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12
히터 좀 올려요. 조금 초조한 음성이었다. 뭔가 강하게 야바의 몸을 똬리 틀었다. 곧이어 뜨끈한 공기가 번져 들고 그보다 더 뜨거운 숨결이 이마에 흩어졌다. 그 감촉에 이끌려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어둡고 좁은 공간, 차창 밖으로 정체된 사물들이 시야에 내렸다. 꼬리를 늘어트리고 지나는 자동차 전조등, 빠르게 지나는 네온사인들, 그리고 흐린 잔상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 그 눈은 잠깐 다른 곳에 있다가도 궤도에서만 맴도는 행성처럼 금세 돌아왔다. 규칙적인 흔들림과 휘어지는 방향감이 느껴졌다. 무뎌진 감각은 저 먼 곳으로 까라졌다.
“아, 해야지. 나비야.”
누구의 음성인지도 모른 채 입을 벌렸다. 목소리 정체보다 코끝에 스미는 우유 냄새 때문이었다. 곧이어 따뜻한 우유가 입속 점막을 적셨다. 흐트러진 정신이 서서히 조각을 맞췄다. 느리게 눈을 떴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건물이 물컹한 춤사위를 벌였다. 그리고 초콜릿색 머그잔을 든 차이석이 어룽거렸다. 자신이 그의 가슴에 몸을 내맡긴 건 한발 늦게 깨달은 일이었다. 100kg에 육박하는 몸무게가 적나라게 드러날 거다. 엉덩이에 깔린 그의 다리가 부러지진 않을까도 염려됐다. 야바는 가까스로 무거운 몸뚱이를 일으켰다. 몸이 얼었다가 녹으니 연체동물 마냥 사지가 흐물거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머그잔을 저만치 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건으로 야바 손과 발을 차례로 닦았다.
“지금 목욕하면 감기에 걸릴지 모르니까 참아.”
늘어진 말투가 그도 술과 약에 쩔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약에 취했을 때 유독 친절했다. 본능에 가까워져서인지, 그 반대인지, 그 괴리감에 매번 가슴을 짓찧어지면서도 어김없이 홀리곤 했다.
“……어디야?”
“내 집.”
그의 집…. 야바는 낯선 공간을 둘러보았다. 의외였다. 당연히 초호화판으로 도배했으리라 생각했다. 검정색과 흰색이 섞인 벽체에는 액자 하나 없었고, 드넓은 거실에는 그 흔한 소파도 없이 달랑 이불과 TV가 전부였다. 벽 한 면을 차지한 창문 너머에서 형형색색의 도시 눈알이 집안을 훔쳐보았다. 뒤쪽에 시커먼 강물은 도시 야경을 꾸역꾸역 삼켜 배를 불리고 있었다. 그때 미끈거리고 찹찹한 뭔가 손등에 닿았다. 시선을 돌리는 찰나, 야바는 헉, 하며 창백하게 굳었다. 술 담그면 삼대는 먹고 남을 법한 구렁이가 이불에서 기어나오는 것이었다. 노란색 바탕에 주황 무늬가 덕지덕지 붙은 구렁이가 야바 팔을 감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갈라진 혓바닥과 빨간색 눈알에 털이 쭈뼛 기립했다.
“괜찮아. 먹이인지 아닌지 탐색하는 거야.”
차이석은 살벌한 얘기를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눈으로는 구렁이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야바는 인상을 찌푸렸다. 뱀은 제일 싫었다. 더럽고, 못생겼고, 흉측한 껍질을 몇 꺼풀이나 가진 요물이다. 야바는 초인적인 힘을 폭발시켜 구렁이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추악한 구렁이가 식탁에 부딪혔다가 몸을 뒤틀어 바로잡았다. 뱀 대가리를 치켜들더니 입을 쩍 벌린 채 슉슉, 섬뜩한 소리를 냈다. 야바도 털을 세운 채 요망한 것을 노려보았다. 이석은 피식 웃음을 걸었다.
“그렇게 보면 싸우자는 뜻이야. 갓난아기쯤 가볍게 먹어치우는 녀석인데 고양이 한 마리는 일도 아니거든. 인사라도 건네 봐.”
“싫어. 난 음식 하고는 말 안 섞어.”
구렁이도 이빨을 드러낸 채 빨간 눈알을 휘번득거렸다. “안 되겠군.” 이석은 한숨 쉬더니 구렁이를 안아올려 방에 집어넣었다. 냉장고가 아니라 어엿한 방에 말이다. 그는 홈 바에 놓인 글라스에다 호박색 술을 따르고 백색 가루를 넣었다. 야바 앞에 앉아 호박색 액체를 마셨다. 눈도 풀렸고 머리카락도, 옷매무새도 헝클어졌다. 하지만, 잔을 쥔 손가락이나 잔에 살짝 걸린 입술은 헐거우면서도 군더더기 없었다. 야바는 서늘한 옆모습을 보며 불쑥 말했다.
“너도 약 너무 많이 하지 마.”
“마약 할 때는 고민이 사라져. 정신이 들면 골치 아픈 일투성이지. 알겠어? 다 내 건강을 위해서 하는 거야.”
이석은 낮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걱정해 주는 건가? 착한 녀석을 주워왔군.”
“…….”
그가 손을 들었다. 야바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신이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나 모르지만, 확실히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예쁜 여자와의 하룻밤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흥밋거리를 선택하는 즉흥적인 사람이다. 그가 주워온 게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동물에게나 하는 이 손짓을 내치는 게 당연하지만, 그의 공간에서 체온에 잇닿았다는 것으로 참을 이유가 있었다. 야바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눅눅한 손길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런데 왜 그 시간에 돌아다녔지? 그런 얼굴로 거리를 뛰어나온 자체가 위험한 거야. 설마 매일 밤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 집에 있기 싫어.”
“왜?”
“같이 사는 애가 죽었어.”
그는 눈썹을 들며 눈으로 물었다. 야바는 끔찍한 광경을 짓누르며 말했다.
“깡패가 리모컨을 눌러서 머리를 터트려버렸어.”
이석은 호박색 술잔을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그 리모컨 나도 갖고 싶은데. 뇌수는 잘 치웠나?”
“몰라, 내가 안 치웠어.”
이석은 가볍게 휘어진 입술에 잔을 가져갔다. 멋대로 빠져나온 일이 발각되면 기하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눌어붙은 뇌는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명령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하가 풀려나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건 알고 있다. 야바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그가 물었다.
“왜?”
“가야 돼. 여기 어디야? 차비 줘.”
야바가 일어나자마자 팔에 감긴 손에 다시 주저앉았다.
“아니, 아니. 넌 오늘 내가 주웠어.”
그의 입술엔 이미 온기가 빠져나갔다. 팔을 옭아맨 불같은 체온은 어쩐지 두려웠다.
“……이거 놔.”
“너 꾼이야?”
차가운 목소리였다. 야바는 고개를 들어 표정을 확인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야바의 뒤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뒤늦게 검은 눈동자가 도착했다.
“너 꾼이냐고.”
“무슨…소리야?”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차에선 나한테 안겨 비비적대더니, 치고 빠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는 위험한 기운을 내뿜었다. 야바는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지만, 더 포악하게 끌려가 무너져 앉고 말았다. 육욕이 득실대는 눈빛이 찔러왔다.
“이봐, 이봐. 둘 다 약에 취했지만, 너를 고양이라고 생각해서 집에 끌고 온 게 아닌 건 알잖아. 너도 자신이 고양이가 아닌 걸 알고 있어.”
“니가…멋대로 데려왔잖아. 난 여기에 올 생각이 없었어.”
이석은 야바의 턱을 한 움큼 잡아 코앞으로 당겨왔다.
“물론 데려온 건 나야. 하지만, 절반은 네 책임이야.”
그가 기습적으로 귓방울을 깨물었다.
“하읏……!”
예리한 교성이 도화선을 당긴 것처럼, 그는 닫힌 입술을 사납게 젖히고 들어왔다. 그 힘에 떠밀려 쓰러졌다. 야바의 아랫입술과 혀를 상처 나지 않게 씹었다. 입안으로 침범한 혀는 야바 위에 올라타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가운뎃손가락이 차지했다. 빙빙 돌리고 피스톤 운동을 했다. 이석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그는 셔츠를 난폭하게 끌어 올렸다. 단단해진 유두가 입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피부가 당길만큼 강하게 흡입하다가 살짝살짝 혀로 스치면서 깨물었다. 남은 쪽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돌기를 애무했다. 숨이 가팔라지고, 저릿한 감촉에 눈가로 열이 몰렸다.
“으읏……하아…그만…해……!”
“가만, 가만있어 봐…….”
그는 그날처럼 다정하게 속삭였다. 몸부림치는 야바의 양팔을 한 손에 붙잡아 위에다 고정했다. 이미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야바의 중심에 대고 비벼 올렸다. 현기증 날만큼 음란한 리듬이었다. 저항이 거세질수록 그의 혀 놀림도 난폭해졌다. 타액에 잔뜩 젖은 그의 혓바닥이 가슴 중앙의 골을 따라 주욱 내려왔다. 움푹 파인 배 언저리, 배꼽 주위, 그는 민감한 곳만 골라 절절 끓는 감각을 지졌다. 격렬한 쾌감이 몰아닥쳐도 고환을 잃은 성기는 발기하지 않았다. 비참함에 몸서리를 쳤다.
이석은 골반뼈를 깨물었다. 하읏…찌릿한 감각에 허리를 띄웠다. 타액에 번들거리는 젖꼭지 너머로 그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 입술과 혀가 점점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갔다. 그는 야바의 허리를 혀로 쓰다듬다가 바지와 속옷을 한번에 잡아 끌어내렸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두려웠다. 피부 껍질이 벗겨나가고 목을 따이는 것보다 두려웠다. 감정과는 상관없이 몸 구석구석을 괴롭히는 열락에 휩쓸렸다. 야바가 허벅지를 조이자 이석은 무릎 안쪽에 손을 끼워 넣고 거침없이 잡아 벌렸다. 팬티에 걸린 성기 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머리를 떨어트렸고, 볼품없는 성기가 그 입속으로 사라졌다. 파격적이고 적나라한 행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귀두를 당겨가 입술로 문지르며 치아로 귀두 끝을 긁었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동시에 치고 빠졌다. 그러다 목구멍 깊이 삼켰다. 흡혈충이 피를 빠는 것같이, 보란 듯이 늘쩍지근한 소리를 냈다. 극치의 쾌감이 척추와 신경에 치달았다.
“하앗…앗……으응……!”
허리가 튕겨 올랐다. 빠르게 치솟은 호흡이 고지에서 뚝뚝 끊어졌다. 야바의 볼 위에 눈물이 흐드러졌다. 그의 머리를 밀치고 다리를 오므렸다. 몸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성기는 미동하지 않았다. 인두 같은 쾌감이 더할수록 그 후에 다가올 공백은 거대할 터였다. 뜨거워진 피부가 경련했다.
“하아…하……!”
질퍽한 고양이의 교성에 이석의 숨소리도 사나워졌다. 울먹임마저 마약 같은 자극제였다. 복근 주위 혈액이 페니스로 몰렸다. 그는 야바 엉덩이를 잡아 벌려 골진 곳을 따라 손가락을 밀었다. 꽉 닫힌 구멍이 음탕하게 움찔거렸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구멍을 휘젓고 싶어 돌아버릴 지경이다. 잡아먹듯이 녀석의 입술을 탐하며 지퍼를 열었다. 터지기 직전의 성기를 끄집어내 녀석의 맨 허벅지에 불이 나도록 마찰했다. 야묘의 반항은 거세졌다. 발톱을 세워 할퀴고 이석의 손가락을 물어뜯기도 했다. 그만 해. 그만 해…. 크게 휜 허리와 젖은 젖꼭지가 질펀한 살냄새를 풍겼다. 첫 손님을 상대하는 매음굴 사탄처럼 녀석은 두려움과 환락에 범벅된 얼굴이다. 덕의에 벗어난 그 모습은 포르노 사진의 피사체처럼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간신히 참고 있던 사정감이 몰아닥쳤다.
“하아…가만있어. 진짜 쌀 거 같으니까.”
“아읏…하아……하으…!”
그는 저속한 밀어를 사납게 뇌까렸다. 허리놀림은 성급해졌다. 잇자국이 날만큼 야바의 목덜미를 깨물어 피부를 빨았다. 쇄골과 어깨, 다시 젖꼭지…드러난 곳엔 모조리 붉은 흔적을 남겼다. 약에 쩔어 이성이 날아가도 결코 하지 않던 유치한 짓거리에 그는 아이 마냥 심취했다. 야묘의 젖은 목덜미 위에 격렬한 숨을 뿌리고 은은한 냄새를 맡았다. 끈적거리는 기류가 피부에 쩍쩍 달라붙었다.
아슬아슬하게 성기에 걸친 속옷이 완전히 내려갔다. 성기를 빨던 그가 더 아래로 입술을 옮겨가는 순간이었다. 그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를 발견한 그의 눈이 그곳을 주시했다. 훼손된 생식기에, 파괴된 성에,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에……. 피가 모두 휩쓸려 나갔다. 흐물거리는 음낭을 보던 그가 이윽고 묘연한 시선을 부딪쳐 왔다. 비웃음도, 당황도 아닌 이상한 눈빛이었다. 그 모든 게 슬로우모션과 같았다. 야바는 제 눈을 찌르고 싶었다. 그의 오만한 턱 아래 비참한 음낭이 몸서리쳤다. 그가 속한 주변 풍경이 괴이하게 뒤틀렸다.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아――――――――――――――!!”
날카로운 비명이 사방으로 내뻗었다. 공기와 사물들이 쩍 갈라지듯 기괴하게 흐트러졌다. 읏, 이석은 신음하며 머리를 잡았다. 폭발적인 압력으로 이마에 심줄이 돋아났다. 야바는 필사적으로 빠져나와 현관으로 달려갔다. 도어락을 허둥지둥 눌렀다. 처음 보는 기계였다. 되는대로 눌러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이석의 눈빛이 뇌를 휩쓸었다. 시궁창에서 빠져나와 더 지독한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덜덜 떨리는 손등으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 길로 달려가 기하 자지에 가위를 쑤셔 박아야 했다. 자궁 없는 여자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야 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폭풍 같은 머릿속과는 달리 사방은 너무 조용했다. 이상한 적막에 야바의 손길이 차츰 느려졌다. 뒤돌아보는 것마저 크나큰 용기를 쥐어짜야 했다. 머뭇머뭇 뒤로 돌아보는 찰나, 머리가 차가워졌다. 차이석이 쓰러진 채 아무 미동이 없는 것이었다. 눅눅해진 입술을 뜯으며 도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까 저항하다 머리를 후려친 모양이다. 아니면 약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걸까…. 심장 박동수가 올라갔다. 문에서 손을 거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석은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차츰 체온이 차가워졌다. 차가운 손끝으로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석아…….”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핏기없는 그의 얼굴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머, 머리 아파? 눈 떠 봐.”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그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석아! 이석아…! 야바는 이석의 머리를 껴안아 흔들었다. 힘없이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심장이 무너졌다. 그 순간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갔다. 그는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죽은 줄 알았어?”
야바는 눈을 끔뻑이다가 이석을 두드려패며 소리쳤다.
“진짜 놀랐어! 진짜 놀랐어! 이런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야. 진짜 머리 깨지는 줄 알았다고. 만져봐 뜨끈뜨끈하잖아.”
이석은 야바 손을 가져가 자신의 이마에 댔다. 헝겊인형처럼 팔다리가 흔들거렸다. 야바는 안간힘을 다해 그를 밀치고 일어났다. 그 순간 단단한 팔이 허리에 감겼다. 야바를 깔아 눕히고 탄탄한 가슴으로 숨 쉴 틈 없이 짓눌렀다. 쭉 뻗은 손이 야바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가라앉은 음성이 귓불에 흘러내렸다.
“가지 마.”
그의 언어는 주문처럼 발버둥을 멈추게 했다. 불규칙한 숨은 차츰 가라앉았다. 짙은 머리카락이 그의 눈썹으로 흘러내렸다. 칼같이 모두 넘겼을 때보다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이석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야바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부르튼 입술을 뜯었다.
“……많이 아파?”
“그래. 아파. 머리가 어떻게 될 만큼.”
이석은 머리에 손을 괸 채 비스듬히 누웠다. 아래에 깔린 고양이는 눈꼬리가 붉어진 채 겁에 질린 눈빛이었다. 좀 더 다그쳐서 더 끄집어내고 싶은 욕구를 담금질했다. 조금 전 깨질 듯한 두통의 잔재가 관자놀이를 씹어댔다. 그는 손가락으로 야바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노래 해봐.”
응시해오는 짙은 시선에 야바의 체온이 올라갔다. 그는 조금 전 끔찍한 광경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어쩌면 벌써 머릿속에서 지웠는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 경찰서에서 풀려난 기하가 자신의 무단이탈 사실을 알고 리모컨에 손가락을 얹고 있을지도 모른다. 목숨의 결정권이 제 것인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석과 함께하는 1분 1초가 필사적이었다. 그의 두통을 매만져주고 싶었다. 삭막한 눈동자에 비를 내려주고 싶었다. 힐러는 이름만으로도 구역질 났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그 능력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야바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노랫말을 흘려보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 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자장가를…….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아름다운 장미꽃 너를……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혀 예상 밖의 노래라는 듯이. 야바 노랫소리도 그쳤다. 그는 다물린 야바 입술을 나른한 손끝으로 쓸었다. 그윽하고 차가운 눈빛이 박혀 들었다.
“계속해.”
야바는 머뭇거리다가 브람스의 자장가를 이어갔다.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아름다운 장미꽃… 너를 둘러 피었네…
잘 자라 내 아기… 밤새 편히 쉬고……
아침이 창 밖에 올 때까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이석은 노래하는 입술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뚜렷이 고정된 눈동자에는 욕망의 잔재가 꿈틀거렸다. 그것이 노랫말을 자꾸 잊어버리게 했다. 그는 몸을 기울여 머리를 떨어트렸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목소리도 흐트러졌다. 예상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귀를 야바 입가에 바짝 붙였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목 근육과 쇄골이 동물적인 덩어리감으로 시선을 훔쳤다. 온몸을 잔뜩 긴장해야 했다. 허벅지에 그의 것이 고집스레 닿아 단단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눅진한 시선으로 내려보다가, 입술에 귀를 가까이 댄 채 탁한 신음을 내기도 했다. 야바도 그의 귓바퀴에 선율을 들려주었다.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오늘 저녁 꿈속에 천사 너를 보호해……
축축이 번지는 음색이 이석의 귓불과 머리카락 위에 올라 하느작거렸다. 이석은 눈을 감고 물 같은 선율에 몸을 내맡겼다. 남자의 것도, 여자의 것도 아닌 음색은 그 어느 것보다 허무했고, 신비로웠다. 가늘게 속삭이는 음성은 숨소리마저 집중하게 했다. 피부와 내장 뼈와 세포와 혈관 심장까지 도달해 액체 같이 흘러내리도록 한다.
이석은 다시 야바를 주시했다. 귓불과 목덜미에서 어깨까지 떨어지는 실루엣이 선율처럼 황홀하다. 옅은 동공은 빛의 각도에 따라 색채가 달라졌다. 그 신비로운 색채에 시선을 붙들린 채 녀석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노랫말을 굴리는 혓바닥도 눈으로 핥았다. 물어뜯듯이 입술을 빨고 고운 선을 망가트리고 싶다. 야바 허벅지에 틈 없이 붙은 중심으로 열기가 몰렸다. 가슴에 맞닿은 녀석의 심장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어미의 태동을 느끼듯 그는 그 울림에 좀 더 가까이 닿았다. 애처롭고 구슬픈 멜로디가 온몸에 감겼다.
잘 자라 내 아기… 밤새 고이고이……
낙원의 단꿈을 꾸며 잘 자거라……
음~~~~~아~~~~~~~아~~~~~~~~~~~
몽롱한 허밍이 이어졌다. 이석은 야바의 입술에 귀를 더 깊이 밀착하고 소리를 들이마셨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노래도 야바 입술을 통하면 음울한 진혼곡이 되고 만다. 아득한 곳에서 들리는 잿빛 첼로처럼 무의식으로 유혹했다. 명치를 꽉 막히게 하는 울림은 물속을 헤엄치듯 느리고 축축했다. 모태에 감싸인 듯이, 그 물막 같은 감촉에 의식을 내맡겼다. 혹한 속에서 서서히 조여오는 죽음 같은 수면처럼,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세이렌의 진혼곡처럼, 녀석은 지옥과 천국의 경계에 놓인 연옥이다.
아…아……아……
허밍이 점점 옅어졌다. 약에 취한 건지 피곤했는지, 이석은 야바를 깔고 엎드려 누운 채 곤히 잠들었다. 허리를 옥죈 팔에 숨쉬기 힘들었다. 그의 체중이 실려 어깨도 뻐근했다. 그렇지만, 이 시간을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았다. 정갈한 호흡 소리가 야바 볼에 흩뿌려지고 셔츠 속에 스며들었다. 매일 같이 향락에 젖은 약쟁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는 깨끗하고 건강한 피부였다. 이 안에 가려진 눈동자는 해이하지만, 어느 순간 숨통을 끊어놓는 흉기로 돌변할 것이다. 뉘엿뉘엿 손을 들었다. 머리카락 끝자락, 정돈된 눈썹과 굴곡 없이 뻗은 콧날…. 닿았는지 아닌지조차 구분 못 할 만큼 숨죽인 손으로 더듬어갔다. 그러다 적당히 두껍고 윤기가 맺힌 입술에 당도했다. 아까 이 입술이 자신의 피부에 닿고, 성기를 머금고, 또 그 안에 있는 혀도……. 머리가 심장처럼 뛰었다.
꾹꾹 눌러담은 숨소리가 그의 머리카락과 콧잔등을 건드렸다. 야바는 천천히 고개 들어 그의 입술에 제 것을 가져갔다.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또 한참을 망설이다가 눈을 꾹 감았다. 두 조각의 입술이 겹쳐졌다. 눌리는 힘에 부드러운 살이 약간 틈을 벌렸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야바는 도둑질한 사람 마냥 입술을 거두었다.
아침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짜 친절이라고 해도, 그의 기억에서 지우개질 당하는 잔인한 아침이 온다고 해도, 오늘도 그를 사랑할 거다. 자신의 벌점은 640점이다. 어쩌면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1000 점이 되면 아웃이다. 999점이 되는 날, 그를 만나러 올 거다.
시간은 새벽 5시 25분을 넘어섰다. 기하는 장장 12시간에 걸친 조사를 마쳤다. 어두운 취조실에서 형사와 단둘이 마주했다.
“뭐, 서로 잘 아는 처지에 성의껏 쓰면 돼. 신고가 들어왔는데 우리도 가만있기는 뭣 하니까 이해하고.”
형사는 이를 보이며 웃었다. 놈이 찬 금시계와 자동차, 자식들 학비에 기하가 심심치 않게 일조했다. 이 정도 편의는 당연지사지만, 그들은 번번이 공치사로 속을 뒤틀리게 했다. 기하는 압수당했던 소지품을 돌려받고 취조실을 나섰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리모컨은 부하에게 맡겼다. 출구로 가는 길에 벽에 걸린 지명수배범 사진이 눈에 밟혔다. 14살의 코카인도 있었다. 뒤따라오는 형사가 말했다.
“아, 10년 전 크리스마스 살인사건으로 유명했지. 달동네에서 10여 명이나 둔기에 맞아서 두개골 파열 당했지 아마? 워낙 엽기적이었고 내 담당이기도 해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지.”
“어쩌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아무래도 원한 관계가 아닐까 해. 그 집 엄마가 워낙 소문이 지저분하던데. 무슨 사이비종교 교주처럼 굴면서 마을 사람들을 현혹해 금품을 갈취했다더군. 사건 당일 그 여자도 두개골 파열로 즉사하고 중학생 아들까지 행방불명에, 우선 그 애도 용의자 명단에 올렸는데 뭐, 중학생짜리가 그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였을 리 있나. 그 녀석 형이 가장 유력했지만, 알리바이가 워낙 확실해서 용의 선상에는 제외됐고 말야. 얼른 공소시효나 지나버렸으면 좋겠다니까. 골치 아프기만 하지. 원.”
형사는 가래를 뱉고 담배를 물었다. 기하는 한번 떠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었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범인이 다른 사람을 처치하는 사이에 도망칠 수 있을 텐데요.”
“알고 보니 그 사람들 몸에서 마약 양성 반응이 나왔다더군. 아마 그날도 단체로 뽕을 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도망칠래야 칠 수가 없었겠지.”
“그렇군요. 목격자가 있었다면 수사에 진전이 있을 텐데 안타깝군요.”
기하는 속으로는 조소했다. 14살짜리 애송이가 비명을 질러 살해했다는 걸 꿈에도 상상 못 할 것이다. 힐러의 노래를 들은 사람에게서 마약성분이 검출됐다는 건 부친의 데이터를 통해 익히 아는 바이니 놀랄 것도 없었다. 그런데 형사가 뜻밖의 말을 했다.
“안 그래도 그때가 크리스마스라 정신도 없고, 목격자가 없는 줄 알았는데 동네 주민 하나가 그 집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걸 봤다더군.”
“누구입니까?
기하는 긴장했다. 혹시 자신이나 임수를 목격한 게 아닐까 해서이다. 자칫 살인자 덤터기를 뒤집어쓰면 곤란하다.
“목격자 말로는, 애가 비명을 지르고 한참 있다가 웬 남자가 그 집에서 튀어나왔다지? 거리도 있고 워낙 어두워서 얼굴을 못 봤지만, 걸음걸이도 이상하고…. 아무튼 그 후로 이상한 남자들이 연달아 드나들었고. 그런데 10년이나 지난 사건에 웬 관심이지? 아까 말하는 걸 보니 아는 것도 좀 있는 것 같은데…….”
형사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턱을 쓸었다.
“워낙 엽기적인 사건이라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형사님 담당이다 보니 관심이 갔을 뿐입니다. 그럼.”
기하는 여유롭게 대답하며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새벽달이 산꼭대기에서 어슬렁거렸다. 어디선가 임수가 뛰어왔다. 눈치 빠르게 담배를 내밀며 불을 붙였다. 놈도 밤새 조사받아 눈 아래가 어둑했다.
“괜찮으십니까?”
“조서 몇 장만 써주고 왔어. 그나저나 대체 어떤 새끼가 자꾸 신고하는 건지 이번에야말로 색출해야 했어.”
임수가 문을 열어주자 기하는 뒷좌석에 앉아 말했다.
“그런데 너 10년 전 크리스마스날 기억하나? 코카인 집에 갔을 때 별다른 낌새는 없었나?”
임수는 운전대에 앉으며 기억을 밟아갔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충격과 경악으로 남았다.
“야바에게 얘기 듣고 다시 코카인 집에 갔을 때 불이 모두 꺼져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사람들 머리가 깨진 채로 죽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서 코카인이 넋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확실해?”
“물론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
기하는 별다른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명소리를 듣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니…. 대체 누구지? 빗물이 긁어내리는 창문 너머, 먼 거리에서 달동네 끝자락이 보였다. 10년 전 그날, 지금은 체벌용으로 쓰는 창고에서 거세 수술하려던 야매 의사 두 명이 두개골 파열로 죽었다. 모두 코카인의 소행이다. 그때 임수는 귀 한쪽을 잃었고, 자신도 하마터면 실명할 뻔했다. 의사들 시체는 근처 야산에 암매장했다. 아직 공소시효가 15년이 남았다. 코카인에 대한 속박 시간이 그만큼 남았다는 것이다. 차 시동 거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출발했다. 경찰서 주차장을 빠져나갈 무렵 임수가 말했다.
“아, 그런데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애들 소지품 검사 겸해서…그런데 고자 새끼들이 뭐에 씌었는지 눈깔이 뒤집어져서 덤벼드는 바람에…. 헤쉬쉬 그 새끼가 도끼 멱을 따려고 하지 뭐겠습니까. 도끼는 지금 중태에 빠져서…….”
“…….”
“그, 고자 새끼 중 하나가 분명합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색출해서 뿌리 뽑는 게…….”
사장실 문가에 덩치 큰 사내들 4명이 서 있다. 기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놈들은 횡설수설했다. 기하는 사무실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아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리모컨에는 작은 버튼이 정렬돼 있다. 억울하게 머리가 날아간 메사돈의 번호는 5번이다. 바로 옆 6번은 야바의 것이다. 손가락이 미끄러져 잘 못 눌렀다면 녀석의 머리통이 박살 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등줄기에 싸늘한 기온이 긁고 지나갔다. 그것은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공포였다. 기하는 리모컨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핏줄이 곤두선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래서. 리모컨을 눌렀고, 엉뚱한 녀석 머리가 날아갔다는 거냐?”
“하, 하지만, 그 새끼들…….”
말을 매듭짓기도 전에 놈의 턱이 돌아갔다. 틈을 주지 않고 배와 옆구리를 무릎으로 강타했다. 육중한 주먹질에 놈은 숨끊어지는 소릴 내며 비틀거렸다. 다른 놈의 인중에 주먹을 꽂자 이빨이 부러졌다. 기하의 피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절절 끓어올랐다. 바닥에 뻗은 놈의 명치를 찍고 도자기를 대가리에 내던졌다. 요란한 파편과 함께 피가 튀었다. 기하는 널브러진 놈의 팔을 구둣발로 짓이겼다. 부하는 흰자위를 드러내며 절규했다.
“크윽……! 죄, 죄송…크아악……!”
“분명히 말했을 텐데 함부로 누르지 말라고. 리모컨을 눌러야 할 때는 놈들이 도무지 잡지 못할 곳으로 도망쳤을 때뿐이야. 사정권 안에 있는 경우엔 끝까지 쫓아가 끌고 오는 게 너희가 할 일이야. 겨우 고자 새끼들 솜 주먹에 몇 대 맞았다고 겁을 먹고 눌러? 적당히 달랬으면 되잖아. 주둥이는 뒀다 계집년들 빨아 줄 때나 사용하지 말고.”
“죄, 죄송합…크윽……!!”
놈의 머리카락을 잡아 일으켜 주먹을 퍼부었다. 광대뼈와 이빨이 나간 놈이 피를 토하며 기절했다. 그리고 다음 차례, 그다음 차례. 꽤 오랫동안 둔탁한 마찰음과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날카로이 울렸다. 냉정해졌을 무렵 사무실 책장과 소파는 난장판이 됐고, 부하들의 앓는 소리가 난무했다. 기하는 거친 숨을 쉬며 담배를 물었다. 묵묵히 서 있던 임수에게 말했다.
“이 새끼들 적당한 곳에 파묻어. 나머지 새끼들 집합시켜서 정신무장 시키고.”
“예.”
“가수들은…….”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임수는 박살 난 고가의 도자기와 넝마가 된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복도 모퉁이로 사라지는 기하의 뒷모습에 무뚝뚝한 시선을 보냈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 거리는 쌀쌀했다. 간밤에 환락의 시간을 증명하듯 거리에는 술병과 구토물이 곳곳에 널렸다. 불안정한 야바의 발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전신은 두드려맞은 것처럼 마디가 쑤셨다. 아직 머리가 날아가지 않은 걸 보니 기하가 풀려나지 않은 모양이다. 숙소를 탈출한 순간부터 돌아갈 곳은 그곳뿐임을 알고 있다. 메사돈 뒤를 따라가나, 그 지옥에 제 발로 들어가나 매한가지다. 찬 기운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이석의 신발을 빌려 신고 왔다. 그의 지갑에서 2만원도 꺼내왔다. 요망한 것은 냉장고 야채 박스에 잘 넣어두었다.
오는 길에 택시를 탈 뻔했다가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고 버스를 탔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열에 여섯은 택시 강도일 거다. 놈은 밀린 카드 값에 유흥비를 대야 하니 족히 2억은 부를 거다. 그 돈을 마련할 가족도 없을뿐더러 코카인이나 기하도 내줄리 만무했다. 하는 수없이 차이석에게 부탁하려고 해도 그의 전화번호를 모르니 그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열 받은 택시 강도가 야바의 사지를 토막 내서 트렁크에 처박을 거다.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야산에 암매장되고, 운이 좋으면 등산객에게 발견될 수도 있다. 하지만, 트렁크에 잘린 다리와 손가락을 두고 왔으니 죽어서도 편히 눈감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버스도 소매치기범이나 전복사고 위험이 있지만, 사지가 토막 나서 암매장당하는 것보다 나았다.
어느덧 숙소 아파트에 도착했다. 3층을 올려다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벽이 갈라지고 고압전선이 엉킨 건물이 새삼 아찔했다. 탈출 자체는 어렵지 않은 편이다. 위치추적 시스템은 사장실에 있어서 부재를 들키는 시간이 늦춰진다. 진짜 무서운 건 리모컨과 룸메이트의 밀고였다. 아마 지금쯤 코카인도 자신이 도망친 걸 눈치챘을 거다. 기하에게 밀고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자신도 망설임 없이 그러했을 거니까.
저길 오르다가 추락사로 죽는 게 나은지, 현관으로 들어가다 깡패에게 맞아 죽는 게 나은지 고심했다. 고민 끝에 추락사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아파트 계단으로 올라갔다. 창문을 통해 나와서 손바닥만 한 난간에 올라섰다. 일직선으로 보이는 곳에 야바의 방이 보였다. 한발 한발 밟아가자 어느덧 화장실로 통하는 창문에 가까워졌다. 창틀을 잡고 다리를 차올렸다. 끙끙거리며 한발 걸치고 거대한 몸뚱이를 창문으로 구겨 넣었다. 발끝을 들고 착지했다. 이 빠진 타일 바닥이 달크락 신음했다. 욕실에 온 김에 샤워나 하고 갈까 하다가 그냥 눕고만 싶어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순간 야바는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새벽녘 기온이 드리워진 방안, 코카인이 욕실 문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때였다.
“그래. 어딜 다녀온 거지?”
시커먼 누군가 자신의 침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하였다. 빨간 담뱃불이 위에서 아래로 추락했다. 그의 눈동자가 불을 뿜고 사라졌다. 그 순간 기하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가왔다. 야바에게서 뚝 하고 뭔가 떨어졌다. 그게 심장인지 머리통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