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track 04
이석과 성재는 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어헤친 채 각각 맞은편 소파에서 뒹굴거렸다. 각이 잘 잡힌 사무실과 정장차림의 두 남자는 도회적으로 보이지만 행동만은 시골 노인처럼 구수했다. 성재가 몸을 뒤틀다가 폰 시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말 좀 해봐라.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점심시간은 왜 이렇게 짧은 거냐?”
“휴식은 짧아서 달콤한 거야. 휴식이 길어지면 더이상 휴식이 아니지.”
이석은 눈을 감으며 혼곤함을 즐겼다. 성재가 담배를 물며 말했다.
“참, 걔들 전부 고자라던데 사실이냐?”
누구? 이석이 눈으로 물음을 던지자 성재가 말을 이었다.
“파라디소 가수들. 어제 영주가 술 취한 척하면서 한 놈 거를 만졌더니 글쎄, 주머니가 비었더란다. 처음엔 엉뚱한 걸 만졌나 해서 다시 확인해도 없더란다. 그런데 그런 얘기가 처음이 아니란 거지. 걔들 좀 묘하긴 해. 노래하는 목소리도 그렇고, 피부도 수염 자국 하나 없이 지나치게 깨끗하잖아.”
“카스트라토인가?”
“카스…뭐? 그건 또 무슨 빵이냐?”
“거세 가수. 중세 서양에서는 거세한 오페라 가수를 여자 대신 썼다더군.”
“설마, 요즘 때가 어느 때인데 멀쩡한 애들 거시기에다…. 잠깐, 그게 사실이면 흥분해도 남자 구실도 못 한다는 거잖냐. 갑자기 확 불쌍해지네.”
“흠….” 하며 이석은 손가락에다 방치해 둔 담배를 피웠다.
“헛소문이겠지. 수염이야 영구 제모하면 되고, 목소리야 훈련하면 되고.”
“코카인은 어떻든?”
“모르지. 구경도 못했으니까.”
“하긴, 그런 데서 일하는 녀석이 몸엔 손도 못 대게 했지. 어때? 코카인 정도면 안는 맛이 괜찮을 거 같은데? 얼굴도 반반하고.”
성재가 물었다. 이석은 담배를 물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한 번 주면 좋지.”
남자도 나쁘지 않지만, 이석은 부드러운 여자 육체를 선호했다. 물론 코카인이 스스로 다리를 벌린다면 사양 않겠지만 말이다. 별안간 성재가 눈썹을 구겼다.
“아~ 이런. 또 생각났어.”
“뭐가?”
“야바인가 야바위인가, 어제 우리한테 반말 찍찍했던 싸가지. 우리가 이래 봬도 화류계 경력 13년인데, 그런 새끼는 처음 아니냐? 어디 손님한테 반말이야?”
“그러면 안 되지.”
이석이 담뱃재를 털며 맞장구쳤다. 성재는 담배 필터를 씹었다.
“태국인이라 그렇다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속은 것 같다. 내가 봤을 때 걔 한국인이야. 그냥 겜값 물어주고 면상을 확 까발리는 건데…….”
“야바, 야바…….”
“싸구려 마약이네.” 이석은 중얼거렸다. 그 당시 취기가 상당히 오른 상태였다. 전부 똑같은 가면을 써서 정확진 않지만, 피딱지 앉은 입술과 독특한 철학이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성재가 녀석과 말다툼한 이후부터 완전히 약에 취해 단편적인 기억만 남았다. 불현듯 이석의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렸다. 몇 년 전부터 따라다니는 두통이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다 어젯밤 잠시 맛본 여자가 뇌리를 지나갔다.
‘으…하아…….’
여자치곤 낮은 편이임에도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귓가에 닿던 가쁜 숨결이나 척척한 점막, 안아주던 손길이 부드러웠던 여자였다. 자신만의 쾌락을 채우려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쓰다듬어주는. 반면에 어색한 혀 놀림과 뻣뻣한 몸에 웃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언뜻 느껴지던 피 맛하며…. 끝까지 갔는지 어쨌는지, 이름도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여자를 이렇게 머리에서 재탕하긴 처음이었다. 이석은 엄지로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제 요트에서 나하고 있었던 애 누구였지?”
“해민이 아니었냐? 걔 요즘 너한테 열 올리잖아. 어제도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데……. 아~나도 정신없어서 너 볼 겨를이 없었다. 은혜 알지? 기집애가 어찌나 혀 놀림이 현란한지. 걘 재능 살려서 변호사 하길 잘한 거야.”
성해민이 그런 손길을 가진 여자였나? 몇 번씩 기억을 되감고, 재생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상관없다. 약에 취해 오늘 안았던 여자가 내일은 다른 친구 위에 올라타 신음하고, 그때만은 정절을 조롱해도 되는 시간이니까.
[전무님. 회장님께서 지금 뵙자고 하십니다.]
성재가 김은혜의 혀 놀림을 극찬하는 가운데 인터폰이 울렸다. 성재와 이석의 눈길이 마주쳤다.
“통 안 찾는 분이 웬일이지? 너 혹시 걸린 거 있냐?”
“글쎄. 워낙 많아서 말이야.”
이석은 검정 재킷을 팔에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부친은 소파 상석에 앉아 허공만 보고 있었다. 호랑이 회장이란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누가 보면 차 회장이 암 투병 중이라 착각할 만큼 궁상맞은 몰골이었다. 곁에 이석이 자리 잡아도 마찬가지였다. 피차 만나도 대화 같은 건 없었기에 차라리 침묵이 편했다. 먼지소리조차 안 나는 공간에서 차 회장이 한껏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폐와 간에까지 전이됐다. 2개월도 못 버틸 거라는구나.”
잔가지 다 쳐낸 말임에도 누군지 뻔했다. “저런.” 이석은 탄식을 입속에 궁글렸다. 상체를 앞으로 구부리며 깍지 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곧 다가올 형제의 장례식에 어떤 화환을 보낼지 벌써부터 고민이 앞섰다. 그날 오열하는 차 회장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줘야 할지, 으스러지게 안아 줘야 할지도 고민이다. 누나들의 죽음 앞에서는 단 한번도 보이지 않던 그 눈물 앞에서 말이다. 차 회장은 빈 공간을 향해 허헛거렸다가 황망함에 젖은 눈가를 떨었다.
“내 살다 살다 별짓을 다 해본다만…. 그래도 자식놈 살릴 길이 있다면야 무슨 짓을 못할까. 암, 그렇지.”
이석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안면을 바르르 떨며 중얼거리는 차 회장 모습은 치매가 의심될 정도였다. 그 순간 차 회장은 여기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이석에게 눈길을 주었다.
“한 번 데려오거라.”
“뭘요?”
차 회장은 이를 꽉 물었다. 부친의 눈빛에는 망설임의 잔재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힐러인지 뭔지… 내 앞에 데려와. 명환이를 살릴 수 있는지 없는지 한 번 해보잔 말이다.”
이석의 입매에서 온기가 빠져나갔다. 그는 찻잔을 들고 느릿하게 입가에 가져갔다. 식은 커피를 왼쪽 볼이 불룩해질 만큼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이어 젖은 입술에 미소가 덧칠됐다.
“그러죠.”
[let me sail, let me sail, let the orinoco flow, let me reach, let me beach on the shores of Tripoli. let me sail, let me sail, let me crash upon your shore…….]
‘Orinoco flow’가 밀실 벽에 스미고, 공간을 채웠다. 비교적 좁은 방안은 소파와 단출한 무대가 전부였지만, 중세 유럽풍으로 꾸며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했다. 코카인의 음색이 융단처럼 몸을 감싸자 백발노인은 황홀한 얼굴로 음악에 젖었다.
힐링에는 감상용과 치료용으로 구분한다. 감상용은 복잡한 기교와 아름다운 노랫말이 좋고, 치료용은 고음역대로 된 보칼리제-모음으로만 발성하는 노래-가 알맞다. 목소리가 차지하는 공간과 음성의 파장, 밀도에 따라 효과도 달라진다. 코카인의 입술을 기준점으로 직선상에 놓인 사람이 최대치로 영향을 받는다. 스피커와 비슷한 원리다. 그래서 병마가 깊을수록 고음역대와 소리의 증폭조절을 통해 치유 부위에 집중포화한다. 피부 안의 뼈, 그 안의 장기, 더 정교한 세포… 깊숙이 도사린 암세포를 분해하고 소멸시킨다.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선율로 병마와 홀로 싸웠던 가련한 영혼까지 어루만진다. 거기까지 해야만 힐러로서 완벽한 임무완수라 할 수 있다.
코카인의 노래가 끝나자 노인은 요란하게 손뼉 쳤다. 옆에 앉으라는 듯이 엉덩이를 물렸다.
“정말 훌륭하구나! 훌륭해! 천상의 목소리라는 말은 너를 위한 거다. 명창이 따로 없어. 이 느낌을 표현하고 싶은데 할애비 가방끈이 짧아서 입에서만 맴도는구나.”
코카인은 쑥스러운 웃음으로 대답하고 김 회장 곁에 앉았다.
“이렇게 화사한 노래도 다 부르고, 이것도 아리아인가 뭔가 하는 거냐?”
“엔야라는 가수 노래예요. 어쩌다 리메이크한 걸 들었는데 가볍게 들으셔도 좋을 거 같아서요.”
“그런데 언제까지 그놈의 가면을 써야 하는 거냐? 생명의 은인 얼굴도 모르는 게 말이 돼야 말이지.”
코카인은 가면에 손을 대며 대답했다.
“규칙은 계속 쓰는 걸로 돼 있어요. 저도 규칙을 지키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래, 그래. 니가 그렇게 한다면야…….”
김 회장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 회장은 건설회사 사주였다. 얼마 전 간경화를 치료받고 완쾌한 뒤로 출입이 잦았다. 원래 가학적 성도착증을 해소 하러 출입했다가 사장의 권유로 힐링을 받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래층 단골이었다가 위층 단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참, 양 비서가 너 같은 목소리를 카, 카운터… 뭐라더구나. 양놈 중에 유명한 가수 걸로 몇 개 사다 들었는데 너만한 목소리가 없어서 듣다 꺼버렸단다. 그놈들은 몇 번만 들으면 금세 물리던데 너는 어찌 들어도 또 듣고 싶나 몰라. 요즘 네 덕분에 취미도 없는 오페라 공연에 다녀왔다만 역시 할애비한테는 어렵더구나.”
“저도 오페라는 어려워요. 아, 요즘 어떠세요?”
김 회장은 껄껄 웃으며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임원들이 혈색 좋아졌다고 난리란다. 입발린 소리가 아닌 게, 할애비가 요새 밥맛도 좋고, 머리숱도 많아졌다. 하도 비결이 뭐냐고 물어대서 등산 시작했다고 둘러댔지.”
“회장님께서 잘 따라와 주셔서 빨리 쾌차하신 거에요. 이제 안 오셔도 될 거 같습니다.”
“서운한 소리 말아라. 할애비는 계속 네 노래 들으러 올 거니까. 그나저나 요새 정 이사 마누라 치매가 심해져서 아주 사람을 잡는다더구나.”
“언제 한번 모시고 오세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힐링 받으시면 완쾌할 수 있으니까요.”
김 회장은 흠칫 놀랐다.
“아니, 치매 같은 것도 고칠 수 있다는 게냐?”
“네. 몇 번 해봤어요.”
그간 치료했던 병은 암에서부터 크고 작은 질환까지 다다른다. 어렸을 땐 요령이 없어서 양성 종양 제거에도 한 달씩 걸렸는데 지금은 암세포까지 한 달 정도면 치료 가능했다. 오히려 마음의 병이 더 까다로웠다. 힐링 비용은 보통 사람이 엄두도 못 낼 만큼 턱없이 높았고 병의 종류와 깊이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물론 여기 고객들은 흔쾌히 지불했으며 지금껏 코카인이 사기죄로 멱살 잡힌 적은 없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김 회장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대답했다.
“정 이사가 알아서 잘하겠지. 남의 가정사에 끼는 것도 그렇고…. 고약한 심보라고 욕하진 말거라. 장롱에 숨겨둔 산삼을 나눠 먹을 놈은 세상에 없으니까. 허허허….”
활력 넘치는 김 회장을 보니 코카인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힐링으로 완쾌된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가족 외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그들 사이에 생긴 이상한 규칙이었다.
“그런데 네가 너무 혹사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구나. 언제 한번 한과라도 보내주마. 지난번 시계도 돌려줘서 마음이 안 편했어.”
“아니에요. 어차피 제 입으로 들어가는 건 얼마 없어요. 함께 지내는 식구가 워낙 많아서요.”
“병풍 노릇이나 하는 놈들이…….”
웃자고 한 소리에 김 회장의 얼굴은 험악해졌다. 손님에게 선물을 받지 않는 건 그들이 매번 그 이상의 대가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농담으로 거절하려 했는데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건가 싶었다. 코카인은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회장님이 쾌차하신 것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리고 동료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제 목소리도 별 볼 일 없을 겁니다. 여기 있는 게 아까울 만큼 모두 뛰어난 애들입니다.”
“그래 봤자 너 등에 업고 덤으로 팔리는 것들 아니냐? 꼭 사내 되다 만 놈들처럼 비실거려선 말이야. 물론 너는 그놈들하고 격이 다르지. 암…. 어디서 병풍 같은 걸 너한테 갖다 댈까.”
거북스러웠다. 김 회장뿐만 아니라 저렇게 동료를 싸잡아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것도 당사자들 앞에서 말이다. 뭔가 머뭇대던 노인이 방문한 진짜 목적을 털어놓았다. 정력을 강화할 수 없냐는 것이었다. 칠순을 앞둔 노인이 새색시 표정을 짓자 코카인은 웃음이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과 시간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코카인의 발소리가 길쭉한 복도 끝자락에 부딪혀 마주 걸어왔다. 이곳에 끌려온 지도 10년이 다 돼간다. 성탄절 날밤, 그날도 집에 쳐들어온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아우성했다. 누가 왔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만 광인들의 울부짖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순간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의 절규를 끝으로 암흑천지에 뒤덮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피범벅이 된 채 후미진 사무실에 끌려왔다. 그곳엔 세진이가 있었다. 순결한 천사복을 입고, 겁먹은 얼굴로 말이다. 그래, 그땐 서로 어린 나이였다. 같은 상황에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 이해한다. 하지만, 이해와 용서는 엄연히 달랐다. 이제는 야바가 돼버린 세진이는 지금껏 단 한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용서로 구해지는 마음의 위안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자신을 망가트렸다. 녀석은 생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보습크림과 항우울제 외엔 물욕조차 없었다. 그런 야바가 요즘 들어 이상한 낌새를 보였다. 그건 오랜 세월 겪어온 자신만이 감지할 수 있는 변화였다.
복도를 걸어가다 현기증이 났다. 요즘 이래저래 무리해서인지 목소리도 쉽게 지치고 몸도 무거워졌다. 성대를 혹사하지 않으려고 해도 아픈 사람을 보면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물론 이 국한된 공간에서, 선택받은 계층뿐이라는 게 씁쓸했다.
‘다음 예약이 누구더라. 아…….’
차이석 전무였다. 코카인은 어젯밤 사진을 보내달라고 떼쓰던 그가 떠올라 피식 웃어버렸다. 오늘은 또 어떤 말로 자신을 당혹게 할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대기실로 향했다.
“가짜를…말씀이십니까?”
아리아가 흐르는 사무실, 벽시계는 오후 8시 25분을 가리켰다. 기하는 젊은 남자와 마주 앉아 조금 전 그가 했던 괴이한 제안을 되씹었다.
“그러니까… 코카인이 아니라, 코카인을 대신할 가짜를 원하신다는 겁니까?”
“맞아요.”
남자가 대답했다.
“그런……. 그러다 들통 나는 날엔 뒷감당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눈으로 식별하는 생선도 아니고, 다들 목소리는 좋으니까요. 한달 정도 시간 때울만한 애 하나만 빌려줘요.”
그렇게 말한 건 차이석 전무였다. 태령그룹 차 회장의 본처 소생이지만 방탕함 때문에 회장하고는 상극이라고 들었다. 차이석은 공격적인 경영방침을 앞세워 태령그룹 성장에 일조하고 대주주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최대주주인 차 회장은 경험 부재와 경영부실을 이유로 차이석을 한직에 내몰았다. 1년 뒤에 명예회장인 조부의 도움으로 복귀했지만, 이미 차명환은 회장을 업고 승승장구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건 뜻밖의 제안이었고 위험한 냄새까지 풍겼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기하도 이번만은 표정이 뜻대로 안 됐다.
“코카인은 파라디소 핵심입니다. 가짜를 데려가면 분명히 탈이 생길 것이고 가게 이미지까지 훼손될 위험이 있습니다.”
“모든 건 비밀에 부칠 겁니다. 회장님도 외부에 새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그런데 그간 코카인의 힐링이 모두 성공했습니까?”
“아, 물론 손도 못 댈 만큼 늦은 사람은 코카인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한달 이상은 필요하다더군요. 실례지만 차 사장님 앞으로 얼마나…….”
“두 달이라는 건 희망 사항 같고, 장기에 모두 전이됐으니까 넉넉잡아 한 달쯤?”
차이석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기하는 목덜미에 있는 전갈 문신을 쓸며 물었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군요. 이참에 코카인의 힐링을 받아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좀 위험하긴 해도 비슷한 케이스를 완쾌시킨 적이 있으니…….”
“사람은 명대로 살고 갈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죠. 아, 이건 회장님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이석은 매끈한 미소로 덧붙였다.
“한 명 추천해 줘요. 내가 직접 골라도 되고.”
“하지만, 차 전무님…….”
“회장님도 어느 정도 조사하고 결정했을 겁니다. 일단 만나보고 힐링 여부를 판가름할 텐데 그 선에서 처리해줄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랬다가 자칫 들통이라도 나면…….”
“들통 안 나요. 가면 덕분에 코카인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고.”
“예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석은 중얼거렸다. 기하는 턱을 주물거리며 물었다.
“혹시 전무님께선 코카인을 불신하셔서입니까? 그건 절대 걱정 안 하셔도…….”
“믿으니까 이러는 겁니다.”
“…….”
“그 사람들, 코카인의 힐링 효과를 확인한다면 평생 독점하려 들 겁니다. 감금, 납치, 살인이 카드 긁는 일보다 더 쉬운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차이석의 흐린 목소리가 단호하게 이어졌다.
“코카인을 누구에게도 내주기 싫군요. 여건만 된다면 당장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기고 싶을 만큼.”
기하는 눈을 얇게 떴다. 기대에 비해 싱겁기 짝이 없는 이유였다. 차 전무가 코카인에게 열 올리는 건 알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차 회장을 속이고 암 투병 중인 이복형을 나 몰라라 한다는 건가? 정열적이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기하는 우선 후자 쪽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그렇다고 차 전무를 마냥 한심하게 볼 것만은 아니었다. 코카인의 노래는 마약과 흡사하며 마약에 미치면 애미, 애비도 몰라보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거기 마음을 돌리려면 뭐라도 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지. 흠…….”
차이석은 연체동물처럼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머리만 기울여 시선을 맞춰왔다.
“내 지분에서 10% 어때요?”
눈 튀어나올 말에 기하는 숨이 턱 막혔다. 태령그룹은 자동차에서부터 전자, 건설, 금융, 철강, 의료계까지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을 형성하고 있다. 총자산만 해도 150조 원에 육박했으며 얼마 전 반도체에도 손을 대서 주가상승에 가속이 붙었다. 차이석의 지분이야 못 해도 7% 안팎, 거기에서 10%라면…백만, 천만, 일억, 십어……. 머리에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졸린 목소리가 침범했다.
“너무 적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하는 겁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만…….”
기하는 목줄을 죄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현실감 없는 상황에 냉정하기 어려웠다.
“차 전무님. 저로서는 무척 흥미로운 제의지만 그에 따른 위험도 무시할 순 없습니다.”
“인생을 걸만한 가치는 있죠.”
“우리 애한테도 위험한 일이 될지 모릅니다.”
“머리카락 한 올 못 건드리게 하죠.”
“하지만, 위험 부담이…….”
“그냥 사람 하나 내주고 지분만 챙기면 됩니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해요.”
기하는 침묵했다. 차이석의 말투처럼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경영권 승계를 목전에 두고 차명환의 암이 발발하자 차 회장 귀에 힐러의 존재가 들어갔고, 차이석은 협력할 생각이 없을 터다. 그렇다면 역시 애매한 치정극 밑바탕에는 경영권 다툼이…….
다시 차이석이 한쪽 눈썹을 들며 말했다.
“역시 너무 적습니까?”
“아니, 그 금액이 적을 리가…….”
“그럼 하는 겁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만…….”
차이석 말장난에 간신히 정리한 사고가 뒤엉켰다. 침을 삼키자 기하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의라 당장 결정하기 힘든데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누구라도 힘든 결정일 겁니다.”
이석은 소맷단을 올리고 힐끗 시계를 보며 말했다.
“5분이면 충분하겠죠?”
‘이 새끼가 진짜 갖고 노나….’ 기하는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이석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차이석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꼰 다리 위에다 손가락 장난질이었다.
“5분을 생각하건 5일을 생각하건 어차피 선택은 둘 중 하납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요. 사람 하나 빌려주고 지분을 챙기면 끝나는 거라고.”
차이석은 불붙인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럼, 집중하도록 자리 피해 줄게요.”
책장으로 걸어간 차이석은 허리를 구부린 채 CD 케이스를 구경했다. 그 중 한 장을 꺼내 앞면을 보며 뭐라 혼잣말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끼인 담배 불씨가 타는 만큼 기하의 속에도 그을음이 생겼다.
사실 구미가 당기고도 남는 제의였다. 말마따나 차명환이 명을 다할 때까지만 연극 할 사람을 구해주고, 지분을 챙기면 된다. 또 여기가 아니어도 사람 구할 곳은 많다. 10년 전, 힐러를 구하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투자자에게 파라디소 경영권을 위임받았다. 언젠가 파라디소 인수를 꿈꾸며 인생을 바쳤다. 그러나 끽해봐야 월급 사장이었다. 이 월급으로 인수는커녕 실소유주가 가게를 팔아치우면 꼼짝없이 실업자 신세였다.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훨씬 커지고 더불어 태령가와 친분까지 맺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차명환이 죽고, 차이석이 승계를 이어받았을 때 얘기다. 그때 차이석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걸어왔다. 상체를 구부린 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린 안 되겠군요. 오늘 예약 취소해요.”
“……예?”
“나는 단순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거기는 생각이 지나치게 많군요.”
그리고 차이석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렸다. 더는 물어볼 생각도 않고 말이다.
“자, 잠깐……!”
기하는 무심결에 차이석의 팔을 붙잡았다. 차이석의 길쭉한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고, 정수리에 시선이 꽂혔다. 기하의 손에 진땀이 흥건했다. 찜찜한 기분이 떠나지 않았다. 떡고물 받아먹다가 만에 하나 일이 더럽게 꼬인다면 엄청난 세력가와 척을 지고 골로가기 십상이다.
“……추천할만한 애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담이 적어서들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안 되도록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인생을 걸어볼 법한 일임엔 분명했다. 물을 쏟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이석이 아무 반응 없다. 설마 그새 마음이 바뀐 건가…. 기하는 여유를 가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까지 데려가야 한다고 하셨죠? 아, 혹시 염두 하신 녀석이 있으신지…….”
차이석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고개 들었다. 그는 표정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절묘한 위치가 떨떠름했다. 무엇보다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저 낯빛에 이제는 기하가 애간장이 저몄다. 눈을 내리깐 채 한참을 응시하던 차 전무가 이윽고 입술을 벌렸다.
“글쎄요. 다 거기가 거기라. 이왕이면 뻔뻔하고 대책 없는 녀석이 좋겠죠.”
기하는 내심 안도를 터트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회장님과 형님이 힐러 같은 건 믿기도 싫을 만큼 말이군요.”
“생각만 해도 치를 떨 만큼.”
“보통 녀석으로는 어림없겠군요.”
기하는 빙긋,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차이석. 얼핏 장난하는 듯해도 풀었다 조였다, 순간순간 치고 빠지는 게 보통이 아니다. 약쟁이에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고 단정했는데 실수였다. 시계는 8시 36분을 가리켰다. 이 엄청난 거래가 단 10분 안에 이뤄졌다니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누가 좋을까…. 코카인을 뺀 여섯 명을 머리에다 일렬로 세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이석에게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총력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차 전무님.”
차이석은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온 손을 물끄러미 보며 느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총력은 무슨. 그냥 애 하나만 빌려주면 된다니까요.”
파라디소 대기실은 미소년과 게이, SM 직원들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서로 마주치는 일 없는 구조였다. 가장 구석에 자리한 고자 가수들 대기실에서 청년들은 손님을 맞이하고자 한참 준비 중이었다. 가면손질을 하기도 하고, 휴일을 어떻게 보내나 열 올리기도 했다. 북적대는 대기실 한가운데, 야바는 ‘초연한 자리’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소위 남들이 멍 때린다는 그 행위는 야바의 철학을 형성하는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30분 전에 먹은 항우울제가 혈관을 맴돌아 뇌를 뭉근하게 만들었다. 명상을 관두고 소파에 축 늘어졌다. 곧이어 코카인이 대기실에 들어와 가면을 벗고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코카인 주변에 청년들이 몰려들어 금세 떠들썩해졌다.
“이제 차 전무지? 그 사람은 아예 출석 도장을 찍네.”
헤로인이 말했다.
“난 그 사람 괜찮아. 못 말리는 약쟁이긴 해도 잘 생기고, 스타일도 좋고, 매너도 좋잖아.”
“여기가 없다고 니가 기집애라도 된 줄 아나 보지? 꿈 깨라. 너한텐 눈길도 안 줄 테니까.”
“앗! 뒤지기 싫으면 이거 놔!”
헤로인에게 중심을 잡힌 메사돈은 끙끙대며 발길질을 먹였다. 코카인은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그들에게 웃음을 던졌다. 헤쉬쉬가 코카인 뒤에서 새 가면을 씌우고 리본을 묶어주었다. 아름다운 황금색 가면도 코카인에 비하면 수수해 보였다. 성대를 소중히 다루는 그는 개나 소나 노래해 주지는 않았다. 극소수의 상류층들이 코카인의 은총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차이석도 그들 중 하나일 터였다. 매일 코카인을 예약하면서 어떤 표정을 할까? 직접 전화로 할까? 궁금증을 짓이기며 야바는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코카인 물에 타는 독약의 양을 더 늘려야겠다.
청년들 모두 준비를 마치고 하이드로 실로 향했다. 야바도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섰다. 아까 약을 챙겨 먹었는데도 하이드로 실에 있을 사람을 떠올리니 속이 울렁거렸다. 청년들 틈바구니에서 모르핀은 울적한 낯으로 걸어갔다. 룸메이트를 밀고한 그를 비난하는 입은 없었다. 탈출 사실을 알고서도 모르는 척하면 연대 책임이기 따랐기 때문이었다. 메사돈이 코카인을 툭툭 쳤다.
“근데 마리화나 그 자식은 연락도 없고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아니, 어제 꿈을 꿨는데 글쎄, 마리화나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살려 줘! 살려 줘! 이러지 뭐겠어. 난 아무래도…헉! 씨발, 놀랬잖아!”
메사돈은 옆에서 걷던 야바를 뒤늦게 발견하고 숨을 골랐다.
“왜 남의 말 엿듣고 지랄이야?”
“내가 걷고 있는데 니가 지껄인 거야.”
야바는 뒤통수에 꽂히는 욕설을 무시한 채 앞서 갔다. 복도 끝 T자 교차점에 있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차이석과 기하였다. “오늘은 웬일로 멀쩡하지?” 청년들이 수군거렸다. 야바도 차이석이 저렇게 멀쩡한 걸음으로 걷는 건 처음 봤다. 웅성거림에 기하와 이석의 관심이 몰렸다. 청년들은 기하라는 공포대상에 바싹 얼었고, 야바 역시 다른 이유로 심장이 술렁댔다.
“안녕하십니까!”
청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인 가운데 야바만 뻣뻣하게 서 있었다. 청년을 비잉 둘러보던 차이석이 눈썹을 부드럽게 들었다. 코카인을 발견한 것이다. 코카인은 그에게 묵례했다. 야바는 가면 너머로 차이석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날처럼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표정이었다.
“코카인만 들어가고 나머진 대기실에 가 있어. 차 전무님이 조용히 있고 싶다시니까.”
기하가 말했다. 야바의 가슴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메사돈이 코카인에게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너랑 단출하게 있고 싶나 보네. 오늘 다들 왜 이러냐? 이러다 완전히 공치는 거 아냐?”
“다음에 예약된 손님 많으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코카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들을 달랬다. 찌끄러기들은 하나둘 대기실로 돌아갔다. 야바는 그 자리에서 멍하게 서 있다가 부스러진 감정을 챙겨 담아 걸음을 옮겼다. 그때 기하가 야바 앞에 우뚝 서며 길을 막았다. 기하를 피해 돌아가는데 다시금 그가 길을 막았다. 야바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 하는 거야?”
기하는 대꾸도 않고 차이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차 전무님. 아까 뻔뻔하고 대책 없는 녀석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
기하의 돌발 행동에 차이석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랬죠. 힐러 같은 건 믿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치를 떨 만큼.”
“맞습니다. 분명히 그러셨죠.”
둘은 야바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밀담을 나누었다. 기하는 제 턱을 만지며 말했다.
“그쪽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녀석이 있긴 합니다.”
동시에 차이석과 기하의 시선이 야바에게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