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늦었지만 마지막 인사 드리려고 왔어요.”
부디 지옥에 가라고 끝인사를 해 놓고 뒤늦게 마음 편해지자고 한 마디 덧붙이는 이 행위를, 차영은 위선이라 말했다. 그가 맞았다. 태주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탄 기체는 이미 이륙했고, 그릇된 길을 선택했으나, 이제 와 방향을 조종할 만한 어떤 키도 없었다.
“제가 야속하게 느껴지겠지만 살 만큼 사셨으니까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세요.”
태주가 알지 못할 뿐, 문 회장은 그나 차영의 아버지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을 필요에 의해 조용히 해치우라고 지시했을 사람이었다. 그건 김 변호사가 그에게 남긴 자료들만 봐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은 죄에 비해 너무나 곱게 세상을 떠나갔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낳아 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외할아버지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만한 일이라곤 겨우 쥐어짜 낸 그것 하나였다. 문 회장이 제 부인과 함께 빚어낸 그녀가 태주의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 덕분에 태주가 태어났고, 또 여러 가지 일이 도미노 쓰러지듯 무너져 결국 그는 차영을 만나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비극이기도 했고, 희극이기도 했다. 세상 모든 일의 이치가 그렇듯이 말이다.
차마 더 문 회장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태주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평생 누군가를 향한 증오심을 품어 왔다는 사실 자체가 늘 태주에게 큰 상처였다. 그는 그런 복잡한 감정들로부터 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으나, 너무 어릴 때부터 보이지 않는 사슬에 발목이 묶여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악에 받친 이의 잘못된 결정으로 삶이 휘둘리는 건 이제 그만 사양하고 싶었다.
그대로 뒤돌아 나가는 길에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게 됐다. 무심코 돌아보니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를 향해 있었다.
잘 가라고, 또 오라고 인사를 하는 듯했다.
그녀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고 명부전을 빠져나온 태주는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 * *
어지간한 일로는 크게 긴장하는 법 없는 차영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비행기에 탑승하는 일이었다. 지난 수 개월간 태주의 도움을 입어 비행시간 다섯 시간 이내의 가까운 몇 개국 정도는 다녀와 봤지만, 열 시간이 훌쩍 넘는 이동 거리를 자랑하는 먼 도시로의 여행은 처음이었다.
이제는 많이 적응을 했다고 생각했으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이 트라우마가 생기게 한 실질적 원인 제공자는 이미 이 땅에서 사라지고 없는데도 차영은 여전히 이 안에서 마음을 졸이게 됐다. 그는 너무 초조해한 나머지 급기야 객실 승무원이 친절하게 건넨 물을 바닥에 쏟기에 이르렀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누가 봐도 아픈 사람 같았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불편한 데가 있으시면 반드시 말씀해 주십시오.”
놀란 승무원이 차영의 발치로 떨어진 컵을 줍고 바닥을 훔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차영은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답이 없었다. 결국 그의 한 자리 건너편에 앉아서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태주가 승무원을 향해 손짓했다.
“네, 한 기장님.”
“혹시 지금 벙커에 사람 있어요?”
“승무원 벙커 말씀이세요? 아뇨, 이륙 직후라 지금은 비어 있습니다.”
“거기 내가 잠깐 좀 쓰죠.”
“그러면 동행하신 손님분은…….”
“여기 물 쏟은 이 손님이랑 같이. 잠깐이면 됩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니까 사람 못 들어오게 통제하세요. 10분, 아니 15분만.”
영문은 알지 못하지만 태주가 따로 요청까지 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승무원은 알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곤 벙커 방향으로 손짓했다. 좌석 벨트를 풀고 일어선 태주는 차영의 것까지 풀어 주었다. 평소였다면 왜 보는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타박을 주고도 남았을 차영은 그저 가만히 있을 따름이었다. 지금은 실체 없는 두려움이 그를 잠식한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차영을 부축한 태주가 기내 승무원들이 수면을 취하거나 휴식하는 기내 벙커로 들어왔다. 그는 입구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를 재차 확인하곤 침대에 차영을 앉혔다. 그러고는 여전히 굳어 있는 차영의 얼굴을 꼼꼼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너 왜 이렇게 긴장해. 오랜만이라 그런가?”
겨우 고요한 공간에 단둘이 남겨지자 차영의 입도 가까스로 열렸다.
“모르겠어. 지난여름에 같이 세부도 갔다 왔잖아. 그렇게 오랜만도 아닌데…….”
“멀리 가는 게 문제야?”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
어렵지 않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결국 그게 문제였던 듯했다.
모든 반복은 강제로 지속될 시 지루함 혹은 공포를 낳곤 했다. 가는 길에 걸리는 시간이 서너 시간 정도인 짧은 구간은 수면제를 먹거나 잠시 태주에게 기대 버티면 금세 하기할 수 있지만 거대한 바다인 태평양을 건너 멀리 가는 동안에는 그 과정을 두 번, 세 번을 겪고도 여전히 비행기 안에 한참을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최종 목적지인 뉴멕시코 주의 앨버커키는 따로 국내엔 직항이 없어 경유까지 해야 하는 멀고도 험한 도시여서 난감했다.
연신 차영이 초조해하자 어울리지도 않게 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미소 지은 태주가 그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기장들은 이런 거 주기적으로 훈련받아. 기체가 추락하면 탈출하는 방법 같은 거.”
“바보 취급 하지 마. 승객들 다 내보내고 기장이 제일 늦게 내리는 거 알거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 승객으로 탔잖아. 그것도 퍼스트. 우리가 제일 먼저 내려.”
“같이 탄 사람들 다 죽고 나만 살면 뭐 해.”
“갑자기 왜 죽어? 너 항공 영화를 너무 봤다. 다 살아.”
“그래도 사고 나면…….”
“이러다가 끝도 없겠다. 끊임없이 걱정거리가 튀어나오네.”
“괜히 탔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차영은 원흉이 눈앞에 있는 너라는 양, 원망스러운 눈길로 태주를 직시했다. 그러자 태주가 웃으면서 차영의 눈두덩 위에 한 번씩 키스했다.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차영의 한쪽 눈이 내리감겼다.
다시 눈동자가 마주쳤을 때, 그는 왠지 묘하게 차영을 향해 야릇한 추파를 던지는 듯 보였다.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건 태주가 제 목울대를 끈적하게 쓸어내리는 순간 깨닫게 됐다.
“뭐 하는 거야? 남은 걱정돼 죽겠는데.”
“좋아서. 어차피 내릴 수도 없는데 앞으로 열다섯 시간이 넘는 동안 넌 나만 의지할 거 아냐.”
“나 원래도 한 기장만 의지해. 하지만 지금 난…….”
“그리고 네 전제에는 오류가 너무 많아. 비행기가 얼마나 안전한 교통수단인지는 이차영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그래 봤자 사람이 만든 기계잖아.”
“나랑 같이 죽는 거 싫어?”
“그런 말이 아니라…….”
“난 우리가 함께 죽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뭐 당연히 까마득히 나중 일이겠지만.”
일순 차영의 머뭇대던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다. 눅눅하게 가라앉은 동공으로 태주를 쳐다보자, 그가 땀으로 젖어 있다 서늘하게 식은 차영의 이마를 손등으로 가볍게 훔치더니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똑같은 자세로 입을 맞췄다. 다만 태주는 조금 전처럼 애써서 다정하거나 상냥한 표정을 지으려 들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한날한시에 죽는 건데. 로맨틱하지 않아?”
“무슨 사춘기 중학생이나 할 소리를 해.”
“둘 중 한쪽이 혼자 남겨지면 우리는 피차 너무 외로우니까.”
떠난 사람보다는 남겨진 이의 고통이 훨씬 크다. 차영은 사는 동안 그걸 배워 왔다. 한 차례 덤덤하게 내리깔린 시선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양 태주를 차분하게 향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도착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야. 내가 직접 너 이 비행기에 태웠어. 두렵고 걱정되는 건 알지만 내 선택을 믿어 봐.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내내 굳어 있던 차영의 입매에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언제 들어도 사랑한다는 말은 기분이 한껏 좋아지게 만드는 주술 같은 신기한 단어였다. 그것도 한태주처럼 근사하고 까다로운 인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이면 쾌감마저 일었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두 팔을 내뻗자, 태주가 상체를 굽혀 차영을 마주 안아 주었다. 그는 상반신의 뼈를 죄다 부술 기세로 으스러져라 차영을 품에 가득 안은 채로 귓가에 수차례 키스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제 상체를 떼어 내 고개를 기울였다. 차영은 습관처럼 눈을 감고 그가 선사하는 입 속의 마법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