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뒤늦은 시승식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태주는 지금 자신이 직접 골라서 차영에게 선물한 이 차량의 조수석에 탑승해 있었다. 타는 것까진 환영할 일이었다. 다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달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터다. 이른 아침부터 다짜고짜 태주를 깨우더니 억지로 준비하게 만들고는 뭐라 의문을 제기할 틈도 없이 차에 태운 차주 때문이었다.
분명히 잠깐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그들은 이미 경부 고속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디 내릴 수도 없게 된 그제야 태주의 물음에 차영이 실토했다.
“우리 지금 어딜 간다고?”
“엄마네. 남해.”
“나 어른들 잘 못 대해. 너도 봐서 알 텐데?”
“한 기장 사람 대할 때 서툰 건 내가 이미 잘 알고. 그래서 엄마한테도 다 이야기했어. 사람이 좀 싸가지 없게 보일 수 있는데 알고 보면 괜찮다고.”
“뭐가 없어?”
“사실이 아니면 발끈해도 되지만 한 기장은 인간적으로 하면 안 되지.”
뭐라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에둘러 면피해 보려던 태주는 금세 핵심으로 되돌아왔다.
“이걸 미리 계획했다는 거야?”
“나도 위험 부담 있어서 이러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엄마가 꼭 좀 보고 싶대. 지난번에 아버지 공항장 도와준 일로 계속 뭐라도 해 주고 싶어 하셨어.”
“나한테 미리 말을 했으면 좋았잖아.”
“그러면 한 기장은 또 부담스럽게 무슨 준비라도 할 것 같았고.”
“다시 생각해 봐. 현명한 생각이 아냐.”
“어울리지도 않게 왜 쫄아 있어? 엄마한테는 그냥 친한 친구라 그랬어. 계속 머뭇대다가 내가 갑자기 너무 적극적이라 부담스러워?”
“그게 아니라.”
그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해도 되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본인이 하던 말을 갑자기 중간에서 뚝 끊더니 운전하고 있는 차영을 힐끗 쳐다봤다.
“나 누군지 모르셔? 그러니까, 내가 문현기 회장 외손자고, 그 사람이…….”
이제야 태주가 왜 계속 미묘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인지를 알게 된 차영이 낮은 숨을 내뱉었다. 차영이 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겪은 사고에 관한 진실 중 어디까지를 노출했는지, 그걸 정확히 모르니 조심스러웠던 게 아닐까 싶었다.
“엄만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셔. 앞으로도 아무 말 안 할 거야. 그러니까 한 기장도 입도 뻥끗하지 마.”
차마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저 한태주라는 친구와 친해졌는데, 그가 한국 항공과 깊은 관계가 있어서 여러모로 아버지의 문제를 도와줄 수 있었다는 정도로만 간략히 설명했다.
어머니는 지난번에 차영이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었고, 그를 병실 밖에서 보호했던 게 한국 항공의 경호원들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로 분명히 몇 가지 의심을 품었을 텐데도, 끝끝내 차영이 제공한 선택적 정보만을 액면 그대로 믿으려 들었다. 아들을 깊이 신뢰하는 것이다. 만약에 감추는 게 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판단일 터였다.
혹시라도 나중에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전부 알게 되기라도 했을 때 그녀가 그들에게 느낄 배신감은 이루 말하지 못할 터다. 그래서 차영은 그녀의 배려에 따라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영원히 함구할 생각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가기 싫어?”
“날 그냥 친구라고 생각하셔도 난 장모님 뵈러 가는 기분이 드는데.”
“개도 기가 차서 웃을 소리를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하고 있어. 우리의 침대 위 포지션이 사회적으로도 적용되는 건 아냐. 장모님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내 어머니야.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해.”
“어쨌든 내 엄만 아니잖아.”
“맥락 비껴 나가지 말고.”
“호칭이 너한텐 그렇게 중요해? 그럼 시어머니라고 단어를 바꿔 볼게. 와,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미치겠어.”
차영이 자신도 모르게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태주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게다가 이렇게 빈손으로 가면 진짜로 성격 하자 있는 줄 아실걸?”
“진짜로 하자 있잖아. 부담 느끼지 마.”
“애초에 난 누군가의 어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되는 건지 잘 모른다고.”
그는 친어머니의 육성을 한 번 들어 보지도 못한 채 그녀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켜켜이 쌓아 온 서사 따윈 없었다. 덕분에 살면서 쉽게 교류할 일이 없는 중년의 여성을 대하는 일에 더욱 낯설고 어려운 모양이다.
태주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심란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태주를 마음으로 이해하는 차영이 한 손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 태주가 제 고개를 기울여 운전 중인 차영의 시야를 가렸다. 버둥거리면서 시야를 확보하려는 차영을 제압하고 기어코 짧게 입을 맞추고는 떨어져 나갔다. 깜짝 놀란 차영이 그를 마구 쳤다.
“돌았어! 진짜. 사고 나면 어쩌려고.”
“안 났으면 됐지.”
“간덩이가…….”
“진짜 나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날 너희 어머니한테 보여 드려도 후회 안 하겠냐고. 마음에 들어 하시겠어? 친구 잘못 사귀었다 소리나 안 들으면 선방이지.”
“엄마한테 특별히 잘 보일 필요 없어. 이미 잘 보고 있을 테니까. 마음에 안 들어 하셔도 하는 수 없지. 내가 그런 너 좋다는데 엄마가 뭘 어쩔 수 있겠어. 원래 부모는 자식 못 이겨.”
덤덤하게 태주를 설득한 차영이 앞뒤의 차들을 살피면서 묵묵히 운전했다. 그런 차영의 옆모습을 꿰뚫듯이 빤히 바라보던 태주가 가볍게 대꾸했다.
“너 왜 그래? 자빠뜨리고 싶게.”
그러면서 은근하게 차영의 목울대 위를 쓸어내리는 손을, 힘주어 쳐 냈다.
“나 운전할 때도 웬만하면 욕 안 하는데 한 기장 때문에 번번이 입 험해지는 건 알아? 진짜 비명횡사하기 싫어. 운전 중에 수치도 모르고 들이대지 마, 좀.”
“내가 운전할까? 넌 한 번에 두 가지 일 못 하지만 난 달라. 막 덤벼도 괜…… 윽!”
결국 오른편으로 손을 길게 뻗은 차영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 내 태주의 옆구리를 힘껏 꼬집었다.
* * *
주로 비행기로 이동하는 태주에게 육로를 통하는 교통수단은 아주 느리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드물게 차량으로 먼 길을 이동할 때마다 비슷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항공기가 똑같은 시간으로 국경도 넘을 동안, 그에 비견하지조차 못할 짧은 거리밖에 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는 것이었다.
다만 차영과 함께 이 지역으로 내려온 두 번만큼은 달랐다. 그는 이곳으로 내려오는 여섯 시간 남짓 동안 줄곧 마음이 초조했다.
“내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사방으로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이었다. 산자락에 색색의 지붕이 조금씩 거리를 두고 간헐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얼핏 눈에 보이는 몇 개의 집들 중 차영의 차가 멈춰 선 자리는 새빨간색 지붕에 진한 파란색 대문이라는 퍽 발칙한 색채의 집 입구였다. 한참 떨어진 곳에야 다른 집의 지붕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지대가 높아 반경 몇 미터 인근에는 이 가구 외에 살지 않는 듯했다. 인가가 거의 없으니 만일을 대비해 멀리서도 사람들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 이렇게 페인트칠을 한 모양이었다.
“뭐 해. 내리라니까?”
뒤늦게 태주가 차에서 내리자, 채근하던 차영이 픽 웃더니 따라 하차했다. 아직 쌀쌀하긴 하나 공기가 맑아 호흡할 때마다 폐부가 상쾌했다. 한번 숨을 크게 내쉬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조수석의 문을 닫은 태주가 뒤늦게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언덕 주위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그리고 그 너머에 바다의 지평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가 생각보다 훨씬 근사한 경치를 감상하는 사이, 마침 대문을 열고 나오는 중년 여자가 그들의 방문을 반겼다.
“어서 와요.”
태주는 그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태주입니다.”
“반가워요. 난 차영이 엄마고, 특별한 건 없이 그냥 식사랑 잠자리 정도만 마련했어요. 잘 데 보여 줄게요. 춥다. 얼른 들어와요.”
계속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신경 쓰는 듯하던 태주는 막상 상황이 닥쳐오자 아들인 차영보다도 더욱 능숙하게 굴었다. 그녀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따라 들어가면서 여기까지 내려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는지, 차영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묻는 말에 자연스럽게 대꾸하면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멀리 있는 바다를 힐끗 살핀 차영은 한 박자 늦게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