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13화 (13/42)

힐러-track11

이석은 본가 앞 골목을 점령한 차들을 보며 혀를 찼다. 매달 한 번씩 친척끼리 의무적으로 모이는 건 조부가 떠나기 전에 남긴 엄명이다. 친족으로 구성된 태령그룹의 단합을 위함이었다. 조부는 지금 일선에서 물러나 전원에서 노년을 즐기는 중이다. 찬 공기에 서린 입김을 헤치고 정원에 들어서자 팔작지붕을 머리에 인 저택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소나무에 둘러싸인 인공 연못을 지나갔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거실 곳곳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차 회장은 차명환 때문에 타들어가는 속내를 숨기고 웃음으로 손님을 상대했다. 호수 아래서 열심히 버둥거리는 백조가 연상돼 이석은 픽 웃었다.

“귀엽다니까….”

동서들에 둘러싸인 이석의 모친도 보였다. 그녀는 세련되지만, 과하지 않은 드레스를 입고 쉴새없이 와인을 마셨다. 공식적인 날만 부여받는 안주인 자리였다. 한 때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그녀는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오늘만큼은 고고한 여왕이어야 한다. 두꺼운 목살에 다이아몬드를 두른 여자가 말했다.

“형님 괜찮으세요?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괜찮아요. 오랜만에 사람이 북적거리니까 기분 좋아서 그래요.”

모친은 거실을 채운 사람들에게 술잔을 높였다. 이석은 그 광경을 무심하게 관조하다가 베란다로 나왔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액정에 찍힌 번호는 차명환의 것이었다. 이석은 미간을 조이며 받아들었다. 녹슨 목소리가 넘어왔다.

[어디냐?]

“본가에 들렸습니다.”

[아, 그래. 오늘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지. 몸만 성했어도 함께 갔을 텐데, 나 안 왔다고 다들 수군거리겠군.]

전혀. 저들에게 넌 이미 저세상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려다가 이석은 가벼운 웃음으로 넘어갔다. 잠깐 조용하던 차명환이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은 안 오는 거냐?]

“뭐가요?”

[그…코카인 말이다.]

결론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석의 눈빛이 싸늘해진 건 스스로도 느끼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이참에 코카인 데려오는 거 나한테 맡기는 건 어떠냐? 너도 내 자리 메우느라 정신없을 거고 거기서 일일이 왔다갔다하는 것도 귀찮을 거 아니냐. 혹시 그쪽에서 외부인에게 노출되는 걸 꺼려서라면 그건 걱정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 지키마.]

야바가 가짜 힐러고 아니고를 떠나 차명환이 그 음색에 매혹된 건 틀림없다. 그의 말대로 요즘 같은 시기에 왕복 네 시간을 길바닥에 버리는 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곤란합니다.”

허락할 수 없다. 녀석이 차명환 앞에서 노래하는 것도, 차명환이 그 매혹적인 노래를 듣는 것도, 모두 자신의 감시하에서만 가능하다. 녀석의 노래를 음미하며 가면 아래 있는 얼굴을 상상하는 사실도 신경 줄을 잡아당기는 일이다. 번화가 한 복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단박에 찾아낼 그 점성 높은 얼굴을…. 이석은 베란다에 기대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코카인은 가게에서도 특별히 관리한다더군요. 지금도 그쪽 사장은 가게 밖으로 돌리는 걸 꺼립니다. 저를 믿고 내준 건데 약속을 어길 순 없죠.”

[그렇다고 니가 매번…….]

“그러지 않아도 회장님이 코카인을 탐탁지 않아 하는데 형님까지 나서면 모양새가 별로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형님은 건강에만 신경 쓰세요.”

다시금 입 다문 차명환이 눌린 소리로 말했다.

[그래…그럼 내일은 오는 거냐?]

“그러죠.”

차명환이 더 징징거리기 전에 통화를 잘랐다. 시선을 돌렸을 때 거실에 있던 성해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눈이 마주치길 기다린 것처럼 입술을 샐쭉거렸다. 차 회장이 만약 자신의 며느릿감을 물망에 올린다면 성해민이 일 순위에 오를 것이다. 성해민은 베란다 밖으로 나오더니 새치름하게 흘겨보았다.

“뭐야? 왜 이렇게 만나기 힘들어? 얼마나 전화했는지 알아? 요트도 걸어잠그고, 모임에 나타나지도 않고, 애들이 모두 궁금해한다구. 혹시 뉴페이스라도 나타난 거야?”

“이것저것 정신없었지.”

“그런데 성재는 왜 안 보여?”

“다른데 들려서 온다더군.”

그녀는 베란다 난간에 기댔다.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너도 본가에는 오랜만이지? 오랜만에 네 방 구경 좀 시켜줘.”

지극히 성적인 신호였다. 성해민은 노골적인 추파를 보내며 와인잔을 머금고 빨간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치아 사이로 젖은 혀가 아른거렸다. 지루한 드레스차림이지만, 그 아래 얼마나 육감적인 몸이 숨었는지 잘 알고 있다. 이석은 그 모든 걸 건조하게 응시했다. 혀로 입안쪽을 쓸며 아직 잔존하는 듯한 야바의 감촉을 더듬었다. 녀석의 입술은 피딱지투성이라 늘 피맛이 난다. 자신에게 입술을 빨릴 때 할딱거리기 바빠서 혀를 어떻게 놀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굴과 혓바닥의 육질만은 그 어떤 작부보다 음탕했고 이성을 놓치게 했다. 문득 미치도록 입속이 타들어갔다. 이석은 비리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수줍음이 많아져서 말야.”

“식구들 때문에 그래? 니가 언제 그런 거 따졌어?”

“좀 더 참아 봐. 성재가 곧 올 거니까.”

“뭐야?! 너 진짜……!”

성해민은 소리쳤다가 지레 놀라 주변을 살폈다.

“음식 준비가 끝났습니다. 모두 안으로 드세요.”

여자 고용인이 거실로 나와 말했다. 안으로 드니 응접실 중간에 식탁과 그 양쪽에 음식이 진열됐다. 15명 남짓한 사람들이 식탁에 모여앉았다. 친족들은 꽉 조이는 드레스와 넥타이에 부담되지 않을 만큼 음식을 담았다. 뒤늦게 도착한 성재 일가도 합류했다. 차 회장은 식탁에 앉아 담소 중이었다. 차 회장의 매부이며 성재의 부친이 말했다.

“사업 확장 과정에서 종업원 대량해고로 여론이 안 좋은 상태고, 주주들도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차 대표도 차후의 행보에 대해…어서 입장표명을 해야 하지 싶습니다.”

“지금 회복 중이야. 주치의가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해서 아직 공식석상에는 자제하는 중이지. 그런데 요즘 홍콩계 펀드가 한국에서 어슬렁거린다던데, 소문 들었나?”

“움직임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계속 주시하는 중인데 걔들이 워낙 공격적이라…….”

그 순간 이석의 곁에 앉은 성재가 힐끗 시선을 보냈다. 이석은 아무렇지 않게 와인을 마셨다. 차 회장이 언급한 홍콩계 펀드란 지금 이 시간에도 호텔방에서 투덜거리고 있을 이석의 브레인들이다. 차 회장은 그 실체를 짐작 못 한 채 태령가의 앞날을 토로했다.

“지겨워.”

그때 혀 꼬부라진 탄식이 분위기를 깨부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이석의 모친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기껏 가족끼리 모여서 할 게 일 얘기밖에 없어요? 여기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남자들뿐이라구요.”

차 회장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으나 이내 온후한 얼굴로 갈아치웠다.

“그런가? 워낙 시간이 빠듯해서 바깥일을 집안에까지 가져올 수밖에 없군. 성재는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마음에 둔 사람은 있고?”

차 회장이 유연하게 화제를 돌리려 했다. 모친이 목젖을 드러내며 깔깔거렸다.

“이것 봐. 꼭 다른 사람 앞에서만 내 말을 들어준다니까? 그 애비나 아들이나 다 똑같아. 이러니까 내가 오늘만을 기다리지.”

그녀는 차 회장과 이석을 노려보며 비틀린 미소를 삼켰다. 이석은 픽 웃으며 고기를 입에 밀어 넣었다. 차 회장은 아내의 도발에도 흔들림없이 말했다.

“술이 과했던 것 같군. 맑은 공기라도 쐬고 오던가 안에 들어가서 쉬지그래.”

“이제 그만 좀 쉬고 싶어요. 온종일 내가 여기서 할 짓이 술 마시는 것밖에 더 있어? 집사도, 도우미 아줌마도, 아무도 나를 상대해 주지 않아. 심지어 조경사조차 내 말을 무시한다구.”

차 회장의 입매가 싸늘해졌다.

“손님 계시는데 무슨 추태야? 취했으면 그만 들어가.”

“당신이나 들어가요. 여기에서 제일 분위기를 망치는 건 당신이니까. 내가 술을 마시지만, 술을 마시는 게 아니야. 숨 쉬는 거야. 숨 쉬려고 술 마시는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아요? 누가 이 꽉 막힌 사람한테 통역 좀 해 줘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곁에 앉은 여자 어깨에 팔을 올렸다. 분위기가 경직되자 친족들은 표정관리에 여념 없었다. 성재가 복화술처럼 중얼거렸다.

“숙모님 말려야 되는 거 아니냐?”

“놔둬. 지루했는데 구경이나 하면서 먹지.”

이석은 육질 좋은 고기를 씹어 넘겼다. 모친은 불투명한 초점을 차 회장에게 고정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당신 어디 아파요?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아, 당신 아들이 죽어가니까 하루하루가 지옥 같겠군요. 딸들이 죽어갈 땐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니, 그래, 우리 애들이 그렇게 수치스러웠어요?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그녀의 언성이 점차 날카로워졌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당신 아들, 걔가 죽을 병 걸린 것도 모두 당신을 대신해 천벌 받은 거라구요. 우리 애들이 저 세상에서 벌준 거야. 이연이가 꿈에 나타나 말했어. 지금 거기에서 명환이 오기만을 눈 시퍼렇게 뜨고 기다린다고!”

폐부를 찔린 차 회장은 얼굴을 미미하게 떨며 짓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끌어내.”

대기 중인 수행원들이 모친을 정중히 일으켰다. 모친은 독기에 충혈된 눈으로 손톱을 휘둘렀다.

“이거 놔! 당신이 죽였어! 당신이 우리 애들 다 잡아먹었어! 우리 애들 기일은 알고나 있어? 애들 잠든 곳에 찾아간 적은 있어?! 넌 사람도 아니야!”

악다구니는 집을 쩡쩡 울렸다. 그 파편은 차 회장에게 달려들어 목을 찌르고 심장을 관통했다. 이석은 핏물이 적당히 밴 고깃덩이를 이빨로 짓씹었다. 모친의 절규는 광란의 아리아를 연상케 했다. 질퍽한 광기로 신경을 흐물거리게 했던 야바의 아리아. 그 순간 기괴한 이명이 신경줄을 자근자근 씹어 발겼다. 이석은 마지막 고기조각을 위에 쑤셔 넣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팔로 식탁 위를 휩쓸었다. 잔과 접시가 박살 나며 요란한 파열음을 갈겼다.

“꺄악……!!”

“으윽……!”

음식물이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이 차려입은 옷을 더럽혔다. 파슬리를 뒤집어쓴 모친은 발악을 멈추었다. 차 회장은 딱딱한 낯빛으로 얼굴에 튄 소스를 닦았다. 불길이 치솟는 눈으로 그 주범을 응시했다. 이석은 태연자약하게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 넘겼다. 용케 넘어지지 않은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요즘 들어 대체 자신이 왜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구는 건지 되새김질하며. 물을 느리게 넘기며 말했다.

“손이 미끄러져서 말이죠. 잘 먹었습니다. 음식 맛있네요.”

그는 싸해진 침묵을 헤집고 유유히 걸어나갔다. 귓구멍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현관문을 열었다. 하루종일 녀석이 머리에 박혔다. 그 어떤 걸 보고 들어도 녀석과 연결됐다. 얼마 전부터 생긴 이명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즐기던 마약조차 싱거워졌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브로커에게 전화했다. 신호음이 가고 잠에 깬 목소리가 들렸다.

“약 좀 구해 봐. 정신 못 차릴 만큼 강한 걸로. 뒤끝이 지저분해서 며칠 동안 기절해도 상관없으니까.”

폰을 끊고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아. 사모님이 아끼시는 건데 이렇게 해 놓으면 쓰나?”

“죄송합니다.”

이석은 소리 나는 쪽으로 쳐다보았다. 콧수염을 단 집사는 낯선 남자를 나무라고 있었다. 집사는 이석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오랜만에 들리셨는데 조금 더 있다 가시지…. 사모님이 부쩍 힘들어하십니다. 전무님이라도 자주자주 들리시면 좋겠습니다.”

이석은 형식적인 미소를 보내고 젊은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뭡니까?”

“아, 처음 보시겠군요. 전무님 분가하시고 나서 들어온 조경사입니다. 손재주가 좋다고 해서 추천받았는데 조금 특이한 청년입니다. 사모님이 말을 붙이셔도 거의 대답도 안 하고 나무만 돌보죠. 마치 나무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요. 허허…….”

이석은 조경사를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남자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돈깨나 있는 중년 여자들이 침 흘릴만한 얼굴과 체격이었다. 음울한 분위기나 꽉 다문 입매는 누군가와 닮은 듯도 했다.

“꼭 사람만 애인 삼으란 법은 없죠.”

이석은 그들을 뒤로하고 본가를 빠져나갔다.

야바는 출근 준비를 하려고 욕실로 직행했다. 오늘은 차이석에게 연락도 없었고 차명환 쪽에서도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별장에 가지 않는 날엔 가게 일을 해야 했다. 한켠에서 머리 말리는 코카인을 힐끗 보았다. 오늘 그의 예약자 명단에 차이석이 있을까? 그동안 대부분 코카인 혼자만 불렀는데 오늘도 그러할까?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물을 틀었다. 아아~~~ 물소리를 벗 삼아 발성 연습을 했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바깥이 시끄러웠다. 코카인을 비롯한 고자 가수들은 경직된 얼굴로 모두 거실에 나와 있고, 깡패 네 명이 온 방을 헤집는 걸 손 놓고 지켜보았다.

“고자 새끼들이 빨리빨리 안 기어나와?!”

각방 하나씩 맡은 똘마니들이 각목으로 벽을 두드렸다. 일부는 청년들 방에 쳐들어가 옷가지며 소지품을 뒤엎었다. 종종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하기도 했는데 저렇게 각목까지 휘두르진 않았다. 예감이 나빴다. 야바는 얼굴의 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굳고 말았다. 시선이 책상으로 향한 건 본능이었다.

“또 어떤 새끼가 짭새 사이트에 접속했어?! 사장님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가셨잖아! 폰이고 컴이고 다 압수야! 씨발놈들이 니들 오늘 다 죽여버릴 줄 알아! 썅!”

뜻밖의 말에 청년들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술렁거렸다. 똘마니 하나가 메사돈의 어깨를 각목으로 내리치자 그는 쓰러져 몸을 떨었다. 헤쉬쉬의 눈초리가 살벌해졌다. 똘마니는 그런 헤쉬쉬의 볼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뭘 봐? 고자 씹쌔꺄. 그러게 허튼짓하면 다 죽인다고 했지? 애들 단속 안 하고 뭐 했냐고.”

깡패는 헤쉬쉬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코카인이 끼어들었다.

“모두 체크하는 거 뻔히 아는데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할 사람이 어딨어요? 우리 중에 한 게 확실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마음 놓고 있다가 뒤통수 얻어맞은 거 아니겠냐? 사장님이 봐 주신다고 니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아구창을 갈아엎기 전에 입 다물어라. 우리 지금 예민하거든?!”

코카인은 모멸감 섞인 말에도 고고함을 유지했다. “넌 가만있어.” 헤쉬쉬는 코카인을 뒤로 물렸다. 깡패는 그 모습을 보며 키들거렸다.

“니네 사귀냐? 하긴, 다리 벌려줄 기집년들도 없을 테니 비슷한 처지끼리 위로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누가 박아주고 깔려 주냐? 웩. 드러운 새끼들.”

얼굴에 칼집 난 깡패는 구토하는 시늉을 했다. 헤쉬쉬는 입술을 비틀었다. 고자 가수들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숫자는 이쪽이 많았지만, 덩치에서부터 주먹놀림까지, 방구석에서 노랫가락이나 훈련하는 가수들과는 대적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턱살이 출렁대는 깡패가 헤쉬쉬 어깨를 치며 다음 방으로 넘어왔다. 이번엔 야바의 방이었다.

“똘아이. 멍청하게 있지 말고 나가! 너도 까불면 사지 멀쩡하게 못 다닐 줄 알아!”

놈은 각목으로 옷장을 헤집고 침대 밑을 들췄다. 야바는 수건을 찢어지도록 움켜쥐었다. 신경은 온통 책상 사이의 공간에만 향했다. 심장은 그악스럽게 날뛰었다. 미용실에서 훔쳐왔던 가위는 매트리스 사이에 숨겨놓아서 발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놈이 책상 쪽으로 걸어가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놈은 서랍을 열고 안에 든 시집을 꺼내더니 책장을 휘리릭 넘겼다.

“꼴에 시집은…….”

“손대지 마!”

야바는 벼락처럼 뛰어갔다. 미리 감추어 놓는다는 게 깜빡하고 말았다. 책에서 수표 8장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동그라미를 확인한 놈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

“이거 뭐야? 이 새끼, 이 돈 어디서 났어?!”

“이리 내!”

야바는 수표를 빼앗아 품에 안았다. 놈도 야바를 밀치고 다시 빼앗으려 했다. 서로 악착같이 붙들다가 수표가 찢어졌다. 그의 키스가 엉망으로 구겨지고 찢어졌다. 머리에 뜨거운 물이 들이쳤다. 야바는 잡히는 대로 쥐어 놈에게 휘둘렀다. 놈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지만, 흉기에 가까운 손으로 야바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한순간 정신을 잃을 만큼 눈앞이 하얘졌고, 머리 가죽이 얼얼했다. 코카인을 비롯한 청년들이 몰려와 질겁했지만 선뜻 말리는 이는 없었다. 깡패가 찢어진 수표를 주워담자 야바는 놈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놈은 야바의 얼굴에 숙련된 주먹질을 퍼부었다. 격렬한 몸싸움에 한데 뒤엉키는 순간이었다. 반쯤 열렸던 서랍이 완전히 빠지고, 검은 공간이 드러났다. 독극물이 보관된 비밀의 장소가……. 야바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때 코카인이 달려와 야바를 짓밟던 깡패를 떼어냈다. 피가 바닥까지 쏟아지는 듯했다.

“그만 해요!”

“저리 가 고자 새꺄! 오늘 너도 안 봐줄 줄 알아!”

놈의 발길질에 코카인은 침대 가로 나뒹굴었다. 헤쉬쉬가 뛰어들어와 코카인을 부축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수표는 공기에 떠돌았다. 그 사이에서 코카인과 시선이 충돌했다. 코카인, 코카인, 사랑하는 친구, 그것만큼이나 증오하는 친구……. 지금 저 책상 서랍 안쪽에다 뭘 감추었는지 알기나 할까…. 깡패의 주먹은 다시 야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했다. 하지만, 중간에 멈추었다.

“씨발. 넌 사장님만 아니면 뒤졌어.”

놈은 이를 갈며 주먹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너 이 새끼! 이거 뭐야?! 어이! 이리 와봐! 빨리!”

누군가 소리쳤다. 깡패는 손을 거두며 튀어 나갔다.

“뭐 하려고 끼어들어서……! 어디 다친 덴 없어?”

헤쉬쉬는 코카인의 입가를 매만지며 다그쳤다. 야바는 그 틈을 타 바닥에 뒹구는 서랍을 들었다. 제자리에 끼워 넣자 비밀의 공간이 사라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뼈가 부서진 듯이 고통스러웠다.

“너 이 새끼 이거 뭐야? 누가 개인 노트북 쓰라고 했어?!”

고함이 들린 곳은 모르핀의 방이었다. 모르핀은 겁에 질린 채 자신을 둘러싼 깡패들 앞에 무릎 꿇었다. 그의 발치에는 빨간색 노트북이 놓였다.

“저, 저… 진짜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경찰서에 신고 한 적 없어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래. 이제 알만 하구만. 전에 튀었던 마리화나 그 새끼하고 한통속이었지?!”

“아니에요! 이건 공동 컴퓨터가 불편해서 산 거예요! 제가 안 했어요!”

“지금 누굴 속이려고……!”

똘마니들은 모르핀에게 발길질을 퍼붓고, 각목을 휘둘렀다. 모르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넝마가 됐다.

“작작 좀 해! 아니라잖아! 개새끼들아!”

그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헤쉬쉬는 의자를 들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기점으로 청년들도 손에 집기를 들더니 일제히 합세했다. 삽시간에 폭동이 일어났다. 기하의 리모컨이 없는 이상 승산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깡패들은 청년들의 습격에 당황했지만, 각목을 휘두르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격렬한 싸움에 집기가 박살 나고 문이 부서졌다. 피가 튀고 뼈 부러지는 파열음이 터졌다. 고자 청년들은 전장에서 단련된 주먹에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선동자 헤쉬쉬 주변을 깡패들이 에워쌌다. 그 중 하나가 각목으로 내리치자 헤쉬쉬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거실 창문으로 날아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이 깨졌다. 헤쉬쉬는 이글대는 눈으로 유리조각을 집어들고 돌진했다. 표적 위에 올라타 주먹질을 쏟아붓고 유리조각을 목에 찔러버렸다.

“개새끼들! 니들도 개돼지 취급당해 봐!”

“크윽……!”

깡패 목덜미에서 피가 푹푹 쏟아졌다. 놈의 동료들이 헤쉬쉬에게 각목을 휘두르고 떼어내도 그는 악착같이 유리조각을 쑤셔 박았다. 아래에 깔린 깡패가 피를 쿨럭 토하며 주머니에서 작은 리모컨을 꺼냈다. 전원을 켜고 손가락으로 누르던 찰나였다. 한쪽에서 떨고 있던 메사돈의 뒷머리가 산산이 조각났다. 검붉은 뇌수와 핏물이 튀어 벽과 바닥을 더럽혔다. 야바는 눈을 홉 뜬 채 가느다란 몸서리쳤다. 누구는 소스라치며 고함을 질렀고, 누구는 눈 가릴 겨를도 없이 숨을 그쳤다. 헤쉬쉬는 창백해진 채 우뚝 섰다.

“씨, 씨발! 큭…헤쉬쉬 저 새끼… 몇 번이야?!”

리모컨을 잘못 누른 깡패는 흑색에 가까운 낯빛으로 소리 질렀다. 헤쉬쉬는 흠칫하며 유리조각을 놓았다. 엉뚱한 사람의 머리가 터지자 나머지 깡패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하에게 있어야 할 리모컨이 똘마니가 들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고, 그걸 알게 된 이상 폭동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뒷머리가 날아간 메사돈은 바닥에서 사지를 경련했다. 핏물은 빠르게 번져 나왔다. 코카인이 달려와 메사돈을 껴안았다. 그리고 격렬한 아리아를 연달아 불렀다. 갈라지고 깨지고, 울음 섞인 그 기적의 목소리가 오늘만은 아름답지 않았다. 피맺힌 노래로 메사돈을 두드려패고 흔들어도 이미 죽음의 강을 건너간 동료를 데려오지 못했다. 피범벅이 된 메사돈 얼굴에 피보다 짙은 눈물이 떨어졌다. 코카인은 싸늘한 주검을 가득 안고서 오열했다.

“안 돼! 윽…흐윽…!…안…돼…!!”

누군가 헛구역질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바닥에는 메사돈의 뇌에서 흘러나온 잔재만이 가득했다.

숙소는 초상집 같은 침묵이 짓눌렀다. 메사돈의 시체는 깡패들이 거둬갔다. 핏물과 뇌수는 고자 가수들이 치웠다. 목을 찔린 깡패는 힐링을 요구했지만, 코카인은 협박과 회유에도 입을 걸어 감갔다. 결국 놈은 병원으로 이송됐다. 코카인은 오늘 예약을 모조리 취소했고 가수들도 제 방문을 잠가버렸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헤쉬쉬는 제방에 틀어박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저 대신 억울하게 죽은 동료에 대한 죄책감보다, 뇌수를 흘리고 쓰러진 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또 그러한 자신을 저주하고 있을 터였다. 야바는 내내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저녁 약은 두 개만 먹어야 했지만, 4알이나 먹어 버렸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와 팔다리가 쩍쩍 녹아내렸다. 코카인은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만 있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그가 침대 아래로 녹아내렸다.

“왜 소리 안 질렀어?”

자신의 물음에 코카인의 떨림이 뚝 그쳤다. 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그가 이불을 끄집어 내렸다. 빨개진 눈동자는 분노와 무기력을 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야바는 바싹 마른 입속을 혀로 축이며 말했다.

“너 말야. 너. 니가 비명을 지르면 사람도 죽일 수 있다면서? 그래서 기하가 너 무서워서 칩을 이식한 거잖아. 우리는 덤으로 박힌 거고. 니가 소리 한 번만 질러주면 깡패 새끼들 몰살시킬 수도 있잖아. 물론 다른 애들도 죽겠지만…….”

코카인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또 저 표정이다. 저런 표정을 하면 저 아름다운 얼굴을 뭉개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된다. 야바는 흐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0년 전 크리스마스 날, 임수가 기하한테 보고 하는 거 들었어. 나 귀 엄청 밝거든. 임수가 그랬어. 너 잡으러 갔을 때 사람들이 모조리 머리가 깨져서 죽어 있었다고……. 그 후에 우리 수술하려던 사람들, 니가 비명 질러서 다 죽였잖아. 두개골 터지고, 뇌수가 벽에 튀어서 악 소리도 못 내고 죽었잖아. 그때 임수도 귀가 망가져서 한쪽 귀가 안 들리는 거고.”

코카인은 까만 눈빛을 섬뜩하게 쏘아올렸다.

“네 망상… 이제 지긋지긋해. 할 일 없으면 가서 몸이나 열심히 씻어. 이왕이면 약물에 절은 그 머릿속도.”

코카인의 모습이 두 개로, 세 개로 분열해갔다. 뼈마저 에이는 크리스마스날 형이 동생마저 버리고 갈 곳은 채우의 집뿐이었다. 야바는 베개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우리 형 그날 너희 집에 갔었지?”

“기억 안 나. 네 형 오지도 않았어.”

“거짓말하지 마. 형은 너희 집에 갔어.”

야바는 그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가시덤불로 매질을 하고, 절절 끓는 물을 아름다운 얼굴에 들이부으며 과거의 밑동을 헤집었다.

“우리 형도 그렇게 죽였어?”

코카인이 숨을 들이키는 게 여기까지 들렸다. 상아 같은 목이 더 창백해졌다.

“기억… 안 나.”

“우리 형 머리도 박살 내 버렸어? 니가 죽인 그 사람들처럼?”

“기억 안 나. 기억 안 난다고 했잖아――――!!”

코카인은 구더기를 뒤집어쓴 양 몸서리쳤다. 그의 절규가 뻗어 나와 창문을 잘게 진동시켰다. 야바의 고막을 쩡 울렸다.

“10년전 일이야. 설사 형이 왔었다 해도 그 많은 사람 중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도 안 나.”

야바는 냉소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그 말 믿어줄게.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렇게 맨정신으로 살 수 없을 테니까.”

야바는 휘청거리며 욕실로 걸어갔다.

“그럼 넌?”

차가운 목소리가 무지근한 다리를 집어 물었다. 흩어지는 눈의 초점을 모았을 때 코카인이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도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어.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었는데 어째서 내 비명을 들어도 멀쩡한 거지?”

그는 가끔 이렇게 허를 찌르는 공격을 한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는 말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느슨한 사고를 모으려 했지만, 약기운이 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왜냐면….” 야바는 입술 거스러미를 뜯으며 눈을 끔뻑거렸다.

“왜냐면…. 난… 이미 네 손에 죽어 있었기 때문이야. 아무래도 시체한테는 네 힘이 안 통하나 봐. 아까 메사돈처럼.”

고고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구경하고 싶지만, 눈앞이 계속 휘청거렸다. 야바는 흐물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모조리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뼈가 에이도록 차가운 물이 살가죽을 때렸다. 기하가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간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일은 오지 않는다는 걸 이 시린 물이 뼛속 깊이 일깨워주었다.

그 순간 거울에서 누군가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창백한 남자였다. 야바는 비명도 내지 못한 채 샤워기를 내던지고 주저앉았다. 뒤집힌 샤워기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머리 위에서 창백한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사지가 부들거렸다.

휘이…휘이……. 툭, 툭……

바람 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동사자가 부르는 거다. 엄마를 탐하고 이석의 누나에게 매료됐던 죽음의 사자가 손짓하는 소리였다. 창백한 남자가 그 증거였다. 그는 동사자의 하수인이었던 거다. 다음 사람을 데려가려고 계속 주변을 맴돌았던 거다. 살덩이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머리는 견딜 수 없이 뜨거웠다. 북소리를 닮은 심장 소리가 전신을 울렸다.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눈을 깜빡이는 백열등, 망가진 타일 벽, 금 간 변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욕실에 딸린 창문이었다. 야바는 물기도 닦지 않고 셔츠와 바지를 껴입었다. 변기를 딛고 올라가 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았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 아래로 아찔한 바닥이 보였다. 여긴 3층이다.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높이였다. 하지만, 이곳보다 동사자의 품이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 창문으로 한 발 빼고, 비곗덩이 몸을 우겨넣었다. 약간 튀어나온 난간을 아슬아슬하게 밟아 갔다. 멀리 아파트 정문에서 두 개의 인영이 아른거렸다. 깡패들도 아까의 충격 때문에 경계가 흐트러진 듯했다.

“씨발. 사장님께는 뭐라고 하지? 하필 엉뚱한 새끼를 누를 게 뭐냐고.”

“잊어버려. 헤쉬쉬 그 새끼는 내일 발라버리든, 파묻든 하고. 기분도 더러운데 술이나 빨러 가자고.”

“저 새끼들 튀기라도 하면?”

“설마 아까 그 꼴을 보고도 도망칠 생각이 들겠냐?”

“씨발. 카악. 퉤!” 아까 리모컨을 눌렀던 놈은 한숨 같은 가래를 뱉어냈다.

휘이……휘이이이……으스스한 바람이 야바의 젖은 머리카락을 때렸다. 동사자가 재촉하는 거다. 발이 미끄러져 몇 번 추락할 뻔했지만, 간신히 땅에 착지했다. 발길이 바빠졌다.

숙소 아파트에서 조금 벗어나자 핏빛의 불을 밝힌 홍등가가 보였다. 약기운은 혈관을 돌아 육신과 정신을 지배했다. 누군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그 힘에 휩쓸려 다리를 움직였다. 복잡한 대로 위에서 차들이 기나긴 영구차 행렬처럼 줄지어갔다. 적막한 도시는 인간의 외피를 뒤집어쓴 생명이 넘쳐났다. 걷고 있지만, 다리가 없고, 사람에겐 마음이 없고, 머리에는 사고가 없고, 도시에는 사람이 없다. 발바닥에 뭔가 박혔는지 둔중한 통각이 느껴졌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마냥 걸었다. 이대로 걷다 보면 다음 계절을 만날지도 모른다. 하아…하아….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찬 공기가 얇은 옷으로 파고들어 심장과 폐를 얼렸다.

“나중에 황홀하게 해줄 테니 잠깐 떨어져 봐. 지금 머리가 지끈거려서 누가 건드리면 팔을 부러트리고 싶으니까.”

“뭐야?!”

어디선가 남녀가 실랑이했다. 야바는 콘크리트벽에 널린 불빛을 깔고 앉았다. 얼음장 같은 바닥이 감각이 날아간 피부에 파고들었다. 네온사인이 핑핑 돌아가고, 우뚝 솟구친 건물이 야바를 향해 무너졌다. 턱에 가득 찬 숨을 뱉었다. 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 힘겹게 고개 들었을 때 서류가방을 든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그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어이, 괜찮아? 오늘처럼 추운 날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고…….”

야바는 남자의 기름진 동공을 빤히 보았다. 우리에서 탈출한 돼지한테까지 손 뻗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비루한 인생인가 보다. 너도 정신병자 취급받는 왕따야? 너도 추악한 질투심을 하루의 양식 삼아 살아가고 있어? 책상 서랍 속에 독극물을 숨겨두었어? 그걸 먹은 친구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날, 그 사람이 나를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제 기억났다. 코카인의 물에 독극물을 넣기 시작한 건 차이석을 만나고부터였다.

“…토…할 거 같아…….”

“뭐?”

남자는 귀를 가져와 재차 물었다. 혓바닥은 녹아 없어진 양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 야바는 숨을 할딱이다가 희미한 음성을 남자의 귓전에 흘려주었다.

“토할 거 같아…….”

당장 꽁무니를 빼리란 예상을 엎고 남자는 눈을 번들거리며 야바의 어깨를 안았다.

“하아…못 참겠는걸. 이런, 몸이 얼음장이네. 잘 곳이 없으면 나하고…….”

“손 치워.”

이 대기보다 단호하고 음습한 목소리였다. 야바는 무거운 시선으로 소리 난 곳을 더듬거렸다. 휘양한 술집 앞에서 불빛을 등진 남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점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계절에서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시간의 경계처럼 그와 자신이 있는 곳은 같은 공간이지만, 전혀 다른 것 같았다. 이 퇴폐적인 도시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였다.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도록 만든 사람이, 차이석이…….

“손 치우라고 하잖아.”

그는 불안정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함께 있던 여자의 실루엣도 음란하게 비틀거렸다. 안경 남자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뭐야? 당신이 뭔데…참견이야? 상관 말고 저리 가.”

“이럴 땐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야.”

그는 안경 남자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찍어눌렀다. 안경은 훌쩍 큰 남자의 기에 눌려 뒷걸음질치고는 체, 하며 사라졌다. 그의 눈길이 발에서부터 위로 훑고 올라와 야바의 눈동자에 멈추었다. 일순 날 세운 검은 눈이 사납게 빛났다. 투창처럼 꿰뚫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예고 없이 손을 들었다. 큼직한 손바닥이 야바의 눈과 코언저리를 가렸다. 항상 가면을 벗을 때만 하는 괴이한 행동이었다. 이 손바닥 너머에서 그는 어떤 눈을 하고 있을까. 이윽고 뭔가를 확인한 듯 천천히 손이 내려갔고, 무표정한 얼굴이 시야를 가득 찼다. 그는 곁에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넌 그만 가 봐.”

“뭐?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알면서 묻지 마.”

그는 비린내 나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기막혀! 지금 나 갖고 놀아? 설마 얘 때문에 그러는 거야?”

“가. 지금은 니가 가는 게 맞아.”

“왜? 왜 내가 가야 하는데?!”

그는 웃음기 없는 음성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이 녀석 맨발이잖아.”

여자는 입술을 바르르 떨더니 도로에 세운 차에 올라탔다. 빨간 차가 연기를 게워내며 사라졌다. 뒤이어 은회색 차가 정차했다. 야바가 도로에서 눈길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그는 야바를 생전 처음 보는 눈을 하면서도 또 아닌 눈빛을 했다. 그가 손을 뻗어왔다. 길쭉한 손가락이 야바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눈을 내려뜬 채 야바의 눈동자 밑면을 훑었다.

“길을 잃었구나.”

야바는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맥박은 점차 빨라졌지만, 턱에 닿은 부드러운 운율과 감촉에 머리가 뭉근해졌다. 턱을 간질이던 손이 거두어졌다. 그는 검은색 하프코트의 허리 벨트를 풀고, 앞섶 지퍼를 내리고, 팔에서 벗겨 냈다. 술과 약에 찌든 동작은 칼처럼 정갈했다. 코트가 야바를 감싸고, 옷에 묻은 체온이 등과 어깨로 옮겨왔다. 깊고 어두운 바다를 닮은 담배 향도 스며들었다. 그는 코트로 야바의 코만 남긴 채 둘둘 감쌌다. 한번에 안아 올려 저벅저벅 걸어갔다. 옷 틈으로 간신히 보이는 야바의 턱선을 혀로 문지르고, 귓불을 빨았다. 끈적한 여운의 끝자락에서 낮은 음성이 스몄다.

“우리 집에 가자. 나비야.”

그렇게 품에 안긴 채 은회색 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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