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태주를 노려보던 차영이 졌다는 듯 내뱉었다.
“나 다음 주부터 출근해. 탑장님한테도 말씀드렸어.”
“나도 검진 결과 제출했더니 바로 비행 잡혔어.”
그 말에 차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어디?”
“국내선. 오랜만에 복귀라서 가까운 데부터.”
“잘됐다. 다시 공항에서 종종 보겠네?”
“그래야지.”
계속 장난스럽게 반응하던 태주의 목소리가 조금 무거워졌다. 그의 음성에 항상 귀를 기울이는 차영은 이 미세한 변화를 당연히 감지했다. 그 이유에 대한 답을 구하듯 차영이 물끄러미 그를 보자, 태주가 부르고 있어도 애틋한 이름을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이차영.”
“심각한 이야기 할 것 같아서 무섭다.”
“공항장으로 이 기장님 장례 다시 치러 드리자.”
차영은 움찔했다.
“장례라니?”
“곧 기일이잖아.”
“하지만 우리 아버지 파직되셨어. 자격이 없어. 이미 돌아가신 지도 한참 지났고…….”
난데없는 소리를 듣고 차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기장 면허 박탈이 아니라 항공사 측에서 파면한 거라 내 직권으로 절차 따라 복권하고 있어. 서류 심사는 통과했으니까 좀 기다리고 있다 보면 상황 마무리돼서 연락 올 거야. 진작 이렇게 했어야 맞는 일인데 늦어졌다.”
차보단 이쪽이 진짜 공들여 준비한 선물일 듯했다. 차영이 부상당한 상태에서 회복에만 전념할 동안 태주는 많은 대외적인 일들을 해결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런 물적 증거도 없이 아주 오래전 파직했던 사람의 실추된 명예를 되살려 주는 일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는데 증거로 제출할 수 있는 게 마땅치가 않으니 태주가 한국 항공 내에서 지닌 힘에 기대야 했다.
아버지의 기일까지는 며칠 남아 있지 않았다. 급작스러운 일이라 여러 가지 부담도 있었을 터다. 그러나 반드시 이맘때에 맞춰 해결해 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당일에 어머니 공항으로 오시라고 해. 모든 준비는 한국 항공에서 할 거야.”
“…….”
“어머니한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너한테도. 그럼 널 좋아하는 내 마음도 좀 편할 것 같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태주에게 한 걸음을 다가가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태주가 그대로 반대편 손을 뻗어 안아 주려고 하는데, 때마침 주차장 입구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차량이 진입하는 기척이 들려서 서둘러 그를 밀어내고 떨어졌다. 태주가 픽 웃으면서 차영의 이마를 툭 쳤다. 차영은 차오르는 울음을 참아 내며 웃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대영 그룹 본사 홍보 팀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주가 사망한 이후 처음으로 사주 일가가 공식적으로 임한 인터뷰 내용이 언론사를 통해 배포되기 때문이었다. 이 대담에 응한 사람은 물론 태주였다. 주말을 이용해 사전 회견을 가진 뒤 적당한 편집을 거쳐 각종 뉴스와 신문 등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예정이었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은 대체로 정보 전달의 목적을 띠고 있었다. 문 회장이 심장 마비로 사망한 애통한 사건과 그로 인해 현장으로 달려가던 자신이 입었던 경미한 상처 따위에 대한 것들로 서두를 열었다.
그런 다음 현재 실질적으로 회장석은 공석이며 본인은 회사를 물려받아 경영 일선에 뛰어들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본인에게는 직접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직업이 있으며, 열심히 노력해서 취득한 자격이고,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지니고 일한다는 생각들을 매끄러운 언어들로 전달했다.
또한 경영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편이 주주들과 사원들은 물론이고 대영 그룹의 모든 계열사를 믿고 제품을 소비해 주는 국민들에게 널리 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라는 점을 공고히 했다.
그는 적합한 절차에 따라 전문 경영인을 선출하는 데까지가 자신의 몫이며, 수렴첨정하는 것처럼 뒤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 않을 것과 회사가 안정되면 일반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다만 문 회장과 김 이사장의 유일한 상속자가 완전히 사측과 본인을 분리하려 들면 이어지는 주가 하락 등의 역효과를 우려한 듯 약간의 여지만을 남겼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기존 경영진 일가라고 해서 본사에 함부로 월권을 행사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기념 재단은 제 이름으로 운영하되 실질적으로 실무진의 역할 비중을 대폭 늘릴 생각입니다. 또한 계열사인 한국 항공에서도 제 역할은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한 사람의 조종사입니다. 저의 영향력은 항공 업계의 생리를 잘 아는 고문 정도에 그칠 겁니다.”
어울리지 않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그는 겸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태까지 제가 드린 모든 말씀은 늘 착용하는 제복의 견장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그러고는 나머지 일을 사측의 고문 변호사들에게 맡긴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일터에 본격적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 차영은 늦은 시간에 관제탑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계단을 올라 탑으로 입성하자마자 내부가 급격하게 소란스러워졌다. 잠깐 들르겠다는 의사를 전한 게 한 시간 전인데 야간 관제를 하던 직원들이 그사이 꽤 많은 것들을 준비한 듯했다.
“차영 씨, 오랜만이에요.”
동료 중 한 사람이 마침 안으로 들어온 차영에게 인사했다. 그가 꾸벅 고개 숙여 마주 인사를 하는 사이, 뒤쪽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본 차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첨단 장비가 많은 이곳에서 화기는 엄금이었다. 그가 나무라듯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자 최대한 안전하게 땅을 향해 폭죽을 겨냥하고 있던 동료가 어색하게 웃었다. 차영도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대대적인 환영은 다소 난감했다. 그가 높은 곳에서 추락해 크게 다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동료들 사이에도 널리 퍼졌던 것 같았다. 어렵사리 귀환한 사람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듯 폭죽을 터트리고 케이크까지 내미는 통에 꼭 생일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그냥 좀 다쳐서 치료하다 온 건데 머쓱하게 왜 이러세요.”
난처해하는 어투로 차영이 민망해하자 탑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원래 이런 건 요란하게 해 줘야 남은 액운이 다 날아가는 거야. 좀 괜찮냐?”
“이제 이곳저곳 돌아다닐 만해요.”
“네 얼굴은 아직 어딜 다닐 만한 것 같지가 않은데? 생각보다 상처가 심각하네? 뺨 쪽에 빨갛게 있는 건 멍이야?”
“네, 아직 다 안 빠졌는데 얼굴에 붕대 감고 있기가 갑갑해서……. 보기에만 이렇지 멀쩡해요. 진단서도 제출했고요. 운이 좋았대요. 아무튼 저 때문에 일 돌려 하느라 고생들 하셨겠어요. 따로 차출도 없었다면서요.”
동료들의 시선이 아직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제 상처에 계속 닿는 것이 부담이 됐다. 차영은 최선을 다해 화제를 돌렸다. 눈치껏 탑장이 보조를 맞춰 주어 다행인 일이었다.
“아니진 않은데. 연말연시 워낙 바쁘니까. 그래도 다들 베테랑들이라 버틸 만했어.”
“상반기 연차 모두 반납으로 보답할게요.”
“야, 너 쉰 기간 생각하면 하반기까지 통으로 해도 모자라.”
“하반기엔 저도 쉬어야죠.”
뻔뻔한 대꾸에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탑장이, 직원들에게 케이크를 각자 잘라 먹을 것을 명하더니 차영을 따로 불렀다.
두 사람은 어두운 밤의 계류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나란히 섰다. 잠시 차영을 이곳에 세워 둔 탑장이 따뜻한 커피를 준비해서 가져오는 동안, 그는 유리창 너머를 직시했다. 어두운 하늘 아래 이곳저곳 도사리고 있는 불빛들이 아름다웠다. 어느 틈에 제 가슴팍 쪽에 따뜻한 김을 뿜어내는 종이컵이 내밀어져서, 감사하게 받아 들었다.
“차영이 너 얼굴이 많이 편해졌다.”
“제가요?”
“응, 한동안 진짜 못 봐 주겠더니 이젠 멍을 달고 나타났는데도 괜찮아 보이네. 내일부터 진짜 출근 가능한 거지?”
“그럼요.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고 배려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배려는 무슨. 그런데 왜 오늘 밤부터 굳이 나오겠다고 한 거야? 내일부터 오면 될걸.”
“아……. 저, 탑장님.”
계류장 풍경을 관찰하고 있던 탑장이 ‘응?’ 하고 대꾸하듯 그를 힐끗 쳐다봤다. 차영은 그 시선이 제게 닿자마자 창밖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다음 주 월요일 밤에 저쪽 계류장에서…… 저희 아버지 영결식 해요. 이런 이야긴 조용할 때 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잠깐 들렀어요.”
“아버지? 아주 예전에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나?”
“네, 한국 항공 기장이셨는데 당시에 그냥 일반장으로 했었거든요. 어쩌다가 이번에 한 기장 덕분에 기회가 돼 가지고……. 늦은 시간에 진행할 거라 다른 분들한테는 괜히 부담될까 말씀 못 드리겠고, 그래도 탑장님은 제가 아버지처럼 따르는 분이라 와 주셨으면 해서요.”
그는 차분하고, 느리지만 분명하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 여전히 눈길은 창밖에 고정된 채였다. 이륙하는 비행기들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탑장이 음, 하고 차마 차영이 설명하지 못한 수면 아래의 일들을 가늠하는 듯하더니 기꺼이 오겠다는 양 답을 주었다.
“야, 그런 말을 뭐 이렇게 조심스럽게 꺼내? 당연히 가야지.”
감사하다는 인사가 차마 입에서 안 떨어졌다. 최선을 다해 덤덤히 끄덕인 차영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