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5화 (5/42)

힐러-track 03

도심지 외곽을 벗어나 도착한 곳은 바다였다. 자연을 헤집어 놓은 선착장에 커다란 요트가 대기하고 있었다. 파라디소를 이용하는 고객은 내로라하는 재력가뿐이라 청년들은 초호화판 결정체 앞에서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메사돈은 휘파람을 불며 한눈에 훑어지지도 않는 요트를 구경했다.

“한국 사람이 천원을 쓰면 거기서 오백 원이 태령그룹 주머니로 들어간다더니 으리으리 하구만.”

메사돈이 한숨을 내리 토했다.

“그나저나 코카인 없다고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이런 적은 처음이라 막막하구만.”

“메사돈, 힘내! 클래식에서 뽕짝까지 완벽 소화하는 네 목소리에 자부심을 느끼라고!”

마리화나의 말에 메사돈은 금세 히죽거렸다. 헤쉬쉬와 나란히 걷던 모르핀이 궁시렁댔다.

“솔직히 코카인하고 우리가 다른 게 뭔데? 힐러, 힐러 찬양하지만, 우리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만큼 좋은 목소리를 가졌잖냐? 난 그렇다고 본다.”

헤쉬쉬는 웃으며 모르핀 정수리에 쿠사리를 심어줬다.

“그럼 김 회장님 간경화가 나은 건? 강 의원님 칼 맞았을 때 코카인한테 달려오신 건? 김경화 유방암 걸려서 배우 생활 접을 뻔한 걸 코카인이 살려준 건? 거기다…….”

“아, 됐어! 됐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모르핀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긴 하지. 환자고 아니고를 떠나서 코카인 노래를 한 번만 들으면 다들 헤어나질 못 하잖냐. 가끔 보면 손님들 꼭 마약 중독자 같더라고. 우리가 그나마 괜찮은 건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많이 들어서 면역이 생겨서겠지?”

헤쉬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닌 사람도 있어.”

“뭐? 누구?”

“있어. 그런 놈이.”

헤쉬쉬는 묘한 대답만 남기고 앞장서 걸었다. 그러다 앞서 걷던 야바와 부딪치자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놈은 가면 사건 이후 종종 저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주먹질하려고 꼬투리 잡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야바 역시 냉랭히 쳐다보자 놈은 코웃음 치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청년들은 가면과 의상을 착용한 뒤 안내인을 따라갔다. 선실로 들어가니 고급 주택을 옮겨놓은 듯한 내부와 손님들이 보였다. 낮엔 신사였으며 숙녀였을 그들은 제 다리가 어디 붙은 지도 모를 만큼 취해 있었다. 베네치아 가면을 쓴 청년들은 선실 한가운데에 정렬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얼큰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코카인 덕분에 젖가슴을 지킨 김경화였다. 그녀는 코카인이 오지 않은 사실을 알고 훌쩍거리며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이어 헤쉬쉬의 솔로를 중심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헤쉬쉬는 힐러가 아니지만, 꽤 들어줄 만한 실력이었으며 청년들이 깔아주는 화음 덕분에 목소리가 한층 돋보였다. 야바는 화음을 넣으면서 열심히 그를 찾으려고 눈을 굴렸다. 아리아가 끝나자 청중은 감동의 물살에 떠내려갈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성인 남자에게서 나온 미성에 놀랐을 뿐 힐러만이 내뿜는 마력은 느끼지 않았다. 파라디소 청년들은 몇 곡 더 부른 다음 파티에 섞였다. 보이 소프라노 톤에 매혹된 여자들은 그들이 고자인 줄도 모른 채 욕정을 드러냈다.

“헤쉬쉬는 음색이 꼭 안드레아스 숄 같네. 어쩌면 그렇게 청아해? 말할 때 목소리는 또 다른 것 같고…. 가면 좀 벗어 봐. 목소리만큼 얼굴도 깨끗한가 보게.”

“죄송합니다. 가면을 벗는 건 규칙 위반이라….”

“이런 데서 썩는 게 아깝네. 혹시 카운터테너 해 볼 생각 없어? 그쪽으로 잘 아는 사람 있는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헤쉬쉬는 자신을 서로 빼앗아 가는 여자들 등쌀에 난감해했고, 나머지도 여자와 희희덕거렸다. 그들만큼 야바도 욕실을 찾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샤워하고 싶어 견딜 수 없지만, 여기선 곤란하니 손이라도 씻고 싶었다. 행여 차이석이 있나 싶어 틈틈이 눈 굴리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는데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코카인이 오지 않았으니 요트만 빌려주고 다른 데서 즐기는 모양이었다. 공연 2부가 남았지만, 야바는 여길 떠나고만 싶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성재였다.

“코카인이 어딨냐? 아까 보니까 없는 거 같던데.”

그냥 지나쳐 가자 성재가 길을 막으며 재차 물었다.

“코카인 왜 안 보이냐니까?”

“없으니까 안 보이지.”

“왜 안 왔는데?”

“목 아파서.”

“프로답지 않게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성재는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코카인, 코카인 지긋지긋하고 짜증 났다. 다른 곳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모든 존재를 지우는 코카인,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코카인. 그래서 그 이름이 몰락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야바는 그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다시 의지와는 상관없이 야바의 팔에 손이 감기며 몸이 돌아갔다. 성재는 무표정한 낯으로 물었다.

“근데 너 왜 말이 반 토막이야?”

“난 원래 아무한테나 반말해.”

“뭐라?”

야바는 그의 팔을 내치고 사람들 틈새로 걸어갔다. 몸속에 기어 다니는 벌레를 씻고 싶어 욕실을 찾았다. 토시를 모두 빼고 팔뚝을 마구 긁던 순간 쭉 뻗어 있던 다리에 걸려 쓰러질 뻔했다. 간신히 바에 의지해 중심을 잡았다. 긴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옮겨간 찰나, 벌레가 일제히 움직임을 그쳤다. 차이석은 이미 풀린 눈으로 소파에 깊이 잠겨 있었다. 검정 바지와 굵은 스트라이프 셔츠 아래 감춘 몸은 저렇게 늘어져 있지 않았다면 훨씬 강인하고 맵시 나 보였을 것이다. 뒤따라오던 성재도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안 온다더니. 언제 왔냐?”

차이석은 눈만큼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놀아주던 사람들이 전부 여기에 있으니까 정작 놀 사람이 없었어.”

“왔으면 즐기지 않고 왜 여기서 구겨졌냐?”

“실망하던 와중에 기쁨을 찾는 중이야.”

성재는 이석이 들여다보던 폰을 당겨와 물었다.

“좀 생겼네. 누구냐?”

“바람 맞힌 대신 얼굴 보여달라고 했더니 의외로 순순히 보내더군. 워낙 철통같이 수비하길래 자신 없어 그런가 했는데 흠….”

성재는 폰을 보며 흠칫 놀랐다.

“그럼 얘가 코카인이란 말이냐?”

“궁금증을 해소 한 대신 상상의 즐거움을 빼앗겨서 아쉽지만.”

이석은 폰을 다시 당겨가며 답했다. 야바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순간적으로 스쳤지만, 분명히 폰 안에 든 건 코카인이었다. 곤란한 듯 어색한 표정임에도 그것마저 미려한 얼굴. 이석이 규칙을 깨부쉈다는 것보다 코카인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곳을 기점으로 살가죽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제야 야바를 발견한 차이석이 말했다.

“코카인이 싫다고 한 걸 억지로 시킨 거야. 비밀로 해줘.”

그는 미끈한 웃음으로 시야를 유린했다. 야바는 뭉그러진 시선을 돌렸다. 빛 닿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나 할말 못할 말 안 가려. 그래서 기하가 말도 못 하게 해.”

차이석의 눈썹이 짙게 꿈틀거렸다.

“곤란한데.”

말투에 비해 표정은 느긋했다. 파라디소에서 손님은 신이었다. 신은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고, 규율 같은 건 무시해도 되는 위치였다. 야바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동시에 이석이 상체를 앞으로 구부리더니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어왔다. 야바도 시선 아래 놓인 그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눈길이 어딘가를 빠르게 훑고는 다시 야바 눈에 얽혔다.

“넌 피부가 성한 날이 없군.”

그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코카인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은 모두 똑같은 옷에 똑같은 가면을 썼다. 그런 와중에 지난번 야바의 볼에 피가 났던 걸 기억한다는 뜻이며, 앞에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임을 안다는 것이었다. 그가 던진 언어는 야바 머리에 꽉 차있던 젖꼭지와 입술 색깔의 상관관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다 맞은 편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멍청한 설렘이었는지 깨달았다. 남들 두 배나 되는 살덩이를 달고 다니는데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때 성재가 야바 머리를 당기며 끼어들었다.

“서로 인사 끝났으면 너는 이리 좀 오지?”

“머리 건드리지 마!”

야바는 본능적으로 성재 손을 후려쳤다. 타인의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신경이 찢기는 듯했다. “하, 뭐야? 이 물건은?” 하며 성재는 맞은 손으로 담배를 집어 물었다.

“너 이름 뭐야?”

“가르쳐줘봐야 다음엔 기억도 못 할 거면서 왜 물어? 사람 귀찮게.”

“이거 봐라? 나 누군지 몰라?”

“세상 사람이 다 너를 알아야 돼?”

“하! 뭐 이런……. 너 친구 없지? 하긴 너 같은 성격파탄자하고 누가 친구 하겠냐?”

“그런 건 줘도 안 해.”

“또 뭐라는 거야?”

“그런 건 줘도 안 한다고.”

야바는 타자기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괜히 어중이떠중이 사귀었다가 배신당하면 누가 책임지는데? 친구랍시고 보증 서달라고 떼쓸 게 틀림없는데, 그럼 당연히 전 재산 다 날리고 신용불량자 신세라구. 신용불량자가 어디 가서 사람 취급이나 받는 줄 알아? 공사판에서 시멘트 가루하고 씨름하다가 떨어지는 벽돌에 머리 맞아 죽으면 곱게 죽은 편이야. 벽돌 떨어트린 사람은 무슨 죄야? 건축업자는? 인생 낙오자한테 일자리 내준 죄밖에 없는데 왜 보상금까지 물어주고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데? 이래도 친구 같은 걸 사귀고 싶어?”

“…….”

“…….”

차이석은 담배를 문 채 멍하게 있을 뿐이고, 김성재는 입을 벌린 채 허허거렸다. 그러다 성재가 험악한 인상으로 손을 뻗었다.

“헛소리 잘 들었고. 일단 면상이나 까보지?”

야바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왜?”

“줘 팰 때 패더라도 면이나 트고 패려고 한다.”

“소, 손 치워!”

성재가 야바의 가면을 벗기려 하자 야바도 온몸으로 가면을 보호했다. 바로 앞에 차이석이 있다. 그나마 아름다운 가면 아래 숨었기에 그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저런 웃음을 보낸 것이다. 야바는 악착같이 가면을 움켜쥐었다. 성재는 막무가내 약탈자였고, 이석은 퇴폐적인 방관자였다. 일방적인 손길에 야바의 가면이 벗겨지려 찰나였다. 어디선가 헤쉬쉬와 메사돈이 달려와 성재를 겨우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은 야바라고 합니다. 그…태국인인데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서…. 죄송합니다.”

“태국인인데 왜 이렇게 허옇게 떴어?”

“태국인이라고 모두 검은 피부는 아닙니다.”

헤쉬쉬는 미소 띤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재는 심기 불편함을 드러냈지만, 조금 전 보다 누그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말 똑바로 가르쳐야지. 이렇게 어설프게 배운 애들이 더 무서운 거야.”

“죄송합니다.”

헤쉬쉬는 야바의 머리통을 짓누르며 허리를 구부리게 했다. 그 와중에도 야바는 가면을 그러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곧이어 육감적인 여자가 다가와 성재 목에 팔을 감자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헤쉬쉬는 허리를 펴며 목소리를 꾹꾹 눌러담았다.

“입 다물고 있으랬지? 그나마 저 사람들 성격 좋아서 넘어가 주는 건 줄 알아.”

“난 입 다물려고 했어. 쟤들이 먼저 말 시킨 거야.”

“너 진짜……! 컴플레인 들어오면 알아서 해.”

헤쉬쉬와 메사돈은 한심한 눈으로 노려보고 나서 인파로 사라졌다. 작은 소동이 정리되자 김경화가 거실 중앙에서 흐느적거리며 걸어나왔다. 드라마에서 주로 변호사나 교수를 담당했던 그녀는 전신에 두른 우아함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야만성을 드러내는 건 이때부터였다. 여배우가 젖가슴을 내밀며 몸을 휘자 그 위에 군림한 젊은 남자가 왕성하게 자맥질했다. 파라디소 청년들은 한쪽으로 물러났고, 사람들은 짐승 본연으로 돌아가 뒤엉켰다. 그 화려한 집단 혼음은 베네치아 가면과 의상마저 밋밋하게 만들었다. 어느덧 선실은 눅진한 냄새와 교성에 잠겼다. 저들은 넘쳐나는 부를 가눌 수 없어 이렇게 밤을 헤매는지도 모른다. 야바는 이 낯익으면서도 낯선 향연을 멍하게 응시했다

차이석은 약 탄 술을 머금은 채 머리를 소파에 기댔다. 쾌락으로 인도해줄 신비의 묘약이 호박색 액체를 부유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늘어지는 음악을 따라왔다. 이석에게 다가가 그의 지퍼를 열고 위에 올라탔다.

“하앗…….”

말려 올라간 스커트 아래 둥그런 엉덩이가 차이석의 하체 위에서 리듬을 탔다. 무심결에 그의 중심에 눈길이 갔다. 여자의 엉덩이에 깔린 음낭에는 단단한 고환이 있을 터였다. 사방에서 쾌락으로 뒤섞인 악취가 진동하자 야바는 속이 뒤집힐 듯했다. 조금만 더 있었다간 토사물을 장렬하게 발포할 것 같았다. 문득 뒤집히는 머리를 헤집고 기묘한 욕구가 자라났다. 여자를 그에게서 떼어 내고 싶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를 저 멀리 밀친 다음, 이석의 성기를 바지 속에 잘 집어넣고, 지퍼를 채우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러고 싶었다. 그 순간 야바는 기묘한 위화감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어질러진 정신을 수습하며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자신이 왜 차이석 앞에 와 있으며, 분명히 열려 있던 이석의 지퍼가 왜 갑자기 채워졌는지, 왜 그 위에 올라탔던 여자가 바닥에 널브러졌는지, 그 모든 이유를 파악하는 데까진 한참이나 걸렸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개처럼 엎드려 있었고 근육질 남자가 다가와 여자 뒤에다 성기를 밀어붙였다. 여자는 상대가 누구건 허리를 움직였다. 둘의 신음이 주변의 교성에 뒤섞였다. 야바의 등골에 땀방울이 푹푹 돋았다. 아까부터 초점 흐린 이석의 눈이 자신에게 박혔기 때문이었다. 담배연기가 아른대는 그의 눈매가 길쭉한 능선을 그렸다.

“응큼한 태국인.”

야바는 방금 손에 닿았던 그것의 감각을 어찌할 바 몰라 주먹을 쥐었다. 눅눅한 그의 시선이 전신에 엉겨붙었다.

“이름이 뭐지?”

야바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뜨며 대답했다.

“야바.”

“야바, 야바. 싸구려 마약이네. 먹으면 머리만 아프고 후유증도 오래가는. 노래도 싸구려인가?”

그가 자신의 이름을 혀에다 올려놓고 굴렸다.

“야바는 마약이지만 원래 용도가 따로 있어.”

그의 눈동자에 불빛이 반짝 긁고 지나갔다.

“숫말 미치게 하는 발정제.”

그때도 그랬었다. 그때도 이름을 물었고, 의미를 알려 주었고, 저렇게 웃었고, 그리고…….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 환락의 시간이 지나면 그는 또다시 모든 걸 잊을 거니까…….

그가 의미 없이 했던 행동에 끝 모르게 추락했고, 또 간신히 기어 올라와 벼랑에 섰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도 굳은살이 돋아났다. 야바는 항상 생각했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처음 떠오르는 얼굴이 그라면,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블라인드 틈에서 여러 갈래 빛이 뻗어 나와 방에 꽂혔다. 훨씬 전부터 일어났던 야바는 혼곤한 눈 끔뻑였다. 썰면 한 접시나 될 법한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가 혀를 아, 하고 내밀기도 했다. 눈가가 확 뜨거워져 눈 감으니 어젯밤 일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가 짐승처럼 뒤섞인 선상 혼음파티가 벌어졌고, 차이석이 야바의 머리를 당겨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에게 입술을 빨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혀의 움직임은 너무 느리고 음울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라앉아 있었다. 우주 너머에서 모든 걸 삼키고 덩치를 불려 가는 죽음의 공간 같았다. 그가 자신의 목덜미를 핥고 발기한 그의 것이 허벅지에 닿은 순간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그리고 점막과 점막의 격렬한 포옹. “아으….” 야바는 베개를 물어뜯으며 괴이한 신음을 냈다.

차이석하고 키스한 건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아마 한 달 전쯤이었을 것이다. 파라디소 화장실에서 약에 취해 쓰러졌던 그를 발견했고, 처음 그와 얘기했다. 그가 이름을 물었고, 의미를 알려준 다음, 야바에겐 첫 키스의 각인을 새겨 주었다. 어제처럼 말이다. 첫 접촉이 주는 두려움에 그를 두드려 팼지만, 그는 끈질기게 입술에 매달렸다.

‘이, 이거 놔! 응…읍……!’

‘가만, 가만…. 가만있어 봐. 잠깐만….’

달래는 목소리는 점성 높은 액체 같았다. 혀를 얽고, 타액을 가져가고, 차이석은 그 행위로 체온을 넘겨받으려는 사람 같았다. 파라디소에서 손님은 신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신치고 몹시 가난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게 천 마디 말보다 더 흔들어 놓았다. 제 몸에 누가 닿는 게 끔찍했지만, 이석은 그렇지 않았다. 혀가 얼얼해질 때까지 뻣뻣하게 입술만 벌리고 있다가 그의 손이 야바의 바지 속까지 침범하자 곧장 도망쳐 버렸다. 다시 파라디소를 찾은 차이석은 그날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는 얼굴이었다. 그건 첫 키스를 강탈당한 충격과 맞먹는 충격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차이석만 계속 눈에 들어왔고 그는 여전히 전혀 모르는 표정으로 무심한 친절을 베풀었다. 가끔 그가 흘리는 언어를 몰래 주워담아 꽁꽁 숨겨놓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야바의 문을 때려 부수고 걸어들어와 깊이 자리 잡았다.

차이석이 그날 일을 기억 못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억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그건 어젯밤 일도 마찬가지였다. 차이석이 개처럼 키스했던 대상이 비곗덩어리에 추남이란 걸 알았을 때 그의 표정을 상상하면 차라리 머리에서 지우개질 당하는 쪽이 나았다. 야바는 그의 입술 감촉에 점령당한 살덩이를 쥐어뜯었다. 입속에서 움직이던 그의 혓바닥이 아직도 들어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에 야바는 흠칫했다. 코카인이 경쾌한 걸음으로 방에 들어왔다. 어제까지 골골댔던 것이 이젠 기력을 회복했다.

“아침 왜 안 먹어? 그렇게 굶으면 속 다 버려. 제때 병원에 보내주지도 않는데 아프면 자기만 손해야.”

야바는 대답없이 코카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코카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아무것도.” 야바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차이석한테 얼굴까지 보여줬으면서 저렇게 잡아떼는 걸 보니 가증스러웠다. 코카인 입술을 보며 젖꼭지 색깔을 상상했던 차이석이 얼굴을 알아내 지금, 어떤 걸 상상하고 있을까? 몸의 체온은 곤두박질쳤지만, 머리는 열기가 치솟았다. 당장에라도 기하한테 달려가고 싶어 뒤꿈치가 근질거렸다. 그러나 파라디소의 중심이며, 핵심 수입원이며, 주치의까지 딸린 코카인 앞에 규칙은 무용지물이었다. 파라디소에서 벗어나려는 불순한 의도만 아니면 코카인에게만은 모든 게 용서됐다. 그럼에도 코카인은 기꺼이 규칙을 지키며 기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아무래도 세상에는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뉘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났다.

“언제부터 안 보였어?”

“아까…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을 때부터요.”

“그런데 왜 이제야 말해?!”

“잠깐 자리 비운 줄 알았으니까 그렇죠.”

“씨발. 고자 새끼가! 어디로 튀었어?! 입구 봉쇄하라고 연락해! 빨리!”

코카인은 문밖을 내다보았다. 깍두기 두 명이 숙소를 뒤지다가 욕을 씹었다. 그들은 날래게 계단을 내려갔고 모르핀은 망연자실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청년들은 각자 방에서 튀어나와 요란을 떨었다.

“미쳤지! 미쳤어! 혹시 경찰서 홈피 접속한 거 마리화나 아냐?”

헤쉬쉬가 그들은 진정시켜 방에 들여 보내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코카인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마리화나가 도망쳤어.”

코카인은 당혹감에 할 말을 잃었다. 야바는 문밖에 벌어진 소동에 귀를 세웠다. 원래 고자 가수는 9명이었다. 몇 달 전, 두 명이 탈출을 감행했던 적이 있는데 더 볼 필요 없이 아웃이었고, 아웃 된 그들은 출국 직전에 즉사했고 들었다. 이유는 뇌 파열이었다. 탈출시도는 곧바로 ‘아웃’이다. 정해진 벌점이 다 모여도 ‘아웃’이다. 이 단순한 단어가 주는 공포는 핵무기에 버금갔다. 야바는 저도 모르게 베개 끄트머리를 뜯고 있었다. 문득 문틈 너머에 있던 헤쉬쉬가 야바에게 기이한 웃음을 던졌다. 그리고 청년들을 진정시키려 발길을 돌렸다. 바깥 분위기가 진화돼도 코카인은 침대에서 한참 뒤척거렸다. 야바는 샤워나 하려고 일어났다. 코카인이 불쑥 물었다.

“넌 아무렇지 않나 보네.”

야바는 문에 발만 걸친 채 질문을 돌려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아?”

“별로.”

야바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 “그러는 넌?” 하며 물었다. 코카인은 아담한 방을 빙 둘러보았다.

“가끔 답답하고 힘들긴 해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여기서 아픈 사람 치유해 주는 일도 보람 있어. 벌이도 좋은 편이고.”

그리고 덧붙였다.

“야바 넌, 형 만나고 싶지 않아? 그날 이후로 연락은 해봤어? 너희 형, 되게 착했는데…….”

생각 못한 질문에 사고가 정지했다. 형이 자신의 세계에서 세진이를 밀어낸 것처럼 야바도 형을 지우기로 했다. 그 다짐은 9년 전에 했었다. 그 성탄절 밤, 형이 간 곳은 채우 집이었다. 채우의 노래에 환장했던 형이 동생이 준비한 선물까지 내던지고 갈만한 곳은 거기뿐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 반푼이 형과 고자 동생이 만나, 뭐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싶었다.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서로 죽었다 생각하고 사는 게 나았다. 야바는 차가운 문고리에 의지해 가까스로 대답했다.

“어딘가에 살아 있겠지. 아니면 죽었던가.”

이번에는 야바가 질문할 차례라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방금 코카인이 그랬던 것처럼 폐부를 찌르면서 고통까지 덤으로 주는 질문으로. 아, 생각났다.

“넌 나하고 달라서 여기가 낫겠네. 그런 엄마한테 시달리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코카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방금 해사했던 피부는 온데 간데 없이, 손에 칼을 쥐였다면 상대를 수십 번이나 찌를 듯한 눈빛이었다. 혹은 야바 손에 송곳이 있다면 찔러버리고 싶은 눈이기도 했다. 야바의 질문은 코카인의 질문과 단 1그램도 모자람 없고, 넘치지도 않는 무게였다. 그런데 왜 저렇게 당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안 됐다. 야바는 그 자리에 서서 숨죽인 채 대답을 기다렸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시들었던 코카인 안색이 제 빛깔로 돌아올 무렵 그가 말했다.

“그래서 항상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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