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여전히 사위는 어두웠다. 병실에 있는 두 사람의 위를 주광색 불빛과 창문 끝까지 내려놓은 블라인드 틈새로 들어오는 밤의 불빛만이 비춰 주고 있었다.
눈 이외에 다른 곳은 멀쩡한 태주와 달리 차영은 눈만 멀쩡하고 다른 곳 여기저기가 넝마주이인 상태였다. 오랜 키스 후에 차영은 태주에게서 제 몸을 떼어 냈다. 자신을 한번, 침대 위의 태주를 한번 쳐다보고는 허탈한 날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태주가 팔을 길게 뻗어 주위를 더듬었다. 한 번에 자신의 몸을 덥석 붙잡지 못하고 허공을 배회하는 모습을 응시하다가, 보다 못한 차영이 제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순간 살갗이 분명하게 스쳤다. 이 찰나를 놓치지 않은 태주가 차영의 손을 힘주어 꽉 쥐어 보더니, 부드러운 손바닥을 쓸었다.
“손은 붕대가 안 만져져. 여긴 괜찮은 거야?”
“응. 자잘한 타박상만 입었어. 다른 데가 큰일이지.”
다시 놓치지 않겠다는 양 꽉, 단단하게 쥐는 손길이 애틋했다. 겹쳐 쥔 두 사람의 손을 내려다보는 차영의 눈동자가 수면 위에 비쳐 어룽거리는 불빛처럼 흔들렸다.
내내 어설픈 자세로 서서 태주에게 닿을락 말락 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차영은 결국 그의 침대 위에 걸터앉아 정면으로 마주 봤다.
끼익.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태주가 차영의 손을 더욱 힘주어 붙들었다.
“우리 납골당에서 일…… 혹시 기억나?”
이건 왠지 그의 눈이 가려져 자신을 볼 수 없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말 같았다. 그리고 태주는 차영의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판단하고 있는 중인 모양인지 대꾸가 없었다.
“실은 나 한 기장 떠올랐어. 잘 가. 또 보자. 그거 그쪽 맞지?”
“그걸 어떻게, 여태까지 기억 못 했잖아.”
“꿈을 꿨어. 그동안 왜 기억 못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결국 또 만났네.”
“…….”
“생각해 보면 진짜 얽히고설켜 있다. 우리가 엮이긴 엮여 있나 봐. 악연 반, 인연 반.”
이 말을 내뱉으며, 차영은 어느 땐가 태주에게 자신이 퍼부었던 모진 언어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사는 세계가 너무 달라 평생 마주칠 일 없었을 것이라 쏘아붙였던 그 말은 결국 초장부터 틀렸던 셈이다. 만일 두 사람이 태주가 만든 우연에 의해 서로를 알게 되고, 또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왠지 몇 번이고 그 납골당에서와 같은 단발적인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옷깃만 스쳐도 그 기저에는 수많은 인연의 끈들이 도사리고 있다는데, 이 정도의 공유지를 형성하고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평범한 연은 아니었으리라.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왜 그해 겨울 이후에 내 앞에 안 나타났어? 또 보자고 말했으면서. 여러 번 마주쳤으면 훨씬 더 빨리 떠올렸을 거야.”
그 납골당에서 마주쳤을 때, 태주도 자신처럼 돌아가신 아버지를 1년 중 하루 만나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걸 잊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너무 어렸고 찰나간 스쳐 지나갔던 나머지 여태까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우고 살았다. 어쩌면 제 삶이 다른 걱정과 고민거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태주가 했던 말대로 그가 처한 입장은 자신과 같았다. 두 사람은 같은 형태의 슬픔을 공유하는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게다가 사건이 벌어질 당시 태주는 어찌할 바 없었을 어린아이였고, 혈육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그가 혼자 물고 있었다는 게 자꾸 손톱 밑 거스러미처럼 차영을 괴롭혔다. 심지어 그 악연을 끝내는 것마저 본인이 해야만 했다. 어떤 의미로는 문 회장과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인 자신보다 더 가혹한 일들을 겪은 것이다.
“자꾸 마주치는 게 좋은 생각 같지 않아서 나만 몰래 봤어. 매년 한 해 초쯤 널 보면, 묘하게 안심이 되더라. 아, 나랑 똑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저기에…… 저렇게 의연하게 이겨 내고 있구나.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잘 자라고 있구나. 한 해를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어.”
“한 기장은 날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었네. 몹시 양심이 없긴 하지만. 그래서 한 해 한 해 잘 버텼어?”
“덕분에. 네가 날 구했지.”
내가 널 구했다고?
그의 말을 곱씹어 본 차영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몸을 들썩이자 태주가 그의 환자복 상의를 꽉 붙잡았다.
“이렇게 또 그냥 가게?”
흉부 압박으로 숨쉬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이었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태주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그가 다소 날 선 말투로 내뱉고는 차영과 맞닿은 제 손아귀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어딜 가.”
“또 나 버리고.”
“나 한 기장 걱정돼서 올라온 거야. 네가 내쫓지만 않으면 난 여기에서 안 나가.”
대답과 함께 그의 붕대 아래 드러난 뺨을 보듬었다. 부드러웠다. 그러다 진짜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목적이 뒤늦게 생각났다. 마음이 급해졌다.
“잠깐만. 눈은? 한 기장 눈 어떻게 된 건지 알려 줘. 수술했다면서. 비행에는 무리 없는 거야?”
기절해 있다가 눈을 뜬 뒤라야 알게 된 사실인데 자신이 생각보다 오래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날짜를 보니 사고 이후 꽤나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뉴스에서 본 바로는 문 회장의 장례를 조촐하게 5일간의 회사장으로 치른 상태였다. 그렇다면 태주가 수술을 한 시기도 그의 죽음과 궤를 같이할 터였다.
차영은 대답을 구하고자 꺼낸 말이었으나, 태주는 잠시 생각할 것이 있는 듯 침묵했다. 초조해진 그가 태주를 나지막하게 부르는 것으로 답을 재촉했다.
“한 기장.”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눈 괜찮아. 눈자위 굴절 상태에 문제 있는 게 아니라 화약 파편이 안구 바깥쪽에 박힌 거였어. 천만다행으로. 너처럼 운이 좋았어. 눈에 직접 손댄 건 거의 없어. 당연히 조종간 잡는 데도 경과만 좋으면 큰 문제 없고.”
“그 말 진짜야? 그럼 눈 위에 이건 다 뭐야.”
“눈에 붕대는 시력 보호 차원이야. 혹시나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정밀 신검에서 실격이니까.”
진심으로 안도한 차영이 여전히 태주에게 붙들려 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놀랐잖아. 다행이야, 진심으로.”
그러고는 긴장이 풀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악력이 약해져 힘을 푸는데, 이게 또다시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시도라고 받아들였던지 태주가 무척 억세게 차영의 손목을 쥐어 오는 것이었다.
“한 기장?”
“별게 아니니까 이제 네 병실로 돌아가는 거야?”
붙잡힌 제 손목을 무심코 내려다본 차영이 반대편 손으로 그의 손등을 겹치고 어루만졌다.
“안 간다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떨지 마.”
파르르 떨리는 감촉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마음이 스산했다. 그의 손등을 쓸어 주고 있는데도 그가 도무지 진정하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태주는 오로지 본인의 눈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 차영이 여길 찾아왔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걸 느꼈지만 차영은 무슨 말을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전해야 그가 제 마음을 십분 이해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제게 일어난 이 모든 사건들은 그의 말대로 애초에 태주가 자신을 욕심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심지어 진실을 털어놓는 대신 모두 감추고 자신에게 접근했다. 지엽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태주는 차영에게 무척 나쁜 사람이 맞았다.
다만 차영은 괴롭게도 그의 내부에 침잠된 깊은 슬픔을 전부 다 이해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자신만큼 그걸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똑같은 걸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넓은 의미에선 오직 그만이 자신의 운명 공동체였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태주가 문 회장에게 총구를 겨누는 순간, 두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은 주적이 공통된 대상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같이 살고 싶고, 또 혼자 죽고 싶지 않았다는 말과 고맙다는 인사를 고스란히 돌려준 건 제 딴엔 이 마음 모두를 전부 꾹꾹 눌러 담은 고백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거부했던 기억에 매몰돼 있는 태주는 보다 분명하게 말해야 납득할 듯했다.
소리 없이 깊은숨을 내쉰 차영이 그를 완전히 밀어냈다. 상대는 이를 명백한 거부의 손길이라고 느꼈던 것 같았다. 헤드에 등을 기대 앉아 있던 태주가 몸을 바르게 일으켜 세우고는 황급히 차영을 만지려고 팔을 뻗었다.
“이차영, 기다려.”
차영은 야멸치게 태주의 손등 위를 탁, 쳤다. 그러고는 여기까지 어렵사리 끌고 온 링거 거치대를 협탁 앞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