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15화 (15/42)

힐러-track13

한뼘 이상 차이 나는 그가 분노에 감싼 눈동자로 정수리를 찍어눌렀다. 부러질 것처럼 목이 뻐근했다. 머리가 터지지 않아 당연히 조사받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왜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지, 왜 기다리다 지친 얼굴로 이 시간에 여기 있는지, 그런 생각들이 살벌한 공기와 어지러이 뒤엉켰다. 새벽녘 어둠에 묻힌 기하가 재차 물었다.

“어디에 갔다 왔냐고 묻잖아.”

칼로 생살을 저미는 이 분위기보다 기하 손가락에 끼인 담뱃불이 더 신경 쓰였다. 불똥은 당장 야바 눈알을 지질 듯이 시뻘건 빛을 번뜩거렸다. 야바는 담뱃불을 보며 말했다.

“보면 몰라? 욕실에서 나오는 거 봤잖아.”

기하는 조소했다.

“개 소리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해. 오늘은 네 헛소리 받아줄 기분 아니니까.”

“어제 그런 일이 있었어요. 누구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을 거예요. 이번만 그냥 넘어가 주세요. 제가 책임지고 이런일 없도록 할게요. 사장님.”

코카인이 끼어들었다. 초췌한 얼굴에는 두려움이 선연했다. 항상 폭력적인 처벌에선 열외였던 코카인은 폭력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파라디소의 중심이며, 청정해역에서만 사는 고귀한 힐러이므로.

“닥쳐. 넌 끼어들지 마.”

야바는 냉담하게 일갈 하고 기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너 상대할 기운 없어. 한숨 잘 거니까 나가.”

기하를 지나쳐 침대로 걸어갔다. 곧바로 손아귀가 팔뚝을 옥죄고 강제로 시선이 맞춰졌다. 담뱃불 같은 눈동자가 눈을 지졌다.

“그 헛소리에 장단 맞춰줄 만큼 한가한 줄 알아? 어디 갔다왔냐고 묻잖아!”

“여기 있으면 미칠 거 같아서 나갔어! 리모컨 누르면 되잖아. 언젠가는 누를 거 시간이 당겨진다고 달라질 거 없어.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해!”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람 환장하게 해? 참아주는 것도 한계야. 사실대로 말해!”

“나도 이렇게 참고 사는데 니까짓 게 뭐라고 그걸 못 참아? 니가 뭐라고!”

기하의 손을 뿌리치고 악다구니했다. 서로 거친 감정에 휩쓸려 바닥에 쓰러졌다. 기하는 야바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셔츠가 늘어나자 어깨와 배가 드러났다. 그 순간 모든 움직임이 일시 멈췄다. 불길한 침묵에 시선을 들었다. 기하의 눈길은 이미 야바의 목덜미와 어깨를 더듬었다. 자잔한 상처가 난 기하 얼굴이 꿈틀거렸다.

“씨발…….”

놈이 뒷머리를 잡아채자 목이 꺾였다.

“누구야?”

의아했다. 갑자기 왜 미친놈처럼 구는지, 몸에서 뭘 발견했는지도. 잔기침하며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무슨… 헛소리야.”

“어떤 새끼냐고 묻잖아!”

야바는 최대한 비리게 웃었다.

“말하기 귀찮다고 했잖아. 그렇게 궁금하면 알아서 조사해 봐.”

그의 눈가가 떨리는 찰나였다. 놈의 주먹이 얼굴에 가차없이 매다 꽂혔다. 야바는 침대 모서리에 부딪혀 쓰러졌다. 한순간 눈앞이 하얘지고, 숨 쉴 수 없었다. 코카인은 숨을 들이켜고 있다가 달려들었다. 기하는 그를 바깥으로 내던지고 문을 잠갔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기하는 야바 멱살을 틀어올렸다.

“함부로 몸뚱이 굴리지 말라고 했다. 누구야?!”

“으윽…노…놔……!!”

뺨에 몇 차례 불이 났다. 기하의 주먹이 추락하는 바윗덩이처럼 명치에 날아와 박히고 복부에도 꽂혔다. 내장이 뭉개질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둔중한 타격음이 몸 곳곳에 쏟아졌다. 기하는 이 고통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잔혹한 눈으로 해악에 몰두했다. 어느덧 입속에는 피가 맺혔다. 폭력이 지난 자리마다 피가 몰려 포화상태였다. 소리가 높아질수록 놈의 얼굴은 괴롭게 어그러졌다.

“누구야?! 말해.”

널브러진 야바위로 놈이 올라타 목을 졸랐다. 놈의 손을 쥐어뜯고 발버둥쳤다. 기하는 오늘 이상했다. 두서없는 추궁은 자신이 무단이탈한 사실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에만 초점을 두었다. 맞닿은 놈의 하체가 맹렬한 기세로 딱딱해졌다. 뜨거운 열기를 뿜는 중심이 야바의 가랑이 사이에 문질러졌다. 기하의 격한 호흡과 야바의 할딱거림이 뒤엉켰다. 흣, 씨발. 개 같은…기하는 으르릉대며 입술을 겹쳐왔다. 그리고 입속을 파고든 건 아마 혓바닥이었을 것이다. 목 조르는 손길보다 그것이 더 역겹고 진저리쳐졌다. 몇 번의 마찰로도 놈의 것은 끔찍하도록 부피를 늘였다. 그 아래 고환도 단단해졌을 터였다. 속이 뒤집힐 만큼 질투가 났다. 얼굴에 피가 몰리고 윙윙거리는 이명이 아득했다. 낡아빠져 방치됐던 기억이 목을 졸랐다.

처음 약을 먹었던 건 그 창고에 들어간 직후였다. 그때 왜 창고에 가게 됐는지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과제로 내준 가사를 못 외웠거나, 기하한테 반항해서였을 것이다. 아마 네 명쯤 됐을 거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깡패들이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입에다 성기를 쑤셔 넣었다. 야바의 빈 음낭을 조롱하고, 개처럼 헐떡이며 몇 번이나 입속에 싸댔다. 혓바닥과 목구멍이 헐도록 자맥질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기하는 약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그 후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고 야바 입을 겁탈했던 깡패들은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어느새 기하는 손을 풀고, 야바 입술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놈의 숨소리와 허리짓이 절정을 향해 달렸다. 야바의 호흡이 뚝뚝 끊어지고, 시야가 휘청거렸다. 안간힘을 다해 손을 아래로 뻗었다. 매트리스 사이를 더듬었다. 달크락, 금속의 신음소리가 손끝에 걸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볼품없는 음낭도 들켰고, 자장가도 불러줬으니 더는 미련 가질 필요 없다고. 야바는 온 힘을 다해 놈의 중심에 가위를 찔러버렸다. 하지만, 놈이 민첩하게 피하는 바람에 허벅지에 찍혔다.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물러가자 격렬하게 기침하며 부족한 공기를 빨아들였다. 기하는 뒤로 물러나며 허벅지에 박힌 가위를 보았다. 길쭉한 놈의 다리를 타고 발바닥 아래에 피 웅덩이가 고였다. 놈은 시선을 들어 으깰 듯이 노려보았다. 허벅지를 찔리고도 여전히 단단한 중심이 역겨웠다. 야바는 침대에 널브러져 토막 난 호흡을 뱉었다.

“……고자의 장점… 생각해 놨어?”

차이석이, 그가 녹아버릴 만큼 애무했을 때도 자신의 성기는 반응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저 악마에게도 결코 허락해선 안 될 쾌감이다. 가슴 아래까지 찢겨진 셔츠와 타액이 뒤엉킨 입술이 넌덜머리 났다. 어느덧 볼에 눈물이 타고 내렸다. 그 모든 곳에 기하의 시선이 닿았다.

“생각해 놔…. 반드시 생각해 놔. 너는 그럴 책임이 있잖아.”

어둠에 묻힌 그의 눈동자는 깊은 고통과 닮아있었다. 야바는 텅빈 눈으로 숨 쉬었다. 블라인드를 뚫은 햇살이 날아와 차가운 무덤 위에 박혀 들었다. 알을 잃어버린 음낭이 차라리 저 빛에 녹아 썩어 문드러져 형체도 없이 사라지길…….

“아니면 너…꼭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흑백으로 조합된 거실 바닥과 가구 곳곳에 육감적인 햇살이 쏟아졌다. 너른 창문을 통해 펼쳐진 빛을 이불 삼아 이석은 몽롱한 상태를 즐겼다. 어제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 단추가 거의 풀어지고 바지 벨트와 지퍼가 내려갔다. 어젯밤 야바의 노래를 듣다가 죽은 듯이 잠들었다. 녀석이 잠들면 미처 못다했던 일을 해치울 생각이었는데 되레 의지를 배반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실 곳곳에는 맨발로 밤거리를 배회했던 고양이 발자국이 찍혀 있다. 그 자국을 눈으로 더듬으며 읊조렸다.

“그렇게 섹시한 자장가는 처음이었지.”

광기 넘치는 아리아를 부를 때와는 또 다른 질퍽함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황홀했던 수면제를 떠올리며 나른함을 음미했다. 근육도 녹진하고 어제보다 갈증이 더 심했지만 미묘한 배부름과 공복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어 울리는 휴대폰 진동음이 혼곤함에서 건져 올렸다. 성재였다.

[어제 개판 치고 가더니, 팔자 좋게 잠이 오나?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회장님 기함하셨지, 숙모님 또 폭음하셨지, 해민이는 너 연락 안 된다고 징징대고. 대체 어디 있었냐?]

“그래?” 이석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며 머리맡에 있는 담배를 꺼내물었다. 잠시간의 여유를 두고 성재가 말했다.

[어제 밤새도록 생각한 건데, 숙모님 말이다. 계속 그 상태로 가셨다간 일 나시겠던데. 이참에 코카인한테 맡겨보면 어때? 걔 정신병도 고친다면서?]

그는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당겼다.

“코카인 노래에 중독성 돼서 폐인 된 사람도 많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정신병원에 드나드는 것보다야 낫지. 숙모님 수면제하고 같이 드셔서 큰일 날 뻔했잖냐. 한달 전엔 목욕하시며 술 드시다가 익사 직전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코카인 노래에 중독되는 쪽이 훨씬 나아. 뭐, 그렇게 들락거린 너도 폐인 안 된 걸 보면 숙모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데, 한번 생각해 보지?]

“음악이라면 질색하는 양반이라 코카인을 안주로 뜯어 먹지 않을까 싶은데. ”

[밑져야 본전 아니냐? 그리고 걔 노래 일단 들어보면 마음이 달라지실 거다.]

한때는 남편에게 버림받아 온종일 술에 위로받는 모친을 동정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목을 죄는 그녀의 행동에 방관자가 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고 보니 파라디소에 안 간지도 꽤 됐네. 한번 어때?]

“시간 봐서. 임 회장은?”

[안 그래도 어제 그 얘기 하려다가 먼저 가버리는 바람에…. 그저께 파라디소에 잘 모셔줬다. 처음엔 내숭 떨면서 빼더라고. 한바탕 질펀하게 땡기고 나오더니 회춘한 얼굴이던데?]

“비디오는?”

[잘 찍어뒀으니 걱정마라. 숙모님 일은 한 번 생각해 보고.]

이석은 통화를 끝내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아까부터 뭔가 허전했다. 이맘때면 몸을 감아오던 순이가 기척이 없었다. 불룩한 이불을 더듬고, 들쳤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제 방에 가둔 걸 떠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뒷목을 주무르며 방으로 갔다. 휘파람을 불어도 조용했다. 방에 딸린 욕실과 드레스룸, 수납장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도 없었다.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을 리는 없는데 의아했다. 이석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며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 목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문을 닫으려는데 반투명한 야채 박스에서 노란색 물체가 비췄다. 도우미가 참외를 사다 채워놓은 건가 싶었다. 그러나 노란색과 규칙적인 주황색 무늬는 왠지 참외와는 다른 익숙함이었다. 음? 이석은 실눈을 뜨고 그곳을 주시하다가 박스를 열었다. 2M에 육박하는 파충류가 좁은 공간에서 꾸역꾸역 몸을 만 채 떨고 있는 것이었다.

“너, 왜…….”

이석은 재빨리 순이를 끄집어냈다. 축 늘어진 얼굴을 들어 파충류의 눈을 살폈다. 빨간 눈은 동면에 이른 것처럼 흐리멍덩하게 풀렸다. 손등으로 가볍게 뺨을 두드렸지만, 녀석은 혼수상태에 빠져 미동조차 없었다. 이석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순이를 이불에 말고 마사지했다. 몇분 후 녀석은 혀를 날름거렸다. 빨간 눈동자도 생기가 돌았다. 이석은 한숨 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대체 누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한 건지 잠이 덜 깬 머리를 굴렸다. 그 순간 앙칼진 고양이 얼굴이 스쳤다.

“하.”

그는 헛숨을 터트렸다.

이석의 폰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액정에 찍힌 건 여비서였다. 일부러 시간을 두고 폰을 받아들었다. 곧바로 다급한 여비서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전무님, 어디십니까?]

이석은 소파로 몸을 젖히며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음…이제 일어났어. 몇 시지?”

[벌써 11시가 다 돼 갑니다. 아까부터 회장님이 계속 호출하십니다.]

“12시쯤엔 세이프 할 거 같은데 시간 좀 벌어 봐.”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저도 한계가 있어서…. 제발 빨리 와주세요. 전무님.]

울먹이는 여비서 목소리가 물러갔다. 이석은 테이블에 폰을 던지고 식은 커피를 마셨다. 50평 남짓한 호텔방, 테이블에 앉은 사내들을 둘러봤다.

“12시까지면 시간 넉넉하겠지. 계속해.”

박준형은 안경을 추어올리며 스크린을 넘겼다.

“최종 목표는 태령 자동차의 지분 51% 확보로 경영권 획득입니다. 조만간 저희가 태령에 공식으로 M&A를 선언할 예정입니다. 주식을 매집한 후 5%룰에 따라 현재의 무능한 경영진을 갈아치우겠다고 선언하는 거죠. 그 일 순위가 차명환입니다.”

“대기업의 경우 계열사나 페이퍼 컴퍼니를-서류 상에만 존재하는 유령회사- 탈세하는 데 이용합니다. 차 회장이 전무님께는 차명환 뒤처리용으로 자금세탁, 탈세를 맡겼죠. 지금껏 모아 놓은 차 회장의 탈세 증거는 상황 봐서 터트릴 계획입니다. 그때 차명환도 묶어서 보내고, 양념으로 언플도 좀 해주고…….”

이석은 담배 필터를 빨며 말했다.

“최대주주인 차 회장이 11%, 1대주주 차명환이 9%, 2대주주인 내가 7%, 그 외 차 회장 우호세력이 23%야. 차 회장과 차명환은 차치하고, 나머지를 내 쪽으로 돌리는 거지. 우호세력 중에 성재를 제외하면 임 회장 지분이 제일 많아. 거긴 성재가 작업 중이니 조만간 판가름나겠지.”

머리 굴리는 것보다 주먹 쓰는 게 어울릴 법한 김도훈이 말했다.

“임 회장이야 워낙 차 회장과 친분이 깊어서 쉽지 않을 겁니다. 또 사업가입장에서도 차 회장 쪽에 서는 게 안정적이니까요.”

“쓸데없이 버틴다면 카드를 꺼내는 수밖에. 스너프 필름을 보여주면 재밌을 거야.”

“스너프 필름이요?”

“그래. 임 회장의 은밀한 사생활이 담긴.”

사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석의 명의로 된 CES 컴퍼니는 태령의 세금 포탈용으로 만들어진 페이퍼 컴퍼니다. 하지만, 그는 차 회장 눈을 피해 태령의 주류업체인 자동차 관련 기술연구개발팀과 특허권 담당팀을 따로 두었다. 그 외 각종 서류 조작을 통해 차이석 컴퍼니 쪽으로 태령의 비자금을 빼돌리는 중이다. 우선 홍콩 펀드로 가장한 자신의 브레인들이 또 다른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함께 적대적 M&A로 치고 든다. 그다음 자신이 나타나 패닉에 빠진 태령을 구원한다. 주주들 여론이 이석에게 몰리면 차 회장과 차명환을 동시에 퇴출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는 것까지가 이 시나리오의 완벽한 피날레다. 이석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경쾌하게 두드렸다. 두드리는 속도는 점차 누그러지고 손가락은 유리 위를 훑었다. 정상치에서 약간 모자란 체온과 맨들거리는 감촉은 어젯밤 맛보았던 살결과 같다.

“한마디로 평소 눈독 들이던 여자 따먹으려고 둘이 짜고 치는 사기극인 거지. 하나는 불한당 역할.”

이석은 브레인들을 향해 손가락끝을 찍었다.

“하나는 정의의 사도 역할.”

그리고 손가락 방향을 바꿔 자신에게 향했다.

“여자한테 치근대는 불한당들 앞에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 구해주고, 신임을 얻어 실컷 먹어치우는 거야. 사람들은 의외로 뻔한 수법에 감동하거든.”

김도훈이 진지하게 물었다.

“태령을 삼키고 그다음엔 어쩌실 생각입니까?”

이석은 날렵한 시선으로 브레인을 둘러보았다. 이제 모든 그림이 그려졌고, 차명환 숨통이 끊어지는 기념비적인 날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

“생각 중이야. 실컷 먹어치우고 사창가에 팔아버릴지, 골방에 들어 앉혀 손님이나 받게 할지.”

이석은 차 문을 닫으며 셔츠 손목을 올렸다. 시계 침은 6시 30분을 향했다. 회사에는 대충 얼굴도장만 찍고 퇴근했다. 오전부터 차명환이 전화로 징징댔기 때문이다. 가게 밖을 나서니 해가 기울었다. 차에 올라타며 한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파라디소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바 준비됐습니까? 지금 데리러 갑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곤란합니다.]

“왜요?”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갔다.

[감기몸살이 났습니다. 통 노래 안 하던 녀석이 그동안 무리했던 모양입니다.]

이번에 침묵한 건 이석이었다. 어젯밤 녀석에게 걸신들려 달려든 건 사실이다. 자신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였지만, 끝까지 가진 않았다.

“혹시 몸도 팔게 합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의 목소리가 예민해졌다. 야바가 항우울제라고 믿고 먹는 약은 GHB다. 원래 마취제나 수면제로 고통을 줄이는 데 사용했지만, 지금은 데이트 강간 약물로 더 많이 사용한다. 한 알만 먹어도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누군가 겁탈하려고 덤벼도 손 놓고 당하고 마는 독한 각성제다. 하루 다섯 알, 그렇게 먹어댄다면 조만간 폐인이 된다. 그런 약을 먹고 거리를 뛰어나온 자체가 위험한 거다.

[아시다시피 저희 가게는 그런 일을 절대 금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제가 궁금하군요.]

“당신이 야바에게 먹이는 그 약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군요.”

[…….]

아니다. 야바의 겨드랑이는 물론, 체모 하나 없이 지나치게 매끄러운 피부였다. 음모 한 올 없는 성기와 깨끗한 분홍색 구멍은 섹스를 전혀 모르는 소년의 그것이었다. 그럼 그 얼굴은 대체 뭐란 말인가.

“뭐, 아니면 됐고. 병원엔 내가 데려갈 거니까 우선 준비시켜 놔요.”

[병원엔 이미 다녀왔습니다. 의사도 오늘은 푹 쉬어야 한다더군요. 오늘 가게에 출근도 못 했습니다.]

뒷목이 급격하게 당겼다. 이석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긴 한숨을 토막 냈다.

“나는 내가 정한 계획에서 어긋나면 무척 예민해집니다. 제시간에, 정해진 동선 안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꼭 일이 엇나가니까요. 당신 덕분에 벌써 두 번이나 차질이 생겼군요. 나를 자꾸 화나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준비시켜놔요. 야바 지금 어딨습니까?”

사장은 사뭇 짓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숙소에 있습니다.]

“고분고분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내 지분의 10%가 아깝지 않도록 해봐요.”

이석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자르고 핸들을 돌렸다. 도로에 늘어진 차 행렬 끝자락을 보며 오늘 마약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걸 인식했다. 끼니보다 더 챙기는 게 약인데 이상한 현상이다. 내내 야바의 자장가가 귀에 맴돌아서 생각 자체가 안 났다는 게 맞을 것이다. 사거리 신호가 바뀌었다. 코너를 도는데 수입 과자 가게가 눈에 걸렸다. 그는 핸들에 올린 손등에 턱을 기댄 채 입술을 쓸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에 들어서자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여직원이 인사했다. 수입 과자 상점 안은 서너 명의 손님이 진열대 앞에서 과자를 바구니에 담고 있다. 이석은 여직원에게 다가갔다.

“혹시 있습니까? 약인지 사탕인지 절대 구분 못 할 사탕.”

“예?”

여직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의아한 눈을 지우고 길쭉한 유리 진열대로 안내했다. 고급스럽게 장식된 유리통 안에는 갖가지 색깔의 사탕이 진열됐다. 녀석의 입술에 물리고, 혓바닥에 올렸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을 계산하며 하나하나 훑었다. 이석은 신중하게 살피다가 붉은색 사탕을 손가락으로 툭 찍었다.

“이건 어때요?”

“아, 그건 새콤한 맛이 나서 누가 봐도 사탕이랍니다. 이건 어떠신가요? 단맛을 싫어하시는 분을 위해 나온 신제품인데 반질거림이 없어서 알약하고도 비슷하고…….”

여직원이 가리킨 건 타원형 모양의 손톱만 한 사탕이었다. 짙은 와인색을 띤 결정체는 사탕 특유의 윤기는 없지만, 매력적으로 빠진 타원형이다. 여자는 집게로 하나를 들어 이석에게 건넸다. 이석은 사탕을 혀에 굴렸다. 색깔도 맛도 모두 흡족할 만하다. 그의 눈이 매끈하게 휘어졌다.

“일단 있는 거 다 포장해 줘요.”

아까부터 쉴새없이 요동치는 휴대폰 때문에 침대 전체가 덜덜 떨렸다. 야바는 숙소 침대에 널브러졌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눈가와 광대뼈는 퉁퉁 부어 몹시 고통스러웠다. 어느덧 머리카락이 자라 눈을 찔렀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 미장원에 갈 생각이다. 그에게 자장가를 불러줬고, 불알이 없는 것도 들켜버렸다. 생에 가장 중대한 두 가지가 한꺼번에 차이석 앞에 까발려졌다. 상관없다. 어차피 그는 모두 잊었을 거니까. 오전 내내 꿈쩍 않고 베게 모서리에 머릴 대고 있다. 뒤돌아보면 입 찢어진 처녀 귀신이 남은 자리를 베고 누웠겠지만 오늘만은 자리를 내주기로 했다. 다시 침대가 진동했다. 액정에 찍힌 번호는 임수였다. 핸드폰 들 힘도 없을뿐더러 놈의 목소리를 들었다간 아침에 먹었던 죽까지 토할 거 같다. 기하 허벅지는 코카인의 힐링으로 말끔하게 나았다. 그는 끝내 리모컨을 누르지 않았다. 창고에 감금하지도 않았다.

코카인은 욕실에서 나와 젖은 수건을 바구니에 던졌다. 조용히 침대 위에 몸을 얹자 매트리스가 푹 꺼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등만 보여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말했다.

“오해하지 마. 사장님이 갑자기 오셔서 어찌할 틈도 없었어.”

간간이 들리는 한숨 소리는 그가 얼마나 묻고 싶은 말이 많은지 알려주었다. 야바는 오랜만에 아량을 발휘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해. 내가 어디 다녀왔는지 궁금해서 못 견디겠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궁금해. 새벽에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야바의 입술이 잔인해졌다.

“니가 아는 사람이야. 그 사람하고 같이 있었어.”

코카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분명 그의 머리에는 딱 한 사람이 스쳤을 거다. 그건 자신도 코카인도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가 관건인 거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뭐가?”

“왜 쓸데없는 망상으로 다른 사람 속을 긁느냐고.”

“내 말이 속 쓰렸어?”

코카인은 입을 다물었지만, 자신의 말을 아예 믿지 않는 눈이었다. 야바는 흐린 눈으로 천장을 보며 말했다.

“혹시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밀고해. 나도 그럴 거니까.”

무구한 눈으로 보던 코카인이 입술을 차갑게 휘었다.

“그래. 알았어. 덕분에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10년 전 자신의 밀고로 그는 이 지옥에 잡혀왔다. 자신도 코카인 때문에 인생이 꼬여버렸다. 지금은 이 진창 속에서 서로의 발목을 물어뜯고 비틀어 누구도 저 바깥세상으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언젠가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 옛날 골목에서 나란히 앉아 서로를 알아갔던 그 시간처럼…….

출근 전, 깡패들이 압수했던 휴대폰을 돌려주며 가당찮은 사과까지 했다. 기하 나름 대로의 회유책이었다. 그는 고자 가수들을 개 잡듯 하다가도 가끔 이렇게 한수 접기도 했다. 그 은총에 감동한 고자 가수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근준비 중이었다. 여기서 더 버티면 안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벽과 가구 틈에는 아직도 메사돈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 헤쉬쉬를 비롯한 고자 가수들은 진저리치지만, 코카인으로 구원받아 금세 회복할 것이다. 헤쉬쉬에게 목 찔린 깡패는 아직도 혼수상태라고 했다.

약기운이 물러나려 하자 야바는 또 알약 두 개를 입에 털어 넣었다. 기하가 갖다 준 약도 다 떨어졌다. 그때 요란한 발소리가 방으로 몰려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신탕 집에서 환영받을 법한 거대한 개 한 마리가 헉헉거리며 걸어왔다. 야바는 희미하게 웃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는 거였다. 리모컨을 눌러 깔끔하게 죽이는 것보다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물어 죽이려는 거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고통스럽게 말이다. 안으로 들어온 시커먼 개가 짖었다.

“왜 사장님 전화 안 받아? 아까부터 얼마나 전화하신 줄 알아?”

야바는 품종 모를 개를 무심한 눈으로 보았다.

“시끄러워. 짖지 말고 나가.”

“빨리 일어나. 지금 숙소 앞에 차 전무 와 있어.”

개가 인간의 말을 하는 건지, 자신이 개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생긴 건지 한 단어가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야바는 코끝으로 웃었다.

“헛소리하지 마. 나를 밖으로 유인하려는 건지 모르는 줄 알아? 꺼져. 보신탕 집에 보내버리기 전에.”

시커먼 개는 한숨을 내리 토했다. 느닷없이 야바의 목덜미를 집어물고는 거실로 끌고 갔다. 앞발로 야바 머리 양쪽을 붙들더니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순간 시신경이 당길 만큼 동공이 꽈악 수축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은빛 차가 서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몸체로 가로등 빛을 흡수하며, 이 골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가. 선팅 때문에 안이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그의 차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출근하는 고자 가수들이 밴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양손에 짐을 들고가는 코카인도 보였다. 야바는 뭉그덩한 눈동자를 굴려 은색 차와 코카인을 번갈아 보았다. 자칫 코카인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화려한 가면을 쓰지 않은 얼굴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알게 되는 거다. 코카인의 옷깃에서 나는 비누 향을 차이석도 맡을 거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야바는 개 앞발을 뿌리쳤다. 느물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걸어갔다. 뒤에서 개가 짖었다.

“어디 가?”

“옷 입으러 가잖아.”

샤워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전신 거울 앞에 주저 앉았다. 제일 먼저 시야에 밟히는 건 눈가와 광대뼈에 얼룩진 멍 자국이었다. 목덜미에 이석이 남긴 자국과 기하의 손자국이 선연했다. 옷이라곤 모두 검정색 아니면 회색이다. 회색 폴라니트와 검정색 바지를 껴입고 가면을 있는 대로 꺼냈다. 손길이 바빠졌다. 덩달아 바빠진 심장 소리가 약기운을 뒤덮었다. 얼굴을 최대한 많이 가릴 수 있는 것으로 고르고 고르다가 입술만 빼고 모조리 뒤덮는 은색 가면을 집어들었다. 깃털이 유독 풍성한 은색 가면은 눈구멍이 주변에 큐빅이 촘촘히 박혔고 붉은색 깃털도 풍성했다. 시선을 분산시키기 적합했다. 리본을 단단히 묶고 밖으로 나갔다.

1층 현관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밴 앞에선 헤쉬쉬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어딘가를 주시했다. 시선 귀퉁이엔 은색 차가 있었고, 그 앞에서 코카인이 허리를 숙인 채 차 안에는 차이석과 마주하고 있었다. 야바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코카인의 예쁜 입술색과 눈동자, 깨끗한 피부, 폰으로 주고받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색채를 이석의 눈에 담고 있었다. 코카인의 분홍빛 입가에서 퍼지는 입김이 그의 이마에 흩어졌다. 청아하게 맺힌 미소는 이슬 위에 햇빛이 부서질 때의 순간처럼 눈부셨다. 아직 그의 폰에는 코카인 사진이 저장됐을까? 날카로운 감정이 심장을 긋고 지나간다. 인생이 이런 거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서 막으려고 해도 저렇게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고야 마는…. 처음부터 주인공은 정해진 거다.

“오랜만이에요. 전무님.”

찬 바람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차이석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무표정하게 훑어내렸다. 한참을 보던 그가 검은 눈동자를 짓궂게 빛냈다.

“누구죠? 나를 압니까?”

코카인은 웃음 띤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맨얼굴을 보여주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보이는 건 생경했다. 그가 대책 없이 구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숙소까지 찾아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것도 규칙 위반일지도 모르지만, 짜투리 시간에라도 볼 수 있어 그저 놀랍고 놀라웠다. 코카인은 고조된 목소리를 추스르며 차분히 말했다.

“피곤해 보이세요.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봐요.”

“내가 안 와서 서운했어?”

코카인은 쓰게 웃었다. 아직 거실에 남은 메사돈의 핏자국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제 그에게 전화하고 싶은 걸 참느라 손가락이 짓무를 지경이었다. 그저 목소리만이라도 들으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아서였다. 코카인은 밴 앞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깡패를 힐끔 보았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아내신 거에요? 이렇게 숙소에 오시면 안 돼요.”

차이석은 눈썹 꼬리를 가볍게 들었다. 그러다 빨려들 듯한 미소를 보냈다.

“안 그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잘 됐군. 알콜 중독자도 고치나?”

“네. 몇 번 해 봤어요. 그런데 어떤 상태인지…….”

“5년 동안 병원은 교회 드나들 듯했고 정신병원, 요양원도 모두 실패했어. 니가 한번 해봐.”

“실례지만, 누구인지 여쭤도 되나요?”

“자세한 건 내일 알려주지. 되도록 빨리 시작했으면 하는데.”

코카인은 미소 띤 입가에 주먹을 대고 잔기침을 했다.

“맨입으로요?”

이석은 입술에 미소를 품은 채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때 이석의 시야에 야바가 포착됐다. 코카인도 허리를 펴며 그곳을 보았다. 밴 앞에 선 야바는 은색 가면을 쓴 채 턱까지 감싸는 니트를 입었다. 이번에도 제 몸의 두 배나 들어감직 한 크기였다. 스산한 바람이 옷감을 휘감자 퇴폐적인 실루엣이 여실히 드러냈다. 이석의 아랫도리에 급격히 열이 몰렸다. 비어 있던 음낭은 충격이다. 녀석을 만난 이후 충격의 연속이다. 성재 말이 맞았다. 야바를 비롯한 가수 모두 거세당했다는 게 신빙성 없는 말이 아니란 거다. 그는 머리에 손을 괸 채 중얼거렸다.

“저 녀석 말야. 옷 취향이 원래 저런가?”

“네?”

코카인이 되물었다. 저대로 두면 찬 바람에 부서질 것 같이 서 있었다. 그는 팔을 창 밖으로 뻗어 까딱까딱 손가락질했다. 야바는 이쪽을 멀거니 보다가 쌩 돌아서 가버렸다. 이석은 반사적으로 차 밖에 튀어 나갔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녀석의 팔을 잡았다.

“이봐, 이봐. 어딜 도망가는 거야? 연락 못 받았어?”

“놔. 안 갈 거야.”

“왜 또 변덕이지? 나 만나러 온 거 아닌가?”

“산책하러 가는 길이었어.”

“이런 가면을 쓰고?”

손목을 집어문 손아귀는 끈질기게 떨어지지 않았다. 몇 칸 아래에 있는 그와 시선이 일직선 상에 놓이자 시선이 중첩됐다. 어젯밤 일을 기억하는 눈이 아니었다. 쪼그라든 음낭이 머리에서 지워졌다는 거다. 그리고 자장가도…. 야바는 그를 뿌리치며 계단으로 올라갔지만, 이석은 뒤에서 허리를 낚아채 명쾌한 걸음을 내뻗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정수리를 꿰뚫고 고막까지 열기가 번졌다.

“놔! 안 가! 안 가! 싫어!”

날선 목소리가 골목에 쩡쩡 울렸다. 기하에게 맞은 명치와 복부가 악다구니했다. 발을 휘적거려 그의 다리를 차버렸지만, 그는 보기 좋게 무시하고 차로 걸어갔다. 걸음걸음마다 엉덩이에 그의 허리띠가 세게 비벼졌다. 그리고 그 아래도……. 이석은 뒤에서 가면 리본을 입에 집어물며 팽팽하게 만들었다. 부정확한 발음으로 귓전에 읊조렸다.

“얌전히 있어야지. 나비야.”

야바의 동작이 일순간 정지했다. 리본을 당기는 입술보다 그가 뱉은 언어 때문이었다. 그는 목 안으로 웃었다.

“그 녀석 야채박스에서 동사할 뻔했어. 녀석이 변온동물인 걸 감사하라고.”

요망한 것은 질기기까지 했다. 다음엔 꼭 냉동실에 넣고 말 거다. 그 집에 다시 갈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밴에 올라탄 고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았다. 깡패들도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지만, 파라디소에서 가장 VIP인지라 딱히 어쩌진 못 했다. 식어버린 코카인 얼굴이 느린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는 야바를 조수석에 구겨 넣고 민첩하게 안전벨트로 포박했다. 큰 보폭으로 걸어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한켠에 서 있는 코카인에게 시선만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 야바가 간신히 정신이 들었을 무렵 차는 출발한 지 오래였다. 그는 골목을 지나 길가에 차를 세웠다. 핸들에 올린 손에다 턱을 기댄 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른한 눈빛은 건기 막바지에 이른 혼탁한 대기였다. 기묘한 시선에 목안이 껄끄러웠다. 어젯밤 일을 모두 기억하는 거다. 모두. 야바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벌레가 꿈틀대는 볼을 긁었다.

“긁지 마.”

이석은 볼에 닿은 손을 잡아 내렸다. 문득 야바의 손목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검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그가 좌석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외투라도 걸치고 다녀. 그렇게 빈약하게 입으니까 탈 나는 거야.”

“나 원래 추위 안타.”

“입술이 파랗잖아. 어깨도 떨고 있어.”

“내가 언제?”

“지금 그래.”

그가 히터 버튼을 누르자 뜨끈한 열기가 퍼졌다. 그때 밴이 지나갔다. 뒷좌석에 탄 코카인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야바는 말했다.

“맨날 이렇게 불시에 찾아오는 거야? 날짜 정해서 가는 게 좋잖아. 어제도 별장에 가는 줄 알았어.”

언제 올지도 모를 사람을 무작정 기다리는 시간은 지옥이다. 차라리 정해진 날이 있으면 집착에서 벗어날 것 같다. 그가 말했다.

“내 스케줄에 맞추려면 하는 수 없어.”

“세상일 너 혼자 다해? 나도 계획 있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리다가 연락 없으면 조롱당한 기분이야.”

느슨하게 풀어헤친 그의 눈빛이 각을 세웠다.

“그렇게까지 차명환한테 가고 싶었는지 몰랐는데.”

야바는 창밖으로 시선을 내동댕이치며 읊조렸다.

“그래…. 매일매일 그날만 기다려.”

꽉 조인 시선이 가면을 관통해 볼을 짓눌렀다. 그는 지금 휴지기에 들어간 화산이었다.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까슬한 침묵이었다. 차이석은 별다른 말 없이 시동을 걸었다. 곧 빼곡히 들어선 도로에 진입했다.

“일단 병원으로 가지. 잘 아는 한의사가 있어.”

“싫어. 그냥 별장으로 가.”

“어차피 몸 상태가 그래선 아무것도 못해.”

“자살하는 것보다 나아.”

음? 이석은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응시했다.

“감기몸살 같은 건 이제 갓 졸업한 새파란 한의사한테 맡길 거야. 그럼 분명 엉뚱한 곳에다 침을 찌를 거고, 나는 전신 마비가 될 거야. 돌팔이 의사가 내놓는 합의금이라고 해봐야 이천에서 삼천일 텐데 그 돈으로 내 인생을 보상할 수 없어. 나는 소송을 할 거고 의료사고 나면 법정에서 이길 확률은 거의 없어. 수년 동안 시간과 돈을 탕진한 나는 비관하다 결국 자살하고 말 거야. 그러니까 그냥 별장으로 가.”

이석은 직각으로 세운 손에 머리를 얹은 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거 알아? 가끔 네 얘기 들으면 나까지 휩쓸려.”

나머지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덧붙였다.

“왜 코카인한테 힐링 안 받지? 그 녀석이라면 감기몸살쯤 한번에 고칠 수 있을 텐데.”

코카인의 물에 독극물을 넣도록 한 장본인이 그 양을 늘리라고 부추겼다. 코카인에게 매일 독약을 먹인다는 걸 알면 그는 어떤 얼굴을 할까?

“안 들으니까 안 받지.”

“어째서?”

“기적이 모두에게 일어나는 건 아니야.”

그가 시선을 포개왔다. 자동차 라이트가 그의 이마와 콧날 위를 적셨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좁은 공간의 공기가 그로 인해 한층 더 축축해졌다. 그는 느슨하게 물린 넥타이에 손가락을 끼워 완전히 잡아뺐다. 옷감과 실크 넥타이 스치는 소리가 뱀의 경고음 같았다. 각양각색의 자동차는 시간을 역행하는 연어처럼 한 곳으로 움직였다. 풍경과 풍경에 얽힌 사연들을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두 달 뒤면 이 향락의 도시에도 봄이 올 거다. 모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대쉬보드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이석은 폰을 기울여 액정을 확인하더니 혀를 찼다. 무심한 손길에 휴대폰이 대쉬보드 구석에 처박혔다. 삼거리에서 신호등을 받자 앞차와 간격을 두고 세웠다. 차이석은 어딘가를 보며 말했다.

“음? 저기 사고가 난 거 같은데?”

“어디?”

이석의 시선을 따라가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그가 손을 뻗어 리본을 당기고 가면을 벗겨 냈다. 은색 가면은 바닥에 황망히 나뒹굴었다. 야바는 불시의 공격에 넋 놓았다가 뒤늦게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가 먼저 턱을 낚아채 잡아 돌렸다. 턱을 부술듯한 악력에 신음을 삼켰다. 날 세운 눈이 충돌해왔다. 그는 야바의 눈두덩과 볼을 낱낱이 주시했다. 갑자기 야바 손목을 잡아채 보라색 멍자국을 보며 뇌까렸다.

“그래, 몸살 난 이유가 따로 있었군.”

다시 폰이 울렸다. 이석은 야바의 턱을 놓고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사뭇 난폭한 움직임이었다.

[어디냐? 오고 있는…….]

“들릴 데가 있으니까 일단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자고 있어요.”

이석은 폰을 대쉬보드에 내던졌다. 곧바로 머리를 뒤튼 차가 U턴했다. 몸이 바깥으로 휩쓸렸다. 급발진한 자동차가 다른 차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불빛에 반사된 성난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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