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126화 (126/144)

126화

어머니의 몸짓에는 태주를 향한 호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여태까지 그녀는 아버지가 가는 길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닦아 보내 주지 못했다는 데 부채를 느끼고 살았다.

“여기예요. 저녁 식사 하기는 좀 이른가? 아무튼 들어가서 잠깐 쉬고 있어요.”

어머니가 태주에게 대청마루 위쪽의 방을 가리켰다. 신발을 그대로 신고 올라가려던 태주는 바닥에 집주인의 신발 몇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많아진 모양인지 잠시 멈춰 섰다. 그러고는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이거, 벗고 올라가는…….”

“네, 올라가면 돼요. 혹시 대청마루 처음 봐요?”

“네, 실제로는 처음 봅니다.”

그녀가 채근하듯 손짓을 하자 망설이다 스니커즈를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그 모양새를 고스란히 보고 있던 차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함께 돌아보았다.

태주 때문에 웃음이 터진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가 나무라듯 차영의 등을 쳤다.

“얘 봐, 차영이 너 왜 웃어?”

“아니, 한 기장 귀여워서. 나 저 사람 저렇게 뭐에 서툰 거 처음 봐.”

이 말에 태주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어머니의 앞이라서인지 별말을 하진 않았다. 찰나간 정적이 흘렀다. 양쪽의 눈치를 살피던 어머니는 차영을 잡아끌었다.

“넌 엄마랑 같이 부엌일 좀 도와. 기장님은 얼른 들어가서 여독 좀 푸세요.”

딸려 가는 길에 태주와 눈이 마주쳤으나 그가 혼자 있어도 괜찮다는 양 끄덕여서, 차영은 순순히 그녀를 뒤쫓았다. 주방에는 이미 그녀가 준비해 둔 음식들이 풍성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이걸 엄마 혼자 다 한 거야?”

“간만에 쉬는데 또 마침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서 이것저것. 네가 간 좀 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그녀가 차영에게로 몸을 기울여서 속삭이듯 물었다.

“세상에. 지난번엔 경황이 없어서 얼굴을 자세히 못 봤는데 한 기장 되게 훤칠하다. 한국 항공 소속이랬지? 저렇게 젊은데 벌써 기장이야? 네 아빠는 마흔 다 돼서 기장 달았는데.”

“엄마 뉴스 안 봐?”

“한국 항공 회장이 죽기 전에 외손자 입양했다는 기사는 봤어 엄마도. 그냥 어떤 사람인지 자세한 게 궁금해서.”

“자세한 게 궁금할 거 뭐 있어.”

“사귀는 사람은 있대? 예쁘장하게 생긴 게 도윤이가 딱 좋아할 것 같은데. 걔가 짝이 있어 안타깝네.”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에 실패한 차영이 오묘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자 평소 같지 않은 기색을 눈치챈 그녀가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왜, 한 기장님도 있어?”

“아, 응. 한 기장 사귀는 사람 있어.”

“그래? 어떤 사람인데?”

“글쎄, 성실하고…… 직장이 안정적인…….”

“선생님?”

“자세하게 묻지 마. 나도 잘은 몰라.”

“결혼할 거래?”

“잘 모른다니까. 정 간절하면 하자고 하겠지.”

“하긴 저 정도 조건에 여자 친구가 없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긴 해.”

“뭐, 그렇지.”

어렵사리 대꾸한 차영은 말을 골랐다. 물론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순수하게 궁금증이 일어 질문하는 그녀에게 정답을 피해 간 모호한 설명만 해 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 태주를 이곳까지 데려오는 데는 큰 부담이 있었다.

10년이 넘게 알아 온 도윤마저도 오며 가며 왕래한 적은 있었지만 차영이 직접 집으로 이끌다시피 해서 초대한 적은 한 차례도 없었던 터였다. 아무리 어머니가 태주에게 밥 한 끼 정도 대접하고 싶다는 독촉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와 자신이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닌 마당에 여기까지 여장을 싸서 함께 내려오는 일에는 위험 부담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에게 못 할 짓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다만, 이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던 건 예전에 그녀가 제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나중에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기게 되면 엄마한테도 소개해 줘.〉

이 삼자대면이 자신도 불안하고, 어머니도 쉽진 않겠지만 누구보다 태주에게 불편한 일이리라는 것은 짐작했다. 그래도 어머니와 자신을 위해 그를 희생하는 욕심을 부렸다.

아주 나중에 가서야 과거에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기보단 지금 저질러 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걸 차영은 아주 어릴 때 배웠기 때문이다.

혹여 어머니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살까 봐 태주가 선물해 준 시계도 빼고 내려왔다. 빈 손목 위가 허전해서 그 위를 쓱 더듬고 있는데 그녀가 덧붙여 물어 당황했다.

“너는? 너도 전에 의지하는 사람 있다고 했잖아.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

대답할 말을 곧바로 찾지 못해서 차영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결혼하면 알게 될 텐데 너무 감추는 거 아냐? 여자 친구에 대해 소개할 말이 그렇게 없어? 심성이 엄청 곱다든가, 웃는 게 예쁘다든가.”

머릿속에 커다랗게 자리를 마련해 둔 차영은 태주의 얼굴을 그 위에 떠올리고 이목구비를 하나씩 뜯어보며 곰곰이 답변을 궁리했다.

“심성…… 이 고운 건 모르겠고.”

“못됐어? 지난번에도 그런 식으로 말하더니.”

“웃는 건, 뭐. 원체 봐 줄 만한 건 반반하신 얼굴과 넘치는 재력뿐이라서.”

“얘가 이게 무슨 소리야. 얼굴이랑 돈 보고 사귀는 거야? 너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녀는 당황했는지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차영이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농담 섞어 한 말이었는데 예전에 했던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심상찮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농담이야. 날 아주 많이 좋아해 줘.”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성질이 못됐는데도 사귀어? 너 같은 애가?”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상상 안 되지?”

“그 사람이 널 더 좋아해?”

“나 그런 데서 자신감 별로 없는 편인데. 응. 그쪽이 날 훨씬 더 좋아해. 그래서 몇 가지 흠 정도는 내가 눈감아 줄까 싶어. 엄마, 나 그 사람 절대 안 놔주려고.”

“어느 나라 말이 그래?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아무튼, 자세한 건 다음에. 오늘은 집에 손님 왔잖아. 손님맞이하자. 손님맞이. 내가 뭐부터 간 보면 돼?”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은 그가 어머니의 등을 살짝 밀었다. 그러면서 그녀를 뒤로하고 손을 씻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녀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차영의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사실 그 외에는 더 바랄 필요가 없었다. 까다로운 차영이 선택했고,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곤 하는 그가 상대의 마음에 확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음식을 데우기 시작하는 차영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가 부드럽게 그 위에 손을 얹더니, 분명하게 눈을 마주쳐 주었다. 그들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 * *

방 안은 무척 깨끗했다. 이제 막 뜯어서 정성스럽게 손빨래를 해 둔 것 같은 새 침구들이 방 한편에 소담한 모양새로 쌓여 있었다.

이곳은 방 두 개짜리의 작은 집이었다. 창문을 열면 대문 반대편으로 바닷가가 넓게 내려다보였다. 마당에 차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차영의 어머니는 한참 아래의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 내려가 출퇴근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전망이 좋고, 내부는 쾌적했지만 그게 다였다. 태주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평소엔 잘 쓰지 않는 방인 듯 흔한 책이나 장식물들조차 안 보였다. 자택이 아닌 다른 데서 묵을 땐 대부분 숙소가 호텔이었던 터라 이런 장소에서 1박을 한다는 게 약간 현실감이 없었다.

밖으로 나가 볼까 싶어 몸을 일으켰는데,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을 보니 어머니가 아니라 차영 쪽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열린 문 사이로 보고 있어도 그리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주는 쓰러지듯이 문지방에 제 몸을 반쯤 바깥으로 걸치고 차영을 제 쪽으로 끌어 내려 입을 맞췄다.

화들짝 놀란 차영이 그를 밀어내고 입술 위를 툭 쳤다.

“미쳤어?”

평소에 주변 의식을 잘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그를 알지만, 이곳은 특히나 조심해야 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들을까 최대한 낮게 속삭이긴 했으나, 차영의 음성은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잠시간 꽤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던 차영이 문득 이마를 좁혔다. 태주에게서 반성하는 빛이 손톱만큼도 안 비쳤던 탓이다. 도리어 문지방에 더욱 늘어지듯 기대어서 차영에게 입을 쭉 내밀고 입맞춤을 조르는 것이었다.

“내가 잠깐 주방 다녀온 사이에 한 기장은 빨래가 돼서 널리셨네.”

“그거 시구야? 제목은?”

“한태주 망부석 설화.”

“이차영 서예 좀 하나? 그 러브레터는 한지에 써 줘. 설화는 그런 데 써야 제맛이지.”

“놀고 있다. 보조 맞춰 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

“키스를 한도 끝도 없이 해 주면 좋을 텐데.”

그가 제 입을 살짝 벌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차영이 어머니가 있을 안방 방향과 그를 번갈아 주시하다 잠잠한 것을 확인한 뒤라야 손바닥으로 태주의 입 주변을 반복해서 내려쳤다. 그러면 태주는 더욱 여봐란듯이 차영의 얼굴을 단단히 붙잡고 고개를 기울여 본격적으로 제 입술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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