셨죠. 어쩌면 부친이 알아내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알고 있지만 기록하지 않은 뭔가가 더 있는 건 아닐까요?”
“그게 뭐지?”
기하는 담배를 이빨로 씹으며 물었다. 코카인이 문을 열자 어깨가 그림자에 묻혔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사장님 부친만 아시겠죠.”
복도를 걸어가다 벽에 기대며 가방을 떨어트렸다. 오는 내내 사장과 나눈 대화보다 차이석의 뒷모습이 머리를 점령했다. 얼마간 못 본 동안 차이석에게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오늘 두 번이나 마주쳤지만 볼을 화끈하게 하는 눈빛도, 질척한 농담도 하지 않았다거나…….
“아닐 거야…….”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거나 다른 일로 여유가 없어서일 거다. 꾹꾹 죄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차이석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지? 그는 이상성욕자들이 출입하는 아래층 단골이었다가 위층 단골이 된 케이스다. 힐링 받으러 오는 사람들 유형이 대부분 그러했다. 그가 어떤 방을 이용했는지는 모른다.
‘예쁜 피부야. 이런 피부를 오래 보존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말야.’
처음 만난 날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 후로도 그는 어지러운 눈빛으로, 수위 높은 말로 얼굴을 뜨끈거리게 했다. 그랬던 것 같다. 성희롱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도 그는 정작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그 괴리감이 혼란스러웠고, 자신의 힐링이 먹히지 않는 것 또한 오기를 부추겼다. 그리고 눈을 떼지 못할 외모와 분위기… 그런 것들이 겹겹이 쌓여 끌림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대기실에 들어서니 청년들은 무대의상을 입고 있었다. 의자 아래에서 금빛 가면 하나가 먼지와 뒹굴었다. 야바 것이었다. 야바는 보습크림과 약을 제외하면 물욕이 없다. 차이석과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나 밤을 함께 지냈다는 말이 망상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야바 몸에 흔적을 남긴 게 차이석이라면, 그가 야바의 얼굴을 봤다는 것이다. 한 번만 봐도 시선을 빼앗기고 마는 그 가면 아래 비밀을……. 야바의 가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면을 밟아 뭉개고픈 충동이 든 건 스스로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코카인은 뒤집힌 가면을 들어 의자 위에 올렸다. 손끝이 차가웠다.
야바는 운전하는 이석을 힐끔 엿보았다. 그는 갑자기 가면을 벗겼고 파라디소에 달려왔다. 한참 뒤에 돌아온 그는 화장실에 들렸다고 했으며 실제로도 개운한 얼굴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이 거짓인 건 알 수 있다. 가면, 자신의 멍든 얼굴, 그리고 파라디소. 이 세 가지 단서로 상관관계를 유추하려 해도 자꾸만 생각이 샛길로 빠져서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다. 그 후 실랑이 끝에 한의원으로 억지로 끌려갔다. 한 시간가량 뜸 뜨고 찜질하니 붓기와 멍이 눈에 띄게 빠졌다. 별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 말라빠진 음낭과 자장가가 새겨진 거다. 막상 그가 기억한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7시였다. 차고에 주차를 마친 이석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약은?”
“……먹었어.”
야바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미리 약 먹고 오길 잘했다. 다시는 약 먹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이석은 손을 내밀었다.
“너 먹는 약 줘 봐.”
“왜?”
“어서.” 그가 재촉했다. 뒷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이석의 손에 올려놓았다. 8개입 플라스틱 약집에는 주황색 알약 하나만 남았다. 그는 약집을 한 손으로 구기더니 창밖에 내던졌다.
“그걸 왜 버려? 아직 남았는데……!”
야바는 무참히 버려진 것을 주우려고 문을 열었다. 어깨가 붙들려 억지로 앉혀졌다. 그가 재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갈색 케이스였다.
“뭐야?”
“새로 나온 항우울제. 니가 먹는 것보다 훨씬 약효가 뛰어난 거지.”
“…….”
야바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갈색 케이스를 열었다. 2열로 나뉜 칸에는 붉은색 결정체가 정렬됐는데 타원형 모양의 새끼손톱만 한 크기였다.
“색깔 기분 나빠. 캡슐도 없잖아.”
“요즘엔 다 그렇게 나와. 니가 먹는 건 구식에 후유증도 지저분한 거지. 앞으로 사장이 주는 건 몰래 버려.”
그는 빨간색 알약 하나를 집어 야바 입가에 갖다 댔다.
“한번 먹어 봐. 자, 혀.”
야바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입술을 꽉 여몄다. 영어도 아닌 이상한 이름에, 모양도 색깔도 생경했다. 그는 마약 쟁이니까 약에 관해선 꿰고 있을 거다. 그러니 더욱이 이게 항우울제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아까 별장에 오지 않겠다고 해서 앙심을 품은 거라면, 사실 파라디소에 간 게 아니라 뒷문으로 빠져나가 독약을 구해 온 거라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야바는 긴장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니가 먼저 먹어봐.”
하? 이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묘한 눈길을 거두고 빨간색 알약을 입에 던져넣었다. 잠시 후 단단한 목울대가 울렸다. “아 해봐.” 야바는 이석의 혀 아래와 잇몸 구석구석까지 확인하고서야 경계를 아주 조금 풀었다. 차이석은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퍼트렸다.
“아침에 한 알, 저녁에 두 알. 약효가 강해서 과다복용은 금물이야.”
“응.”
야바는 약 케이스를 만지며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득 그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깔로 짙어졌다. 몸을 짓누르는 침묵에 떠밀려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고, 야바 입술이 축축한 곳에 빨려 들어갔다. 대책 없이 밀고 드는 혓바닥에 야바는 숨을 삼켰다. 끈적한 타르 같은 혀가 혀뿌리와 입천장을 긁자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세한 약 맛은 서로의 타액에 소리 없이 녹아버렸다. 한참 동안, 어쩌면 찰나의 시간인지 모를 시간 동안 알알한 키스에 살갗이 흐물거렸다. 질퍽한 살덩이가 턱을 휩쓸고, 그의 손이 셔츠 속으로 들어와 무례하게 돌아다녔다. 야바는 살뭉치를 더듬는 손을 잡아빼고 몸을 경직시켰다. 그는 야바 혀에 매달려 질겅질겅 깨물다가 떨어졌다. 서로의 경사진 숨결이 늘어진 타액 위에 뒤엉켰다. “약값이야.” 그가 입가에 대고 읊조렸다.
“내가 우습게 보여?!”
방에 들어서자마자 날아든 화분이 벽에서 산산조각났다. 차명환은 악으로 빚어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야바는 뭐라 쏴붙일 의욕마저 날아갔다. 차명환의 몰골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숨소리는 끊어지기 직전의 거미줄 같았다. 흙색에 가까운 피부와 얇은 가죽만 남은 손목, 푹 들어간 눈동자는 부패 직전의 생선 같았다. 그는 마치 약을 구걸하는 폐인의 몰골이었다. 차이석이 침대가 의자에 앉자 차명환은 격앙된 눈빛을 했다.
“너 아까 무슨 태도야? 그런 식으로 전화를 끊으면 내가 뭐가 돼?”
“앞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흥분했습니다.”
“그렇다고 전화를 그런 식으로 끊어?”
“못 들었습니까? 잠깐 흥분했다고.”
이석의 눈 선이 길게 휘어졌다. 장식된 웃음은 섬뜩했다. 차명환도 눈을 번뜩이며 형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두 형제 사이에 경직된 공기가 흘렀다. 지위도, 서열도 차명환이 높지만 오히려 아나콘다 앞의 작은 뱀처럼 먹이사슬 아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먼저 피한 건 차명환이었다. 이번에는 한결 누그러진 음성이었다.
“이렇게 매번 불규칙하게 오니까 짜증 난다. 차라리 정확하게 날짜를 정해.”
“둘이 통했군.” 이석은 눈썹을 들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굴렸다.
“어떻게 하길 바랍니까?”
“이틀에 한 번은 와.”
“그건 곤란합니다. 요즘 회사 일이 바빠서 시간 내기 힘드니까요.”
“그러니까 쟤 데려오는 거 나한테 맡기라고 했잖아. 너 대답해 봐. 너도 그게 편할 거 아냐?”
“싫어. 차라리 나한테 죽으라고 해.”
냉랭한 야바의 대답에 차명환 미간이 떨떠름해졌다. 잠깐이나마 그 지옥에서 탈출했는데 차명환과 단둘이 마주하고 노래하다니 끔찍했다. 이석은 검지로 입술을 쓸다가 말했다.
“그럼 나흘에 한 번으로 하죠. 코카인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여기만 매달릴 수 없다더군요.”
“여기 발 들이는 것도 영광인 줄 모르고.”
“좋아. 할 수 없지.” 차명환은 얼마 붙어 있지 않은 살가죽을 쓸며 야바를 보았다.
“빨리 노래나 해 봐. 오늘 나한테 뭘 불러줄 거지?”
마지막 말이 몹시 거슬렸지만, 야바는 껌 뱉듯이 말했다.
“오페라의 유령,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
“그럼 그렇지. 이젠 열도 안 받는군.”
차명환은 간이 테이블에서 종이를 들더니 침대 가장자리에 던졌다.
“리스트 작성했어. 이왕 노래하는 거 내가 듣고 싶은 게 좋잖아? 오늘은 거기 첫 번째부터 불러 봐.”
야바는 다가가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는 20여 곡의 아리아가 나열됐다. 대부분 밝고 희망적인, 도무지 입에 담기 구역질 나는 노래뿐이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그는 음악에 관해 보통이상의 관심을 가진 듯했다. 야바는 머뭇거림 없이 종이를 박박 찢어버렸다. 차명환은 험악해졌다.
“무슨 짓이야?!”
“니가 지금 이딴 거나 끄적거릴 때야? 쓸데없는 짓 할 시간에 네 인생이나 한 번쯤 돌아봐.”
“너 이……!”
그가 눈가를 떨며 목소리를 눌렀다.
“하라면 해.”
“싫어.”
“해.”
“싫어.”
“오늘 예민하니까 거슬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야바는 짧은 숨을 토했다.
“이젠 별 거지 같은 것들이 시비를 거네. 나도 어제오늘 기분 바닥이니까 너까지 보태지 마.”
“너 진짜 그 바닥에서 생매장당해 봐야 정신 차릴 거지?”
“아, 그럼 우리 조만간 흙속에서 만나는 거야?”
차명환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고 야바도 매섭게 응수했다. 그러다 차 명환 눈초리가 묘한 빛을 발산했다.
“너 가면 좀 벗어 봐.”
그 순간 차이석의 입술 끝이 얼어붙었다. 차명환은 그 사실을 인지 못하고 몸을 앞으로 당겨왔다.
“빨리 벗어보라니까?”
차이석은 소파에 한쪽 팔을 걸친 채 늘어트린 손에 다른 손으로 깍지꼈다. 그리고 느릿하게 야바를 쳐다보았다. 웃음 위에 얹힌 눈동자에서 섬뜩한 빛이 곤두섰다. 그 빛이 빠르게 달려들어 가면 아래 추한 얼굴을 물어뜯었다. 저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눈길을 뿌리쳤다. 볼과 눈두덩에서 웅크렸던 벌레가 기어 올라와 살덩이 위를 돌아다녔다. 야바는 가면 틈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고 볼을 긁었다.
“싫어.”
차명환이 말했다.
“잠깐 벗었다 얼굴만 보여주고 쓰면 되잖아. 그 가면만 보면 속이 부글거려. 그리고 니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좀 봐야겠어.”
“싫다고 했어.”
눈초리만큼 야바의 목소리도 날카로워졌다.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게 가게 규칙이라더군요.”
“그렇지?” 이석은 눈썹을 들며 야바에게 물었다. 차명환이 조소를 흘렸다.
“왜? 팬텀처럼 얼굴이 엉망인가 보지?”
그 순간 야바는 차명환의 따귀를 매섭게 올려붙였다. 거무죽죽한 피부에 금세 손자국이 올라왔다. 차명환은 어안이 벙벙한 낯빛으로 굳었다. 이석도 이번엔 제법 놀란 눈치였다. 야바는 제 손이 부서지도록 그러쥐었다. 차명환 팔뚝에 꽂힌 주삿바늘을 잡아빼 놈의 눈알에 찔러버리고 싶었다.
“지금부터 입도 뻥긋하지 마. 네 얼굴 보는 것만큼 목소리 듣는 것도 짜증 나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방법은 모조리 꿰고 있다. 지금도 실행에 옮기는 중이다. 목표물이 하나 더 늘어난다 해서 다를 건 없다. 눈 뒤집혀 달려들 거란 예상을 깨부수고 차명환은 제 뺨을 쓸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잠깐 벗는 것도 안 되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토할 것 같은 목소리와 눈빛이었다. 야바는 입을 꽉 다문 채 싸늘히 노려보기만 했다. “어지간히 못생겼나 보군.” 차명환은 중얼거리고는 덧붙였다.
“좋아. 그럼 오페라의 유령 먼저 불러 봐.”
싸한 침묵이 감돌자 차명환은 눈알을 굴려 야바를 힐끔힐끔 보았다. 앙상하고 조급하게 말했다.
“아, 알았어. 내가 실언했으니까 빨리 노래해 봐.”
차명환의 호기심 덕분에, 차이석의 묘한 반응 덕에 기분은 시궁창이 되었다. 어차피 자신은 노래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데 저렇게 매달리는 꼴을 보자니 우스웠다. 차명환은 뙤약볕이 추락하는 날 흙 위에서 몸을 뒤트는 지렁이 같았다. 살고자 발악하는 것을 짓밟아 배를 터트리고 싶은……. 야바는 목구멍으로 밀고 나오는 분노를 삼켰다. 놈의 말을 무시하고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선창했다. 죽음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소녀는 공포에 질려 절규했다.
Vorüber! ach, vorüber! Geh, wilder Knochenmann!
지나가세요. 아! 지나가세요! 가세요! 거친 죽음의 사신이여!
Ich bin noch jung, geh, Lieber! Und rühre mich nicht an.
나는 아직 젊답니다. 가세요. 당신! 그리고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사신은 소녀를 죽음으로 유혹한다. 영원한 안식은 죽음뿐임을.
Gib deine Hand, du schön und zart Gebild Bin Freund und komme nicht zu strafen.
너의 손을 다오. 너 아름답고 연약한 형상아. 나는 너의 친구이지 벌주러 온 것이 아니란다.
Sei guten Muts! Ich bin nicht wild. Sollst sanft in meinen Armen schlafen.
마음을 편히 하렴. 나는 거칠지 않단다. 너는 나의 품 안에서 편히 잠자게 되리라…….
이석은 감각을 끌어당기는 젖은 곡절을 따라 몸을 늘어트렸다. 차명환도 야바가 창조한 소리공간에 빠져들었다. 눈꺼풀을 닫으며 가슴이 불룩해지도록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코로 마약을 빨아들이듯이, 깊숙한 공간으로 이끌어 가득 저장하듯이. 오페라의 유령으로 넘어가자 야바의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In sleep he sang to me, in dreams he came
꿈결에서 그는 내게 노래 불렀지. 꿈속에서 그는 내게 다가왔어.
that voice witch calls to me, and speaks my name
나를 부르는 그 음성은 나직이 내 이름을 읊조렸어.
Thoses who have seen your face draw back in fear
당신을 본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뒤로 물러서
I am the mask you wear…….
당신이 쓰고 있는 그 가면…….
음양을 지닌 목소리는 크리스틴의 구절에서 이기적인 표독스러움을 분출했다. 청순하고 가녀린 크리스틴이 야바로 인해 재창조됐다. 팬텀 구절에서는 광기의 스펙트럼을 극한으로 발산했다. 외설적인 몸의 곡선과 노랫말이 뒹구는 입술과 혓바닥, 가면으로 살짝 내비치는 각을 세운 눈동자는 뭇 사내의 관음증을 충동질했다. 야바가 만드는 선율이, 녀석의 목소리가 이석의 귀를 빨고 핥으며 음탕하게 애무했다. 몸 안의 피가 중심으로 몰려 발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야묘를 집요하게 주시할 때였다. 하아…차명환이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신음을 뱉었다. 야바에게 고정된 눈은 섹스 전희에 돌입한 듯 몽롱해졌다. 이석은 경고음처럼 어금니를 부딪쳤다. 차명환의 귓구멍을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찌르고픈 욕구를 참기 위함이다. 야바의 노래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럴수록 이석의 밑바닥에서 뱀 같은 살기가 똬리 틀었다. 그것은 마치…야바의 구멍에 자신의 성기와 차명환 성기를 꽂아넣고 함께 박아대는 기분이었다.
“요근래 그이가 이상해졌어요. 갈수록 살도 빠지고, 혈색도 나빠지고, 불안증이 극심해진 거 같아요. 그리고 계속 코카인 씨만 찾아요. 코카인 씨가 노래할 때 저는 얼씬도 못 하게 해서 아까도 쫓겨나다시피 했어요.”
명환의 부인이 조근조근 말했다. 차 회장과 차명환 부인, 양 박사는 아치형 벽난로 앞 테이블에 자리하고 있다. 양 박사는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말기 암 환자라면 누구나 있는 불안증세입니다.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죠.”
차 회장은 빨갛게 이는 불을 보며 말했다.
“아니, 저 아이 말이 맞아. 요즘 명환이가 뭐에 쓰인 녀석 같아서 지켜보는 중이었지. 장기에 모두 전이된 암세포를 고작 노래로 고치다니, 그 사기꾼을 애초에 여기 끌어들인 것부터가 실수였다.”
양 박사는 은테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제 생각엔, 그냥 듣도록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요즘 차 사장도 저…힐러가 오는 날만 낙으로 여깁니다. 저 시기엔 아무래도 의지할 것이 필요하니 심리적인 안정 차원에서라도…….”
“혹시…코카인씨 때문에 저이 상태가 더 나빠진 걸까요?”
차명환 부인이 침통한 낯빛으로 물었다. 양 박사는 대답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차 사장 상태가 악화 되는 건 힐러 때문이 아닙니다. 조만간 서울에 가서 정밀 검사받겠지만, 아무래도 조금씩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절망에 휩싸인 여자는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입 다물고 있던 차 회장이 말했다.
“차 전무는?”
“아까 코카인씨와 함께 돌아갔어요.”
여자가 울먹이며 간신히 대답했다. 차 회장은 텅 빈 차고를 응시했다. 이석은 어릴 적부터 속내를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유학길에서도 약에 절어 세월만 탕진했고 회사에 들어 앉혔을 때도 마찬가지라 여겼다. 그러나 이석은 공격적인 경영방침으로 이사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상대적으로 명환이 뒤처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로 이석은 본래의 한량 모습으로 돌아갔다. 자라난 환경 때문인지 두 형제 스타일은 달랐다. 명환이 논리에 의지하는 타입이라면 이석은 직감으로 승부 한다. 이석은 외모에서부터 성격까지 아비인 자신보다 조부를 더 닮았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가족에게도 인정사정없던 자신의 부친을…. 차 회장은 비서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 힐러 다시 조사해 봐. 그래. 차 전무가 가져온 서류는 이미 훑어봤어. 이건 따로 조사하는 거야. 차 전무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그리고 덧붙였다.
“요즘 차 전무가 뭐하고 다니는지도.”
코카인이 이석의 집에 도착했을 땐 늦은 오후였다. 가끔 외부로 나갈 경우 헤쉬쉬가 화음을 넣어주는 역할로 대동했는데 오늘만큼은 홀로 가고 싶었다. 싸늘해진 헤쉬쉬를 뒤로하고 숙소를 나섰다. 머리도 다리도 묵직했다. 며칠 전 퇴근하고 돌아갔을 때 야바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코카인은 그 일에 관해 더는 꺼내지 않았다. 야바 역시 평소엔 말수가 없다가 한번에 폭탄을 터트리는 타입이라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야바는 못 보던 갈색 케이스를 내내 만지작거렸다.
주택가 어느 정문 앞에서 수염이 멋들어진 노신사가 마중 나왔다. 그는 교직 생활을 은퇴한 학교장 분위기였다. 그는 깃털 가면을 쓴 코카인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지고 있는 가면은 파라디소 인테리어와 조명에 어울리는 것뿐이라 그나마 제일 수수한 것이었다. 옷차림도 깔끔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골랐다. 노신사는 굳은 얼굴을 풀며 안으로 안내했다.
“사모님 지금 예민하시니 심기 건드리지 말게. 술을 지나치게 드셔서 요샌 깜빡깜빡하기도 하니까 당황한 티 내지 말고.”
“네.”
정문을 들어서자 현대와 고전이 조합된 웅장한 대저택이 압도해 왔다. 연못과 숲을 통째로 옮긴 것 같은 정원은 운치와 비교하면 사막같이 메마른 공기를 풍겼다. 큼직한 디딤돌을 밟으며 노신사를 따라갈 때였다. 멀리 떨어진 정원 귀퉁이에서 젊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뒷모습만 보이는 남자는 나무를 돌보는데 열중했다. 앞서 간 노신사의 부름에 코카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거실을 지나 2층 방문 앞에 멈췄다. 노신사는 조용히 노크했다.
“사모님. 접니다. 주무십니까?”
“뭐에요.”
혀 꼬부라진 음성이 문 너머에서 들렸다.
“차 전무가 말한 청년이 왔습니다.”
노신사는 시간을 둔 다음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머리가 팅할 만큼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무 평쯤 되는 방안은 클래식한 가구들이 지켜섰고,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알 법한 명화들이 벽에 걸려 있다. 그 한가운데 중년 여자가 잠옷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뒹구는 와인병과 안에서 흐른 붉은 액체는 그녀가 흘린 피 같았다. 천정을 멍하게 보던 그녀가 이윽고 방문객에게 관심을 돌렸다. 코카인은 허리를 숙였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에 땀이 고였다. 저 사람이 차 전무의 모친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사모님.”
노신사가 나가고, 차이석 모친은 낯선 방문객을 주시했다. 코카인은 다시금 조용히 묵례했다. 뒷목에서 허리까지 굳어서 우스꽝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저는 코카인이라고 합니다. 말씀 들으셨겠지만…….”
“남자가 올 줄은 몰랐어. 노래로 치유하는 사람이라면서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듣기만 하라더군. 그 자식은 항상 그런 식이야.”
“네.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우선 저를 믿으시고…….”
“노래는 집어치우고 옷이나 벗어 봐.
“네?”
코카인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녀는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실크 잠옷 사이로 젖무덤 골이 뭉근하게 드러났다.
“외로운 여자 아랫도리 긁어주는 직업인 줄 모를 줄 알아? 그 가면은 마음에 들지만, 옷은 지루해.”
“저기…….”
“한번 해 줄 거 아니면 돌아가.”
그녀의 말투는 몸가짐만큼이나 직선적이었다. 오랜 세월 술에 갉아 먹혔음에도 뭇 남성의 시선을 끌 만큼 요염한 분위기다. 태령가 안 주인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이미지는 누가 봐도 이석의 모친임을 일깨워줬다. 코카인은 시선을 내렸다. 이럴 때 수치심을 느끼는 게 정상인데 왠지 미소가 고였다.
“말씀 들으셨겠지만, 저는 노래로 병을 고치는 힐러입니다.”
“노래로 알콜 중독자를 고친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어. 난 알콜 중독자도 아니고. 이석이 그 자식은 앞에서만 위해주는 척하면서 항상 날 무시해. 다 마음에 안 들어.”
지금 그녀에겐 힐러보다 말상대가 필요한 것처럼 쉴새 없이 말했다. 가만히 그녀의 푸념을 듣고 있지만 코카인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고치지 못한 차 전무의 두통을 이렇게라도 대리만족하고 싶은지 모른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를 믿고 편안히 노래를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냥 라디오를 틀어놨다고 생각해 주세요.”
“노래는 질색이야. 그걸 돈 주고 들으러 다니는 사람들 도무지 이해 못 하겠어.”
“네. 맞아요…….”
코카인은 결국 웃어버렸다. 이상하게 저 퇴폐미를 뿌리는 중년 부인이 귀여웠다. 코카인의 시선이 채광 좋은 방을 비잉 탐방하다가 빛이 닿지 않는 여인에게 당도했다. 그녀 홀로 있기에 이 방은 너무 넓었다. 이 불완전한 육신에서 비롯된 목소리로 저기 어둠에 갇힌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음을 단단하게 모았다. 그리고 ‘pie jesu’를 불렀다.
Pie Jesu, Pie Jesu, Pie Jesu, Pie Jesu,
자비로운 예수, 자비로운 예수님…….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Dona eis requiem.
세상의 죄를 사하시는 주님,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첫 소절을 뱉는 순간 허공에 있던 그녀의 눈망울이 요동했다. 이어 그 눈길이 코카인에게 당도했다. 그녀의 퍼석한 눈동자에 격렬한 감정 소용돌이쳤다. 분노, 갈증, 집착, 권태, 무기력, 묵은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담백하면서도 경건한 성가곡이 낯설고 척박한 공간에 깊이 울렸다. 왜곡된 감정을 어루만지고, 가슴 밑바닥에서 부패한 사연을 들어주었다. 이 곡은 부드럽지만, 의외로 높은 음역대라 세기와 진폭이 강하다. 그래서 오랜 세월 마음의 병에 물든 사람을 편안하게 하면서 힐링 효과까지 얻는다. 나긋한 곡절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환자의 고막으로 배어들었다. 최면에 빠진 그녀의 표정이 평온한 세계로 까라졌다. 무기력한 육신에 비해 격렬했던 의식이 조금씩 이완되는, 알파파로 바뀌는 거다. 소리 파장의 강약을 조절하며 그녀의 아픔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Angus Dei, Angus Dei, Angus Dei, Angus Dei…….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어린양…….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ona eis requiem…….
세상의 죄를 사하시는 주님.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안식을 주소서…….
보드라운 음색이 투명한 빛살에 스몄다. 어디선가 맑은 풀 향기가 났다. 바람이 몰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손을 잡고 숲길을 걸으며 맨발로 진흙 밟는 기분을 만끽하게 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살결 고운 햇살과 만나 반짝거렸다. 노래하는 사람도, 그걸 듣는 사람도 일체가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지금이다. 높은 음역에 다다르자 날갯짓하듯 유연하게 날아올랐다. 일상에 시달린 영혼을 씻겨내고, 무뎌진 감각 속으로 상냥하게 스미도록, 그의 어머니에게…….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ona eis requiem…….
세상의 죄를 사하시는 주님.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안식을 주소서…….
넓고 깊이 공명점을 울렸다. 노랫소리를 뚫고 어렴풋이 문 열리는 소리,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귀가 아니라 피부에 닿은 공기의 위화감 때문이었다. 흙냄새, 나무 냄새가 와락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코카인을 부서지도록 껴안았다. 격정적인 움직임에 옷에 묻었던 빛의 입자가 나비 가루처럼 흩어졌다. 매달린 사람의 떨림이 등에 전해지고, 목덜미로 정체불명의 수분이 흘러내렸다. 목덜미에 코를 묻은 사람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시야를 메웠다. 처음 보는 사람이, 더군다나 다 큰 남자가 껴안는 것도 모자라 눈물까지 흘리자 사고가 비어버렸다. 남자의 이목구비는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한순간 코카인은 숨을 멈추었다. 시야가 휘청거렸다. 수치심 없이 우는 남자의 검은 눈망울은 아이의 그것이었다. 머나먼 시공을 넘어선 갈망이었다. 그는 조금 어눌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노, 노래 해주세요…. 또 해 주세요…….
멈추지 않는 귀울음이 현실과 기억의 교착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날처럼, 그 옛날 자신에게 노래해 달라 보챘던 그 눈빛 그대로,
그날의 악몽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