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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30화 (130/144)

130화

새벽에 태주의 꼬임에 넘어가 와인을 입에 머금으면서도 내일 출근을 염려했던 터라 이렇게 상쾌한 기분이 드는 건 좀 낯설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천천히 휴대폰으로 손을 다시 뻗어 현재 시각을 확인한 차영이 벌떡 일어섰다.

“헉……!”

그 단말마의 비명 같은 소리를 듣고 태주가 눈을 떴다.

“이차영, 왜 그래?”

“나 늦잠 잤어.”

“몇 신데.”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났어. 아, 미치겠다. 어쩐지 개운하더라.”

누운 채로 마른세수를 한 태주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시간 패닉에 빠져 대체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가늠도 못 하고 있는 차영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그를 욕실로 들여보냈다.

“순서 계산할 시간 있어? 씻는 게 제일 먼저니까 너 얼른 샤워만 하고 나와. 필요한 건 가는 길에 전부 해결하고. 나 오늘 오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

“한 기장 지금 운전해도 되나? 술기운 남아 있을 거 아냐.”

“난 거의 안 마셨어. 너 어떻게 한번 자빠뜨려 보려고 몰래 너만 많이 먹인 거야.”

“헉……. 나 전혀 몰랐는데. 눈 뜨고 당한 거야?”

“당연히 몰랐겠지. 그걸 알면 몰래 한 게 아니지. 뭐 해. 씻어.”

“아……. 그래야겠다.”

얼떨떨해하던 차영이 서둘러 씻으러 들어갔다. 평소였다면 발끈했을 텐데 얌전히 욕실로 진입한 게 뒤늦게 귀여웠다. 조용히 웃던 태주는 집 안을 한번 스윽 둘러보았다. 급한 대로 차영이 입을 옷가지를 챙겼다.

속옷과 상·하의를 모두 꺼내 든 그는 욕실 문 앞에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곧이어 돌아선 그 순간, 시야 한편에 제 침대 위가 흐트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차영이 누웠던 자리가 푹 눌려 있는 장면을 주시하고 있자니 복합적인 감상이 몰려왔다.

자신의 공간에 타인의 흔적이 제 것만큼 많아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태주는 이제 아주 잘 알았다. 아마 차영도 그럴 터였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길 모든 여행엔 여행자도 미처 알지 못한 비밀스럽고 은밀한 목적지가 있는 법이라고 했다던데. 이곳이 바로 그 지점 같았다. 여긴 막다른 골목이고, 그는 이 편안함과 익숙함에서 되돌아 나갈 생각이 없었다.

픽 웃음을 터트린 태주는 시트부터 정리하곤, 전화로 아침 식사로 때울 만한 것을 주문했다. 차영 대신 해야 할 일의 순서를 머릿속에 입력한 뒤라야 그도 침실 밖에 있는 욕실로 씻으러 들어갈 수 있었다.

* * *

뒷좌석에서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조수석으로 옮겨 온 차영은 익숙한 로고의 쇼핑백을 열었다. 그 안에 샌드위치와 주스 따위들이 종류별로 담겨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들렀다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태주는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숙취를 고려해서인지 맑은 수프도 들어 있었는데, 차영은 웬일인지 정신도 무척 말짱하고 기분도 산뜻해서 손이 안 갔다.

“나 오늘 왜 이렇게 멀쩡하지?”

“좋은 거 아냐?”

태주의 말대로 상태가 괜찮다는 건 좋은 징후였으나,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싹트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두툼한 샌드위치를 꺼내 한 입 베어 문 차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맛있다.”

그러고는 운전 중인 태주의 입에도 한 입 물려 주었다. 그는 입맛이 없는 모양인지 한 번 거절했으나 차영이 억지로 넣어 주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입에 넣고 씹었다. 그걸 보다가 차영이 기특하다는 듯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때마침 신호가 걸렸다. 태주가 갑자기 조수석 쪽으로 얼굴을 확 들이밀더니 차영의 입술에 제 것을 문지르고 혀로 보드라운 살결을 느릿하게 핥은 뒤 떨어져 나갔다.

“비위도 좋다. 입에서 샌드위치 맛 날 텐데.”

“드레싱 맛이 나. 키위?”

“으…….”

“정 마음에 걸리면 아무 맛도 없어질 때까지 할까?”

키스를 바라는 듯 태주가 입술을 쭉 내민 사이 다시 신호가 바뀌었다. 차영이 운전에나 집중하라는 듯 핸들을 툭툭 쳤다. 여느 때였다면 차영이 당황한 모습을 보기 위해 온갖 경적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도로 한복판에서 버티는 강수마저 놓고도 남았을 태주였으나, 오늘은 차영의 출근 시간이 임박했던 탓에 순순히 출발했다.

“평소에 엄청 가까운 것 같더니, 공항 가는 길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지?”

“지각할 수도 있지 왜 그렇게 걱정해?”

“어제 신입 지각 자주 하는 걸로 눈물 쏙 빠질 정도로 혼냈는데 내가 오늘 해 버리면 뭐가 돼. 걔가 날 뭘로 보겠어?”

태주가 의외란 듯이 픽 웃었다.

“이차영 너 신입도 막 혼내고 그래? 그걸 왜 너희 팀원들만 봐. 나도 영상 찍어서 보내 줘.”

“그거로 뭐 하게?”

“글쎄. 뭐 할까?”

“그거 틀어 놓고 잠자리하자고나 안 하면 양반이지.”

“너 창의력이 많이 늘었다. 장거리 비행 갔을 때 혼자 하려는 용이었지 난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얄밉다는 눈초리로 태주를 노려보던 차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나 원래 그런 거 안 하는데 탑장님이 자꾸 시키잖아.”

“너 그 탑장이라는 인간이랑 정확히 무슨 관계야? 아버지 영결식에도 부르더니만.”

“무슨 관계긴 사수와 부사수도 되고 멘토와 멘티도 되고. 넓게는 선후배 사이…….”

“두 사람을 수식하는 이름이 쓸데없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외간 남자랑 관계의 정의가 된다는 것부터 너 아웃이야.”

그의 말을 곱씹던 차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 기장은 질투를 할 데 해야지. 애 셋 딸린 유부남이란 말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지?”

“난 애 셋 딸려 있는 상태에서 뒤늦게 너 만났어도 너랑 바람피우다가 이혼할 거야.”

“뭐라는 거야? 제정신이야? 술 별로 안 마신 거 맞아?”

정신 차리라는 양 뺨을 슬쩍 건드리니 그는 한술 더 떠서 손등에 키스를 해 왔다. 태주의 독점욕은 물론 기분 좋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면 도저히 통제가 안 될 것 같아서 차영은 늘 적당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곤 했다. 아마 그도 차영이 어떤 생각으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더 힐난할 시간도 없는 차영은 샌드위치를 한 입 더 입에 물고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금세 그들을 태운 차가 인적이 많지 않은 공항 터미널 인근 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차영이 착실히 자몽 맛 음료까지 반 정도 비웠을 때라야 주차장에 도착했다. 평소였다면 태주가 열어 줄 때까지 기다렸을 터였다. 그가 배려해 주고 싶어 해서 이런 사소한 부분에선 적당히 맞춰 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촉박해 그럴 수가 없었다.

벌컥, 스스로 문을 열고 내린 차영이 갑자기 제 몸을 다시 조수석으로 구겨 넣더니 택시비 조라는 듯 태주의 입술 위에 성심껏 제 입을 맞물렸다.

“이번엔 입에서 주스 맛 나겠다.”

“아무 맛도 안 나. 한 번 더 해 주면 무슨 맛인지 더 확실히 알 것 같아.”

“나 지금 뛰어 올라가면 가까스로 될 것 같거든? 간다. 한 기장은 내리지 마.”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려는데 역시나 청개구리인 태주가 그를 따라 내린 모양인지 이름을 불러 차영을 멈춰 세웠다.

“이차영!”

“어……. 전화로 얘기하면 안 돼? 나 이제 진짜 올라가야 돼.”

“얼굴 보고 얘기해야 돼. 나 오늘 저녁에 본사에 가 봐야 해서 식사 시간에 못 맞출지도 몰라. 늦어지면 먼저 밥 먹어. 기다리지 말고.”

설렁설렁 뒷걸음질 치며 듣던 차영이 우뚝 섰다.

“본사? 한 기장 내일 비행 아냐? 거길 왜 가?”

“잠깐 누구 좀 만나러. 날 좀 보자고 했대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한 기장이 직접 만나러 가? 그리고 왜 늦어?”

“이제 올라가. 늦었다.”

태주는 더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야, 한태주! 치사하게 굴래? 사람 궁금하게 만들고 이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어!”

“여기. 간다.”

역시나 마음대로 움직여 주는 법이 없는 태주가 호기심만 뭉텅이로 남긴 채 차에 올라탔다. 그런 그를 원망스레 쳐다보던 차영은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그러다가 왠지 그가 이렇게 급할 때 대충 얼버무린 이유가 있는 듯해서 머뭇거리게 됐다. 자신이 아무것도 물어보길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의구심 섞인 시선을 보내다가 하는 수 없이 너그럽게 손을 흔들고 뜀박질을 시도했다.

그리고 마지못해 재빠르게 뛰어가는 차영의 뒷모습을, 차 안의 태주는 한참이나 지켜봤다. 그는 익숙한 인영이 완전히 제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 뒤라야 겨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딱, 딱. 굳은 표정으로 핸들 위를 규칙적으로 내려치던 태주가 차영과 공평하게 손목에 나누어 낀 시계를 힐끗 보다가,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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