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쳐들어오더니 차영을 와락 껴안았다. 체온이 가까이 닿으니 얼마나 서둘러 뛰었는지 웬만해선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그의 숨결이 난잡하게 흩어지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끝내 태주가 평정을 잃고 완전히 으스러뜨릴 듯이 차영의 몸을 품에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이게 어떻게 된…….”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그는 언제부터 제게 미안하단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게 됐을까.
“미안. 늦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또, 어울리지도 않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태주는 꽤 초조한 것 같았다.
1주일 가까이 목소리 한 번 들려주지 않다가 겨우 만나게 된 데다 중요한 날을 망치기까지 한 마당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다는 간절한 투였다.
제 몸에 닿은 그의 살결 위에 그 마음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듯했다. 빠듯하게 닿은 피부 위로 전부 전이됐다. 망설이던 차영도 두 손을 올려 그의 등을 보듬었다.
“안 되는데 왜 늦었어.”
“미안. 미안해.”
“나 머리끝까지 화난 상태로 우리 거의 1주일을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어제 같은 날 늦냐? 혼자 두고. 이게 말이 돼?”
“내가 잘못했어.”
그의 탓이 아닌데도 태주는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그러다가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어 차영을 꽉 안았다. 어찌나 단단히 틀어쥐었던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래서 나 부러지겠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소중한 이차영 부러지면 안 되지.”
억세게 고정하고 있던 두 팔을 살짝 느슨하게 풀어 주니 그제야 차영의 숨통이 트였다.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차영은 태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숨을 골랐다.
떨어져 있는 동안 그가 그리웠다는 것을 머리로도 알고 마음으로도 느끼고 있었는데 실재하는 태주를 안고 있으니 그 감각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듯했다. 익숙한 향기가 풍겨 오자 불안감이 사라지고 안도감이 들었다.
“차영아, 나 좀 봐.”
서서히 제 상체를 차영에게서 떼어 낸 태주가 그의 두 뺨을 쥐고 눈을 마주쳤다. 살짝 상기된 살결을 어루만지고,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보드라운 입술에 찰나간 입을 맞췄다.
“화는 좀 풀렸어? 나는 반성 많이 했거든.”
“한 기장이 반성하면 나는 자동으로 화를 풀어야 돼?”
“모자라면 무릎 꿇고 빌까?”
“지금 일부러 저자세로 구는 거지? 나 화 대충 풀린 거 알고. 눈치는 또 귀신같아서.”
“아냐. 네가 날 버릴까 봐 겁이 나서 그래.”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차영이 퍽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태주의 옆구리를 꽤나 힘주어 꼬집었다. 아플 텐데, 태주는 잠깐 움찔하긴 했으나 큰 동요는 안 보였다.
“진짜 치사하다. 내가 본 한태주 중에 방금 제일 치사했어.”
“난 원래 수단 방법 안 가려. 목적 지향 주의자야.”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연신 터트리긴 했으나, 차영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지금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너무 애틋하고 좋았다. 태주에게도 그 마음이 전달된 듯 말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뽀송뽀송한 머리카락 이곳저곳에 꼼꼼하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한참 그렇게 현관에 머물러 있었다. 서로 얌전히 끌어안고 숨만 쉬고 있으면 금세 불이 꺼졌다가, 다시 조금씩 손과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하면 센서가 이를 감지해 희미한 불을 켜는 것이 몇 차례나 반복됐다. 그러다가 차영이 먼저 태주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자연스럽게 차영을 안아 든 태주가 거실 소파로 가 함께 그 위에 무너졌다.
그의 위에 완전히 올라탄 차영은 태주의 전신에 제 몸을 의탁하듯 기댔다.
“한 기장이 준비한 이벤트 설명해 봐. 작년처럼 우리 불꽃 축제 보러 가는 거였어?”
“어쩌다가 호숫가 근처에 있는 괜찮은 레스토랑을 하나 알게 됐어. 저녁을 거기에서 먹고, 저번에 네가 잘 먹었던 케이크를 미리 주문…….”
스스럼없이 대답하던 태주가 아차 싶었던지 잠시 말을 멈췄다.
“왜 그래?”
“선물. 캐리어에 있는데 그냥 몸만 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태주의 상체를 두 손으로 짚어 지탱한 차영이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짐 다 팽개치고 올라왔다고? 그것들은 다 어쩌고.”
“홍 기장한테 부쳐 달라고 말해 두긴 했어.”
“그건 다행인데. 그럼 결국 한 기장 지금 빈손이시다? 말도 안 돼. 물질은 애정의 척도야. 어떡해? 한태주 씨 오늘 일 만회 못 하겠네?”
장난스럽게 가슴팍을 툭툭 치며 그러자, 태주가 덩달아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차영을 안은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느릿하게 다가온 입술이 차영의 것과 부드럽게 맞물렸다. 손쉽게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혀끝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달라붙는 차영의 것과 얽혔다. 서로의 눈이 스르륵 내리감겼다.
태주의 혀가 차영의 입 속을 천천히, 하지만 꼼꼼하게 탐색했다. 치아를 훑고 지나가서 입 안의 여린 살들을 자극하고, 다시금 혀로 되돌아와 맞물리는 꽤 공들인 키스였다.
숨이 막힌 차영이 그의 목울대를 가볍게 붙들고 쓸자, 태주가 이 신호를 제대로 알아듣고 서서히 제 입술을 떨어뜨렸다. 두 개의 입술이 멀어지면서 얇게 타액이 걸렸다가 떨어졌다. 차영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붉어진 뺨을 태주의 손이 매만졌다.
“일단 계약금.”
“한 기장만 좋은 건데 이게 어떻게 계약금이야?”
“나만 좋다고? 아닐걸? 나 키스 잘하잖아.”
“그 소릴 본인 입으로 하는 것부터 파울이야.”
“공 다시 던져 줘. 이번엔 홈런 날릴게.”
“홈런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내가 투수고 네가 타자면 그 점수 나한테서 따 가는 거잖아.”
“하. 차갑네, 오늘.”
농담 섞인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손이 거침없이 차영의 셔츠 안으로 침입했다. 이를 느낀 차영이 픽 웃었다. 다시 태주를 마주하게 된 뒤로 계속 갖가지 이유로 웃게 됐다. 지난 1주일간 별로 웃을 일이 없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어느새 커다란 손이 잔뜩 긴장한 등줄기를 쓸어내리다가 천천히 내려서 허리를 만지작댔다. 각자의 하반신이 바짝 굳어 가는 것이 서로에게 느껴졌다.
“같이 씻을까?”
이윽고 태주가 은근하게 요구했다. 그러면서 차영의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 넣으려고 하기에, 서둘러 그 손의 진입을 가로막은 차영이 입 속의 혀를 꺼내어 태주의 입술을 핥았다.
“우리 얘기부터 해.”
“몸의 언어로 먼저 이야기하면 안 돼?”
“나도 미안해. 내 생각만 한 것도, 계속 전화 안 받은 것도.”
아주 신중한 음성이었다. 언제나 진지한 차영의 말투 그대로였으나 지금 이 순간 여느 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태주에게도 전달됐다.
두 사람의 시선이 보다 분명하게 마주쳤다. 태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볍게 감싼 차영이 제 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고정하더니, 다시 그를 마주하게 되면 꼭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야기들을 일방적으로 꺼내 놓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이 늦게 되니까 불안해서 밤에 공항에 갔었어. 내가 예상한 자리에 한 기장 없으니까 기분이 너무 이상하더라. 어디 있는지 확인 제대로 안 되는 동안 한태주 씨 심정 좀 이해됐어.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그런 결심 하면서, 좀 복잡했어.”
당연히 태주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귀담아들었다. 그건 마치 차영의 의사가 제 기분이나 감정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듯이 보였다. 그러다 차영이 심호흡을 하며 제 음성 내뱉기를 멈추었을 때라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알아. 올라오는 길에도 계속 전화가 안 되길래 여기저기 연락해 보다가, 타워에 갔다는 거 듣게 됐거든.”
차영은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 휴대폰은 침실 침대에 얌전히 놓여 있을 듯했다.
“탑장님한테?”
“너 어머니 기다린다고 그랬다면서.”
“혹시 기분 상했어? 아무리 친구라지만 생일에 남자끼리 단둘이 만나는 거 좀 이상한 것 같아서.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았을까?”
“이 비슷한 이야기 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넌 뭐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신경질 내. 화도 내. 전화…… 받기 싫으면 네 기분 따라 행동해. 그걸로 네가 짜증 났다는 표현을 하고 싶다면 난 견딜 수 있어. 나한테 네가 어디에 있는지만 넌지시 알려 주면 돼. 날 숨겨도 상관없어. 딱 하나, 날 버리지만 마.”
“…….”
“버림받을까 봐 불안하다고 했던 거 거짓말 아니야.”
그는 영리하다 못해 때론 교활하기까지 해서, 어떻게 다가가야 상대의 마음속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아는 듯했다. 졌다는 양 차영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한태주 치사하고.”
“내가 고안한 생존법 중에 하나지. 이제 우리 씻어도 돼?”
“안 돼.”
단호하게 대꾸한 차영은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있던 제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한 기장 혼자 씻고 나와.”
“설마 우리 각방 그런 거 아니지?”
“우리 집에 침실 하나밖에 없는데 당연히 아니지. 빨리.”
“나 씻겨 주려고? 내 생일도 아닌데 이렇게 받기만 해도 돼?”
“왜 틈만 나면 미친 소릴 하는 거야? 얼른 들어가.”
“싫어. 같이 씻어.”
“난 방금 씻고 나왔어.”
“뭐가 문제야? 또 씻어. 기분 전환에도 도움돼.”
“한태주, 이거 봐.”
제 손목시계의 시침을 돌린 차영이 러시아 모스크바의 현지 시각에 그들의 시간을 강제로 고정한 다음 태주의 앞에 내밀었다. 그곳은 한국과는 여섯 시간 정도가 나는 먼 지역이었다. 덕분에 현재 두 사람이 지나고 있는 시점은 여섯 시간 전인 하루 앞으로 되돌아갔다.
“아직 내 생일이야.”
“너 이런 요행도 부릴 줄 알아?”
“목적 지향적이신 누구한테 배웠어. 빨리 씻고 나와. 20분 줄게.”
그러고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상태로 어설프게 소파에 걸치듯 앉아 있던 태주가 픽 웃음을 터트리더니, 벌떡 일어나 욕실로 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