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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15화 (115/144)

115화

힘겹게 호흡을 고른 차영은 입을 뻐끔거렸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죄다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찢어질 듯 건조해진 입술을 어떻게든 힘껏 벌려서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고 싶은 충동이 함께여서 괴로웠다. 제 입의 통증은 감당할 수 있었으나, 혹시라도 곤히 잠든 그가 깰까 두려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한태주…….’

그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였다.

“안 실장?”

차영이 멀리 있는 그에게 손을 어설프게 뻗는 순간, 태주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주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빛이 필요가 없어서 겨우 조명 정도만 켜 놓은 게 아닐까 싶었다. 문 쪽을 향해 내뱉는 말투가 신경질적이었다.

“너 누구야.”

시각이 제한되자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 듯, 그는 인기척을 듣고 무척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었다. 안 실장이 아닌 것 같았던지 바로 경계 태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차영의 온몸이 떨려 왔다. 호흡도 가빠졌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상한 목소리를 내게 될 것 같아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태주를 향해 최대한 빠르게 다가갔다. 제 몸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으나 겨우 움직였다.

거의 기듯이 태주에게 다가간 차영이 그의 수척해진 모습을 잠시간 눈에 담았다. 허공에서 윤곽을 그리듯 그의 머리끝부터 상체까지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어울리지 않는 병원복 차림과 가려진 눈 아래로 보이는 지친 안색이 자신이 아는 한태주 같지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근사했지만 늘 자신만만하던 반짝임이 조금 사그라졌다. 그건 자신 때문이었다.

“너 누구냐니까. 의사? 간호사?”

관료적인 말투로 내뱉은 그가 인터폰으로 내선을 연결하려 듯 손을 뻗었다. 차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움찔한 태주가 손의 방향을 바꿔 차영의 어깻죽지를 더듬었다. 붕대로 일부분 감싸인 목울대와 턱선, 그리고 보드라운 살결로 감싸인 뺨까지 천천히 산을 타듯 오르더니 서서히 제 어깨의 긴장을 푸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그러는 동안 차영은 얌전히 있었다.

“이차영?”

그는 제 입으로 차영의 이름을 불러 놓고 그제야 확신이 생겼는지 낮은 숨을 몰아쉬었다.

덩달아 무거운 숨을 내뱉은 차영이 그의 눈 위를 두텁게 감싸고 있는 붕대를 무척 조심스럽고 신중한 손길로 매만졌다. 태주는 살짝 동요하긴 했지만 차영이 그랬던 것처럼 말리지는 않았다.

“한 기장 눈이…….”

한 음절씩 내뱉을 때마다 차영의 음성이 급격하게 떨렸다.

“너 왜 여기에 있어? 어떻게 올라온 거야.”

대꾸로 침착한 태주의 음성이 이어지자, 차영은 울컥하고 말았다.

“제발 떨어져 달랄 땐 절대 안 헤어진다고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나 안 본다 그랬는데?”

말을 할수록 미칠 것 같았다.

이런 비극적인 결말은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다.

“그걸 원하는 거 아니었어? 더는 네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았어.”

“왜, 왜 그렇게 생각해?”

“네 말대로 네 앞에 내가 나타나서 잘 살고 있던 네 삶을 망쳤잖아. 너를 속이고, 등신같이 원수 외손자랑 눈 맞아서 자는 머저리로 만들었으니까.”

화를 내는 투는 아니었다. 원망하는 것도 아닌 듯싶었다. 그게 맞지 않느냐고, 여상한 어조로 확인 사살을 하는 듯했다.

“맞아. 네가 다 망쳤어. 이제 어떡할 거야?”

“미안해. 일이 이렇게 되리라곤 나도 예상 못 했어. 내가 너무 욕심…….”

이어지는 태주의 음성은 덤덤했다. 그게 너무 사무쳐서 차영은 대답 대신 한 번 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덩달아 그의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아냐 틀렸어.

그가 틀렸다.

제게 최대치로 솔직하지 않아서 크게 실망했던 적이 있었고, 왜 하필 그런 사람의 외손자인지를 원망도 하게 됐지만 그가 싫어졌던 적은 없었다. 그게 자신이 지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날 일 꿈 아니지? 나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어. 진짜일까 봐.”

“…….”

“왜 그랬어? 그쪽 외할아버지잖아. 난 남이고.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데.”

“안 그랬으면 네가 죽었을 거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서, 나한텐 달리 선택지가 없었어.”

그 말을 듣자 이미 지난 일인데도 두려워진 차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때의 자신은 태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 그대로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일생에 그런 치욕스럽고 무서운 극한의 경험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래도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나 때문이 아니야?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차영이 침묵하는 사이 그때까지 늘어뜨리고 있던 태주의 두 팔이 천천히 올라왔다. 차영을 마주 안고 싶은 것 같았다. 다만 그렇게 해도 되는지를 가늠하듯 병원복 위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모양새가 무척 안 어울렸다. 결국 차영이 해도 괜찮다는 듯 더욱 절박하게 태주를 끌어안았을 때라야 태주도 야윈 몸을 감싸 안았다. 서로의 심장이 생생하게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가 무섭진 않아?”

“무서워.”

그런데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가 훨씬 더 무서웠겠지,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안해. 그런 거 보게 해서. 이게 영화도 아닌데……. 많이 놀랐을 거 알아.”

묘한 기색을 담은 차영의 눈동자가 태주 뒤편의 벽면을 길게 훑었다. 한태주는 사과에 인색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입에 담는 그가 생경했다.

“그 자동 권총, 오래전에 외할아버지가 내 머리에 겨눴던 거야. 아주 어릴 때.”

차영은 움찔했다. 그날 그가 문 회장에게 했던 말 중 그런 내용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이미 죽고 난 뒤긴 하지만 생전에 한 짓들이 하나하나 너무 끔찍해서 사람처럼 안 느껴졌다. 그는 서서히 태주를 떼어 내 마주 보며 물었다.

“왜? 어린애한테 굳이.”

“날 두렵게 만들고 싶으셨던 것 같아. 그래야 말을 들을 테니까. 그리고 난 그때 무서워서 살려 달라고 빌었어. 여태까지 그 기억이 늘 창피했지.”

“어린애였잖아. 난 어른인데도 살려 달라고 빌었어. 우린 아무 잘못 없어. 물론 한 기장이 날 1년이나 속인 건 잘못한 거 맞지만.”

침묵하던 태주가 조바심 가득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태주로선 아마 줄곧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걸 알아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도 맞았고, 또 일부는 진심인 것도 맞았다. 어느 쪽도 정답이었던 터라 차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그럼 네 앞에 안 나타날 거야. 넌 평범하게 살고, 난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거 안 배우고. 끔찍한 장면도 네가 볼 일 없겠지. 무엇보다 이런 꼴이 될 일도…….”

그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경청하며 감정들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던 차영이 불현듯 온몸을 굳히고 멈칫했다. 그날의 일을 조금씩 떠올리니 전신이 덜덜 떨렸다. 현실감이 없다가 뒤늦게 죽음을 목전에 뒀던 얼마 전의 공포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시각 외의 다른 감각들이 여느 때에 비해 훨씬 예민해지기 마련이었다. 떨어져 있는 차영의 파동을 기민하게 알아챈 태주가 말을 중간에 끊어 내더니 그를 다시 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차분한 손길로 토닥였다. 달래 주면 달래 줄수록 차영이 더욱 숨 가쁘게 떨어 대는 게 안타까웠으나,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참이나 호흡을 고르던 차영이 태주의 귀를 어루만졌다. 이윽고 뺨을 쓸어내리고, 천천히 그의 눈이 가려진 얼굴을 제 두 손으로 붙들었다.

“나 그날, 한 기장 계속 기다렸어. 같이 살고 싶어. 혼자 죽기 싫어. 그런 생각 하면서. 그래서 계속 원망도 했어. 나 살리고 너도 살겠다더니 왜 내 눈앞에 안 나타나나…….”

잠시 내려앉은 침묵을 가르고 차영이 불쑥 말했다. 태주가 움찔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그는 대답이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당황한 것 같았다. 어쩌면 같이 살고 싶었다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상대를 일방적으로 볼 수 있다는 건 무척 묘한 기분이었다. 가만히 태주의 표정을 들여다보던 차영은, 고개를 기울여 태주에게 정성껏 입 맞췄다.

가볍게 두 개의 입술이 맞닿았다. 예민해진 서로의 혀끝이 부드럽게 엉켰다가, 금세 조심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태주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이차영, 너 이거…….”

의아한 기색의 태주가 뭔가 물으려고 했으나, 차영은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

이윽고 차영이 조심스럽게 태주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읏…….”

두 개의 뜨거운 혀가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얽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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