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131화 (131/144)

131화

대영 그룹의 총괄 회장 집무실은 이전 주인이 사망한 뒤로 줄곧 공실이었다. 현재 대영 그룹의 전 계열사는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창업주 일가의 손이 뻗치는 일 없이 투명한 CEO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맨 처음 이런 제도를 확립할 때는 단단히 버팀목이 되어 주는 제왕적 존재가 없어서 약간의 부침도 있었다. 최종 결정을 내리고 밀어붙이는 우두머리적 존재가 있어야 하는 한국의 기업 문화와는 상충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주가 직접 이사진들의 동의를 얻어 CEO 성과제를 도입하자 특유의 저력을 발휘하며 그럭저럭 잘 굴러가게 됐다.

이제 태주가 본인의 입김을 넣는 것은 한국 항공 기념 재단이 유일했다.

“이사장님 오셨습니까.”

“한 기장이라고 부르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요.”

다만 그가 재단과 관련된 어떤 호칭을 얻는 일은 절대 사양이었다.

회장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몇몇 비서진들이 전부 일어나 그를 향해 묵례했다. 이곳은 주인이 부재하니 평소엔 비워 두는 장소였는데, 오늘 태주가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이곳을 제안해서 특별히 개방한 것이었다. 이만 됐다는 양 그가 손짓하자, 비서들이 인사를 반복했다.

“손님은?”

“지금 승강기 타고 올라오고 계신답니다.”

“그분 들여보내신 다음엔 한두 사람 정도만 남기고 전부 내려가서 일 보세요.”

“차나 다과 같은 건 필요 없으신가요?”

“손님한테 다시 여쭤보세요. 전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수행 비서이기도 했던 익숙한 얼굴에게 지시를 한 태주는 집무실로 들어섰다. 매일 청소를 하는 모양인지 업무용 책상에는 먼지 한 톨 앉아 있지 않았다. 그 위를 손가락으로 슬쩍 쓸어 본 태주가 이내 뒤편의 전망 좋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그의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오는 이는 아주 나이 든 노인이었다. 사망한 외할아버지의 또래거나, 혹은 그보다 더 들어 보였고, 태주도 실물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아주 오래전 문 회장의 밑에서 고문 변호사로 일을 하다가 이민을 간 뒤 사직했다고만 전해 들었다. 두 사람이 고등학교 동창이자 막역한 친구여서 꽤나 가깝게 지냈다는 모양이었다.

사실 비서를 통해 그가 만나자고 청했다는 소식과 제 외할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듣게 됐을 때 태주가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오랜 우정에 대한 감상이 아니었다. 그래 봤자 그 변호사도 제 외할아버지가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었다.

딸칵. 뒤편에서 문이 닫혔다. 변호사는 태주가 선 방향을 따라 직선으로 걸어왔다. 걸음이 꽤 느렸지만 태주는 보채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이 마주 섰다. 변호가 쪽에서 먼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탁환 변호사입니다. 김 변호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네, 처음 뵙네요. 한태주입니다.”

태주가 소파를 가리키자 김 변호사가 그곳으로 가 앉았다. 세대가 멀고 난생처음 만난 그들 사이에는 마땅히 안부를 나눌 만한 교류 지점이 없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태주가 먼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외할아버지가 주신 특별 자료 관리를 변호사님께서 하신다고요. 오랫동안 재야에 계셔서 두 분 친분 관계를 전혀 몰랐습니다.”

“작고한 문 회장님과는 고등학교 동기간입니다. 이사장님 돌아가셨을 때는 제가 와병 중이라 오질 못했고 회장님 장례식엔 왔었습니다만…….”

“그땐 제가 자리를 못 지켰죠.”

“연락을 따로 드리는 게 맞는 건가 고민을 좀 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저한테 자료들을 맡기실 때 본인 이외의 어떤 지시도 들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거든요. 연락도 항상 본인이 직접 주셨고. 자료 전달도 다른 사람 손 타는 일이 없으셨어요.”

이 말을 들은 태주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안 실장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덕분에 전 퇴직 후 안 실장 얼굴을 본 일이 많지 않지요. 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선물 정도만 가져다주곤 했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안 실장이 안 보입니다.”

“사직했습니다. 쉴 때도 됐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회장님도 돌아가신 마당이니 그럴 때도 됐지요.”

생전에 문 회장이 어느 쪽을 더 신임했는지는 가닥이 나왔다. 태주는 순간 제 외할머니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됐다. 문 회장이 아무도 믿지 못하며 중요한 자료들은 여기저기에 분산시켜 놨으리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그 진가가 여기서 드러나는 듯했다.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지 한참인 사람에게도 일부 맡겼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어디에 뭐가 더 있을지 예측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저한테는 왜 연락을 하신 겁니까.”

“제가 건강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서요. 앞으로는 스위스에 있는 아들내미 집에 가서 지낼까 하는데. 캐나다 집 신변 정리 중에 회장님 자료들이 걸리더군요. 허락도 없이 폐기를 하는 건 제 소관이 아닌 것 같고, 또 생전에 회장님께서 워낙 외손자분을 아꼈다는 걸 제가 잘 아는 터라…….”

그가 검은 가방 안에서 물건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상자였다. 김 변호사는 그것을 열어서 태주에게 내보였다. 갖가지 메모리들로 보이는 작은 물체들이 푹신한 안감 위에 놓여 있었다. 그것을 하나씩 꺼내 매만져 보던 태주가 불현듯 물었다.

“외할아버지가 뭔가를 맡긴 사람이 김 변호사 말고 또 있을까요?”

“없으리라고 봅니다. 저한테 자료를 맡기기 시작하신 것도 제가 이민을 가서 한국 국적을 버린 뒤, 이쪽과는 연관될 일이 전부 사라진 후였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개인적으로 사리사욕은 없는 편이기도 하고요.”

“생각보다 개수가 많네요. 이 안에 든 게 뭔지 아십니까?”

“전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얼핏 듣기만 했고 정확히는 말씀 안 해 주셨어요. 아마 제 생각으론 회사 업무에 관한 것들 아닐까 싶습니다. 아, 그쪽에 있는 금색 메모리는 제가 확실히 들었습니다. 안에 따님과 외손자분을 촬영한 영상 같은 것들이 든 걸로 압니다. 이걸 제일 세심하게 관리하라고 명령을 하셨었지요.”

“저 말입니까?”

노인은 끄덕였다. 미묘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태주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 친구에게 때마다 맡기던 문 회장의 소중한 물건이 돌고 돌아 태주에게 돌아온 이 상황이 우스웠다.

“외할아버지 어지간히 피곤하게 살다 가셨네요. 안 실장한테까지 숨기고.”

“워낙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조심스러우셨던 탓이지요.”

“내용은 제가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혹시 누락된 건 없습니까?”

“그게 다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이 원본이고, 제일 아래 깔린 것들이 백업본입니다.”

“그렇군요. 좀 벅차 보이시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갑자기 무리를 해서 좀 쉬는 편이 낫겠습니다. 따로 저한테 전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전 이만 가 봐도 괜찮을까요. 같이 온 우리 막내딸이 빌딩 밖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연로한 그는 한꺼번에 많은 말을 한 게 꽤 힘에 부쳐 보였다. 물론 용건이 끝났으면 자리를 물려도 된다는 양 태주가 내선 버튼을 눌러 비서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비서가 김 변호사를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때처럼 꾸벅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는 김 변호사에게, 태주도 마주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앉은 자리에서 작은 상자를 검문하듯 뜯어보고 있다가 내선을 다시 눌러 비서를 소환했다.

- 네, 한 기장님.

“새 노트북 하나 가지고 들어오세요. 메모리 장치들 연결할 거니까 단자 있는 걸로.”

-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금세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태주가 반응하자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온 비서가 그의 앞에 기계를 두고 전원을 켰다. 그때까지도 태주의 얼굴은 별 표정이 없었다.

“시간이 좀 걸리실 것 같으면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아니요. 됐습니다. 제가 나갈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노크도 하지 마시고.”

“알겠습니다.”

이윽고 다시 혼자가 된 태주는 상자에서 제일 먼저 손에 잡히는 것들부터 기기에 연결했다. 화면에 떠오른 창에는 파일명이 숫자로 된 각종 자료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문서는 물론이고, 영상이나 음성, 이미지 파일 따위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보다 보니 제목의 숫자들이 날짜를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 아주 옛날부터 비교적 최근인 몇 년 전까지 다양했다.

가까운 날짜부터 하나씩 열어 본 태주는 생각보다 수위와 강도가 높은 자료들을 보고 다소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이 안엔 끔찍한 것들이 산적했다.

이 메모리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정부 부처의 관계자들인 듯 그들의 약점과 치부들이 모여 있었다. 치정 문제부터 비리에 이르기까지 당사자가 본다면 기함할 것들이었다. 심지어 대상과 문 회장이 직접 대화를 나눈 듯한 영상이나 음성 따위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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