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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22화 (122/144)

122화

제 손을 빼낸 차영은 그를 야멸치게 쏘아봤다. 그가 고개를 갸웃해서 차영과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픽 웃었다.

“나 그렇게 걱정돼? 어느 날 경찰이라도 와서 잡아갈까 봐?”

“당연하지. 난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세상에 비밀은 없잖아.”

“외할아버지가 가졌던 권력이 다 내게 이양됐어. 아마 이젠 내가 털어놓고 싶어 해도 비밀이 강제로 지켜질 거야. 대영 그룹 최대 주주 일가가 그 정도로 콩가루 집안이었다면 주식이 급락할 테니까.”

“이해가 안 돼.”

“돈의 습성이야. 나도 잘은 몰라. 자라는 내내 외할아버지가 숨기는 것들을 봤을 뿐이지.”

“결국 확실한 안전은 보장할 수가 없는 거네.”

“응, 없어. 그래서 누군가 냄새를 맡으면 진흙탕 싸움이 될 거야. 무서워?”

“조금.”

그는 차영의 뺨에 바람이 스치듯 입을 맞췄다. 본능적으로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를 둘러보던 차영이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태주가 그런 차영의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결 좋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래도 난……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되게 아이러니하지.”

“…….”

“안 실장은 곧 직위 해제하고, 국외로 실질적 추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볼게. 이걸로 네 마음이 찰까?”

그가 어떤 극형을 받아도 제 마음이 차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슬픔과 고통만이 가장 중요했고, 제일 크다고 느끼는 법이다.

“다신 얼굴이나 안 봤으면 좋겠어. 앞으로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진 나한테 말해 주지 마.”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그게 뭐든.”

어느 틈에 태주가 파라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밑쯤에 쪼그려 앉아 있던 차영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차영이 강아지의 털을 쓰다듬어 주던 모양새를 그대로 흉내 내듯 손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런데 너 이렇게 쪼그려 앉아 있어도 돼? 자세 불편해 보인다. 의사가 상체에 최대한 무리 가지 않게 일상생활 해야 한다고 했잖아.”

“이 정돈 괜찮아. 한 기장이랑 더한 자세로 별짓 다 하는데 뭐.”

태주는 어이가 없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차영 넌 ‘더한 자세’와 ‘별짓’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린 섹스에 관한 한 아주 스탠다드한 커플이야.”

“우리가? 한 기장 완전히 변태 같은데.”

“와, 침대가 있는 실내를 선호하고, 역할놀이 같은 것도 네가 창피해해서 일절 안 하고, 특히 공공장소에선 손만 닿아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별짓도 안 해. 무엇보다 정상위가 제일 잦잖아. 이게 어디가 변태야. 솔직히 난 얼마나 깊게 박히는지 다양한 체위를 시도해 보고 싶은데, 네가 창피해해서 애초에 하자고도 안 하는데.”

“어, 얼마나 깊게 박히는지?”

“너 내 거 들어갔을 때 납작했던 배 불룩하게 나오면 그거 진짜 야한 거 알아?”

잠자코 듣던 차영이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기색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손아귀에 힘을 줘 태주의 입술 위를 손바닥으로 툭, 툭 쳤다. 동시에 그가 픽 웃는 모양새가 반쯤은 농담이었던 모양이다. 고로 나머지 반은 농담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런 거 누가 듣는 게 그렇게 무서워? 이 거리를 봐. 아무도 없잖아. 차도 없고.”

“지금은 그렇지. 그런데 넌 평상시에도 아무 때나 이러잖아. 안 무서운 게 비정상 아냐?”

“그래도 이런 내가 좋지?”

“…….”

“대답 안 해도 너 나한테 다 들켰어.”

“아닌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한 기장이랑 어떻게 사귀어. 맞아.”

“나 아직도 원수 같아?”

“그건 약간. 그냥 널 모르고 살았어야 했는데.”

그리고 아마 이 사실만큼은 영원히 간극을 좁히지 못할지도 모른다. 태주는 문 회장이 저지른 악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본인에게 책임이 있든, 없든 여하를 막론하고 말이다.

“그러게 그런 건 왜 물어? 내 대답 뻔한데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차영이 입을 살짝 내밀고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그는 언제나 태주에 비해 불안정한 게 한참 많았다. 그리고 태주는 그런 차영을 이해했다. 두 사람은 침묵을 즐기면서 잠시간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이윽고 코트 주머니 안쪽을 더듬거리던 태주가 뭔가를 꺼내 차영에게 휙 던졌다.

뭔가 날아오니 본능적으로 받아 든 차영이 손바닥 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차 키였다. 고개를 쭉 빼서 담벼락 너머 야외 주차장의 제 차를 확인하려 했으나 담장이 높은 데다 제 바로 앞을 태주가 가로막고 있어서 안 보였다.

“뭐야? 심각한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웬 차 키?”

“너 차 키 나한테 있는 거 잊었어?”

떠올리기 싫은 두 번째 납치되던 날을 자연스럽게 되새기게 됐다. 차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운전을 할 몸 상태가 전혀 안 돼서 그날 태주와 제 차의 스마트키를 교환했었다는 사실을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단출한 버튼 반대편에 날개형 모양의 로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이 몰던 것과 전혀 다른 브랜드의 차종인 듯했다.

“그런데 이 건 내 게 아닌데?”

“새 차야. 원래 있던 차는 폐차하자. 이래저래 좀 찜찜하기도 하고. 내가 이미 의뢰했어.”

“뭐야, 나한테 말도 없이. 그리고 내가 몰던 차랑 같은 기종도 아니잖아. 이건 벤틀린데?”

“다른 브랜드가 더 좋아? 그거 튼튼하대. 새로 나왔다는데.”

“그런 말이 아니라……. 아무리 봐도 한 기장 씀씀이가 너무 헤프니까 이 차 내 분에 안 맞는 비싼 걸까 봐 불안해서.”

“너 나 억대 연봉잔 거 잊었어? 내 소비는 숭고하고 고결한 비행의 대가인 셈이지. 즐겨.”

“웃기고 있다. 댁은 항상 본인 연봉 이상의 초월적인 액수를 쓰고 있으시거든. 실은 본인 한국 항공 급여 통장에 얼마나 꽂히는지도 모르지? 애초에 그런 계좌가 있는지도 모르시겠지.”

“보유하고 있는 통장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는 쪽이 변태 아니냐?”

“변태는 너지. 네 거 윤곽 보면서 흥분하는 한국 항공 한태주 기장.”

차영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차 키를 내려다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꼭 동화 속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차마 제 마음속에 일고 있는 미약한 파란을 말로 꺼내기가 어려워서 입술만 달싹였다. 그걸 본 태주가 픽 웃었다. 아마 차영의 반응으로 미루어 무슨 생각인지, 어떤 심정인지를 유추한 듯했다.

“뭐 걱정하는지 아는데 그거 문 회장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 아냐.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버지 유산 같은 거야. 넌 내가 그렇게 파락호로 보이냐?”

“무슨 근대 소설에 나올 것 같은 단어를 쓰고 있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

가장 꺼림칙했던 부분을 태주가 긁어 주고 나니, 괜히 툴툴대는 것 외엔 더 할 말이 없었다.

차 키를 가만히 관찰하기만 하던 그는 마침내 태주의 무릎을 손으로 짚고 제 몸을 지탱해 일어섰다. 차영이 특별한 예고 없이 주차장 방향으로 묵묵히 걷기 시작하자, 태주가 본인 차를 내버려 두고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의 등 뒤에서 강아지가 아쉬움을 나타내듯 가볍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나올 땐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야외 주차장 제자리에는 이미 원래 쓰던 차가 사라지고 없었다. 황망해하던 차영이 차 키 중앙의 버튼을 누르자 멀리 헤드라이트에 번쩍 불이 들어오는 차량이 한 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무척 튼튼해 보이는 검은색 차체였다. 묵직한 질량감이 눈으로도 느껴졌다. 정확한 차종은 모르지만 컨티넨털 신형 라인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아니면 더 고가의 라인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저런 차가 옵션을 빼고 본체만으로도 이미 수억대에 달한다는 건 귀동냥으로 알았다.

“내 차는 출퇴근 용도인데 저걸 어떻게 타고 다녀?”

“면허 있는데 왜 못 타?”

발끈해서 한 마디 쏘아붙이려던 차영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태주는 뭐가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알지만 이게 본인의 선택이니 재고의 여지가 없을 뿐이다.

차를 가운데 두고 보닛 앞에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은 서로를 직시했다. 어두운 새벽, 곳곳에 켜진 가로등이 주변을 밝혀 주고 있어서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는지 상대의 눈에 선연하게 들여다보였다. 차영이 보닛 위를 손으로 짚었다.

“그래도 이런 건 좀.”

“예쁘지 않아? 난 마음에 들어.”

“한 기장 좋은 거만 하고 살 순 없어.”

“여태 그러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고쳐. 그냥 받아들여.”

차영은 발끈했다.

“아니, 이런 비싼 차를 어떻게 출근할 때 몰고 가! 다들 나 로또 당첨된 줄 알 거야. 아니면 사채라도 끌어다 쓴 줄 알걸? 직원들 수입 뻔하고 공항 상주 직원용 주차장에 차들 서로 빤한데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말해? 솔직히 불어. 이거 대체 얼마야?”

“가격은 나도 몰라. 편의점에서 뭐 샀다가 경품 당첨됐다 그래. 뭐 생수 같은 거 사면 주는 거 있잖아.”

“와……. 뭐 저런 대책 없는. 나 좀 더 저가형 모델로 바꿔 줘. 최대 1억 원 미만에, 막 다뤄도 되는 거.”

“그걸 막 다루면서 타. 나 너 도로에서 무시당하는 꼴 못 봐.”

“야, 한태주!”

그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얄미운 나머지 다리를 걷어차자 윽, 하는 신음을 내면서도 얌전히 맞아 주었다. 역시나 뭐가 문제인지는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좋은 차를 몰게 해 주고 싶은 그의 마음이 느껴져서 차영도 그를 지탄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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