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웃지 마.”
“왜? 딸 싫어? 그럼 딸 하나 아들 하나.”
“말 돌리려고 일부러 맥락 벗어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네 그 수법에 한 번 속지 두 번 속아?”
“웃기고 있다. 너 맨날 속아. 엄청 귀여워.”
차체에 기대서 있던 태주가 조수석 문을 활짝 열고 안에 앉아 있는 차영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고는 상대가 노려보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입술을 맞물렸다. 그의 혀가 입 속으로 매끄럽게 빨려 들어오는 감각을 느끼면서, 차영도 별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한쪽 팔로 글러브 박스를 짚어 지탱한 태주가 좀 더 고개를 깊게 틀어서 차영과 제 혀를 한데 얽어 나갔다. 들고 있는 보온 컵 때문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차영이 겨우 한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제 몸을 지탱했다. 완전히 뒤쪽으로 무너지기 직전, 태주가 뒤통수를 받쳐 준 덕분에 안전을 사수했다.
찐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혀의 온기도 멀어졌지만 입술 위는 여전히 촉촉했다. 아직 태주가 차영을 안은 채여서,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알지? 내가 착해서 한 기장 봐주는 거야.”
“알아. 넌 착하지. 난 못됐고. 그래서 우린 균형이 맞잖아.”
차영은 그의 색이 짙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태주가 행복해 보인다고 느꼈다.
가슴이 벅찬 나머지 이번엔 차영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태주의 입술에 가볍게 쪽, 하고 입 맞췄다. 그러다가 뭔가 북받친 기색으로 그의 턱을 쥐고 정신없이, 또 허겁지겁 새털 같은 뽀뽀를 온 얼굴에 퍼부어 댔다. 만일 자신이 립스틱을 발랐다면 태주의 안면 전체가 붉은색으로 범벅이 됐을 것이다.
한참 뒤, 차영이 그의 얼굴에서 제 입술을 떼어 내자 태주가 묘하게 달뜬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이거 뭐지? 그동안 애교는 나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한태주 행복해 보인다.”
“그래?”
“응. 엄청.”
늘 슬픔만 가득했던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차영에게도 슬픔을 전이시켰다. 어릴 때 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어른이 된 자신은 그걸 모른 체할 수 있는 힘을 모르는 사이 길렀을 뿐, 전부 느끼고 있었다.
그랬던 태주가 버거울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인 건 어쩌면 지금이 처음 같았다. 그게 차영을 짜릿하게 했다. 어쩌면 육아는 이쪽이 체질인지도 모른다.
“차영이 너는?”
“난 한 기장이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좋아.”
“그래서 너는?”
이번엔 태주 쪽에서 분명하게 구하고자 하는 답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덧붙여 물었다.
“내가 행복해서 좋은 거 말고, 너도 나랑 있는 게 좋냐고.”
“싫다 그러면 놔주게?”
“싫을 리가 없는데. 네 표정은 거짓말을 안 하거든.”
차영은 그의 말에 괜히 표정 관리를 하다가 관두고 픽 웃었다.
“뭐야, 진짜.”
“만에 하나 그렇다면 반성하고 더 잘할게. 이건 농담 아냐. 진심이야.”
굳이 그러지 않아도 지금 이 상태로 족했다. 가끔은 막무가내로 굴고 그게 문제인 줄도 모르는 한태주 그 자체가 좋은 거니까. 사실 차영은 행복하다고 느낀 지 꽤 오래됐다. 자신이 아니라 태주가 계속 슬펐을 뿐. 다행히 지금은 그도 제 옆에 있다는 이유로 편해 보였다.
차영이 이 모든 말들을 입 안에 감추고 입술을 달싹이자,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차마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공기가 찰나 동안 흘렀다. 태주의 올곧은 눈빛은 차영을 향해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곧바로 직감했다. 누군가에게는 별일 아닌 것이지만 가끔은 작은 행동이 한 사람의 감정을 전부 뒤흔들어 놓기도 하는 법이다. 태주는 아마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제 외할아버지한테 다녀왔던 걸 사과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었다.
다만 자신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키려 함인지 그가 말로 꺼내지 않아서, 차영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조용히 묻어 두기로 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차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여기 말고 한 군데 더 가고 싶은 도시 정했어.”
“어딘데. 사행성 도박의 도시?”
“한 기장 살던 데. 뉴욕이랬지? 거기에서 부모님 같이 사셨고, 돌아가신 뒤엔 태주 씨 다시 가서 혼자서 지냈다고 했잖아. 그 집에 가 보고 싶어.”
“뭐……. 나야 환영이긴 하지만 거긴 여기랑 반대편인데?”
“비행기 타면 금방 아냐?”
“여기 한국 아냐. 네댓 시간은 걸려.”
그 고생을 하고 여기에 와 놓고 하루 사이에 또 항공기에 오를 수 있겠냐고 묻는 듯한 미심쩍어하는 눈길이 차영을 향했다. 차영은 그의 볼을 치즈 늘어지듯 쭉 늘렸다. 꽤 세게 꼬집듯이 붙잡았는데도 저항하는 기색이 안 느껴졌다. 급기야 픽 웃는 얼굴을 보곤 더 못 할 짓 같아서 손을 떼어 냈다. 태주의 뺨에 빨갛게 자국이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신년엔 우리 납골당에도 같이 가.”
“너 어머니랑 같이 가지 않아?”
“두 번 가면 되지. 매번 부모님 계신 데 왔다 갔다 하면서 혼자 보는 거 마음에 걸렸어.”
돌아가신 부모님을 안치해 둔 곳이 제각각이라, 태주는 항상 번거롭게 움직여야만 했다.
“어머닌 아버질 사랑했지만 결과적으론 평생을 외롭게 만들었던 거 아닐까 싶어.”
그는 어렵게 제 속마음을 내보였다. 이를 증명하듯 씁쓸한 말투였다.
“한 기장은 내가 평생 안 외롭게 만들어 줄게.”
“아무리 그래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 아이는 진짜 있어야 돼. 평화의 전도사.”
“제발! 좀!”
어렵사리 무릎을 들어 올려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인 태주의 복부를 걷어차려는데, 때마침 “와아아아” 하는 커다란 함성 소리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거세게 울려 퍼졌다. 어느 틈에 일출이 시작되고 서서히 하늘이 문을 열어 밝은 빛을 내보내는 즈음이었다.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도 천천히 몸을 틀어 소리의 진원지를 눈으로 살폈다.
청명하고 드넓은 하늘 위에 수백 개의 열기구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주가 차영의 뺨에 아쉬울 정도로 찰나간 제 입술을 맞대곤 손을 내밀었다.
“저쪽 같이 걷자. 이맘때쯤 저 열기구 아래 걸으면 시야가 근사하거든.”
하늘을 가리킨 그가 차영을 일으켜 세웠다. 차영은 응당 그에게 필연적으로 이끌리게 됐다. 마침내 두 사람이 대지에 땅을 디디고 섰다. 그는 차영에게서 컵을 빼앗아 내려놓고 어깨를 어루만진 뒤, 이윽고 함께 걷자는 듯이 손짓했다.
두 사람은 다채로운 색깔의 풍선들이 뒤덮은 하늘 아래를 같이 걸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 아래를 황홀한 얼굴을 하고 거닐었다.
기구들이 점점 멀어지자, 꼭 푸른 테이블보 위에 동그란 모양들의 무늬가 박혀 있는 듯했다. 공기가 맑은 날 볼 수 있는 별이 수놓인 밤하늘 같은 모양새이기도 했다.
신기함 반 설렘 반의 표정을 하고 그것들을 감상하며 걷고 있는데, 두 사람의 조금 뒤편에서 제일 이륙이 늦었던 하늘색 열기구가 서서히 상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종을 막론하고 또래에 비해 더딘 모든 생명체는 주변인들이 본능적으로 잘 자라 달라고 응원하게 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곳으로 쏠렸다. 차영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물끄러미 알록달록한 풍선들로 풍성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진짜 신기해. 어떻게 하늘을 날아갈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태주의 시선만은 차영의 옆모습에 박혀 있었다. 그걸 느낀 차영이 천천히 눈길을 돌려 태주를 마주 봤다.
“왜?”
“너 예뻐서. 안고 싶어.”
절대 안 된다는 의사를 표명하듯, 차영은 마치 엄정한 재판관처럼 고개를 분명히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양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가 나한테 방 청소 하라고 잔소리하면서 항상 해 줬던 이야기가 있는데, 옛말에 이런 게 있대. 공간을 비워야 좋은 게 들어온다고. 이제 한 기장 슬픔을 비우기 시작했으니까 좋은 것들이 들어올 거야.”
“키스하고 싶어.”
“참아. 참는 것도 배워야지.”
“원래 잘 참으면 적절한 보상을 하는 걸로 아이들 가르치는 거야. 육아의 기본이 덜됐네.”
차영이 그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다가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하늘색 열기구를 응원하기에 바빠 보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가던 길을 다시금 가기 시작했다. 모두 저마다 다른 것에 관심이 팔린 사이, 차영은 고개를 숙이고 제 손등 위에 남몰래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태주의 입술에 자신의 손등을 댔다.
동시에 웃음을 터트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리 날아가고 있는 열기구를 올려다봤다.
누군가의 슬픔을, 아픔을, 혹은 희망들을 담은 그것들이 서서히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멀어져 갔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찬란한 빛깔의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