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찰나간 고민했지만 차영의 입은 결국 조심스럽게 열렸다.
“나 사귀는 사람이랑 사소한 일로 좀 크게 다퉜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 다퉜는데? 그게 중요하지.”
“그냥. 그 사람이 내가 기대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게 화가 나.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짜증 나. 내 입으로 말하기 전에 전부 알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해 주고, 불편한 이야기는 차라리 안 들려줬으면 좋겠는데, 굳이 말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걸 못 견디겠어.”
“얼마나 사귀었어?”
“사귄 건 3년도 훌쩍 넘었어.”
“여태 한 번?”
“이런 식으로 상대가 날 실망시켜서 싸운 건 두 번째야.”
그리고 두 번 모두 차영에게 아주 큰 상처를 입혔다. 처음엔 헤어지자고 말했으나, 이제 차영은 그렇게까지 화풀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용서를 해야 하는데, 어느 지점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가 안 잡혔다.
“넌? 넌 그동안 몇 번이나 한태주 기장을 실망시켰는데?”
“나? 그쪽은 그런 말을 안 하니까 난 잘 모르…….”
잘 모르겠다고 마저 대답하려던 차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엄마.”
그녀는 놀랍게도 차영을 향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태 아주 잘 감췄다고 생각했다. 또 같은 남자와 교제한다는 명제 자체가 그 나이 대 어른들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논점 외의 범주였기 때문에 내심 마음을 놓고 있던 것도 맞았다.
“한 기장이 우리 차영이 정말 많이 봐주나 보다. 성격은 못됐는데 그래도 널 엄청 좋아하긴 하나 봐? 어떻게 3년이 넘게 만나면서 딱 두 번 실망시켰을 수가 있어?”
“대체 어, 어떻게 알았어?”
“가정 있는 유부녀만 아니면 된다고 말하지 말 걸 그랬어. 어디 고를 사람이 없어서 남자를.”
“어떻게 알았냐니까!”
차영은 왠지 조바심이 나 언성을 높이게 됐다. 그러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차영을 직시했다.
“어떻게 알긴. 엄마 고지식한 사람인데 그런 거 상상이나 했겠니? 말을 했으니까 알지!”
“내가 언제? 나 그런 말 한 적 없어! 취해서 말했나? 아닌데?”
“넌 입만 말하는 줄 아니? 눈도, 귀도, 행동도. 손짓이나 말투, 네가 앉은 방향까지 전부 옆에 있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또 싫어한다고 말해. 엄마 평생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어. 그 애들 교우 관계 관찰하는 덴 도가 텄다.”
“결국 넘겨짚은 거야?”
그녀는 어불성설이라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차영아, 적당한 근거가 있을 땐 넘겨짚는다고 안 해. 합리적으로 추측한다고 하지. 그리고 너 보고 안 거 아니야. 처음엔 전혀 몰랐어. 너 쳐다보는 한 기장 보고 차츰 눈치챈 거지.”
“…….”
“넌 아주 잘해. 그런데 걔는 전혀 못 감추더라. 처음에 너희 일 짐작하게 됐을 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리려고 했어. 우리 병원 지원해 준다고 한 것도 전부 걔 꿍꿍이 같아서 물리고 아주 머리를 쥐어뜯어 놓으려고. 그런데 너 쳐다보는 한 기장 보고 차마 사람이 할 짓 아닌 거 같아서 관뒀다. 싸웠다고? 잘됐네! 솔직히 엄만 이참에 둘이 헤어져서 네가 예쁜 여자애 만나 결혼이라도 한다 그러면 제일 좋겠어.”
아들인 차영의 선택에 반대는 하지 않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자기 주도 하는 어른으로 차영을 키웠대도 이런 부분에서 부딪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자식의 평탄한 삶과 행복만을 바라는 존재니까 말이다.
언젠가 둘 사이를 그녀가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자신도 미처 몰랐던 이런 스며드는 듯한 방식이리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던 터라 차영은 난감했다.
“얼굴 봤으니까 됐어. 차 잘 마셨다. 버스 시간 다 됐으니 이만 가 봐야겠어. 일어나자.”
“이렇게 그냥 일어나면 나는 어떡해.”
곤란해진 차영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관계를 단절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전화 정돈 받아 줘. 대화를 해야 풀지. 휴대폰 계속 울리는 거 몰랐어? 부재중 전화 열다섯 통 쌓여 있던데.”
“왜 그런 것까지 봐…….”
“본 게 아니라 보인 거야. 방금 여기 앉는데 진동이 끊기지도 않고 계속 울려서 시끄럽더라. 그러게 누가 휴대폰 테이블 위에 두래? 거실에 있으라고 했던 것도 너야. 엄마 아들 사생활 간섭하는 파렴치한 만들지 마. 나야말로 이런 거 알기 싫어.”
그녀는 그들이 마주 앉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휴대폰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다가 못다 한 말이 있는 모양인지 차영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말을 이었다.
“이차영. 과정이 틀려도 결과는 맞을 수 있지만, 과정이 맞았는데 결과가 틀리는 일은 없더라. 만약에 결과가 잘못 나왔다면 분명히 그 과정 사이에 크고 작은 실수가 있었을 거야. 나눗셈을 덧셈으로 착각했다든지, 인수 분해를 잘못했다든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 내가 틀렸다는 거야?”
“그렇겐 말 안 했어. 또 만약에 틀렸대도 실수하면서 배우는 것도 있는 거지. 오답 노트 괜히 만드는 줄 아니? 엄마 말은, 네가 올바른 과정을 통해 그 사람이라 판단을 했으면, 그건 맞는 결정이란 뜻이야. 적어도 네 안에서는 그게 정답인 거지.”
“…….”
“엄만 너 잘 알아. 넌 한 번도 과정을 틀린 적이 없었어. 항상 심사숙고하고, 공식대로만 문제 푸는 애야. 한 기장 괜찮은 사람 같아. 이번에 널 실망시킨 부분이 있다면 그걸 완화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봐. 그러다 정 안 되면 헤어지고. 사실 그래 주면 제일 고맙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떤 공식을 적용해서 풀어 가야 하는지를 잘 몰랐다. 그건 두 사람 앞에 놓인 문제가 어느 한쪽이 맞고 한쪽이 틀린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맞았다. 단지 관점이 다를 뿐이다. 태주의 마음이 그나마 편해지려면 한 번쯤은 문 회장을 제대로 보내는 의식을 치르는 편이 좋았다. 위선적이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차영은 그 단 한 번이 싫은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간극을 좁혀 가는 게 어려운 게 마땅했으니, 싸움으로 연관되는 일도 응당한 결과였다.
“가자, 얼른. 춥다. 너 그냥 나오지 말고 점퍼나 두툼한 트렌치코트 입어. 밤공기 쌀쌀해.”
괜히 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초조해하던 차영은 마지못해 일어섰다. 차 키와 겉옷을 챙겨 들고 현관으로 나서자, 그녀가 뒤따르면서 행운을 빈다는 양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 * *
밴쿠버발 인천행 한국 항공 052는 현재 인천 공항 근방의 하늘길을 나는 중이었다. 확보된 조종석 시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모습을 직시하는 태주의 얼굴에는 드러난 표정이 없었다. 그는 힐끗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밤이 다 된 시각이었다.
안 그래도 느닷없이 밴쿠버 국제공항에서 문제가 생겨 출발이 열 시간이 넘도록 지연되고 있다가 겨우 이륙했던 터였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차영의 생일 오전쯤에 착륙할 수 있었으나, 현재 한국의 기후가 무척 안 좋아 기록적인 폭우까지 내리고 있는 바람에 이대로 기체가 도착할 때까지 막대한 강수량이 지속될 시 당일 도착을 장담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객실 승무원들에게 조종석으로 인터폰이 연결되고 있었던 차였다. 그들은 연착으로 인한 보상 서비스에 관한 문제로 태주의 의견을 구하고자 했다. 이런 상태에서 도착까지 더 지연된다면 직원들이 여러모로 곤란해질 듯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인천 공항의 관제소와 교신을 시도하는 선재에게 말을 건넸다.
“비가 예상보다 너무 많이 오는데.”
“그러게요. 하늘에 구멍 뚫린 것 같아요. 자연재해가 제일 무섭다니까요.”
“아까부터 계속 이 주변 빙빙 돌고만 있잖아. 우리 연료 얼마나 있어? 확인해 봐.”
“빠듯해요.”
일이 안되려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악재가 한꺼번에 닥쳐오는 법이었다. 연료가 빠듯한 상황에서 기상 상태는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질 기미만을 내비치기 바빴다.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어지는 터라 난감했다.
“홍 기장, 타워에 우리 비행기 우선 착륙 어렵겠냐고 물어봐.”
“우리한테 우선권 없을걸요.”
“연료 부족하다며.”
“또 비상 상태라고 할 정도로 아주 없진 않아서…….”
“이대로 계속 뺑이 치면 아주 없어져. 요청해.”
“알겠습니다.”
교신 장비를 들고 대화를 몇 마디 나누던 선재가 태주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선배, 어째 분위기가 우리는 아마 우회해서 지방 공항 쪽으로 날아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어마어마하게 밀렸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