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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34화 (134/144)

134화

차영은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집보다 훨씬 넓고 쾌적한 태주의 집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도, 제 사적인 공간에 그의 흔적이 지나치리만큼 많았다.

평상복 따위의 의복은 기본값이고 칫솔이나 식사 도구 따위들, 태주가 즐겨 뿌리는 향수, 그의 운동화 같은 생활 반경 내의 물건들이 도처에 산적했다. 심지어 그의 여벌 제복과 캐리어까지 있었다.

물론 거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안 됐지만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온다면 상황은 180도로 달라지는 법이다. 그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화를 해선 지금 자신이 공항 인근 지하철역에 있다고 연락이 온 마당이라 마음이 급해졌다.

그나마 집 앞이 아니니 다행이었다. 이곳까지 거리가 있어서 대충 치울 시간 정도는 마련된 셈이라 차영의 두 손과 다리가 바빠졌다.

“맞다, 제복.”

물건들을 열심히 치우고 나자 그의 제복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만큼은 아무렇게나 쑤셔 박듯 없는 물건처럼 방치해 두고 싶지가 않았다. 고아한 금색 견장을 만지작거리던 차영이 하는 수 없이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어서 침실 한편에 얌전히 걸어 두었다. 집에 왔을 때 어머니가 주방과 드레스 룸은 살펴봐도 함부로 가장 은밀한 공간까지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그 안에 타인의 흔적이 있을 수도 있으니 배려하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침대 옆에 비치해 둔 차영은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엄마 왔어?”

다급히 맨발로 현관을 밟고 벌컥 문을 열자 그리운 얼굴이 서 있었다. 그가 어머니를 한 번 꽉 끌어안고는 안쪽으로 안내했다.

해가 지고 난 뒤 달이 떠오르듯 어머니의 시계추는 여전히 규칙적이고, 또 바쁘게 돌아갔다. 최근에는 한국 항공 기념 재단에서 지원하는 치매 노인 보호 사업의 남해 지부 감사 자격으로 여러 가지 일을 맡은 것 같았다. 물론 아주 찝찝하지 않은 건 아니나 그게 태주 나름대로의 배려라는 걸 알기에 묵인하고 있던 차였다.

“음식은 좀 해 먹고 사는 거야? 이거 뭐 죄다 빵에 샐러드에.”

이럴 것 같았다. 그녀가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한 일은 여느 때와 비슷했다. 손을 씻고, 바로 주방으로 진격해 냉장고 문부터 열어 보는 것이었다. 차영은 픽 웃었다.

“아냐, 나 요즘 진짜 잘 해 먹어. 여기서 잘 안 먹어서 그렇지.”

“여기서 안 먹으면? 밖에서 사 먹어?”

“뭐 그럴 때도 있고.”

“이 우유는 상했겠는데? 날짜 한참 지났다. 진짜 잘 해 먹는 거 맞아?”

“그건……. 몰랐어. 버리면 되지.”

“설마 마신 건 아니지? 너 요즘 뭘 하고 살길래 냉장고 안에 우유 유통 기한이 1주일 넘게 지난 것도 까맣게 몰라?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실은 오늘 아침에 이걸 마시고 출근했다. 지난번에 태주의 집에서 다투고 무턱대고 내려와 이곳에서 생활한 지 오늘로 꼬박 나흘째였다. 4일 동안 차영에게 음식은 그저 열량을 채우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던 터라 기계적으로 마셨을 뿐 날짜 같은 걸 볼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제게 다른 데 신경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하다. 맛 멀쩡했는데.”

“진짜 먹었단 말이야?”

“다 버릴게. 버리자.”

그녀의 의구심 가득한 눈길이 차영의 온몸에 꽂혀 들었다. 그는 정말 오랜만에 여기 내려와서 자고 있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서, 머쓱하게 우유를 버리는 것으로 묵묵히 응답했다. 그녀는 좀 의아하게 차영을 보긴 했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대신 여기서 나오는 게 썩 자연스럽지는 않은 이름을 언급했다.

“한 기장은 잘 지내?”

“갑자기 웬 한 기장? 잘 지내거나 말거나.”

“무슨 대답이 그래. 둘이 싸웠어?”

“아냐. 내가 누구랑 싸우는 거 봤어? 한태주 비행 갔어. 밴쿠버인가.”

실은 태주가 잘 지내고 있는지 누구보다 궁금한 것은 이쪽이었다. 그 밤에 그렇게 갈라진 뒤, 태주가 나흘 내내 비행시간과 수면 시간을 제외하곤 한 시간에 한 번꼴로 꼬박꼬박 연락을 취해 오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받아 주지 않았다. 통화를 거부하자 그쪽에서 메시지도 여러 차례 보내왔으나 괜한 오기가 생겨서 확인해 볼 생각도 안 했다.

“그래?”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그녀는 어느새 심각해진 차영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쉽게 이 화제를 넘겨 버리고는 거실로 나갔다. 남겨진 차영은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작은 숄더백 외엔 손에 짐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던 듯했다.

“그런데 엄마 왜 짐이 하나도 없어? 오늘 자고 가는 거 아냐?”

그가 의아해서 묻자 거실과 드레스 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인지 먼발치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언제 여기서 자고 가데? 다 큰 남자애 집에서 무슨. 그냥 병원장님 따라 한국 항공 재단에 들렀다가 나만 따로 일정 좀 뺀 거야. 너 얼굴이나 보려고. 모레 생일이잖아.”

“우리가 언제 생일 챙겼나.”

“미역국은 못 끓여 줘도 생일쯤에 얼굴은 한번 봐야지.”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생일쯤에 얼굴 봤다고? 그리고 원래 자식 생일은 엄마들이 미역국 먹는 날이래. 엄마가 대신 많이 먹어.”

“맞아. 낳느라 고생했으니까 엄마가 모레 아침에 끓여 먹어야겠다.”

공기를 타고 주방까지 전달되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고 부드러웠다.

“엄마 9시 넘었는데 뭐 타고 내려가게.”

“야간 버스. 표 11시 거 끊고 왔어. 이제 주말이니까 터미널까진 차영이 네가 데려다줘. 내일은 출근 안 하지?”

“알겠어. 급해도 차는 한 잔 마시고 가. 엄마가 좋아하는 거 있어.”

“그것도 유통 기한 지난 거 아냐?”

“이 한방 찻잎은 기한 몇 개월씩 되잖아. 금방 내갈게. 거실에 잠깐 계세요.”

대답은 없었다. 계속 문을 여닫는 소리만 들렸다. 휴대폰 진동 소리 같은 게 이어 들린 것도 같았다. 차영은 전부 뒤로하고 차를 우리기 위해 물을 올리고 포트 앞에 버티고 섰다.

삐익, 하는 소리로 기계가 금세 물이 다 끓었다는 표지를 전달했다. 차를 우린 차영이 거실로 나가자, 그녀는 테이블 앞에 얌전히 앉아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영이 찻잔을 내려놓고 마주 앉자마자 득달같이 말을 붙였다.

“그런데 저 마그넷 판은 지난번에 왔을 때 그대로다?”

“뭐가 그대로야?”

“개수 말이야. 얼추 비슷한데. 새로운 거 사서 안 붙였어?”

“아, 저거 내가 사서 붙인 게 아니라서.”

“그러면? 한 기장이?”

“엄마 왜 자꾸 한 기장 타령이야? 여기 우리 집인데.”

“아니야?”

한 번도 묻지 않던 질문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할 엄두는 안 나서 고개를 덤덤히 끄덕여 보였다. 그녀도 짐작했던 일인 듯싶었다.

“여행 갔다가 하나씩 기념으로 사다 주는가 보구나. 슬쩍 보니까 다니는 나라가 되게 많다. 네 아버진 저렇게까지 전 세계 방방곡곡 돌아다니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거든.”

“그때보다 지금 취항하는 도시들이 훨씬 많아졌어. 사람들 여행 비율도 엄청 늘었고.”

“그렇구나. 세상이 자꾸 좋아지네.”

“뭐……. 누군가한테는.”

“한태주 기장 여기 자주 왔다 갔다 하니?”

찻잔을 들던 차영이 손잡이를 놓치는 바람에 테이블 위에서 달그락거렸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게 돼 더 당황한 차영이 그녀를 물끄러미 살폈다. 계속 뜬금없는 타이밍에 태주의 이야기를 꺼내질 않나 갑자기 저런 소리까지 하는 어머니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네 침실에 한국 항공 제복이 걸려 있더라. 네 아빠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가 저거 매번 직접 다려서 알지. 지금 비행 갔으면 여벌인가?”

“엄마가 내 침실에 함부로 왜 들어가!”

당혹스러운 나머지 버럭 소리치곤 입술을 달싹이게 됐다. 쓸데없이 과민 반응했다는 것을 당사자인 차영이 가장 잘 아는 바였다. 하지만 그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태까지 어머니가 침실만큼은 함부로 허락 없이 들여다봤던 적은 없었기에 안전지대라고 여겼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제복이었겠지만 침대 옆의 협탁을 뒤져 보면 콘돔과 윤활제 따위도 있어서 날카롭게 반응이 튀어나왔다.

“차영아?”

“아……. 어떡해. 엄마. 놀랐지.”

“아냐. 내가 실수한 건데. 그냥 문이 열려 있길래 닫아 둔다는 게……. 너무 넘쳤나 보다.”

“내가 잘못한 거야. 좀 예민해져 있기도 했고. 응, 한 기장 가끔 왔다 가. 특별한 일도 아니고 우리 친한 거 엄마가 다 아니까 그냥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미안.”

“왜 예민해져 있는데. 무슨 일 있어? 엄마한테 털어놓으면 안 되는 이야기야?”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잘 모르겠다. 일단 제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에도 서툴렀고, 그 청자가 어머니인 것은 더욱 낯설었다. 그러나 어디 말할 데가 없었고, 또 너무 토로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녀라면 무조건 제 편을 들며 이해해 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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