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10화 (10/42)

힐러-track 08

“뭐 볼까?”

“글쎄. 뭘 보지?”

코카인과 헤쉬쉬는 벌써 30분째 이 질문만 주고받았다. CGV 안에 걸린 포스터를 살펴도 딱히 볼만한 게 없었다. 마트에 들려 장을 보고 난 다음 누구는 옷을 사거나, 미용실에 드리거나 제각각 찢어졌다. 코카인과 헤쉬쉬도 그냥 들어가기 서운해서 영화나 보고 가기로 했다. 코카인은 선택을 기다리는 포스터를 비잉 둘러보고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켰다.

“이거 볼래.”

헤쉬쉬는 입가를 찡그렸다. 포스터엔 노인 네 명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부감이었다.

“노친네들이 주인공이잖아. 딱 봐도 밋밋하고 지루할 거 같은데.”

“밋밋하고 지루한 거야말로 우리한테 필요한 거야. 매일 마주하는 사람이란 게 깡패 아니면 환자, 이상성욕자들이 전부니까. 주인공들 표정을 잘 봐. 분명히 영화도 따뜻하고 재밌을 거야. 이거 보자. 응?”

“알았어. 표 끊어 올게.”

헤쉬쉬는 코카인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매표소로 걸어갔다. 헤쉬쉬는 자신이 고집을 부리면 곧잘 맞춰주는 쪽이었다. 그도 거세당했지만, 여리한 가수들과는 달리 키가 컸고 골격도 굵었으며 목소리도 테너톤이다. 공연 의상을 벗어 던지고 멀끔하게 차려입으면 여자들이 힐끔거릴 만큼 준수한 외모였다. 그가 13살 즈음,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친척집에 살다가 홀대를 못 이겨 가출했다. 거리를 전전하다가 소매치기 조직에 들어갔는데 조직끼리 안면 있던 사장 눈에 띄었던 것이다. 헤쉬쉬는 파라디소에서 듬직한 맏형 역할을 도맡았다. 사장에게 건의할 게 있으면 앞장서 나섰고, 분란을 일으키는 동료를 다독이기도 했다. 물론 야바를 제외하면 말이다. 헤쉬쉬는 표를 끊고 오는 길에 커피를 사왔다.

“한 시간 정도 여유 있어. 오늘 왜 이렇게 노인들이 바글거리나 했더니 이 영화 때문인가 보네.”

헤쉬쉬는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그나저나 혼자 뒀다가 또 네 물건에다 장난질 안 하려나 모르겠군.”

“누가?”

“누구긴, 똘아이지. 예전에도 자리만 비우면 네 가면 부수고, 예약명단 찢어서 엿 먹였잖아. 손님한테 받은 선물도 망가트리기까지…. 아무튼 단단히 돈 새끼라니까. 걔 어릴 때도 그 모양이었냐? 너희 한동네에서 살았다면서?”

“어릴 때는 달랐지. 아픈 형을 잘 돌보고 솔직한 애였어. 이런 곳에 있으면 누구든 견디기 힘들 거야.”

그 어린 날, 눈앞에서 사람들 뇌가 터져나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거세당하고, 감금당해 광대놀음을 강요당한다면 누구든 견디기 힘들 것이다. 또한 야바의 지독한 열등감이 스스로를 좀 먹고 결국 패배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치열하게 싸우고 겨우겨우 평정이란 가면을 쟁취했다. 이제 남은 건 이 지옥 같은 곳에서의 탈출뿐이다. 코카인은 커피 뚜껑을 걷으며 한 모금 머금었다. 쓴맛이 혀에 감겼다. 헤쉬쉬가 말했다.

“그런데 어제 똘아이 머리는 왜 터져서 왔대? 그렇게 지목당해서 출장 간 건 처음이고 이상하지 않아? 아무래도 차 전무와 관계있는 거 같던데.”

“언제 야바가 나한테 그런 말 하는 거 봤어?”

“같은 방 쓰는데 그 정도 대화도 안 나누나 보지? 니들 대체 뭐라고 불러야 되는 사이냐?”

“글쎄. 그건 야바한테 달렸어.”

아니, 자신에게 달렸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유년을 함께한 친구 또는 서로의 인생을 망쳐버린 원수. 그 끝과 끝에서 줄을 맞잡은 채 서로를 지켜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야바에게 한 가지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 처음 야바를 만났을 때 자신의 예감이 맞는 건지 틀린건지를 말이다. 코카인은 포스터를 건성으로 보았다. 헤쉬쉬는 컵을 입가에 대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면 차 전무 말이야. 전엔 하루가 멀다하고 들락거리더니 벌써 나흘째 감감무소식이네.”

“일 때문에 많이 바쁜가 보지.”

“일은 무슨….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허구한 날 약에 절어서 오나?”

결국, 저 말을 꺼내려고 그렇게 빙빙 돌아온 거다. 코카인은 한숨을 쉬었다.

“윤교야.”

밖에 있을 때만은 서로의 본명을 불렀다. 채우와 윤교라는 원래 이름 말이다.

“야바가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건 신경 안 써. 누군가 야바를 마음에 들어 했겠지. 아니면 진짜 차이석 씨와 상관있거나. 그것까지 내가 일일이 물어볼 생각은 없어. 나 피곤해. 낮에는 목소리 좀 그만 쓰고 싶어.”

헤쉬쉬는 쓰게 웃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 요 며칠, 예약 명단에서 차 전무 이름 없는 거 확인했을 때 네 표정 어땠는 줄 알아?”

“단골이 발길 뜸해지면 누구한테라도 나는 그래. 괜한 억지 부리지 마.”

“너야말로 억지 부리지 마. 가끔 너 보면 야바 그 자식보다 더 지독한 거 알아? 누구보다 눈치 빠르면서 둔한 척하는 거 보면 열 받는다고.”

헤쉬쉬는 괴로운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항상 저런 식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속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본론에서 겉돌면서도 알아채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했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네 말이 맞아. 아무래도 이 영화 재미없겠다. 환불하고 가자.”

코카인은 헤쉬쉬의 굳은 표정을 못 본척하며 지나쳐갔다. 바삐 움직이는 인파를 보았다. 신경질 난 애인을 달래며 표를 사는 남자, 팝콘을 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들고 가는 연인들, 만화 포스터에 앞에서 엄마에게 보채는 아이들…. 자신은 누리지 못했던 유년시절과 청춘이 스크린처럼 펼쳐졌다. 자신은 저 평범함에 섞일 수 없는 관객이었다. 그건 대체 누구의 탓일까? 겁에 질려 밀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야바 탓일까? 사장의 탓일까? 사장의 명령에 복종하는 실장 탓일까? 자식의 능력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엄마의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원치도 않는 능력을 준 신의 불찰일까….

한순간만이라도 힐러라는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동료마저 다치거나 잔병에 걸리면 달려와 노래를 요구한다. 스스로 자생할 생각 없이 힐링에만 의지했다. 가끔 피곤해서 미루기라도 하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자신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가끔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이 숨 막혔다. 그들의 호의가 친구로서인지 환자로서인지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이 기적의 힘이 먹통인 사람이면 좋겠다. 힐러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게 해줄…. 그래, 바로 그런 사람이 있다. 실없는 소리로 단발성 웃음을 짓게 하더라도, 가끔 자신을 마약이나 술보다 무능하게 느껴지게 할지라도. 코카인은 주머니에 든 폰을 만지작거렸다. 손님과의 개별 연락은 규칙 위반이다. 밖에서 만나면 그만큼 매상이 준다는 게 사장의 주장이었다. 전에 차이석에게 포토메일을 보냈을 때 번호를 지우지 않았다. 흔적을 남기면 안 되니 머리에 저장해뒀다. 다리는 어딘가로 휩쓸려가듯 움직이면서도 손가락은 폰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왜, 왜 이래요? 그러게 내가 오지 말자고 했잖아요! 젊은이, 전화 좀 해줘요! 어서요!”

매표소 앞에서 노인이 가슴을 쥐며 쓰러졌다. 동반한 할머니는 안색이 하얘진 노인을 부축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지만, 선뜻 나서진 않았다. 헤쉬쉬는 폰을 끄집어내 전화를 연결했다. 코카인은 헤쉬쉬를 끌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어리둥절하게 따라온 헤쉬쉬에게 말했다.

“비상구로 옮기자.”

“손 떼! 이놈들아! 지금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구!”

“잠깐만이면 돼요. 할머니 걱정마시고 잠깐만…!”

할머니는 헤쉬쉬와 코카인을 번갈아 두드려팼다. 헤쉬쉬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쓰러진 노인을 번쩍 들었다. 군중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궁시렁댔지만, 어디까지나 구경꾼 입장만 고수했다. 할머니는 눈물바람으로 두 청년의 옷을 쥐어뜯고 등짝을 후려쳤다. 비상구에 다다르자마자 헤쉬쉬는 문을 닫았다. 노인은 정신이 혼미한지 바닥에 늘어졌고 창백한 낯빛으로 힘겹게 숨을 쥐어짰다. 손발도 차가웠다. 코카인은 계단 위아래층에 누가 있는지 살핀 다음 할머니에게 빠르게 말했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시, 심장이 안 좋아! 심근경색이 있어! 이래서 의사가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튼 구급차나 불러 줘!”

“3분만 주세요. 어차피 구급차가 오려면 시간이 걸리잖아요. 부탁할게요.”

“호, 혹시 의사유?”

“의사는 아니에요.”

“그럼 공부하는 중인가?”

헤쉬쉬가 할머니를 넘겨받아 진정시켰다.

“의학도는 아니지만, 한 번만 믿어 보세요.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할머니의 경계하는 표정을 풀었지만, 극도의 불안에 떨었다. 설득할 여유가 없었다. 코카인은 의식이 혼미한 노인 쪽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였다. 노인의 귓가에 대고 아리아를 불렀다. 밤의 여왕이었다. 뻥 뚫린 계단에 빠르고 현란한 콜로라투라가 울려 퍼졌다. 심장으로 전달하는 피의 통로를 열어주고, 응고된 핏덩어리를 녹이고, 손상된 심장근육을 유연하게 만들도록 치밀하고 섬세한 기교로 불렀다. 할머니는 의식불명인 남편에게 느닷없는 노래 부르는 코카인을 실성한 사람 쳐다보듯 했다. 3분짜리 노래가 끝나갈 무렵 서서히 노인의 혈색이 돌아왔다. 호흡도 편안해졌다. 할머니는 재빨리 할아버지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영감. 괜찮수?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수?”

할아버지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코카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는 울먹이며 코카인을 바라보았다.

“세, 세상에…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손도 안 대고… 혹시 무당이유…?”

코카인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감기처럼 가벼운 병이 아니라 한 번에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급한 불은 끈 셈이다. 파라디소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아 보라고 권유할까 했다. 그러나 뙤약볕에 탄 노부부의 얼굴과 수수한 옷차림이 입을 닫게 만들었다.

“전에도 이렇게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었지. 의사가 한 번만 더 발작하면 장담 못 한다고 했지 뭐겠어? 오늘따라 우리 영감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찌나 영화관에 가자고 보채던지…. 진짜 염하는 줄 알았지 뭐야…. 고마워. 청년. 고마워…….”

할머니는 코카인 손을 잡고 문질렀다. 나무껍질 같은 손바닥은 부드러웠다. 손등을 감싼 체온은 따뜻했다. 노부부가 돌아가자 헤쉬쉬는 코카인 어깨를 치며 말했다.

“사장이 알면 지랄하겠군. 네 능력을 한정된 사람들만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니까.”

“사장님이 무슨 재주로 알아? 물론 네가 입 다물어준다는 가정하에.”

“맨입으로?”

헤쉬쉬가 짓궂게 물었다. 조금 전 어색했던 분위기가 거짓말 같다. 코카인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그 순간 천장이 뒤틀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자 헤쉬쉬가 민첩하게 붙잡았다. 그의 표정은 휘청댔던 코카인보다 더 나빠 보였다.

“괜찮아? 너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더니, 괜한 일 한 거 같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자주 현기증이 나네.”

“그렇게 일주일 내내 일하는데 탈이 안 나는 게 이상하지. 나온 김에 병원에나 들리자.”

“그냥 숙소에 가자. 좀 눕고 싶어.”

헤쉬쉬의 부축을 받아 비상구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어디선가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못해. 이런 적은 처음이야.”

야바는 가장 안쪽 방앞에 서서 걸음을 멈추고 온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차이석이 돌아봤다.

“처음이라니?”

“혼자 노래 해본 적 없어.”

코카인 뒤에서 화음이나 깔아주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입만 벙긋거린 적이 대부분이었다. 항상 지목은 코카인에 한해서였으니 다른 가수들은 혼자 노래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 저 문을 지나면 홀로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식은땀이 났다. 자신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거다. 천 찢어지는 것처럼, 결코 아름답지않은 제 목소리가. 야바는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냈다. 그때 차이석이 야바 손에서 알약을 가져갔다. 주황색 캡슐을 들여다보며 그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이 약 어디서 구했지?”

“기하가 병원에서.”

“어느 병원?”

“몰라. 어디 병원이겠지.”

“언제부터?”

“몰라. 언제부터였겠지.”

그의 시선이 오른쪽 볼에 닿았다.

“하루에 몇 알씩 먹지?”

“다섯 알. 오전에 세 개, 오후에 두 개.”

“심한데….” 차이석은 중얼거렸다. 정확히 언제부터 약을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우울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지도 잊은 것 같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정체된 감정이 계속됐다. 점점 번식해가는 벌레를 칼이나 불로 퇴치하려고도 했다. 그때마다 기하가 가져다주는 약은 더 많아졌다. 확실히 항우울제를 먹고 나면 감정 기복도 덜해지지만, 만사가 무력해져서 누구에게 칼에 배를 푹 찔려도 ‘이 칼 어디서 구했어?’ 하며 물을 경지에 올랐다.

“약 줘.”

야바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석은 쫙 펼친 손바닥에 약을 얹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야.”

차이석은 눈을 내리깐 채 덧붙였다.

“이런 거 주는 대로 먹지 마. 뇌를 무르게 해서 쓸데없는 짓을 막기도 하지만, 사람 병신 만드는 것도 시간문제니까.”

아, 야바는 차이석을 바라보았다. 그의 언어는 정말로 이상했다. 코카인이나 헤쉬쉬, 고자 가수들, 심지어 약을 구해다 주는 기하마저 지나는 말로 끊으라고 잔소리했다. 모두 짜증만 났다. 그런데 이렇게 약을 먹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건 처음이었다. 야바는 손바닥에 있는 약을 주물주물 거리다가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때마침 복도에 정수기가 있었다. 컵을 갖다 대다가 찝찝해서 제자리에 두고 그냥 손바닥에 물을 받았다. 입에 한 알씩 넣고 손 컵에 든 물을 마셨다. 지금 먹어야 효과는 후에 나타나지만, 그래도 약을 먹었다는 자체가 위안이 되었다. 미처 입속에 다 못 들어간 물이 손가락 틈에서 목줄기를 타고 셔츠 속으로 흘러갔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돌아봤다. 차이석은 거짓말처럼 시선을 거두고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기 전,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 아파?”

야바는 물었다. 그가 외눈으로 응시했다.

“가끔 깨질 만큼 지독하지. 오늘처럼 일이 꼬였을 때는 더.”

차이석은 곧장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방안이 보이자 야바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손길에 야바의 몸이 공간 속으로 빨려 갔다.

“처음엔 앞뒤 없이 까불어서 죽여버리고 싶었어. 보통 어떻게든 내 비위 좀 맞추려고 하는데 그 밑도 끝도 없는 방자함이란 게…….”

말끝을 늘이던 차명환이 힘겹게 호흡하며 말을 매듭지었다.

“좋아. 달인만이 가진 오만함이라고 해두지.”

뭐라는 거야. 야바는 눈썹을 찡그렸다. 차명환은 간밤의 격통을 대변하듯 피부와 뼈가 맞닿은 몰골에 거무죽죽한 안색이었다. 그가 짜증 섞인 어투로 말했다.

“제발 그 꼴같잖은 가면 좀 벗어. 눈 썩을 것 같으니까.”

“알았어. 그럼 너도 그 가면 벗어. 나도 벗을 테니까.”

“너 이……!”

차명환이 검고 탄력 없는 살거죽을 일그러트렸다. 약간 떨어진 데 앉아 있던 차이석은 눈을 접으며 픽 웃었다. 그런데 오늘은 낯선 여자가 차명환 곁에 꼭 붙어 있었다.

“여보…. 안 그러기로 했잖아요.”

여자는 검정색 레이어드 치마와 크림색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그 옷차림은 일부러 노숙하게 보이려는 의도 같았다. 청바지에 셔츠를 걸친다면 대학생으로 보일만큼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가 다가와 야바의 손을 붙잡고는 가면을 곁눈질했다. 방에 오고 나서 벌써 네 번째다. 깃털 달린 가면이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을 터였다.

“코카인 씨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나는 차명환 씨 안 사람이에요. 저이 좀 꼭 살려주세요. 이제 우리한테는 코카인 씨뿐이에요.”

“몰라. 하는 거 봐서.”

“뭐든 필요하신 건 다 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간절한 눈빛과 매달리는 두 손에 이질감을 느꼈다. 코카인은 늘상 이런 대접을 받았을까? 저들이 고매한 귀족정신을 내팽개치고 매달리는 사람이 가짜임을 안다면 저 얼굴이 어떻게 바뀔까?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면 차이석은 어떻게 혼내킬까? 결말 없는 연극이 진짜 시작된 거다. 야바는 여자의 손아귀에 갇힌 제 손을 잡아뺐다. 차명환은 부인을 노려보았다.

“너도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 니가 애초에 쓸데없는 짓만 안 했어도 내가 이 수모는 안 당하잖아!”

야바는 한숨 쉬며 여자에게 말했다.

“봤지? 쟤 아직 정신 못 차렸어. 쟤는 암 고치기 전에 사람부터 만들어야 돼.”

“저이도 원래 순하고 좋은 사람이었어요. 병마에 시달려서 예민해진 거니까 저이가 무례하게 굴어도 이해해 주세요.”

“자꾸 주변에서 오냐오냐하니까 저 모양이 된 거잖아. 남편 사람 만들고 싶거든 아줌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감히 누구한테 얘, 쟤야? 이게 진짜 오냐 오냐 해주니까…!”

“여보. 제발 좀…!”

“저게 사람 건들잖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누군한테! 콜록! 큭…콜록……!”

차명환은 넘어가듯 기침하면서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야바는 말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는 상관없어.”

차명환은 안면 근육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술을 씹었다. 이석은 한숨을 길게 늘어트리며 말했다.

“형님. 겨우 어르고 달래서 데려왔는데, 서로 시간 낭비할 거 없잖습니까.”

“하지만, 저 새끼가……!”

“마음에 안 들면 데려가죠. 대신 저도 이제 손 놓습니다.”

유연하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차명환은 쇳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알았어.” 가까스로 대답했다. 여자는 냉막한 공기가 사이로 걸어가 차명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차이석에게 시선을 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차명환은 부인 도움으로 상체를 세우더니 야바를 노려보았다.

“좋아…. 죽은 사람까지 벌떡 일으킨다는 네 노래. 얼마나 대단한지 들어나 보자구.”

“…….”

깜빡 잊었던 의무가 생각나 숨구멍이 오그라들었다. 소파에 몸을 늘어트린 차이석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무심하게 응시했다. 차명환 부인은 말만 번드르 했지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았다. 차명환은 대놓고 노골적이었다. 그렇게 빛깔 다른 세 쌍의 눈알이 한꺼번에 집중했다. 머리는 백지가 됐다. 약기운은 통 소식이 없었다. 야바는 팔이며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시선을 도피시켰다. 차명환이 물어뜯듯이 끼어들었다.

“시작 안 해? 그 입 놀리는 것만큼 어서 실력을 보이라구!”

“괜찮아. 긴장 말고 아무 노래나 해 봐.”

차이석이 말했다. 야바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겐 빠른 치료가 필요하며 고음역대의 강렬한 노래가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코카인에게 주워들었다. 그래 봐야 코카인에 한해서지만, 흉내는 내야 했다. 머리는 쉴새 없이 두드려 맞는 것처럼 정신을 못 차렸다. 심장은 살을 뚫고 나올 듯이 요동쳤다. 정신없이 달려오는 와중에 급하게 정했다. 하나는 텅 빈 왼쪽 음낭에 넣고, 남은 하나는 오른쪽 음낭에 넣어 두었다. 그토록 지긋지긋한 노래라 해도 텅 빈 음낭에 뭐라도 채워넣어야 했다.

“야. 너 진짜 할 거야? 말 거야?!”

참다못한 차명환이 소리쳤다. 머리에 열이 몰리자 뇌 주름 사이사이에 잠들었던 벌레가 꾸물꾸물 기지개를 켰다. 혈관을 타고 관자놀이로 귓바퀴로 오더니 그거 먼저 해. 그거! 하며 귀에다 속삭였다. 야바는 왼쪽 음낭에서 하나를 끄집어냈다. 턱을 치켜올리고 차명환 쪽으로 머리를 틀었다. 어디선가 빠르게 긁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목 끝에 맺힌 소리를 터트렸다. 밤의 여왕의 아리아였다.

Der hoe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

내 가슴은 지옥의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Tod, und Verzweiflung, Tod und Verzweiflung flammert um mich her

죽음! 그리고 절망! 죽음과 절망이 내 주위에 불타오르네!

도도한 보이소프라노가 베일을 헤치고 튀어나왔다. 폭발적인 성량은 첫 호흡부터 공간을 채우고, 신경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이석과 명환, 부인의 눈이 한없이 커다래졌다. 숨을 그치는 게 들릴 정도로 완전히 굳고 말았다. 이석은 눈을 크게 뜬 채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박자도 기교도 정돈되지 않았지만, 관능적으로 교사를 속삭이는 음성이었다. 여왕의 절규가 회색빛 공기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순식간에 몰아에 이르게 했다. 화려한 스타카토를 튕기며 최고음까지 도약했다.

Fuehlt nicht durch dich, Sarastroh Todesschmerzen, Sarastro Todesschmerzen,

네 손으로 짜라스트로에게 죽음의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so bist du meine Tochter nimmer mehr. So bist du mein~~ meine Tochter nimmer mehr~

그러면 넌 더이상 내 딸이 아니야! 넌 더이상 내 딸이 아니야!

야바는 폐에 찬 숨을 내뿜으며 더 많이 빨아들였다. 어느 날 코카인이 이 아리아의 내용을 말해 줬다. 노랫말의 의미도 모르고 곡을 다루는 건 노래에 대한 모독이라고 일장 연설했다. 야바는 콧방귀를 쳤지만, 그건 순간일 뿐이었다. 여왕의 이야기는 야바를 사로잡았다.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던 여왕은 딸 파미나를 짜라스트로에게 납치당한다. 여왕은 타미노 왕자에게 딸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그녀를 구해달라고 한다. 왕자는 파미나를 구하려고 짜라스트로의 사원에 들어가 고행길을 걷는다. 하지만, 야바는 오페라의 은밀한 비밀을 알아채고 말았다. 짜라스트로는 여왕의 악덕에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파미나를 납치했지만, 파미나에게 욕정하고 독차지하려는 술수였다. 밤의 여왕은 딸의 아름다운 젊음과 강한 애인을 질투한 것이다.

긴장했던 성대가 점차 유연해지고, 뜨겁게 차올랐다. 그 옛날 노랫말과 자신의 목소리만이 전부였던 세계로 접어들었다. 이 자리가 어디며,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젠 여왕이 탑에 갇힌 딸에게 찾아와 짜라스토로를 죽이라고 협박한다. 여왕을 무시하고 젊은 딸을 갈구했던 짜라스트로를! 딸에게 쥐여 준 칼은 여왕의 의지였다. 딸의 아름다움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 딸의 젊은 연인을 욕망했던 의지. 젊음은 선이며, 늙은 건 악이다. 불사의 탐욕은 무엇보다 순결했다. 짜라스트로에게 납치당하고 싶었던 건 여왕이었다! 야바는 곧 다가올 정점을 맞이하고자 공명점에 소리를 집중했다. 목구멍을 크게 벌리고 목젖을 내렸다. 이제 여왕의 핏빛 클라이막스다.

Ah~AAAA~~~ A~~~ A~~~~~~~~~~~~~~~~~~~~~~~

아아아아아~~~~ 아~~~~ 아~~~~~~~~~~~~~~~~~~~~

du bist meine Tochter nimmer mehr

넌 더이상 내 딸이 아니야!!

빠르게 치고 오르는 현란한 초고음은 쇠끼리 맞부딪혀 긁는 절명한 비명이다. 팽팽하게 당긴 초고주파가 투과해 머리 가죽을 벗기고 눈알을 비트는 듯했다. 으윽…관자놀이에 심줄이 돋아난 차명환이 신음을 흘렸다. 탐욕스럽고 악랄한 절규가 얼음 손톱처럼 등줄기를 긁었다. 이석은 목 졸린 사람처럼 셔츠 깃을 풀며 목울대를 꿈틀거렸다. 섬뜩한 음의 파동이 숨통을 끈질기게 틀어막고 죽음 직전에 놓인 것처럼 몽롱해졌다. 이석은 저 흉기 같은 음색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빠드득 소리 나도록 어금니를 짓씹었다. 명환도 그의 부인도 완벽하게 압도당해 여과하지 못한 표정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맑고 투명한 파장은 어느 순간 각을 세운 얼음송곳이 되어 치명적인 통점을 공격했다. 그것은 지옥의 복수심을 불사른 여왕의 환생이었다. 혼을 빼앗는 악마의 목소리였다.

alle Bande der Natur~~~~alle~ alle~~~~~alle Bander der Natur!

자연의 모든 이치가! 모든 자연의 끈!!

Wenn nicht, durch dich, Sarastroh wird erblassen!

만약 네가 짜라스트로를 죽이지 않는다면!

하늘을 찌를 듯이 치달았던 음성은 곧이어 물속을 거니는 것처럼 음울하고 질척해졌다. 그러다 정점에 위에 우뚝 치고 올라 극단적인 음계를 가지고 놀았다. 야바는 턱을 든 채 손을 꽉 움켜쥐었다. 칼을 쥐면 어울리는 손 모양이다. 분노를 내뿜을 때마다 가면에 매달린 깃털이 파르르 몸서리쳤다. 한치도 밀림 없이 절정으로 치닫는 비브라토는 현악기와 흡사했다. 투명한 줄이 튕겨와 몸을 몇 갈래로 찢어발기는, 그 폭발적인 공격에 이석은 살가죽이 따끔거릴 지경이다. 동시에 저 밑바닥에서 정체 모를 열기가 솟구쳤다.

야바는 성대가 찢기도록 독을 내뿜었다. 그것은 텅텅 빈 주머니의 절규였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울부짖음이었다. 왕자는 결국 여왕의 딸과 결실을 본다. 밤의 여왕이 창조한 악이 세계는 붕괴하고 태양의 세계로 바뀐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파미나는 왕자의 손을 잡고 어미의 죽음 위를 행진한다. 흩날리는 꽃가루는 여왕의 핏물이며 살점이었다. 행진곡은 여왕의 울부짖음이었다. 백색 드레스는 여왕이 입었어야 했다. 모든 걸 가로챈 파미나는 쓰레기다.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어미를 비웃은 쓰레기!

Hoert! Hoert! Hoert! Rachegoette! Hoert! der Muttersschwur!

들으소서! 들어보소서! 복수의 여신이여! 이 어미의 맹세를 들어라!

성대와 내장은 광란으로 달구어져 형체 없이 녹아버린 것 같았다. 목소리가 흩어지기도 전에 야바는 다른 주머니에 담긴 ‘광란의 아리아’를 끄집어냈다. 이제 모조리 비우고 나면 우주로 돌아갈 시간이다. 뼈와 살을 얼게 하는 무한한 공간으로……. 흐느적, 흐느적, 늪에서 빠져나오듯 느리고 음울한 음성으로 노랫말을 흘렸다. 첫날밤 남편의 피를 온몸에 묻힌 신부의 애달픈 광기, 피비린내 나도록 숭고한 아리아였다.

Alfin son tua, sei mio! A me ti dona un Dio. ogni piacer più grato mi fia con te diviso

del ciel clemente un riso la vita a noi sarà….

드디어 나는 당신의 것, 당신은 나의 것! 하느님이 맺어주었어요. 모든 쾌락을 당신과 나누면 더욱 기쁩니다. 우리 생애에 하느님이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실 겁니다…….

노래가 끝났다. 억만년 같은 시간도 지나갔다. 머나먼 심해에 다녀온 듯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야바의 얼굴과 셔츠는 땀으로 온통 젖었고, 목까지 숨이 차올랐다. 절절 끓는 물을 한번에 들이킨 양 목이 고통스러웠다. 똑똑……. 링거액 떨어지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야바는 한껏 치켜 올린 턱을 내리고 희뿌연 시선을 움직였다. 이제야 약기운이 도는지 뇌가 흐물거렸다. 혓바닥도 뭉글어졌다. 점차 또렷해지는 시야로 차이석과 차명환의 얼굴이 낱낱이 들어왔다. 그들은 야유를 보내지도 그렇다고 박수치지도 않았다. 찰나의 표정을 붙든 한 폭의 피사체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어쩌면 공포영화를 본 사람의 눈빛일지도 모르겠다. 야바는 숨을 고르며 시선을 패대기쳤다.

“됐지? 나, 간다.”

그리고 곧장 걸어가 방을 나가버렸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 여전히 방에서는 박수소리도 따라오는 발소리도,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밖을 나오니 사방에 어둠이 짙었다. 쇠내음 섞인 기침이 자꾸 나왔다. 여자 소프라노도 성대가 망가질 만큼 초고난도의 콜로라투라여서 코카인도 자주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악명높은 아리아를 원음으로 부른 건 역시 무리였다. 이대로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리가 후들거렸다. 몸에 달라붙던 그들의 이상한 시선도, 여왕의 환영도 하얀 거품에 씻겨 보내고 싶었다. 따뜻한 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푹신한 곳에 몸을 눕히고 싶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조금 전 차이석의 표정이 뇌를 들쑤셨다.

문을 열고 와르르 튀어나오는 발소리에 도베르만이 포악하게 짖어댔다. 야바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했다. 경호원이 줄을 잡아당겨도 야바를 물어뜯을 기세로 앞발을 들었다. 멍청하고 시끄럽기만 한 개, 더럽고 냄새나는 개는 질색이었다. 그 순간 등에 벽이 달라붙었다. 벽치고는 탄력 있고 따뜻했다. “그만.” 어깨 위로 낮고 단호한 음성이 떨어졌다.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야바의 팔을 잡아 돌렸다. 오래된 쇠문처럼 삐그덕거리며 몸이 돌아갔다. 훌쩍 큰 차이석이 시야에 가득 찼다.

그는 정말로 이상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야바를 별세계에서 떨어진 생명체를 관찰하듯 했다. 낯선 곳, 낯선 눈빛, 이석은 오늘따라 낯설었다. 어쩌면 어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심장은 좀처럼 진정할 줄 모르고 온몸이 떨렸다. 이윽고 그가 표정을 풀며 입술을 열었다.

“아무튼, 모르겠다니까…….”

그는 또 입을 닫았다. 눅진하게 붙는 눈빛에 야바의 얼굴 근육이 경련할 지경이었다. 그가 짧게 말했다.

“가게로 가면 되나?”

차이석은 곧장 야바를 차고로 끌고 가 운전석에 올랐다. 야바는 반대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아니. 숙소에 갈 거야.”

내 노래 어땠어? 형편없었어? 아니면…. 굳이 거창한 걸 듣고자 한 게 아니라 그냥 어땠는지만 알고 싶었다. 불현듯 야바는 조수석에 타야 할지, 뒷좌석에 타야 할지 고민됐다. 고민 끝에 조수석에 앉았다. 문을 닫는데 야바의 허벅지에 푸른색 종이 세 장이 놓였다. 시선을 돌리니 차이석은 지갑을 접고 있었다.

“앞으로 수고비 줄게. 사장이 뺏어 가면 나한테 일러.”

야바의 눈동자가 침잠했다. 어제와 같은 공간, 같은 색깔 수표였다. 어젯밤 키스는 수표와 같은 의미였다. 그럼 수표는 키스이다. 그러니까 차이석은 지금 키스해 주는 것이다. 야바는 푸른색 종이를 반으로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시선을 바깥에 내던졌다. 머리카락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자꾸 눈에 들어와 따끔거렸다. 이석이 느닷없이 말했다.

“가면… 갑갑하면 벗어.”

야바는 뜨끔한 심경으로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이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 갑갑해.”

“내가 갑갑해.”

이석은 시간차 없이 말했다. 야바도 지지 않았다.

“니가 뭐가 갑갑해? 갑갑하면 내가 갑갑했지.”

“그래. 너 갑갑하니까 벗으라고.”

“안 갑갑하댔잖아.”

“방금 갑갑하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

그의 입꼬리가 미끈한 곡선을 그렸다. 야바는 그제야 말장난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았다. 입을 다문 채 날렵한 그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래, 어젯밤엔 저 입술에 혼이 녹을 뻔했다. 의식하고 나니 살갗에 열이 올랐다. 그 순간 이석이 기습적으로 야바에게 팔을 쭉 뻗었다. 야바는 흠칫 놀라 의자 구석에 등을 딱 붙였다. 그의 손이 야바의 머리 뒤쪽으로 스윽 지나가더니, 다시 나타났을 손에는 안전벨트가 붙들려 있었다. 이석은 벨트를 채워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벗길 줄 알았어?”

야바는 대답도 없이 놀란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었다.

“발톱 세우다가도 가면 근처에 손만 가면 꼼짝을 못하는군.”

이석은 입을 꽉 다문 야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가면 구명 아래서 경계를 세운 불투명한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핸들에 한 손을 얹고 시동을 걸었다. 힐끗 시선을 던졌다. 가면의 안전을 확인한 야바는 헐렁한 셔츠로 땀에 젖은 얼굴을 문지르고 있다. 볼과 목덜미는 온통 땀투성이지만, 끝내 가면을 벗지 않았다. 가면에 가려진 고운 옆선과 붉은 입술이 이석의 시선을 속박했다. 자신은 분명 눈을 돌리고 싶은데도 말이다. 이석은 상앗빛 가면을 뜯어내고 싶은 충동을 짓눌렀다. 심줄이 불거진 손으로 기어를 비틀 듯이 잡아당겼다. 거친 손동작에 비해 차체는 부드럽게 차고를 미끄러져 갔다.

이석은 운전하면서 한 손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노래 듣는 내내 얼마나 힘을 줬던지 척추가 욱씬거렸다. 항상 코카인 뒤에 가려서 별 볼 일 없는 실력일 거라 짐작했다. 이번에도 기대치 않은 충격이다. 조금 전까지 깨질듯한 두통이 사라질 정도였다. 코카인이 부드러운 거품처럼 치유하고 어루만지는 미성이라면 야바는 깊은 해심처럼 음울하고 질척한 미성이었다. 코카인이 플롯처럼 청아한 음색이라면 녀석은 회색 빛깔에 젖은 첼로였다. 어쩌면 얼음송곳 같기도 한…. 녀석이 노래할 때 그대로 싸버릴 만큼 섬뜩했다. 그는 혀로 입안쪽 살을 쓸었다. 노래가 그쳤을 때 막연한 갈증이 밀려들었다. 다시 듣고 싶다는 갈증, 만약 부르지 않겠다고 하면 억지로 입을 벌리고 구멍을 들쑤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갈증의 정체는 어젯밤의 연장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석의 눈동자에 곤두섰던 불기가 마지막 빛을 뿜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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