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12화 (12/42)

힐러-track 10

샤워하고 돌아오니 부재중 전화가 7통이나 와 있다. 차명환 안사람의 번호였다. 아직 8시도 안 된 시간이라 의아했다. 이석은 폰에 찍힌 번호를 무심하게 보며 샤워가운을 여몄다. 냉장고로 가 생수병을 꺼냈다. 이렇게 아침 일찍 눈 뜬 건 드문 일이다. 머리는 구름이 낀 것처럼 혼탁했고 입속은 내내 타는 듯했다. 두통의 행방은 묘연했지만, 정체 모를 현상이 생겼다. 물을 들이키고 약을 흡입해도 물러나지 않는 갈증에 결국 느지막이 일어나려던 계획을 망쳤다. 그때 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도련님 저예요. 이제 일어나셨나 봐요.]

“어쩐 일입니까?”

[저기…다른 게 아니라 그이가 지금 코카인씨를 불러달라고 하는데 어쩌죠?]

이석은 눈썹을 접었다.

“깨어났습니까?”

[네. 새벽에야 정신을 차렸어요. 그때부터 계속 저러는데 아무리 진정시켜도 소용이 없어서…….]

그대로 지옥문으로 걸어간다면 가장 화려한 장례식을 열어줄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끈질기고 구차한 목숨에 혀를 찼다. 휴대폰 너머에서 차명환 목소리가 팔딱거렸다.

[바꿔봐! 바꿔 보라니까?! 답답하긴! 내가 말한다고!]

차명환의 언성이 높아지자 그녀는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이른 시간인 건 알지만, 지금 당장 코카인 씨를 불러달라고 해서…. 오후에라도 오실 수 있는 거죠?]

그 순간 이석의 눈빛에 날카로워졌다. 그는 휴대폰을 어깨와 귀에 끼운 채 생수 목을 비틀었다.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어서 못 데려갑니다. 내일까지 견디라고 하세요. 나도 참는 중이니…….”

그는 말을 흐렸다. 참고 있다니. 자신이 뱉고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위화감까지 느꼈다.

[도련님 바쁘시니까 우리 쪽에서 차를 보내면 안 될까요? 코카인 씨가 어디에 사시는지만 알려주시면 돼요.]

“내일 데려가겠다고 하세요. 이제 아침 식사나 할 생각인데 그만 끊을까요?”

[아, 죄송해요. 저이한테는 제가 말해 볼게요. 그럼 식사하세요.]

이석은 날을 세운 눈으로 폰을 식탁에 던졌다.

“뭐래?”

차명환은 퀭한 눈으로 물었다. 아내가 머뭇거리자 소리 질렀다.

“그러게 나 바꾸라고 했잖아! 다시 전화 돌려!”

아내가 대답했다.

“오늘 도련님이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대요. 내일 꼭 데리고 온댔으니 좀 기다려봐요.”

“답답하긴. 그럼 가게 위치나 전화번호라도 물어봐야 할 거 아냐?”

“도련님도 아는 사람 통해서 알아낸 건데 조심스러우신 거겠죠. 당신 지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무슨 노래를 듣겠다는 거에요?”

그녀는 막무가내 고집을 받아주고는 있지만, 의식이 깨어나서 달라진 남편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명환은 입술을 씹으며 눈을 굴렸다. 그러다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잠깐. 전에 성진 건설 김 회장도 간경화 고쳤다고 했지? 그럼 가게 연락처도 알 거 아냐?”

늦은 오후 담배연기 자욱한 레지던스 호텔 방이다. 채광이 잘 드는 창가에서 다섯 명의 남자가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다. 테이블에는 서류로 빈틈이 없었고 지저분한 커피잔과 담배가 꽉 찬 재떨이가 테이블 모서리에 아슬하게 놓여있다. 상석에 앉은 이석은 느슨하게 풀어헤친 넥타이와 셔츠를 팔뚝까지 걷고서 브리핑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외국계 유명 투자사에서 이름 날리던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로 구성되었다. 학벌은 별 볼일 없지만, 피 튀기는 세계에서 실전으로 다져진 재야의 고수들이다. 그간 이석이 눈여겨봤던 인재이며 태령그룹을 치고 들 최정예 부대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호텔방에서 밤새도록 밀실회담을 한다. 덕분에 남자끼리 그룹섹스를 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물론 이들 중에 지저분한 소문을 즐기는 사람은 이석뿐이었다. 무태 안경을 낀 남자가 말했다. 그는 잔머리가 잘 돌아가고 상환판단이 빠르다.

“기관투자자들은 차명환의 대표이사 선임 이후 태령의 행보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차명환의 업적을 위해 반도체를 무리하게 인수했지만 여러 악재가 겹쳐서 태령의 주식은 저평가된 상태입니다. 게다가 분식회계나 탈세 의혹이 나돌아 대선을 앞둔 정권이 여론을 의식하고 어마어마한 추징금을 물릴지도 모르죠. 차 회장님이 콩밥을 좋아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멋대가리 없는 농담에 모두 피식 웃었다. 주먹질이 어울릴 법한 남자가 말을 받았다.

“사업 확장 과정에서 태령이 대규모 담보 대출로 부채비율이 높아지면서 주가가 하락했습니다. 아무래도 몇 년 전 사모펀드 유입으로 인한 타격이 있었으니까요. 우선 외국 펀드 측에 접촉해야겠습니다. 걔들 눈치가 귀신같아서 전무님이 등장하면 주가에 호재로 작용할 수 있어서 안 내놓고 버틸 수도 있거든요.”

이석은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다.

“한번 접촉해 봐. 주식양도 계약서도 받아낼 수 있으면 받아보고. 차 사장이 죽으면 차 회장도 은퇴를 미룰 거야. 그럼 오히려 주주들은 환영하겠지. 태령 신뢰도는 더 높아질 것이고, 차명환이 총수자리에 앉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프다고.”

“현실적으로 적대적 M&A가 성공한 사례는 극히 드뭅니다. 우리가 치고 들어간다 해도 차 회장도 넋 놓고 당하지만은 않겠죠.”

“그러니까 너희를 고용한 거야. 확률적으로 극히 드문 것까지 모든 변수를 산출하고 대응책도 검토해 봐. 만에 하나 차명환이 무덤을 박차고 나오는 것까지도.”

이석이 만든 국내 회사와 홍콩계 펀드의 탈을 쓴 자신의 일개미들로 적대적 M&A를 구상하고 있다. 물론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먹잇감은 태령그룹이다. 4명의 사내는 한숨을 내쉬거나 고개를 내저었다.

“숨 좀 쉬게 해주시죠. 애들 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속옷이라도 갈아입었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축배를 들 때까지 참아. 그땐 진짜 황홀하게 만들어 줄 테니.”

이석은 노트북에서 USB를 빼내 금색 케이스에 넣었다.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뜬 건 파라디소 사장이름이었다. 저음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차 전무님. 파라디소입니다. 차명환씨가 조금 전 야바를 데려간다고 사람을 보냈는데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거긴 어떻게 알아냈답니까?”

[차 전무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건 나중에 따지고 일단 돌려보내요. 오늘은 안 간다고 했으니까.”

[아, 야바는 벌써 보냈습니다. 대신 애 혼자 보내기 껄끄러워서 임수를 대동했습니다.]

그 순간 이석의 뒷골이 쭉 당겼다. 그는 담배를 끼운 손으로 눈썹을 문지르며 뇌까렸다.

“누가 보내라고 했습니까?”

상대는 침묵했다.

“당신에게 주는 지분에는 고양이 값도 포함된 겁니다. 생각이 많아서 장점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병신 같은 짓으로 나를 놀라게 할 줄은 몰랐군요.”

사장의 숨소리가 경직했음이 적나라케 느껴졌다. 이석은 한쪽 눈썹을 곤두세웠다.

“입이 뚫렸으면 사과든 변명이든 시늉이라도 해봐요. 그래야 나도 기분을 풀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닙니까.”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쪽에서 워낙 막무가내여서…….]

그는 싸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지루한 사과를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맞은 편 일개미들이 긴장 어린 표정을 했다. 이석은 서류를 들며 말했다.

“계속해.”

“아, 예. 태령은 현재 공장부지 대부분을 부동산 담보로 걸어놨고…….”

브리핑도 활자도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석은 뒷목을 주무르며 이를 따닥따닥 부딪쳤다. 차명환이 깨어난 사실보다 야바가 혼자 그곳에 갔다는 사실이 손톱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렸다. 그는 담배를 비벼껐다. 소파에 널린 재킷을 쥐고 일어났다.

“오늘은 그만 하지. 나머지는 메일로 보내.”

그들은 어리둥절한 낯빛으로 줄줄이 일어났다. 방에서 나온 이석은 곧바로 주차장으로 가 차에 올라탔다. 끼이익…! 타이어가 바닥을 사납게 긁으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야바는 임수에게 끌려 얼결에 별장에 당도했다. 초호화 병실을 방불케 하는 방에는 다 죽어가는 병자와 암 말기환자를 남편으로 둔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웨이브 진 머리는 단정하게 올렸고 요란하지 않지만, 명품 옷으로 전신을 감았다. 간병인이 따로 있기에 저런 옷차림도 가능한 것이다. 야바는 붉은색 벨벳 가면을 긁적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석이는?”

“이석이가 네 친구냐? 나이도 한참 어린 게 어디 이름을 함부로 불러? 아, 됐으니까 노래나 해봐.”

“안 왔어?”

“오늘 바빠서 못 와.”

야바는 관절 없는 사람처럼 걸어갔다. 뱃살이 접히거나 말거나 의자에 축 늘어졌다. 이석이 주로 앉는 의자였다. 엔틱 의자는 육중한 몸무게를 못 견디겠다고 신음했다. 차명환은 밤새 뭔가에 시달린 듯 눈두덩이 푹 꺼졌고 눈알도 충혈돼 있었다. 핏기없는 얼굴은 전보다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죽음에 쫓기는 눈이라기보다 다른 초조함이 느껴졌다. 가래 끓는 숨소리를 내며 그가 말했다.

“노래 안 해?”

“숨 좀 돌리게 기다려 봐.”

“오늘은 뭘 할 거지? 그땐 예고도 없이 불러서 놀랐다구.”

“모짜르트 진혼곡, 슈베르트 마왕.”

“너는 왜 부르는 노래가 전부 그따위야? 죽거나 미치거나.”

“나는 이따위 노래가 좋아. 듣기 싫으면 귀 막아.”

“아, 좋아.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빨리해.”

명환의 아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이렇게 갑자기 불러서 죄송해요. 코카인씨 다녀간 이후로 푹 잤어요. 매일 밤마다 진통제 없이는 한숨도 못 잤는데…. 물론 조금 지나치게 많이 잤지만요.”

“너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 아니, 말 나온 김에 앞으로 이 시간에는 들어오지 마.”

차명환이 부인에게 눈총을 보냈다. 야바는 이맛살을 구겼다.

“미쳤어? 너하고 단둘이 남아서 노래 불러주게? 넌 왜 항상 네 생각만 하는데?”

“난 쟤만 보면 답답해. 병이 덧날 거 같다구. 빨리 나가.”

여자는 남편의 타박에 수치심을 느끼면서 단호히 돌아서지도 못했다. 차명환은 울먹거리는 아내를 애정 한 자락 담지 않은 눈으로 밀어냈다. 야바는 차명환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

“지금 나한테 한 소리냐?”

“일일이 주워주기 귀찮아. 찔리는 사람이 알아서 챙겨가.”

재활용도 못할 쓰레기가 콧잔등을 씰룩거리지만, 전과는 달리 눈빛은 오만함이 한풀 꺾여 있었다. 차명환의 성화에 야바는 한숨을 내리 쉬며 상체만 일으켰다. 일어서기도 귀찮았다. 오늘 담아온 노래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d 단조, 진노의 나날’과 슈베르트의 ‘마왕’이었다. 하나는 합창곡에 하나는 테너 곡이지만, 파라디소에서는 더러 솔로나 소프라노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물론 코카인을 위한 편곡이었다. 야바는 앉은 채로 레퀴엠을 끄집어냈다.

Dies irae! dies illa Solvet saeclum in favilla!

진노의 날! 슬픔의 날! 모든 만물 재가 되리라!

Quando judex est venturus Cuncta stricte discussurus

심판하기 위해 내려올 때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게 되리라!

선창이 이어지고 화음이 끊김 없이 따라가야 해서 혼자 부르기 벅찼지만, 상관없었다. 맥아리 없는 음성이 쨍쨍 공간에 퍼졌다. 대충 뱉었던 목소리에 힘을 주고 성의없는 기교를 덧대었다. 노래를 시작하자 차명환은 말과 달리 표정을 풀고 베개에 기댔다. 지금껏 산소 없이 견딘 사람처럼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시종일관 달라붙는 퀭한 눈이 불쾌했다. 노랫말을 단물 빠진 껌처럼 질겅거렸다. 정신이 흩어져, 좀처럼 노래의 세계에 접어들지도 않았다. 오늘 차이석은 안 올 모양이다. 이렇게 혼자 두면 위험하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다. 그가 없는 사이 자신이 어떻게 입을 놀려서 이 음모를 누설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절대 감시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마왕까지 끝마치고 야바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었다.

“야! 벌써 가? 한 곡 더해!”

“싫어. 앞으로 두 곡만 할 거야. 그렇게 알아.”

거기엔 엄연한 규칙이 있다. 음낭은 두 개뿐이고 노래를 더 담으면 터지고 말 거다. 나중에 불알을 담으려면 소중히 다뤄야 했다. 그건 차이석이라고 해도 안 될 말이었다. 차명환이 뭐라 하든 무시하고 문고리를 잡을 때였다. 바깥에서 더 강한 힘이 문을 밀고 왔다. 들어온 건 차이석이었다. 야바의 심장이 다급해졌다. 겨울 냄새를 잔뜩 묻힌 그의 어깨가 거친 호흡에 들썩였고, 말끔하게 정리했을 머리카락은 약간 흐트러져 있다. 그를 감싼 공기보다 음산한 눈으로 야바를 응시했다. 이어 정제되지 않은 시선을 차명환에게 겨누었다. 목을 물어뜯긴 것처럼 차명환은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공기는 한순간에 경직됐다.

“아니, 니가 바쁘다고 해서 괜히 신경 쓰일까 봐…….”

“그래서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습니까.”

차이석은 입술을 끌어당겼지만, 그건 단순한 근육의 움직임일 뿐이었다. 웃음에서만은 인색하지 않던 그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야바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하아…. 가면을 벗고 열 오른 볼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늘어진 볼살이 출렁거렸다. 거울에 비친 돼지 얼굴을 붉은 벨벳 가면으로 덮고 리본을 동여맸다. 가면이 이마의 상처를 건드려 따끔거렸다. 매일 반강제로 코카인의 노래를 듣는데도 상처는 좀처럼 낫지 않았다. 차라리 그쪽이 나았다. 뒷주머니에 넣은 폰이 볼기짝을 두드렸다. 임수가 말했다.

[끝났으면 나오지 않고 뭐 해?]

“갈 거야.”

통화를 끊고 밖으로 나갔다. 끈적한 담배냄새가 퍼졌다. 냄새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을 때 차이석이 복도 벽에 기댄 채 형수와 마주 서 있었다. 그녀는 말기 암 환자를 남편으로 둔 여자 같지 않게 싱그러운 젊음이 있었다. 그녀는 높이 솟은 차이석의 콧날과 담배를 문 입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눈빛이 적어도 시동생을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자가 욕실 문에 서 있는 야바를 발견하고 조금 전 끈끈한 시선을 지웠다. 뒤이어 차이석의 시선도 향했다. 야바는 그들을 지나쳤다.

“코카인 씨 차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지난번엔 그냥 가시는 바람에 제대로 얘기도 못 나눴죠?”

“필요 없어.”

“이대로 보내드리기 불편해서 그래요. 시간 많이 뺏지 않을 거니까….”

야바는 가시 돋친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차이석이 야바의 어깨를 손으로 감싼 채 형수에게 말했다.

“먼저 가세요. 잠깐 둘이 얘기 좀 하고 가겠습니다.”

어깨에 신경이 집중해서 내려앉을 듯이 뻐근했다. “그럼 아래층으로 내려오세요.” 여자는 이석의 손길이 닿은 곳을 힐끔 보며 계단을 내려갔다. 차이석은 야바를 복도 끝으로 끌고 갔다. 허리를 숙이고 낮게 말했다.

“마음대로 여기에 오지 마.”

“기하가 보내서 온 거야.”

“그 부분은 좀 더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겠군. 나를 통해서가 아니면 여기에 얼씬도 하지 마.”

“나 하고 싶은대로 하랬잖아. 왜 말을 바꾸는 거야?”

“그건 내 동의하에서만이야.”

야바의 눈초리에 날이 섰다.

“내가 아무리 오고 싶어도 니가 안 된다고 하면 못 오는 거야?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니가 오라고 하면 와야 하는 거야?”

날렵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에 다시 오고 싶어할 줄은 몰랐는데.”

“못 올 것도 없잖아. 차명환이 찌질하게 굴 때마다 밟아주는 게 재밌어졌어.”

차이석은 차가운 얼굴로 시선을 부딪쳐 왔다. 검은 눈동자에 붉은빛이 번뜩이는 착각이 들었다.

“코카인은 자존심이 강하지만, 일에 관해선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는 녀석이야.”

“넌 지금 코카인이고.” 그는 낮게 덧붙였다.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야바의 손톱을 뽑고, 머리 가죽을 벗기고, 고막에 뜨거운 물을 들이쳤다. 그날 아침 코카인이 노래를 불러줬던 사람이 그라는 걸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앞섶이 벌어진 그의 외투를 노려보았다. 자다가 뛰쳐나온 사람처럼 셔츠와 재킷이 흐트러져 있었다.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목소리가 꽉 막혔다.

“너에 대한 권리가 있는 사람.”

그는 오만하고 단호했다. 야바의 눈이 깊어졌다. 물건처럼 거래된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연극이 끝나면 기하는 거액을 챙길 거다. 차이석은 코카인을 지키고 더 거대한 전리품을 쟁취할 거다. 자신이 챙길 건 자존심뿐이었다. 그걸 마지막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그만둘 거야. 딴사람 알아봐.”

곧바로 그를 지나쳐갔다. “이봐, 이봐….” 그의 손이 야바를 잡아채고 포악하게 벽에 밀어붙였다. 가면 볼에 붙은 깃털이 파르르 몸서리쳤다. 형형한 눈빛이 충돌해왔다.

“니가 감정적인 건 알지만, 적당히 할 때나 깜찍한 거야. 내가 됐다고 하기 전까지 꿈도 꾸지 마.”

“이거 놔!”

“조용히 해. 여긴 생각보다 귀가 많아. 지금 우리 얘기도 이미 누군가 들었을지 모른다고.”

이상했다. 그는 뭔가에 굶주린 야만인의 눈이었다. 이게 본 모습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야만스럽고 악랄한 얼굴이었다. 야바는 섬뜩한 손을 뿌리치고 걸어갔다. 그 순간 리본이 죽 당겨지더니 가면이 얼굴을 벗어났다. 야바는 본능적으로 가면을 잡은 채 굳고 말았다. 자세가 흐트러진 야바의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 동시에 번쩍 몸이 떠올랐다. 웃음소리가 어깨에 흩어지고 낯선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간단해. 내 말만 잘 들으면 누구도 다치지 않아.”

“차 마시고 가야지.” 그는 야바의 귓불을 꽉 깨물었다. 그대로 들춰 안은 채 계단으로 다리를 뻗었다.

“13살 보이소프라노 같아요. 그런 목소리는 어떻게 나오죠?”

쪼그라든 음낭에서. 라고 하면 여자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그 뒤 응접실로 끌려와 동그란 테이블에 억지로 앉혀졌다. 세 명이 자리한 거실은 온통 레이스와 지루한 그림으로 둘러싸였고, 테이블에까지 레이스가 덕지덕지 달렸다. 벨벳 가면이 볼살에 부대끼자 야바는 그 틈으로 손가락을 욱여넣고 긁었다. 더운 건 질색이다. 이렇게 따뜻한 공기에서 벌레가 부화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코카인 씨 노래 들었을 때 솔직히…소름 끼쳤어요. 저도 오페라를 자주 보러 다녔지만, 그런 목소리는 처음이에요. 아, 우리 그이가 음악을 무척 좋아해요. 처음 만난 것도 오페라 하우스였죠. 밤의 여왕 아리아를 제대로 부르는 건 세계에서도 몇 안 된다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그날은 저도 잠이 안 올 정도였어요.”

그녀는 입을 가리며 소리 내 웃었다. 야바가 별 반응 없자 그녀는 웃음기를 물렸다. 차이석은 손가락에 턱을 괸 채 뱀 허물처럼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헐렁한 자세는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했고 조금 전 그 얼굴에는 감쪽같이 친절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곧이어 중년 여자가 커피를 앞에 놓았다. 저런 쟁반만 들고 있지 않다면 여염집 안주인다운 기품이 있었다. 가정부는 야바의 가면을 흘끔거리며 표정 관리에 여념 없었다. 그건 형수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아, 좋은 커피인데 코카인 씨도 한번 마셔보세요.”

“됐어.”

“혹시 커피를 싫어하시나요? 그래도 한 번 맛보세요. 정말 부드러워서….”

“됐다고 했잖아.”

“시중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커피에요. 아무리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히 반하고 말걸요? 그렇죠? 도련님.”

여자는 예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벌써 다섯 번째다. 여자는 내내 차이석과 눈을 맞추며 웃음을 흘렸다. 왜 사람들은 이석을 그렇게 쳐다볼까? 쳐다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 혹시 자신도 저 여자처럼 차이석을 쳐다봤을까? 야바는 싸늘하게 물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차이석에게 박혔던 여자의 시선이 되돌아왔다.

“……네?”

“평생 커피는 입에도 안 댄 사람이 고작 이거 한 잔에 반할 거라는 거야? 만약에 내가 이 커피 마시고도 마음이 안 바뀌면 어쩔 건데?”

그러니까 이석이 그만 쳐다봐. 눈알 쑤셔버리기 전에. 야바는 그녀가 손수 골랐을 레이스를 쥐어뜯으며 시선을 올려붙였다. 바짝 경직된 여자의 얼굴이 볼만했다. 순진한 눈망울이 불순한 감정을 긁었다. 옆에서 차이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

“아,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제가 괜한 걸 강요했죠?”

대인배인 척, 모든 걸 수용하는 척, 가증 떠는 모습이 누군가와 겹쳐졌다. 구역질이 나왔다. 차이석은 커피잔을 든 채 소파에 기대고는 이쪽으로 시선을 옮겨왔다.

“너희들 성대 관리 때문에 담배나 카페인은 입에도 안 댄다던데, 혹시 그것 때문인가?”

야바는 커피 물만 노려보았다. 그의 말대로 기하의 강요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까 가정부의 눈초리가 기분 나빴다. 분명 침이라도 뱉었거나 신고 있는 스타킹을 담갔다 뺐을지도 모른다. 차이석은 한동안 묘한 눈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는 가정부에게 배즙이나 생강차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가정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야바 앞에 있는 커피를 치웠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커피만 홀짝대던 여자가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런 질문 실례인지 모르지만, 어떻게 하다가 그런 일을 하게 됐는지 물어도 될까요? 성악은 어릴때부터 레슨받은 건가요?”

야바는 레이스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뜯으며 타자기 같이 억양 없이 말했다.

“14살에 사장한테 이유도 없이 끌려왔어.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에 감금당하고 매일 같이 성악 연습을 했어. 레슨 선생은 120킬로쯤 나가는 노처녀인데 뺨 때리기, 눈 밑 꼬집기, 쇠 자로 발바닥 때리기로 모자란 성욕을 채웠어. 그날 연습 분량을 못 따라오거나, 숙제로 내준 노래를 마스터 못 하면 그 여자가 기하한테 일러. 그 애들은 일주일 동안 창고에 가둬놓고 물도 안 줬어. 거기 갇힌 애들은 배고파서 쥐도 잡아먹고, 바퀴벌레도 먹고, 목 마르면 자기가 싼 오줌도 받아먹으며 목숨을 연명했어. 하지만, 대부분 시체로 발견되거나 풀려나도 알아서 자살했어. 겨우 살아남은 애들은 그다음부터 죽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연습해. 그렇게 해서 나온 목소리야.”

“…….”

“…….”

“…….”

차이석도, 가정부와 형수란 여자도 일제히 부동자세로 굳었다. 안색이 하얘진 형수는 간신히 표정을 수습하고 불편한 침묵 풀었다.

“그, 그랬군요…. 아, 커피 향이 좋네요. 미세스 문.”

그녀는 커피잔을 코에 갖다 대며 킁킁거렸다. 가정부도 쭈뼛쭈뼛 대답했다.

“방금 내린 거예요. 사모님. 전에 이 장관님이 보내신 건데 한번 내봤어요.”

이석은 테이블 위에 상체를 반쯤 걸친 채 머리를 괴었다. 흥미로움을 담은 눈빛이 정면돌파해 왔다.

“너는 어때?”

“뭐가?”

“그 창고에 가봤나?”

야바는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응.”

그의 눈에 적나라한 빛이 반짝 지나갔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그는 짙은 눈동자를 깊이 밀어붙였다.

“자세히 얘기해 봐. 거기에서 있었던 일.”

시선 아래 있는 그를 빤히 보며 야바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얘기가 왜 듣고 싶은 거야? 변태같이…….”

“어서 해봐. 나 말고도 모두 듣고 싶어할 거야.”

그의 시선이 형수와 가정부를 죽 훑었다.

“도, 도련님 저희는 그런 얘기는…….”

그녀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이석을 만류했다. 고운 손이 그의 팔에 닿았다. 120킬로의 노처녀 레슨 선생은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으로 성욕을 풀었다. 암환자 남편을 둔 여자는 어떻게 성욕을 풀었을까? 야바는 눈을 떨어트리고 손등과 볼을 긁었다. 이석은 포크로 과일 접시를 뒤적거리더니 멜론을 찍어 내밀었다.

“그러다 피부 다 짓무르겠군. 손이 허전하면 이걸 들어.”

야바는 멜론을 받아들고 한입 베물었다. 입속에 달큼한 향과 뭔가 묘한 냄새가 뒤섞였다. 물컹한 것도 씹혔다. 입에서 떼어내며 살피는 순간이었다. 몸통이 반만 남은 벌레가 멜론에 박혀 꿈틀대고 있었다.

“으으…!”

야바는 벌떡 일어나 손등으로 혀를 닦아냈다. 갑작스러운 반동에 테이블이 흔들렸다. 과일 접시가 뒤집히고 커피잔이 휘청거려 여자의 명품 옷을 덮쳤다.

“꺄악……!”

여자는 벌떡 일어나 치마를 털며 소란을 떨었다. 가정부도 형수의 옷을 털어주었다. 덩달아 커피 세례 당한 차이석은 그대로 굳었고, 옷과 머리카락에서 커피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야바는 피부를 기어다니는 벌레를 털며 귀를 때렸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는 벌레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살가죽이 말도 못하게 따끔거렸다. 샤워시간을 놓쳤기 때문이다. 따뜻한 공기까지 더했으니 알의 부화시기까지 앞당긴 거다. 찬 바람이 필요했다. 야바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쾅! 문 닫는 소리에 응접실 전체가 진동했다. 봉변을 당한 그녀는 제대로 된 언어를 만들지 못했다.

“왜, 왜……. 이게…무슨…….”

이석은 머리카락과 어깨에 묻은 커피 얼룩을 털었다. 그리고 픽 웃었다.

야바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내부를 울렸다. 얼굴에 열이 치달아 가면까지 녹일 듯했다. 뒷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진동했다. 임수가 재촉하는 거다. 시간은 벌써 8시30분을 향해갔다. 현관 문고리를 돌리려는데 누군가의 팔이 쭉 뻗어 나와 입 벌린 문을 닫아버렸다. 뒤에서 쏟아지는 거친 숨이 가면 깃털을 흔들었다.

“예고 없이 튀어 나가지 좀 마.”

야바의 몸이 돌아가고 차이석이 보였다. 헐겁게 맨 넥타이 사이로 목근육이 꿈틀거렸다. 차이석의 머리카락은 커피 물에 젖었고, 흰색 셔츠에도 개 발자국 같은 얼룩이 졌다. 그는 깨끗한 셔츠 소매를 올려 손목시계를 힐끗 들여다보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지. 근처에 한식 잘하는 곳이 있어.”

야바는 고개를 치켜 올렸다.

“……지금?”

“그래. 지금.”

“왜…?”

“너도 그렇고, 나도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끼니를 놓쳤으니까.”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맞대고 모사를 꾸미는 게 아니라,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자고 말하는 거다. 진짜 밥만 먹는 것일까? 혹시 아까 그만두겠다고 해서 밥에다 독이라도 타는 건 아닐까? 복잡한 생각이 뒤엉켰다. 야바는 거실 창을 통해 차고를 보았다. 불 꺼진 임수 차가 이쪽을 주시하는 듯했다. 입술 거스러미를 뜯으며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싫지 않다. 싫을 리가 없다. 모험을 걸어볼 만큼 흔들리는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빨리 가야 돼. 임수가 계속 기다리고 있어.”

“먼저 가라고 해.”

“안 돼. 기하가 10시까지 오라고 했으면 그 안에 가야 돼.”

“전화하면 되잖아.”

“안 돼…….”

“그냥 해 본말 아닌가? 몇 분 늦는다고 죽이진 않겠지.”

야바는 차이석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왜 기하의 말에 따라야만 하는지 확실히 짚어줄 필요가 있다. 입술을 자근거리며 어두운 곳으로 몸을 감췄다. 셔츠를 잡아당기자 그의 상체가 딸려 내려왔다.

“사실은 내 머리에 알람시계가 설치돼 있어.”

“알람시계?”

차이석이 눈썹을 지그시 올렸다. 야바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위치 파악도 다 되는 건데 만약에 늦게 오거나 말을 안 들으면 머리가 터져. 원래 가수들 숫자가 더 많았는데 도망치려다가 머리 터져서 절반만 남은 거야. 기하가 내 머리 때리지 말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잡아온 아이들을 고자로 만들고 난 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머리에다 칩을 이식하는 거다. 기하는 위성에 연결된 시스템을 이용해 사무실에서도 청년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 시간 안에 오지 않거나 정해진 동선을 벗어나면 곧바로 리모컨을 켜고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차이석은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야바는 하는 수 없이 등을 돌렸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올려 뒷목을 보여줬다.

“거기 목에 까만 거 있지?”

그 순간 이석의 콧속에 은은한 향기가 확 밀려들었다. 길쭉한 목덜미는 불빛이 반사돼 극단적인 백색을 띠었다. 눈과 코에 스미는 자극에 머리가 눅눅해졌다.

“있지?”

야바의 목소리에 이끌려 이석의 시선이 새하얀 길 아래로 미끄러졌다. 머리카락이 끝나는 부분쯤에 작은 점이 보였다. 그는 이완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점으로 보이는데….”

“아냐. 자세히 봐. 그게 칩을 이식한 자국이야. 가수들한테 전부 다 있어.”

약물에 찌들면 현실과 망상을 구분 못 한다. 공격적이진 않지만, 녀석의 망상은 지금껏 봐온 사람 중에 가장 기발했다. 차이석은 싸늘한 웃음을 야바의 목덜미에 흩뿌렸다.

“그렇다 치고.”

무심한 대답에 야바는 기분이 나빠졌다. 바지에 든 휴대폰이 내내 진동하며 다그쳤다. 얼른 밖으로 나가려는데 몸이 벽에 밀어 붙여졌다. 단단한 피부 아래서 푸른 정맥이 힘차게 맥동하는 게 보일 만큼 그는 가까이에 있었다. 차이석이 별안간 손을 쭉 뻗더니 어깨에 흘러내린 리본 끝을 만지작거렸다. 야바는 어김없이 석고상처럼 얼어붙었다. 조금만 힘주면 매듭이 풀려, 가면이 벗겨질 것 같았다. 그는 리본을 손가락에 둘둘 말았다. 손가락에 감고 남은 끄트머리를 입술 사이에 물고 자근자근 씹었다. 그 감촉이 리본을 통해 전해져 피부를 씹히는 것 같았다. 뒷목에서부터 어깨까지 단번에 딱딱해졌다. 온 신경이 그의 손에 향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가면 말이야. 몇 시간 동안 쓰고 있으면 갑갑하지도 않나?”

“이거…놔.”

아킬레스건을 붙들린 녀석은 겨우 목소리를 밀어냈다. 이석은 그런 반응을 감상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재밌는 장난을 치듯 고약한 미소였다. 절반만 드러난 얼굴이 붉은색 가면보다 더 달아올랐다. 좀처럼 피하지 않는 회갈색 눈동자는 이석의 넥타이 언저리만 맴돌았다. 검고 긴 속눈썹이 풍부한 곡선을 늘어트렸다. 수분에 젖은 목덜미는 도색잡지에 나오는 알몸보다 불쾌할 만큼 색정적이다. 그 모든 게 밑바닥에 깔린 지저분한 욕구를 끌어올렸다. 이석의 입술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물러났다. 야바의 뒷머리를 잡아 당겨와 입술을 집어물었다. 크게 뜬 야묘의 눈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급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맞닿은 가슴에 또렷이 전해졌다. 농도 짙게 젖은 혀가 미끄러져 와 야바의 안쪽 살을 휘젓고 나갔다. 온몸이 마찰하는 자극에 야바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탁한 목소리가 녀석의 입가에 흩어졌다.

“수고비…. 지갑을 안에 두고 왔어.”

아마 계단에서부터였을 것이다. 녀석이 눈에 가시를 세우고 덤벼들 때부터 이 혀를 빨고 싶었다. 이석은 다시 얼굴 각도를 바꿔서 다가왔다. 재질이 무른 아랫입술을 물며 혀를 쑤셔 넣고, 음탕하게, 더없이 상스럽게 감아올려 빨았다. 하아…으……. 야바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크게 벌려진 입술이 잔뜩 젖은 채 떨고 있었다. 이석의 숨결도 금세 흐트러졌다. 야바의 가랑이 사이로 다리를 찔러넣고 꽉 밀어붙였다. 허벅지가 경련하듯 다리를 조였다. 마찰하던 하체가 더 깊이 움직였다.

“…흐으…으응…….”

“하아…….”

이석은 오랫동안 참았던 사정을 하듯이 숨을 쏟아냈다. 몇 번의 마찰로 그의 것은 팽팽하게 발기되었다. 임계점에 오른 열기가 혈관 속을 내달리고, 이성을 마비시켰다. 찬바람을 쐬어도 맑아지지 않을 혼몽이다. 그는 페이스를 잃고 야바의 혀에 자신의 것을 세게 문질렀다. 틈 벌린 입술에 손가락을 찔러 타액을 묻혀왔다.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야바의 젖꼭지 끝을 비볐다. 미끈거리는 감촉에 녀석은 허리를 떨었다. 다시금 작은 턱을 깨물고, 입술을 헤치고, 혀를 밀어 넣었다. 입안 가득한 두 개의 혓바닥이 한 덩이처럼 엉겨붙었다. 입가에 늘어지는 타액을 이석은 질척하게 핥아 올렸다. 딱 한번 보았던 야바의 얼굴이 이젠 가물거렸다. 이석은 가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야바의 바지에서 숨죽였던 휴대폰이 열기를 뒤흔들었다. 야바는 은밀한 행동을 들킨 양 소스라치며 이석을 밀치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12시의 저주에 걸린 주인공처럼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이석은 창가에 기댄 채 밖을 내다보았다. 밤 고양이가 불을 쪼개고 달려갔다. 몸이 하나 더 들어갈 만큼 큰 니트 티가 찬 바람에 펄럭거려 어깨로 흘러내렸다. 이석은 담배를 꺼내물고 라이터를 켰다. 매캐한 연기를 빨아당기며 입속의 허전함을 달랬다. 담배 연기는 혼들의 울음처럼 차가운 얼굴 주변에서 아른거렸다. 아까 확인한 명환의 몰골은 기대 이상으로 형편없었다. 이제 녀석의 노래를 진혼곡 삼아 죽을 날을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 혼신을 다해 코카인이 되라고. 나도 온 마음을 다해 봉사해줄 테니.”

문득 초고주파를 닮은 이명이 고막을 쥐어 비틀었다. 마른 입속은 더 타들어갔다. 이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야바가 어둠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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