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4화 (4/42)

힐러-track 02

‘이렇게 연약한 피부는 조금만 빨아도 금방 자국이 생기지. 입술색은 젖꼭지 색깔과 비슷하다는데, 흠…….’

야바는 샤워 꼭지를 잠그고 뱃살을 들어 물기를 꼼꼼히 닦았다. 덜렁거리는 팔뚝 살 너머 동그란 젖꼭지가 시야에 걸렸다. 화장실 조명 때문인지 은은한 홍조를 띠었다. 그때 이석이 야바의 입술을 주시하는 착각이 들어 간신히 서 있었다. 그의 언어는 매번 머리에 깊이 박혀서 다음에 만나 다른 것을 남길 무렵에야 먼저 것이 밀려나곤 했다. 물론 그 언어의 주인이 따로 있기에 도둑질하는 심경으로 몰래 숨겨 왔다. 하지만, 뭐든 줍는 사람이 임자 아닌가…. 머리카락 물기를 마저 닦고 옷으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거울 속에서 창백한 누군가가 야바를 노려보고 있었다.

헉, 야바는 너무 놀라 뒷걸음치다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차가운 바닥에 얼어붙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가끔 나타나는 남자였다. 시체처럼 깡 마르고 창백했으며 늘 표정이 없었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다. 낯설기도 하고 낯익기도 한 그는 벌레보다 훨씬 불쾌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용기 내어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거울을 보니 남자는 사라지고 겁먹은 돼지만 담겼다. 제 얼굴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야바는 가슴 꺼지도록 한숨 쉬며 옷에 몸을 끼웠다. 개인 수납장에서 둘둘 만 작은 종이를 꺼냈다. 안에 든 흰 가루를 신중히 손에 덜어냈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코카인은 ‘Once Upon A Dream’을 흥얼흥얼 부르고 있었다.

[Once upon a dream, I was lost in love's embrace.

There I found a perfect place, Once upon a dream.

언젠가 꿈속에서 난 사랑의 품 안에서 길을 잃었어요.

난 완벽한 곳을 찾게 되었죠. 언젠가 꿈속에서]

심연에 잠재한 악을 증폭시켜 파멸에 이르렀던 지킬 박사, 그 괴물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녹아내렸다. 박사를 잠식한 악이 정화되도록, 구원하도록…. 야바는 귀를 틀어막고 정수기 쪽으로 척척 걸어갔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도 천국으로 끄집어 올린다는 목소리인데 어째서 자신의 녹슨 가슴은 정화하지 못하는 걸까? 그의 노래가 아름다워질수록 야바는 나락에 떨어졌다. 그러니 이토록 기적을 불신하는 것이었다.

“무슨 샤워를 그렇게 해대? 아까도 몇 번이나 하더니. 그런데 넘어졌어? 무슨 소리가 들리던데….”

노래하다 말고 코카인이 물었다. 야바는 좀전에 보았던 남자 때문에 대답할 기분이 아니라 제 서랍을 뒤졌다. 항불안제를 입에 털어 넣고 다시 연습에 몰두하는 코카인 동태를 살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코카인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만약 신이 내린 능력만 믿고 까불었다면 한점도 남김없이 증오라는 감정에 쏟아부었을 거다. 야바도 한때는 열심히 연습했었다. 과정이 어찌 됐든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한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코카인을 따라가지 못하자 그나마 남은 애정마저 바닥났고 자포자기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코카인은 까만 점으로 보일 만큼 멀어졌다.

야바는 등 돌려 시야를 가리고 손에 든 가루를 물에 투여했다. 잔여물이 보이지 않도록 잘 저어 코카인 책상에 올려놓고 손바닥을 씻었다. 그 모든 동작이 하나의 의식처럼 숭고하고 정성스러워야 했다. 그제야 야바는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까만 점이 노래를 그치고 말했다.

“참, 사장님이 주신 선곡표 책상에 올려놨어. 4곡인데 하나는 가요라 괜찮을 거야.”

야바는 종이에 적힌 노래를 대충 훑고 냉랭하게 말했다.

“이러면 시궁창이 꽃밭이라도 될 줄 아나 보네.”

“그러게.” 코카인도 픽 웃으며 동의했다. 노래는 모두 기하가 골랐다. 전직 깡패라고 들었는데 오페라를 원래 좋아했던 건지, 이 일 때문에 오페라를 듣는 건지, 아무튼 아리아 위주였다. 기하가 매주 선곡표를 주면 고자 가수들은 인터넷을 뒤져 이탈리아 가사를 한국어 발음 그대로 종이에 옮겼다. 노래를 못 외우면 창고에 감금, 벌점이 주어졌다. 그런 식으로 10여 년간 부른 노래만 해도 1000여 곡에 달했다. 슬슬 레퍼토리가 떨어지자 기하는 팝페라나 뮤직컬 명곡, 크로스오버로 눈을 돌렸다.

야바는 침대에 드러누워 포우의 소설을 펼쳤다. 남자의 부인이 고양이를 데려온 부분에 다다르자 책을 옆에 두고, 이번엔 범죄 기사만 스크랩한 신문을 탐독했다. 요즘 완전 범죄에 관해 공부 중인데 소설과 신문은 훌륭한 교과서였다. 범죄. 자신이 매일 코카인의 물에다 하는 짓은 범죄일까? 야바는 자신의 행위가 장인과 같다고 여겼다. 오랜 시간 공들여 하나하나 모양을 다듬고, 일생을 바쳐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장인 말이다. 코카인의 몰락이야말로 자신의 최대 걸작인 것이다.

야바는 신문 몇 줄을 보다 말고 또 소설에 집중했다. 왜 사람의 눈은 한 번에 한 가지밖에 읽을 수 없을까? 오른쪽 눈으론 소설을 읽고, 왼쪽 눈으론 신문을 읽는다면 훨씬 효율적일 텐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또 인체가 궁금했다. 냉큼 거실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숙소는 파라디소와 떨어진 거리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였다. 거실과 방에 있는 CCTV가 청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파라디소에는 여러 분야에 걸친 직원들이 있지만 철저하게 관리하는 건 고자 가수들뿐이었다. 제 발로 온 사람과 끌려온 사람의 차이였다. 컴퓨터도 한 대뿐이라 항상 자리싸움이 치열한데 웬일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인터넷 창을 여는 찰나 마리화나와 모르핀이 각각 화장실과 제 방에서 튀어나왔다.

“야! 비켜! 아까부터 내가 쓰다가 잠깐 화장실 간 거야!”

“아깝다! 조금만 빨리 나왔어야 했는데…!”

두 사람은 무릎을 치며 야바 옆에 앉아 찰싹 달라붙었다. 마리화나가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

“비켜 봐. 내가 계속 쓰고 있었다니까?”

“한 번 자리 뜨면 그만인 거 몰라?”

야바가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마리화나는 작전을 바꿔 살살거렸다.

“내가 먼저 쓰면 안 되냐? 영화 볼 거 있는지만 검색만 하고 나오마.”

“싫어.”

“딱 5분이면 돼. 찍어 놓은 게 있어서 금방 끝난다니까? 아, 그러지 말고 똘아이 너도 내일 영화 보러 같이 갈래?”

“너나 가.”

야바는 칼같이 대답했다. 마리화나는 조그만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너도 가끔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러 다녀라. 허구헌날 방구석에만 있으니까 성격이 그 모양이지.”

야바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러다 영화관에 불나서 타 죽으면?”

“뭔 소리야? 요새 영화관 시설이 얼마나 잘 돼 있는데.”

“사람 안심시켜서 끌어들이려는 수작이야. 소화기가 있어봤자 고장 나서 소용없을 거고, 그런 데서 죽어봤자 지문도 다 타버려서 대조도 못 하니 우리가 누군지도 모를 거야. 우리처럼 주민번호 말소된 사람들은 공동묘지나 납골당에서도 안 받아주니까 국가에선 각막이고, 콩팥이고 쓸만한 장기는 죄다 꺼내서 멋대로 나눠 준다구. 그렇게 해부 당해서 전국으로 흩어질 바엔 그냥 집에 조용히 있는 게 나아.”

“지, 진짜냐? 주민번호 말소된 사람들은 시신 기증해야 되는 거였어?! 왜?! 누구 맘대로!”

마리화나가 소리치자 모르핀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진짜는 뭐가 진짜야? 저 개 소리를 믿냐? 아직 우리 나란 스스로 기증 안 하면 머리카락 한 올도 안 떼간다고.”

“그, 그래? 아니, 나도 안 그래야지 안 그래야지 하는데 매번 이러네.”

마리화나는 머리를 매 만지며 모니터에 푹 빠진 야바를 째려보았다. 마리화나와 모르핀은 강제로 끌려왔어도 드물게 유쾌한 부류였다. 그들은 일확천금을 꿈꾸거나 파라디소 손님을 잘 낚아 연예계로 진출하려는 야망에 부풀었다. 기하가 그들이 사람이 되는 것도, 남자가 되는 것도 허락지 않는 걸 모르고서 말이다. 야바와 코카인은 실종으로 사망처리, 누구는 해외 입양으로 허위신고됐거나 아예 출생신고도 안 된 길거리 출신이 많았다. 그래서 살아 있어도 산 사람이 아니었고, XY 염색체를 가졌어도 남자가 아니었다.

“아~ 오늘만 일하면 휴가구나. 요새 재밌는 영화 뭐 있지? 남들 일 할 때 노는 것도 죽을 맛이야. 번화가도 북적거리는 맛이 있어야지.”

모르핀이 드러누우며 말했다. 파라디소는 월요일이 휴일이었는데 그때면 청년들은 제각각 여가를 즐겼다. 그러나 10시만 되면 칼 같이 돌아와야 했다. 기하가 청년들 머리에 설치한 알람시계 때문이었다. 그 시계는 타협을 몰랐으며 빠르고, 정확했고, 잔인했다.

아침부터 무례한 휴대폰 벨소리가 침실을 뒤흔들었다. 이석은 이불에 파묻히다시피 있다가 손을 더듬거렸다. 이불에서 찾아낸 폰을 뒤에 갖다 대는 순간이었다.

“어째 대통령보다 통화가 힘든 게야?! 집에도 코빼기 한 번 안 비치고, 살아는 있는 거냐?!”

가래 섞인 노성이 신경 줄을 자근자근 씹었다. 토요일 아침을 망친 목소리는 차 회장이었다. 이석의 부친이기도 했다. 이런 불시검문은 애초 따로 나와 사는 목적을 단박에 비웃었다. 이석은 눈동자를 굴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였다. 그는 머리를 고꾸라트리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너는 명환이가 다 죽어가는데 잠이 오느냐?”

“벌써 갔어요? 두 달 남았다면서요.”

“너는 도대체……!”

이석이 민첩하게 폰을 귀에서 떨어트려 뭐라 지껄였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노성이 잦아들자 다시 폰을 귓가에 댔다.

“……하나 못 하는 돌팔이 새끼들. 명환이 항암치료 들어간 후로 뼈밖에 안 남아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나도 곧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회사는 어찌 굴러가라고…. 극비로 했는데도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대주주들도 승계방안 공개하라고 압박하는 분위기다. 태령 자동차가 계속 지분을 모으고 우호 세력까지 끌어들인다는 소문이 있어. 아버님 발바닥이나 핥던 것들이 어딜 넘봐?”

차 회장의 목소리는 영상 통화가 아닌 게 안타까울 만큼 분에 치받쳐 있었다. 흠…. 하며 이석은 담배를 집어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이석의 차가운 얼굴 주변을 맴돌았다.

“우리 쪽 보유율이 높으니까 괜찮겠죠.”

“속 편한 소리. 너도 매사 슬렁슬렁 넘어가지 말고 좋은 방법이나 생각해봐라. 이제 주총이 코앞인데 가만있지만 말고 대주주들이라도 잘 좀 다독거려 보던가. 허구헌날 기집질이나 하고 다니는데 회사가 좌로 굴러가는지 우로 굴러가는지 알 리가 있나? 제발 차 사장 반만이라도 닮아 봐.”

이석은 피식 웃음이 새었다. 윗대부터 내려온 계집질 유전자가 어디 가겠나 싶어서 말이다. 물론 차 사장은 괜찮은 오너였다. 일 처리도 유능하며 매사 깔끔했고,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월경전인 여자아이에게 애정이 각별했다. 이 시간에 전화까지 할 정도면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올랐을 테니 적당히 상대하고 모자란 잠을 청하고픈 마음뿐이었다.

“나중에 애미가 갈 테니 밥이라도 사 먹여서 보내라. 행여 애미가 허튼소리 하면…….”

말을 잘라먹은 차 회장은 다시 덧붙였다.

“조만간 집에 한 번 오거라. 할아버님이 너 찾으시니까 안부 전화도 자주 드리고.”

부친과 통화를 끝내자 잠이 깨끗하게 달아났다. 이석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석은 차 회장과 본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차명환은 두 번째 처 사이에서 태어났다. 차명환의 모친과 회장은 대학생 때부터 연인이었던 터라 차명환이 이석보다 4년 먼저 세상 구경을 했다. 하지만, 태령그룹 창업주이자 지금은 명예회장인 전 차 회장은 평범한 여자였던 차명환 모친을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차 회장은 정치가 집안인 이석의 모친과 결혼했다. 법적인 부부라 해도 이석과 모친은 집안 행사 외에 아비란 사람을 볼 일이 없었다.

반면에 차 회장은 차명환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며 사장 자리에까지 앉혔다. 차명환이 태령그룹 실세로 급부상한 지금 3년 전 앓았던 담낭암이 재발한 것이다. 은퇴를 앞둔 회장은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려 했지만, 암투병 중인 차명환을 대주주들이 환영할 리가 없었다. 안팎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이석은 귀찮은 경영권 다툼에서 한 발짝 물러나 관조하는 입장이었다. 아니, 그렇게 비춰야 했다.

이석이 담배를 문 채 꾸벅꾸벅 조는데 이불이 꿈틀거렸다. 이불 아래서 노란 무늬 알비노 버미즈 파이톤이 기어나왔다. 아직 미성숙한 파충류는 혀를 날름거리며 주변을 탐색했다. 이석은 베개에 머리를 떨어트리며 순이의 주둥이를 툭 건드렸다.

“깼어? 맘마 줄까?”

순이는 혀를 날름거리며 대답했다. 이석은 이부자리를 차고 일어나 맘마 창고로 갔다. 80평 아파트에는 냉장고와 TV, 오디오가 전부였다. 침대도 소파도 없었다. 그는 바닥에 뒹굴면서 TV 보는 걸 즐겼고, TV 보다가 잠들면 그 자리가 침실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색채는 흑과 백뿐인 듯 바닥과 벽, 가구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었다.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연달아 눌렀다. 쉴새없는 소리는 문을 열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현관으로 가니 인터폰 안에서 중년 여자가 보였다. 이석은 벽을 짚고서 애간장이 바짝 탄 여자를 관망했다. 문을 여니 명품 원피스 차림에 찬합이란 부조화스러운 여자가 방실거렸다. 차명환의 처이자 이석의 형수라 불리는 여자였다.

“도련님 계셨네요. 벨을 얼마나 눌렀는지 아세요? 전화도 안 받으셔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어요.”

“아침부터 어쩐 일입니까?”

“반찬 좀 가져 왔…….”

그녀가 말을 하다말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석은 피식 웃으며 훤히 드러난 상체를 돌렸다. 거실로 걸어와 바닥에 뒹구는 셔츠를 대충 껴입었다. 시선을 정리한 여자가 졸졸 따라왔다.

“혹시 주무시는데 아아악――――!!”

여자는 느닷없이 찬합을 내던지며 자지러졌다. 거실 가운데서 순이가 기어 다녔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벽에 붙어서 울먹거렸다.

“도, 도련님…저기…구렁이 좀…….”

“순해서 안 물어요.”

이석은 순이를 새색시처럼 양팔로 안아 침실에 넣고 문을 닫았다. 여자는 침실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오래된 반찬을 수거 하고 새로운 걸 채워넣으며 조잘거렸다.

“이럴 줄 알았어요. 음식 가져온 거 손도 안 대셨네. 이러니까 할아버님께서도 걱정하시잖아요. 할아버님도 전 같지 않으셔서 맨날 도련님 언제 오시는지 여쭈시고…. 아버님도 밤잠 설치시는 게 예사예요. 그이도 몸이 성치 않으니까 많이 약해지나 봐요. 그럴 땐 형제가 생각나는 법이잖아요.”

그녀는 쉴 새 없이 떠들다가 말을 뚝 끊었다.

“저,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들으셨어요?”

“아뇨.”

이석이 웃으며 답하자 그녀는 “도련님도 차암.” 하며 까르르 웃었다. 형수는 냉장고 문을 닫고 다가왔다.

“아침에 성재가 안부 전화를 했더라구요. 얘기 끝에 성재가 알려 주던데…. 저도 믿기 어려워서 도련님한테 확인하고 싶어서요.”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이석은 찜찜한 마음이 들었고,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힐러라고…….”

이석의 입에 걸린 웃음이 차츰 사라졌다. 조금 전 차 회장의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 듯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노래로 암 고친다는 말은 믿기 어려워요. 병원에서도 포기한 말기인데…. 그런데 사람 통해 알아봤더니 천안 김 회장님과 어떤 여배우가 힐러의 노래로 병이 나았다더라구요.”

“…….”

“그이나 아버님은 차라리 무당 굿이나 하겠다면서 반대하시는데 제 생각은 좀 달라요. 병원을 바꾸자는 것도 아니고, 위험하게 수술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노래만 들으면 되는 거잖아요. 형님 살리려고 안 해본 짓이 없는데 뭔들 못할까 싶어요. 거기다 금액도 엄청나다던데 얼마나 해요?”

“글쎄요. 저도 외상만 했으니까요.”

“아휴~ 도련님도 차암…….”

여자는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시답잖은 말에도 일일이 반응하는 그녀가 피곤했다. 더 피곤한 건 저 웃음이 인위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웃음을 갈무리한 그녀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솔직히 저 도련님한테 서운해요. 믿을 분이라곤 도련님밖에 없는 거 아시면서 언질도 안 하시고…….”

파라디소라는 공간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 누리는 유희거리였다. 그런데 가장 알리고 싶지 않은 대상 귀에 들어간 것이다. 이석은 여유로운 웃음을 유지한 채 엄지로 미간을 쓸며 말했다.

“저 역시 형님 병환이 완쾌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확실치도 않은데 섣불리 소개하는 건….”

“도련님이 누구보다 형님 걱정하시는 거 알아요. 제가 괜한 투정 부린 거예요.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방법이 있다면 뭐든 해 보려구요. 어떻게든 아버님과 그이를 설득하는 중이지만…….”

여자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역시 혼자 이러는 게 너무 힘들어요…….”

마치 눈물을 닦아 달라는 듯이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석은 울먹이는 여자를 무미건조하게 응시했다. 물기 가득한 눈동자와 진동하는 향수 냄새가 잔인한 욕구를 꿈틀거리게 했다. 저 얼굴을 벽에 짓뭉개고 싶어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그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 형수님도 쓰러지겠군요. 이럴 때일수록 가족이 더 강해야한다는 거 잊지 말아요.”

“네. 도련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제 눈물을 훔쳐냈다. 여자가 돌아가고 이석은 폰을 집어들었다. 신호음이 가고 성재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여보세…….”

“그 입말이야.”

이석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칼 같았다. 성재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형수님이 어찌나 눈물을 찍으시는지, 안부인사 한 번 했다가 30분을 붙들리는 바람에 내가 실수했어.”

“아니. 너를 데려간 내 실수였어.”

“파라디소에 대해선 자세히 얘기 안 했다. 나도 소문만 들었다고 둘러댔으니까 형수님도 자세히는 모르실 거야.”

이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재는 이석의 고종사촌이었고, 서로 속내를 털어놓는 유일한 존재였다. 바로 이럴 때 그런 존재가 쓸모없는 걸 느낀다.

“혹시 코카인이 죽은 사람도 살리나?”

“왜? 명환 형님 그렇게 위독하시냐?”

“아니. 너부터 시험해 보려고.”

“어이. 어이….”

성재가 말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형님한테 보여줘 봐라. 배다른 형님이라도 사람 목숨이 걸렸다. 그 양반 이제 겨우 35살이야. 사장 자리 꿰찼다고 해도 할아버님 반대까지 무릅써가며 태령가에 간신히 입적됐고 그래 봐야 식구 취급도 못 받는데 그 자리가 편했겠냐? 형님 너한테 콤플렉스 있는 거 몰라서 그러냐? 여유 있는 니가 봐 줘.”

“나도 여유 없어.”

“그래도 담낭암 4기보다야 느긋하겠지.”

담배 연기가 유리창에 드리운 이석의 얼굴 위에 어른댔다. 낯익은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정도면 살만큼 살지 않았나?”

“소름 끼치는 새끼. 너 그러면서 형님 앞에서는 실실 웃지? 네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낱낱이 까발리면 아마 여럿 거품 물고 쓰러질 거다. 특히 차 회장님.”

“상상만 해도 서겠는데.”

달콤한 미소가 이석의 입술 끝자락에 녹아들었다. “끊어.” 이석이 곧바로 통화를 끝내려는데 “잠깐, 잠깐!” 폰 너머로 성재가 황급히 붙잡았다.

“나도 막상 말해놓고 뒷감당을 어찌해야 하나 골치 아프다. 힐러라는 게 얼마나 믿을만한지도 모르고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잖냐? 넌 혹시 경험 있냐?”

“없지.”

“잠깐, 너 혹시 형님한테 보여주기 싫은 이유가 코카인을 다른 사람하고 공유하기 싫다, 뭐 그런 거냐?”

이석은 한쪽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기적의 노래를 독점할 생각은 없어. 코카인은 모두의 것이니까.”

만약 코카인을 독점하려고 들었다면 그곳에 놔뒀을 리도, 성재를 데려갔을 리도 없다. 아무리 여자까지 공유하는 사이라도 말이다. 힐러의 능력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맹신하는 것도 아니었다. 코카인의 노래는 마약처럼 전신에 감겨 피곤함을 씻겨 준다.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그 기적을 몸소 겪지 않았다고 해도 기하를 통해 힐러의 능력을 들었기에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숫자만이 진리인 차 회장이라지만 그 아들만큼이나 며느리에게도 약했다. 만에 하나 힐러를 통해 차명환의 병세가 회복된다면 앞으로 귀찮은 싹이 될 터였다. 이석이 짓밟고 갈 계단은 차 회장 하나로도 족했다. 상념에 잠긴 사이 성재는 내내 떠들고 있었다. 이석은 성재 목소리를 잘랐다.

“그렇다 치고. 이따 파라디소 어때? 상처받은 영혼이나 치유하러 가야겠어.”

“그러던가.”

이석은 통화를 마치고 이불에 폰을 던졌다. 커다란 유리창에 어깨를 기대서자 강물에 반사된 빛줄기가 시야를 침범했다. 어느 틈엔가 탈출한 순이가 이석의 발목을 요염한 몸짓으로 감아올렸다. 찹찹한 감촉에 머리가 맑아졌다.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10시였고, 밤은 아직 저만치에 있었다. 그는 순이의 맘마를 가지러 주방으로 걸어갔다.

아침부터 임수와 똘마니들이 숙소에 난입해 청년들의 컴퓨터를 압수했다. 새벽에 누군가 경찰서에 접속했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누군가 폰으로 신고했다가 걸려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고, 그 후로 매달 통화내역을 관리했다. 이번 사건으로 인터넷은 흔적이 안 남는다는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한 셈이었다. 임수의 취조에도 모두 어리둥절한 반응만 보이자 결국 임수는 인터넷 금지령만 투척하고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졌다. 똘마니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아가리 닥쳐. 고자 새끼들아. 그나마 남은 좆 대가리 다 잘라버리기 전에. 처먹여주면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뺑이치게 하고 지랄이야.”

거한 욕설에 청년들은 그들의 빈약한 음낭 마냥 쪼그라들었다. 똘마니들이 사라지자마자 마리화나가 이를 박박 갈았다.

“내가 꼭 저 새끼보다 큰 불알을 넣고 만다!”

“난 타조알만 한 걸로 제작해 달랄 거야.”

모두 의기투합한 가운데 야바도 소리 없이 뜻을 함께했다. 그 후 청년들끼리 범인을 물색했지만, 진범은 밝히지 못했다. 오전 내내 뒤숭숭했던 것도 잠시, 오후엔 기하가 똥 씹은 표정을 할 사건이 생겼다. 파라디소의 중심이며, 핵심 수입원이며, 주치의까지 딸린 코카인이 인류 최대의 적, 감기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응당 노래는 무리였고, 중요한 예약이 펑크날 지경에 이르렀다.

“차 전무가 너를 꼭 보내달라고 했어. 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고. 여긴 신용이 생명이야.”

기하의 서슬에도 코카인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이런 상태로 노래하면 더 나빠지는 거 아시잖아요. 거기 가면 공기도 나쁘고 그냥 하루 쉬는 게 나아요. 차이석 씨한테는 제가 잘 말씀 드릴게요.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두 사람이 거론하는 이름에 야바의 손은 가면을 닦으면서도 신경은 그들에게 쏠렸다. 코카인이 가지 않으면 예약은 취소될 것이고 그럼 오늘은 그를 보지 못한다. 야바는 초조함을 달래려고 연신 입술을 물어뜯었다. 기하는 한숨 쉬며 폰을 꺼내 들었다. 누군가와 통화하던 기하가 코카인에게 폰을 건넸고, 코카인은 어리둥절해하며 폰을 입가에 갖다 댔다.

“안녕하세요. 차 전무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감기에 걸려서…. 아니요. 괜찮아요.”

코카인은 상대와 통화를 끝내고 폰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통화를 마무리한 기하가 거실 쓰레기통을 걷어차며 말했다.

“그쪽에서 너희라도 보내라니까 우선 출발하고, 코카인 따라와.”

청년들은 죄인처럼 끌려가는 코카인에게 동정어린 눈길을 보냈다. 모두 코카인이 단순한 감기에 걸린 줄 아는데 실은 야바의 정성이 드디어 빛을 보는 것이었다. 저들도 내심 기쁠 거다. 어쩌면 매일 코카인에게 독약을 먹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 심경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들은 행운으로 여겨야 했다. 야바는 심장에 도는 피가 허파로 가는지 자꾸 기침이 나와 입을 가렸다.

“뭘 웃고 지랄이야? 코카인 끌려가는 게 그렇게 좋냐?”

고개를 돌리니 모르핀이 노려보고 있었다. 저러고 있으니 평소 동글동글한 인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야바는 대꾸없이 보습크림을 살에 펴 발랐다.

“작작 좀 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씻었다, 말렸다, 처발랐다! 너 때문에 물세며 샤워비누 값만 해도 한 달에 수십 이 깨져!”

“내 크림 들이붓건 먹어치우건 무슨 상관인데? 그래서 생활비 더 많이 내잖아.”

“그래도 아껴 써! 요새 것들은 뭘 아낄 줄을 몰라. 이것 봐. 어제 새 거 꺼내더니 반 통밖에 안 남은 거. 도대체 이 많은 걸 어디다가 처바르는 거야? 네 살가죽이 불쌍하다.”

야바는 천천히 일어나 모르핀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모두 코카인이 없으면 불안해한다. 그건 야바도 마찬가지였다. 코카인이 없어지길 원하지만 그러지 않기를 원하기도 했다. 그들을 너무나 이해하지만, 자신의 외모 가지고 시비 거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쫑알거리지 마. 나도 이 살덩이 좀 제발 잘라버리고 싶으니까.”

“지금 그 말이 왜 나오…….”

“앞으로 입 함부로 놀리지 마. 너 정신없이 잘 때 주둥이를 찢어 줄 거니까.”

야바는 벙한 표정의 모르핀 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제 책상에 있는 물건이며 시트, 베개, 닥치는 대로 쓰레기통에 담았다. 하아…하아…. 숨이 차올랐다. 많은 양의 산소가 한번에 공급되고 체온이 뜨거워지면 벌레가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 야바는 출렁이는 팔뚝이며 목덜미를 피나도록 긁었다. 문득 건너편에서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저, 저 똘아이! 와아…! 하여튼 사람 환장하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만. 꼭 저런 것들이 죽는소리라니까?”

“그러게 뭐 하려고 말을 시켜?”

“아 진짜. 찝찝하게… 문 잠그고 잘까 봐.”

“입을 찢긴 무슨. 말로만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이냐?”

“저 자식은 진짜 할 거 같단 말야.”

“그나저나 오늘 우리만 가는 건가? 코카인 없이 어쩌라고….”

코카인이 없으면 모두가 불안해한다. 코카인의 이름을 기도문처럼 입속에 품어야만 안심한다. 모두 코카인을 사랑한다. 야바도 언제든지 코카인을 사랑할 준비가 돼 있다. 형욱이를 빼앗고, 형을 빼앗고 결국 노래마저 빼앗아 간 약탈자에게 너그러울 수 있었다. 만약 코카인이 바닥까지 무너진다면 그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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