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하아…….”
진득하게 맞부딪쳐 있던 두 개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숨이 가쁜 차영이 깊이 호흡을 내뱉으며 폐부에 모자란 공기들을 채워 나갔다. 태주는 그런 차영의 정수리에 부리로 꾹 누르듯 입술을 문질렀다.
“기분 좀 나아졌어?”
“거의. 손도 잡아 줘.”
“손가락 사이사이 문질러 줄게.”
“됐어. 그건 그냥 한 기장이 하고 싶은 짓이면서.”
“말했잖아? 난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태주가 놀리듯 웃으면서 차영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를 자극하듯 어루만졌다. 가만히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던 차영은 이제 괜찮으니 이끌어 달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주는 것을 보니 이제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차영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만 나가자.”
잠자코 태주의 뒤를 따른 차영은 다시금 제 몫의 좌석에 앉았다. 잠깐 그와 몇 분여의 여유 시간을 가진 것뿐인데 놀랍게도 몸이 아까보다 훨씬 가뿐하고 편했다. 더는 식은땀이 나지도, 손발이 떨리지도 않았다. 건너편의 태주를 힐끗 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기대 반 체념 반의 복잡한 심경으로 웃었다.
창밖의 창공은 푸르렀다. 언제 봐도 이 조그마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구름 낀 하늘은 아름다웠다. 밤이 되면 더욱 볼만해질 것이다. 감상하듯 바깥을 내다보던 차영은 좌석에 탑재된 모니터로 전 세계 지도를 보여 주는 영상 화면을 켰다. 이 위에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표시된 하늘길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비행기가 그들이 탑승한 로스앤젤레스행 한국 항공 같았다. 그곳에 내린 다음 다시 앨버커키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항공기로 갈아타야 했다.
“뉴멕시코 근처에 라스베이거스 있다. 한 기장 카지노 할 줄 알아?”
“학교 다닐 때 몇 번 해 본 정도야. 그리고 난 도박은 별론데.”
“왜?”
“그 테이블 앞에 앉은 인간들 눈이 다 맛이 가 있거든.”
“뭐 얼마나 판돈 큰 데 껴서 해 봤길래 그래? 난 건전한 도박에 흥미 있어.”
“우연에 기대서 한탕 해 보려고 돈 거는 작업에 건전하다는 단어를 붙이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 추운 여름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왜, 넌 해 봤다며. 너만 해 보는 게 어디 있어. 나도 가르쳐 줘.”
그러자 의외라는 양 약간의 의문과 커다란 흥미를 담은 태주의 시선이 차영을 향했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모범생이 탈선하겠다고 작심하는 순간을 목격한 느낌이야.”
차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도에 시선을 고정했다. 미국의 이곳저곳을 확대했다 축소했다 눈으로 확인하더니 또다시 한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도 한번 가 보고 싶어. 도윤이가 그러는데 여기 사람들은 다들 느긋하대. 또…… 이 위쪽에 아이다호도 있다. 이 영화 본 적 있어? 키아누 리브스 나오는 거.”
“너 그 나라 땅덩이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건 아니지? 우리 휴가일은 비행시간 제외하면 단 5일밖에 안 돼.”
“다 못 가?”
“갈 순 있어. 해당 주에 발자국 찍은 다음 호텔에서 잠깐 눈만 붙이고 나올 거라면.”
“못 간단 소리네.”
“꼭 가 보고 싶은데 한 군데만 더 골라. 나머진 다음 기회에.”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좌절된 차영은 짐짓 아쉬운지 화면을 툭툭 건드려 댔다. 사고가 날까 봐 무섭다며 겁이 잔뜩 나서 덜덜 떨던 게 바로 10여 분 전인데 금세 적극적으로 즐거운 여행을 도모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태주가 입을 살짝 내밀고 아쉬워하는 차영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갑자기 허리를 일으켜 세우더니 도둑 키스 했다.
깜짝 놀라 식겁한 차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퍼스트 객실은 다른 등급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고 사적 영역이 그나마 보장되어 있었다. 아울러 지금 이 순간 이곳의 승무원들도 각각 전담하고 있는 라인 승객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느라 바빴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번번이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막무가내로 구는 태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쿠션을 그를 향해 던지자 그가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얄밉게 그 모습을 보던 차영은 허리를 한껏 수그리고 목소리는 더욱 낮춰 경고했다.
“한 번만 더해, 진짜. 휴가지 호텔에서 다른 침대를 쓰는 기적을 보여 줄 테니까.”
“이래서 네가 사행성이 안 된다는 거야. 간덩이 사이즈가 소박해서.”
“한 기장이 너무 비상식적으로 부은 거야.”
어째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반성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태주의 버릇을 고쳐야겠다 싶어서 도착하자마자 호텔 객실을 바꿀 궁리를 하고 있는데, 약간의 잡음과 함께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음성이 기장 메시지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객실의 승무원들이 본격적인 밀 서비스를 시작하기 위해 갤리로 향했다.
-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비행기의 부기장인 홍선재입니다. 여러분이 탑승하고 계시는 한국 항공 031은, 대한민국 인천에서 출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순조롭게 운항하고 있습니다.
안정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기체 안에 덧입혀진 꽤 명랑한 음성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태주도 익숙한 음성인 듯 귀 기울이는 모양새였다. 그걸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난폭하게 조종간을 잡고 제멋대로 굴 것 같은 태주는 의외로 이 거대한 기체를 다룰 때 그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차영은 그걸 알았다.
어쩌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한 시선에 사랑을 조금 담았던 모양이다. 제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태주가 차영과 시선을 공평하게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이더니 다시 이쪽으로 접근해 와 입을 맞췄다.
좌석 간의 거리가 꽤 있어서 움직이기 불편하고 자세도 어정쩡해졌으나 그는 모두 감수하고 계속 키스하려 들었다. 황급히 상체를 뒤로 뺀 차영이 입술 위를 손등으로 닦으면서 그를 쏘아보았다. 눈으로 나무라니 그가 픽 웃었다. 그러고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막상 뒤통수를 보고 있게 되자 그건 또 싫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물끄러미 태주만을 직시하고 있자니, 그가 느꼈는지 힐끗 돌아보았다.
“왜? 이제 진짜 안 하려고 했어.”
“그걸 어떻게 믿어?”
“네가 믿을 필요 없어. 내가 약속을 지키면 되는 거니까.”
결국 졌다는 듯이 차영도 따뜻한 웃음을 터트렸다.
* * *
매년 10월 초.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라는 이름의 도시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열기구 축제가 개최됐다. 이 축제는 개막부터 폐막까지 그 기간이 꽤 길었다. 그동안 재미있는 행사들을 많이 진행하는데, 특히나 이것을 가장 속속들이 즐기려면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가 있었다. 바로 식전 행사 격인 축제의 첫 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동이 트기 직전, 아직은 깜깜한 새벽녘의 너른 벌판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열기구를 안전하게 띄우기 위해 대기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선발대였다. 그들이 색색의 풍선들을 하늘로 올려 보낼 준비하는 사이 이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태주와 차영도 그들 중 하나였다.
주차장에 차를 댄 두 사람은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열기구들의 이륙을 기다렸다. 먼발치의 주황색 불빛들과 오색 창연한 풍선들이 한데 모여 어둠 속인데도 시야가 꽤 화려했다.
“저건 뭐 하는 거야?”
목 넘김이 부드러운 커피를 마시면서 차영이 물었다. 그의 시선이 고정된 자리에는 제각각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거대한 풍선을 바닥에 늘어놓고, 뜨거운 화염으로 그 안의 공기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기 바빴다.
“열기구들 슬슬 띄우려고. 공기 데우는 거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신기하네. 이 축제 며칠이나 한댔지?”
“글쎄, 아마 1주일은 넘게 할걸?”
“다 못 보고 가서 아쉽다.”
“이번에 보고 좋으면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또 나 데리고 여기까지 올 자신 있어? 난 당사자니까 차치하고 계속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거 감당하려면 한 기장은 몇 배로 더 피곤할 텐데?”
“나 그거 생각보다 재미있어. 육아가 체질인가 봐. 이참에 우리도 하나 낳을까? 섹스를 한 수만 번 하다 보면 신의 가호가 내려서 기적적으로 수정을 할지도 모르잖아. 난 너 닮은 딸이 좋은데.”
차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말을 안 하면 입에 막 가시 돋지?”
“응, 돋아. 나한테는 생존이 걸린 일이야.”
“그래서 나 어르고 달래는 게 피곤하긴 하시다?”
“내가 그렇게 말했어? 설마.”
“했다. 말 다 했어?”
날카롭게 쏘아붙이니 피해 가긴 어렵다고 판단한 듯했다. 태주는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귀엽다는 양 차영을 직시하다가, 이내 자세를 고쳐 서곤 순순히 대꾸했다.
“이차영, 직접 물어봐 놓고 발끈한다는 것부터가 네 미숙한 정신 연령을 증명하는 거야.”
“보자 보자 하니까. 야, 한태주. 넌 인도적인 배려라는 게 없어? 전혀 피곤하지 않으니까 다음에 또 오자고 해야지.”
“없어. 그리고 한태주라니, 형이라고 불러.”
“미쳤어? 이제 와서?”
“싫으면 하나 낳자. 너 닮은 예쁜 딸로.”
차영이 발끈해서 그러자 태주가 능글맞게 받아치며 씨익 웃었다. 이상한 소리 하고 난 직후인데 웃는 얼굴이 저렇게 상큼하다는 건 솔직히 반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