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113화 (113/144)

113화

“야, 이차영…….”

“미안. 저기, 나…….”

“이거 봐. 너 분명히 그날 무슨 일 있었어. 맞지!”

그는 쩔쩔매는 것 외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타인의 손길이 제게 가까워졌을 때 불현듯 일었던 이 공포심의 근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울리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는 차영이 낯설긴 했으나 이러는 이유가 있으리라고 짐작한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고 당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겁에 질린 차영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는 것이다.

그녀가 별말이 없자, 애써 평정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때 일을 되새기던 차영이 초조하게 되물었다.

“도윤이 너 혹시 그 이야기 엄마한테 했어? 나 너희 집 앞까지 갔던 거.”

“무슨. 경찰이 너 어디에서 굴러떨어졌다고 저러는데 그날 이야기를 어떻게 해. 괜히 의심만 하시지. 너한테 물어보고 말하려고 안 했어.”

“잘했다. 고마워.”

“고맙긴.”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영은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나 제삼자인 그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답해 줄 수 있을지가 무척 흐렸다. 분명히 자신은 그날 태주를 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는 이야기가 확신을 더해 주었다. 다만 그때 목격한 끔찍한 광경이 실제라면 정말이지 큰 문제인 터라 입이 안 떨어졌다.

“저기, 도윤아.”

“응?”

“혹시 한태주 기장…… 한테 무슨 문제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헉, 너 어떻게 알았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겨, 경찰한테 잡혔어?”

“웬 경찰? 하긴. 경찰도 약간은 관련 있나? 한태주 외할아버지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잖아.”

역시나. 그날 자신이 본 것은 현실이 맞았던 듯했다. 차영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다행히 그녀는 여태까지 동요했던 상황의 연장선상이라고 느꼈는지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해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 있던 그가 무척 복잡해진 표정을 하더니 도윤과 시선을 마주치려 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지만, 최소한 자신이 있는 곳이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한태주가 외할아버지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장면을 본 소수의 목격자다. 그리고 아주 깊게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당사자이기도 했다. 어떤 측면으로든 어머니나 도윤 같은 최측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리라. 더군다나 이런 몸 상태로 무슨 일이 새롭게 발생했을 때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부탁 하나 하자. 당장 어머니 댁으로 내려가시라고 해. 그리고 너도 집으로 돌아가.”

“뭐? 야…… 너 환자야. 어떻게 그래. 그리고 우리가 왜 가야 되는데?”

“나도 설명 못 해. 잘 모르니까. 그런데 그냥 가 줬으면 좋겠어.”

“난 그렇다 치고 어머니는 어떻게 설득하게? 안 가려고 하실걸?”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

“너 우리 돌려보내고 한 캡 만나러 가려고 그래?”

“그 사람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내가 이런 꼴로 지금 한태주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만나러 가. 그냥 부탁이니까 좀…….”

“한태주 이 위의 통제 구역에 있잖아.”

“뭐? 왜?”

위층을 말하고 싶은 모양인지 그녀가 천장을 손가락으로 찌르듯이 가리켰다.

“왜긴. 다쳤으니까 병원에 왔겠지.”

“다쳐? 어딜?”

“그 어른 돌아가신 날 한 기장이 본인 외할아버지 상태 확인하러 가다가 접촉 사고 같은 게 있었나 보더라? 사고 때 파편들이 눈 쪽을 찔렀대. 덕분에 장례도 직접 못 치르고 이 병원에 바로 입원해서 수술한 걸로 알아.”

“누, 눈이라니? 어디가 얼마나? 어쩌다가? 큰 문제는 아닌 거지?”

조종사에게 눈은 생명과도 같았다. 시력 교정을 위해 수술을 한 기장들도 물론 아주 없진 않지만 대부분 안구에 문제가 있다면 업계에서 퇴출 수순이라고 봐야 했다. 필드는 시력에 관한 한 그 어떤 기준보다 엄격하고 까다롭게 굴었다. 그리고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을 책임지고 조종간을 잡는 이들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정확한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으니 자꾸만 최악으로 상상이 치달았다.

“나야 뉴스에 나온 거 외엔 모르지. 뭐 경과 봐야 하고 수술은 잘 끝났다고 하던데.”

“여기 입원했다고? 병실 정확히 어딘지는 몰라?”

“자세한 건 나도 잘……. 어제 내가 비상계단으로 살짝 올라가서 보려고 했는데 거기도 경호원들 쭉 깔려 있더라고. 심지어 의사랑 간호사들도 복장 검사랑 손발톱 검사까지 다 하고 겨우 들어가는 것 같던데, 난 중간에 쫓겨나서 그 뒤로는 못 봤어.”

도윤은 최대한 친절하게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했지만 차영은 이미 생각이 한참 다른 데 가 있어서 어떤 반응도 해 주지 못했다.

때마침 어머니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병실로 들어왔다.

“우리 아들 일어났으면 뭐를 좀 먹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진통제 독한 거라더라.”

“엄마, 그냥 내려가.”

“차영아? 갑자기 왜 그래.”

“돌아가! 제발.”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게 온갖 신경질을 가득 담아 소리치는 차영을 물끄러미 살폈다.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제발 나한테서 며칠만 좀 떨어져 있어 줘. 부탁이야…….”

그는 계속 억눌러 왔던 눈물까지 쏟아 내며 애원했다.

* * *

제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차영은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하얀색으로 점철된 이 병실은 오래 머물러 있으면 병을 치료하려다가 도리어 정신병을 얻을 것 같았다.

일단 혼자 쓰기엔 너무 쓸데없이 넓고, 고급스러워서 위화감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밖의 보안이 철저하고 삭막해서 숨이 막혔다. 그리고 이 복잡한 감상들은 자신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게 아마도 태주의 뜻이리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날, 현장에 분명히 태주가 얼굴을 드러냈다. 자신의 이름을 불렀고, 문 회장이 계속해서 자신을 걸고 도발하자 몹시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시 차영의 시야는 꽤 흐렸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생생하게 눈동자에 박혀 들었다. 이윽고 그들은 주사와 총기를 서로 빼앗기 위해 난투를 벌였고, 태주가 문 회장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결국…….

거기까지 생각한 차영은 끔찍한 일이 벌어진 뒤, 자신을 안았던 그의 촉감을 떠올렸다.

그러나 여전히 제 몸 어딘가에 그의 온기가 남아 있을 것 같아서 이곳저곳을 더듬듯이 만져 보면 까칠한 붕대만이 손끝에 닿을 뿐이었다.

문 회장이 탄환에 맞고 쓰러지던 순간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무서운데, 직접 총구를 겨눴던 태주의 심정은 가늠한다는 상상조차 사치일 것 같았다. 윤 원장은 어떻게 된 건지, 안 실장은 어떻게 대처했을지, 경찰 권력과 병원 측은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든 것이 미궁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얻은 정보로는 이 일로 입원한 사람은 자신과 태주 두 사람이었다.

굳이 이런 일을 겪을 필요가 없는 두 사람만이 남겨져 아픈 것이다.

‘10시…….’

시간을 확인하니 밤이었다. 결심을 한 차영이 표정을 굳히고 밖으로 나왔다. 양옆으로 도열하고 있는 경호원들의 모습이 그가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동식 링거 거치대를 이끌고 겨우겨우 기어가듯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혹시나 낯익은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걷다 보니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언젠가 문 회장을 공항으로 만나러 갔을 때 자신을 집까지 모시러 온 사람 중 하나였다. 순간 또 자신을 기절시키는 건 아닐지 겁이 나기도 했으나, 호기심이 두려움을 짓눌렀다.

“저기, 한태주 씨 어떻게 된 건지가 좀 궁금한데요.”

차영이 그의 앞에 정확히 멈춰 서서 질문하자, 경호원이 난감한 기색으로 그를 마주 봤다.

“혹시 제 질문에 계속 대답 안 하실 건가요? 그러면 저도 다른 방법 찾아야 해서요.”

“병실에서 쉬고 계십니다.”

머뭇대던 경호원은 별수 없다는 양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어쨌든 대화는 성립된 셈이었다.

“수술했다던데, 현재 의식은 있는 거예요?”

“네, 있으십니다.”

“혹시 지금 이 경호원들…… 한 기장이 여기에 두라고 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본인을 제가 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원하지 않으십니다.”

“뭐라고요?”

너무 즉각적으로 답이 나와서 어이가 없었다. 수많은 경호원 중 한 명에 불과한 이 사람이 태주의 의중을 뛰어넘어 본인 판단으로 대꾸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분명 사전에 태주나 혹은 그의 명령을 전달한 누군가의 지시가 선행되어 있을 터였다. 아마 높은 확률로 본인일 듯했다. 문 회장이 죽었고, 그걸 도모한 사람이 태주인데 이들이 그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 선대의 권력을 태주가 아무런 문제나 무리 없이 이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아직 한 기장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이차영 관제사님은 완쾌하실 때까지 대영 그룹에서 책임지고 돌봐 드릴 겁니다. 쾌차하신 뒤에 퇴원하시면 됩니다.”

“나 지금 이차영 말고 한태주 씨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이만 들어가시죠. 만일 외출이 필요하시면 산책을 도와줄 요양사를 부르겠습니다.”

“한 기장은 날 왜 안 보겠다는 건데요.”

“그걸 저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꼴도 보기 싫다고 저어할 땐 계속 찾아와 사람 미치게 만들더니 이제는 안 만나 주겠다는 그가 미웠다. 누구라도 원망하면서 이토록 화가 나는 마음을 토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차영은 여기에서 이 사람과 마주 보고 서서 실랑이를 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럴 만한 힘이 있다면, 최대한 다른 생산적인 데 분산해서 쓰는 편이 나았다. 이 남자에게선 어차피 쉽게 원하는 답변을 듣지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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