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137화 (137/144)

137화

“이쪽 KTX 구간은 또 언제 폐지했어?”

“어, 선배 모르셨어요? 이용자가 별로 없어서 그랬다는데.”

“지랄 났다. 진짜 가지가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그가 여전히 신호만 걸리고 상대의 목소리는 들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이미 예약한 레스토랑은 영업을 종료했을 듯했고, 출국 전 미리 주문해 둔 케이크는 호텔 베이커리 냉장실에서 상해 가고 있을 것이다.

“대체 누구 생일인데 그러세요? 어머니나 아버지? ……일 리가 없고. 형제…… 도 외동이시니 아닐 거고. 친구 같은 거 전혀 없으시고. 저도 아니니까…… 역시 애인?”

“재밌냐?”

“이게 안 재미있으면 뭐가 재밌어요. 선배 이렇게 난감해하시는 거 처음 봐요. 대체 얼마나 대쪽 같은 여자길래 전화를 이렇게 여러 번 하는데도 단 한 번을 안 받아 줘요? 밴쿠버에서도 계속 거셨는데 차이셨죠? 차단당한 거 아니에요?”

다시없을 기회라고 느꼈던지 연신 깐족거리던 선재를 한심하게 보던 태주가 결국 통화를 포기하고 창밖을 살폈다. 분명히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쏟아지는 곳을 지나 날아왔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하늘이 깨끗하고 맑았다. 선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와, 어떻게 손바닥만 한 땅덩이에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수도권은 비가 그렇게 하늘에 구멍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데 여긴 멀쩡한 거요.”

태주는 선재 쪽을 힐끗 보다가, 벤치에 내려놓았던 휴대폰이 반짝거리는 것을 확인하고 다급히 그것을 들었다.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니 차영은 아니었다.

“선배 계속 여기 계실 거예요? 아까 공항에서 노숙한다는 사람들 좀 있어서, 보상 문제 이야기 끝나면 이쪽으로 곧 몰릴 것 같은데.”

“아니, 올라갈 거야.”

“어떻게요?”

“홍선재, 내 캐리어 네가 수습해서 화물로 인천 공항에 보내.”

“짐을 부치라고요? 이대로 그냥 가시게요?”

“어, 정 방법 없으면 육로로 가려고 차 불렀어. 도착했나 보다.”

“어라? 선배! 태주 선배!”

벌떡 일어난 그는 선재를 뒤로하고 걸었다. 황망해진 선재가 애타게 불렀지만 태주는 대꾸가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발을 내딛다가, 급기야 달리기 시작했다.

* * *

터미널의 커다란 전광판 앞에 선 차영은 한국 항공의 고유 번호부터 찾았다. 도착 예정인 항공기들은 분명히 이 위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데, 몇 번이나 화면이 반전되는 동안에도 한국 항공 052편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 차영은 늦은 시간대인데도 공항 내에 평소 대비 사람이 무척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대다수가 항공기가 예정보다 늦게 착륙하게 된 덕분에 막차가 끊겨 곤란을 겪고 있는 듯했다. 그들 중 몇몇의 시선이 쫄딱 젖어 있는 차영에게로 향했다.

뒤늦게 제 몸을 내려다보게 된 차영은 내심 식겁했다. 분명히 집에서 출발할 때는 우산을 챙겨 들고나왔었는데, 이곳에 도착해서 터미널 안으로 진입하는 동안 맨손으로 뛰어왔던 것을 되새기게 됐다. 우유의 유통 기한이 한참 지났다는 걸 몰랐을 때와 똑같았다. 어지간히 정신이 없는 것이다.

태주와 연락하지 않았던 이번 주 내내 자신의 상태가 이랬다는 게 왠지 뼈아픈 기분이었다.

일단 무턱대고 왔는데 길이 사라진 상황이니 다른 활주로를 모색해야 했다. 휴대폰을 찾아보는데 주머니 안에 만져지는 게 없었다. 집에 놓고 온 게 분명했다.

“뭐야, 진짜.”

스스로를 탓하던 차영이 한국 항공의 카운터를 힐끗 살폈다. 지상직 승무원들은 일정이 마구잡이로 교란되어 화가 난 승객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익숙한 관제탑으로 향했다.

발걸음에 애가 타서 조마조마한 마음이 조금씩 묻어났다. 걷는 속도가 빨라지다가, 결국은 뛰게 됐다.

“수고하십니다.”

서둘러 탑으로 뛰어 올라간 차영이 둥그런 형태로 된 내부를 둘러보며 인사했다. 야간 관제를 하던 동료들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출근하지 않았던 그가 이 시간에 나타났다는 것도 의아했으나 더 궁금한 것은 왜 이렇게 흠뻑 젖었는지였을 터다.

“차영 씨 왜 이렇게 젖었어요? 우산 안 갖고 왔어요?”

“여긴 왜 다시 온 거예요? 우리 난리 났다는 소식 듣고? 안 그래도 배수로가 어디 하나 망가졌는지 공항 지금 아수라장이에요. 탑에서 봐도 시야가 흐릴 정도고요.”

그가 입술을 달싹이면서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왜 이렇게 홀딱 젖었냐? 내리는 비는 혼자 다 맞은 사람처럼?”

“탑장님!”

차영이 간절한 눈길을 하면서 탑장을 직시했다. 그는 제 부하 직원이 감기가 걸릴까 염려가 됐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서둘러 차영을 데리고 나왔다. 그러고는 휴게실로 이끌었다.

“야, 너 일단 좀 닦아라.”

다짜고짜 커다란 수건을 내민 탑장은 차영을 위해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 망연히 휴게실 한가운데에 서 있던 차영이 뒤늦게 제 옷자락 위에 흥건한 물기들을 닦아 냈다. 흠뻑 젖은 덕분에 몸이 너무 무거워서 계속 버티고 서 있기가 어려웠던 그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머그 컵에 따뜻한 커피를 가득 따라 내온 탑장이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인마, 오늘 생일이라면서. 이 시간에 왜 여길 와?”

“탑장님, 한국 항공 052 왜 착륙 예정 기체 목록에 없어요?”

“왜? 거기에 누구 타 있어? 어머니?”

“아뇨. 아…….”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고민한 차영이 입을 다물었다. 거기까지는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던 탓이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고, 차영의 성향을 잘 아는 탑장이 당연히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상식적인 일이긴 했다. 침묵이 긍정의 언어라고 생각했던지 탑장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밴쿠버는 왜 다녀오시는데?”

“글쎄요. 그냥 일 때문에…….”

“너 그거 한태주 기장이 모는 거 아냐?”

“네, 알아요.”

“안 그래도 아까 한태주 기장이랑 얘기했는데.”

“교신됐어요? 왜 아직이에요?”

차영이 수건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으며 다급하게 묻자 탑장이 상체를 살짝 뒤로 뺐다.

“깜짝이야. 그거 대구로 보냈어. 이제 도착했을걸? 아마 어머니한테 곧 연락 올 거야.”

“대구요?”

“응. 연료 부족하대서 여기서 뺑뺑이 돌리는 대신 아래 지방으로 뺐어. 지금은 그나마 비가 그친 거야. 아까 여기 완전 난지도였거든. 나 퇴근도 못 하고 붙잡혀 있는 거 봐라.”

침묵하는 차영이 서운해하고 있다고 지레짐작했는지 탑장이 달래듯 이어 붙였다.

“아마 한국 항공에서 여기 올라오는 비행기 잡아 주지 않겠냐? 그런데 오셔도 네 생일은 다 지나 있겠다. 어째?”

바로 그때, 휴게실에 있는 디지털시계가 지금 막 밤 11시를 지나친 시점이라고 친절히 전달해 주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차영은 전화를 한 통 해도 되겠느냐고 탑장에게 물으려다가, 가뜩이나 예정에 없던 불시착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태주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관뒀다.

“괜찮냐? 얼굴 안 좋아 보인다.”

“아니에요. 탑장님, 저 이거만 다 마시고 갈게요. 올라가 보세요.”

“정 서운하면 나라도 같이 있어 줘?”

“괜찮습니다. 엄청 바쁜 것 같던데 도와 드린다고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야, 나 1년에 하루 있는 날까지 후배 밤새 일 시킬 정도로 무뢰한 아니다. 그거 다 마시고 옷도 좀 말리고 가. 알았지?”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보인 차영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날 외롭게 혼자 두는 일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지 몇 번 뒤돌아보던 탑장은 일손 하나라도 더 보태야 할 관제탑 또한 신경이 쓰인다는 기색으로 조용히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결국 차영은 다시 혼자가 됐다. 올해 그냥 지나치면 내년에 또 오는 날이고, 1년에 365일이나 있는 많은 날들 중 하나일 뿐이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오늘따라 그냥 흘려보내기가 왜 이렇게 섭섭한지 모르겠다. 그가 천재지변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특히나 지금 이 순간 자신보다 더 초조해하고 있을 사람이 태주라는 것도 잘 아는데 서운했다.

가만히 앉아서 빗소리를 들으며 찻잔 입구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은 겨우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 * *

눅눅해진 몸을 이끌고 들어가 겨우 씻고 나온 차영은 제집 거실 창가에 섰다. 편의점 근방에 있는 빵집이라도 들러서 작은 케이크라도 하나 구매해 생일을 자축하려고 했으나 이미 문을 닫은 뒤여서 좌절됐다. 하는 수 없이 빈손으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이미 기념할 만한 날짜를 넘겨 버린 지 한참 후였다.

지난 다음엔 뭘 해도 의미가 없는 법이다. 허탈한 심경을 애써 억누르며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셨다. 빗소리가 잦아드는 것 같다고 느끼긴 했는데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장대비가 깔끔하게 그쳐 있어 놀라웠다.

“와……. 진짜 신기해.”

창문을 활짝 열어도 빗방울이 그의 얼굴로 날아들지 않았다. 어제 오후부터는 광폭하리만치 거칠게 내려 대는 빗소리에 자신까지 침수되는 기분이 들었다. 건물이 무너지면 어떡하나, 차체가 뚫리면 어떡하나 농담 삼아 생각했을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그런데 지금 하늘이 너무 깨끗해서 느낌이 묘했다.

“무지개 뜨겠네.”

테라스 창문에 한쪽 팔을 걸친 차영이 상체를 뒤쪽으로 쭉 빼서 태주의 집인 7층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주차장에 차량이 진입하는 소리가 들려서 그곳을 돌아보았다. 지금 시각은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누가 늦은 퇴근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도착한 차량은 택시였다.

차량의 바퀴가 첨벙, 하고 고인 물웅덩이 위를 지나쳤다. 출입구 앞에 도착한 택시의 뒷좌석 문이 다급히 열렸다. 길쭉한 다리가 지면에 내디뎌졌다. 뭔가 익숙하다고 느꼈는데,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완전히 내린 이가 제복 차림의 태주였기 때문이다.

“한태주?”

건물을 올려다보던 그가 테라스에 팔을 걸치고 있는 차영을 발견했는지 멈칫했다. 그는 좀 아연한 얼굴로 잠시간 차영을 올려다보다가, 재빠르게 건물 안쪽으로 뛰어들어 왔다.

이에 질세라 잽싸게 현관으로 뛰어간 차영은 잠시 멈춰 서서 거울부터 확인했다. 씻고 나와서 말간 얼굴이 유리 위에 고스란히 비쳤다. 마침내 현관 손잡이를 붙잡고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바깥에서 벌컥 열리는 바람에 몸이 딸려 나갔다.

“헉…….”

눈앞에 태주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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