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차영은 그를 이해하는 한편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그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태주가 문 회장을 완전히 척졌기에 자신도 과감히 그와 마주 앉아 일상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었던 터였다. 이제 와 본인 마음 편해지자고 그를 추모하는 자리에 얼굴을 내밀고 싶다고 말하는 게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고민에 빠지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네 대답 알아들었어. 거절할게.”
망설이는 듯 한참 입술만 달싹이는 차영을 향해 태주가 분명히 고했다. 그러나 차영은 이미 감정이 상한 뒤였다. 그걸 아는 모양인지 그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거절할게. 신경 쓰지 마.”
“그 사람 왜 죽었는지 까먹었어? 이제 와서 이러는 거 위선 아니야?”
차영은 여전히 때때로 누군가 그 사건을 들추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과 태주만의 비밀로 영영 묻어 두길 바랐다. 그 때문에 그 일에 관해 이렇듯 직접적인 단어를 써 가며 말하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화가 난 것이다.
“알아. 안 갈 거야. 너 마음만 불편하게 괜히 이야기 꺼냈다.”
“그렇게 잘 알면 애초에 꺼내지 말지 그랬어!”
그들은 서로를 첨예하게 마주 봤다. 짐작보다 훨씬 더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던 터라 차영이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은 무를 수가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의 아연해진 기분 같아서는 그렇게 시간을 돌이키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실수했어. 미안. 못 들은 걸로 해.”
“들은 걸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 난 이걸 허락하면 원수 추모하는 자리에 내 애인 보내는 호구 멍청이가 되는 거고 끝까지 허락하지 않으면 애인 외할아버지 영결식도 못 가게 만든 나쁜 놈이 되는데. 보내 줘야 하나? 하지만 싫은데. 그래도 한 기장이 가는 게 맞는 거겠지. 그렇지만 너무 싫은데……! 이러면서 고민할 거 몰랐어? 너 똑똑하잖아. 진짜 몰랐어?”
“…….”
“봐, 너 다 알고 꺼낸 말이야. 네가 알아서 해결했어야지. 한 기장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
“차영아.”
“나 한 기장 이해해. 그게 마음 편해지는 유일한 길이란 것도 알아. 한 기장이 그때 했던 일이 그쪽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을지도 알아. 가끔 악몽 꾸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편해지게 만들어 주고 싶어. 그런데 또 한편으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문 회장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게 진짜 너무 싫어.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 죽였고 나까지……!”
순간 되살아나는 공포를 느낀 차영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어렵게 말을 이어 붙였다.
“나까지…… 죽이려고 했잖아. 나 그때 태주 씨가 그 사람한테 총구 겨누지 않았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어. 그거 까먹었어?”
“그걸 어떻게 잊어.”
“그거 기억하고 있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너 나한테 매달릴 때 뭐라 그랬어. 다 포기하고 나 갖겠다고 했었지. 그 집 문턱은 드나들지도 않을 테니까 버리지 말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면 어떡해. 나 이래서 너 회사에 가는 것도 본가에 들르는 것도 늘 싫었어. 되게 이기적으로 들리지? 그래서 아무 말 안 하고 너 하는 대로 그냥 두고 보면서 참았잖아. 그런데 한 기장은…… 안 참네.”
최소한 자신에게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진 말았어야 했다. 몰래 다녀온 뒤 자신의 눈을 가리고자 했다면 기꺼이 속아 주었을 것이다. 문 회장을 생각하면 꺼림칙한 마음만큼, 태주가 편해지기를 바라는 걱정 또한 진심이었으니까. 더는 자신을 속이는 게 불편하고 어려웠다면 다른 현명하고 괜찮은 방법을 어떻게든 고안해 내는 것이 옳았다.
“차영아.”
“내가 끝까지 이야기 안 해 주면 그건 그런가 보다 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그건 한 기장의 선택을 믿고 필요할 경우엔 덮어 주겠단 뜻이야. 그리고 그 말 한 지 10분도 안 지났어.”
그가 늘 솔직하게 자신을 대해 주길 내심 바랐으나, 그런 솔직함도 때를 가려야 한다는 걸 차영은 실감했다.
“차영아, 잘못했어. 내가 생각이 짧았다.”
“길게 했으면 좋았을걸. 나 이만 내려갈게.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잘래.”
“나 내일부터 4박 5일 일정이야. 이러지 마, 제발. 같이 있자. 최소한 잠은 같이 자.”
“미안한데 오늘 밤은 그냥 좀 떨어져 있는 게 낫겠어. 잘 다녀오고 다음 주에 봐.”
“차영아, 이차영!”
“쫓아오지 마. 혼자 있고 싶어.”
급히 붙잡는 태주의 손을 싸늘하게 밀어낸 차영이 결국 일어섰다. 너무 단호하게 뒷모습을 보여서 태주도 쫓을 엄두를 못 냈다. 억지로 붙잡으면 일이 더 커질 게 명백했다.
“나 귀국하는 날 네 생일이잖아. 공항에서 봐.”
대답은 없었다. 띠릭. 현관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안을 채우고 있던 차영의 다정한 숨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라야, 태주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게 됐다. 이러리라는 건 분명 예상했는데, 어쩌면 차영이 눈 딱 감고 넘어가 주는 요행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를 속이는 건 싫다는 핑계로 제 마음이 편하고자 부담을 주었던 것이다.
“젠장…….”
소파에 털썩 드러누운 그는 천장을 직시했다. 그러다가 짜증스럽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 * *
거울 속의 얼굴은 떼꾼하기 짝이 없었다. 한숨도 못 자고 밤부터 새벽까지 내내 잠을 설쳤던 탓이다. 캐비닛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제 얼굴을 들여다보던 차영은 무심코 창밖을 살폈다. 이미 태주가 조종간을 잡은 기체는 이륙해서 저 높은 가을 상공을 날고 있을 것이었다.
긴 한숨을 내뱉은 끝에 캐비닛 문을 닫고 나가려던 차영의 앞에 동료 한 명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깜짝이야. 이제 나와요?”
“네, 이 관제사님 오늘은 한 기장님이랑 카풀 안 하셨나 봐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을 들은 터라 차영은 좀 당황했다.
“우리 가끔 카풀 하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가끔 주차장에서 뵀으니까 알죠. 한 기장님 사복 입고 오시고……. 어,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네. 기장이 왜 사복 차림으로 공항에 바로 오지?”
그건 그가 자신과 하는 게 카풀이 아니라 쉬는 날마다 차영을 데려다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같지만 의외로 함께 출근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일단 태주의 비행 시간이 항상 다른 데다 공항보다 먼저 인근에 있는 본사 사옥으로 가서 운항 브리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미묘하게 가는 길도 달랐던 터다.
동료가 대화 중 태주의 행보에 뭔가 의아한 부분을 눈치챘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낯빛을 하기에 차영이 재빨리 앞서 걸었다. 그도 자연스럽게 차영을 따라 나란히 움직였다.
“한 기장님은 왜 그러시는 거예요?”
“글쎄요. 시간 낭비하는 걸 좋아하나 보죠.”
“아무튼 관제사님 가끔 한 기장님이랑 같이 출근하실 때 손에 바리바리 음식들 싸 오시고 그래서 엄청 좋았는데. 호텔 베이커리에서 샐러드랑 샌드위치 같은 거 다 털어 오시고요.”
“그건 그냥 차에서 뭘 먹느라.”
“그러시구나.”
“혹시 어제 나 본 거예요?”
“네! 어제. 이렇게 손 흔들어 주시는 거 봤어요.”
제 옆의 동료를 힐끗 쳐다본 차영은 아연해졌다. 해맑게 대답하는 그에게 악의는 전혀 없어 보였다. 역시나 보는 눈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애써 곤란함을 감췄다. 굳이 어제가 아니더라도 태주는 종종 본인이 쉬는 날일 때마다 차영의 간식거리들을 챙겼다. 업무 중에는 바빠서 식사를 대충 때우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지나가듯 흘린 적이 있었는데, 기억을 되짚어 보니 아무래도 그 뒤부터였던 것 같다.
왠지 허전한 맨손을 내려다보던 차영은 등을 툭툭 치는 동료를 돌아봤다.
“아까 뉴스 보니까 한 기장님 이번에 한국 항공 창립 기념 행사 겸 그 회장님 영결식에 참석한다는 거 같던데……. 이 관제사도 가요? 한 기장이랑 엄청 친하잖아요.”
“아뇨, 전……. 우리가 친하긴 한데 또 그 정도로 친하진 않아서.”
“난 그것만으로도 너무 부러운데. 말 나온 김에 자리 좀 만들어 주면 안 돼요?”
“그 성격 감당 못 할 거예요.”
대충 얼버무린 차영은 더 이상의 질문은 듣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표명하듯 동료를 뒤로하고 뚜벅뚜벅 앞서 걸었다. 마침 맞은편에서 나오던 탑장이 안색이 안 좋다는 둥 무슨 말을 한 게 들리긴 했는데 그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눙치고 지나쳤다.
오늘부터 태주는 4박 5일간 집을 비웠다. 어제 그런 말을 꺼내 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태주가 밉긴 했지만, 그건 서운한 감정의 발로이지 증오심이 아니다. 차영은 그가 돌아왔을 때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고 싶었다. 그러니 자신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생각할 시간이 그 5일로 충분하기만을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