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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27화 (127/144)

127화

차영은 저항했다. 그러나 안쪽을 의식한 덕분에 몸짓이 작았고, 음성은 낮았다.

“좀! 걸려서 엄마한테 쫓겨나고 싶어?”

“날 여기 데려온 건 너잖아. 네가 해결하면 되지. 나 책임진다며?”

“책임지려고 그만하라는 거야. 오래오래 옆구리에 끼고 살려고. 한 번만 더 해. 화낼 거야.”

“와, 너무 무서워. 밤에 혼자 못 자겠어. 옆에서 자장가 불러 줘.”

“해 달라는 게 왜 이렇게 많아.”

“네가 나 일곱 살 애라며.”

“으, 말이나 못 하면.”

짜증스럽게 태주를 째려보던 차영이 이 마당에도 주눅 드는 기색이 전혀 없는 태주를 보다가 허탈해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태주도 더 했다가는 차영을 정말로 화나게 만들 것 같았는지 제 상체를 움직여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아담한 크기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나 이런 대청마루 있는 집 처음 와 봐.”

전 세계의 수십 개 국가를 제집 드나들듯 다니는 그였다. 처음 경험하는 영역이 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하고 흥미로웠던지 아무것도 없는 방 안을 꽤 오랜 시간 쳐다봤다.

“아까 보니 그러신 거 같더라. 옛날 집이라 그래. 난방 장치 따로 있어서 안 쓰긴 하는데 저쪽에 아궁이도 있거든.”

“와, 나 살면서 아궁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사람 처음 봐.”

차영은 픽 웃었다. 생각해 보니 제 입으로 직접 내뱉은 건 자신 또한 처음 같았다.

“나도 글로만 읽어 봤지 내 입으론 처음 말해 봐.”

“들어올 때 보니까 이쪽 교통이 좀 불편할 것 같던데 왜 하필 여길?”

“글쎄. 엄마 마음이지. 혹한기·혹서기 제외하면 버스 정류장까진 걸어 다닐 만한가 봐. 왜, 집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 반대야. 너 저쪽에서 창밖 내다봤어? 그러면 그런 질문 못 할걸.”

번뜩 생각난 것이 있는 표정으로 차영이 몸을 방 안쪽으로 기울였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태주가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이쯤 되니 차영은 고개를 젓는 것 외엔 별 타박도 하지 않게 됐다. 그저 저항의 의사 표현으로 다시 방 밖을 향해 제 몸을 빼낼 뿐이었다.

“나 지난번에 한 기장 덕분에 놀러 왔을 때 여기서 잤어.”

“그때 네가 쓴 이불이랑 같은 거 줘. 네 향기 맡으면서 자게.”

“계절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걸 줘. 아, 저기서 밤바다 내려다봤는데 엄청 근사하더라. 온 김에 이따 나가 볼래? 산책하자.”

“걸을 때 손잡아도 돼?”

“당연히 안 돼.”

“넌 뭐 그렇게 안 되는 게 많아?”

들어주지 못할 부탁만 꺼내 놓은 쪽이 누군데. 차영은 어이가 없었다.

“되는 게 많은 한태주 씨 쪽이 이상한 거야.”

“여기 방음이 잘 안 되겠지?”

“꿈도 꾸지 마. 여기선 절대 짤 없어.”

“난 그냥 순수하게 방음 잘 안 되는 거냐고 물어본 거야. 그리고 번번이 너 사람 꿈을 그렇게 함부로 짓밟는 거 아냐.”

“순수 같은 소리 한다. 이 음란의 화신아.”

“너무하네.”

태주가 혼잣말하듯 내뱉으며 차영의 어깻죽지에 제 고개를 파묻었다. 차영이 웃으면서 손을 뻗어 그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촉감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어 차영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다 문득 차영의 머릿속에 이 방의 문을 연 처음의 목적이 떠올랐다. 어째 태주와 부딪치고 나면 늘 원래 목적을 잊고 잠시 딴짓을 하게 되곤 한다.

“아, 맞아. 한 기장 배고파?”

“아냐, 괜찮아. 그런데 왜?”

“시간도 아직 이르고, 엄마 잠깐 나갔다 와야 한다시네?”

“지금? 어딜?”

“요양 병원에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외출 당사자로부터 돌아왔다.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안방에서 나온 그녀가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태주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몸가짐을 바로 하더니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태주에게 이끌려 대청마루 위에 어설프게 앉아 있던 차영도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섰다.

태주가 마당에 내려와 서자 그녀가 민망스럽다는 양 손을 내저었다.

“이거 초대해 놓고 미안해서 어떡하죠. 병원에서 내가 담당하는 어르신이 계신데, 이 양반이 치매 노인이라……. 내가 오늘 쉰다는 걸 자꾸 까먹고 찾으신다네. 앉은 자리를 막 뒤집어 놓고 난동을 부리고 그러나 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식사는 차영이한테 맡겼으니까 때 되면 차려 달라고 해서 먹어요. 직접 대접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일인데 가 보셔야죠.”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럼. 차영아, 엄마 다녀올게.”

그녀가 서둘러 나가려고 걸음을 내디뎠다. 차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태주가 갑작스럽게 차영의 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어 뒤지는 것이었다. 당황한 차영이 그를 밀어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주머니 안에서 뭔가를 꺼낸 태주가 그녀를 뒤쫓았다.

“제가 모셔다 드리고 싶은데요.”

“어, 아니에요. 한 번에 가는 버스 있어요. 바로 가요.”

“차영이 차로 한 번에 더 빨리 태워다 드릴게요. 급하신 거 아닙니까?”

차영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망설였다. 그러나 차영도 뭐라고 반응해 주어야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제 어머니인데도 직접 데려다주는 것까진 생각을 못 했던 터라 다소 당황스러운 심정인 이유도 있었다.

고민하던 차영이 차라리 자신이 데려다주겠다고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그렇게 되면 태주가 놀러 온 집에 혼자 남겨지는 셈이니 이치에 맞지 않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태주가 그녀를 모시고 대문 밖을 빠져나갔다. 하는 수 없이 차영은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매일 조종간에서 순발력을 발휘하고, 임기응변에도 강한 편이니 그가 알아서 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타시죠.”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 그녀가 탄 다음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린 태주가 뒤늦게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렇게 신세만 져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이거 차영이 차예요. 기름값도 본인이 냈습니다. 전 약간의 노동력만 제공하고 있고요.”

“그래도…….”

“따로 드릴 말씀도 있어서요.”

“나한테요?”

운전대를 잡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태주가 부드럽게 주행을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서 넓은 도로가 나오는 동안 내내 침묵하던 그가 먼저 대화의 서두를 열었다.

“치매 노인들 돌보시는 겁니까?”

“네, 암 병동에서 일하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치매 기운이 있는 노인들을 돌봐요.”

“일하기가 많이 험하시겠네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사명감으로 해요. 젊을 땐 아이들을 가르쳤고, 나이 들어선 노인들을 돌보고. 그렇게 내 생애에서 보람 한두 가지씩 찾으면서 지내는 게 좋더라고요. 이제는 여기가 내 자리인 것 같고 그래요.”

딱, 딱.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태주가 진지한 어투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저희 재단에서 치매 노인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합니다.”

“재단이라면…….”

“대영 그룹 계열사고, 한국 항공 기념 재단입니다. 외할머니께서 생전에 거기 이사장이셨고 저한테 전권을 위임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랬구나. 유감이에요.”

“거기에서 병원을 좀 도와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

“어우, 그래 주면. 사실은 여기가 외진 데기도 하고 예산이 부족해서 일손이 많이 모자라거든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반색하며 태주를 쳐다보던 그녀가 너무 염치없게 느껴졌는지 말끄트머리를 줄였다. 어떻게 뒷말을 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태주가 덧붙였다.

“제가 알기로 지금은 수도권 위주로 하고 있는데 어차피 하는 사업이니까, 지역 범주를 좀 넓혀 보면 어떨까 싶어요.”

“정말 고맙긴 한데 내가 그런 걸 마음대로 결정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저야 차영이 어머니를 믿고 지원하겠다는 거니까요. 지원금이 이곳에서 애먼 사람 배불리는 일 없이 제대로 잘 순환하는지만 직접 확인해 주신다면 진행할게요.”

“당장 여기에서 뭐라 말하기가 어렵네요. 한 기장님이 이쪽에 신경을 써 주시면 환자들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막상 우리 아들한테는 부담일지도 모르고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단지 추천서만 쓰는 거고 실무는 직원들이 하는 거라 저랑 차영이가 얼굴 붉힐 일은 없어요. 조만간 차를 보내 드릴 테니까 병원장이랑 함께 서울로 한번 오세요. 실무 팀과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혹여 부담이 될까 봐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은 못 하지만, 이미 그녀는 태주의 제안에 대한 희망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태주는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복잡한 오거리를 지나 언덕을 오르니 한적한 곳에 위치한 요양 건물이 보였다. 주차장으로 진입한 태주가 건물 출입구 근방에 차를 세우고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저기…… 한 기장님.”

“네, 말씀하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병원 일도, 우리 차영이한테 귀한 친구가 되어 주신 것도.”

그 말을 들은 태주의 표정이 애매한 빛을 띠었다. 그가 침묵하자 그녀가 재차 감사 인사를 하려 함인지 살짝 묵례했다. 그는 그녀와 똑같이 했다. 바로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은근하게 울려 퍼졌다.

“얼른 들어가 보세요. 돌아오실 때 연락하면 차영이가 데리러 올 겁니다.”

“고마워요.”

“이따 뵐게요.”

한 번 더 인사한 그녀가 먼저 돌아섰다.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동선을 꼼꼼하게 눈에 담고 있던 태주가 차체에 기대어 선 채로 한숨을 내뱉었다.

누군가의 목숨값을 이런 식으로 갚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외할아버지와의 천륜을 끊을 수는 없으니 하는 데까지는 해 보는 것이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주는 이내 시선을 떨어뜨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직시했다. 그러고는 짤막하게 미안합니다, 하고 읊조리듯 속으로 인사했다.

안타깝지만 당연하게도 그 파동은 그녀의 옷자락에 닿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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