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공항 내에서 태주가 제복이 아닌 슈트 차림을 한 모습은 보기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검은색 정장을 하고 공항 귀빈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상이 무척 사나운 편이라 입을 다물고 있으면 꽤나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출입구를 개방했다.
“한 기장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공항 공사의 사장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김 이사장님 장례 때 보고는 처음인가? 앉아요.”
사장의 맞은편에 앉은 태주를 향해 그가 먼저 안부를 건넸다.
“외조부모님 연달아 여의고, 안 됐어요. 문 회장님 장례도 갔었는데 한 기장은 수술하고 회복 중이라고 하더라고. 이제 몸은 좀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좀 아팠다고 들었거든요.”
“이제 괜찮습니다.”
“날 따로 보자고 접견을 청했다고? 의외네요. 어떤 입장으로 온 겁니까? 보니까……. 여긴 공항인데 제복을 안 입었네요?”
“네. 대영 한국 항공 회장 대리인으로 온 겁니다.”
그들은 서로를 잠시간 쳐다봤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것은 공항 공사의 사장 쪽이었다. 본인이 그런 자격으로 왔다면 그만한 대우를 해 주어야 마땅한 일이다.
“용건이 뭡니까. 들어 보죠.”
“공항장을 치르고 싶어서요.”
“공항장이라……. 주변에 사망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현직에 있는 사람이려나? 아니면 회장님 영결식 같은 거라도?”
“아닙니다. 한국 항공에 재직하셨던 파일럿이었고 20여 년 전에 파직되신 분입니다.”
의아한 사장의 시선이 태주를 탐색하듯 살폈다.
“파직? 웬만한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고서야 쓸 만한 인력 찾기가 어려운 항공사에서 기장을 파직하는 일은 없을 텐데요. 있어 보자. 내 기억이 맞는다면……. 한국 항공 이 무슨 기장이던가?”
“맞아요. 현재 사측에서 복권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계시다니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아주 우수한 인재였고요.”
“그분 장례를 공항장으로 다시 치르고 싶다.”
“네, 본인이 원했던 곳에서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저한테 직접 요구하실 정도면 꽤 큰 규모를 생각하시는 것 같고요.”
“아닙니다. 공항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제가 아는데요. 본인 때문에 다른 일정 지연되는 건 그분도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계류장 일각만 잠시 내어 주시면 됩니다.”
“정확히 언제쯤 말입니까?”
“제가 절차 생략하고 급하게 접견 청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기장님 기일이 곧이라서요.”
다시 명예를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고는 하나, 대상은 이미 한번 항공사 차원에서 자격을 박탈한 기장이었다. 복권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선 공항 측에서 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마라톤협상으로 쓸데없이 허비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태주가 직접 움직이고자 한 것이다.
잠시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지 사장이 침묵했다. 그러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한국 항공 회장 대리인으로 오시길 백번 잘하셨습니다. 일개 기장으로 오셨으면 거절당하실 뻔했거든요. 이 문젠 복권된 후에 다시 논의하자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태주는 잘 알고 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수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그들은 악수를 청하기 위해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 * *
오늘따라 공기가 유독 찼다. 살을 엘 것 같은 강추위였다. 혹한기를 실감할 수 있을 만한 날씨인 데다, 심지어 새벽녘이라 칼바람이 불었다. 이런 때에 나와서 시간 낭비를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 못 했는데, 세상은 생각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 사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본가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온 태주는 집 근방의 편의점 앞에서 차를 세웠다. 24시간 운영이라더니 인적이 드문 골목이라 그런지 편의점의 불이 꺼져 있었다. 그 어두컴컴한 가게 앞에 어떤 익숙한 인영이 버티고 앉아 강아지에게 손을 내밀어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차영?’
의아해진 태주가 창문을 스윽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역시나 차영이 맞았다.
파라솔 옆쪽에서 차가 멈췄다는 것도 느꼈을 테고, 누군가 창을 내리고 한참이나 본인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을 텐데 차영은 강아지와 놀아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네 옆에 사람 있다.”
기다리다 못한 태주가 불쑥 그러자 차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그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그러나 여전히 태주를 쳐다봐 주진 않았다.
“눈길 한 번 받기 진짜 어렵다. 개새끼한테는 헤프게 주면서.”
“한 기장도 애교 부려 봐. 얘 얼마나 귀여운 줄 알아?”
“날 키우라니까?”
“돈 너무 많이 들어서 부담돼. 때마다 옷 사 줘야지. 시계 사 줘야지. 차 사 줘야지. 비싼 거 아니면 입지도 타지도 먹지도 않잖아. 쓸데없이 까다로워서.”
“그럼 역으로 내가 널 키우는 방법도 있어.”
“이제 크는 건 각자 크자.”
얼핏 듣기엔 거절을 담고 있는 냉담한 대답이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다정했다.
“커서 만나.”
나지막한 말을 덧붙인 차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태주를 봐 주는 차영의 눈에도 음성만큼 애정이 듬뿍 깃들어 있었다. 두 팔을 창틀에 걸치고 그 위에 제 턱을 괸 채로 차영을 보던 태주가, 눈이 마주치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추운데 뭐 하냐, 여기서. 편의점 불 꺼져 있어서 골목도 어둡고, 무엇보다 지금 새벽 2시가 넘었어.”
“한 기장 기다렸지.”
태주가 오늘 본가에 들렀던 건 문 회장의 생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에 관한 문제 때문이었다. 유골함은 명부전에 두는 게 맞는 일 같아서 가족들의 옆에 영정을 놓고 함을 안치했다. 이 일로 본가에 갔다는 것을 아는 차영이 못내 걱정이 되어 잠도 이루지 못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앞으로는 그가 모든 중차대한 일을 혼자 결정해야만 하고, 또 조언을 구할 만한 어떤 대상도 없게 된 셈이라 신경이 쓰였다. 물론 여태까지도 태주는 자유 의지를 갖고 살아왔지만 있는데 활용하지 않는 것과 없어서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잘 다녀온 거야?”
“응. 명부전도 좀 둘러보고.”
“나 있었던 데?”
“그렇게 되나? 나 거기 다녀와서 찝찝해?”
“아냐, 그날 이상하게 한 기장 어머니가 나 지켜 주는 것 같더라. 별로 힘은 못 쓰셨지만.”
“지난번에 어머니 아버지 혼인 신고서를 외할머니가 주셨어. 간 김에 그걸 거기에 두고 왔어. 처음엔 내가 갖는 게 맞는 것 같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내가 갖고 있을 물건이 아닌 것 같더라고.”
차영도 연락이 안 된 그의 집에 무턱대고 찾아갔다가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던 것이다. 한 세대를 지난 태주가 아니라, 그걸 작성한 당사자들의 몫이라는 듯 들렸다.
“그러면 이제 한 기장 아버지도 나 지켜 주겠네.”
“앞으로 그 명부전에 네가 갈 일은 없어.”
“거기 문 회장 유골함 뒀구나? 어디다가 놓을지 고민하는 것 같더니.”
“…….”
“안 실장은 뭐래?”
어느새 문 회장이 사망한 일의 전말은 극소수만 알고 있는 아주 은밀한 사건이 되어 묻혔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 간의 비밀이 켜켜이 쌓이면서 유대도 깊어져 갔다. 제 가족의 행복을 앗아 간 사람에게 같잖은 연민을 베풀려는 게 아니다. 그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단지 차영은 사건의 목격자가 자신뿐이 아니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마음에 걸렸다.
“내 처분에 맡기겠대. 그동안 본인은 본인 일을 하겠다고.”
어렴풋하게 듣기로 당시 자리를 지켰던 윤 원장에게 안 실장이 입막음을 위한 어떤 명령을 내렸다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일이 두려워 캐묻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태주는 이런 험한 일의 쓸모를 위해 굳이 제 곁에 안 실장을 남겨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그만한 적임자는 없었다. 이제야 태주가 안 실장의 처분을 입에 담는 것으로 미루어 교통정리가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그러다가 수틀려서 한 기장 들이받는 거 아니야? 무서운 사람 같은데.”
“그 사람은 예전에 우리 어머니를 좋아했나 봐. 외할아버지랑은 같은 슬픔을 공유했다고 생각했겠지. 진짜로 개가 아닌 이상 모든 충성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거든.”
“안 실장이 그래?”
“직접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짐작이 돼.”
“그렇다고 그게 한 기장한테까지 대물림이 된다는 확신이 어디 있어. 그러다 갑자기 마음이 바뀔 수도 있어. 윤 원장처럼.”
“그럴지도 모르지.”
“한 기장.”
“아무것도 확신 못 해. 그 사람이 나한테까지 충성을 바칠 필요도 없고. 나도 그런 인간 충성은 안 달가워. 안 실장과 내 관계는 그것보다는 이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거야.”
그의 말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확신할 수 없다면서 이렇게 태연한 게 이해가 안 됐다. 여전히 걱정도 컸다.
“그 사람은 문 회장 밑에서 30년 넘게 일했어. 굳이 나랑 싸우겠다고 나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러시안룰렛 같은 거라고 했잖아.”
“둘 중 누가 총알을 맞게 될지 모른다는 거야?”
“아니, 우리가 러시안룰렛을 하게 될 거란 의미야, 그거 원래 교도관들이 죄수들한테 강제로 시켜서 내기한 거에서 유래됐다는 거 알아?”
그러다가 차영을 차에 태우기보단 자신이 직접 내리기로 결정했는지, 태주가 땅을 내디디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타악, 차량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태주의 음성이 보다 가까워졌다.
“안 실장은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야. 아마 내 문젠 덮으려고 할 거야. 안 덮으면 그 사람이 한 수많은 악행들을 나도 터트릴 테니까. 같이 죽느니 같이 사는 편이 낫지. 무엇보다 그 사람은 나한테 본인은 접근할 수 없는 문 회장 개인 금고 카드 키가 있는 걸 잘 알고 있거든.”
“금고?”
“응, 금고. 치부책 같은 거 막 있을 것 같지 않아? 실제론 속 빈 강정이었지만.”
“…….”
“뭐, 안 실장을 그냥 두는 게 정 네 마음에 걸리면 확…….”
“한태주, 누가 들어.”
펄쩍 뛴 차영이 그를 아프게 때렸다. 태주는 제 몸을 내려친 차영이 손등에 입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