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어두운 밤바다 옆으로 길게 난 방파제의 위를,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바람은 꽤 찼지만 옷을 두툼하게 입어 꽤 오랜 시간도 견딜 만할 듯했다. 파도가 치는 소리가 마치 잔잔한 음악처럼 그들 사이를 휘감았다. 바다 내음이 바람을 타고 물씬 풍겨 왔다.
“아까 엄마 데려다주는 길에 무슨 이야기 했어?”
“그냥. 재단에서 사업하는 게 있는데 병원 지원금을 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진짜? 어쩐지. 엄마 엄청 좋아하셨겠다.”
“좋아하셨지.”
“좋은 일 해 놓고 한 기장은 표정이 왜 그래?”
“그냥. 그게 단순한 선의라고 생각하시는 게 마음에 걸려서.”
“단순한 선의인 걸로 해. 말했지. 난 엄마한테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그러기로 결정했어.”
“네가 그래 주면 그걸 단순한 선의로 끝내긴 아깝지. 목적을 바꿔 볼게. 구애의 춤?”
그의 능청에 차영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한 뼘 정도 떨어져서 걷고 있던 태주가 제 쪽으로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이곳이 밖이라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던 터라 무심결에 그의 체온을 밀어내려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게 됐다. 외진 곳이라 그런지 거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멀리 뒤편으로 불이 켜진 집들만이 듬성듬성 보였다.
어느 틈에 태주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커다란 손 위와 멀리 있는 등대를 번갈아 힐끗 본 차영이 결국 졌다는 양 그에게 가까이 달라붙어서 손을 맞잡았다. 태주는 자연스럽게 차영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그들은 잠시간 별말 없이 걸었다. 시야에 닿은 물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차영은 멀리 지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부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금 입을 벌렸다.
“엄마가 그러는데, 저기 저쪽……. 밤에 가끔 하늘이랑 바다가 겹쳐진대.”
차영에게 오롯이 향해 있던 태주의 시선이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옮겨졌다.
“원래 아빠가 죽었을 때 머무르길 원했던 건 하늘과 육지의 경계가 없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엄만 차마 그런 데다 아버지를 버릴 수가 없어서 납골당에 안치하고, 대신 매일 그런 풍경을 볼 수 있는 이런 데 내려왔구나 싶더라.”
“네 어머니 이야기 들으면 항상 기분이 이상해. 평생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어?”
“그러게. 엄마가 저렇게 외곬인 줄 아빠도 몰랐을걸.”
“나도 뭐가 뭔진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너 엄마 닮았으면 좋겠다. 얼굴은 외탁했던데?”
웃으면서 태주를 살피던 차영은 자연히 머릿속에 그의 어머니 사진을 떠올려 봤다. 인상적인 미인이라 쉽게 잊히지 않았다. 사진만 본 것이긴 하지만 태주도 어머니를 많이 닮은 게 아닐까 싶었다. 짐작이지만 성격 같은 것도 외탁을 많이 했을 듯했다.
걷다가 방파제 길 오른편에 움푹 팬 자리가 있어 그 앞에 멈춰 섰다. 차영이 좀 앉고 싶어 하는 것 같았던지, 태주가 먼저 내려가 그에게 내려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나란히 앉은 채로 하늘과 바다의 유려한 경치를 감상했다. 여기가 조금만 덜 외졌더라면 관광객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보고 있는 모든 게 너무 조화롭고 찬연해서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편안하게 상체를 살짝 뒤로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차영이 문득 물었다.
“저거 반은 인공위성이라며? 밤하늘 나는 기분은 어때?”
“끝내줘.”
“부럽다. 난 책으로만 느껴 봤어.”
“「야간 비행」?”
차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가끔 읽어 주셨대. 남들은 세종대왕 위인전이나 안데르센 동화 이야기 들을 나이에 그런 걸 읽어 줬으니 내가 그게 뭔지 알았겠어?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 그런데 나중에 직접 읽으니까 아빠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 나한테 자기가 봐 온 근사한 밤하늘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 아니었을까 싶고.”
그 책에서 등장인물인 리비에르는 이런 밤에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을 제 안에 생명이 잉태하는 순간이라 일컬었다. 조종간을 잡은 자신이 그 소중한 생명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이다. 아버지가 느꼈던 야간에 하늘을 나는 일이란 어쩌면 그런 것이었을 터다.
“네가 워낙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몇 번 더 읽어 봤어.”
“어땠어?”
“「탑 건」보단 낫더라.”
이 대답을 들은 차영이 미간을 구겼다.
“와, 진짜 분위기 다 깨는 거 봐.”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넌 다시 하늘 날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안 들어? 어릴 때 파일럿 되고 싶었다고 했잖아.”
“이제 와서?”
“네가 원한다면 전폭적으로 도와줄 수 있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냐. 미국엔 제도가 잘돼 있고.”
그는 차영이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본인의 인생을 제 주관대로 멋지게 설계했으면 하고 바랐을 터다.
정말 역설적이게도 차영의 트라우마를 야기한 원인에서 죽을 때까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태주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덕분에 차영은 이제 전처럼 막연히 비행기에 탑승하는 일로 불안을 느끼지는 않았다. 몇 번 더 경험하다 보면 익숙해지리라.
“내가 비행기를 못 타는 문제에 대해 계속 신경 쓰는 게 좀 낯설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 그쪽은 시작부터 다 의뭉스럽고 이상했어. 그런데 믿고 싶었던 것 같아. 너무 좋아서. 아, 내가 말했나? 나 한 기장 첫눈에 좋아졌거든. 어릴 때 처음 말고. 관제탑에서 봤을 때.”
그렇게 인연을 이어 가다 보니 여러 가지 면들이 눈에 띄었고, 결국 가당치도 않게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때 눈 마주치며 감이 오긴 했는데. 네 입으로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어. 차영이 너 얼굴 많이 보는구나?”
차영은 굳이 반박하지 않고 끄덕였다. 그러면서 태주를 힐끗 살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급작스럽게 고개를 틀어 차영의 입술에 ‘쪽’ 하는 소리가 나도록 입을 부딪쳤다. 결국 차영이 그의 입술을 손등으로 툭, 내려치는 것으로 저지해야 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거든?”
“와, 부추겨 놓고?”
“그냥 쳐다본 거거든요.”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서 쳐다본 거지. 선후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할 거 아냐.”
그렇게 나오면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나도 내 직업 심사숙고해서 선택했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쪽처럼 사명감 갖고 일해. 그러니까 그 문제로 너무 마음 졸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계속 하고 싶었어.”
공항에서 차영의 역할은 저 등대지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딴 등대에 갇혀 바다를 두루 살피는 저들처럼, 높은 탑에서 공항 전반을 관찰하고, 항공기들의 항로를 설정해 주는 데에 자부심을 느꼈다. 관제사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잘 모르는 승객이 태반이지만, 그가 일하지 않으면 항공기들도 제시간에 맞춰서 일사불란하게 운항하지 못했다.
덤덤하게 제 생각을 털어놓던 차영은, 그의 어깨에 살짝 고개를 기대고 있다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태주의 정면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살폈다. 심각한 낯빛을 하고 있던 태주는 이 와중에도 빈틈을 꿰뚫고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또! 진짜 틈만 나면.”
“기회를 안 놓치지? 이래야 성공해. 새겨들어.”
“한 기장 한번 웃어 봐. 심성은 안 고운 거 확실하고 웃는 얼굴 예쁜지나 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태주가 썩 협조적이지 않자 차영은 두 손으로 직접 그의 입매를 쭉 늘어뜨려 봤다. 그는 차영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니 일단 얌전히 있었다.
“뭔지는 알고 당하자?”
“내가 틀린 말 했나 사후 점검하는 거라고 하면 될까?”
“너희 어머니한테 나 웃는 거 예쁘다고 했어?”
“와……. 귀신이네.”
“넌 나 망부석도 만들고 귀신도 만들고 전래 동화 쓰느라 재밌겠다.”
“내 유일한 취미 생활이지.”
부드럽게 웃음을 터트린 차영이 그를 물끄러미 직시했다. 그래도 아까 한 말 중 그가 자신을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점검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태주의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겁이 많은 차영도 지난 일을 전부 덮어 놓고 오직 그여야만 한다고 단호히 결정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입 속의 사랑을 꺼내어 놓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읽은 것일까.
다시금 보드라운 입술에 제 것을 찰나간 맞물린 태주가 투명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차영 대신 고백했다.
“내가 너의 친구이자, 애인이자, 가족이 되어 줄게.”
그는 판에 박힌 사랑의 언어 대신, 제 말을 돌려주며 무언가 되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거 내가 먼저 한 말이잖아.”
“모방은 위대한 창조의 어머니란 말도 못 들어 봤어?”
“진짜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 가지고. 도대체 뭘 보고 듣고 사는 거야?”
“너.”
차영은 눈을 흘기다가 태주의 뺨을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붙들었다. 이곳에 내려와 여러 번 도둑 키스를 했지만 늘 태주가 시도했고, 차영은 거부하거나 겨우겨우 눈치를 살피다가 받아 주던 것이 다였다. 그러나 이번엔 차영이 적극적으로 그의 입술을 벌리고 제 혀를 밀어 넣었다.
곧바로 고개를 기울여 온 태주는 능숙하게 보조를 맞추며 차영이 움직이는 대로 따랐다. 치열하게 부딪치다 보니 어느새 차영의 혀가 바깥으로 딸려 나왔다.
허공에서 진득하게 얽히던 두 개의 살덩이가 순리에 따라 차영의 입 속으로 긴 행로를 이어 갔다.
“하…….”
숨이 가빠진 차영이 그의 어깨를 꽉 붙들자, 태주가 한참이나 더 혀의 돌기들과 잇몸의 여린 살들을 괴롭힌 뒤라야 겨우 놓아주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밤바다의 바람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걸 듣고 차영이 눈을 빛냈다.
자연스럽게 생택쥐페리의 「야간 비행」에서 리비에르가 밤하늘을 날아가면서 무전으로 승무원에게 질문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됐다.
“날씨는 어떤가?”(*Saint Exupery, Night Flight, Houghton Mifflin Harcourt, 1974.)
손에는 없지만 무전기를 쥐고 교신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면서 차영이 물었다. 태주가 그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의중을 파악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뒤 그가 대꾸했다.
“매우 좋음.”(*Saint Exupery, Night Flight, Houghton Mifflin Harcourt, 1974.)
동시에 미소 지은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다시금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