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외전 : 매스 어센션(Mass Ascension)
한태주는 뭐랄까. 사람을 은근히 부추기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이거 도수가 꽤 높은데 생각보다 잘 마시네.”
투명한 와인 잔에 불그죽죽한 액체를 조금 따른 그가 손잡이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차영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대꾸했다.
“이젠 그만 마셔야지.”
“그래. 더 못 마시겠으면 이만 관두는 게 낫겠지.”
뭔가를 잘한다는 칭찬에 이어 패배나 포기를 상징하는 부정적 문장이 이어지자, 이상하게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울러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을 보는 연인의 표정이 ‘이차영,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돼?’라고 말하는 듯해 잔을 물리려던 차영의 손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계속 자신을 들쑤셨다. 하지만 내일 오프인 태주와 달리 제 쪽은 멀쩡히 출근을 해야 했다. 고로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맞았다. 한데 머리로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끝내 차영은 그의 손에서 잔을 슬며시 빼앗고 말았다.
“이리 줘.”
“진짜 괜찮겠어?”
“이게 진짜 마지막.”
벌써 몇 잔째 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건지 기억도 안 났다. 처음 코르크 마개를 딸 때 거의 병목까지 꽉 차 있던 와인 병이 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최소한 그 없어진 양의 반은 자신이 마셨겠거니 할 뿐이었다.
탁. 차영이 빈 잔을 내려놓자마자 태주가 얇게 썬 치즈를 입에 물려 주었다. 그걸 오물오물 씹으며 턱 운동을 하다 보니 온 얼굴이 벌겋게 익어 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차영은 그의 정면에 제 안면을 기울여 내보이며 물었다.
“한 기장, 나 얼굴 빨개?”
이에 태주가 가볍게 입술에 키스하며 응답했다.
“딱 귀여워.”
“빨갛단 소리네. 나 얼굴 빨개지면 진짜 그만 마셔야 돼.”
이성의 실마리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긴 했던 모양인지, 여기서 끝내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어차피 그러지 않더라도 안색이 바뀔 정도로 술기운이 오르고 있다면 금세 깊은 수면에 빠져들게 될 터다.
보드라운 손등으로 제 달아오른 피부 위를 문지르던 차영이 거실 소파에서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태주가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나서 마른 몸을 부축했다.
침실을 향해 걸음을 걷고 있는데, 그가 옆구리를 은근하게 지분거리는 촉감이 전이됐다. 분명히 성적인 의도가 담겨 있었던 터라 가뜩이나 고르지 않던 숨이 절로 더 가빠졌다.
“하아, 술에 뭐 탔어?”
이 질문이 어불성설이라는 듯, 태주가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차영 관제사. 내가 성질이 개차반이긴 한데, 그래도 그런 양아치 짓은 안 해.”
“그러니까. 그런데 나 왜 이렇게 자꾸 달뜨지?”
“기분이 좋은가 보지.”
“맞아. 좋아…… 한태주도 좋고. 다 좋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전이 침대였다. 푹신한 매트리스를 보자 자신도 눕고, 그도 누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걸 이겨 내지 못하고 태주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확 밀쳐 내듯 쓰러뜨린 차영이 그의 하체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양팔을 유려한 얼굴 양옆에 뻗은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풍성한 그의 속눈썹이 차분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양새가 꼭 수묵화 같았다. 서서히 열리는 붉은 입술이 차영의 시선을 단단히 사로잡았다.
“너 정말 잘생겼다. 임신 중에 뭐 드시면 이런 아들 나오지?”
“할래? 제일 잘 생겨 보일 때.”
“아…… 안 되는데.”
“하고는 싶어?”
새벽녘 잠이 안 와 뒤척이는 차영에게 그가 한잔하자고 꼬드겨 급조한 주석이었던 터다. 덕분에 여전히 두 사람의 옷차림은 얇은 파자마였다. 그 부드러운 옷자락 너머로 그의 늘씬한 몸을 감싸고 있는 근육이,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의 호흡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건 꽤 에로틱한 기분을 몰고 왔다.
태주의 몸 위에 제 몸을 비비던 차영이 솔직하게 대꾸했다.
“응……. 그런데 잠 막 쏟아지고, 또 씻을 힘도 없어.”
그러면서도 내일 일을 생각해 망설이는 기미를 보이자, 그가 손을 하의 안에 쑥 넣고 속옷 위로 성기를 매만져 왔다. 콱, 난폭하게 쥐었다가 이를 만회하듯 부드럽게 쓸기를 반복하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애무였다.
“아, 안 돼, 하지 마.”
“뭐 어때. 그냥 해 버리자. 씻겨 줄게.”
“안 된다니까…… 으응.”
벌벌 떨리는 두 팔로 침대를 짚고 있던 차영이 그가 성기를 쥐락펴락하는 동안 허리를 들썩였다. 필연적으로 그의 하체와 제 것이 닿아 성감이 더욱 차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벌게진 얼굴로 그의 위에서 흔들리며 버티는가 싶더니 금세 풀썩, 태주의 탄탄한 몸 위로 무너졌다. 자연히 성기를 농락하던 그의 손 움직임도 멎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쌔근쌔근, 한결 고르게 변한 숨소리가 태주의 귓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입을 달싹이던 그는 나지막한 주파수로 음성을 내뱉었다.
“이차영?”
“…….”
“설마. 잠든 건 아니라고 말해 줘.”
상대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다. 견갑골이 도드라진 등을 어루만지자 반사적으로 몸을 슬쩍 들썩이는 모양새가 이미 선잠이 든 게 분명했다. 원래 태주의 목적은 적당히 술이 들어가 알딸딸하게 만든 뒤, 차영의 옷을 벗기고 관계를 갖는 데까지였는데 정확히 반만 성공하고 말았다.
그의 옆으로 긴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서로 마찰해 있어 맥박이 빨라지고, 체온도 높아지고 있었던 즈음이었으나 순식간에 고스란히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되고 말았다.
“자는 건 또 왜 이렇게 예뻐. 깨우지도 못하게.”
마른 몸을 끌어안은 채로 황망하게 차영을 올려다보던 태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 * *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아침을 간단히 차려 먹고, 퇴근 후엔 귀갓길에 만나서 영화를 보거나 산책을 하고, 두 사람의 휴일이 겹치는 날엔 먼 곳으로 드라이브를 나간다.
이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는, 상대의 일상을 맡아 안아 주는 책임감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서로의 생활 사이클이 비슷하다면 좀 나을지도 모르나 태주와 차영의 것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얼추 맞춰 가는 재미가 있었다. 한번 집을 비우면 꽤 오래 밖에서 머무르는 대신, 태주는 시간을 차영에 비해 유동적으로 활용하는 게 가능했다. 덕분에 비행하지 않는 날 차영의 아침을 차려 주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어 있었다. 아마 그가 직접 요리를 해 본 건 차영을 위해서가 난생처음이었을 것이다.
또 반대로 태주에게 비행이 있기 하루 전날이면 차영은 결코 그의 팔베개를 하고 잠들지 않았다. 도리어 태주가 왜 그래야만 하느냐고 발끈했으나 차영은 강경했다.
〈만에 하나 조종간 잡을 때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해. 유비무환 몰라?〉
그의 주장은 매우 합리적인 논리였다.
여느 때와 같이 한 침대 위에서 밤부터 새벽까지의 일상을 공유한 두 사람은 오늘따라 늦은 아침이 될 때까지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드르륵.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물건의 주인인 차영이 이 소리를 들은 것은 분명한데 단잠을 깨울 정도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던 모양인지 잠투정을 조금 부릴 뿐 일어나려 들지 않았다. 도리어 옆의 태주에게 더욱 파고들자, 잠결에 태주가 그를 안아 주었다.
몸을 겹친 그들의 위로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반쯤 열린 침실 문 밖으로 보이는 거실의 테이블 위에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마셨던 와인 병과 빈 잔, 안주 따위들이 널려 있었다. 조금 어지럽지만 대체로 평화로웠다.
진동 소리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울려 댔다. 알람보다 요란하지 않아서 거슬리긴 했지만 못 참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뒤늦게야 어렵사리 손을 뻗어 진동을 끈 차영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옆자리에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태주가 보였다.
“한태주……. 자?”
행복이란 정말 별게 아닌 듯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태주여서, 그런 기분 좋은 안정감에 가까운 충만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장난스럽게 태주의 이목구비를 만지작거리자, 그가 힘주어 차영을 끌어안았다. 차영은 태주의 넓은 품에 잠시간 기대 있었다.
언제부턴가 항상 윗집 아랫집 할 거 없이 그날 같이 있었던 곳에서 자연스럽게 잠들곤 했었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둘 중 누구도 살림을 합치자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대로도 좋고, 또 굳이 짐을 옮기는 게 별 의미가 없어서였다.
그의 가슴팍에 제 뺨을 비비던 차영이 문득 묘한 기분을 느꼈다. 노닥거리다가 꽤 늦은 시간에 잠들었는데 찌뿌듯하기는커녕 무척 개운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