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06
어제부터 한숨 못 자서 멍했다. 코카인 물에다 독극물 넣는 것까지 잊을 정도였다. 아침부터 미용실에 다녀왔다. 야바는 앞 머리카락이 눈썹 선에 걸리도록 했다. 조금만 길거나 짧아도 그것만 눈에 밟혀서 아무것도 봬질 않는 까닭이었다. 숙소에 가위나 칼을 못 들이니 하는 수없이 주에 한 번은 미용실 신세를 졌다. 미용실에 다녀오니 거실 컴퓨터 앞에서 청년들이 밀렸던 인터넷을 하느라 줄을 섰다. 야바는 화장실로 직행해 몸을 씻었다. 차이석이 오늘 데리러 온다고 했어도 정확한 시간은 정하지 않았다. 기하도 기다리란 말 외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혹시 약속 날짜를 잘 못 안건 아닐까? 아니면 차 회장이 힐러 대신 굿을 선택한 걸까? 연락이라도 주면 기다리든, 포기하든 할 텐데 밥알 하나 넘기지 못했고 사고는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급기야 항불안제 복용적정량을 초과해서 직립보행 동물임이 무색할 만큼 바닥에서 흐물거렸다. 시계 침이 엿가락 마냥 쩍쩍 녹아내리고, 3시는 8시로, 9시는 5시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정오쯤에나 팔다리를 가눌 수 있었다.
저녁이 되었다. 이제 그가 오지 않는다는 확신을 품고 아예 드러누웠다. 축 늘어진 손등 위에 벌레가 꾸물꾸물 기어 올라오더니 야바를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 말을 할 듯이 타원형 몸체를 꿈틀거렸다. 벌레들은 가끔 말을 걸기도 했는데 주로 혼자 있는 시간만 노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벌레가 말했다.
뭘 그렇게 고민해? 결론 나왔잖아. 걘 연락 안 해. 키스해 준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냐?
넌 버림받은 거야. 찌질이. 찌질이. 찌질, 찌질, 찌질, 찌찌찌찌찌찌……….
“닥쳐! 닥쳐!”
야바는 벌떡 일어나 손등을 마구 후려쳤다. 벌레는 눈 깜짝할 새에 도망쳤다. 빨갛게 부어오른 손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벌레 새끼들,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혹시 키스해 달라는 조건 때문에 비위 상한 걸까? 그럴지도 몰라, 아니 확실하다. 키스해 달라니, 미친 게 아닌가? 그런 구걸을 하는 게 아니었다. 기하가 자신을 창고에 가두고 물 한 방울 안 준다고 해도 깨끗하게 거절했어야 했다. 그럼 적어도 자존심만은 야바의 몫이 됐을 것이다. 자꾸 몰아내도 또 들어오고 들어오는 얼굴 때문에 녹초가 되고 말았다. 출근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코카인 침대맡에는 어젯밤 손님들한테 받은 선물이 쌓였다. 야바는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 가위를 꺼냈다. 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한눈파는 사이 훔쳐왔다. 수차례 시도 끝에 오늘에야 성공한 것이다.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는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차가운 가윗날을 살폈다. 은색 가위에 추한 얼굴이 비치자 야바는 가위를 베개 밑에다 얼른 쑤셔 넣었다. 때마침 코카인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방에 들어왔다.
“출근 준비 안 해?”
야바는 입을 봉한 채 코카인을 빤히 응시했다. 코카인은 차이석 폰번호를 알까? 전에 폰으로 얼굴을 보여줬으니 당연히 알겠지. 혹시 그동안 매일 문자를 주고받았을까? 피가 나도록 입술 거스름을 쥐어뜯었다. 시선을 느낀 코카인이 수건을 내리며 물었다.
“온종일 왜 그래? 어제 무슨 일 있었어?”
“그건 니가 더 잘 알겠지.”
“무슨 소리야?”
코카인은 이 내막을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보였다. 어제 차이석하고 함께 있었을 텐데 그가 얘기 안 한 모양이었다. 당연한지도 모른다. 코카인이 더러운 음모에는 발 담그지 않길 원할 테니까. 코카인은 청정해역에 사는 고기였고 자신은 썩은 물에 사는 박테리아니까. 이 연극이 끝나면 흔적도 없이 박멸해야 할 세균 덩어리. 야바는 눈을 감은 채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달칵, 베개 아래에서 가위가 속삭였다. 그것은 위로를 가장한 유혹이었다.
코카인은 한쪽에 자리 잡고 목을 풀었다. 아~아~ 코카인이 치고 드는 보칼리제가 머릿속을 흔들고 몸을 짓눌렀다. 단선 음으로도 그는 지상에 없는 동산을 창조했다. 이 한파에도 봄을 일깨우는 음색이었다. 빛을 닮은 거대한 파동이 야바가 있는 영역까지 침범했다. 야바는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숨구멍을 닫고, 소리가 들어오는 입구를 모조리 차단했다. 도무지 뛰어넘지 못할 존재가 같은 치약을 사용하고, 같은 변기를 사용하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이토록 끔찍하진 않았을 것이다. 코카인의 목소리가 한계 없이 올라섰다.
“시끄러워. 다른 데서 연습해.”
하지만 꿈틀거리는 목소리는 코카인의 세계에 매몰 됐다. 야바는 이를 악물었다.
“시끄러워!”
날카로운 고함이 아름다운 파동을 흐트러트렸다. 방을 채우던 소리 잔향이 사라지고 침묵이 찾아들었다. 묘한 정적에 야바는 고개를 돌렸다. 코카인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경직된 표정이었다. 곧바로 평정을 찾은 그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뱉었다.
“함부로 소리 지르지 마. 니가 더 시끄러워.”
야바는 눈살을 구깃 접으며 말했다.
“나가서 해. 아무리 듣기 좋은 소리도 누군가에겐 소음이 되는 거야.”
코카인은 목을 좌우로 돌리며 차분히 응수했다.
“그럼 온종일 잠만 자는 너한테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말해봐.”
“맞추기 싫으면 나가면 되잖아.”
“너 혼자 쓰는 방 아니야. 듣기 싫으면 니가 나가서 자.”
야바는 눈에 발톱을 세웠다.
“나가. 딴방으로 옮겨.”
“난 여기 있을 거야. 싫은 사람이 나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닥쳤다. 애초에 방을 함께 쓰자고 한 건 코카인이었다. 그러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는데 이토록 고문 같은 나날이 될 줄은 몰랐다. 여긴 제일 큰 방이고 화장실도 딸려 있어 수시로 샤워하는 야바에겐 옮길 이유가 없었다. 그건 코카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도 샤워하러 들어가면 한 시간 동안 나올 생각을 안 했으니 개별 욕실이 필요한 인간이었다.
“차 왔어. 빨리 내려와.”
문 건너에서 헤쉬쉬 목소리가 끼어들어 싸한 공기를 쓸어냈다. 코카인은 지금껏 숨 쉬지 않은 사람처럼 자그마한 숨을 터트렸다. 훨씬 이완된 목소리로 말했다.
“가게 안 갈 거야? 너 어제도 공쳤잖아.”
그는 저렇게 감정을 다루는데 능숙했다. 야바처럼 순간순간의 감정을 날것으로 게워내는 게 아니라 고매한 인격으로 대처했다. 그것조차 넘보지 못할 미덕이다. 초조해하는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야바는 바늘 같은 눈초리를 거두고, 베개에 얼굴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가방 들어주면.”
코카인이 피식 웃었다. 매번 이 문제로 부딪힐 때마다 야바가 그렇게 공격하면, 코카인은 저렇게 응수했고, 결국 이렇게 마무리됐다. 시간이 지나 이 사연은 대인배 코카인이 왕따 못난이를 거둬 은총을 내렸다는 미담으로 전해졌다.
30분쯤 달려와 파라디소에 도착했다. 좁은 밴에 구겨졌던 청년들은 괴성을 터트리며 내렸고, 가게 뒷문으로 들어갔다. 헤쉬쉬가 건네받으려는 것도 뿌리치고 코카인은 야바의 가방을 들어다 날랐다. 황공하게도 손수 말이다. 야바도 뭉실한 몸을 움직여 벤에서 내렸다. 가게 뒷문에서 통화를 마친 임수가 다가섰다.
“넌 지금 곧바로 출발해야 되니까 따라와.”
야바의 맥박이 빨라졌다. 임수가 뜻하는 말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주변을 봤지만, 차이석은 보이지 않았다.
“데리러 오는 거 아니었어?”
“너 모시러 올 만큼 시간 남아도는 사람 아니야. 잔말 말고 따라와. 그리고 반말하지 마.”
임수는 부러지게 말하고는 저만치 걸어갔고, 야바는 코카인한테서 가면을 꽉 쥐고 뒤따라갔다.
“누구길래 똘아이만 따로 불렀지?”
“그러게. 별일이 다 있네.”
“만만치 않은 똘아인가 보지.”
남은 청년들은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코카인은 임수 차에 타는 야바를 보았다. 차는 곧 출발했고 시야에서 멀어졌다. 헤쉬쉬가 코카인에게 말했다.
“신경 쓰여?”
난데없는 물음에 코카인은 헤쉬쉬를 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래?”
헤쉬쉬는 헤아릴 수 없는 눈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후, 하며 웃었다.
“실없는 소리니까 긴장하지 마. 아무래도 어제 일하고 관련 있는 거 같지? 뜬금없이 사장실에 불려 간 것부터 이상했어. 게다가 차 전무까지 함께……. 어제 방에 들어갔을 때 차 전무가 아무 말 안 했어?”
“그런 말 하는 분도 아니고, 나도 사적인 일은 안 물어보니까…….”
헤쉬쉬는 차 전무가 파라디소에 오면 항상 예민하게 굴었다. 그건 야바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예약명단에서 차 전무를 발견하는 순간이 가장 복잡한 심경이 드는 순간이었다. 코카인은 야바의 짐을 들고 가게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한참을 빠져나왔다. 양평이라는 이정표를 지나 또 한참을 달렸다.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도착한 곳은 호수가 내다보이는 녹지였다. 사방은 어둠과 나무로 둘러싸여 시야도 좁아졌고 병원 비슷한 것도 안 보였다.
“병원은?”
“일단 기다려 봐. 이쪽으로 오라고 했으니까.”
임수는 앞만 보며 대답했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났는데도 사람 그림자도 안 보였으며 임수도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야바는 차 뒷좌석에 앉아 밖을 둘러보았다.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여서 어디가 물이고 뭍인지 구별이 안 됐고, 인적도 드물어서 딱 시체 유기하기엔 적당한 장소였다. 그 순간 가슴에서 덜컥 소리가 났다. 자동적으로 아웃 되기까지 점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했다. 위험하지만, 아직 여유가 있었다. 생각 끝에 한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바로 어제 일이었다. 자신은 엄연히 차이석의 일을 다 알아버렸으니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할 거다. 틀림없다. 임수가 여기에 데려온 이유는 하나뿐이다. 정황이 딱 들어맞자 체온이 순식간에 떨어지고 공황에 빠졌다. 이렇게 개죽음당할 줄 알았다면 돈이나 다 써버릴 걸 그랬다. 코카인의 물에다 독극물을 모조리 넣지 못한 것도 한스러웠다. 아직 고환 수술도 못 받았는데 결국, 미완성된 몸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엄마와 같은 팔자를 밟는 것이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임수의 뒤통수를 노려 보았다. 이렇게 죽일 거면서 히터는 뭐하러 틀어준 건지, 인간다운 척했던 놈이 가증스러웠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점차 숨이 가빠졌다.
“…차이석 만나러 온 거 아니지?”
임수가 백미러를 통해 응시했다.
“뭐?”
“약속 취소된 거 다 알아. 그런데 중요한 내막을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처리하려고 데려온 거잖아. 니들이 하는 짓이 그런 거잖아.”
전직 깡패라고 했으니 살인하는 법이야 책을 낼 정도일 거다. 여긴 그가 실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뒷좌석을 빠르게 살피며 임수 머리통을 후려칠 것을 찾았다. 놈을 기절시키고 도망친다고 해도 이 허허벌판에 도움 청할 곳도 없었다. 눈으론 흉기 될만한 걸 찾으며 머리로 온갖 생각을 다 했다. 백미러 안에서 임수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그거 알아? 네 헛소릴 들으면 가끔 나까지 헷갈려. 그 망상이 현실화되는 게 싫으면 말버릇부터 고쳐.”
“어물쩍 넘어갈 생각……!”
뭐라 쏴붙이려는 찰나였다. 툭툭, 차창 두드리는 소리에 야바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차이석이 허리를 굽힌 채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머리가 하얘졌다. 야바는 가슴이 오그라들 만큼 한숨을 토했다. 비명횡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미리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임수는 차에서 내려 차이석에게 인사했고 다시 운전석에 올라탔다. 창문이 내려가자 차이석이 허리를 조금 더 깊이 숙였다. 회색 니트 사이로 강인한 목덜미와 쇄골이 꿈틀거렸다. 그는 표정없이 ‘안녕.’ 하며 입 모양을 만들었다. 야바가 대꾸없이 멀거니 보고 있자 그는 운전석으로 고개를 틀었다.
“내가 데려다 줄 테니 그만 가 봐요.”
“아닙니다. 번거로우실 텐데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데려다 줘요.”
말릴 틈도 없이 차이석은 야바를 뒷좌석에서 끄집어내고, 단호히 팔뚝을 잡았다. 그가 야바의 머리에서 발까지 눈으로 훑었다.
“그대로 갈 건가?”
“왜?”
야바는 경계를 기울였다. 어제도 하마터면 얼굴이 까발려질 뻔했기에 매듭을 재차 확인했다. 아깐 급하게 오느라 의상까지 차려입을 정신이 없었다. 검정 셔츠와 크림색 바지는 베네치아 가면에 안 어울리지만, 야바에게 있어 이건 단순한 가면이 아니었다. 자신의 추함을 가려주고 사람들의 눈초리를 걸러주는 보호장치였다. 알아서 하라는 듯, 차이석은 앞장서 갔다. 운동부족인 야바는 몇 발자국도 안 돼 헐떡거렸다. 차이석은 보폭을 늦추지 않았다. 야바는 넓은 등을 보았다. 왜 이렇게 늦게 연락했어? 늦을 거면 기다리지 않게 전화나 하지. 내 폰번호 모르지? 묻고 싶은 게 많지만, 할딱이는 입술은 다른 말을 꺼냈다.
“병원에 가는 줄 알았어.”
“병원에서도 손 못 대는 상태니까.”
“이런 데서 살면 없던 병도 덧나겠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차이석은 주변을 빙 둘러보며 공기를 가볍게 들이마셨다.
“이런 데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도 괜찮아. 소음이 철저하게 차단된 곳에서 자신이 죽어가는 1분 1초를 낱낱이 느끼는 거지.”
궁금했다. 그는 왜 아버지를 거스르는지, 왜 이복형제의 죽음을 부채질하는지, 그리고 어째서 저토록 짙은 심해를 닮은 눈을 갖게 됐는지도. 아득한 수심 아래는 생명력 가득한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은폐된 비밀에 함부로 침범하면 죽음의 공간이 되고 마는…….
훌쩍 앞서 가는 등은 낯선 곳에서의 유일한 방패였지만, 굳건한 벽처럼 보였다. 언젠가 저 옆에 나란히 걸을 날이 올까? 혹은 그가 자신의 보폭을 맞춰주는 날이 올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야바도 걸음 속도를 높였다. 숨이 턱까지 찰 즈음, 불 들어온 별장이 보였다. 별장이라기보다 궁전에 가까운 축조물이었다. 뒤에선 야트막한 산이, 앞에선 호수가 검은 눈을 반짝거리며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른 키만 한 담장은 주변 밭이며 녹지를 점령해 굳건한 결계를 쳤다. 정문을 거쳐 현관까지 가는 길목엔 뼈만 남은 정원수가 괴기스러운 노래를 불렀고, 귀신 눈알 같은 가로등은 낯선 방문객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겨울이 주는 냉기와는 다른 스산함에 야바는 몸을 떨었다.
현관에 도착하니 도베르만 세 마리가 이를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야바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개는 제일 싫었다. 냄새나고, 더럽고, 야바에게 벌레를 옮긴 중간숙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만.” 차이석의 명령에 사납던 도베르만이 꼬리를 내렸다. 정장차림의 경호원이 현관을 열어주자 차이석이 안으로 들어섰고, 야바는 개한테서 멀찌감치 떨어져 들어갔다. 유럽풍으로 꾸민 실내를 가로질러 원형으로 된 계단을 밟아갔다. 발소리와 적막한 공기가 뒤를 따라왔다. 긴 복도를 지나 제일 끝 방문 앞에 서는 순간이었다. 안에서 요란한 파열음이 났다. 동시에 남자 목소리가 쩡쩡 울렸다.
“호스피스 요양원?! 내가 거기에서 산송장들하고 뭘 할까? 마주앉아 고스톱이라도 칠까? 환자한테 죽을 준비나 하라는 게 의사야? 꺼져 돌팔이 새끼야!”
“자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런 곳이 아니라네. 일단 가면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쨍그랑! 와장창! 다시금 부서지는 소리가 중년 남자의 목소리까지 잡아먹었다. 차이석은 “휘유.” 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곧바로 문이 열리고 중년 남자가 깨진 안경을 들고 나왔다. 중년 남자의 눈가에는 피가 흘러내렸다. 이석은 닫힌 문을 힐끗 보며 말했다.
“저럴 거라고 했잖습니까.”
“그러게. 자네 말 들을 걸 그랬군. 난 아래층에 있을 테니 급한 일 생기면 부르게.”
중년 남자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차이석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야바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조금만 분위기가 진정되면 가자.”
“지금이 딱 좋아.”
그가 또 문고리를 돌리려 하자 야바는 더욱 세게 팔을 잡았다. 막상 오긴 했지만, 이런 분위기라곤 생각 못 했다. 우산도 없이 폭풍을 뚫고 가는 기분이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야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알고 있겠지? 힐러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게 만들어 줘.”
귀에 닿는 낮은 음성에 야바의 어깨가 꽉 움츠러들었다. 문득 뒷머리에 닿는 손길이 있었다.
“긴장 풀어. 넌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차이석의 행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손이 닿은 곳에 열기가 솟구치고 심장 고동이 더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야바의 손목을 움켜쥐고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문이 활짝 열리는 찰나 눈앞이 하얘졌다. 동시에 지독한 죽음의 냄새에 현기증이 몰아닥쳤다. 차츰 눈앞이 선명해지자 바닥에 부서진 유리조각과 뒤집어진 의자들이 보였다. 말기 암 환자가 왜 여기에 있을까라는 의문을 날릴 만큼 방안은 병원을 그대로 옮긴 풍경이었다. TV에 나온 특실같이 화려하게 꾸몄지만,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안을 둘러보고 나자 이윽고 침대 위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잘 보존 된 미라 같았다. 몇 개의 주삿바늘에 뚫린 앙상한 팔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조금 전 호통치던 사람인지 의심될 만큼 초췌했고, 죽음에 쫓기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일면식조차 없지만, 그가 차명환임을 직감했다.
“진정하고 눕거라.”
그 곁에는 좀 더 나이 든 남자가 차명환을 다독였다. 나이 든 남자는 왕좌를 내준 정글 사자의 얼굴이었다. 또 어쩌면 차이석이 삼십 년 뒤에 저런 얼굴이 아닐까 짐작게도 했다. 그는 아마도 차이석에게 정자를 제공해준 사람일 터였다. 차명환이 뒤늦게 방문객을 발견했고, 회장도 시선을 돌렸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길이 엇갈려서요.”
부자는 퍼석한 인사를 나누었다. 차이석은 뒤집힌 의자를 세워 그 위에 앉고는 차명환에게 말했다.
“좀 어때요?”
“저 돌팔이 새끼가 사람 속 뒤집잖아. 당장 잘라버려. 사람 잡을 새끼야.”
“양 박사만 한 실력도 없으니까 이번엔 넘어가죠.”
“너도 아까 하는 소리 들었을 거 아냐? 담당 환자한테 호스피스에 틀어박혀 있으란 게 할 말이냐고?! 당장 협회장한테 전화 돌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새끼 매장하고 말 거니까.”
차이석은 꼰 다리에 팔꿈치를 세우며 차명환을 물끄러미 보았다.
“매장씩이나…. 오늘은 밤도 늦었고, 일단 자 봐요.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도 여전히 화가 안 풀린다면 그때 매장하든 수장하든 하고. 어때요?”
“…….”
이석은 차명환의 격정에 휩쓸리지 않고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차명환은 분이 덜 풀린 듯 쇠 비린내 나는 호흡을 뱉었지만, 표정은 점차 이완됐다. 이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알았어.”
의외였다. 당연히 차이석과 차명환이 얼굴만 봐도 으르릉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차 명환은 차이석에게 어떤 적의도 없는 듯했다. 오히려 신뢰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차이석 역시 배다른 형제의 죽음을 부추기던 사람인지 의심될 만큼 걱정하는 기색까지 비췄다. 그들은 평범한 형제처럼 보였다.
“급하게 오느라 빈손입니다. 대신 멋진 선물을 가져왔어요.”
그제야 입구에 우두커니 있는 야바에게 이목이 쏠렸다.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차 회장은 날카롭게 주시하며 말했다.
“왜 여기에 불려 왔는지 잘 알 테니 설명은 그만두지. 넌 일단 그 흉측한 가면이나 벗거라.”
이석이 말했다.
“얼굴을 보이는 건 규칙 위반입니다. 사장한테 신상정보는 확인했으니 염려 마세요.”
“확실해? 철저하게 확인한 게 맞느냐?”
“물론입니다.”
“서류는 당연히 받았겠지. 보여다오.”
“사무실에 두고 왔습니다. 내일 보내드리죠.”
차이석은 혀를 내두를 만큼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뻔뻔했다. 주민등록이 말소됐기에 애초부터 야바의 신분을 증명할 서류 같은 건 없었다. 차 회장은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 장비서 보내서 팩스 보내라고 하거라.”
“퇴근시켰습니다.”
“전화 돌려.”
“한참 자고 있을 겁니다.”
“깨워.”
“자는 사람 뭐 하려구요. 자꾸 집안일로 부리면 걔들도 피곤해요.”
“그게 놈들 할 일이야.”
“그건 아버지 생각이고. 아무리 충성스러운 개라도 혹사시키면 물어뜯죠. 저는 개한테 물릴 생각 없습니다.”
그 순간 차 회장 눈에 서슬이 번뜩였다. 뒷방으로 물러난 늙은 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눈만 마주해도 주저앉힐 기백이었다. “흠….”하며 이석은 느릿느릿 말했다.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보셔도 안 됩니다. 내일 바로 보낼 테니 하루만 참아 보세요.”
날 세운 차 회장 눈빛에도 이석은 여유작작한 얼굴로 응수했다. 저 둘이 앉아 있는 틈에다 손을 집어넣으면 수십 조각으로 절단될 것처럼 소리 없는 전쟁이 몰아쳤다. 차명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버지…. 왜 엄한 이석이한테 그러세요? 어련히 알아서 했겠죠.”
회장은 아들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감히 누가 태령가를 상대로 눈속임할까. 그럴 배포를 가진 놈이면 한번 만나보고 싶군.”
이윽고 차명환이 야바에게 눈을 돌렸다. 야바 역시 그를 마주 보았다. 삼십 대 중반은 넘어 보이는데 태령그룹 사장이라는 작자가 철부지에 유약한 모습일 거라곤 생각 못했다. 일부러 알려주지 않으면 차이석과 형제라는 게 의아할 만큼 닮지 않았다. 병마에 갉아 먹히지 않았더라면 보기 좋은 체격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숨을 고르지 못하는 건 힘겨워서이기보다 악에 받쳐서인 듯했다. 죽음이 드리운 얼굴에서 유일하게 생동감 넘치는 건 아집을 틀어쥔 저 눈이었다.
“그래. 니가 코카인인지 뭔지 하는 힐러라고?”
차명환은 가면을 쓴 야바를 훑어보며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냈다. 야바는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힐끔 차이석을 살폈다. 그는 뻔뻔할 만큼 당황하거나 경직된 기색이 없었다. 차명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물으면 바로바로 대답해. 힐러냐고 묻잖나?”
막상 질문을 받으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느덧 가면 아래는 땀이 흥건하게 찼고 뒷목도 경직됐다. 이 자리에 코카인이라면 몇 분 만에 저들의 미심쩍은 표정을 180도로 뒤바꿔놓았을 것이다. 야바는 차이석을 빗겨 보았다. 그는 저들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서로 달랐다.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야바는 턱을 치켜들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 왜 이 시간에 오라 가라야? 사람 귀찮게.”
차명환과 차 회장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차명환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너 몇 살이야?”
“너보다 어려. 이 말 듣고 싶어서 그렇지? 지금 내 나이 물어보려고 이 논밭밖에 없는 데로 불렀냐?”
“…….”
차명환은 정수리를 장도리에 찍힌 안색이었다. 이석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쇳소리 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뭐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감히 누구한테 반말이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너도 아까 나이 많은 의사한테 반말하고 욕도 했잖아. 너는 되고 나는 왜 안 돼?”
“뭐, 뭐……?”
“괜한 걸로 시비 걸지 말고 본론으로나 넘어가.”
“……너… 내가 누군지 몰라?”
하아…. 야바는 입을 동그랗게 벌려 탄식했다.
“니들은 무명가수로 살다 죽은 귀신 붙었어? 왜 그렇게 몰라본다고 징징대? 나도 내가 누군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는데, 니가 누군지 알게 뭐냐고.”
그 순간 차이석은 말려 올라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차명환과 차 회장은 얼굴 근육을 부들부들 떨었다. 극명하게 상반되는 반응은 자신이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라 믿고 싶었다.
“하, 뭐 저런, 저런 게……. 차 전무. 제대로 데려온 거 맞아?”
“물론이죠.”
“진짜야? 뭐 저런…….”
차명환은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지 못했다. 반면, 차 회장은 감정의 빈틈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저런 천박한 게 대체 어떻게 명환이 병을 고칠 수 있단 거냐? 똑바로 데려온 게 맞느냐?”
“저도 소문만 들었지 이런 타입일 줄은…….”
차이석은 자못 진지한 눈으로 야바를 응시했다. 세 개의 시선이 쏟아진 가운데 야바는 덩그마니 홀로 서 있었다. 이석이 이 모든 연극의 연출자임은 알지만, 이 구도가 왠지 서글펐다.
금세 평정을 되찾은 차 회장이 엄중하게 말했다.
“좋다. 그럼 우리 아이를 어떻게 치료한다는 건지 설명해 보거라.”
“설명하면 알아? 어차피 증명할 때까진 안 믿을 거잖아.”
“그러니 말로라도 설명하라는 거다.”
“싫어. 귀찮아. 궁금하면 알아서 조사해.”
“…….”
화를 욱여넣은 차 회장 입술이 씰룩거렸다. 뒤늦게 차이석의 표정없는 얼굴이 눈에 걸렸다. 아, 혹시 너희 아빠한테 반말해서 기분 나빴어? 밑져야 본전이란 심경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는데, 놀랍게도 차이석이 알아듣고는 눈을 반짝였다. 그건 더 분발하라는 의미처럼 보였다. 차 회장 입을 닥치게 했더니 이번엔 차명환이 넘겨받았다.
“좋아. 지금 그걸 논할 때가 아니지. 그럴 기력도 없고. 수소문해 봤더니 너를 아주 신처럼 떠받든다더군. 사이비 종교집단처럼 말이야.”
그는 코웃음 치며 덧붙였다.
“물론 난 음악을 좋아하지. 음악회도 자주 가는 편이고 음악으로 병을 고친다는 것도 한 번쯤 들었어. 노래로 말기 암을 치료한다니 대단한 능력이야. 물론 신의 계시는 받았겠지. 그럼 목소리를 쏴서 암세포를 태우는 건가? 뱃가죽도 가를 필요 없으니 미용상으로는 혁신적이겠군. 하! 노래로 암을 고쳐? 내가 너 같은 싸구려들한테 속을 것 같나?”
차명환은 격앙된 숨소리를 뱉었다.
“제발 토할 것 같은 가면 좀 치워. 그 꼴을 보니 없던 병까지 생길 지경이니까! 좋아. 그렇게 자신 있거든 힐러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한번 증명해 보라구.”
다른 말은 전부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외모에다 시비 거는 건 그 어떤 경우에도 참을 이유가 없다. 잠자고 있던 벌레가 차츰 꿈틀거렸다. 볼을 긁적이며 바닥에 뒹구는 유리파편을 보았다. 누군가의 목을 긋기 좋은 각도로 깨졌다. 야바는 싸늘하게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내가 믿지. 지금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거든.”
“그럼 믿지 마.”
“그러니까 니가 진짜라는 걸 증명해서 믿게 하란 말이다!”
“내가 왜?”
입을 꽉 다문 차명환이 눈가를 떨었다.
“날 고치치고 싶어서 안달 난 최고 명의들이 줄을 섰어. 여기가 너 같은 싸구려들이 함부로 발 들이는 곳인 줄 아나?”
모멸 섞인 눈초리가 눈에 낀 먼지처럼 거슬렸다. 한 달밖에 안 남았다고 들었다. 비록 가짜라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쥔 사람 앞에서도 결코 고개 숙이지 않는 작자들을 보니 웃음이 났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우아하고 싶었나 보다. 방에 들어섰을 때 풍겼던 악취의 정체를 이제 알았다. 그건 썩어가는 오만방자함이었다. 야바는 차가운 눈으로 그 모든 걸 응시하며 말했다.
“떠드는 거 보니까 아직 살만한가 보네. 니가 살려달라고 매달려도 이젠 내가 싫어졌어.”
그리고 덧붙였다.
“나도 개나 소나 막 살려주진 않거든.”
한순간 살얼음 같은 침묵이 엄습했다. 차 회장과 차명환은 구정물 마신 얼굴이었다. 차이석은 고개를 돌리더니 어깨를 떨며 웃음을 참았다. 즐거워서 돌 것 같은 눈에는 야만적인 광채가 번뜩 스쳤다. 미소 사이로 비치는 가지런한 치아가 핏물 줄줄 흐르는 고기를 씹어 발기는 듯했다. 동족마저 모조리 씹어 삼킬 심해의 포식자처럼 말이다. 그리고 차명환이 화분을 집어든 건 누구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차이석이 자릴 비운 사이, 야바는 가면을 내렸다. 차 백미러로 이마를 살피니 거즈에 피가 흥건했다. 차명환은 야바의 머리에 화분을 던지고, 목까지 조르며 미쳐 날뛰었다. 이석이 빨리 끌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팔뚝에 꽂힌 주삿바늘까지 뽑아서 휘두를 기세였다. 의사는 차명환에게 진정제를 놔주고 아래층으로 와 야바의 이마도 치료했다. 야바는 그 와중에도 고집스럽게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밖에 나오니 임수는 보이지 않았고, 차이석이 자기 차에 쑤셔 넣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차를 얻어탔다. 차이석은 오는 내내 운전하다가 큭큭거리다가를 반복했다. 상처가 꽤 심했는지 야바의 볼까지 피가 흘렀다. 그는 차를 세우고 인근 약국으로 달려갔다.
야바는 얼굴을 꼼꼼히 가리며 리본을 질끈 동여맸다. “으읏.” 가면이 상처를 건드려 욱씬거렸다. 옷은 죄 늘어지고 찢어져 뱃살이며 팔뚝 살이 삐져나왔다. 이마에 금이 간 가면을 보자니 놈의 면상을 똑같이 못 만든 게 원통했다. 의자에 기대니 안락한 감촉이 등에 감겨들었다. 멀리 도로 위에서 차 불빛이 꼬리를 끌며 지나갔다. 사라지는 빛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이 일을 계기로 그의 뇌리에 자신이 각인됐으면 했다. 그 사람과의 시간을 독차지하길 바랬다. 그렇기에 필사적인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어제부터 한 모금도 못 잔 탓에 눈꺼풀이 혼곤해지고 주황색 불빛이 뭉개졌다. 어쩐지 오늘 밤은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병원에 가려면 30분은 더 가야 돼. 급한 대로 지혈만 하지.”
언제 왔는지 차이석이 흰색 봉투를 들고 차 문을 열었다. 찬바람을 몰고 운전석에 앉자 차체가 그쪽으로 뭉근하게 쏠렸다. 차이석은 연고와 거즈를 자신의 허벅지에 펼쳤다. 한 손에는 거즈를, 다른 손가락에는 약을 묻히고, 몸을 살짝 틀어 준비태세를 갖췄다.
“얼굴 이리로.”
“내가 할 거야. 숙소에 가면 약하고 다 있어.”
“그걸 쓸 일이 많나 보군. 자, 얼굴.”
야바는 연고 묻은 그의 손가락을 곁눈질했다. 저 손가락이 이마에 닿으면 분명 견딜 수 없을 거다.
“그럼 이대로 해.”
야바는 머뭇거리다가 엉거주춤 이마를 내밀었다. 차이석은 최대한 가면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피를 닦고 약을 발랐다. 이마에 닿은 부드러운 손놀림에 현기증이 났다. 야바의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그의 목덜미와 어깨가 야바의 눈을, 그의 눈길이 이마를, 숨소리가 귓가를… 모든 감각을 포위해 버렸다. 이유가 뭐든 적어도 지금은 야바가 그의 시야 바깥에 놓이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상처가 사랑스러웠다. 내일 아침 눈떴을 때도 그럴 터였다.
치료가 끝나자 손길도 물러갔다. 차이석은 양손을 핸들에 올리고 그 위에다 날렵한 턱을 얹었다. 문득 콧등에 와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렇게 웃어본 건 처음이야.”
아마 칭찬이 맞을 거다. 차명환은 야바에게 다시 나타나면 생매장시키겠다고 했다. 차이석이 만족할만한 결과였고 모든 게 계획대로 됐다. 그가 시동을 걸며 기어에 손을 얹었다. 야바는 잘 깎인 얼굴을 보았다. 편하게 늘어트린 그의 머리카락은 짙푸른 색을 띠었다. 문득 그곳에다 손가락을 대 보고 싶었다. 야바는 손을 꽉 쥐었다. 손으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
이석이 느리게 고개를 돌리자 신경이 경직했다. 야바는 나머지 말을 쥐어짰다.
“수고비는……?”
순간 차이석의 입가에서 온기가 싹 빠져나갔다. 꼭 지금 내 기분을 망쳐야겠어? 하며 묻는 것 같다. 그건 너무나 선명해서 다른 쪽으로 생각할래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잠시간 비쳤던 그의 진짜 얼굴에 부드러운 가면이 덧씌워졌다. 조금 전 그 표정을 환상이라고 생각할 만큼 철저하고 완벽한 가면을 말이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손가락으로 핸들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깜빡했네.”
마치 신호처럼 그의 눈길이 야바의 입가에 떨어졌다. 야바는 제 아랫입술을 윗니로 씹으며 방금 전 그의 표정을 뇌리에서 몰아내려 애썼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오늘 밤이 지나면 이석이 먼저 꺼내지도 않을 것이며 야바 역시 더는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오기 부리듯 그에게 똑바른 시선을 꽂는 순간 그의 손이 가면에 닿는 것이었다. 야바는 경기하며 뒤로 물러났다. 공수에 유리하도록 재빨리 다리를 의자에 올렸다. 차이석이 가면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건 잠깐 치우지그래?”
야바는 눈 둘 곳을 몰라 그냥 호숫가에 내팽개쳐버렸다.
“이, 이대로 하면 되잖아…….”
“난 키스할 때 입술과 혀만 핥지 않는데.”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당연히 가면을 쓴 채 수고비를 받을 생각이었다. 안 되겠다 싶었다. 야바가 밖으로 튀어 나가려 하자 이석이 문을 모조리 잠그고 도주로를 봉쇄했다. 한쪽 팔은 야바가 앉은 좌석에, 한쪽 팔은 창문 턱에 얹고는 전방도 완벽히 포위했다. 신랄한 눈빛이 박혀 들었다.
“그리고 네 얼굴이 정말 궁금해졌어.”
이석이 늘어진 가면 끈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고, 야바는 가면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저 손에 힘을 주면 가면이 딸려나가 그 아래 추한 얼굴이 드러날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속사포처럼 말했다.
“사실… 벌레가 있어. 벌레들이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든 거야.”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벌레 생김새를 그림으로 그릴만큼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이 말을 믿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진짜 있어. 지금도 내 몸에 알을 까고 얼굴까지 뜯어먹고 있어.”
그 순간 차이석의 입매가 냉랭해지고 눈동자엔 경멸이 긁고 지나갔다. 그 표정은 생명감 없는 사진 같았다. 무표정하던 그가 이내 고른 치아를 드러냈다.
“의심하는 게 아니야. 그런 사람을 아니까.”
이석이 끈을 잡아당기자 야바는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 보호막이 치우기 전에 보험이라도 들어놔야 했다.
“그럼 약속해…. 가면 벗고 나서도 절대 마음 바꾸면 안 돼.”
“약속하지.”
“진짜지?”
“진짜야.”
몇 번이나 다짐받고 나서야 야바는 그를 붙든 손에 힘을 풀었다. 이윽고 그가 가면에 달린 리본 끝을 잡아당겼다. 온몸에 힘을 꽉 주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고였다. 가면에 반사된 가쁜 숨결에 얼굴은 축축했다. 문득 차이석의 웃음이 어깨에 흩어졌다.
“옷 벗기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비장해?”
온 신경이 가면에 쏠려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손끝에 사로잡힌 리본이 팽팽해졌다. 매듭이 풀리고 가면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시원한 공기가 스미고, 머리카락이 이마에 흘러내렸다. 굴곡진 심장 소리에 토기가 났다. 아름다운 가면이 거둬지자 얼굴 가죽이 통째로 벗겨지는 것 같았다. 끔찍한 공포였다. 야바는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석은 가차없이 가면을 벗겨 냈다. “잠…!” 야바의 입에서 엷은 신음이 났다. 베네치아 가면은 깃털을 하느작거리며 이석의 허벅지에 튕겨 의자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탁탁…….
가면이 만드는 잔동이 점차 희미해졌다. 야바는 상아 빛깔의 아름다운 얼굴을 절망에 가까운 눈으로 보았다. 모든 걸 포기한 심경으로 있는 힘껏 시선을 움직였다. 어둠을 등진 차이석은 이미 뭔가에 놀란 듯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한동안 움직임 없던 그가 커다란 손을 들었다. 야바의 눈과 콧잔등 언저리를 손으로 가렸다 치웠다를 반복했다. 그 행동은 뭔가를 확인하는 몸짓 같았다. 큼직한 손이 내려가고, 조금 전보다 훨씬 모호한 표정을 한 차이석이 있었다. 야바의 눈길이 바닥과 천장을 스치고, 이석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어지러이 겉돌았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는 순간 그가 야바 손목을 잡아채 거칠게 아래로 내렸다. 그는 다시 야바의 눈에서 볼을 거쳐 턱언저리까지 핥듯이 뜯어보았다. 그때마다 표정은 미세하게 동요했다. 야바는 오래도록 숨을 멎었다. 격하게 뛰는 심장 소리에 고막이 아파왔다. 소리가 들릴까 봐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오랫동안 표류하고 온 그의 눈동자가 야바의 눈동자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잘 다듬은 그의 눈썹이 접혔다. 이어 눅진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술과 콧잔등이 정액으로 범벅된 게 어울리는 타입이 있지. ”
어둡고 짙은 눈동자가 질 나쁜빛을 발산했다.
“천사에게 실컷 강간당하고 매음굴에 버려진 사탄의 얼굴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