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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7화 (7/42)

힐러-track 05

야바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 팔뚝을 긁었다. 이 사무실은 기하와 그가 허락한 사람 외엔 들어와선 안 되는 성역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자신을 들이고, 귀한 차까지 대접한 저의를 되짚으며 가장 원초적인 궁금증을 풀어헤쳤다.

“왜 난데?”

맞은편에 앉은 기하가 대답했다.

“당장 너 같은 녀석이 필요하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너 같은 놈.”

야바는 냉랭한 얼굴로 대꾸했다.

“헤쉬쉬나 모르핀 있잖아.”

“걔들을 무슨 수로 하루 안에 너처럼 만들란 거지?”

“아픈 사람이라면서? 난 못 고치니까 코카인 보내.”

“코카인이 갈 수 없다고 했잖아.”

“그럼 보내지 마.”

“잔소리 말고 가.”

“싫어.”

“너 진짜……!”

꽉 쥔 기하의 주먹에 심줄이 돋아났다. 저 주먹에 제대로 맞으면 몇 초 동안 다리가 풀리곤 했다. 오늘따라 그는 유독 강경하게 굴었다. 아니, 초조해 보였다. 이때쯤이면 양복 안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며 으름장 놓겠지만, 꾸역꾸역 참는 게 눈에 훤했다. 평소 턱을 내밀며 쏘아붙이던 야바도 지금은 녹록한 분위기가 아니므로 침묵하기로 했다. 그때 야바가 기댄 소파 등받이에 누군가 팔로 지탱하고 섰다. 시원한 코롱 냄새가 번져 들자 모든 신경이 그곳에 고였다.

“내가 말할 테니 자리 좀 피해줘요.”

야바는 고개를 확 틀었다. 차이석의 옆모습이 훌쩍 높이 있었다. 멀끔한 정장 차림과 약에 취하지 않은 차이석은 주변 풍경을 낯설게 했다. 그가 예고 없이 시선을 부딪쳐왔다.

“너도 그러고 싶지?”

“아니.”

야바는 빠르게 대답했다. 기하가 눈앞에서 꺼져주는 건 좋지만, 그와 둘만 남는 것도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초조함에 손등을 박박 긁었다. 기하는 그런 야바를 힐끗 보았다.

“저한테 맡기시는 게 나을 겁니다. 곱게 말해선 알아듣는 녀석이 아니니까요.”

“곱게 말 안 하면요?”

차이석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어투로 물었다. 기하는 경직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서요.” 이석이 재차 눈짓하자 기하는 못 미더운 얼굴로 일어났다.

“도저히 안 되시면 언제든 호출하십시오. 곧 하시게 될 겁니다.”

이어 야바에게 말했다.

“전무님 심기 불편하게 하지 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기하는 검지로 제 머리를 툭툭 쳤다. 손가락 놀림에 야바의 머리 가죽이 쭉 당기는 듯했다. 안방을 내준 기하가 문을 닫고 나가자 철장 문이 닫히는 듯 철렁했다. 야바는 넓적한 허벅지에 힘을 잔뜩 주었다. 허리를 펴서 층층이 접힌 뱃살도 감췄다. 야바는 문을 힐끔거리며 입술 거스름을 물어뜯었다. 금세 피가 고이자 윗니로 입술을 감싸 피를 쪽쪽 빨아댔다. 그 소리가 차이석에게 입술을 물렸을 때와 흡사해 흠칫하며 뱉어냈다.

차이석은 야바가 앉은 소파등받이에 기대며 상체를 구부렸다. 각을 세운 팔꿈치가 야바 어깨에 닿을락 말락 했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지 그의 숨결이 가면에 붙은 깃털을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은색 가면을 지그시 눌러오자 목이 부러지는 착각이 들었다. 견디기 힘든 시선을 좇아 고개를 올렸다. 그가 이윽고 입을 뗐다.

“원래 그래?”

“뭐가?” 야바는 눈으로 물었다.

“항상 그렇게 사람 빤히 쳐다보냐고.”

그의 코롱 냄새에 사고가 한 발짝씩 뒤처졌다. 뒤늦게 야바는 질문의 의미를 고민했다. 기하와 똘마니, 고자 가수들에게 송곳으로 찌르고 싶은 눈이란 말은 자주 들었는데 혹시 그런 뜻인가 싶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사람 때문에 자꾸 몰랐던 자신을 알아간다. 한 번 먹으면 머리만 아픈 싸구려 마약, 원래는 숫말 발정제였던, 그리고 불쾌한 눈……. 또 말해 줘.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여?

그제야 야바는 눈을 내렸다.

“내일 넌 누구를 만날 거야. 그 사람 앞에서 니가 코카인이라고 하면 되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이해가 안 되면 그날 요트에서 했던 것처럼만 하면 돼.”

심장이 소리를 부풀렸다. 요트에서 있었던 일을 어디까지 기억하는 걸까? 지금 눈앞에 있는 비곗덩이가 자신이 개처럼 키스했던 사람인 걸 알면 어떤 표정일까? 그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과 영원히 기억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야바는 조금 전 지적당한 것을 망각하고 다시금 그를 빤히 보았다.

“싫어. 난 코카인이 아닌데 왜 자꾸 우기라는 거야?”

우습지도 않은 연극을 해야 하는 것도 싫지만, 코카인인 척해야 하는 게 더 질색이었다. 차라리 길바닥에서 하체 까고 노래하는 게 나았다. 입을 꽉 다문 야바의 볼에 시선이 닿았다.

“그 사람들은 코카인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내가 싫으니까.”

“그 사람이 누군데?”

“나를 만들 때 정자를 제공한 사람.”

즐거운 표정에, 신랄한 목소리, 그는 묘한 이질감을 풍겼다. 야바는 재차 물었다.

“너희 아빠가 왜 코카인을 만나고 싶어 하는데?”

“그 사람 아들이 암에 걸려서 한 달밖에 못 살거든.”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부지런히 살라고 해.”

“나도 그러길 바라지만 그 사람은 고쳐주고 싶어 하니까.”

“그럼 코카인 보내면 되잖아.”

“내가 싫다고 했잖아.”

왜? 왜 그렇게 보내기 싫은데? 야바는 그 말을 혓바닥 아래에 숨겼다. 그가 코카인 이름을 입술에 품을 때마다 무딘 바늘이 생살을 후벼 파는 듯했다. 어깨에 닿은 팔꿈치와 코롱향은 형욱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렇게 보내기 싫으면 안 보낸다고 하면 되잖아.”

“그 사람들은 코카인을 필요로 한다니까.”

“그럼 보내.”

“후….” 돌림노래 같은 대화에 차이석은 숨을 한 모금 뱉어냈다. 그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래. 내일도 이렇게 하는 거야.”

그는 재규어가 기지개 켜듯 상체를 앞으로 쭉 빼며 야바와의 눈높이에서 훌쩍 멀어졌다. 담배를 입술에 걸치며 그가 말했다.

“니가 할 일은 그게 전부야. 위험한 건 없고, 따로 수고비를 원한다면 말하고.”

“필요 없어. 어차피 기하 주머니로 들어갈 거야.”

“사장 몰래 줄게. 계좌번호 알려 줘.”

“나 통장 같은 거 없어.”

차이석은 모사 꾸미는 사람처럼 음성을 낮추었다.

“그럼 뭐 좋은 방법 없나?”

“없어.”

기하의 착취 수법은 교활했다. 가면과 의상은 자신이 소개한 디자이너에게만 맡겨야 했고, 눈 튀어나올 만큼 비싸도 일주일에 한 번씩 교체를 강요했다. 숙소도 월세며 전기세, 휴지까지 사비로 해결해야 했고, 가게에 실어다 주는 깡패한테 기름값도 찔러줘야 했다. 많이 벌어봐야 훨씬 더 많이 쓸 일이 줄을 섰으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였다. 그 옛날 달동네 사람들처럼 말이다.

“여기에선 비밀이 없어. 전에 어떤 애가 몰래 돈을 꿍쳤다가 들켜서 깡패들한테 2박3일 동안 두드려 맞았어.”

“저런.” 이석의 눈썹이 작위적으로 꿈틀거렸다. 말투와는 달리 그의 표정엔 연민 같은 건 한 점도 담기지 않았다. 먹이 사슬의 가장 우위에 선 그들에게 손해 볼 것 없는 이치일 터였다. 야바의 눈은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입술을 더듬었다. 입술과 피부는 약하는 사람치곤 매끄러웠고, 근육도 갉아 먹히지 않았다. 그건 스스로를 제어하는 지독함만이 쟁취하는 빛깔이었다. 차이석은 정물화 같았다. 멀리서 보면 생동감 넘치는 화려함으로 눈길을 끌지만, 한 발 가까이에서 보면 퍼석하고 차가운 물감의 질감이 적나라게 보이는…. 그들의 친절은 실패를 모르는 자의 여유로움일 것이다.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하지. 그래서 결론은?”

“만약에 내가 끝까지 싫다고 하면 어떻게 돼?”

“다른 녀석은 안 내켜. 내가 필요한 건 너야.”

자신이 가장 필요한 일은 이렇게 지저분한 모사를 완성할 때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무심코 내다 버린 언어를 주워담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거침없는 눈동자가 가면 아래 있는 야바의 표정을 핥아 올렸다. “고집 센데.” 그가 정돈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읊조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들지? 네 마음을 돌릴 방법이 있으면 귀띔 좀 해 줘.”

차이석은 상체를 숙이며 시선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저 기대에 부응하고 싶으면서도 완전히 깨부수고 싶었다. 당장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으면서도 이 시간을 영원토록 붙잡고 싶었다. 그에겐 항상 두 마음이 산란했다. 처음엔 의도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서 분한 마음뿐이었다. 그 입맞춤이 머리를 온통 차지했고, 그러다 자꾸 눈이 갔고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한 번 더 보게 되니 내일도 모레도, 또 그다음 날에도…. 매일매일 보고 싶었다. 그러다 만지고 싶었고, 만져줬으면 했고…. 그에게만은 자꾸 헤퍼졌다.

“돈은 됐어. 대신에 내가 이 일을 한다면…….”

“음?” 하며 그가 신경을 집중했다. 그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당시에도, 시간이 지나서도 모를 것 같다. 살았을 때 알지 못하는 건 너무 많았다. 야바의 입술에서 실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뭘 해줘? 똑바로 말해.”

차이석은 몸을 숙여 야바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댔다. 깨끗한 귓바퀴와 눈에 가득 들어오고, 셔츠 안에서 풍기는 향기가 현기증 나게 했다. 쿵쿵쿵…심장 고동소리는 주술용 북처럼 머리를 혼몽하게 했다.

“……키.”

야바는 입술을 벌렸다 오므렸다, 남은 언어를 그의 귓속에 흘려보냈다.

“키스해 줘…….”

그 순간 차이석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의 주변 공기가 경직된 것이 피부에 확연히 느껴졌다. 저기서 변하게 될 표정은 차마 볼 수가 없어 야바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심장은 파열되기 직전이었다. 혈관과 피부 아래 있던 벌레는 모두 숨죽였고 알도 부화를 미루었다. 한동안 같은 자세로 있던 그가 느릿느릿 고개 돌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야바는 눈만 연신 깜빡거리다가 간신히 그를 보았다. 시야가 좁아지며 그의 얼굴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그의 눈빛에 선명한 조소가 지나갔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있어 눈은 소통기관이 아니라 공격도구였다. 싫어? 라고 묻는 건 어쩌면 무의미한 물음일 터였다. 이런 살 뭉치 얼굴을 감싸고 비곗덩어리 몸을 껴안으며 키스하는 건 상상만 해도 구역질 날 것이다.

하지만…꼭 내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나 사람 열 받게 하는 거 잘할 자신 있어.

와락 서글픔이 눈가에 몰렸다.

“싫으면… 됐어. 다른 사람 알아봐.”

그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아마 영원히 대답을 돌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숨소리가 전부인 시간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 숨 막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야바의 양어깨를 감싸며 도로 앉혔다. 천천히 고개 돌렸을 때 차갑게 정제된 이목구비가 눈앞에 가득했다. 강제로 앉힌 사람인지 의심 갈 만큼 그는 미동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침묵을 밀어냈다.

“진짜 그거면 되나?”

귀를 의심할 만한 물음이었다. 심장이 수면 위로 펄쩍 튀어 올라 무섭게 박동했다. 야바는 한참을 굳어 있다가 눈 맞춤하지 않은 채 머리를 주억거렸다. 차이석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반짝였다.

“입술만? 아니면 혀까지?”

다분히 짓궂은 의도였다. 그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 스스로 선택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야바는 뜨끈해진 미간을 구기며 대답했다.

“뒤에 거…….”

턱에서 삐그덕 소리가 날 듯한 목소리였다. 날렵한 그의 눈가에 길쭉한 능선이 그려졌다.

“좋아. 제대로만 한다면 혀가 녹을 만큼 해 줄게.”

이번에 놀란 건 야바였다. 야바의 얼굴에 피가 몰리고 머릿속에서 북소리가 요동쳤다. 그는 왜 이런 제의를 하는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자신이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도, 그가 받아들였다는 것도 현실감이 나지 않아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차이석은 소파를 빙 돌아와 옆에 앉았다. 그때였다. 그가 다짜고짜 야바의 가면에 손을 가져갔다.

“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모공이 오그라들 만큼 진심으로 놀랬다. 제 입을 틀어막느라 방치된 가면에 차이석이 다시 손댔다. 야바는 그의 손목을 잡으며 목소리를 삼켰다.

“……뭐하는 거야?”

“거사를 함께할 텐데 얼굴은 알아야지.”

차이석은 야바 손에서 가볍게 빠져나와 다시 시도했다. 야바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규칙 위반이야. 밖에 기하도 있어.”

“살짝 봤다가 다시 덮으면 돼.”

“안……!”

그가 망설임 없이 리본을 당기자 매듭이 확 풀어졌다. 야바는 뒤로 물러나다가 소파에 널브러졌다. 차이석이 덮쳐오며 남은 매듭마저 풀어 젖혔다. 야바는 얼굴에서 떨어지는 가면을 간발의 차로 잡아챘다. 지금 얼굴을 본다면 모든 약속을 엎을 게 분명했다. 가면 아래 숨었기에 황당한 조건도 받아들인 것이다. 저렇게 느긋한 농담까지 곁들이는 것이다. 체온이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안 돼! 안 돼! 그런 짓 하지 마!!”

되는대로 그에게 발길질하자 그가 짧게 신음했다. 야바는 가면으로 악착같이 얼굴을 감춘 채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요란하게 문이 열리자 밖에 있던 기하와 임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쾅――――――!!

대기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앞만 보며 걸어갔다. 수십 개의 눈알이 몰려들었다. 곧바로 야바의 자리로 가서 가면을 내던지고 짓밟기 시작했다. 밑바닥에 잠자는 분노를 긁어보아 발에 실었다. 고작 가면 뒤에 숨어서야 그와 얘기하고, 바라보고, 키스하고, 그런 것들이 허락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만약 그가 지금이라도 모든 약속을 무로 돌린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보내줄 것이다. 아니, 실은 한 번만 가까이서 그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가 맑은 정신일 때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눈가에 열기가 몰렸다. 조각난 가면을 하나도 남김없이 잔혹하게 밟아 뭉갰다. 고자 가수들은 그런 야바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혀를 내둘렀다.

“또 지랄이네. 또 지랄이야. 저 비싼 걸 대체 몇 개째야?”

그때 임수가 들어와 가루가 된 가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코카인에게 말했다.

“차 전무님 수타이실에서 기다리신다. 어서 가 봐.”

“네.”

코카인은 난장판을 심란한 눈으로 봤다가 가면을 쓰고 대기실을 나섰다. 뒤를 이어 임수도 따라나가다 불쑥 돌아섰다.

“차 전무님이 내일 데리러 온다고 했어. 미리 준비해 둬.”

야바는 숨을 할딱이며 발길질을 멈추었다. 확인할 새도 없이 임수는 시야에서 멀어졌다.

“후우…….”

이석은 수타이 테라피 실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눈가를 주물렀다. 은은한 조명으로 적당한 어둠을 지닌 밀폐공간은 양 모서리에 토사칸 동상과 코끼리 조각, 고가의 장식품으로 태국 황실을 재현해 놓은 듯했다. 그는 마르텔을 잔에 따랐다. 크리스털 술잔을 흔들자 백색 가루가 진한 액체에 녹아들었다. 술을 왼쪽 볼에 머금은 채 조금 전 일을 되새김질했다. 야바라고 했던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축냈지만, 이 일에 그만인 녀석이다. 차 회장이 총애해 마지않는 아들 목숨을 싸구려 태생에게 맡길 리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차 회장이 노망나서 받아들인다 해도 어차피 힐러가 아니니 빈 깡통이나 다름없다. 하나는 해결했다 해도 그 외 모든 변수에 대비해야 된다.

이석은 눈꺼풀을 내리며 알알함을 음미했다. 백색 환락이 푸른 정맥을 빠르게 휘돌아 전신에 흡수됐다. 축축하고 긴 혀가 핥은 듯 전신이 눅눅해졌다. 주홍 불빛에 잠복된 태국 풍취가 뒤틀렸다. 피곤을 풀어헤친 눈동자는 밤보다 더 깊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숨을 길게 들이켰다. 담배연기, 술 냄새, 신음소리, 모두 치열한 삶의 냄새였다. 홀연히 잔기침 소리가 났다. 소리를 따라 시선이 흘러갔다. 문가에서 베네치아 가면을 쓴 청년이 서 있었다. 미지의 공간에 다녀온 이석의 눈동자는 좀처럼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잠시간의 시간을 두고 그가 말했다.

“내가 간 줄 알았어?”

코카인은 웃음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깃털에 달린 크리스털 구슬이 맑게 울렸다. 빛을 등진 그의 곡선이 둔탁한 시야를 점령했다. 코카인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말했다.

“5분 전부터 있었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허공에 박힌 흐리터분한 시선이 코카인에게 옮겨갔다.

“넌 네 힘을 얼마나 믿지? 네 노래로 사람 목숨까지 건질 수 있나?”

“죽은 사람을 살린 적은 없지만, 암투병하는 사람은 경험이 있어요.”

“대단한데.”

이석은 술잔을 기울이며 빛에 둘러싸인 코카인을 감상했다. 음양이 공존하는 목소리, 신과 인간이 만들어 낸 합작품. 퇴폐적인 이름으로 숭고한 기적을 일으키며, 여기 천국과 지옥이 맞닿은 곳에 꼭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코카인이 만드는 소리 세계는 그토록 경이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기적의 목소리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건가. 술 위를 표류하는 얼음 결정체에 일그러진 이석의 얼굴이 투영됐다.

“마약도 애초엔 치료 목적으로 사용했다더군. 하지만 인간의 쓸데없는 상상력 때문에 본연에서 변이하고, 결국 육신과 정신까지 갉아먹는 악마가 됐지.”

낮은 음성이 잔 속에 스며들었다.

“네 노래도 그렇게 변이할까?”

한순간 차이석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 빛을 잡아보기도 전에 사그라졌다. 코카인의 표정이 어둑해졌다. 차이석은 상대를 매료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건 헐거운 행동과는 다른 황폐한 눈동자 때문일 거다. 비밀을 숨긴 깊은 눈동자가 가끔씩 본성을 드러내며 한걸음도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이 순간, 자신의 노래는 저 술과 마약보다 무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혼자 계시고 싶은 거 같은데 원하시면 나갈게요.”

이석의 몸이 찹찹한 소파에 늘어 붙었다. 그는 기적의 청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와서 오염된 영혼이나 치유해 줘.”

좁은 창고 곳곳엔 거미줄이 드리워졌고 먼지 쌓인 나무 상자가 시멘트 바닥에 뒹굴었다. 기하는 덩치 큰 사내들에 포위된 탈주범을 응시했다. 탈주범은 뼈 부대끼는 소리가 날만큼 떨었고, 발목은 뒤틀려 있었다. 마리화나였다.

“근방 모텔에 숨어 있더군요. 송신호가 안 잡혀서 시간이 걸렸습니다.”

곁에선 임수가 말했다. 기하는 담배 필터를 잘근대며 마리화나에게 물었다.

“말해 봐. 도대체 뭐가 불만이지? 난 너희를 인간적으로 대했어.”

마리화나는 눈물 콧물 범벅된 목소리로 답했다.

“너, 너무 답답해서 바람이나 쐬고 싶었습니다. 진짜 돌아올 생각이었어요! 믿어 주세요!!”

“얼마 전 뉴스 봤어?”

“…….”

“어떤 포주가 여자들을 감금하고 윤락행위를 강요했더군. 이불 한 채와 요강이 전부인 골방에 처박아두고 말야. 내가 몸을 팔게 했나? 외출을 못하게 했나? 아니면 월급을 착취했나? 나는 그런 새끼하곤 질적으로 달라. 물론 너희에게 통금 시간을 정하거나 통화 내역을 조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20대 성인 남자를 통제하려면 규칙이 필요하니까.”

기하는 담배를 발로 비벼끄며 마리화나의 머리카락을 틀어잡았다.

“하지만, 규칙은 어딜 가나 존재해. 거기서도 규칙은 있었을 거 아냐? 앵벌이 두목 년한테 좆 꽂아주던 시절이 그리웠어? 너 같은 길바닥 출신들이 어디 가서 구경이나 하는 돈인 줄 알아?”

기하는 눈을 번뜩이며 생고기를 씹듯 말했다.

“야바가 나한테 기어올라도 왜 가만두는 줄 알아? 걘 여기서 벗어나려는 의욕 자체가 없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네크로필리아-시체 도착증-들한테 던져주고 싶어도 그것 때문에 참게 돼.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구.”

마리화나는 숨죽여 울며 간신히 목소리를 토했다.

“저, 저는 그냥……. 하루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어요…….”

“넌 힐러도 아니고 너 정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이 버튼을 누르고 싶은 걸 얼마나 참은 줄 알아? 길 한복판에서 뇌가 터져도 니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

그가 청년의 코앞에 작은 리모컨을 들이대자 작은 버튼이 7개가 보였다. “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마리화나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떨림은 격렬해졌다. 기하는 마리화나의 얼굴에 난 멍 자국에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 만들지 말랬잖아.”

“심하게 반항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깨끗하게 처리해. 먼저 녀석은 금세 부패해서 본전도 못 건졌으니까.”

신호를 넘겨받은 임수는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사내들에게 머리를 짓눌린 마리화나는 절박한 눈으로 기하를 보았다. 기하의 눈빛에는 짜증과 연민이 뒤엉켰다. 얌전히 처박혀 있기만 해도 네크로필리아들의 제물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목덜미에 주삿바늘이 박힌 순간 마리화나는 눈에 핏대 세우며 절규했다. 약물이 들어가자 탈주범의 몸이 까부라지고, 잔 경련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채 차가워졌다.

뒷일은 부하에게 맡기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숙소 근처에 있는 창고는 직원들 기강 잡을 때 이용하는 장소였다. 변태 성욕자를 상대하는 직원들은 시끄러운 데 비해 대형 사고는 치지 않는다. 반면 가수들은 평소 얌전하지만 가끔 이렇게 큰 사고를 터트린다. 뒤따라오는 임수가 물었다.

“차 전무 말입니다. 정말로 별 탈 없을까요?”

기하는 담배를 꼬나물며 대답했다.

“웃는 얼굴로 등에 칼 박는 족속들이라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한배를 탄 이상 선착장까지는 같은 목숨이야. 여차하면 내 종신보험이라도 타 먹을 수밖에.”

파라디소는 거물급만 상대하는 만큼 밀실회담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그들이 나눈 대화 녹취록과 CCTV에 담긴 모습, 장부만으로도 든든한 종신보험이었다. 그러나 보험을 사용하는 시기는 갈 데까지 갔을 때였다. 그들을 건드리려면 이 땅을 뜨고도 평생 쫓겨 다닐 각오를 해야 했다.

“나머지는 차 전무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난 조신하게 기다렸다가 지분만 넘겨받으면 되는 거야. 그땐 파라디소도 내 손에 떨어지는 거지.”

임수가 눈을 크게 떴다.

“소유주를 만나셨습니까? 넘긴다고 하던가요?”

“만나기는커녕 이름도, 얼굴도 몰라. 목소리 한 번들은 적도 없지. 서류도 변호사가 모조리 관리하고, 연락도 변호사를 통해서만 가능했으니까. 아, 종신보험을 들라고 한 건 그 사람 아이디어였지.”

“대체 뭐하는 인간이죠?”

“변호사한테 아무리 캐물어도 이빨도 안 들어가더군. 나한테 경영 전권을 맡긴 걸 보면 가게에는 애착도 없는 것 같고, 때를 봐서 넘기라고 구슬려 봐야지.”

“태령 주식은 전망이 좋으니 당분간 두시죠? 모자란 건 가게 담보 잡아 대출받으면 되잖습니까?”

“그건 차차 생각하지.”

임수는 생김새나 덩치와는 달리 살림꾼이었다. 이렇게 믿음직한 부하가 있었기에 기하도 차 전무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후미진 골목을 지나 2층 주택으로 들어섰다. 고자 가수들의 숙소는 어둑했고 소리도 나지 않았다. 미리 달려간 임수가 현관문을 열자 센서에 불이 들어오고 휑한 내부가 보였다.

“왜 이렇게 조용해? 벌써 잠들었나?”

“인터넷을 못 하니까 잠이라도 청하는 거겠죠. 말 나온 김에 인터넷 금지령 좀 거둬 주시면 어떠십니까?”

“알아서 해.”

“애들이 좋아할 겁니다.”

임수는 멋대가리 없는 미소를 보였다. “새끼들이 얼마나 더 잘하란 거야?” 기하는 궁시렁거리며 어둔 거실로 들어갔다. 임수는 불을 켜려고 벽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컴컴한 거실 구석에 쭈그리고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창밖에서 드는 빛에 괴생명체를 확인하는 순간 두 사람의 미간이 주름졌다. 파라디소의 골칫거리 야바였다. 기하가 한숨 쉬며 물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냐?”

야바는 대답없이 한결같은 자세로 창밖만 보고 있었다. 기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새벽 3시를 향했다.

“이 시간에 안자고 뭐하냐고 묻잖아.”

야바는 어둠에 침수된 도시를 바라보았다.

“보면 몰라? 내일이 오길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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