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다른 것을 연결해 보니 내용은 비슷했다. 다만 표적이 달랐다. 이번엔 경쟁 관계에 있거나 거래를 하고 있는 타 기업 수장이나 계열사 경영진들이 그 과녁인 것 같았다. 놀라운 것은 제 눈에도 무척 익숙한 이름으로 된 폴더 또한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다 하다 안 실장까지…….’
문 회장이 큰 지지 기반 없이 자수성가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입맛이 썼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가득한 회장의 집무실이 이런 협잡과 부정행위들이 만들어 낸 집약적 산물처럼 보였다.
눈으로 하나씩 담고 있던 태주는 제 이목구비가 더러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는 길에서까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제 혈육이 혐오스러웠다. 그는 그대로 화면을 종료하려다가 아까 김 변호사가 남겼던 말이 마음에 걸려 멈칫했다.
〈안에 따님과 외손자분을 촬영한 영상 같은 것들이 든 걸로 압니다.〉
태주의 손이 금색을 띤 가장 크기가 작은 메모리에 닿았다.
다른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날짜별로 정리를 해 둔 듯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파일의 개수가 많아서 놀랐다.
오래된 순으로 정렬을 하니 어머니가 피아노 치고 있는 장면으로 보이는 영상과 생전의 그녀 사진으로 보이는 이미지들이 제일 위에 떴다. 그 아래부터는 전부 그녀가 사망한 뒤의 숫자들이었다. 태주와 밀접한 익숙한 숫자들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모습들일 것이다.
생년월일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날, 한국에서 지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때, 처음 조종간을 잡았던 날 따위들이 쭉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자신의 일대기를 다른 사람이 써 주고 있었던 듯해 기분이 이상했다.
그중 태주의 기억에는 없는 날짜가 있어 이미지를 열어 보니 자신이 걸음마 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아마 아버지가 직접 찍어서 보내 드렸던 것일 듯했다.
왜였을까.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던 흔적들을 마주한 태주의 손이 설핏 떨렸다. 이 집무실의 주인이었던 사람에게 총구를 겨눴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제 손등을 내려다보게 됐다.
자신은 아마 영원히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동전에도 양면이 있듯, 사람 역시 모두 양면적 존재다. 이런 기록들이 문 회장의 면죄부가 되어 주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태주의 죄책감을 일깨우는 데는 기여했다. 자신의 피붙이를 직접 황천길로 내몰았다는 비참함이 그의 목구멍에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까 왜…….”
그는 왜 제 아버지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서, 자신까지 이렇게 참담한 심경이 되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 사실 그날 이후 태주는 종종 가슴 한편이 무겁고 답답해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방아쇠를 당겼던 바로 그때를 떠올리면 속이 얹힌 듯한 느낌으로 괴로웠다. 차마 차영에게 이런 심경을 털어놓을 수도 없어서 늘 속으로만 삼켰다. 다른 사람도 아닌 차영에게 제 부담을 나누어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꼭 체한 것처럼 불편한 이 양가적인 마음을 어떻게 해야 짓누르고 편해질 수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게 가능하긴 한 건지도 가늠이 안 됐다. 태주는 외할아버지가 여전히 미웠고, 또 한편으론 그를 죽였다는 죄장감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은 태주가 목울대를 움켜쥐었다. 동시에 더듬어 봤다. 외할아버지에게 목이 졸리고 이마에 총구가 겨눠졌던 아득한 감각이 되새겨지는 듯했다. 그는 서둘러 제 손을 떼어 내고 노트북 화면을 난폭하게 덮었다. 그러고는 황급히 내선을 연결했다.
“한 사람 들어오세요. 짐 있으니까 챙기고,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 차 대기시켜요.”
- 알겠습니다. 그리고 기장님, 이번 창립 기념일에 회장님 영결식을 진행할 예정이라 꼭 참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장례식에도 불참하셨는데 기일마다 번번이 모습을 안 비치셨던 터라 이번 행사까지 빠지시면 안 될 것 같다고 방금 이사회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그가 잇새를 짓이기듯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당장 차, 대기시키라고. 나 같은 거 여러 번 말하게 만들지 마세요.”
-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나오시면 됩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 * *
도착했다는 연락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가 7층에서 내리자마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아마 타이밍 좋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스르륵 틈새가 벌어지고 차영의 얼굴이 나타나서, 태주가 본능적으로 그를 와락 당겨 안았다. 언제나 하는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했던지 차영도 별 저항 없이 마주 안아 주었다.
한참 현관에 머물러 있던 태주가 차영을 번쩍 안아 들고 키스했다. 그 상태로 걸음을 내디뎌 거실로 들어섰다. 소파에 자연스럽게 무너지게 된 두 사람은 잠시간 달라붙어 있었다. 태주의 손이 차영의 등 쪽으로 향했다.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등줄기를 매만졌다. 아, 하고 차영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잠자코 태주를 받아 주는 듯하던 차영이 움찔했다.
“한 기장, 잠깐만.”
“여기 싫어? 침대로 갈까? 아니면 나 씻을 테니까 욕조에 같이 들어갈래?”
태주가 차영의 귓가에 은근하게 속삭이며 단추를 풀었다. 그러자 이번엔 차영이 말뿐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핏줄이 선 단단한 팔 위에 손을 얹어 그의 후속 행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태주의 의아해하는 눈길이 제 아래 깔려 있는 차영을 향했다. 가까이에 있어서 눈동자가 일렁이는 모습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별수 없이 태주가 제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차영의 등 아래에도 손을 밀어 넣어 앉혀 주자, 차영이 그를 똑바로 마주 봤다.
“왜 이렇게 늦었어?”
“그냥 주변 한 바퀴 돌고 왔어.”
집에 차영이 있는 걸 알면 외부에서 혼자 시간 보내는 일 따윈 없이 용건이 끝나자마자 칼같이 들어오던 그였다. 그래서 차영은 이 대답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그걸 굳이 말로 꺼내 놓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랬구나. 저녁은 먹은 거야?”
“별로 생각 없어.”
“난 배고파.”
“아직 저녁 안 먹었어?”
“사람을 뭘로 보고. 한 기장 기다렸지.”
“뭐가 궁금해서 기다렸는데?”
“난 늘 항상 한태주 씨 기다려. 말해 줄 때까지. 준비 다 끝내고 솔직히 알려 줄 때까지. 그리고 말 안 해 주면……. 그건 그런가 보다 할 거야. 엄마가 나한테 그러듯이.”
“…….”
“그냥 얼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뭐라도 먹이고 싶어서 그래. 섹스는 먹고 해도 되잖아. 우선 씻고 나와. 차려 놓을 테니까.”
태주의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맞춰 준 차영이 먼저 일어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태주가 갑작스레 그의 손목을 붙들고 다시 자리에 앉히는 바람에 도로 마주 보고 있게 됐다.
“할 얘기가 있어. 듣고 가.”
“뭔데?”
“말하기 앞서 밝힐 건 이 일엔 네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고, 당연히 네가 반대하면 난 절대 안 할 거라는 거야.”
예상외로 태주의 입은 쉽게 열렸다. 오늘 본사에 들렀던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안 했는데 조금 의외였다. 게다가 서두부터 조금 겁을 주기에 차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까지 바르게 고치고 경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번 대영 그룹 창립 기념일에 외할아버지 영결식을 겸해서 하게 될 것 같아.”
“영결식? 기일도 아닌데 갑자기 뜬금없는 날짜에 왜?”
“내가 장례식장에 없었잖아. 상주도 없이 회사장으로 치렀던 거여서 그 문제로 계속 회사 안팎에서 구설수가 있었나 봐.”
“눈 수술 때문이었던 건데 어째서?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꾸역꾸역 그 자리를 채우는 게 맞았다는 거야? 사람들 인간미 없게 뭐 그래?”
“그래서 그땐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이사회에서 이번 창립 기념일 행사에는…….”
찰나간 말을 잃은 차영이 침묵을 지켰다. 태주도 자연스럽게 말을 끝맺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기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머릿속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 사안에 관해 서로 의견이 갈릴 듯싶다는 것이다.
한참 뒤에 차영이 물었다. 평소에 비해 다소 서늘한 음성이었다.
“한 기장더러 와 달래?”
“응.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어.”
“영결식 한번 참석하면 언론에서 다들 이번엔 외손자 왔다고 떠들어 대겠네?”
“그러겠지. 그걸 위해서 이사회에서도 자리 지켜 달라고 하는 거니까.”
“그러면 이제 매년 그런 일 생길 때마다 태주 씨 거기 가야겠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안 그럴 거야.”
“원래 한 번이 어려워. 한 기장이 누가 필요하니까 오란다고 순순히 갈 사람도 아니고, 무엇보다 본인 마음이 내키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 동의가 필요하다고 한 거고. 맞지?”
태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해지자면 차영은 그를 이해했다. 이제야 태주는 제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평생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아득한 영역만을 빼면 말이다. 그건 외할아버지를 직접 죽여야만 한 극한의 상황에서 피어난 죄악감이었다.
그는 차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사실과 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디지 않았다. 자신은 가끔 그가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 눈을 뜰 때 덩달아 깨곤 했다. 이 일을 공론화하는 게 두렵고, 또 태주가 자신을 신경 쓸까 염려돼 여전히 곤히 잠든 체했을 뿐이다. 뜬눈으로 그 시간을 몰래 함께 견뎌 내며, 차영은 진심으로 태주가 자책감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런 배려심만 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