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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14화 (114/144)

114화

“딱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한태주 씨 눈은 괜찮은 거예요?”

남자는 이 물음엔 대꾸가 없었다. 함부로 답변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은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일 터다. 알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인 차영은 순순히 제 병실로 향했다.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입구 바로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그들을 비롯해서 경호원들이 얼마나 되는지 눈대중으로 살펴본 차영은 별 소득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딸칵. 입구와 중문이 연달아 닫히고 나니 병실 안에 완벽한 혼자였다.

“하…….”

괴로운 숨을 토해 낸 차영은 어렵사리 침대로 돌아가 푹신한 위에 걸터앉았다. 온몸이 삐걱거렸다.

그가 자신을 만나 주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는, 얼추 이해됐다.

그도 이제 자신이 미울 것이다. 도저히 눈 속의 연민과 입 안의 사랑을 감출 수가 없어 모습을 내보였는데, 여태까지 그의 고민이나 갈등 따위는 조금도 봐 주려고 하지 않고 원망만 해 댔으니 말이다. 특히나 끝내 태주로 하여금 직접 제 외할아버지를 처단하게 만든 셈이 됐으니, 사람이라면 차영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도 할 말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태주에게 화를 내고 결별을 선언하는 것 외에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었을까.

대화가 필요했다. 좀 더 그와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니, 이런 건 사실 모두 핑계다. 실은 지금 그가 어떤 상태일지가 가장 걱정이 됐다.

시력이 좋아서 조종사가 됐다고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차영은 태주가 제 직업에 얼마나 큰 애정과 열정을 지니고 임하고 있는지를 잘 알았다. 아마 본인의 아버지가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죽었는지를 잘 알고 있기에, 사람들이 가장 안전한 상황에서 비행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으로 자신과 죽은 자의 넋 모두를 위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했다.

“한태주…….”

차영은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이런 자신이 한심했지만 마음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막을 방법이 또렷하게 안 보였다.

* * *

이틀 동안 문밖의 동태를 관찰하면서 차영이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가 있었다. 경호원들이 대기하는 시간도, 교대하는 시간도 정확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하루의 자정이 되면 10분여간 복도의 모든 사람이 우르르 물러나는 조용한 시간대가 생겼다. 아마 이 층의 승강기나 비상계단 출입을 통제하고 아래층쯤에서 교대를 하는 듯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하루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점검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뒤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나 밤새 복도를 다시 지켰다. 사람만 바뀌고 하는 일은 거의 같았다.

11시 45분쯤. 밖으로 얼굴을 슬쩍 내민 차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의 경호원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자, 그가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차영을 응시했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저 새벽 공기를 좀 쐬고 싶은데 제가 혼자 나가도 되나요?”

“안 됩니다.”

“누가 안 된다고 했는데요? 의사는 자주 움직이는 편이 회복에 더 좋다던데. 혹시 그것도 한 기장 명령이에요?”

“혼자 움직이시면 안 되는 겁니다. 산책은 당연히 하셔도 됩니다.”

“그러면 도와줄 사람 따로 부르면 되는 건가요? 지난번에 산책하고 싶으면 요양사 불러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하면 되죠?”

“대략 몇 시쯤…….”

“지금요.”

병동의 사람을 수배해 이쪽으로 오게 한다면 얼추 12시쯤 될 듯싶었다.

“이 시간엔 VIP 전담 간호사가 항시 대기하고 있습니다. 내선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침대 위의 인터폰 말이죠. 알겠습니다.”

다시 병실로 돌아온 차영은 조심스레 내선을 넣어 밤 산책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상냥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곧 가겠다고 대꾸했다.

이윽고 이 방의 나이팅게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영은 그녀가 들어오는 사이 현재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11시 55분. 자정이 되기 5분 전이었다. 그는 비스듬히 열린 문 틈으로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역시나, 잠시 뒤에 교대 절차를 밟으려는 계산인지 경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영의 몸 위에 덮어 줄 만한 코트를 챙기던 간호사가 휠체어를 끌고 그에게 다가왔다.

“타시죠. 날이 추워서 오래는 어렵고 10분 내지 15분 정도 산책로 돌아보시면 어떨까 싶은데요.”

“저기, 선생님. VIP 전담이라고 하셨죠.”

“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단 한 가지인데 그게 꽤 들어주기 난감한 부탁이어서 문제다.

“복장 검사 같은 거랑 몸수색 다 해야 위층에 올라갈 수 있는 거예요?”

뜬금없는 질문을 듣고 그녀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차영에게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공개해도 될지 속으로 가늠하는 듯했다.

“한태주 씨를 좀 보고 싶어요.”

“그건 안 됩니다. 위층은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돼 있어요.”

“병동을 통제 구역으로 만든 건 기자들 때문 아니에요? 전 그 사람 친구예요. 여기에 저 본인 이름으로 입원시키고 돌봐 주고 있는 거 보면 모르세요? 한 기장한테 제가 얼마나 중요한 친구인지 충분히 눈치채고 계시잖아요.”

아마 그녀도 살면서 뉴스에 이름 한번 오르내린 적 없는 평범한 사람을 호위하기 위해 경호원 수십 명을 병실 밖에 배치해 두고 보호하게 하는 모습은 처음 봤을 터다. 그녀가 돌연 침묵하자 차영이 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전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덕분에 조종사한테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아요. 눈 수술을 했다고 해서 너무 걱정돼요. 어떻게 된 건지, 그것만 확인하고 나올게요.”

“그래도 병동 내규를 어기고 모셔다 드릴 순 없어요.”

“저한테 환자 의료 정보를 알려 주시는 방법도 있어요. 수술이 어떻게 끝났는지, 예후는 어떤지……. 그런데 그거보단 산책 중에 저를 잠시 방치해 두시는 편이 훨씬 낫지 않아요?”

“환자분, 정말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시는 거 알아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제가 전부 책임질게요. 아니, 그러기도 전에 제가 했다 그러면 한 기장이 전부 용서할 거예요.”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차영이 미워서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천명한 태주라도, 그의 명령을 어기고 뭔가 잘못한 게 자신이라면 모두 이해하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들은 피차 서로에게 그 정도는 너그러워도 됐다. 슬픔과 원망을 공유한 사이기 때문이다.

“잠깐 얼굴만 볼게요. 10분…… 5분만요. 오래도 안 바라요. 딱 5분이면 돼요. 저희 정말 친한 친구예요. 안 지 20년도 넘은…….”

몸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은 참혹한 몰골로 안절부절못하면서 애원하자, 그게 그녀의 마음속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가련한 듯 여기는 눈빛이 차영의 눈자위 위를 스쳤다. 그걸 느낀 차영이 방점을 찍듯 그녀의 옷자락 위를 살짝 붙잡았다.

“제발요.”

이미 그가 애걸복걸하는 사이 시간은 5분가량이 흘러 있었다. 지금 바깥에서 경호원들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을 듯했다. 시간이 없었다. 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시계와 간호사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고 있는데, 그녀가 불쑥 내뱉었다.

“전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일인 거예요.”

“네. 우린 산책을 나갔다가 제가 변덕이 도져서 다시 들어왔어요.”

“믿어도 되는 거죠. 만에 하나 저한테 무슨 영향이 끼치면 어떻게 책임지실 건데요?”

“그건 한태주 씨한테 상의할게요. 분명히 저보다 더 많은 걸 줄 수 있을 거예요.”

“20년 친구시라고요?”

“그것보다도 더 됐어요.”

굳은 의지를 표명하듯, 말을 마친 차영이 그녀와 분명히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깊은숨을 내쉰 간호사가 하는 수 없다는 양 차영의 손을 살짝 떼어 내더니 이동식 링거 거치대를 단단히 쥐여 주었다.

“일단 따라오세요.”

딸칵. 문을 열고 나온 두 사람은 고요한 복도를 아무런 대화 없이 거닐었다. 중앙의 인포 데스크를 지나니 직원들 전용인 듯 작은 승강기가 한 대 눈에 띄었다.

사위를 둘러본 그녀가 차영을 거기에 태웠다. 그러고는 승강기에서 내린 뒤 왼쪽 가장 끄트머리 병실이라고 위치를 일러 주었다. 같이 탑승하지는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이상 관여하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차영은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고맙습니다.”

“고마우실 거 없어요. 전 모르는 일이거든요.”

꾸벅 인사를 한 차영이 층수와 닫힘 버튼을 함께 눌렀다. 몇 초가 흐른 뒤 문이 활짝 열렸다. 이곳도 차영이 있는 층과 보안 체계는 마찬가지로 돌아가는 듯했다. 12시가 조금 넘은 지금, 경호원들은 비상계단으로 모두 내려간 모양인지 복도가 조용했다.

걸음을 내딛는 두 다리가 점점 풀려 가는 게 느껴졌다. 아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오랜 시간 움직이는 게 꽤 버거웠던 탓이다. 겨우 문 앞에 당도한 차영은 출입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중문이 있었다. 처음엔 잠겨 있는 것 같아서 당황했다. 어렵사리 휠을 돌려 열어 보니 생각보다 허술했다. 건물 사방에서 통제하고 있으니 여기까지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긴 것 같았다. 이윽고 문이 안쪽 공간으로 차영을 들여보내 주었다.

딸칵. 중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차영은 어두운 병실에 어스름한 조명만 살짝 켜져 있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차츰 눈이 익숙해지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착각이나 착시가 아니다. 다른 덴 멀쩡해 보였으나, 분명히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차영은 그걸 인지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제 딱딱해진 마음을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칼날처럼 썰어 버린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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