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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20화 (120/144)

120화

“하……. 어떻게 씻지. 망했어.”

온몸이 젖은 차영이 허탈해하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씻겨 줄게.”

한참을 차영의 아래에서 버텨 주던 태주가 살짝 고개를 떼어 냈다. 그러고는 젖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핥았다. 꼭 눈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정확하게 차영의 뺨이 축축해진 지점을 아는 듯했다.

차분하게 살결을 핥던 그가, 다시금 허리를 움찔했다. 태주의 것은 여전히 차영의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껏 예민해진 내부는 그가 실시간으로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차영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성기가 꿈틀거리면서 크기를 키우는 게 느껴졌다.

“이거 뭔데?”

“독수공방의 결과물.”

“찬불가 불러.”

“어떻게 부르는지 까먹었어.”

“안 돼. 빨리 빼. 두 번 했다가 나 가슴뼈 다 아작 나.”

“이번엔 진짜 거북이처럼 할게. 느긋하게.”

“나 이렇게 아픈데?”

“하지만 좋았잖아.”

“좋은 만큼 아팠어. 그리고 다시 사귀자고 했지, 나 아직 완전히 한태주 씨 용서해 준 건 아냐. 나 속인 건 아직 해결 못 했잖아. 진짜 양심 어디 갔어?”

“몰라. 한 번만 더.”

유독 간절한 목소리였다.

한 번만 더.

또한 익숙한 조름이기도 했다. 마치 몇 개월 전으로 둘 사이를 되돌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 하자 있는 성격은 안 변하는구나.”

차영은 그리움이 해소된 동시에 좀 얄미운 기분이 들었다.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 * *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서로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한 그날 밤 이후로 차영은 태주의 두 번째 눈이 되어 주고 있었다.

문 회장이 사망한 일로 태주가 해야 할 일이 꽤 많아진 것 같았다. 사전에 준비를 체계적으로 해 왔다고는 하나 하루아침에 수장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 버린 마당이니 주주들의 불안을 해소해 줄 필요가 있었다. 덕분에 문 회장의 유일한 상속자인 그가 이사 회의에 직권으로 상정해야 하는 안건들이 많아진 듯했다.

그가 안 실장을 통해 제일 먼저 실행한 것은 긴급 이사 회의를 열어서 이사진들에게 계파, 정파 아무것도 상관하지 말고 쓸 만한 전문 경영인들의 이름을 올리라고 명하는 일이었다. 인재들을 추천받은 뒤 그들 중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겠다는 의사를 직접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그리고 회사 업무에 관한 이런 중요한 사안들을 지시할 때 태주가 차영을 곁에 두고 직접 상황을 지켜보게 만들었다. 정확한 이유는 그가 설명하지 않아서 차영도 알지 못했다.

안 실장을 감시하고 압박하려는 차원일 수도 있었고, 단순히 차영의 옆에 있고 싶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본가 저택 말입니다만.”

“그건 그냥 두세요.”

“빈집 상태로 말입니까?”

“네. 어머니 명부전도 거기 있고…….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일단은요.”

“알겠습니다.”

안 실장이 명령을 받들겠다는 양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들의 대화 양상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차영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자신의 기억 속에 묻혀 있다가 다 자란 뒤 공포가 되었던 안 실장이, 태주가 지닌 권력 앞에 너무나 무력해 보였다.

아무리 상부의 지시였다고 한들 안 실장이야말로 그들 아버지들의 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태주는 왜 그를 계속 옆에 두는지 알 길이 없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끝에 지나가듯 물었더니 그가 내뱉은 말은 차영의 상식으론 너무 뜬금없게 느껴져서 해석하기가 좀 어려웠다.

〈이건 러시안룰렛이야. 누가 총알을 먼저 맞느냐지.〉

그 말의 진의가 파악이 안 돼 그저 그에게 뜻이 있겠거니 할 뿐이었다. 어쨌든 안 실장을 향한 미움만큼은 자신에게 절대 지지 않을 정도일 테니 말이다.

차영이 생각이 많아진 사이, 때마침 의사들이 노크 후 병실에 입성했다. 차영은 시계부터 확인했다. 태주의 눈을 가린 붕대를 걷어 낼 시간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그의 침대 주변을 반원형으로 에워쌌다. 깨끗하게 손을 소독한 가장 지척의 한 의사가 태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차영은 한 걸음 떨어져서 그 모습을 좀 불편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기장님, 지금부터 붕대 풀겠습니다. 불편한 부분 있으면 바로 말씀하시고요.”

서서히 풀려 나가는 의료용 천은 생각보다 길이가 길었다. 마침내 태주의 눈 위에 살짝 얹혀 있는 얇은 거즈가 드러났다. 그 위에 새빨간 색으로 핏물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까지 모두 걷어 낸 의사가 장갑을 벗고, 허리를 숙여 태주의 눈 주변을 들여다봤다.

“양쪽 눈 서서히 떠 보십시오.”

의사는 그의 앞에서 얇은 막대기를 들어 보였다.

“이거 보이십니까? 보이시면 이제부터 초점을 잡아 볼게요.”

“…….”

“한 기장님?”

대답이 없는 태주는 무표정했다. 의중을 선뜻 알아채기 쉽지 않았다. 의사도 조금 당황한 듯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차영은 누구보다 피가 말랐다.

“한 기장, 뭐라고 말 좀 해 봐.”

“도련님.”

가만히 눈을 깜빡여 보는 태주에게서는 여전히 표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양쪽 눈 모두 눈동자가 공허했다. 시선 처리가 다소 불분명한 듯도 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눈만 감았다 떴다 하던 그는 고개를 돌려 차영이 선 쪽으로 눈길을 고정했다.

그는 집중해서 차영을 쳐다보았다. 다들 그 상태로 정지해서 태주의 한 마디만 기다리고 있는 채였다. 미간을 찌푸리던 태주가 이윽고 안도한 듯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처음엔 윤곽만 보였다가, 이제 잘 보입니다.”

꽤나 덤덤한 음성이었다. 그의 응답을 듣고 의사가 눈동자를 보다 면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차영은 먼발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며 계속해서 마음 졸였다.

처음 사람의 윤곽만 보였을 때의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헤아려 보게 됐다.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침묵을 하면서 제 쪽을 좇았던 그가 안타까웠다. 정말 당황하고 피가 말랐던 것은 역시 본인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

깊은숨을 내쉰 차영이 어렵사리 태주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차영이 그에게로 홀린 듯이 접근하려 하다가, 아직 사람이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 차영을, 고개를 살짝 기울인 태주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의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주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그러나 태주의 시선은 차영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최소한 여태까지 눈이 가려져 있어서 못 봤던 양만큼은 고스란히 채워 놓고 싶다는 결연한 의지처럼 보였다. 차영은 몰래 픽 웃음을 터트렸다.

“네, 경과 아주 좋습니다. 이제 안약과 연고 정도만 처방받으셔도 됩니다. 안약은 두 가지로 처방이 나갈 텐데 2주간 하루에 세 번씩 점안하셔야 하고요.”

붕대를 풀어 주었던 의사가 안심한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으며 인사했다. 안 실장이 그와 함께 앞서 나가고, 나머지 의사들이 그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사람들이 모두 병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차영은 딸칵, 하고 중문과 출입문이 모두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태주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러고는 기특하다는 듯이 온 얼굴에 입을 맞췄다. 마지막 종착지는 언제나처럼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그동안 고생했어. 앞 안 보여서 불편했지.”

“이차영 너 이런 꼴이구나. 손으로 만질 때랑 되게 다른데?”

이 말에 당황한 차영이 제 몸 위를 슬쩍 내려다봤다. 얇은 환자복과 그 안에 설핏 보이는 붕대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게 뭐. 아프면 입는 건데. 한 기장도 지금이야 멀끔하지 어제까지 이거 입고 있었거든?”

“진짜 너랑 내가 이 꼴로 이 침대에서 매일 했다는 거지?”

“급하면 아무거나 입고 하는 거지.”

“아니지. 섹스는 웬만한 건 벗고 하는 운동이지. 너 환자복 차림 생각보다 되게 귀엽다. 의사와 환자 놀이 같은 거 어때? 관심 있어?”

“전혀 없어. 한 기장 변태라서 딱딱한 불 주사 같은 거나 놓겠지.”

태주의 멀쩡한 옆구리를 있는 힘껏 쳐 준 차영이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시야가 확보된 태주에게 붙들리는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확, 허리춤을 붙잡힌 차영의 몸이 뒤로 무너졌다. 전신이 태주에게로 고스란히 쓰러졌다. 그는 차영을 꽉 끌어안은 채로 목울대에 꼼꼼하게 키스했다.

오래도록 공들여 입맞춤을 하던 그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앞이 안 보일까 봐 무섭더라. 그런데 시야가 환해지는 순간에 네가 보였어. 왜 그런 거 있지. 엄청 곤란한 상황에서 어떤 신적인 존재가 빛을 품고 내 앞에 나타나는 것 같은 착시.”

태주의 절박한 시선이 닿았던 바로 그 자리에 차영이 서 있었다. 그때의 감동을 그는 자신이 아는 어떤 말로도 설명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무슨 존재?”

“신적인 존재. 이차영 하늘에서 내려온 성스러운 천사 아니야?”

“살다 살다 별소릴 다 들어 본다. 그런 말 할 때 안 창피해? 낯 뜨겁지도 않아?”

“응, 전혀.”

“와…….”

차영이 허탈하게 의미 없는 대꾸를 하자, 태주가 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그의 어깻죽지에 비벼 댔다.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 여태 무서운 거 별로 없었는데. 널 만나고 너무 많아졌다.”

“아주 잘 크고 있는 거야.”

“나한테 이것저것 다 돼 주겠다고 했던 약속 지켜. 무르기 없어.”

별말씀을 다 하신다는 양 픽 웃음을 터트린 차영은 뒤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제 고개를 살짝 틀어 태주에게 뜨겁게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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