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136화 (136/144)

136화

인천 공항의 주 배수로는 이런 재해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는 것으로 알았다. 집중 호우와 만조가 함께 발생해도 거뜬히 버틸 만큼 말이다.

“말이 돼? 여태 침수된 적 없잖아.”

“그러게요. 공항 배수로에 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에요.”

태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곤란해하는 선재를 잠자코 쳐다보다가, 자신이 직접 교신을 하겠다는 양 장비를 챙겨 들었다. 승객들의 일정도 문제겠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는 태주 본인에게 있었다. 지난번에 차영과 마찰을 빚은 뒤에 맞게 되는 그의 생일인데 이렇게 얼굴도 보지 못하고 물처럼 흘려보내면 가뜩이나 다 까먹은 점수를 어마어마하게 더 잃는 셈이다. 이미 연착이 길어진 탓에 그의 생일을 마감하기까지 세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여기는 한국 항공 052. 타워. 응답 바랍니다.」

- 「타워. 한국 항공 052. 현재 착륙 대기 기체 만기 상태입니다. 연락할 때까지 대기 바랍니다.」

말투는 느긋하지만 정확한 발음이었다. 꽤 연륜 있는 사람의 음성으로 들렸다. 그리고 태주는 이 사람의 목소리를 언젠가 관제가 아닌 전화 통화로 들어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항공 052 우선 착륙 바랍니다.」

- 「한국 항공 052는 요청 근거가 없습니다. 현재 기체들 밀려 있어서 불가합니다. 기다리세요.」

「네, 그러죠. 지금 연료 아슬아슬한데 우리 비행기 그대로 추락하면 전부 해당 관제사 책임인 걸로 알겠습니다.」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약간의 잡음만이 교신 중인 두 사람 사이를 건넜다.

- 급하니까 한국말로 할게요. 한태주 기장님이세요? 저 탑장입니다.

“네, 한태주 맞습니다. 당연히 나지, 나 말고 이런 진상 피우는 기장도 있어요?”

- 농담이 너무 살벌하셔서 알아챘습니다. 052 지금 연료 얼마나 모자라죠?

“부기장 말론 빠듯하답니다. 우선 착륙 바랍니다.”

- 우리도 다 해 드리고 싶은데 못하는 거예요. 여기 상황이 정말 어렵습니다. 정 연료가 모자라면 우회해서 대구 공항으로 착륙 시도하십시오. 그쪽은 강수량이 많지 않답니다. 해당 타워에는 저희가 교신을 하겠습니다. 공항까지 접근하셔서 명령에 따르시면 됩니다. 예상 도착 시간은 35분가량 후입니다. 악천후라 약간의 변동 있을 수 있습니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태주는 미간을 구겼다.

“대구라니 승객들 컴플레인 책임질 겁니까? 차라리 김포로 해요.”

- 수도권 지역 기상 악화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김포도 우리랑 상황은 비슷합니다. 인천 공항은 외항사 항공기, 환승 예정 기체들을 우선 착륙시키고 있습니다. 국내 항공사는 급한 경우 대구와 부산 지역으로 나누어 이동하고 있으니 지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탑장님.”

- 한 기장님이 제발 좀 봐주십시오. 저희도 미치겠습니다. 이런 일 한번 생기면 관제사들 얼마나 죽어나는지 차영이 보면 잘 아시잖습니까.

당장 차영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착륙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의 이름을 들으니 더 억지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건 꼭 마법의 언어 같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태주는 짜증스럽게 장비를 내려놓고 교신을 선재에게 다시 맡기면서 덧붙였다.

“운항 팀에 연락해서 대구에서 인천 가는 비행기 좀 알아보라고 해.”

“선배, 대구랑 인천 구간은 환승 전용 내항기라서 단독으로 노선 운항 안 하잖아요. 이 비행기에 탄 승객 우선이라 승무원들까지 차례 오려면 시간 좀 걸릴걸요. 제 생각엔 차라리 다른 교통수단 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하……. 진짜 안 도와주네.”

“왜요. 아까부터 초조해 보이시는데, 뭐 급한 일 있으세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태주가 겨우 내뱉었다.

“생일.”

“선배 생일 오늘 아니지 않아요?”

“내 생일보다 더 중요한 생일.”

“설마 여자 친구?”

“씨발, 일이 안 풀리려니까 별…….”

신랄하게 내뱉은 그는 결국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선재가 고개를 기울이고 태주의 눈치를 살피다가, 지금은 괜히 더 말을 걸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 * *

차영의 침대 위에선 태주를 떠올리게 하는 향기가 희미하게 풍겼다. 태주의 침실 침구를 세탁할 때 사용하는 익숙한 섬유 유연제 냄새였다. 너무 시원하고 좋아서 규칙적으로 와 주시는 태주의 집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지 따로 물어봤을 정도였다. 덕분에 이곳에 누우면 혼자일지라도 태주에게 안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트 위를 괜스레 손바닥으로 쓸어 보던 차영은 허공으로 손목을 들어 올렸다. 태주가 준 시계가 얌전히 둘러져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야속한 초침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은 하늘 위의 구름처럼 유유히 흘렀으나 안타깝게도 휴대폰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태어난 날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여태까지 늘 어제와 같은 하루를 보내 왔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 정도는 차영에게도 있었다.

〈나 귀국하는 날 네 생일이잖아. 공항에서 봐.〉

오늘 새벽, 태주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차영은 그가 보내 두었던 메시지를 뒤늦게 하나씩 확인해 봤다. 그의 말대로라면 도착 시간은 당일 오전쯤이었다.

한참 전부터 오늘은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터라 월차까지 쓴 마당이었다. 이제 와 내숭을 떨 필요를 못 느꼈다. 화해도 도모할 겸 직접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려고 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폭우가 내렸다. 덕분에 태주도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도윤을 통해 전해 들으니 그를 태운 항공기는 열 시간이 넘게 연착을 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미뤄진 시간은 고스란히 한국에 도달하는 시간에도 적용이 되는 듯했다.

비라도 그치면 기분이 나으련만. 설상가상으로 뉴스에서는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수도권을 강타한 기록적 가을 폭우라면서 떠들어 대기 바빴다. 피해를 입은 수재민들의 소식을 화면으로 보면서 함께 마음을 졸이다 보니 이미 뉴스마저도 모두 끝나고 밤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결국 전원을 끄고 침실로 돌아와 누운 지 몇십 분가량이 흐른 뒤였다.

얌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꽤나 빗발이 굵은 모양인지 무척 거칠었다. 그 물방울들이 몸뚱이를 한데 겹쳐 광폭하게 창문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게 느껴져서 창가를 돌아보았다. 유리창이 흠뻑 젖어 있었다.

“전화를 받을걸.”

그들은 5일 내내 아무 연락 하지 않았다. 태주가 끊임없이 시도했으나 차영은 시종일관 무시 일변도였다. 일이 잘못됐다는 걸 어렴풋이 느낀 차영이 오늘 오후쯤 뒤늦게 걸어 봤지만 당연지사 비행 중인 그는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어렵사리 몸을 일으킨 차영은 거실로 나와 베란다를 내디뎠다. 주차장에 태주의 차로 보이는 몇 대의 차들은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쉬운 대로 그 옆에 세워 둔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어 보았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주차된 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 켜졌다.

거기까지 눈에 담은 차영은 더 견딜 수가 없어서 그대로 정신없이 현관으로 뛰어갔다. 대충 눈으로만 집 안 단속을 하고, 우산만 겨우 챙겨 든 뒤 밖으로 나갔다. 띠릭. 문이 닫혔다.

잠시 뒤 계단을 황급히 뛰어 내려간 차영이 제 차를 몰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배기음이 육중하게 지면 위에서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불 꺼진 차영의 침실 침대 위에서 주인이 두고 나간 휴대폰이 위잉, 하고 몸을 떨며 진동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 * *

휴대폰을 든 채로 왔다 갔다 하던 태주가 으스러뜨릴 듯 기계를 손아귀에 거세게 쥐어 봤다. 손목시계로 확인한 현재 시각은 밤 10시 35분. 아직 차영이 잠들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나, 목소리를 듣기는 요원해 보였다.

“미치겠네.”

초조해하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시도해 봤으나 여전히 상대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선배, 아직도 전화 안 받아요?”

선재가 뒤늦게 그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따뜻한 캔 음료를 태주에게 건네자, 그가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됐다는 양 손을 저었다.

그들은 다행히 탑장이 언질을 주었던 대로 35분 만에 대구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다만 승무원들의 업무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항의하는 승객들을 객실 승무원들끼리 상대하기가 벅차서 선재까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처음엔 태주도 아비규환인 모습을 보고 잠시 손을 보탤까 했으나 본인은 대외적으로 얼굴이 알려져 있어서 자칫하다간 한국 항공 측에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해 관뒀다. 그러고는 먼저 하기해 개인적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강구했는데 이 시간에 제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육로 외엔 마땅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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