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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24화 (124/144)

124화

기내에 브리핑을 위해 모인 승무원들이 웅성거렸다. 예의 한태주 기장이 아주 오랜만에 제복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탓이었다.

태주가 조종간을 비웠던 사이 그들은 동료였던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공중파 뉴스 따위에서 접하는 게 다였다. 그래서 다소 낯선 눈길로 그를 살폈다. 아무래도 연달아 외조부모를 여읜 데다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그가 유일한 상속자라고 떠들어 대고 있어서 여러 가지 갈래로 부담이 느껴지는 듯했다.

정작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칼 같은 모양새로 나타난 태주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자신에게 주의 집중하고 있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사무장을 비롯한 객실 승무원들에서부터 제 왼편에 서 있는 오늘의 파트너 권 부기장에게까지 긴 시선이 닿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벌리자 침묵이 깨졌다.

“뭡니까? 동물원 왔어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의 오른편에 검사관 한 사람이 버티고 서 있다가 끼어들었다.

“한 기장님, 브리핑 시작하시죠.”

그는 태주의 건강 상태에 문제가 있을 때를 대비해 탑승한 조교 겸 조종사였다. 인천발 제주행 국내선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한동안 휴식을 취했다가 이제 막 복귀한 태주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던 탓에 일정을 함께하게 된 것이다. 감사 차원의 목적도 있었다. 사무장이 건넨 서류를 들고 눈대중으로 살피던 태주가 서두를 열었다.

“한태주 기장입니다. 오늘 우리 비행기 인천발 제주행 한국 항공 1701편입니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 손님이 대다수입니다. 기내 소란해질 수 있으니 요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발언에 이어서 기상 상태와 특별한 주의 사항 몇 가지를 승무원들이 교환했다. 감시관이 객실 승무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태주는 권 부기장과 함께 조종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번 식당에서 잠깐 회동했던 이후 그와도 처음 맞닥뜨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내 동의 없이 출근해도 되는 겁니까? 아직 한 기장 사직서 저한테 있습니다.”

“당연히 해도 됩니다. 내가 그러겠다고 결정했으니까요.”

“뭐, 직원들이 다들 어려워하는데 이럴 때 겸손하게 구는 미덕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런 거. 사주 외손자면 직원들이 당연히 어려워해야죠.”

“뭐 이런 게 다 있나?”

“칵핏 앞입니다. 예의를 갖춰 주시기 바랍니다.”

“갖추고 있는 겁니다. 깍듯한 존대로 응하고 있잖아요.”

입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보는 권 부기장을 태주가 힐난했다.

“뭐 하자는 거야. 시간이 남아도나? 할 짓 없으면 들어가서 체크 리스트나 확인하세요.”

그러고는 그대로 권 부기장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제복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고 입성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무슨 용건이냐는 듯 태주가 쳐다보자, 그가 옷 안쪽에서 하얀색 봉투를 꺼내 들었다. 태주에게 도로 건네주기에 받아서 보니 조금 전 본인이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던 사직서 같았다.

“그때 약속한 당일에 오겠다던 기자들 아무도 안 왔던 거 압니까?”

“알아요.”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우리 거래도 파투가 났으니 돌려드리는 겁니다.”

태주가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데 권 부기장이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계속 궁금했던 의문이었는데 차마 묻지 못하고 버텨 왔던 듯했다. 사실 당일에도 물었으나 태주가 대충 눙치고 넘어가는 바람에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왜 도움을 청한 게 하필이면 저였는지 물어도 됩니까? 우리가…… 그, 사실 조종간 잡기 전에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관계가 원만한 편은 아니잖아요.”

“그나마 믿을 수 있어서요. 최소한 겉이랑 속이 똑같이 적당히 못되고, 또 적당히 착한 사람 같아서.”

“…….”

“그게 답니다, 평범해서. 그러니까 본인이 특별한 사람이라 그랬다는 착각은 버리시고요.”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듯, 태주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권 부기장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기를 불사했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와 조종석 측면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체크 사항들을 확인하고 있는데, 그가 뒤쫓아 자리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저 곧 승급 시험 있습니다. 만반의 준비 마쳤습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뭐, 알아서 하세요.”

“좀 도와주십시오. 명실공히 한국 항공 최우수 기장 아닙니까?”

“왜 친한 척이에요, 간지럽게. 미쳤어요?”

“잘 좀 봐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주 외손자 당연히 어려워해야 한다면서요.”

“그런 말을 안 하는 게 훨씬 더 본인한테 도움이 될 텐데요.”

“다른 건 괜찮은데 항공 영어가 좀……. 특별한 팁 없어요? 달달 외우는 거 말고.”

“왕도가 있으면 다 조종간 잡지 않겠습니까. 전 미국에서 태어났고 덕분에 바이링구얼이라 잘하는 방법 같은 거 모릅니다.”

그는 귀찮다는 양 손을 신경질적으로 휘둘러 권 부기장을 뿌리쳤다. 이윽고 태주가 선글라스를 고쳐 끼고 앉았다. 체크 사항들을 꼼꼼하게 확인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 듯 교신 장비를 손에 쥐었다.

“이륙 허가 내가 받겠습니다.”

권 부기장이 끄덕끄덕하는 사이, 태주가 주파수를 맞추고 교신을 시도했다.

「타워 응답 바랍니다. 한국 항공 1701 이륙 준비 완료됐습니다.」

곧이어 익숙하지만 늘 다른 각도로 태주의 머릿속을 두드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 「한국 항공 1701. 현재 바람은 320도 방향에서 10노트 속도로 불고 있습니다. 34번 좌측 활주로로 이륙을 허가합니다.」

「한국 항공 1701. 34번 좌측 활주로로 이륙 허가받았습니다.」

- 「부디 안전 운항 하세요. 괜히 성질부리지 말고, 좀 화가 나도 말 예쁘게 하고, 동료랑 사이좋게 지내고요. 무슨 일곱 살 애도 아니고 이런 걸 가르쳐야 돼.」

전방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태주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 * *

어두운 밤. 공항의 계류장 일각에 한국 항공의 로고를 단 비행기 한 대가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기체의 아래에 제복을 입은 승무원들 몇 사람들이 영결식 준비를 거의 끝마친 상태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차영과 그의 어머니가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눈에 담았다.

그들은 의외로 울지 않았다. 그저 한참 동안 항공기와 그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이정욱 기장을 기리러 기꺼이 나와 준 객실 승무원들이 묵례하며 기도하자, 그제야 고개를 떨어뜨렸다. 금세 사위가 조용해졌다. 모자를 벗은 몇몇 조종사들도 함께 예를 표하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불빛 아래, 꽤 긴 시간 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덤덤하게 영결식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차영은 무심코 제 어머니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 또한 생각보다 무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지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해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걱정은 내려놓게 됐다. 그러자 아까 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일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 차영은 뒤를 돌아봤다. 서서히 어스름의 마법이 풀리고, 어둑어둑한 멀리 자신과 비슷한 검은 정장 차림의 태주가 서 있는 모습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하늘을 보고 있어서 차영도 덩달아 머리 위를 올려다보게 됐다.

‘별이…….’

오늘따라 유독 별이 많이 보였다. 그 깨끗하고 청명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금 시선을 떨어뜨렸을 때, 차영은 태주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았다.

오늘 오전 태주는 제 아버지를 모신 납골당에 다녀왔다. 그사이 차영은 어머니를 마중했다. 덕분에 이른 새벽녘 헤어진 뒤 서로 얼굴을 이제야 겨우 보게 된 것이었다.

달려가서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안아 주고 싶었는데, 어머니에게 손을 단단히 붙들려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고마워.

대신 차영이 그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열심히 입 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멀어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태주는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자신 말고 앞을 보라면서 고갯짓을 하는 것이었다.

“시력 좋다더니.”

“응? 차영아, 뭐라고?”

혼자 궁싯대는 그의 음성을 듣고, 어머니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차영은 그녀에게로 몸을 틀어 태주를 등졌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예상 정도는 손쉽게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꽉 붙든 차영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 인사는 아무리 늦어도, 아무리 바래도 항상 슬픔이 남았다.

〈난 네가 그 애의 슬픔이 되길 바란다.〉

절대 그렇게는 안 해 줄 생각이었다. 죽은 그가 원하는 게 그런 일이라면, 자신은 태주에게 정반대의 가치를 주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할 것이다. 태주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차영이 필요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차영은 아버지가 준 슬픔이 파생한 한태주라는 행복으로 문 회장에게 갚아 줄 생각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오늘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서로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날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차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망자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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